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강원일보 신춘문예 희곡 당선작] 내 책상 위, 작고 따뜻한 산세베리아 화분 / 서유진
<당선작>
내 책상 위, 작고 따뜻한 산세베리아 화분 / 서유진
[등장인물]
도연(33살)
갑수(33살)
천수(갑수의 형), 실장, 면접관은 1인 다역
[무대]
갑수의 방 현관으로 통하는 입구와 주방으로 통하는 입구. 두 군데의 등퇴장 로가 있다.
좌측에는 책장, 책상, 의자가 있는데 책상 위에는 모니터를 제외한 키보드, 마우스가 놓여 있고 우측에는 이젤, 유화물감, 페인팅 나이프 등의 그림 도구들이 있다.
이젤 위 액자에는 울고 있는 갑수의 초상화가 있다.
무대 뒤 배경막은 흰 스크린이다.
스크린은 <별이 빛나는 도연의 화실>이라는 인터넷 상 도연의 SNS공간, TV광고, 사진 등의 영상물이 비칠 때 쓰인다.
1. 내게도 집이 있다면
시끄러운 음악 소리와 함께 막이 오르면, 스크린에 인기 쇼프로의 엔딩 자막이 올라가고 곧이어 유명여자연예인이 고급스런 옷을 입고 환하게 웃고 있는 아파트 광고가 나온다.
이불 속에서 꿈틀거리던 갑수, 광고가 시작되자 얼굴을 내밀고 광고를 바라본다.
잠시 후 이불 속에서 나온 도연, 스크린을 향해 리모컨을 누른다.
광고 이내 사라지고 밝아지는 무대.
도연 : 쟤 예쁘니?
갑수 : 빛난다.
도연 : 다 money의 힘! 나도 연예인이면 저 정도야, 맨날 운동하고 마사지 받고 미용실 다니면 저만큼 돼.
갑수 : 얼굴에 여드름이나 어떻게 해봐. 예전엔 여기 요 점 하나만 보이고 반짝였는데.
도연 : 너 만나고 늙었지. 두 달 뒤 재계약.
갑수 : 이번엔 꼭 정규직 됐으면 좋겠다.
도연 옷을 챙겨 입고, 스카치테이프를 뜯어 방 주위에 있는 머리카락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도연 : 몰라. 자기들 맘이라. 회사 얘긴 그만.
갑수 : 또, 또, 또. 괜찮아. 너 가고 나면 청소해.
도연 : 그래도 싫어. 내 머리카락 길잖아. 엄마가 지난번에도 몇 개 주웠다며.
갑수 : 그럼 어때. 너 오는 거 다 아는데.
도연 : 갑수야, 넌 말야. 7년 동안이나 날 엄마한테 머리카락으로 소개하고 싶니.
갑수 도연의 주위에서 머리카락을 같이 줍는다.
갑수 : 여기도 있네. 안녕하세요, 어머님. 여기도, 안녕 엄마 저 도연이에요. 여기 도연이는 이쁜 도연이. 이쪽 도연이는 한 성깔 하는 한도연이.
화가 난 도연 머리카락 붙이던 스카치테이프를 갑수의 입에 붙여버리고 의자에 걸려있는 옷을 챙겨 입는다.
갑수 : 퇴퇴퇴퇴. 아, 왜.
도연 : 시끄럽다.
도연 스마트폰을 보기 시작하고 갑수 도연의 눈치를 살피다가 주방으로 간다.
갑수소리 : 라면 넣는다.
도연 : 엄마 올 시간 얼마 안 남았잖아. 다음에 먹자.
갑수소리 : 배고프잖아. 먹고 가.
도연 : 시계 보며 먹기 싫어.
갑수소리 : 엄마 오늘 금요예배. 새벽에 오셔.
도연 : 그냥 떡만 넣어. 고추장은 조금. 지난번에 너무 매웠어.
갑수소리 : 네 공주님!
도연, 스마트폰으로 SNS작성 중이다.
스크린으로 빈센트 반고흐의 <아를의 포럼 광장에 있는 밤의 카페 테라스> 보이고 도연의 SNS 내용이 함께 보인다.
도연 : (여전히 스마트폰 보고 있다) 따뜻하게 느껴지는 밤 풍경이다. 밤하늘의 별이 저렇게나 커 보일 만큼… 이때만 해도 고흐는 그리는 것이, 살아가는 것이 행복하고 기쁜 일이었을 것만 같다. 프랑스 아를에 지금도 저 카페테라스가 있다고 하던데… 테라스 한쪽에 자릴 잡은 갑수, 그런 그의 모습을 그리는 것을 상상해 본다. 그때는 풍경 속 사람들 얼굴을 그릴 수 있을 것 같다.
갑수 작은 상에 떡볶이와 커피 한 잔을 가지고 나온다.
갑수 : 그림 올렸어? 남의 그림만 주구장창 올리지만 말고 네 그림 좀 올려. 멋진 거 많잖아. 지금 그리고 있는 <울고 있는 갑수의 얼굴> 참 멋지잖아. 뉘 집 자식인지 울어도 멋져.
도연 : 쪽팔려.
갑수 : 짠~ 우리 도연이가 제일 좋아하는 별다방 카페라떼.
도연과 갑수 밥상 앞에 마주 보고 앉는다.
도연 : 이거 한잔에 얼만데. 집에 라면이다 사다 놓지. 생각 없이.
갑수 : 또 욕만 먹었네. 찬물공주님! 사람이! 어떻게! 맨날! 밥만 먹고 사십니까!
도연 : 이왕 사 온 거니까 맛있게 먹는데 앞으론 내 허락받고 사와.
도연 말과는 다르게 정말 맛있게 단번에 커피를 마셔버린다.
갑수 : 맛있게도 잡수십니다. 공주님.
도연 : 너도 마셔.
갑수 : 너 다 마셔. 난 커피향은 좋은데 맛은 영 모르겠더라.
도연 : 멋없는 놈.
갑수 : 엄마 허리는 어떠셔.
도연 : 매일 그렇지 뭐… 언니네 애기들 둘러업느라 그렇지 뭐. 아프면 좀 덜 업던가. 언니들도 그래. 지금껏 키워줬음 된 거 아냐. 주말마다 식구들 힘들게 해. 오면 드러누워 있고 조카들은 내가 보고. 난 절대 안 그래.
갑수 : 나중에 네가 더 할 수 있어.
도연 : 절대, 절대. 네버네버! 엄마한테도 말했어. 혹시라도 내가 애 봐달라고 하면 절대 봐주지 말라고. 그리고 있는 사람이 더 무서워. 집에 오면 얼마나 챙겨가는 줄 알어. 반찬에 세제까지 다 챙겨. 매번 오면 분양받은 집값이 지금 얼마 올랐네 자랑하면서.
갑수 : 집값 오르면 좋지 뭐.
도연 : 그러게. 좋은 일인데 괜히 배 아파. 우린 전세 얻기도 힘든데.
갑수 : 또또또 그런다.
도연 : 우리 서른셋!
갑수 : 조금만 기다려 봐.
도연 : 진짜 장난 아니구. 매번 심각해지면 말 돌리더라.
갑수 : 아까 그 아파트 얼마냐? 저거 사서 결혼하자.
도연 : 지난번엔 네미안, 그 지난번에는 오르지오. 아주 쇼를 해라 쇼를, 내일은 잇편한세상이냐? 그래 갑수야 기특한 생각이긴 한데 살라믄 우리 버는 걸로 50년은 족히 걸려. 아니다. 50년 지나면 값이 또 올라있을 거야.
갑수 : 아… 오늘도 맵게 된 거 같지. 우유 갖다 줄까.
갑수 서둘러 주방으로 가려는데,
도연 : 세연이 상견례 한데. 나 똥차.
갑수 다시 밥상 앞에 앉아 남은 떡볶이를 꾸역꾸역 입안으로 넣는다.
도연 : 그 기집애 언니들 닮아서 결혼도 일찍 하려나봐. 이제 나만 남았다… 좋지 뭐. 방도 혼자 쓰고, 남는 방은 작업실로 쓰지 뭐.
갑수 : 미안하다 공주.
도연 : 찬물공주가 아니라 난 맨날 말로만 공주야. 내가 요즘 어떤지도 모르면서 거기다 꿈이 어쩌니, 저쩌니… 그런 말이나 날리고 말야. 그런 구렁텅이 같던 시기에 니놈이 나한테 그런 말 던진 거라고. 나쁜 놈, 여우 같은 놈, 늑대 같은 놈, 얌체 같은 놈, 악마 같은 놈, 미운 놈, 놈놈놈놈.
갑수 : 너가…
도연 : 너는 그런 놈이라구.
갑수 : 내 맘 알면 너… 그런 말 못 한다.
도연 : 왜. 나만큼 힘든 일이 뭐가 있어.
갑수 : 다들 같아. 다 너 만큼이야. 말 안 할 뿐이지.
도연 : 집에 무슨 일 있어?
갑수 : 속속들이 보면 행복한 사람들 하나도 없어. 너만 지지리 사는 거 아냐.
도연 : 엄마한테 무슨 일 있구나.
갑수 : 매일 밤늦게 일하고 오는 우리 엄마 행복하겠니. 사업 때문에 골머리 앓는 우리 형이 행복하겠니. 속속들이 행복한 사람 별로 없어. 다 같거나 비슷해.
도연 : 그래 우리도 비슷하게 살자. 회사는 알아보고 있니? 맨날 말로만 결혼하자고 하지 말고 행동으로 좀 보여줘. 전세방이라도 얻어야 될 거 아냐. 우리 언니들처럼 아파트 사서 결혼하자는 것도 아니고 방 한 칸이라도 좋으니까 전세방이라도 하나 얻어서 살자는 거잖아. 갑수 네가 어떤 앤지 얼마나 괜찮은 앤지 내가 얼마나 사람을 잘 알아봤는지 자신은 있지만 엄마, 아빠한테 자신 있게 얘길 못하겠어. 당장 하고 싶은 것들 조금은 참고 안정적인 모습 보여주자. 잠시만이라도… 우리 둘 월급 합치면 얼만지 알지. 하고 싶은 일들 조금씩 너랑 날 위해서 포기하는데 넌 왜 끝까지 이기적이야. 꿈… 다 좋은데 네 꿈만 중요한 건 아니잖아. 조금만 양보하자. 무리한 걸 바라는 거 아니잖아. 나도 너도 회사 다니면서 그림 그리고 사진 찍고… 평범하게 살자. 꼭 그림 그리고 사진 찍는 일을 직업으로 삼아야 행복한 건 아니잖아.
갑수 : 아 맵다. 우유가 남았나.
갑수 주방으로 나간다.
도연 외투 챙겨 입고 갑수가 나간 주방 쪽을 바라본다.
스크린에 <아를의 포럼 광장에 있는 밤의 카페테라스>서서히 사라지며 무대 어두워진다.
2. 열심히 산다는 것
배경막으로 도연의 SNS <별이 빛나는 도연의 화실>이 보인다.
SNS 사진엔 갑수의 독사진 보이고, SNS글 ‘몽마르트 언덕에서 갑수의 얼굴을 그릴 수 있을까…’
도연 주위에 흩어져있는 그림 도구들을 챙기고 이젤 앞에 자릴 잡고 앉아 갑수의 사진을 보며 스케치북에 물감을 칠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잠시 후 시계를 보고 시간을 확인하자 불안해한다.
곧 손이 떨리지만 계속해서 채색한다.
도연 : (계속해서 그림 그리며) 빈센트 반 고흐… 채색할 때 항상 부담이었데. 망치면 물감을 더 사야 되니까. 그 두려움이 계속 쫓아오다 보면 꼭 그림을 실패했데. 나는… 초침… 분침… 시침… 응 그래 수많은 침들 속에 시간이지. 오늘 한 시간을 그리면 한 시간의 잠을, 두 시간을 그리면 두 시간의 잠을 줄여서 회사에 가야 해. 그러면 아침부터 졸거나 지각을 하겠지. 슬슬 감기는 무거운 눈꺼풀을 느끼며 키보드를 쳐본 자만이 알지. 그래서 5시간 그렸던 게 4시간으로… 3시간으로… 2시간으로… 줄고, 줄고, 줄고… 어느 순간부터는 그리는 시간보다 그리지 않고 있는 시간이 더 많더라. 어느 순간 그리는 시간보다 회사에서 시간이 더 중요해졌지. 근데 말야 … 네가 사진 찍고 싶은 것만큼 나도 정말 그림 그리고 싶어. 몽마르트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 발걸음 소리도 그림으로 옮겨내고 싶고 내 앞에 앉아 있는 갑수 네 얼굴도 그려주고… 그림… 그리고 싶어.
도연 그림 그리다 이내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다.
조명 바뀌고, 실장 사무실로 들어오며 졸고 있는 도연의 모습을 발견한다.
실장 : 도연!
도연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리지만 좌우로만 움직일 뿐 뒤는 돌아보지 못한다.
이번엔 의자에 앉아서 몸을 비틀며 스트레칭 해보지만 곧, 다시 슬슬 졸기 시작한다.
그러나 실장의 헛기침 소리에 눈을 부릅뜨고 부서질 듯 키보드를 두드린다.
실장 : 밤새 뭐했나. TV에서 재밌는 거라도 했나. 오후만 되면 왜 그렇게 졸아. 오전에 준 건 다 하고 조는 거야.
도연 : 다 됐습니다.
실장 : (자를 들고 치수 재기에 여념이 없다) 이거봐 이거봐. 또 틀렸잖아.
도연 : (다시 자로 세심하게 재본다) 다… 맞는데요.
실장 : 글씨 크기! 11포인트! 글꼴! 돋움체! 몰라!
도연 : 아… 네… 글꼴…
실장 : 그리고 결재란이 하나 빠졌잖아. 담당자 란은 비워두랬더니 버젓이 자네 도장은 왜 찍나 이건 그쪽 담당자가 찍는 거라고 몇 번을 말했어. 결재방도 수정하고 도면도 잘 좀 보에게 해서 10부씩 뽑아봐. 비싼 도면이야. 알아서 잘 해.
도연 : 다시 할게요. 기억했다가도 꼭 하나씩 틀리네요. 죄송합니다.
실장 : 꼭 하나씩! 오늘은 하나가 아니라 수두룩.
도연 : 다시 할게요. 금방 고칩니다. 맡겨주세요.
실장 : 본사 갔다 올 거니까 전화 오는 거 잘 좀 받고 퇴근 전까지 잘 그려봐. 알았지.
도연 : 네, 실장님.
갑수 등장하고 객석을 향해 사진을 찍어대기 시작한다.
스크린에 도연의 SNS사진 사라지고 유치원 아이들의 사진이 보이는데 죄다 넘어지거나 다쳐서 우는 아이들 사진뿐이다.
도연 : 너 또 혼나려고?
갑수 : 리얼하잖아. 애들은 깨지고 다치면서 크는 거야.
도연 : 유치원 원장이 그나마 니네 고모라서 그동안 안 잘린 거야. 그런 사진들 홈페이지에 올리지마. 맨날 학부형들이 뭐라 한다며.
갑수 : 애들이 맨날 싸우고 다치는 걸 어떡해.
도연 : 애들 태우고 운전은 할만 해? 요새 사고도 많이 난다는데. 나는 맨날 너 걱정이야. 너만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하니 불안해.
갑수 : 또또또 걱정이다. 그렇게 맘 약해서 어쩌니. 세계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그림 그리고 싶다며. 그런 사람이 그래서 되겠어. (휴대폰 벨소리. 전화 받는다) 담배랑, 컵라면이요. 네 알겠습니다. 10분만 기다리세요.
도연 : 저녁 땐 좀 쉬어. 방구석에만 박혀있는 애들 잔심부름하기 귀찮지도 않니.
갑수 : 유치원 버스보다 수입 괜찮아.
도연 : 진짜 사진은 언제 찍어?
갑수 : 틈틈이 찍고 있어.
도연 : 내가 한 말들 때문에 그런 거야. 무리하는 것 같아서 미안하잖아. 그 틈틈이가 있긴 있는 거야?
갑수 : 있어, 걱정하지마. 아, 그리고 기쁜 소식.
도연 : 기쁜 소식! 뭔데?
갑수 : 거의 다 모았어. 드디어 카메라 산다.
도연 : 카메라 많잖아.
갑수 : 다 같은 카메라가 아닙니다. 공주님! 아시면서 그러십니까. 카메라 사고 나면 돈 되는 알바 할 수 있을 거야. 취직자리도 지금 보다 더 열심히 알아볼게. 도연아 걱정 조금만 덜어라.
도연 : 실장 떴다. 이따 톡할게.
갑수 객석과 무대를 향해서 여기저기 사진을 찍는다.
실장 : 도면 다 그렸으면 축척 맞춰서 뽑아와.
도연 : 벽체는 다 그렸고, 문 방향 바뀐 것들이 있어서요, 그것만 고치면 될 것 같습니다.
실장 : 그게 얼마짜리 도면인 줄 알지. 짖기 전부터 그 아파트 난리 났다더라. 프리미엄만 2억 붙었대.
도연 : 실장님… 결정 났나요?
실장 : 그래 2억이래.
도연 : 아니요… 저…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거…
실장 : 아 맞다. 프로젝트 때문에 잊고 있었네. 인사팀에서 그러는데 우리 부서에 티오가 없어서 올해 정규직 계획이 없대. 그동안 노력 많이 했으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봐. 올해 몇 년째였지.
도연 : 2년이요…
실장 : 오우. 벌써 그렇게 됐어. 오래됐네. 그래도 사무실에서 일하니 얼마나 좋아. 현장에 있는 언니들 얼마나 힘든지 몰라. 정규직이면 뭐해. 퇴근도 늦고 밤샘 작업도 많잖아. 이따 도면 받으러 올 거니까, 10부만 만들어놔.
도연 : 네…
실장 들어가고 도연, 다시 SNS에 글 올리기 시작한다.
스크린으로 빈센트 반고흐의 <울고 있는 노인> 그림 보인다.
도연 : (키보드 두드리고 있다) 퇴근 늦고 밤새서 일해도 좋으니까 정규직이면 좋겠다. 월급도 보너스도 연장근무 수당도 같이 받고 건강검진 받을 때도 같이 받고 휴가도 같이 쓰고 같이같이같이… 하면 안 되나… 컴퓨터로 도면 그리는 거 지겹다… 너희들보다 일도 많이 하면서 그 일이 줄어들까봐 걱정하고, 필요 없는 사람이 될까봐 걱정하고… 선이 그려지고 면이 만들어지는 이 공간에서 많이도 헤맸다. 그려진 선을 자르기도 지우기도 하면서 정확히 자로 잰 듯 도면을 그렸다. 모니터 속, 선과 면을 바라보며 내 인생 또한 그렇게 정확해지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잘려나갈 부분은 여지없이 잘려나가고 한 번 만들어진 면은 그 안에 누구도 침범하지도 방해하지도 않았으면 좋겠다고… 정확히 그린 면에 높이를 주어서 내 인생도 그렇게 올라갔으면 좋겠다고…
도연 <울고 있는 노인> 그림과 같은 모양으로 의자에 앉아 두 손안에 얼굴을 파묻고 앉아 있다.
갑수 사진을 찍는 것을 멈추고 SNS에 힘겹게 말들을 쏟아내는 도연을 바라본다.
갑수 : 내가 있는데… 넌 왜 네 작은 집에만 진심 어린 얘길 하니. 내가 그 얘기들 다 들어주고 싶어.
도연의 핸드폰 벨소리. 힘들게 얼굴을 들어 전화 받는다.
도연 : 응. 그렇지 뭐. 매일 같아. 그냥 그래. 어? 정말? 좋겠다. 누구누구? 나한테도 연락주지 그랬어. 그렇지… 응 5박6일 휴가는 무리야. 갔다 오면 내 책상 뺄지도 몰라. 앙코르와트는 공부하고 가야 한다는데 아니면 다 그냥 돌로 보인데, 준비는 다 됐구? 그래… 잘 갔다 와… 갔다 오면 전화하구. 정말? 그래? 축하해. 잘 됐다. 이제 몇 년 만 공부하면 의사선생님 되는 거네. 시험공부 열심히 하더니 잘 됐다. 에이, 그건 돌아가는 거 아니지. 그림? 어… 2년 정도 된 거 같아. 어… 그려야지… 그래… 고마워… 응… 잘 다녀오구.
갑수 : 도연아. 나 여깄어.
실장 출력된 도면을 잔뜩 들고 들어온다.
도연 그것을 받아들어 정리한다.
실장 : 층별로 정리해서 제본 맡겨요.
도연 : 네.
실장 : 도연씨 좀 복잡한 일이 있는데. 너무 기분 나쁘게 듣지 말고.
도연 : …
실장 : 도면 그리는 팀을 용역직으로 전환한다고 하네.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마. 내가 그쪽에 우선적으로다가 도연씨 추천할 테니까. 몇 년간 일해 온 거 내가 옆에서 쭉 지켜봤잖아. 성실하고 책임감도 있고.
도연 : 언제부터 전환되나요.
실장 : 월급도 기존 그대로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도연 : 미리 말씀 좀 해주시지.
실장 : 법이 그렇다는데 어쩌겠어. 회사도 다 먹고살자고 하는 거니까 이해해.
도연 : 예…
실장 : 오전에 준 도면만 그리고 가. 간만에 도연씨 일찍 퇴근하겠네. 이럴 때 데이트도 좀 하고 말야, 좋을 때다. 그럼 수고해.
실장 나가고 도연 계속해서 출력된 도면을 정리 중이다.
도연 : 좋을 때... 인가? 날 유일하게 위로해주는 곳… 나랑 가까운 친구… 갑수 너… 모두 아닌 것 같아. 그렇다고 우리 집이겠니. 우리 가족들… 누가 보지만 않으면 어디 모르는 데 내다버리고 싶은 사람들. 어쩔 땐 갑수 너도 내다 버리고 싶어.
갑수 : 도연아… 나 여기 있는데… 전화해.
도연 도면 정리가 끝나자 핸드폰 버튼을 누른다.
갑수 : (핸드폰 벨소리. 발신자 확인되자 기쁘게 받는다) 공주님. 오늘…
도연 : 나 오늘도 야근이야. 도면 출력되는 거 보고 퇴근해야 될 것 같아.
갑수 : 어… 그래.
도연 : 끊을게.
갑수 : 어… 그래. 도연아… 나… 여기 있는데… 나… 여깄어.
3. 허수아비가 되어
도연 이불 속에서 카메라 렌즈를 들여다보며 갑수의 방 곳곳을 찍기도 하고 렌즈를 분리하기도 하며 갑수의 새 카메라를 구경하고 있다.
갑수 주방에서 분무기 가지고 나온다.
갑수 : 엄마가 내 코랑 발에 막 뿌리더라. 너는 다리에 뿌려줄까. 좀 날씬해지게.
도연 : 뭐야.
갑수 : 엄마가 교회에서 가지고 왔더라.
도연 : 정말 열심이시다.
갑수 : 그게 낙인 사람이잖아.
도연 : 아버지랑은 계속 그렇지.
갑수 : 요샌 고모집에도 안 오나봐. 어딨는지도 모르겠다.
도연 : 그래도 아버진데 연락하고 살아야지.
갑수 : 길에서 만나도 못 알아보거나 그냥 지나칠 것 같아.
도연 : 우리 엄마한테는 아버지 계속 만나고 있다고 했어.
갑수 : 그건 나도 어떻게 못 하겠다.
도연 : 결혼식 때 네 형처럼 작은아버지가 앉아 계시는 거니.
갑수 도연의 입에 분무기 뿌린다.
갑수 : 요기 우리 도연이 입도 예뻐졌으면 좋겠는데.
도연 : 장난치지 마! 나 우울해.
이때 누군가 현관문 두드린다.
도연 : 엄마 아냐.
갑수 : 오늘 수요예배 가셨어.
도연 : 근데 누구야.
갑수 : 형인가.
도연 : 어떡해.
갑수 : 보조키 잠가놨어.
밖에선 계속해서 문 두드리고
갑수 : 가만있어. 그냥 저러다 가겠지.
도연 : 몰라. 몰라. 그래서 내가 아까 간다고 했잖아.
갑수 : 형이 웬일이지.
도연 : 어떡해.
갑수 : 가만있으면 돼.
곧이어 갑수의 핸드폰 울린다. 갑수도 난처하다.
도연 갑수 보고 나가보라는 손짓, 갑수가 현관으로 나가는 동안 도연은 옷가지, 가방, 신발 등을 챙겨 주방 쪽으로 달려간다.
그와 거의 동시에 갑수의 형 천수가 방으로 들어온다.
천수 : 잤냐.
갑수 : 어.
천수 : 벌써 자고 그래. 저녁은 먹었냐.
갑수 : 어.
천수 :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는 갑수를 보며) 카메라 샀냐.
갑수 : 어.
천수 : 비싸 보인다.
갑수 : 그렇지 뭐.
천수 : 요새도 일 많이 하냐.
갑수 : 그렇지 뭐. 형은. 일 잘 되가?
천수 : (한숨 쉰다)
갑수 : 왜… 잘 안 돼?
천수 : 너 돈 좀 있냐.
갑수 : 지난번에 준 게 다야.
천수 : 엄마는 요새도 칼국수집에 계시니?
갑수 : 엄마도 없을 거야. 곗돈 붓느라… 용돈도 내가 드렸어.
천수 : 밥은 잘 먹고 다녀?
갑수 : 형은?
천수 : 나야 니 형수가 잘 차려주지.
갑수 : 밥 잘 먹고 다녀. 아프지 말고.
천수 : 그래.
갑수 : 저녁 안 먹었으면 먹고 가.
천수 : 밥도 안 넘어간다.
갑수 : 왜 그러는데.
천수 : 어디 돈 빌릴 데 없을까.
갑수 : 또 많이 밀렸어.
천수 : 직원들 월급날은 왜 그렇게 빨리 오는지 모르겠다. 집사람은 해령이 영어유치원도 보내야 된다고 하고. 당장 딱 칠백만 있으면 되는데.
갑수 : 형수한테 얘기 좀 해. 왜 어려운 거 숨겨.
천수 : 그 사람 알면 그때부터 나 진짜 피곤해진다. 차라리 돈 꾸러 다니는 게 나아.
갑수 : 몇 달 걸러 이러면 나도 엄마도 힘들잖아. 엄마 곗돈 이번에도 깨게 하지마.
천수 : 알아. 그러니까 너 찾아 왔지.
갑수 : 내가 어떻게 해볼 테니까. 엄마한테는 절대로 말 하지마.
천수 : 어떻게 할 건데. 모아둔 것 좀 있어.
갑수 : 나도 이번엔 정말 어려워. 그러니까 형,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야. 다음엔 도와주고 싶어도 못 도와줘.
천수 : 그래. 내가 너 결혼하게 되면 어떻게든지 그동안 빌린 돈 다 갚을게.
갑수 :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 지금.
천수 : 알았어. 그래 부탁 좀 하자.
천수 현관으로 나가려다 다시 갑수를 보며
천수 : 계좌번호는 지난번 그걸로 보내면 돼.
갑수 : 알았어.
천수 : 그래 쉬어라.
천수 나가고 갑수 한동안 카메라를 바라본다.
도연 화가 난 얼굴로 갑수에게 다가온다.
도연 : 니네 형 너무한다. 매번 이백씩, 오백씩. 백만원은 돈도 아니니.
갑수 : 도연아 피곤하다. 그냥 같이 누워 있자.
도연 : 너는 지금 누워 있고 싶니. 정말 생각 없다.
갑수 : 그런 거 아니야.
도연 : 뭐 하러 그렇게 챙겨. 너랑 같이 살 때 언제 너한테 밥 한번 챙겨준 형이니. 라면을 사와도 자기 먹을 거 한 개만 사서 온 사람이잖아. 왜 그렇게 챙겨.
갑수 : 너희 집하고 달라.
도연 : 카메라를 사면 뭐해. 벌써 몇 번을 갔다 팔았니.
갑수 : 그만하자.
도연 : 우울하다.
갑수 이불 안으로 들어가 등을 돌려 누워버린다.
도연 : 우울해.
갑수 : 나 좀 잘게. 오늘은 버스정류장까지 못 데려다주겠다.
도연 : 얘기 좀 해.
갑수 : 도연아 오늘은 그냥 나 좀 내버려 둬라.
도연 : 얘기 좀 하자니까.
도연 화를 참지 못하고 갑수가 덮고 있는 이불을 걷어버리고 갑수를 앉혀보려고 애쓴다.
갑수 : 하고 싶은 얘기가 뭔데!
도연 : 주방에 숨어있었던 내 모습 우울해.
갑수 : 미안해. 어쩔 수 없었잖아.
도연 : 하나밖에 없는 형은 자기 살길 바빠서 동생한테 힘이 되기는커녕 걱정만 더해줘서 우울하고, 아버지는 있는지 없는 도무지 알 수 없는 너희 집 가정사가 우울하고, 너 먹여 살리느라 카드값 내고 나면 얼마 안 남는 내 월급이 우울하고, 매번 바뀌는 네 직장 거짓말해가며 엄마한테 말하는 것도 우울해.
갑수 : 그렇게 내가 미워서 그동안 어떻게 만났니.
도연 : 미술 공부하느라 엄마, 아빠가 돈 많이도 먹어치웠는데 이제 와서 그것도 이용 못 하고, 취직한 화실이며 공방 죄다 안되서 결국 도면 그리고 있는 내 모습이 우울하고, 그것도 계약직으로 겨우 연명하고 있는 내 모습 우울하고, 언니들처럼 있는 집에 시집간 것도 아니고 동생처럼 머리가 좋아서 이 회사 저 회사 옮겨 다닐 수도 없고 재계약 때만 되면 눈치만 보는 내 모습 우울하고, 그것마저도 용역으로 밀려난 내 모습 우울하고, 내 삶도 갑수 네 삶도 모든 걸 계획할 수 없다는 게 우울하고… 결국은 나야…나… 이런 내 모습이 우울해.
갑수 : 나는 매일 편하게 즐겁게 산 줄 알아. 결국 넌 능력 있는 놈에게 갈 거야. 네 미래에 내가 있긴 있는 거니. 매일매일 인터넷에 고민 털어놓고 네가 하고 싶은 말들 쏟아내는 니 모습 보는 게 편한 줄 아니. 도대체 네 옆에 있는 나는 누구니.
도연 : 우리 끝내.
갑수 : 매번 넌 이런 식이야.
도연 : 그만하자.
갑수 : 내가 노력하는 것들은 안 보이니. 너 때문에 조금씩 포기하고 있는 내 모습 안 보이냐고.
도연 : 나 때문이라고! 나 때문이라고? 너 때문이야!
갑수 : 도망칠 생각만 하지마.
도연 : 그만하자. 다 지겹다. 이제.
갑수 : 너는 언제나 이런 식이야.
도연 : 그래 나 그런 애야. 이제 알았니.
갑수 : 왜 이렇게 못나졌니.
도연 : 그러니까 헤어지자고.
갑수 : 하나하나 해결해보자.
도연 : 우리 문제가 해결한다고 해결되는 것들이니. 네가 날 이렇게 만들었어.
갑수 : 매번 헤어지자고 말하는 사람은 너지.
도연 : 제발 끝내자.
도연 나가려는데 갑수가 손목을 잡는다.
그 손목 억지로 빼려는 도연과 가지 못하게 꽉 붙잡고 있는 갑수.
도연 : 아퍼. 아퍼. 놓으란 말야.
갑수 : 가지 말고 가만 있어봐.
도연 : 놔. 놔. 놓으라고.
갑수 : 도연아.
도연 : (엉엉 울기 시작한다) 제발 놔. 놔. 놔.
갑수 : 도연아.
도연 : 놔. 놔.
갑수 : (도연의 손목을 놓아준다)
도연 주저앉아 아픈 손목을 붙잡고 울기 시작한다.
갑수 울고 있는 도연을 남겨두고 나간다.
4. 별이 빛나는 밤에
갑수 면접 보는 중이다.
도연 책상에서 그런 갑수의 모습을 보고 있다.
면접관 : 특별한 사회경험이 없는데 사람들 만나는 영업직 괜찮겠어요?
갑수 : 경력이 될 만한 직장은 다니지 못했지만 많은 아르바이트 했습니다. 그곳에서 쌓은 경험들이 영업일을 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면접관 : 영업이 뭐하고 생각해요?
갑수 : 사람과의 관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얘기를 들어주고 그래서 그 관계가 유지되고 고객에게 물건이 판매가…
면접관 : 소설책 많이 읽나 봐요. 영업일이 그렇게 아름답거나 호락호락한 일은 아니죠.
갑수 :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채용해주시면 열과 성의를 다해서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면접관 : 다들 그런 말하고 나간 거 아시죠. 방금 전에 나갔던 사람도 그랬고 다음에 들어 올 사람도 아마 그럴 거예요. 인사팀에 오래 있다 보니 대충 볼 줄 알아요. 이 사람 몇 개월짜리다, 몇 년짜리다. 직장생활 3개월 넘긴 적 없죠.
갑수 : …….
면접관 : 전공자들도 와서 힘들다고 해요. 전공하고도 관련이 없고 특별한 자격증도 없고, 솔직히 서류심사도 어떻게 통과했는지 의문이네요.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아보는 게 좋을 거 같은데.
갑수 : 자격은 부족할지 모르지만, 자질은 쌓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 첫 번째 인상은 3개월짜리지만 두 번째 보시게 될 인상은 3개월, 3년이 아닌 그 이상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두 번째 인상을 기대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면접관 : 하고 싶은 일을 해야 재밌고 행복하지 않겠어요.
갑수 : …….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갑수에게 도연이 휴지를 던진다.
갑수 고개를 번쩍 든다.
도연 : 우는 거 싫어.
갑수 : 난 너 아니야.
도연 : 그럼 다행이구. 갑수야…
갑수 : 갑수야, 이름부터 부르는 거 보니까 심각한 얘기네.
도연 : 미안해. 너 말대로 나 못났어.
갑수 : 아니야. 나만 잘하면 되는데. 너는 항상 잘 하고 있었어.
도연 : 너도 열심히 하잖아. 그것도 몰라주고.
갑수 : 나만 바뀌면 되는 거였는데. 그날은 나한테 화가 났던 것 같아.
도연 : 뭐 하면서 지냈어?
갑수 : 드라마 봤어.
도연 : TV 잘 안 보잖아.
갑수 : 일주일간은 프렌즈 일곱 번째 시즌까지 다 봤고 두 번째 주에는 프리즌 브레이크 3번째 시즌까지 다 보고 지나 주에는 김윤진 나오는 로스트 네 번째 시즌까지 봤어.
도연 : 와 심심하진 않았겠네.
갑수 : 너 독하더라. 내 전화도 안 받고 메신저도 차단해 놓고. 집 앞이라고 나오라고 해도 안 나오고. 죽을 만큼 시간이 안 가더라.
도연 : … 미안해.
갑수 : 어제 내 빨래 걷어놓고 갔더라. 고마워.
도연 : 너 비에 젖은 빨래 제일 싫어하잖아. 비만 아니었어도 너 드라마 더 봤을 거야.
갑수 : 빨래보고 찾아갈 용기 냈어. 네가 잊지 않고 있는 것 같아서.
도연 : (갑수의 목소리 흉내 내며) ‘작업하느라 밤새고 집에 갔는데 옥탑방 빨랫줄에 그 전날 널어 논 빨래들이 죄다 젖어 있더라. 전날 형도, 엄마도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던 그 방에 젖은 빨래들하고 함께 걸어 들어가는데 갑자기 눈물이 났어.’ 그때 내가 왜 그 말에 뻑 갔나 몰라. 앞으로 갑수 빨래들 젖게 하는 일은 없어야겠다… 그랬어.
갑수 : 고맙다.
도연 : 됐어… 내가 얘기했나. 내 책상에 아무것도 없다. 컴퓨터 말고 정말 아무것도 없다. 여기 봐봐.
갑수 : 다 그렇지.
도연 : 아니야 다들 개인 컵도 있고 메모장도 있고 서류뭉치도 있고 책상 위가 난리도 아니야. 근데 난, 티끌 하나 없이 무지 깨끗해.
갑수 : 깨끗하면 좋지 뭐.
도연 : 그래서 언제고 이 자리에서 몸만 쏙 빠져나오면 돼. 내일 아침에 일어났을 때 갑자기 회사 가기가 싫다. 그래서 회사에 안 간다. 그럼 정말 빈자리가 되는 거야. 회사에 다시 가서 뭐 챙겨오거나 할 거 없이. 그냥 그걸로 끝이야. 일부러 그랬어. 짐 많이 안 만들었어. 언제라도 그만둘 수 있게… 나 식물들 좋아하는 거 알지
갑수 : 알지 그럼. 봄만 되면 길거리 파는 천원이천원짜리 화분은 죄다 사들이잖아.
도연 : 내 자리에 화분 하나 가져다 놓고 싶었는데 2년간 꾹 참았어. 화분이라도 하나 가져다 놓으면 회사에 있는 내 자리에 애착이 생길 것 같아서 안 갔다 놨어. 그만두고 나왔을 때 날 무시하는 실장은 또 누굴 무시하면서 잘살고 있을까 하는 생각보다 화분은 누구한테 갔을까 물은 잘 주고 있나. 나 그만뒀다고 그것도 버려버렸나부터 시작해서 남겨둔 화분이 제일 맘에 걸릴 것 같았어. 그렇다고 누구 주고 나오기는 그렇잖아. 그렇다고 가지고 나오기도 그렇고. 다른 것들이야 버리면 그만이지만 살아있는 거잖아.
갑수 : 문득문득 네 생각하면 눈물이 나더라.
도연 : 나도 그랬는데…
갑수 : <오아시스> 기억나?
도연 : 문소리가 달빛에 비친 나뭇가지 그림자가 무섭다고 하니까 설경구가 나무 위에 올라가서 가지들을 막 쳐내잖아. 난 그 장면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짠해.
갑수 : 네가 힘든 것들 두려운 것들 그렇게 가지치기해주고 싶었는데. 네가 무서워하는 것들에 나라는 가지 하나를 더 엮어준 것 같아서 미안했어.
도연 : 그래서 도망쳤었구나.
갑수 : 그래서 다시 돌아왔고.
갑수 : 도망쳐 있는 동안에도 도연이가 잘 있게 해주세요…
도연 : 갑수가 잘 있게 해주세요… 그래야 저도 잘 있을 수 있어요.
갑수 : 그래야 저도 잘 있는 거예요…
도연 : 그랬어.
갑수 : 나도…
도연 뒤에 항상 켜져 있었던 컴퓨터 바탕화면(스크린)을 끄고 갑수에게 전화를 건다.
갑수 : (핸드폰 받는다) 공주님?
도연 : 나 배고파.
갑수 : 집으로 와. 삼겹살 구워 먹자.
도연 : 침 고인다. 얼른 갈게. 뭐 사갈 거 없어.
갑수 : 물 한 병 사와.
조명 바뀌고 갑수의 옥탑방.
평상에 걸터앉아 갑수와 도연 차를 마시고 있다.
도연 차 마시다 말고 연신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는다.
갑수 : 내 몸에서 삼겹살 냄새 많이 나지?
도연 : 신기한 거 있어. 니 집에서 나는 냄새가 회사에서도 우리 집에서도 길을 걷다가도 나.
갑수 : 차나 마셔.
도연 : 진짜야. 냄새가 나. 길을 걷다가 지나가는 바람에 니 냄새가 나서 놀랐다니까, 아까도 그랬어. 그래서 주위를 막 두리번거렸어. 갑수 네가 옆에 있는 줄 알고. 근데 없더라. 근데 어느 날부턴가 길에서만 났던 게 내 방에서도 나고, 회사에 앉아 있는데도 나더라니까. 그래서 혼자 실없이 웃었어. 네 냄새가 곳곳에 나니까 꼭 네가 항상 내 곁에 있는 거 같아서 매일매일 안심이 되더라.
갑수 : 나는 널 안고 있을 때만 나던데.
도연 : 그럼 그렇지. 됐다. 됐어. 징그런 놈.
도연 그림 도구를 챙기고 이젤에 놓여있는 스케치북을 펼친다.
스크린에는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보이고 그것을 배경으로 갑수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하는 도연.
도연 : 아, 이제 진짜 겨울이다. 며칠 뒤면 서른넷이네.
갑수 : 서른 셋의 갑수 얼굴 잘 그려줘.
도연 : OK~
갑수 : 지금 그리는 그림 내가 사도되지.
도연 : 뭐야 창피하게.
갑수 : 네가 계속 그리고만 있다면 언제고 꼭 의미 있는 작품이 될 거 같아. 네가 좋아하는 반 고흐 보다 더.
도연 : 미안해… 맨날 무시만 해서.
갑수 : 나도 미안해. 변변찮은 놈이 못돼서.
도연 : 내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어. 그 스트레스를 너한테 다 풀어버린 것 같아. 너한테 미안하면서도 또 막 어느 순간 화가 났어.
갑수 :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오는 여자. 천 일 동안 밤마다 왕한테 재미있는 얘기 들려줘서 죽는 거 면한 여자. 매일 밤 얘기해야 되는 게 숙명인 여자. 그림 그리는 게 숙명인 우리 도연이.
도연 : 그림 그리고 사는 게 내 숙명인 줄 알았는데… 그리고 있지 않은 내가 죽은 사람 같았어. 그래서 무서웠어. 그림을 그리지 않았던 시간이… 회사를 다녔던 시간이…
갑수 : 너와 내가 느끼는 공포감이 그 여자 같았을 거야. 예전엔… 그림이 너고, 사진이 나였잖아. 자꾸만 네 존재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깔보고 힘들어하면서 오랫동안 그림에 손도 못 댄 널 보면서 마음이 아팠어.
도연 : 무서운 놈. 그런데 이쁜 놈.
갑수 : 20년 뒤에 우린 어떻게 살고 있을까.
도연 핸드폰 동영상 찍기 시작한다.
도연 : 안녕. 쉰셋의 갑수야.
갑수 : 뭐해.
도연 : 너도, 어서.
갑수 : 안녕. 쉰셋의 도연아.
도연 : 지금의 난 좀 많이 작아. 20년 뒤의 너는 지금 보다 더 커지고 행복할 거라고 생각해. 도연이 넌… 몽마르트언덕에서 갑수와 함께 질 좋은 커피를 마시고 있겠지.
갑수 : 난 커피 싫어하잖아.
도연 : 그럼 향만 맡아. 급수정, 갑수는 몽마르트언덕 노천카페에서 질 좋은 커피 향을 맡고 있을 것이고 도연이 너는 질 좋은 커피를 마시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한가롭게 쳐다보고 있겠지. 커피를 다 마신 너는 몽마르트언덕을 배경으로 갑수의 얼굴을 그리고 있을 거야. 아니다… 아닐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의 학자금 대출이나 내 집 마련 주택자금 대출 때문에 그때의 너 역시 힘들지도 모르지만, 별다방 커피 한 잔에 여전히 벌벌 떨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서 여전히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의 내가 행복한 것처럼 쉰셋의 너도 행복할 거라고 생각해…
갑수 : 정지된 게 좋았어. 예전에 아버지랑 엄마랑 매일 싸울 때 형은 학교에서 일부러 오지 않았을 때, 그냥 그 싸우는 장면이 사진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더 이상 싸우지 않게 제발 멈추게만 해달라고. 정지된 게 좋았어. 너와 내 사랑도 지금 이렇게 사랑인 채로 멈췄으면 좋겠다고 그랬는데… 20년 뒤 우리를 생각하면 난, 움직이는 사진이 찍고 싶어진다. 도연아 우린 행복할 수 있을 거야. 걱정하지 마.
도연 : 응 걱정 안 해.
갑수 : 20년 뒤의 도연아, 갑수야. 우리가 지금 이렇게 행복한 것처럼 너희들도 행복하길 바란다.
도연 : 지금처럼 몸도 마음도 아픈 곳 없이.
갑수 : 나 일 시작했어. 출장 아기사진! 백일사진도 찍어주고 돌잔치 하는 데 가서 잔치준비도 해주고 사진도 찍어주고.
도연 : 그래 잘 됐다. 잘 될 거야. 내 친구 애기들 돌잔치는 너한테 다 끌어올게.
갑수 : 열심히 할게.
도연 : 믿을게.
갑수 : 갑수표 별다방 커피 한 잔 더 타줄까?
도연 : 다음에, 내일 새벽 출근이야. 도구들은 그냥 두고 갈게. 정리 좀 해줘.
갑수 : 머리카락도 들고 가면서 도구 두고 가게.
도연 : 그냥, 그렇게 할래. 너희 집이 그림 잘 그려져.
갑수 : 엄마 괜찮아.
도연 : 괜찮아.
갑수 : 데려다줄게.
도연 : 아니야, 혼자서 갈래.
갑수 : 데려다줄게. 요 앞까지라도.
도연 : 요 앞까지? 그래, 멋없는 놈.
갑수 평상 아래쪽에 예쁘게 포장된 산세베리아화분과 풍경사진이 들어 있는 바인더를 도연에게 건넨다.
갑수 : 아까 올라오는데 시장 입구에서 팔길래 샀어. 공기 정화된데. 회사에 갔다 놔.
도연 : 안 그래도 나 화분 하나 살려구 했는데.
갑수 : 도연아. 그림 그릴 데 없으면 우리 집 와서 그려도 돼.
도연 : 정말?
갑수 : 내가 붓도 씻어주고 네 팔레트도 항상 깨끗이 치워줄게.
도연 : 응. 그럴게.
갑수 : 이제 풍경 그림도 그릴 수 있지. 얼굴만 열심히 그리지 말고. 네 주변을 그리기 시작해봐. 오늘처럼.
도연 갑수가 건네준 풍경 사진이 들어 있는 바인더를 넘겨본다.
도연 : 갑수야…
갑수 : 왜.
도연 : 고마워. 넌 이쁜 놈이야. 열심히 그릴게.
갑수 : 나도 고마워. 오늘은 성질 안내서.
도연 : 뭐? 우이씨.
갑수 : 또 성질이시다.
갑수, 도연 티격태격하며 다정하게 나간다.
스크린에는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반짝이는 별들과 함께 서서히 사라진다.
5. 내 책상 위, 작고 따뜻한 산세베리아 화분
‘Somewhere Over the Rainbow / What a wonderful world-Israel Kamakawiwo’ole 음악이 들리는 가운데 갑수에게 선물 받은 화분을 안고 씩씩한 모습으로 출근하는 도연.
갑수는 방 가운데 도연이 그림 그릴 수 있도록 이젤, 보드, 팔레트 등을 배치하고 방 정리가 끝나자 카메라 가방과 돌잔치 보드와 풍선 등을 챙긴다.
도연도 의자에 앉아 간단한 스트레칭 후 열심히 도면을 그리기 시작한다.
잠시 후, 책상 위 산세비에리아화분을 흐뭇하게 바라보다 화분에 물을 주기 시작하는 도연.
-음악 계속해서 들리는 가운데 암전되는 무대.
<당선소감>
삶의 소중한 의미 생각하며 희망을 쓸 것
선생님의 희곡을 필사 중입니다. 단어와 문장, 그 사이의 말들 그리고 비어 있는 공간에서 선생님이 떠오릅니다. 그래서 또다시 감동받고... 슬프고... 그립습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선생님의 연출로 다시 태어났듯 선생님의 작품도 오래도록 다른 손길을 통해 계속해서 태어나며 영원히 재귀되길 바랍니다. 늦었지만 선생님께 정말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꿈에 다가갈 수 있도록 제 희곡을 읽어주시고 따뜻한 손을 내밀어주신 심사위원들께.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명동의 작은 학교와 그 안에서 만났던 모든 이에게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게 많은 것을 물려주신 서울과 진안에 계신 부모님께, 진정한 어른에 대해 고민하고 행동할 수 있게 해주는 내 사랑 인복, 명제, 명우에게 이름을 모두 나열할 순 없지만 항상 고맙고 든든한 가족들, 친구들, 동료들에게 감사라는 의미를 품고 있는 모든 것을 모아 다시 한 번 감사인사를 드립니다.
1999년은 연극이 저에게 온 첫 해입니다. 학교를 다시 다닐 수 있게 되어 기뻤고 읽기로 끝났을 책들이 무대 위에서 살아 숨 쉬며 변화되는 경이로운 순간들을 경험했습니다. 그중 몇 번의 순간은 지금도 제 심장을 뛰게 하고 그때의 책들을 다시 펼쳐보게 합니다. 오랫동안 쓰지 못해 괴롭고 우울했던 순간들조차도 그때의 경험들로 인해 포기보다는 언제가 되었든 간에 다시 쓸 수 있을 거라는 기대와 희망이 생겨나게 했습니다. 계속 꿈을 꾸고 그걸 좇아가다 보면 그 꿈과 닮은 저와 언젠가는 만날 수 있을 거라 오랜 시간 생각했습니다. 좇아가는 그 길에서 삶의 소중한 의미에 대해 생각하며 희망에 대해 쓸 수 있도록 앞으로도 꾸준히 노력하겠습니다.
● 전북 김제 生
● 서울예대 극작과졸업
<심사평>
다양한 사회적 현상 새로운 작법으로 표현
총 73편이 응모한 금번 신춘문예 희곡의 경우, 많은 작품이 작금의 다양한 사회적 현상을 나름대로 새로운 작법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든 기존의 희곡 작법을 깨뜨리려는 현상은 사실 미디어의 발전과 그 영향을 차치하고라도 작가에게는 매력적인 요인이 될 것이다.
하지만 기존의 정통 연극 무대 형식에서 벗어나 극적 표현의 자유로움을 누리고자 하는 희곡적 노력은 만족할 만한 성과를 보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문제는 그 이유가 아이러니하게도 무대의 특성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대의 특성과 그 무대 위에서 일어나는 사건 전개의 개연성, 이를 이끌어가는 인물들의 캐릭터 구축은 희곡의 기본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LIMITED TIME’, ‘프리타임’, ‘멍 때리기’, ‘장래식’, ‘두부’, ‘착상의 전환’, ‘동네 미장원’, ‘내 책상 위, 작고 따뜻한 산세베리아 화분’ 등이 위와 같은 아쉬움을 안은 채, 최종 논의됐다. 심사위원들은 결국 상대적으로 안정적이라고 판단된 ‘내 책상 위, 작고 따뜻한 산세베리아 화분’을 망설임 끝에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심사위원 : 김혁수, 진남수
<AI와 함께하는 작품 분석>
작품 개요: "내 책상 위, 작고 따뜻한 산세베리아 화분"은 불안정한 현실 속에서 꿈을 지키려 노력하는 30대 청년들의 이야기를 담은 희곡입니다. 무대와 스크린을 복합적으로 활용하여 현실과 내면의 공간을 동시에 표현하는 특징을 보입니다.
줄거리 전개:
1막 "내게도 집이 있다면"
- 도연과 갑수의 관계와 현실적 고민 제시
- 주거 문제와 결혼에 대한 불안 표출
2막 "열심히 산다는 것"
- 직장에서의 차별과 비정규직의 불안
- 꿈과 현실 사이의 갈등 심화
3막 "허수아비가 되어"
- 갑수의 가족사와 경제적 어려움 표출
- 관계의 위기와 갈등 고조
4막 "별이 빛나는 밤에"
- 화해와 이해의 과정
- 서로에 대한 재인식과 성장
5막 "내 책상 위, 작고 따뜻한 산세베리아 화분"
- 희망적 변화의 시작
- 작은 일상에서 발견하는 의미
인물 분석:
도연(33세)
- 미술을 전공했으나 계약직 도면 설계자로 일하는 현실
- 예술가적 열망과 현실적 제약 사이의 갈등
- 불안정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
갑수(33세)
- 사진작가를 꿈꾸는 불안정 노동자
- 가족에 대한 책임감과 예술적 열망의 공존
- 순수하고 따뜻한 성격의 소유자
주제 의식:
1. 예술과 현실의 대립
- 생존과 꿈 사이의 갈등
- 예술가로서의 정체성 문제
- 현실적 제약과 이상 사이의 균형
2. 사랑과 성장
- 서로의 불완전함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
- 관계를 통한 상처와 치유
- 함께 성장해가는 연인의 모습
3. 청년세대의 현실
- 비정규직의 불안정성
- 주거문제와 경제적 어려움
-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상징적 요소:
- 산세베리아 화분: 희망과 생명력의 상징
- 스크린의 반 고흐 작품: 예술적 열망과 고뇌의 표현
- 사진과 그림: 각자의 예술적 정체성 표현
- 무대 공간의 이중성: 현실과 내면의 공존
현대적 의의:
이 작품은 현대 청년세대가 직면한 다양한 문제들을 섬세하게 포착하면서도, 그 속에서 발견하는 희망과 사랑의 가치를 드러냅니다. 불안정한 현실 속에서도 꿈을 포기하지 않고 서로를 지지하며 성장해가는 모습을 통해 현대인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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