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넝쿨은 집으로 가요 / 김지민
<당선작>
넝쿨은 집으로 가요 / 김지민
꿈이 쳐들어와 며칠째 끌고 가요
뿌리가 박혀 있는 재건축지구로
굴러다니는 벽시계 옆 이불과 옷가지 사이 사하라 장미는 피어 태엽을 작동하고 고양이가 고양이 꼬리를 잡고 무너진 담장을 친친 감아요 마침표를 찍었어도 빈집과 빈집 사이로 길이 지나가요
세발자전거와 두발자전거 사이에 있던 들뜬 목소리
그 소리가 어디로 갔을지 궁금하지만
살아있는 것들은 살고
넝쿨은 집으로 집으로 또 집으로 가요
갈라진 벽으로 들어온 찢어진 햇빛
빛과 함께 살아나는 먼지
벽지에서 헤매다 색을 잃어가는 색연필
메뉴판에서 썩어가는 토마토를 불러와 요리해요
어제와 다름없는 지붕을 만들어요
오르톨랑이 차려진 식탁
먹어본 적 없는 맛이 불러온 우리 집
이곳의 하늘이 가라앉을 동안
그늘이 그늘을 부풀려 발이 그늘 속으로 사라지고
우리의 과거는 해체되고 있어요
우리만 떠나고
여기엔
아침이 오고 쓰레기도 생기고 꽃이 피고 길이 지나가
고양이는 거실에서 짝짓기를 하고
살아 본 적 없는 세상에서
살아 본 적 없이 사는 것들이
이끼가 나무 의자를 점령한 시간의 길이를 재면서
있어요
우리는 아직도 집으로 집으로
<당선소감>
예측 못한 소나기 같던 ‘당선’… 詩 앞에 늘 겸손할 것
전국적으로 눈이 내릴 거라는 예보가 있었습니다.
바람은 회색이었고 올해도 기다리는 소식은 없나보다 하고 책 한 권을 펼쳤습니다. 자꾸 바깥을 내다봤습니다. 눈을 기다렸는지 아니면 혹시 모를 어떤 소식을 기다렸는지 헷갈리기도 했네요. 아무것도 오지 않았으므로 마음은 점점 휑해졌네요. 페이지는 습관처럼 넘어가고 읽었을 내용이 아득해 다시 앞으로 돌아가고 눈에 들어오지 않는 문장과 종일 옥신각신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오후 다섯 시, 여느 날처럼 별일 없이 오늘이 가고 있을 때 연락을 받았습니다. 당선은 예측하지 못한 소나기였습니다. 흠뻑 맞으면 시원하면서도 온몸을 누르는 알 듯 말 듯한 무게감, 설레면서도 겁났습니다. 여전히 저는 시가 뭔지를 잘 모르겠는데, 시인이라니 그때부터 머릿속은 흰색이 휘몰아쳤습니다. 뭐가 뭔지 모르는 것들로 마음도 휘청댔습니다.
지금까지 시가 저에게 힘이었듯 앞으로도 힘이 돼 줄 걸 믿습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조심스럽게 끌어안아 봅니다.
많은 인연이 스쳐 지나갑니다. 길게 또는 짧게 가르침을 주셨던 모든 시인께 지면을 빌려 감사함을 전합니다.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 창작 전문가 과정을 통해 조금씩 성장을 한 것 같습니다. 이승하, 송승언, 하린, 김근, 황인찬, 김성규, 류근, 정홍수 교수님께 감사함을 전합니다. 김명철 시인님께도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시를 만난 곳이자 최고의 놀이터인 노작홍사용문학관을 빼놓을 수 없네요. 손택수 관장님과 직원분들께 감사함을 전합니다. 서로에게 힘이 되어준 다,시다 동아리 회원들과 중대 문우님들 함께 이 길 걸어줘서 감사해요. 사랑하는 가족들과 이 기쁨을 마음껏 나누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시인의 길을 걸을 수 있게 길을 터주신 경인일보사와 심사위원님께 고개 숙여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제 몸을 눌렀던 무게를 잊지 않고 시 앞에서 늘 겸손한 사람이 되겠습니다.
● -
<심사평>
무너진 옛집서 찾은 삶의 흔적… 마지막까지 울림 지속
정치적 격랑을 거치면서, 계속 되는 불황을 견디면서, 우리들의 시심은 더 높아지고 더 깊어졌음을 응모작품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시를 쓰기 시작하면 누구나 시인입니다. 시인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가슴 속 깊이 숨어 있는 서정을 사물에 투사하여 사물의 본질을 드러낼 수 있다면 훌륭한 시인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시인이 될 수 있다면 아름답고 기쁘고 담대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시심은 연민입니다. 이 사회가 연민으로 가득 찬다면 시편들은 사회 병리를 치유하는 치료제가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기쁜 일은 응모작품의 수가 늘어났으며 작품의 수준이 높아졌다는 사실입니다.
작품의 경향은 대체로 일상생활에서 느꼈던 감정을 섬세하게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또한 철학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사유의 깊이를 보여주고 있는 작품들이 많이 눈에 띄었습니다. 두 심사위원은 오랜 토론 끝에 김지민을 당선자로 밀었습니다.
김지민의 당선작 ‘넝쿨은 집으로 가요’는 재건축지구의 폐기물들에서 찾아볼 수 있는 삶의 흔적들에 깊은 시선을 보내는 시입니다.
굴러다니는 벽시계는 사하라 장미가 그려져 있고, 빈집과 빈집 사이에는 길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사라진 아낙의 목소리가 어디에 있는지 궁금하고, 오르톨랑, 즉 멧새 요리가 차려진 식탁이 있기는 하지만 먹어본 적이 없으니 상상속의 음식일 뿐입니다.
온갖 폐기물들 사이에 자라나는 넝쿨은 끈질긴 생명력의 상징입니다. 이미 무너져버린 옛집을 향해 뻗어나가고 있는 넝쿨은 재건축지구에 살던 주민들의 마음일 것입니다.
버려진 메뉴판은 재건축되기 전, 그곳에서 음식점 영업으로 생계를 이어가던, 그리하여 주민들과 정담을 나누던 업주의 마음일 것입니다. 재건축지구의 하늘이 가라앉고 그늘이 커지면 그늘 속으로 발을 옮기던 사람들이 떠나고 주민들의 과거가 해체되는 것입니다. 결국 주민들은 재건축지구를 떠납니다. 서럽고도 슬픈 일입니다.
‘우리들만 떠나고’라는 마지막 행의 울림이 오래 계속됩니다. 부디 한국 시단의 미래를 예인하는 능력 있는 시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심사위원 : 김명인, 김윤배
<AI와 함께하는 작품 분석>
작품 개요: "넝쿨은 집으로 가요"는 재건축 지구라는 특수한 공간을 배경으로, 사라져가는 것들과 남겨진 것들의 공존을 그려내는 시입니다. 꿈과 현실이 교차하는 초현실적 이미지를 통해 공동체의 기억과 상실, 그리고 그 속에서 발견되는 생명력을 섬세하게 포착합니다.
형식적 특징:
1. 시적 구조
- 자유시 형식을 통한 유동적 운율
- 이미지의 연쇄적 배치
- "집으로 집으로"와 같은 반복구를 통한 리듬감
- 시각적 여백의 효과적 활용
2. 언어적 특징
- 일상적 사물의 초현실적 변용
- 감각적 이미지의 중첩과 병치
- 현재형 시제를 통한 생동감 부여
이미지와 상징 분석:
1. 핵심 이미지
- 넝쿨: 귀환과 생명력의 상징
- 사하라 장미: 황폐함 속의 아름다움
- 고양이: 본능적 생명력의 표상
- 빛과 먼지: 존재와 소멸의 이중성
2. 공간적 표현
- 재건축 지구: 과거와 현재가 중첩된 공간
- 무너진 담장: 경계의 해체
- 빈집: 기억의 저장소
- 그늘: 보존과 소멸의 경계
주제 의식:
1. 기억과 상실
- 공동체적 기억의 보존과 소멸
- 개인적 경험의 집단적 의미화
- 과거와 현재의 긴장관계
2. 생명력과 희망
- 폐허 속에서 피어나는 새로운 생명
- 자연의 회복력과 순환성
- 귀향의 의지와 가능성
3. 공동체성의 문제
- 도시 재개발과 공동체 해체
- 개인의 정체성과 장소성
- 기억의 공유와 단절
현대적 의의:
1. 사회적 의미
- 도시 재개발이 야기하는 인간 소외 문제
- 공동체 기억의 보존 필요성
- 현대인의 정주성 문제 제기
2. 문학적 성취
- 초현실적 이미지를 통한 현실 비판
- 서정성과 사회성의 조화
- 새로운 시적 언어의 가능성 모색
이 시는 재건축이라는 현대적 현상을 단순한 물리적 변화가 아닌, 기억과 정체성의 문제로 승화시킵니다. 특히 넝쿨이라는 자연적 생명력을 통해 상실과 희망이 공존하는 역설적 상황을 효과적으로 포착하며, 현대 도시인의 실존적 고민을 섬세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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