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현대경제 신춘문예 시 대상] 감자밭에서 왜 양을 세니 / 이사과
<당선작>
감자밭에서 왜 양을 세니 / 이사과
감자밭에서 왜 양을 세니
하지만 난 감자들이 갓 태어난 양 같아 못 견디겠는 걸
땅속에서 뒤룩뒤룩 살을 찌운 몸뚱이 양수를 터뜨리고 나와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멍한 눈들
감자를 양이라 우기면 지글지글 침은 고이지만 조금 참을 만해지는 걸
양들은 눈을 뜨자마자 창고로 옮겨지고 엄마는 가축들을 세심히 돌보지
어느 날 엄마는 양의 가죽을 벗겨 칙칙폭폭 거무틱한 화덕에 불을 지피네
화차엔 맵고 그을린 울음들 세차게 뿜어져 나오지
동생은 양의 염통에 소금을 뿌려 대지만 감자엔 포크와 설탕이 필요하고
온종일 일을 나갔다 감자 앞에 앉은 식구들
가슴에 뜨거운 달 하나씩 품고 데굴데굴 양을 셉니다
아릿한 꿈들이 뿔처럼 자라나는 이불 속
<당선소감>
다시 리셋
세상에서 가장 갖고 싶었던 이름. 어릴 적부터 시인이 되고 싶었습니다. 시인이 되고 싶을 때마다 펜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자주 좌절했습니다. 시인은 그렇게 쉽게 되어서는 곤란한 것이었습니다. 컴퓨터에 시들을 모아 놓고 한 권의 시집을 생각했습니다. 좋은 시집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시들을 버렸습니다. 시집은 그리 쉽게 나와서는 곤란한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시가 몇 편 남지 않았을 때 모든 걸 리셋하고 다시 쓰자고 다짐했습니다. 밤마다 화장을 지워가면서 쓴 시. 맨얼굴이 투사되면 어쩌나 걱정도 되었습니다. 시가 써지지 않을 땐 공원을 배회하며 밤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칠흑 같은 하늘에 찬연히 흩뿌려진 시들. 광활한 우주 성단에 나만의 통점을 박아 넣었습니다. 고흐처럼 귀를 자르고 광인으로 살아보고도 싶었습니다.
당선 소감을 쓰면서 오래 전 문학도였던 한 소녀가 했던 질문을 떠올려봅니다. 시가 뭐라고 생각해? 시를 쓰는 이유 같은 거? 혼자서 가만히 중얼거려 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말주변은 그대로입니다. 그래서 이곳에 적어봅니다. 시란 인식의 이데아(플라톤)가 아닐까 하고. 그러니까 나는 항구적 욕망을 위해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이라고...... 오늘이 있기까지 아낌없는 지지와 많은 도움을 주었던 분들(이승하 시인, 하린 시인, 김근 시인......)에게 지면을 빌어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그대 나의 뮤즈’ 박초이 소설가에게도 애정 어린 마음을 전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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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동화적이면서 서사 구조를 바탕으로 한 완성도 높은 작품
고맙게도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현대경제신문>에서 응모하는 신춘문예 시 작품들을 읽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우선은 응모된 작품의 양이 많아서 놀랐습니다. 그만큼 우리 민족이 시적 표현에 대한 열도가 높다는 것을 말해주는 한 증거인 것 같아 반갑기도 하고 걱정스럽기도 했습니다. 왜냐면 인간이 시를 필요로 하는 것은 감정적인 문제가 많을 때 그런 것이란 것을 알기에 그렇습니다.
여러 차례 읽어 이진호 씨의 「감자밭에서 왜 양을 세니」를 당선작으로 뽑고 박마리아 님의 「산 능선」을 가작으로 뽑습니다. 또한 최종심까지 겨룬 작품은 양일동 님의 「아방가르드 여인」이었음을 밝힙니다.
응모작품 가운데 다수작품들이 시 표현 이전에 그친 경우가 있었습니다. 자기 내부의 생각이나 감정들을 무심히 쏟아낸 것 같은 작품들이 그런 작품들입니다. 어디까지나 시에는 형식(언어)에 대한 고려(考慮)와 내용(감정)에 대한 정제(整齊)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아셨으면 합니다.
당선작으로 뽑힌 이진호 씨의 「감자밭에서 왜 양을 세니」는 동화적이면서 나름 서사 구조를 바탕에 깔고 있는 귀여운 작품이었습니다. 함께 보낸 작품도 비교적 완성도가 있는 작품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가작으로 뽑힌 작품 「산 능선」 역시 서사구조가 바탕에 깔린 짜임새 있는 서정시였습니다. 개인의 감정을 독자에게 강요하지 않으면서 조곤조곤 다가오는 숨결이 매우 정겨운 작품이었습니다.
선에 든 분들에게 축하를, 선에 들지 못한 분들에게 위로를 드립니다.
심사위원 : 나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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