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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자물쇠 / 박찬희

 

안거가 일이라고 단단히 가부좌를 틀어
오가는 바람도 굳어 서있다
하필이면 벼랑 끝에 걸어놓은 맹약
효험이 낭설이기 십상이기도 하고
굳이 풀어 들여다 볼 상당한 이유가 없어도
그저 보는 것만으로는 잡다한 호기심만 늘어
없는 설명서를 찾아 읽는다
맹약의 해피엔딩은 녹슬고 녹아 서로에게 귀속되는 것
애지중지 닫아 걸 별 이유는 없어도
그냥 습관인 까닭에
벽을 치고 들어앉아 음과 양을 저 혼자 맺고 풀면서
맞지도 않는 열쇠를 깎는 일
어쨌든 그것도 수고라면 수고지
결속과 해지는 엎어 치나 메치나 한가지여서
틀림없는 쌍방의 일
자물쇠든 열쇠든 서로에게 맞출 수밖에
옳으니 그르니 해도 꼭 들어맞는 짝은 있게 마련인데
내가 너를 열 수 있을까
시도 때도 없는 옥쇄 앞에서
밤낮 우물쭈물, 나만 속절없이 녹슬어간다


 

  <당선소감>

 

   "-"

  조금 전까지 훤히 밝았던 쪽문 밖에 커튼이 내려쳐 집니다. 얼마 전 폭우 속에서 간신히 난간을 붙들고 있었던 그 까마귀가 날아와 앉아 있다가 난무하는 도심의 불빛 건너편으로 날아가 버렸습니다.
 
 겨울 초입의 매정한 한기 속에서도 꿈쩍 않고 있었는데 잠깐 한눈을 판 사이에 온다 간다 말도 없이 제 길로 갔습니다.

 저의 지난 시간들도 그러했습니다. 무언가 붙들고는 있었는데 막상 손을 펴면 빈손이기 일쑤였습니다.

 ‘시’라고 써 놓으면 시가 된다고 우기면서도 늘 찜찜했습니다. 도가도비상도 명가명비상명(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이라 했지요. 써놓은 시 아닌 시를 다시 읽어보면 시가 아닐 때 과감히 지우지 못하는 스스로를 타박합니다.

 아무리 고쳐 써도 아침에 보면 부끄럽기 짝이 없는데 저녁은 아랑곳없이 와 있습니다. 낯선 거리의 퇴락한 이정표 같은 속내를 오롯이 담아내자고 시의 내에 어정쩡 손을 담그고는 ‘시입네’하기엔 밤이 너무 깊습니다.

 퇴고에 퇴고를 계속해도 시가시비상시(詩可詩非常詩)이어서 아예 어둠 속에 자신을 가두곤 합니다. 그 속에서 또 시를 씁니다.

 시리고 어두운 속에서 형해되어 있는 고갱이를 드러내는 일,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잠깐씩 쉼표를 찍고, 그러다가 ‘시’들이 줄줄이 걸어가는 뒤꽁무니에 한 발을 슬쩍 들이밀었습니다.

 힘에 부치는 작품에 후한 평을 주시고 15년 역사의 중부광역신문 페이지에 선뜻 올려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중부광역신문사 이숙경 대표님과 청주시문학협회 그리고 성낙수 신춘문예 추진위원장님을 비롯한 송찬호 한상우 김나비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부지런히 쓰고 지우며 시 한 편 제대로 써서 함께 응모하셨던 문우님들의 길 앞에 징검다리 하나로 남으라는 격려로 삼겠습니다.

● 서울 출생
● 햔제 미국 AEU 대학교 겸임교수


 

  <심사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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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후 위기 때문일까. 이상하게 따뜻한 겨울 날씨 속에 심사가 진행됐다. 응모 작품의 경향은 사회나 집단에 대한 관심보다 일상적 삶에 대한 통찰이나 개인 내면의 서사에 집중하는 현상이 두드러져 보였다, 토론을 거쳐, ‘열의 이동’, ‘늦은 7시의 속사정’, ‘자물쇠’가 최종 단계에 남았다.

 ‘열의 이동’은 인생의 단계를 자전거, 모터사이클, 자동차 등에 빗대 형상화한 게 눈길을 끌었다. ‘가족 가득 태운’ 자동차로 쉼 없이 달리다 결국 폐차가 됨으로써, 가족을 위해 밤낮없이 헌신하다 노후에 이르는 이 시대 가장의 모습을 실감 있게 그렸다. 작품의 후반부가 평이한 진술에 그쳐 아쉽다.

 ‘늦은 7시의 속사정’은 ‘동그라미’나 ‘멜론’ 등의 단어를 자신만의 개성적인 이미지로 표현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작품이 경쾌하고 속도감 있게 읽힌다. 그만큼 언어와 상상력의 운용이 활달하고 주제 또한 깊이가 있다. 작품 중간에 다소 모호한 부분이 있어 선택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자물쇠’는 사물에 대한 깊은 이해와 언어에 대한 감각이 뛰어난 작품이다. 잠그고 풀리는 ‘자물쇠’의 이미지를 통하여 복잡다단한 세상살이의 이치를 설득력있게 설파하고 있다. 자물쇠처럼 닫힌 너, 이웃, 사회, 세상이 저절로 열리는게 아니라, 타자에 대한 이해와 상대에 대한 사랑과 관심으로 그 문을 열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자물쇠라는 대상을 새롭게 바라보는 인식 능력과 그것을 바탕으로 전개된 삶에 대한 깊은 통찰력은, 응모자가 치열한 시정신과 결코 만만치 않은 시적 기량 보유하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 ‘자물쇠’를 당선작으로 선정하고, 당선자에게 축하의 인사를 보낸다.

심사위원 : 송찬호, 성낙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