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한국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호버링 / 황예솔

<당선작>
호버링 / 황예솔
숨이 가득 차오를 때는 내 폐가 아코디언처럼 느껴졌다. 초등학교도 안 간 어릴 적, 엄마와 싸운 아빠는 나를 데리고 동네 근린공원에 나와서 담배 한 갑을 모조리 태웠다. 그동안 나는 열린 무대에서 아코디언을 연주하던 아저씨의 버스킹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의 찌그러지는 이마와 미간, 격정적으로 움직이는 손가락과 팔꿈치, 그리고 트랙을 달리는 사람들의 숨소리를 겹쳐 보았다. 겹겹이 접힌 아코디언이 줄어들고 펴지고 다시 천천히 소리를 내뿜고 슉 펼쳐졌다가 건반이 눌리는 대로 선율을 내지르는 것을 보면서, 정말 이곳에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가 있구나, 생각했다. 달리는 사람들의 숨이 악기의 폐로 들어가고, 빠라리라람 멜로디로 내쉬어진 공기는 떠다니다가 저기서 담배를 태우는 아빠의 입속으로 들어가고, 다시 하얀 연기로 나오고…… 살아 움직이는 사람들을 맞물려 돌아가는 자동 모빌처럼 멍하니 바라보던 기억은 너무도 강렬해서 잊히지 않았다. 달릴 때마다 그 장면들이 영사기 돌아가듯이 연속해서 떠올랐다. 헉, 헉, 헉, 헉, 뛰면서, 내 몸은 형편없이 구린 악기다, 어딘가 구멍이 뚫려 음악도 될 수 없고 유기적인 장면도 될 수 없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이어질 수 없는 고장난 개체구나, 되뇌었다.
"야!"
뒤에서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얼마나 뛰었을까. 잠시 멈춰 무릎에 기대고 땅을 향해 숨을 몰아쉬었다. 고개를 드니 달리고 있던 이차선도로의 먼 끄트머리가 보였다. 지평선을 빼곡히 메꾼 서울의 건물들이었다.
"김초! 기다려!"
나를 김초라고 부르는 사람은 함지밖에 없었다. 함지가 나를 쫓아 달려오고 있었다. 하아, 나는 한숨을 쉬고 너덜너덜해진 다리에 힘을 줘 다시 뛰기 시작했다. 새벽 배송 센터에서 받은 유니폼이 무겁게 느껴져 주섬주섬 벗어 풀숲으로 던져버렸다. 사실 나는 배송 센터에서 최대한 멀리 도망치는 중이었다.
"야이씨! 기다리라고!"
함지는 결국 나를 따라잡을 것이었다. 나보다 키도 크고 건강하니까. 달릴 때 아코디언 연주가 떠오르는 건 그때가 도망친 상태였기 때문일지 몰랐다. 어린 나이에도 아빠가 엄마랑 싸우기 싫어서 도망쳤다는 걸 은연중에 알았던 거다. 정말 나는 도망이 몸에 배었나 봐. 어쩔 수 없나 봐. 생각하느라 뜀박질이 늦어지면 안 됐다. 함지가 나를 붙들 것이었다. 동이 트고 있었다. 하늘이 조금씩 밝아졌다.
함지는 그날 센터로 출근하는 셔틀버스 정류장에서 마주쳤다. 막차가 끊길 즈음, 학교 정문 앞 사거리, 자동차는 현저히 줄고 술에 취한 사람만 비틀거리며 지나다닐 때 새벽 배송 센터로 출근하는 사람들은 감서대입구역 셔틀 정류장에 조용히 줄을 섰다. 엘이디 가로등의 차가운 회백색 빛은 고된 하루를 더 고되게 채우러 가는 사람들의 낯빛을 그늘 지게 만들었다. 나는 벌써 후텁지근한 오월의 밤을 느끼며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때 누군가 몸이 돌아갈 정도로 강하게 팔뚝을 붙들었다. 함지였다.
"야! 네가 여기 있네?"
함지는 드라마 속 추노꾼처럼 눈을 번뜩였다. 팔뚝을 쥔 손에 어찌나 힘을 주는지 멍이 들 것처럼 아팠다. 나는 함지의 손에서 벗어나려 뒷걸음질 쳤다.
"내가 널 얼마나 찾아다녔는지 알아? 왜 나 피해?"
날카롭게 꽂히는 함지의 말에 조용히 셔틀을 기다리던 근무자들이 숨죽이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피한 게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버스가 도착했다. 함지는 내 옆에 딱 붙어 자연스럽게 새치기로 버스에 올라탄 후, 나를 버스 창가 쪽으로 밀어 넣고 본인이 통로에 앉았다. 새치기당한 사람들이 항의했으면 좋았으련만, 그들은 나를 도와주지 않았다. 나는 창밖을 보며 함지를 애써 외면했다. 함지는 내게 얼굴을 들이밀고 속삭였다.
"내가 왜 여기 있는지 알아? 네가 망가뜨린 드론 물어낼 돈 벌러 가는 거야."
함지의 따뜻한 숨이 뺨에 닿았다. 나는 함지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어깨를 움츠렸다. 함지의 드론, 엄밀히 말하면 학교 드론동아리의 드론을 망가뜨린 건 고의가 아니었다. 내가 무슨 동아리에 들어가겠다고, 거기를 왜 갔나, 그동안 후회는 충분히 했다.
한 달 전, 갑자기 쓰러진 아빠 때문에 다음 학기 이후에 휴학해야 할지도 몰랐다. 병원비 수납을 도와주러 온 고모는 병실에 있던 내게 전화를 걸었다. 상냥한 목소리로 잠깐만 내려와서 키오스크 수납을 도와줄 수 있냐고 물었다.
― 창구는 번호표 줄이 길어 한참 걸리네. 기계로 하면 금방이라는데 고모가 옛날 사람이라 좀 어려워. 초림이 네가 내려와서 도와줄래?
네, 대답하고 내려간 나는 키오스크 화면에 아빠의 정보를 입력하고 고모가 건네주는 신용카드로 긴 숫자의 나열처럼 보이는 수납비를 처리했다. 고모는 기계에 말하듯, 너 아르바이트라도 해야지, 하고 건조하게 말했다.
"내가 병원비는 도와줘도 등록금까지는 도와줄 수가 없어."
나는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네 엄마한테는 연락해 봤니?"
나는 가만히 고모를 바라보았다.
"너는 도와달라 해도 돼. 어느 엄마가 자식까지 외면하겠어. 사람이 말이야, 아무리 그래도 그러면 안 되는 거야. …… 듣고 있니?"
나는 키오스크에서 뽑은 카드를 고모에게 돌려줬다. 고모는 카드를 탁 빼앗듯이 가져가며, 요즘 애들은 왜 대답을 안 하고 쳐다보기만 하는지, 하고 들으라는 듯이 중얼거렸다. 나는 빈손이 부끄러워져서 얼굴을 붉혔다. 고모는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앞으로 걸어갔다. 나는 고모가 가기 전에 감사하다고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키오스크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수납하실 거예요? 누군가가 물어봐서 자리를 비켜주고 보았을 때 고모는 이미 가고 없었다. 사람이 이렇게 염치가 없으면 안 되는데 생각했지만, 발이 움직이지를 않았다. 그런데, 사람이니까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입력된 기계도 아니고…… 그런 생각이 본드처럼 내 발을 땅에 딱 붙여서 떨어지지 않게 했다.
병원에 봄꽃이 만개하여 홍보 영상을 찍기 위해 드론을 띄웠다고 했다. 촬영용 드론으로 인해 소음이 발생할 수 있으니 양해 바란다는 안내 방송을 들은 나는 흡연구역에서 담배를 피우며 드론을 보고 있었다. 작은 군용 헬기처럼 보이는 드론은 안정적으로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며 입구와 정원, 그리고 주차장까지 이어진 벚꽃과 개나리 길을 촬영했다. 그때 옆에 무언가 툭 떨어졌다. 누군가 말랑한 고무공을 던진 것 같은 소리였다. 가까이 가보니 주황색 깃털에 검은 머리를 가진 곤줄박이였다. 유리 창문에 부딪혔다가 떨어진 충격이 컸는지 일어나지 못했다. 나는 손가락으로 곤줄박이를 건드려 봤다. 움직이지 않았다. 더 밀어봤다. 목은 힘없이 꺾였고, 꼬챙이 같은 다리는 하늘을 향해 뻗어졌다. 아직 꽃샘추위가 서늘한 사월인 것 치고 볕이 뜨거웠다.
"죽었나?"
내 혼잣말에 얇은 발이 살짝 까딱, 움직이더니 곤줄박이는 더 움직이지 않았다. 짧아진 담배는 힘 빠진 손가락 사이에서 툭 떨어졌다. 귓가에 투두두 거리는 프로펠러 소음이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드론이 반듯하고 안정적으로 직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학생회관 앞 벤치에서 혼자 삼각김밥을 씹던 내게 동아리 홍보 전단지를 건넨 것은 함지였다.
"드론 동아리입니다. 축구부랑 함께하니 많은 관심 부탁해요."
함지는 짧은 커트 머리에 왁스를 발라 살짝 젖은 머리를 하고, 후드에 통이 넓은 반바지를 입어 중성적인 이미지를 풍겼다. 함지는 내가 드론에 관심이 있는 걸 눈치챘는지, 다 들리는 속삭임으로 "우리 축구부 잘생긴 거 아시죠?" 하고 전단지 속 '축구부 경기 촬영 실습' 문구를 톡톡 두드렸다. 나는 고등학생 때 늘 체육복을 입고 유난히 활달한 성격으로 일진과 체대 입시생 사이의 아슬아슬한 경계를 타던 아이들과 함지를 겹쳐 보았다. 일단 삼각김밥을 베어 물며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동아리에 가입할 생각은 없었다. 오리엔테이션을 듣고 결정해도 된다는 설명에 구경이나 하자는 마음이었다. 드론을 더 가까이서 보고 싶었다.
함지는 예비 부원들을 대운동장 잔디밭에 앉혔다. 자신을 회장이라 소개한 함지의 원래 이름은 함지아였다. 그냥 함지로 편하게 불러달라며 이어서 모임 주기와 뒤풀이 자유 참여 등의 동아리 수칙을 설명했다. 배경으로 피부가 그을린 축구부 선수들이 스프린트를 뛰고 있었다. 옆에 앉은 신입생들은 서로 속닥이며 몇 번 선수가 잘생겼는지 토론했다. 함지는 가장 기본적인 운행을 알려주겠다면서 드론을 꺼냈다. 그때까지도 예비 부원들은 집중하지 못했다. 함지는 드론을 자신이 서 있던 자리에 놓고 사람들이 드론을 볼 수 있도록 비켜섰다. 윙, 하고 드론이 천천히 떠올랐다. 바람에 살짝 흔들리긴 했지만 균형을 잡은 채 둥실 자리를 지켰다. 그때야 부원들은 가만히 떠 있는 드론에 시선을 모았다.
"드론을 운행하려면 제일 먼저 정지비행을 배워야 합니다. 호버링이라고 해요."
위, 아래, 양옆으로 움직이기 전에 일단 가만히 떠오를 수 있어야만 드론 운행을 시작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삼차원의 세상을 잠깐 꼬집어 허공에 떠 있는 것 같은 드론. 그 무던하고 단순한 움직임을 바라보았다. 늘 땅이 무겁게 나를 끌어당기고 있는 기분이었다. 나는 버튼을 누르면 바람과 공기에 가볍게 저항하며 몸을 띄우는 드론이 좋았다.
가입서를 제출할 때 함지는 우리가 같은 24학번이라는 걸 보고 바로 말을 놓으며 김초림인 내 이름을 김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나는 함지가 체육경영학과라고 하자 그럴 줄 알았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함지는 짧은 대화 중에도 나를 오래 알고 지낸 친구처럼 툭툭 치며 어깨동무하고 웃었다. 동아리 방을 얼른 나오고 싶었지만, 함지가 계속 동아리 운영에 관해 이야기하는 바람에 생각보다 시간이 늦어졌다. 기수별로 적정 인원이 있는데 이번 기수에 인원도 적고 24학번이 없어서 내가 와준 것이 정말 좋다고 내 팔을 흔들어댔다.
겨우 동아리방을 나와 괜한 짓을 한 것 같다고 후회하는 중에 학생회관 게시판에 붙은 '고수익 새벽 배송 센터 아르바이트 모집' 포스터를 보았다. 아르바이트 앱에도 도배되다시피 올라오는 알바였다. 정문 사거리 앞 셔틀 운행, 대학생 우대, 친구랑 함께, 하루 알바도 가능이라고 적혀 있었다. 고모의 말이 떠올라 포스터에 있는 큐알코드를 인식해 간단 지원서를 작성하고 지원 버튼을 눌렀다. 하루 만에 합격 문자가 왔다. 그 후로 일주일에 사나흘 정도는 지원해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또래 대학생들이 몇 있긴 했지만, 대부분은 하루 일하고 안 나오는 듯했다. 함지를 이곳에서 만나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내가 괜찮다고 소리 지르는 거 못 들었어?"
함지는 드론이 망가졌던 날을 생생하게 떠올리는지 오버스럽게 몸을 돌려 나를 보았다. 통로 너머에 앉은 근무자가 함지의 등을 툭툭 치고, 저기요, 조용히 좀 해주세요, 하고 신경질을 냈다. 함지는 바로 죄송합니다, 속삭였다. 원래 버스에서 대화하는 사람은 없었다. 조금이라도 눈을 붙여야 새벽 일을 할 에너지가 비축되기 때문이었다. 함지는 도끼눈으로 나를 한 번 더 흘기고 눈을 감았다. 나는 다시 창밖을 보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드론이 순식간에 대운동장 콘크리트 계단으로 처박혔을 때, 나는 내 조작 실수 때문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리고 드론을 주우려다가 깨진 프로펠러를 보았다.
"괜찮아! 들고 와!"
함지는 나를 향해 걸걸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나는 드론을, 그리고 고개를 들어 함지를 차례대로 바라보았다. 함지는 당황한 나를 보았는지 천천히 내 쪽으로 걸어왔다.
"깨졌어?"
나와 함지 사이로 구보를 맞춰 달리기 훈련을 하는 축구부가 지나갈 즈음, 나는 그들과 반대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어? 너 어디가!"
당황하는 함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야! 김초! 어디가!"
슬쩍 뒤를 돌아보았을 때, 축구부 애들도 함지의 목소리를 듣고 달리기에 집중하지 못한 채 나를 흘긋흘긋 쳐다보았다. 함지는 떨어진 드론을 확인하고 얼마간 나를 쫓아 뛰어왔다.
"야악!"
함지는 내 뒤통수를 향해 분노와 의문이 섞인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그 후로 한 달 동안 나는 함지의 연락을 모두 무시했다. 사진도 하나 없는 내 SNS는 어떻게 찾았는지 디엠이 오기도 했다. 함지의 계정은 바로 차단했다. 심지어 과사무실로 전화가 온 적도 있었다. 다음 학기 휴학 상담 때문인 줄 알고 받았다가 함지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알아차리자마자 전화를 끊어버렸다. 나도 내가 왜 이렇게 상황을 피하려고만 하는지 몰랐다.
센터에 도착하고, 처음 지원한 사람들은 교육반으로 나뉘어 갔다. 함지도 교육반으로 가면서 내 귓가에 경고처럼 속삭였다.
"나는 널, 반드시 찾아낸다."
그리고 눈을 흘기고 멀어져갔다. 내가 잘못한 거긴 한데, 함지의 저런 에너지가 나를 힘들게 했다. 함지의 눈빛이 벌레처럼 어깨에 달라붙어 아무리 털어도 떨어지지 않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배정된 캐비닛에서 유니폼과 장갑을 착용하고 바로 업무에 투입되었다. 내가 일하는 구역은 배송 물품의 바코드를 스캔하는 스캔 존이었다. 주로 여성들은 스캔 존에서 들어오는 팔레트에 쌓인 배송 물품을 소팅 로봇에 스캔하여 올리는 일을 하고, 남성들은 상하차 존에서 분류된 배송 물품을 각 지역으로 가는 택배차에 싣는 일을 했다. 두 존을 가르는 가운데 구역은 소팅 로봇의 구역이었다. 소팅 로봇은 스캔 존에서 스캔한 물품을 종류와 지역에 따라 구분하여 상하차 존에 쌓았다. 로봇은 오로지 입력된 대로만 움직였다. 근무자가 물품을 스캔하지 않으면 같은 문장만 반복했다. 물품을 스캔해주세요. 물품을 스캔해주세요. 여성의 나긋나긋한 목소리였다. 뒤에서 관리자가 손뼉을 뻑뻑 치면서 고래고래
"빨리 빨리 작업해주세요! 내일 주말이라 물량이 많습니다!"
라고 소리치는 것과 톤도 다르고 감정이 배제되어 있지만 의미는 같았다. 나는 로봇의 아무렇지 않음이 좋았다. 로봇의 감정 없음이 편했다. 그래서 드론이 좋았는지 모른다.
나는 로봇에 물품을 스캔하면서 계속 함지로부터, 깨진 드론으로부터 도망치던 날을 떠올렸다. 스캐너에 바코드가 찍힌 듯 자동으로 움직이던 팔다리. 도망가야지. 이 상황이 너무 싫어. 벗어나야지. 아주 깊숙한 곳으로부터 떠오르던 그 마음들에 대하여 곱씹었다.
엄마는 아빠가 지긋지긋하다고 했다. 네 아빠는 어쩜 그렇게 회피형이니. 지겨워 죽겠어. 정작 그런 엄마도 내가 성인이 되자마자 아빠로부터 도망갔다. 아빠는 합의이혼 후에 엄마가 짐을 빼는 날까지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봤지? 네 아빠는 끝까지 이런다. 엄마는 그냥 갈란다."
나는 안방의 문가에 서서 짐을 싸는 엄마를 바라보았다. 그럼 나는? 물어보지도 못했다. 엄마는 장롱을 열어 외할머니가 결혼할 때 솜을 직접 꿰어 줬다는 이불을 꺼내다가 사이에 껴있던 솜인형이 달린 모빌을 발견했다. 엄마는 허어, 하고 숨을 들이쉬며 나에게 손짓했다.
"이게 여기 있었네."
엄마는 엉켜버린 모빌의 끈을 풀어보려고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모빌 중앙의 건전지를 넣는 부분을 만지며 풉, 웃었다.
"이거 알아? 아기 침대에 걸어두면 자동으로 돌아가는 모빌인데, 우리가 왔다 갔다 하다가 잘못 쳐서 네 몸 위로 떨어진 거야.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불 끄고 자러 가고, 너는 뒤척이고, 모빌은 꼬이고, 그러다 네 목에 감긴 적이 있었어. 큰일 날 뻔한 거지."
엄마 말을 듣다 보니 어렴풋이 아플 때마다 목줄에 매여 어딘가로 질질 끌려가는 꿈을 꾸는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을까 싶었다.
"그때 네 아빠가 무슨 예감이 들었는지 잠에서 깨서 소리도 못 내고 울던 널 구했어. 여기 네 아빠가 밟아서 고장 난 거야. 그렇게 화를 내던 모습은 처음 봤다. 늘 회피만 하던 사람이 어떻게 알고 깨서 널 살렸는지 몰라."
엄마는 웃으며 말하다가 어느 순간 슬픈지 화났는지 모를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나를 보지도 않고 모빌을 내 쪽으로 내밀었다. 모빌을 받아 보니 건전지를 넣는 함이 완전히 박살 나 있었다. 나는 모빌에 달린 아기천사 솜인형을 만지작거리다가 엄마에게 모빌을 돌려주었다. 엄마는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너 안 가질 거면 버려."
그리고 아무런 미련도 없는 얼굴로 다른 짐을 정리했다. 나는 고민하다가 그 모빌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그날 엄마가 떠나고 늦은 밤에서야 아빠가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다. 아빠는 어휴, 에휴, 에흑, 하면서 한숨을 쉬다가 울음을 삼키는 소리를 냈다. 나는 못 들은 척 잠에 들려고 했지만, 자꾸 모빌 끈에 목이 묶인 채, 개처럼 어딘가로 끌려가는 악몽을 꾸었다. 뱅글뱅글, 내 의지 따위는 거세당한 채 어딘가로 자꾸만 끌려가는 꿈이었다.
아빠는 이혼 후에 일을 늘렸다. 집에서 아빠를 보는 날이 줄어들었다. 우리는 다른 시차를 사는 사람처럼 각자의 생활을 했다. 사람은 안 하던 짓을 하면 꼭 그런다고, 그날은 오랜만에 저녁에 둘 다 집에 있으니 같이 밥을 먹자고 한 날이었다. 아빠는 밑반찬이라도 있어야 집에서 밥 먹을 맛이 난다며 유튜브를 보며 멸치를 볶는 중이었다. 프라이팬에서 멸치가 짭짜름한 냄새를 내며 타고 있었고 아빠 폰에서 들리는 영상 속 요리 선생님은 물엿을 넣고 잘 섞어주는 단계로 넘어갔다. 컥, 하고 바닥에 쓰러진 아빠를 보고 소파에 누워 폰을 보던 나는 무심코 "응? 아빠 왜 그래?" 물었다. 몸을 일으켜 보니 아빠는 무너진 돌탑처럼 부엌에 누워있었다. 머리가 새하얘졌다. 순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다가가서 아빠를 흔들었다. 아빠는 숨을 안 쉬었다. 나는 아빠 폰을 집어 유튜브 검색창에 떨리는 손으로 '숨을 안 쉴 때'를 검색했다. 심폐소생술 영상이 나왔고, 그걸 재생했다. 아나운서가 나와서 설명하는 것부터가 영상의 시작이었다.
― 만약 여러분의 가족이나 주변 사람에게 심정지가 발생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지금이 바로 그런 순간이었다. 우선 신고를 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뇌가 고장 난 것 같이 주춤거리면서 들고 있던 아빠 폰이 아닌, 내 폰을 찾아 119에 전화했다.
― 신고자분, 심폐소생술 할 줄 아세요?
학교에서 CPR을 배우고 실습했던 경험이 있었지만, 실제로 그걸 내가 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래서 내 입에서는, "아, 아니요."라는 대답이 나왔다.
― 스피커폰으로 바꾸고 침착하게 따라 하세요.
진심으로 도망가고 싶었다. 아빠 폰에서 재생되는 영상은 이미 심폐소생술을 하는 방법을 한창 가르쳐주고 있었지만, 나는 스피커폰에서 흘러나오는 대원의 안내에 따라 숨을 아빠의 마른 입술로 불어 넣고, 가슴을 체중을 실어 눌렀다. 숨을 후, 후, 불고 체중을 실어 팔을 직각으로 세운 채 심장이 있는 가슴을 육 센티 정도 깊이로 누르고, 누르고, 누르고…… 어떻게 했는지 기억이 잘 안 났다. 땀이 흘렀고 어깨가 뻐근했다. 그래도 멈출 수 없었다. 얼마나 했을까. 유튜브는 다른 영상을 자동 재생했다. 오늘은 묵은김치를 처리할 수 있는 돼지고기 김치찜을 함께 요리해 볼 텐데요, 하고 영상 속 요리 선생님이 밝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구급대원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넘어졌다가 허겁지겁 일어나 문을 열어주었다. 대원들은 집으로 뛰어 들어왔다. 나는 그 모든 기억이 관객석에서 본 연극처럼 느껴졌다. 그중 제일 인상적이었던 것은 구급대원 중 한 명이 가스불을 끄는 장면이었다. 고개를 들었을 때 드라이아이스 효과처럼 멸치 탄 연기로 뿌옇게 흐려진 부엌이 보였다.
아빠는 심폐소생술 과정에서 갈비뼈가 세 대 부러졌다고 했다. 내가 그런 건 아니겠지, 그냥 못한다고 할 걸, 의사의 말을 듣는 내내 손이 벌벌 떨렸다.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런데 아빠를 두고 갈 수는 없었다. 아빠한테는 이제 나밖에 없었다. 상태를 체크하는 기계를 잔뜩 단 채 병실에 누워있는 아빠는 이제 보니 예전보다 많이 마른 것 같았다. 아빠한테 말하고 싶었다. 아빠, 나 두고 도망치는 거야? 이대로 영영? 면회 시간마다 나는 아빠가 누운 침대에 얼굴을 기대고 바이탈 모니터가 그리는 그래프를 보았다. 아빠 대신 모니터가 대답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규칙적으로 맥박이 뛰었다. 그래프가 톡톡 튀어 올랐다. 슈퍼마리오가 포인트를 얻기 위해서 뛰어오르는 것처럼, 픽셀이 먹이를 먹기 위해 요리조리 움직이는 것처럼, 그래프도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중이었다. 그렇게 한 달 정도가 흐르자, 언제부터는 일정하게 떠오르는 심박수가 긴 숫자로 보였던 키오스크의 수납비에 쌓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면 안 되는데, 자꾸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어쩌면 내게는 기계처럼 반복적이고 단순한 일이 필요했는지 몰랐다. 엄마가 두고 간 모빌에 목이 묶여 내 의지와 상관없이 어딘가로 이끌려 가는 기분이었다. 내 인생이 어디로 갈지, 아빠는 어떻게 될지, 알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야식 시간을 알리는 안내 음성이 나왔다. 우리는 조를 나누어 센터 내 식당으로 이동했다. 나는 제발 함지와 같은 타임에 걸리지 않기를 바랐는데, 바람이 무색하게 식당에 들어가자마자 배식받은 식판 그대로 자리에 앉아 나를 기다리는 함지를 마주했다. 함지는 내가 식당에 들어오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흔들며 "김초!"하고 불렀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싶은 심정으로 식판에 음식을 배식받아 함지의 옆에 앉았다. 빨리 먹고 일어나려고 밥을 콩나물 김치국에 모조리 말았다.
"내가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은, 김초 네가 드론을 물어낼 일은 없다고."
나는 식판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밥을 씹으며 함지의 말을 들었다. 함지는 숟가락을 든 채로 밥을 뜨지 않고 말만 했다.
"학교에도 다 동아리에 배정된 예산이 있어. 그리고 설마 내가 회장이 되어서 부원한테 드론을 물어내라고 하겠니?"
나는 속으로 그럴 수도 있지, 하고 생각했지만 말대꾸하지는 않았다.
"문제는 네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도망갔다는 거야. 왜 얘기도 안 해보고 잠수를 타?"
함지는 말하다가 나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점점 목소리에 화를 섞었다. 나는 국에 만 밥을 입에 넣은 채로 장조림 메추리알도 쑤셔 넣었다. 함지는 여전히 밥을 한 숟갈도 뜨지 않았다.
"우리도 이제 어엿한 성인인데 너 그래 버릇하면 안 돼. 내가 너 찾으려고 과사무실까지 가서 연락한 거 알지. 나는 뭐 시간이 남아돌아서 이러니? 나도 쉽지 않아. 드론값도 예산에서 빼면 되는 건데, 우리 동아리 부원들한테 조금이라도 풍족하게 활동하라고 지금 봉사하는 거잖아."
함지는 숟가락에 메추리알을 하나 올려 먹으며 웅얼웅얼 "교수님한테 예산 결재 올리기 귀찮아서도 있지만……"했다. 나는 입에 있는 음식물을 삼키고 함지에게 말했다.
"밥 먹어. 지금 안 먹으면 이따가 힘들 거야."
함지는 내 말에 조금 벙찐 듯이 잠시 말을 멈추고 나를 보았다. 그래도 내가 조금이나마 반응을 한 것이 기쁜지 숟가락을 내려놓고 말했다.
"김초야, 나는 새벽에 많이 먹으면 식단 루틴 깨질까 봐 안 먹는 거야. 걱정해 줘서 고맙지만, 나는 퇴근하고 하루 죽어있으면 돼. 아무튼 너, 내 말 알아들었어?"
나는 함지의 초롱초롱하고 광기 어린 눈빛을 외면하기가 힘들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리고 밥을 다 먹고 일어나기 전에 남은 반찬을 국 자리로 모두 밀었다. 함지도 나를 보고 따라 했다. 정말 밥을 한 숟가락도 먹지 않은 함지의 식판을 보다가, 문득 예전 교육 시간에 들은 과로사 직원의 사례가 생각났다.
"새벽 일은 생각보다 체력 소모 심해. 과로사한 사람도 있어."
한여름 가장 더울 때, 상하차 존에서 일어난 사고였다. 열대야가 심했던 며칠 동안은 스캔 존에서도 쓰러진 사람이 있다고 했다. 교육 담당자의 말로는 그 사람이 원래 몸이 약했고 지병이 있었던 탓이랬다. "여러분도 해보면 할 만 하다고 생각될 거예요. 죽을 정도는 아니에요." 웃음 섞인 목소리로 그랬다. 그렇긴 하지. 이거 때문에 죽었다고 하기는 애매하지 않나. 내 앞에 앉았던 대학생 둘이 속닥이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나 체대 헬스걸이야."
함지는 소매를 걷어 전완근에 힘을 주고 갈라지는 근육을 보여줬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퇴식구로 향했다. 함지는 나를 졸졸 따라오며 어디 가냐고 물었다. 흡연구역에 간다는 말에 한 대 빌려줄 수 있냐고 애교를 부렸다. 나는 함지가 들이대는 얼굴을 슬쩍 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흡연구역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 중, 우리와 또래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말했다.
"아, 빨리 돈 받고 싶다. 돈 들어오면 해외여행도 가고, 데이트도 하고, 사고 싶던 운동화도 사고, 백팩도 바꾸고……"
오늘 하루로 그게 다 되겠냐, 옆 사람이 낄낄 웃었다. 그 뒤에는 아빠와 나이가 비슷한 아저씨들도 있었다.
"물량을 적당히 나눠야지, 힘들어 뒤지겠네."
추임새처럼 말끝마다 씨팔, 씨팔, 하던 아저씨는 내가 있는지 모르고 침을 탁 뱉었다. 운동화 앞코에 침이 살짝 튄 것 같아 내려다보았다. 나는 가만히 있는데 오히려 다른 아저씨가 나한테 침 튄 거 아니냐고 빨리 사과하라고 했다.
"아이고, 그래? 튀었어요?"
서너 명의 눈동자가 한 번에 나를 향했다. 아저씨의 당황하고 머쓱한 표정을 보자 밑반찬을 만들겠다던 아빠가 떠올랐다. 튄 것 같기는 한데, 일할 때 신는 운동화라서 상관없었다. 괜찮다고 대답하려고 하다가 차라리 아니라고 할까……, 생각하는 중에 아저씨가 한 번 더 물었다.
"학생, 침 튀었냐고. 왜 대답을 안 해?"
이상하게 입이 바로 떨어지지 않았다. 생각이 너무 많아져서, 오히려 아무런 생각도 못 하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사실 기분이 나쁘긴 했다. 안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냥 아니요, 라고 대답하려고 입을 여는 순간 아저씨는 뒤를 돌며 말했다.
"왜 사람을 빤히 쳐다보고만 있어? 답답하네, 정말."
"요새 엠지인지 엠제트인지 하는 애들이 저러더라. 무슨 생각하는지 알 수가 없어."
다른 아저씨가 한 마디 거드는 것이 들렸다. 옆에 있던 함지가 내 팔을 잡으며 괜찮냐고 물었다. 잠깐 고민했을 뿐인데 왜 그러지? 엄마도, 아빠도, 고모도, 그리고 저 아저씨까지도 왜 나를 기다려주지 않지? 나도 나를 모르겠는데, 온통 나를 판단하려는 사람들뿐이었다. 나는 함지의 팔을 뿌리쳤다. 함지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가 빌려준 담배를 피우며 화난 듯 말했다.
"내가 한 마디 해줘?"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흡연 구역에서 각종 독한 담배 연기가 자욱하게 뿜어져 나왔다. 중학생 때, 나와 나눈 카톡을 캡처해서 SNS에 올린 친구들이 생각났다. 아이돌 이야기를 하다가 생긴 사소한 다툼일 뿐이었는데, 한 친구가 내 의견을 박제하겠다며 자신의 SNS에 올렸다. 하룻밤 사이 나를 모르는 친구뿐만 아니라, 그 아이돌의 팬까지 몰려와서 나에 대한 댓글을 달았다. 우리끼리 한 말이니 삭제해달라고 부탁해도 친구는 삭제하지 않았다. 그중, 어떤 사람이 '친구끼리 한 대화 같은데 왜 이렇게 몰려와서 욕하는지 모르겠네. 그냥 지나가세요.'하는 댓글을 달았다. 나는 가끔 그 댓글을 단 사람은 어떤 사람일지 궁금했다. 함지 같은 사람이었을까. 처음엔 그 댓글이 조금은 고마웠지만, 곧 누군가가 '당사자세요?ㅋㅋ'하고 답 댓글을 달아 다시 조롱했다. 그때는 친구와도 멀어지고 은근한 따돌림을 당해 힘든 시간이었다. 지금까지 그 게시물을 기억하는 사람은 오로지 나밖에 없겠구나 싶다. 다행히 고등학생 때 팬데믹이 터져, 얼굴을 가리고 학교에 다닐 수 있었고 친구들과 거리두기를 해야 했다. 가끔 나는 그때가 훨씬 편했던 것 같았다. 그리울 정도로.
쌀쌀해진 봄날의 새벽 공기에 연기를 내뿜는 사람들의 숨이 하얗게 피어올랐다. 담배를 다 피운 아저씨들은 무리 지어 센터로 돌아갔다. 조끼 색깔을 보니 반대편 구역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함지의 조끼도 그들과 같은 색깔이었다.
"너 상하차야?"
함지는 인상을 쓴 채로 연기를 내뱉으며 어, 하고 대답했다.
"상하차가 시급이 더 세."
그런데 밥을 안 먹냐…… 그런 말을 삼키는데 함지가 재떨이에 꽁초를 버리며 말했다.
"김초. 네가 어떤 마음으로 도망쳤는지는 알겠는데, 동아리 다시 나와. 괜찮으니까. 응? 솔직히 동아리 기수 인원이 부족해서 그런 것도 있지만, 그냥 네가 안타까워서 그래."
어깨를 툭툭 치며 먼저 센터로 들어가는 함지의 뒷모습을 보다가, 따라서 센터로 들어갔다. 내가 그러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었는데. 네가 나에 대해서 뭘 얼마나 안다고. 순간 울컥 울분이 올라왔다.
다음 타임에 일하는 동안, 소팅 로봇에게 대신 속으로 말을 걸었다. 네가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삑. 로봇은 대답이 없었다. 그냥 내가 물품을 스캔하면 스캔하는 대로, 물품을 올리면 올리는 대로 자신의 일을 했다. 너는 아무것도 몰라. 삑. 그러다 나는 슬며시 웃었던 것 같다. 그래, 너는 아무것도 몰라.
"야악!"
센터로부터 얼마나 도망 왔을까. 함지는 참 끈질겼다. 교육받느라 상하차 일은 절반만 했다고 쳐도, 체대생은 밥 안 먹고 이렇게나 뛸 수 있구나. 함지는 지쳐서 거의 쓰러질 듯 터덜거리면서 뛰는 내 팔을 잡았다. 헉, 헉, 헉, 숨이 찼다. 나는 함지에게 붙잡힌 채로 허리를 숙이고 헛구역질을 해대면서 숨을 몰아쉬었다. 함지도 나 정도는 아니었지만, 얼굴이 땀으로 젖은 채로 헉헉댔다. 함지는 무언가 말하려고 침을 삼키고 숨을 골랐다. 나는 함지가 할 말을 알 것 같았다. 왜 도망쳤냐고 물을 거지? 아까 삼켰던 울분이 다시 올라왔다.
"나도 몰라. 나도 내가 답답해."
숨과 숨 사이로 말을 뱉었다. 함지가 나를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나 좀 그냥 두면 안 돼? 너무 벅차. 쫓아가는 게 너무 벅차다고."
눈물이 비집고 흘러나왔다. 헉, 헉, 하던 숨소리가 흑, 흑, 하고 바뀌면서, 울음 때문에 딸꾹질이 나오기 시작했다. 악을 써서 소리를 질렀다. 그래도 딸꾹질은 멈추지 않았다. 그때 함지가 내 팔뚝을 잡아끌었다. 나는 고개를 들고 함지의 얼굴을 보았다. 입술을 바들바들 떨고,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화가 난 듯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바보야, 그게 아니라……!"
함지가 말하다가 입이 말랐는지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러고 보니, 함지도 조끼를 입고 있지 않았다.
아까 로봇에게 말을 걸고 슬며시 웃었을 때, 상하차 존에서 누군가가 사람이 쓰러졌다고 외쳤다. 나는 순간적으로 함지면 어떡하지, 생각했다.
"여기 사람 쓰러졌다고요!"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상하차 쪽을 바라봤다. 남자 한 명이 쓰러진 채 거품을 물고 발작하는 모습이 작게 보였다. 누군가의 비명이 들렸다. 물품을 스캔해주세요. 소팅 로봇이 다가와 대기 중이었다. 상하차 쪽 관리자가 쓰러진 사람을 향해 뛰어갔다. 상태를 확인하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고, 근로자 중 한 명이 심폐소생술을 시행했다. 물품을 스캔해주세요. 나는 나도 모르게 팔을 들어 물품 하나를 스캔하고 로봇에 올렸다. 그리고 퍼뜩 놀라 로봇을 보았다. 물품을 받은 로봇은 노선을 따라 이동하더니 심폐소생술을 받는 사람 앞 팔레트에 툭, 배달했다. 물품을 스캔해주세요. 어느덧 다른 로봇이 와서 기다렸다. 우리 구역 관리자가 애써 태연한 목소리로 손뼉을 뻑뻑 치면서 말했다.
"일단 스캔은 계속 해주세요!"
옆에서 훌쩍거리며 우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울면서 일을 계속하는 중이었다. 로봇은 멈추지 않았다. 물품을 스캔해주세요. 나는 주위의 눈치를 살피며 박스를 들어 스캔하고 로봇에 올렸다. 고개를 들자, 멸치 타는 연기로 자욱한 부엌 바닥에서 아빠 심폐소생술을 하던 내 모습이 보였다. 도와주세요, 힘 빠져요! 근로자가 외쳤고, 관리자가 옆에서 대기하다가 바로 바꿔서 같은 자세로 동작을 시행했다. 나도 저렇게 했을까? 물품을 스캔해주세요. 나는 손에 힘이 빠져 물품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도와주세요! 심폐소생술을 하던 사람이 다시 외쳤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계속해! 나는 떨어진 물품을 주우려 손을 허우적댔다. 잡히지 않았다. 물품을 스캔해주세요.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여기요! 빨리! 그때 손에 배송 물품이 잡혔다. 나는 기계적으로 바코드를 스캔하고 로봇에 물품을 올렸다. 로봇은 입력된 노선을 따라 전진했다. 응급차에서 내린 대원들이 뛰어 들어오고 센터가 더 소란스러워진 사이, 내게서 출발한 로봇이 함지 앞 팔레트에 툭, 하고 물품을 내리는 것을 보았다. 함지는 멍하니 쓰러진 사람이 응급차에 실리는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어 숨이 찼다. 나를 보진 않았겠지? 돌아본 함지와 눈이 마주쳤을 때, 물품을 스캔해주세요, 다시 다가온 로봇의 음성이 들렸다. 그 음성에 내 목에 매여있던 보이지 않는 끈이 당겨진 것 같았다. 이곳을 벗어나. 뒤에서 관리자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저기요. 어디 가세요!"
도망쳐. 태연하게 걸어 나오던 나는 그 순간부터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뒤에서 응급차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밝게 조명이 켜진 물류센터를 뒤로하고 어둑한 바깥으로 향했다. 응급차는 바람을 몰고 빠르게 나를 지나쳐나갔다. 먼저 차도로 달려 나간 응급차가 순식간에 작아졌다. 나는 그걸 쫓는 듯이 달렸다. 계속 달렸다. 작아지고 싶었다. 없어지고 싶었다. 도저히 더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이제 달리기 때문이 아니라 울음으로 숨을 헐떡였다. 함지는 무어라 말하려다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피하더니 내 팔뚝을 놔주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너 따라 나온 거야. 무서워서……"
어느새 사위는 더 밝아져 함지의 얼굴이 똑바로 보였다. 바람이 불자 땀과 눈물이 함께 식으면서 소름이 끼쳤다. 우리는 세상이 멈춘 듯이 이차선도로의 한가운데에 가만히 서서 서로의 숨소리가 진정되는 것을 들었다. 멀리서 차 소리가 들리고 곧 우리 앞에서 빵, 경적을 울릴 때까지 그러고 있었다. 센터에서 나온 택배 트럭이었다.
"비켜, 이씨!"
트럭은 우리가 비키지 않자 빠아아앙, 경적을 길게 울리며 창문을 열어 욕을 했다. 나와 함지는 주춤거리며 길가로 피했다. 다리에 힘이 풀릴 것 같아서 함지를 붙들고 비틀비틀 걸었다. 지나간 택배 트럭을 시작으로 다른 택배 트럭이 줄을 이었다. 아까 있었던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새벽 배송은 출발했다. 함지가 쉰 목소리로 물었다.
"너 유니폼은?"
"오다가 버렸어."
함지는 땀이 식으며 소름이 끼쳤는지 살짝 떨었다.
"나도."
우리는 땀과 눈물 때문에 축축해진 얼굴로 멍하니 서 있었다. 어떡하지. 캐비닛에 지갑이랑 가방 다 있는데. 우리는 돌아가야 했다. 무단이탈이라고 알바 매니저에게 깨지겠지. 가다가 유니폼도 다시 줍고, 시급은 못 받으려나…… 지나가는 택배 트럭이 많아 매캐한 매연 냄새가 났다. 함지가 내 팔을 꼭 쥐었다. 돌아가야 하는데 발이 안 떨어졌다. 길가 옆 가로수에서 새 소리가 들렸다. 봄날의 아침을 알리듯 새가 울었다.
<당선소감>
"오래 살아남는 소설가가 되게 해주세요"
촛불을 불 때, 뜨는 해와 지는 해를 볼 때, 유난히 밝은 달을 마주쳤을 때, '등단하게 해주세요'라는 소원을 빌어왔다. 간절한 적도 있었는데 셀 수 없이 낙선을 겪으며 점점 중얼거리는 주문으로 변질되었다. 각별한 문우이자 우체국 동반자 효정에게 "이번에 당선되면 소감 첫 문장은 '신춘문예가 정말 싫습니다' 라고 할 거야" 말했다. '이 짓'을 그만하고 싶었다. 하지만 보시다시피 첫 문장에 그렇게는 못 썼다. 당선 전화를 받고 손이 떨리도록 기뻤기 때문이다. 행복해하는 엄마, 아빠의 얼굴에 뿌듯했다. 자기 일처럼 좋아하는 친구들에게 고마웠다. 존경하는 스승님께 소식을 전하며 멋쩍게 웃었고, 축하한다는 음성에 마음이 벅찼다. 현실인지 꿈인지 얼떨떨했다. 그래도 하루하루는 갔다. 터질 것 같던 심장도 잠을 설치던 밤도 지나갔다. 촛불을 불 듯 반짝이었다. 뜨는 해와 지는 해, 유난히 밝은 달을 멈춰 서서 바라보다 이내 발걸음을 옮기듯.
같은 소원을 가진 이들이 이 글을 어떤 마음으로 읽을지 잘 안다. 지난 오 년간, 나는 12월마다 투고 후에 예심 기사가 뜰까, 하루에 몇 번씩 신춘문예를 검색했고, 크리스마스 전까지 차가운 손으로 전화를 기다렸으며, 체념 후에는 조용히 울었고, 새해 첫날 새벽부터 어떤 사람이 등단했는지 확인하려고 눈에 불을 켜고 기사를 새로고침했다. 그렇게 매달렸는데 당선 후에는 몇 사람에게 "신춘문예가 뭐야?"라는 질문을 들었다. 이건 우리만의 리그다. 앞으로 당선자와 낙선자가 할 일은 다르지 않다. 계속 글을 읽고 쓰면 된다. 이 생각은 그동안 낙선되었을 때마다 나와 효정, 민주가 서로를 위로하던 것이다.
새해 첫날에 읽은 신춘문예 작품이 좋았던 적이 거의 없었다. 분노와 좌절, 질투심이 작품 보는 눈을 가려버렸다. 하지만 가을쯤, 다시 읽은 작품은 대다수가 좋았다. 이제 내 소설이 심판대에 올랐다. 너무 떨린다. 신춘문예…… 역시 싫다. 그래도 내 소설을 뽑아준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호버링' 속 모든 인물이 건강하게, 오래 살았으면 좋겠다. 행복은 말할 것도 없다.
사랑하는 가족, 윤담 정희 은솔 다솔, 건강하자. 단국대 문예창작과 문우들과 교수님께 감사합니다. 하옥단문, 녕별빵, 개굴(다현), 수연어, 루미언니, 나는 딱 내 친구들만큼만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이제 반짝하는 순간에 이렇게 빌 것이다. 오래 살아남는 소설가가 되게 해주세요. 이건 내 새로운 주문이다.
● 1996년 대전 출생 ● 단국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 수료
<심사평>
"인간의 취약성과 사회구조적 취약성을 집요하게 응시하려는 작품들 인상적"
올해 한국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에는 '아픈' 사람의 이야기, 그리고 그들을 돌보는 이들의 이야기를 소재로 다루는 작품들이 다수 응모되었다. 살아있는 존재와 시대의 고통을 정밀하게 들여다보는 역할을 여전히 소설이 해낼 수 있다고 본다면, 지금은 그 고통을 추상적 관념이 아닌 인간의 몸과 경험을 통해 구현하고자 하는 기대가 소설에 부여되고 있었다. 승리와 영광만을 조명하는 시대에 삶이 안기는 통증, 열패감, 좌절 등을 외면하지 않고 인간의 취약성과 오늘날 사회의 구조적 취약성을 집요하게 응시하려는 응모자들의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한편 언급한 문제의식을 전하기 위해 '나와 너'의 관계로 세계가 과도하게 수렴되는 경향이 읽히는 상황은 또 다른 진단이 필요해 보인다. 소설의 범위와 가능성에 대해 깊이 있는 질문을 던져야 할 시기임을 이번 응모작들이 말해주고 있는 듯하다.
본심에서는 총 여섯 편의 작품이 집중적으로 논의되었다. '벼랑 아래에서'와 '카운트다운'은 모두 세련된 문체로 이야기를 맵시 있게 푸는 역량을 보유했지만, 하나의 단편소설이 내세울 수 있는 고유한 매력은 덜해 먼저 내려놓게 된 작품들이다. 그 이야기가 왜 '소설'로 전달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설득력을 갖춰야 한다는 점이 중요했다. '벽지를 뜯어내는 겨울'은 인물들이 내보이는 균열을 함부로 헤집지 않아 미더웠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조성된 서사적 안온함이 자칫 신인에게 기대되는 열도를 드러내지 못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여지가 있었다. '동굴에서 살아남기'는 비밀처럼 감추어진 누군가의 역사가 형상화되는 방식의 흡입력이 상당했으나, 이야기의 규모에 비해 그 끝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는 판단이 들었다. '멍청이들'은 인물들의 대화가 리드미컬하게 이어지는 가운데 읽는 이들의 여러 감정을 다양한 각도로 건드리는 작품이어서 매력적이었지만, 이야기의 도착 지점이 출발 지점에 비해 한 발짝 더 나아가지 못한 듯 보였다.
당선작 '호버링'은 새벽 배송 센터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청년의 이야기를 다루지만, 소설의 관심은 그 노동의 재현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 소설은 생의 순간마다 도망을 선택해 온 아버지의 방식으로부터 마냥 자유로울 수 없는 청년 세대가 자신의 선택을 어떻게 성찰하고, 나아가 그것을 '도망'이 아닌 '정지 비행'을 뜻하는 삶의 기술 곧 '호버링'으로 전환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삶의 세부를 섬세하게 포착하면서도, 선택의 갈림길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일들이 생동감 있게 펼쳐졌다. 자신의 몸으로 어떻게든 움직이려는 인간의 시도, 바로 거기에 미시적(小)이라고 여겨졌던 곳으로부터 떠오르는 이야기(說)의 힘이 있었다. 당선자에게는 축하를, 응모자들에겐 다음을 위한 응원을 보낸다.
심사위원 : 손보미, 양경언, 이서수, 조연정, 최민석
<AI와 함께하는 작품 분석>
1) 작품 한 줄 핵심
“도망치는 몸”으로 살아온 화자가, ‘도망’이 아니라 ‘정지비행(호버링)’이라는 삶의 기술로 자기 움직임을 다시 정의하려는 이야기다. 새벽배송 센터(로봇/관리/속도)와 가족사(이혼/응급/침묵)가 겹치며, 화자는 “움직이면 죄책감이 따라오고, 멈추면 불안이 덮치는” 상태에서 간신히 공중에 떠 있는 법을 배운다.
2) 전체 구조 분석: “달리기 서사”의 뼈대
이 소설은 ‘달리기’를 **현재 서사(도주)**의 엔진으로 삼고, 달리는 동안 **과거 기억(영사기처럼 재생)**이 끼어드는 방식으로 구성된다.
- 현재 1: 새벽배송 센터에서 도망치는 ‘나’ / 함지가 추격
- 과거 1: 어린 시절 공원(아빠의 도주, 아코디언) → ‘숨’ 이미지의 원형
- 현재 2: 셔틀버스/센터 노동(스캔존·상하차·로봇 음성)
- 과거 2: 드론 동아리(호버링 개념) + 드론 사고 후 도주
- 과거 3: 엄마의 이혼(모빌 목에 감김/끈/회전)
- 과거 4: 아빠 심정지(CPR, 유튜브, ‘기계처럼’ 반복)
- 현재 3: 센터 응급상황(발작/CPR) + “스캔은 계속”
- 현재 결말: 도로 한가운데 멈춤(세상은 계속 출발) / 돌아가야 하지만 발이 안 떨어짐
즉, “달아남→붙잡힘→멈춤”으로 끝나는데, 이 멈춤은 패배가 아니라 호버링의 전 단계처럼 놓인다. (추락도 도주도 아닌, “일단 떠 있기”)
3) 제목 「호버링」이 작품 전체를 통제하는 방식
소설은 ‘호버링’을 드론 기술로 설명하면서, 곧장 인간의 생존 기술로 확장한다.
- 드론의 호버링 = 움직이기 전에 먼저 ‘가만히 떠 있는’ 능력
- 화자의 삶 = “도망”과 “추락(붕괴)” 사이에서 멈춰 떠 있을 능력이 부족했던 상태
- 결말의 정지(도로 한가운데 멈춤) = 아직 비행은 못 하지만, 최소한 기계적 노동의 노선에서 이탈한 뒤 자기 숨을 듣는 순간
이 소설에서 “호버링”은 멋진 자유가 아니라, 무너지지 않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자세다.
4) 인물 분석: 두 사람의 ‘도주 방식’이 부딪히는 구조
1) 화자(김초/초림)
- 핵심 성향: 회피/동결(freeze)
- “대답을 못 하고 쳐다보기만” 하는 순간이 반복된다.
- 이는 무능이 아니라, 판단·비난·강요가 몰려올 때 몸이 멈춰버리는 생존 반응이다.
- 핵심 감각: 숨/끈/기계적 반복
- 숨은 늘 “헉헉”으로 표시되고, 끈은 모빌·목줄·붙잡힘으로 변주된다.
- 기계적 반복은 CPR/스캔존/로봇 음성으로 계속 겹친다.
2) 함지(함지아)
- 겉모습은 “추노꾼”처럼 쫓는 자인데, 실은 불안을 ‘행동’으로 처리하는 사람이다.
- “찾아낸다”는 선언은 폭력처럼 들리지만, 결말에서 함지는 털어놓는다:
- “무서워서… 너 따라 나온 거야.”
→ 함지는 ‘추격자’가 아니라, 자기 공포를 견디기 위해 붙잡는 방식으로 생존하는 인물이다.
- “무서워서… 너 따라 나온 거야.”
둘은 반대처럼 보여도 공통점이 있다.
둘 다 무서워서 움직인다. 다만 한 사람은 숨고(회피), 한 사람은 들이받는다(추격).
5) 핵심 상징·장치 6개 (이 작품을 “한 번에” 잡는 열쇠)
(1) 아코디언 = “폐”의 이미지 / 연결되고 싶지만 연결되지 못하는 몸
첫 장면에서 화자는 자신의 폐를 아코디언에 겹친다.
아코디언은 “접혔다 펴지며 소리를 내는 폐”인데, 화자는 달리며 스스로를 **“구멍 난 악기”**라고 느낀다.
→ “나는 사람들과 이어질 수 없는 고장난 개체”라는 자기 진술이, 이후 모든 회피의 정서적 뿌리가 된다.
(2) 드론 = “떠 있음”의 욕망
화자는 “늘 땅이 나를 끌어당긴다”고 느낀다.
그런데 드론은 버튼 하나로 **공중에 ‘정지’**할 수 있다.
→ 화자가 드론에 끌리는 이유는 ‘비행’이 아니라 정지비행의 안정감 때문이다.
(3) 모빌(아기 침대 장난감) = 목을 조르는 “보이지 않는 끈”
엄마가 말해주는 과거는 거의 공포 서사다:
모빌의 끈이 목에 감기고, 자동으로 돌아가며, “개처럼 끌려가는 꿈”으로 이어진다.
→ 이 끈은 작품 전체에서 **‘사회/가족/노동의 끈’**으로 변형된다.
(로봇의 노선, 관리자의 명령, ‘기다려!’라는 추격, “대답해”라는 압박)
(4) CPR(심폐소생술) = “살려야 하는 반복”과 “살리면서 드는 죄책감”
아빠 쓰러짐 장면에서 중요한 건, 화자가 CPR을 하며 **“도망가고 싶다”**고 느끼지만 반복을 멈출 수 없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 “살리는 행위조차 죄책감을 남기는 세계”가 형성된다. 이 감정은 센터 응급상황에서 폭발한다.
(5) 소팅 로봇 음성 “물품을 스캔해주세요” = 구조의 무감각
이 문장은 사실상 작품의 **합창(코러스)**이다.
사람이 쓰러져도, 울어도, CPR을 해도, 로봇은 같은 문장을 반복한다.
관리자의 “스캔은 계속”은 로봇 음성과 의미가 같아진다.
→ 사회구조의 핵심은 “잔혹”이 아니라 무감각한 지속으로 묘사된다.
(6) 도로 한가운데 ‘정지’ = 호버링의 인간 버전(아직 불완전한)
결말에서 둘은 도로 한가운데 서 있다가 경적에 밀려난다.
새벽배송 트럭은 줄지어 출발한다.
→ 세계는 출발하고, 개인은 멈춘다.
이 장면은 패배가 아니라, “이 노선에서 잠깐이라도 벗어나 숨을 고르는” 정지비행의 순간이다.
6) 장면별 부분 분석 (중요 구간 클로즈 리딩)
A. “도망”의 원형: 아빠와 공원, 담배와 아코디언
아빠는 싸우기 싫어서 아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온다.
즉, 화자는 아주 일찍 **도망이 ‘가족의 방식’**임을 몸으로 배운다.
아코디언 연주를 보며 화자는 공기의 흐름(숨의 이동)을 상상하고, 인간들이 맞물린 자동 모빌처럼 보았다고 말한다.
→ “사람들이 서로 연결되어 돌아간다”는 세계관이 여기서 생기지만, 화자는 곧장 자신을 “고장난 악기”로 규정하며 연결에서 탈락한 자아를 만든다.
B. 함지의 추격: “기다려!”는 폭력인가 구원인가
함지의 “기다려!”는 겉으로는 폭력적 추격이지만, 화자에게는 다른 의미다.
화자는 기다려주는 사람이 없었던 경험(고모, 엄마, 아저씨의 재촉) 속에서, ‘기다려’조차 통제의 언어로 듣는다.
그래서 함지의 에너지는 “살려주는 힘”이 아니라 “나를 더 빨리 무너뜨리는 힘”처럼 느껴진다.
C. 드론 사고 후 도주: “실수”보다 더 큰 공포는 ‘관계’
드론이 깨졌을 때 화자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실수임을 알지만, 더 무서운 건 돈이 아니다.
함지가 “괜찮아”라고 말해도, 화자는 관계를 통과하는 대화/책임/설명을 감당하지 못해 달아난다.
→ 이 소설의 회피는 “책임 회피”가 아니라 관계의 압력 회피다.
D. 새벽배송 센터: 성별 분업 + 로봇 + 관리자의 고함
스캔존(주로 여성)과 상하차(주로 남성), 그 사이 로봇 구역.
여기서 “여성의 나긋한 음성”과 “관리자의 고함”은 톤만 다를 뿐 의미가 같다고 서술된다.
→ 권력은 목소리의 성별/톤을 바꿔도, 결국 속도와 생산을 강제한다.
화자는 “로봇의 감정 없음이 편하다”고 말한다.
그건 편안함이라기보다 상호작용을 요구하지 않는 세계(판단·비난·기다림이 없는 세계)로 숨고 싶은 욕망이다.
E. 엄마의 이혼과 모빌: ‘회피형’의 유전이 아니라 ‘환경의 학습’
엄마는 아빠를 회피형이라 비난하지만, 자신도 도망간다.
아빠는 이혼 날까지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
→ 소설은 누가 더 나쁜지 판결하지 않는다. 대신 “도망”이 가족 전체의 언어가 된 상황을 보여준다.
모빌 사건은 결정적이다: 보이지 않는 끈이 목을 조르는 기억이, 화자의 악몽이 된다.
이후 화자는 “보이지 않는 끈이 당겨진 것 같았다”고 말하며 현재의 센터 도주로 연결한다.
F. 아빠 심정지와 CPR: “반복 노동”의 원형 장면
화자는 CPR을 유튜브/대원의 안내에 따라 수행한다.
여기서 인간은 로봇처럼 반복을 수행한다.
그 와중에 유튜브가 자동재생으로 요리 영상으로 넘어가는 장면이 중요하다.
→ 생사의 경계에서도 세계는 밝은 콘텐츠를 틀며 아무 일 없듯 흐른다.
이 무감각한 ‘자동 재생’의 세계가, 뒤의 ‘로봇의 반복 음성’과 정확히 겹친다.
G. 센터 응급상황: 소설의 정점(윤리의 붕괴가 아니라 감각의 붕괴)
사람이 발작하고 CPR이 시작되는데도,
- 로봇은 “스캔해주세요”를 반복하고
- 관리자는 “스캔은 계속”을 말한다.
화자는 공포 속에서 자기도 모르게 스캔을 계속한다.
이때 핵심은 “비정하다”가 아니라, 몸이 시스템의 리듬을 따라가 버리는 공포다.
그리고 그 장면이 아빠 CPR 기억과 겹치며, 화자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뛰쳐나간다.
→ 도주는 이기심이 아니라 감각적 붕괴로부터의 탈출이다.
H. 결말: 함지의 고백과 ‘정지’
함지는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무서워서…”라고 말한다.
추격자도 사실은 공포에 쫓기는 사람이었다는 고백.
둘이 도로 한가운데 멈춰 숨을 가라앉히는 순간은, 작품이 제시하는 아주 작은 해결이다.
세상은 트럭을 보내며 계속 굴러가지만, 둘은 잠깐이라도 자기 숨을 듣는다.
→ “도망”이 “호버링”으로 바뀔 수 있는 유일한 출발점은, 결국 숨을 회복하는 멈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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