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문화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작] 문학을 초과하는 언어로서, 음악<김기태 론 1)> / 오웅진

<당선작>
문학을 초과하는 언어로서, 음악<김기태 론 1)> / 오웅진
이소라와 이은미의 히트곡 후렴구의 등장이 유독 반가운 까닭은
그 문장이 우리에게 이미 익숙하기 때문이다.
퀸의 히트곡 인트로와 함께 고조되어 세종대로 좌우로 도열한 빌딩에서
환호성과 장미 꽃잎이 터지기까지, 점층적으로 달아오르는 해당 트랜지션 속에서
우리는 영웅에게 기대지 않고 세상을 구할 방도가 있다고 낙관하는 소설가의 연출을 본다.
실제로 그 어원이 그러하듯 아마추어는 미숙함의 대명사가 아닌,
무언가를 깊이 사랑하는 애호가의 속칭이다.
그리고 택시 라디오에서 한때 수도 없이 반복해서 듣던 발라드 애창곡을
우연히 듣게 되는 순간과 같이 진정 음악에 감화되는 상황 역시 덜컥 찾아온다.
이처럼 음악은 들려오는 것이다.
인류 보편을 아우르는 거대한 언어를 상상하는 것은 꽤 신나는 일이다.
단순히 나와 다른 피부색의 누군가와 통신할 수 있다는 설렘을 넘어,
범지구적인 영역에 걸쳐 유효할 만큼 매력적이고 멋진 ‘아름다움’이
실재한다는, 반증이기도 하니까.
공통선은 어렵지 않다. 어렵다면 어쩌면 그것은 선(善)에서 요원한 것일지도 모른다.
모두가 널리 공유하는 것들 가운데서 희망을 찾자.
1. 노래하는 속인들의 픽션
어느 인터뷰에서 소설가의 한 단편을 두고 질문한다. 소설에 대중가요의 노랫말이 어찌 그리 인용되는 것인지. 소설가가 되묻는다. 고다르를 인용하는 건 자연스럽고 대중가요를 인용하는 것은 문학적이지 않으냐고.2) 영화지라는 매체를 참작한 나름의 유머였는지, 정말로 누벨바그 감독이 대중가요의 카운터파트라고 생각한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건 김기태의 소설에서 대중가요가 독특한 지위를 갖는다는 점이다. 그것들은 소설 중간에 한 구절씩 툭, 자주 등장한다. 이 세계에서 음악은 크게 두 가지를 증언한다. 우선은 비물질로서 세계에 실재하는 무언가 있다는 사실에 대한 증언이고, 다른 하나는 성문화될 수 없는 언어의 무한한 확장성에 대한 증언이 그것이다. 실제로 음악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인간 사이를 유영한다. 때로는 에어팟 안쪽에서 내파의 방식으로, 때로는 추운 겨울 국회의사당 앞에서 떼창으로 불리는 외파의 방식으로.
그리고 김기태 소설은 지금, 여기에서 노래하는 이들을 살핀다. 그리고 이것은 그가 다수의 작품에서 취하는 전략과 교묘하게 연결된다. 그는 소설에서 화자가 얼마나 ‘보통 사람’인지 묘사하는 데 최선을 다한다. 이러한 제반 작업을 통해 그가 문학에서 이루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누구를 향해 문학을 던지는 것이며 그의 문학에 닿아 독자는 무엇을 확인하는가. 오늘날 우리 문학이 구사하는 전략을 성찰할 적에 단연 논의되어야 하는 지점이 있다면 인물이 처한 상황이다. 대체로 그들은 결여되어 있다. 그것이 그들을 입 열게 한다. 더 정확히는 결여된 자의 음색으로 발화하게 한다. 하여 그들은 어떤 크고 작은 사건의 피해자이거나, 혹은 한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과거를 짊어지고 독자 앞에 선다. 때로는 그 인물이 얼마나 적당한 깊이로 잠겨 있는지가 고스란히 작품의 문학적 깊이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기준에 따르자면 김기태가 구사하는 글은 문학이 아니다. 그의 소설 속 인물들은 잠겨 있지 않다. 간혹 잠긴 것처럼 보이는 이에게 말을 걸어도 그들은 바짝 마른 목소리로 답한다. 자신들의 부침을 연민하지 않는다. 그들은 아무것도 연민하지 않는다. 그저 노래할 뿐이다.
2. ‘보통 사람’들의 문학적 ‘떼창’
“주인공 역을 맡았던 선배는 그날 밤 노래방에서 〈연극이 끝난 후〉라는 곡을 예약했다. 경제학을 전공하는 회장이 익살스럽게 말했다.
“이 노래는 공공재니까 독점 금지다.”
그는 처음 듣는 노래였는데 모두가 곧잘 따라 불렀다. 무언가를 가져보기 전에 도둑맞는 게 가능한지 생각했다.” (「전조등」, 84쪽)
소설 「전조등」의 주인공은 전형적인 속인이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 야간 자율 학습에 빠지지 않고 공부하여 서울 중상위권 대학 통계학과에 진학한다. 연극부는 그가 대학에 진학하여 스무 살 처음으로 가입한 동아리였다. 그에게 연극은 입학 직후의 설렘과 잉여 시간을 투자할 정도의, 예술보다는 ‘활동’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 소설에 따르면 연극은 졸업한 이후로도 끝나지 않는다. 그가 분(扮)한 보통 사람 역할이 작은 군청색 고무신으로 벗겨질 뻔도 했지만, 극의 흐름을 방해할 수준은 아니었다.
이쯤에서 앞서 선배가 던진 말을 다시 떠올린다. “이 노래는 공공재니까 독점 금지다.” ‘보통 사람’이 다분히 연극적인 노력에 근거해야 유지할 수 있는 설정이라면 선배의 말은 다소 의미심장하다. 실제로 보통 사람들에게 대중가요의 노랫말이 가장 모범적인 공통선(the common good)이라면, 문학이 그것을 외면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것은 경전의 어떤 구절보다 우리 삶에 가깝고, 심지어 따라 부르기도 쉽다.
“세상은 어제와 같고 시간은 흐르고 있고 나만 혼자 이렇게…” (「롤링 선더 러브」, 42쪽)
“그 사람 나만 볼 수 있어요. 내 눈에만 보여요오오오오.” (「롤링 선더 러브」, 60쪽)
「롤링 선더 러브」의 주인공 맹희는 연애 프로그램 〈솔로농장〉에 출연한다. “요새 노래”들처럼 “매가리 없는” 삶을 살아온 그녀로서 일생일대의 결심이었지만, 출연자들 가운데서 딱히 주목받지 못한다. 와중에 남자 출연진에게 집중하지 못하고, 그녀를 전담으로 찍는 PD에게 호감을 느낀다. 이소라 노래의 가사는 속마음 인터뷰 중 카메라 렌즈는 보지 않고 PD를 보는 맹희의 맹랑하고도 짠한 성격을 대변한다. 이처럼 음악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우리 삶 가까이에 있다. 김기태의 전략은 유쾌하다. 그러나 단순히 웃음만을 위한 전략은 아니다. 그의 이러한 인용은 저자의 문장이 어느 위상에 놓여야 하는지, 나아가 독자가 어떤 높이에서 글을 읽어야 하는지에 의문을 제기하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전통적으로 소설은 적당히 인물이 잠길 수 있는 홈을 파내고 그 안에 그를 담가 설정한다. 그리고 인물에게 이입하는 독자일수록 함께 내려앉아 종국에는 그와 위상을 나란히 하게 된다. 이러한 방식은 픽션 내의 생생한 경험을 전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유효하다. 다만 이때의 방식이 어떤 경험을 환원적으로 대리하는 체험관의 콘셉트와 닮아있다면 김기태의 스타일은 조금 다르다. 가령 이소라와 이은미의 히트곡 후렴구의 등장이 유독 반가운 까닭은 그 문장이 우리에게 이미 익숙하기 때문이다. 각자의 사연이 후렴구에 내재하며, 개인의 역사가 해당 구절을 더욱 두텁게 한다. 우리는 맹희의 이야기와 우리의 이야기를 적당히 안배한 그 중간지점 어딘가에서 문학을 감각한다. 이것이 김기태가 픽션을 구사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이것은 독자 개개인에게 웃음을 주는 설정을 넘어, 궁극적으로 진정한 의미에서 문학적 ‘떼창’을 가능케 한다.
이소라와 이은미의 가사는 맹희의 마음을 대변한다는 측면에서 맹희의 문장이기도 하지만, 친숙한 만큼 독자인 우리의 문장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는 “행위자와 제작자, 비평가와 관찰자가 동시에 서로 관여하고 참여하는” 측면에서 전통 미학과 구분되는 “일상 미학”의 전제 조건이기도 하다.3)
실제로 우리는 ‘떼창’을 할 때 하나 됨을 넘어서, 묘한 안도감을 느낀다. 그것은 함께 따라 부르지 못하는 이들을 배척하고 그들을 격리하는 데서 오는 우월감을 근거로 하지 않는다. 이때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주변과 어깨동무하고 하나로 일치된 목소리를 낸다. 일련의 미적 컨센서스(共通感)로서 합의된 노랫말에는 그런 힘이 있다. 합의된 노랫말이 없는 세계에는 머지않아 광기가 번진다. 칸트는 “광기의 유일한 일반적 증상은 공통감의 상실이며, 자기 자신만의 감각을 논리적으로 고집스럽게 우기는 것인데, 자신의 감각이 공통감을 대신한다”라고 이야기했다.4)
김기태의 문학에는 그런 광기에 사로잡힌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다. 광인을 소재로서도 제물로서도 봉헌하지 않으며, 그러므로 괜히 한가운데의 제단을 둘러싸고 광장의 사람들끼리 서로를 두리번거리며, 고개를 주억거리고 괴랄한 연대를 하는 그런 풍경도 보이지 않는다. 대신 사람들은 노래를 부른다. 김기태는 그렇게 이상한 방식으로 인간을 끌어안는다.
“Don’t stop me now..... Don’t stop me.....!”
딴 딴단단 딴딴. 딴 딴단단 딴딴. 사장이 가게 한 편의 피아노를 연주했고 모두가 어깨동무를 하고 합창했다. 돈 스톱 미 나우 (커즈 아임 해빙 어 굿타임)
돈 스톱 미 나우 (예스 아임 해빙 어 굿타임) 아돈워너스톱 앳 올. 다 함께 거리로 뛰쳐나갔고 노랫소리를 들은 이들이 찜닭집과 스터디 카페, 스크린 골프장에서 쏟아져 뒤를 따랐다. 세종대로 좌우로 도열한 고층 빌딩 창문이 열렸고 환호성 속에서 장미 꽃잎이 휘날렸다. 맹희는 군중에 섞여 행진했다.
퀸의 히트곡 인트로와 함께 고조되어 세종대로 좌우로 도열한 빌딩에서 환호성과 장미 꽃잎이 터지기까지, 점층적으로 달아오르는 해당 트랜지션 속에서 우리는 영웅에게 기대지 않고 세상을 구할 방도가 있다고 낙관하는 소설가의 연출을 본다.
3. 전기보다 거대한 세계 공통어가 있다면
그의 소설 속 인물들은 여간해서 가면을 벗지 않지만, 「일렉트릭 픽션」에서는 한 “사무 보조”가 전기의 도움을 받아 가면을 잠시 벗는다. 이 소설에서 사건이 발생하는 까닭은 소리가 ‘관통’하기 때문이다. 김기태는 작품을 통해 질문한다. 여기서의 소리가 무엇을 어떻게, 어디까지 관통할 수 있는지에 관하여. 이것은 일차적으로 자본주의가 자랑해 마지않는 콘크리트 벽이나 두꺼운 철문 등 각종 건설 자재를 가뿐히 지난다.
“기타 연주하는 분께. 이웃끼리 배려 부탁드립니다. 집에 아기가 있어요.”(124쪽)
누군가에겐 소음에 불과한 기타 연주를 작가는 어떤 가능성으로 확장한다. 정녕 문학적 탐색이다. 소리가 무언가를 넘나드는 성질로부터 김기태는 문학이 회복해야 할 세속성worldliness의 맹아를 본다.5) 이웃집에 기타 소리를 선사하는 이는 한 전기 회사의 “사무 보조”(117쪽), 즉 아마추어 기타리스트이다. 아마추어의 동작은 고도로 전문화된 자본주의 시장에서 대개 자신의 정체성을 미처 획정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몸짓으로 해석된다. 실제로 현대 사회는 어느 영역에서라도 기틀이 되고자 한다면 자격증을 요한다. 가령 의사 자격증 없이는 병원을 세울 수 없고, 누군가를 치료하고자 하는 호의마저 불법이 된다. 즉, 고도로 전문화된 사회에서 아마추어의 움직임은 자연스레 배회하는 몸짓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이 아마추어의 몸으로만 건널 수 있는 곳이 있으니, 바로 문이다.
“거실 한 편에 거치되어 있는 기타를 상상하며 퇴근 시간을 기다렸다. 그건 그가 ‘기쁨’보다도 더 오랫동안 발음하지 않은 단어, ‘사랑’을 떠올리게 했을지도 모른다.”(123쪽)
실제로 그 어원이 그러하듯 아마추어는 미숙함의 대명사가 아닌, 무언가를 깊이 사랑하는 애호가의 속칭이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더 이상 아마추어 음악가조차 되지 못한다.”6) 전문화된 세계에서 애호가의 지식은 늘 모자라고 그들은 ‘배경화’된다. 그러나 김기태는 이 애호가의 몸으로만 건널 수 있는 문이 있음을 주지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모든 문 앞에서 존재는 언제나 아마추어가 된다고 그는 말한다.
“문밖의 일은 문 안의 삶을 위하여 수행하는, 견디는 무엇이었다. 세상에는 반대로 사는 사람도 많았다.”(116쪽)
여기에서 단어 ‘문’은 앞서 언급한 집의 자재나, 한 부품으로서 ‘문’보다 좀 더 크다. 그리고 이 문을 넘나드는 기타 리프 선율은 앞선 대중가요에서 필수인 ‘가사’조차 두르지 않은, 최소한의 음악이다. 그것은 좀 더 비언어적이며 더 동물적이다. 사이드는 프루스트의 용어를 빌려 음악이 어느 정도로 문 안쪽까지 들어설 수 있는지 이야기한다. 프루스트는 선율(air de la chanson)이 있다고 말하면서, 이 문장의 배면에 흐르고 있는 가장 내밀한 활자는 그 누구와도 함께 열람할 수 없는 가장 고독한 작품이자 침묵의 자식(l’oeuvre de la solitude et les enfants du silence)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가장 사적이고 내밀한 자신만의 방에서 음계를 변주하는 일은 언어를 실천하는 것과 동일한 행동이 되어, 궁극적으로 음악과 문학이 완전히 동의어가 되는 것이다.
“그 신호는 손가락 근육을 움직여 기타의 여섯 현을 울렸고, 두 개의 마그네틱 픽업에 의해 다시 전기신호로 변환됐다. (…) 자신이 연주했다는 게 의심스러울 정도로 듣기 좋을 때도 있었다. 매력적인 성조와 강세를 가진 먼 외국의 언어로 말하는 기분이었다. 그 언어에는 그가 이름 붙일 수 없었기 때문에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감정들이 포함되어 있었다.”(122쪽)
전기신호의 도움을 받아 비로소 세계에 드러날 수 있는 언어가 있다는 걸 확인함으로써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김기태에 따르면 우선은 가장 수동적인 방식으로 시스템에 대한 해킹이고, 그것은 다시 낯선 방식의 민주화로 확장된다. 인물이 민주화와 같은 거룩한 숙제를 해결하고자 기타를 구매한 것은 아니다. 그는 그저 퇴근 후 “핀란드어를 배우듯” “화엄경을 필사하듯” 기타를 구매한 것이었다. 다만 성실하게 전기료를 납부하고 있었음에도 기타를 연주할 때면 왠지 전기를 훔치고 있는 기분을 그는 느꼈다고 고백한다. 이것이 한 전기 회사에 “사무 보조” 수준에서 실천할 수 있는 가장 능동적인 해킹이다. 그리고 전문화된 이들이 주도하는 세계에서 아마추어의 움직임은 어떻게든 전복의 씨앗으로 오역된다.
“저는 전기 기타를 좋아합니다. 가끔만 집에서 연주합니다. 9시 이후에는 안 하겠습니다. 불편함이 있으시면 505호에 메시지를 남겨주세요. 죄송합니다.”(125쪽)
배려를 부탁한다는 호소에 대한 답변이었고 주인공은 505호의 반응을 보며 이런 상상에 빠진다.
“배려와 무례가 섞인 문장들이 아주 조금 열어놓은 문. 그 틈으로 (…) 자우림처럼 “신도림역 안에서 스트립쇼를” 하는 기분으로 옷을 벗어 던지며 흥얼거린, 자신이 노래를 잘 부른다고 믿었던 이를 돌아본다. 지난 8년 동안 그런 식으로 잠깐 존재를 알렸던 사람들 말이다.”(125쪽)
아마추어의 연주로 발생한 ‘소음’이 이 빌라의 여러 문을 넘나든다. 이때 ‘소음’은 자크 아탈리의 시선을 통해 좀 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그는 서양 음악사의 전개를 ‘희생-재현-반복-구성’의 네 단계로 구분한다. 우선 ‘희생’은 앞서 언급한 ‘제물’로서의 음악과 연루된다. 만인이 공동체를 이루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쌓이는 노이즈나 불협화음을 음악이라는 희생양을 같이 감상하는 가운데서 함께 씻어내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이 ‘감상’을 전문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오디토리엄의 등장과 함께 ‘재현representing’이 찾아오고, 라디오나 축음기 등 매스 미디어의 출현과 함께 ‘반복repeating’이 일어난다. 그리고 김기태의 작품에서 등장하는 ‘소음’은 네 번째 단계 ‘구성’과 관련된다. 대체로 이 최종 단계에서 재구성되는 것은 ‘소음’이다. 이 지점에서 ‘어디까지를 소음으로 들을 것인지’에 관한 논의로, 태생적으로 소음인 것은 없으며 무엇이 소음 취급을 받는지에 관한 논의로 나아간다. 구성 단계에서 이르러 세계는 사운드 자체보다 그것이 어떻게 발생하고 제작되었는지 그것의 제작 기술에 주목한다. 이제 소리도 데이터라는 것이 되돌릴 수 없는 ‘사실’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기태의 「일렉트릭 픽션」은 고유의 사운드 제작 기술을 제시하는 것이다. 아마추어 기타리스트의 기타 리프가 그것이다. 그것은 전문화된 음악계에서는 취급하지 않는, 바깥으로부터 인입된 새로운 사운드 신디사이징이다.
엘리베이터에 붙어 있는 505호의 사과문 종이 아래에 주인공이 작게 ‘댓글’을 단다.
“저도 전기 기타를 좋아합니다.”(128쪽)
진정으로 사운드 아닌 성질의 무언가가 틈을 넘는 순간이다. 주인공은 501호에 산다. 그는 종이에 댓글을 달아 문장으로써, 문학으로써 음악을 구사하는 데 성공한다. 최유준은 근대성과 자본주의적 권력에 의해 망각되고 순치된 소음을 재구성하는 가운데서 세계의 집단적 나르시시즘을 치유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한다.7) 어떤 경우에도 자는 아기가 깨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비록 환영받지 못한 사운드일지라도 그것을 통해 연대의 가능성을 확인했다면 그것을 음악이라고 부르는 의식 또한 놓치지 않아야 한다.
4. 포함되지 않은 실재들의 노래
김기태의 또 다른 작품에서는 이 연대를 “친한 사이”(「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142쪽)라는 구체적인 호칭으로 달리 부른다. 그리고 역사 속에서 실재했던 이 “친한 사이”들이 한때 범지구적으로 제창하던 유행가 〈인터내셔널가〉를 소환한다. 그것은 한때 “국제주의와 사회주의를 대표하는” “빨갱이”(138쪽)의 곡이었지만 경기도 서남부의 한 빌라에선 그저 가쁜 리듬을 성실하게 제공하는 노동요일 뿐이다. 소설의 두 주인공 진주와 니콜라이는 그들이 속한 사회에서 적자(嫡子)가 아니다. 졸업 앨범에서도 그들은 “한끝과 다른 한 끝에”(116쪽) 서 있으며 그들을 달리 부르기 위해, 필요한 단어는 “사회적 배려대상자” “국내거소신고증” 같은 것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를 무겁게 연민하지 않음으로써 음악이 된다. 여기서 음악이란 블랑쇼가 문학이 지향해야 할 ‘관념’의 지대로서 제시한 예술로서의 그것이다.8) 그에 따르면 작곡자나 연주자가 음표나 악기를 통해 지시하는 것은 사물들이 사라져 가는 길이다. 즉 음악은 계속해서 ‘바깥’을 환기함으로써 문학이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하는, 언어로서 도달할 수 없는 곳에 대한 힌트를 제시한다. 실제로 오늘날 목격되는 대부분의 공동체는 바깥을 떠올리는 가운데서 작동하고, 더욱 구체화된다.
시인 말라르메가 동료 작곡가 바그너에게 그에 반(反)하는 내용으로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9) 특정을 위한 민족 공동체를 구축하려는 바그너를 향해 말라르메는 예술이 누구인 것도 아닌 형상, 혹은 장터 어디에서나 발견될 수 있는 익명의 인간들을 제시해야 한다고 전했다. 이것은 단순히 예술의 윤리에 관한 내용을 넘어서, 정치적 선언인데 구체적으로 어떤 이름‘들’을 두둔하기 때문이다. 소설에선 “세 다리로 서는 듯한 테이블” “정전을 계기로 앞집 부부와 치게 된 배드민턴” “아홉 시 넘어 벽 너머로 들려오는 리코더 소리” 등 비교적 긴 이름으로 그것들이 등장한다.
실제로 현실에서 음악은 대개 “밤 아홉 시 넘어 옆집에서 들려오는 아이의 리코더 소리”, 혹은 유튜브가 추천해 준 “4시간 51분 분량의 95개국 〈인터내셔널가〉 모음”(139쪽)처럼 바깥에서, 불현듯 들려온다. 그리고 택시 라디오에서 한때 수도 없이 반복해서 듣던 발라드 애창곡을 우연히 듣게 되는 순간과 같이 진정 음악에 감화되는 상황 역시 덜컥 찾아온다. 이처럼 음악은 들려오는 것이다. 이 동세를 근거로 음악은 문학이 추구해야 할 어떤 윤리가 된다. 이때의 윤리에 관해서는 랑시에르의 말을 빌린다. 그는 근대 픽션이 “도달해야 할 결말을 향해 곧게 뻗어 있는” 전통적 픽션과 다른 방식을 구사한다고 말한다.10) 근대의 픽션은 ‘가장자리’에 주목한다. ‘가장자리’는 기존 픽션 세계에서는 여백에 머물렀던 존재나 상황이 있는 곳이고 포함되지 않는 실재의 잔혹함을 픽션 스스로가 맞는 곳이다.
포함되지 않는 실재의 잔혹함. 진주와 니콜라이가 무엇에 대한 의인화인지 우리는 랑시에르의 표현을 빌려 답할 수 있다. 이는 동시에 앞서 언급한 소설 「전조등」의 주인공이 얼마나 픽션에 부합하는 인물인지 상기하게 한다. 그는 현실에서 조금도 가장자리의 인물이 아니라는 점에서 되레 허구적이다. 그리하여 다시 픽션이 된다.
귀에는 눈꺼풀이 없다.11) 그리하여 음악이 삶에서 여지없이 귀를 파고든다는 것을, 김기태는 적극 활용한다.
“오, 오오오, 오빤 강남스타일”(「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115쪽)
“기립하시오 당신도!”(135쪽)
정치란 픽션이다. 우선 실재보다 과장된 집단을 설정하는 단계를 거쳐, 그들의 권익을 위한 구호를 정하고, 그 구호의 울타리 안으로 이해득실을 따져 적당한 실수(實數)의 사람들이 들어서도록 만드는 것. 이 일련의 단계를 정치의 과정이라 본다면, 이 소설에서 대중가요의 가사나, “기립하시오 당신도!”라고 외치는 소녀 ‘짤’ 등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유행하는 각종 아이템의 인용은 꽤 곱씹어 볼 만한 장치이다. 실제로 우리에게 친숙한 유행의 등장은 우리를 들뜨게 한다. 더 이상 방관하지 않고 어떤 울타리 안으로 들어서게 만들며, 이때의 장력으로 우리 안에서는 자동으로 어떤 음악이 재생된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진주와 니콜라이, 단 두 사람만으로도 담백하고 가성비 좋게 인터내셔널을 소환하는 방식이다.
5. 무플러들의 음악으로서, 문학
네 음절짜리 제목의 연애 프로그램이나 케이팝의 가사,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의 ‘짤’이나 ‘드립’ 등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요소들을 볼 적에, 누구라도 김기태의 소설을 읽거든 으레 ‘통속’이나 ‘세태’, 혹은 ‘리얼리즘’과 같은 단어를 작품과 겹쳐보게 된다. 그러나 해당 관성에 떠밀리듯 그의 문학 지형을 파악하려는 태도는 다소 게으른 접근이다. 그의 문학은 차라리 어떤 언어 학습에 관한 소설로 읽는 것이 적합하다. 기본적으로 그는 지구를 관통하는, 단일의 육중한 링구아 프랑카가 엄존한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한다. 그것은 영어라는 현재의 공통어(common language)보다 커다랗고 과거 라틴어보다 오래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누구의 국어도 아니어서 어떤 민족이나 집단도 주변화하지 않는다.
“거칠지만 모두를 뒤덮을 만큼 커다란 손이, 이 조용한 동네의 골목과 골목 사이로 조금은 엉켰지만 분명 이어진 전깃줄들을 벼락처럼 울린다면, 전부를 감전시킬 일렉트릭한 멜로디를 연주한다면, 나는 비밀스럽게 웅엉거렸던 몇 개의 문장을 큰 소리로 발음해볼 작정이다. Hei Kaikki, 모두들 안녕하세요. Kiitos, 감사합니다. Pidan sinusta, 저는 당신이 좋아요” (「일렉트릭 픽션」, 128∼129쪽 )
그의 소설이 자꾸만 음악을 경유하거나, 그 언저리로 거듭 회귀하는 것처럼 보이는 건 결코 착각이 아니다. 음악은 세계에 비물질의 형식으로 무언가 실재한다는 걸 증거하는 가장 강력한 장르이다. 이것이 김기태가 생의 가까이에서 목격되는 음악을 기꺼이 집어 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세상에는 크게 두 종류의 댓글이 있다. “인생을 반도 안 산 사람에게 도태되었다는 표현을 하는”(「롤링 선더 러브」, 70쪽) 댓글과 “저도 전기 기타를 좋아합니다”(「일렉트릭 픽션」, 128쪽)라는 댓글이 그것이다. 그리고 더 많은 수의 무플러, 즉 아무런 댓글도 쓰지 않는 이들이 같은 네트워크 안에 있다. 활자화된 데이터만을 바탕으로 어떤 우주를 파악하려는 태도에는 비약이 있다. 무플러들은 아무런 발언을 하지 않으면서도 트래픽을 생성함으로써, 리듬과 패턴을 형성하는 데 관여한다. 이것이 김기태가 음악적인 수사에 기대어 문학을 말하는 또 다른 이유이다.
김기태의 문학이 외국어로 번역될 때 겪게 될 딜레마를 상상해 본다. 마치 영화 《기생충》에 등장하는 ‘짜파구리’를 라면과 우동을 조합해 만든 ‘람동’으로 표현한 한 번역가의 기지처럼, 언제나 근사한 대안을 찾아낼 테지만 앞서 그 딜레마가 어디서 기인하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문제는 김기태의 소설이 어떤 콩글리시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실제로 그것은 우리 국어를 기반으로 쓰여 있으나 언어의 지향은 세계 일반을 향해 기울어져 있다. 이때 번역은 단순히 해당 ‘기울기’를 그저 다른 국어로 전환하는 일이 아니다. 외려 우리가 실은 동일한 기울어짐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작업에 가깝다. 그것은 이 세계에서 “화엄경”이나 “전자 기타의 선율” 같은 게 내내 하는 일이다. 인류 보편을 아우르는 거대한 언어를 상상하는 것은 꽤 신나는 일이다. 단순히 나와 다른 피부색의 누군가와 통신할 수 있다는 설렘을 넘어, 범지구적인 영역에 걸쳐 유효할 만큼 매력적이고 멋진 ‘아름다움’이 실재한다는, 반증이기도 하니까. 소설에선 “아기가 꺄르륵 웃는 소리” 같은 것이 일례로 등장한다. 김기태는 이 소리를 “오직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는 외국어처럼 들리는 것”이라고 서술한다.
“…협력사에서 유일한 계약직 직원으로 일하며, 규칙적인 박자로 복사물을 뱉어내는 복합기 앞에서 휴대전화 배경 화면으로 해둔 아기 사진을 남몰래 본다. 저녁이 되어 되찾은 삶. 아기가 꺄르륵 웃는 소리는 오직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는 외국어처럼 들리고……” (「일렉트릭 픽션」, 124쪽 )
현대인에게 퇴근이란, 복합기 소리로부터 아기가 꺄르륵 웃는 소리로 되돌아오는 과정이다. 출근이란, 그 웃는 소리를 나날 성장시키는 과정이다. 김기태는 제 소설의 연주 가능성을 거듭하여 타진한다. 그것은 다성 음악의 떼창과 흡사한 모습으로, 낭독이나 합평과 같은 수준의 문학적 모둠 활동을 초과하는 일이다. 최근 있었던 뉴욕의 추수감사절 행렬에서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노래가 울려 퍼졌다. 전 세계가 우리를 안다. 이제 그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들이 우리의 ‘노래’를 따라 불렀기 때문이다. 공통선은 어렵지 않다. 어렵다면 어쩌면 그것은 선(善)에서 요원한 것일지도 모른다. 모두가 널리 공유하는 것들 가운데서 희망을 찾자. “아기가 꺄르륵 웃는 소리”처럼 간명하면서도 충분히 완전한 것이 있음을 문학으로서 말하는 것. 이것이 김기태가 인터내셔널을 건설하는 방식이다. 그것은 저 멀리 해외에 있지 않다. 소설가는 출근길 눈에 밟히는 그것들 가운데 하나를 줍는다. 그리고 조금 묻은 먼지를 털고 종이 위에 올려두어 소설을 완성한다.
■ 각주
1) 이 글은 김기태의 소설 가운데 「전조등」,「롤링 선더 러브」,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문학동네, 2024) 그리고 「일렉트릭 픽션」(『릿터』, 민음사, 2024년 6, 7월호)을 다룬다.
2) 김소미, 「혼란 앞에 정직해지기 위해 쓴다,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소설가 김기태」, 『씨네 21』, 2024.7.19.
3) 김광명, 「공감과 소통으로서의 일상 미학-칸트의 공통감과 관련하여」, 『인문학 연구』 제43집, 2014, 96쪽
4) 임마누엘 칸트, 『실용적 관점에서의 인간학(Anthropologie in pragmatischer Hinsicht)』, 백종현 옮김, 아카넷, 서울, 2014, 251-262쪽
5) 에드워드 사이드는 음악이 비물질적이며 초월적인 매체라는 특성을 빌미로 교조적이고 권위적으로 여겨지는 태도에 반하여 그것의 세속성을 강조하였다.(E 사이드, 『음악은 사회적이다』, 박홍규&최유준 옮김, 이다 미디어, 132쪽)
6) 위의 책, 181쪽
7) 최유준, 「제의와 재현, 그리고 소음: 아탈리의 음악 정치경제학에 대하여」, 『미학예술학연구』 제66집, 62쪽
8) 박준상, 『바깥에서』, 그린비, 2014, 161쪽
9) 위의 책, 276쪽
10) 자크 랑시에르, 『픽션의 가장자리』, 최의연 옮김, 오월의 봄, 2024, 188-189쪽
11) 파스칼 키냐르, 『음악 혐오』, 김유진 옮김, 프란츠, 2017, 103쪽
<당선소감>
일상 속 파고든 음악처럼… 문학을 우리 삶 가까이에
과거 싸이월드 시절의 어떤 청춘이 그랬던가요, 음악만이 나라가 허락한 유일한 무언가라고.
미어터지는 지옥철 안에서도 어떻게든 이어폰을 꺼내어 귀에 찔러 넣는, 삼각형의 재생 버튼을 누르려는 누군가의 치열한 동작들을 볼 때면 안타까우면서도 묘한 안도감을 느낍니다. 마치 예술이 어떤 생존에 기여하거나, 일련의 회복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만드니까요. 그리고 이때의 회복은 그가 해당 음악을 잘 아는 데서 비롯하는 건 아니겠습니다.
해외 팝의 외국어를 전부 알아듣지 못해도, 심지어는 지금 들려오는 고전음악의 소리가 관악기의 것인지 현악기의 것인지조차 구분하지 못할지라도 모종의 진실된 간절함으로, 음악을 향해 돌진하는 이들에겐 어떤 이유가 있는 것이겠죠. 이처럼 무언가를 아는 것만으로는 그것과 충분히 가깝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저 역시 누군가의 문학을 알고, 알리는 것보다는 그들의 문장을 우리 삶 가까이에 진정 붙일 수 있는 평론을 쓰겠습니다.
우선 그저 매체 타령만 할 줄 알았던 제게 예술이 무엇에 기대어 말하고 있는지, 그것이 사회를 딛고 있음을 어째서 잊지 않아야 하는지 석사 시절 내내 큰 가르침을 주신 심보선 교수님께 감사합니다. 쑥스러움이 많아 이곳저곳에서 글 지도를 받지 못했는데 제 글을 꼼꼼하게 읽어준 나의 지원, 고맙습니다.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 그리고 아쉬운 작업 가운데서도 작은 가능성을 발견해주신 김형중 심사위원님께도 감사하다는 말씀 전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방금 세상에 도착한 조카 준이에게. 네 이름을 여기 불러 둔다. 지금 이 시간에도 안양의 한 아파트에서, 한 소설가의 표현대로 “꺄르륵 웃는 소리”로서 세상에 완전한 것이 있음을 나날 증언하고 있을 테지. 문학이 지금 네 웃는 소리 정도만큼의 몫을 세상에 기여할 수 있길. 너 스스로의 목소리로 노래할 수 있을 때쯤 내게 씩씩하게 걸어와 예쁜 동요로 앞선 나의 호명에 신나게 답해 주길! 그동안 나도 문학에 비평의 언어로서 부지런히 보탬이 되고 있을 테니까, 우리 그때 만나자. 끝으로 이번 당선의 모든 영예를 제 어머니와 아버지, 두 분께 돌립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익히 말할 수 있도록, 그런 언어를 받게 된 것은 정말 두 분 덕이라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 오웅진. 1991년 서울 출생. ●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문화매개(Cultural Mediation) 전공. 현재 클래식 음악 방송국에 재직 중이다.
<심사평>
막상막하 다섯 작품… ‘얼마나 문학을 사랑하는지’ 기준으로 심사숙고
올해 문화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에는 총 28명의 응모자가 원고를 보내주셨다. 작년보다는 적은 편수였지만 평년보다는 많은 편수였다. 자주 등장하는 키워드는 예상했던 대로, 페미니즘, 인공지능(AI)시대의 문학, 신자유주의적 비참 등이었다.
우선적인 심사 기준은 둘이었다. 첫째, 응모자가 한국문학의 현재 맥락을 잘 파악하고 있는지의 여부였는데, 이것은 착점의 문제다. 맥락을 이해하는 비평가가 지금 어떤 대상에 대해 어떤 말을 해야 유효한 발언이 되는지 그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 둘째, 평론 장르의 특성상 당연한 말이지만, 사용하는 개념적 장치들의 적절성과 문장의 정확성도 중요하다. 이론적 개념들을 생경하게 나열하는 것보다, 자신만의 리듬을 유지하면서 정확하고 적절하게 구사된 해석 작업이 문장의 가독성과 설득력을 높이는 법이다.
일단 이 두 기준에 따라 투고된 28편의 평문을 읽었다. 숙고 끝에 다섯 편이 남았다. ‘단지 인간적-박솔뫼론’ ‘‘나’이면서 내가 아닌, 객체와의 관계 맺기-김혜순론’ ‘에르고딕 시/픽션-한국 SF시의 가능성’ ‘‘나’의 이야기는 그들의 세계로 생존합니다-문보영 시의 월드 시뮬레이션’ ‘문학을 초과하는 언어로서, 음악-김기태론’이 그 글들이다. 고백하건대 어떤 글이 당선작이 되어도 무방할 만큼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 세 번째 기준이 필요했다.
작가와 시인만 독창적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같은 작품이라도 다른 시각에서 달리 볼 줄 아는 비평가가 문학장에 활기를 가져온다. 게다가 신인 비평가라면 더 그래야 할 것이다. 박솔뫼론과 김혜순론을 당선작에서 제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런 이유였다. 구성과 문장, 그리고 개념적 장치들의 능숙한 사용이라는 점에서 두 글은 오히려 다른 글들보다 더 흠잡을 데가 없었다. 그러나 ‘비인간과 박솔뫼’ ‘김혜순과 여성적 글쓰기’는 사실 잦고 익숙한 연결이었다.
남은 세 편을 두고 다시 고심했다. 문보영론은 문장의 호흡이 좋아 잘 읽힌다는 장점이 있었다. 주제도 흥미로웠다. 그러나 논지 전개가 평이하다는 단점이 눈에 띄었다. 잘 읽히는 것은 모든 글에 대해 미덕이지만 종종 예리함이라는 다른 미덕을 잃게 만든다. 사실상 ‘조시현론’이라고 해도 무방한 ‘에르고딕 SF시의 가능성’은 착점이 유독 좋았는데, 조시현의 시를 통해 한국 SF시 장르의 가능성을 타진한 글이다. 필요하고도 창의적인 글이었으나 표본 집단이 작다는 생각을 버리기 힘들었다. 하나의 장르가 태동한다는 사실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대상들에 대한 천착이 필요해 보였다.
결국 ‘문학을 초과하는 언어로서, 음악-김기태론’ 한 편이 테이블 위에 남았다. 다른 글들에 비해 이론적으로 화려한 글은 아니다. 심지어 만약 쉼표가 없었더라면 제목마저 촌스러울 뻔했다. 그랬으니 이 글을 당선작으로 뽑은 것은 어느 정도 내기에 가까웠다. 김기태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대중음악과 그 노랫말에 관해 쓰면서 글은 시작된다. 그러나 애초에 작품의 소재 차원에서 거론되던 대중가요가, 논의가 전개되는 와중 김기태 소설 전체의 주제와 연결되고, 결국 신자유주의 시대 ‘공통감각’에 대한 논의로까지 가 닿는다. 김기태의 작품을 진심으로 좋아하지 않는 이상 쓸 수 없는 글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이번 심사의 마지막 기준, 그것은 이 예비 평론가가 얼마나 문학을 사랑하는지였다. 당선자에게는 축하의 말을, 다른 응모자들에게는 격려의 말을 전한다.
심사위원 : 김형중 문학평론가
<AI와 함께하는 작품 분석>
0) 이 글의 한 문장 요약
김기태 소설의 음악 인용은 “통속 장식”이 아니라,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공통 언어(공통감각)를 호출해 ‘보통 사람’들을 문학의 주체로 묶어내는 장치이며, 그 장치는 **대중가요(가사) → 떼창(공통감) → 전기기타/소음(구성) → 가장자리(포함되지 않은 실재)**로 점층 확장된다.
1) 프롤로그(도입)의 역할: “음악은 들려오는 것” + “공통선은 어렵지 않다”
도입부는 내용 요약이 아니라 윤리 선언에 가깝습니다.
- 후렴구가 반가운 이유 = “이미 익숙한 문장”이기 때문
→ 음악은 기억·사연·집단 경험을 싣고 있어, 텍스트 밖의 삶을 한 번에 끌고 들어옵니다. - “음악은 들려오는 것이다”
→ 독서처럼 의지적으로 ‘읽는’ 게 아니라, 침투합니다(귀에는 눈꺼풀이 없다는 결론부로 이어짐). - “공통선(the common good)”을 희망의 자리로 제시
→ 이 글이 끝까지 밀고 갈 핵심은 **공통감각(칸트)**과 **‘떼창’**입니다.
→ 즉, 김기태 문학의 정치성은 ‘거대 담론’이 아니라 공유 가능한 문장/리듬의 합의에서 온다고 봅니다.
도입은 결론을 이미 예고합니다: “문학의 희망은 ‘영웅’이 아니라 ‘공유되는 노랫말’의 방식으로 온다.”
2) 1절: “노래하는 속인들의 픽션” — 김기태의 인물론(반전)
여기서 평론가가 세우는 첫 대비축은 이거예요.
- (기존 문학 일반) 인물은 결여되어 있고, 그 결여가 발화를 만든다.
→ 피해자/트라우마/과거/침잠 = “문학적 깊이”로 환산되는 관습을 지적합니다. - (김기태) 인물은 “잠겨 있지 않다”
→ 연민의 드라마로 침잠하지 않으며, “바짝 마른 목소리”로 답하고 노래한다.
즉 김기태의 인물은 “고통을 깊게 파서 감동을 만드는 타입”이 아니라, 고통이 있는 세계를 ‘공유 가능한 리듬’으로 통과하는 타입으로 설정됩니다.
여기서 음악은 “위로”가 아니라 비물질의 실재이자 언어의 확장성 증거가 됩니다(내파/외파 이미지도 그 확장성의 비유).
3) 2절: “보통 사람들의 문학적 떼창” — 이 글의 핵심 장치
여기서 논지의 핵심이 등장합니다.
A) 대중가요 인용은 ‘저급한 삽입’이 아니라 ‘공공재’ 호출
평론은 김기태 소설 속 대사 “이 노래는 공공재니까 독점 금지다”를 핵심 명제로 삼습니다.
- 대중가요 가사는 경전보다 삶에 가깝고, 따라 부르기 쉽다
- 그러므로 문학이 이 공공재를 외면할 이유가 없다
→ 이건 “문학의 격”을 낮추자는 말이 아니라, 문학의 기반을 공통감각으로 재정렬하자는 주장입니다.
B) 인용의 효과: 독자가 ‘적당한 거리’에서 자기 경험을 끼워 넣게 함
기존 소설은 인물에 이입시키며 독자를 함께 ‘잠기게’ 하지만, 김기태식 인용은
- 맹희의 이야기(픽션)
- 독자의 기억(후렴구 경험)
이 둘을 “중간지점”에서 섞게 한다고 봅니다. 여기서 문학적 떼창이 가능해진다는 거죠.
C) 떼창은 배척이 아니라 ‘안도감’이다
이 문단이 글의 윤리적 핵심입니다.
떼창을 “우월감/배척”으로 설명하지 않고, 일치된 목소리의 합의로 설명합니다.
그리고 칸트의 “공통감 상실 = 광기”를 끌어와
- 합의된 노랫말이 없는 세계 → 광기가 번짐
- 김기태 문학엔 ‘광인의 제물화’가 없다
- 대신 노래로 인간을 끌어안는다
여기서 “광장-제단-제물” 같은 이미지가 슬쩍 지나가는데, 그 자체가 “희생양 메커니즘”을 떠올리게 하면서, 김기태가 그 경로를 피한다고 강조하는 장치예요.
4) 3절: “전기보다 거대한 세계 공통어” — ‘가사 없는 음악’으로 한 단계 더 밀기
2절이 “가사(언어)로 공유되는 공통감”이라면, 3절은 “가사조차 없는 음악(기타 리프/전기신호)”로 확장합니다.
A) ‘문’의 비유: 전문화 사회에서 아마추어만 넘나들 수 있는 곳
이 대목이 되게 야무집니다.
- 자격증 사회(전문화) = 호의조차 불법이 될 수 있는 구조
- 아마추어는 배경화되지만, 어원적으로는 “사랑하는 사람”
- 그리고 모든 문 앞에서 존재는 아마추어가 된다
→ ‘문’은 집의 문이기도 하고, 삶의 경계이기도 하고, 사회적 문턱이기도 합니다.
B) ‘소음’의 정치경제학: 아탈리의 4단계로 “구성”까지 끌고 감
여기서 평론은 ‘소음’을 단순 민원으로 보지 않고,
- 소음이 “어디까지 소음인가”라는 규정 투쟁으로 봅니다.
- 그래서 아마추어의 기타 리프를 “바깥에서 인입된 새로운 사운드”로 읽죠.
그리고 아주 중요한 장면:
- 505호 사과문 아래 501호가 “저도 전기 기타를 좋아합니다”라고 적는 ‘댓글’
→ 이 순간을 “사운드 아닌 성질의 무언가가 틈을 넘는 순간”이라고 규정합니다.
여기서 문학은 음악을 ‘설명’하는 게 아니라, 음악처럼 연대의 신호가 됩니다.
5) 4절: “포함되지 않은 실재들의 노래” — 랑시에르의 ‘가장자리’로 윤리 확장
이 절은 김기태 문학을 “인기 소재(대중가요/짤/예능)”로 규정하는 관성에서 빼내, 근대 픽션의 윤리로 올려놓습니다.
- 근대 픽션은 결말을 향해 곧게 뻗기보다, 가장자리를 본다(랑시에르)
- ‘사회적 배려대상자/국내거소신고증’ 같은 단어들이 필요한 인물들(진주/니콜라이)은
“포함되지 않은 실재”를 대표한다.
그리고 다시 “음악은 들려오는 것이다”로 돌아옵니다.
- 옆집 리코더, 택시 라디오, 유튜브 추천…
→ 음악은 의도보다 우연/침투/바깥으로 온다.
이 성질이 문학이 따라야 할 윤리(바깥을 환기)라는 거죠(블랑쇼/말라르메 호출).
여기서 “정치란 픽션”이라고 하는 대목은 꽤 도발적 장치인데,
- 유행어/짤/가사 같은 “친숙한 것”이 사람을 울타리 안으로 끌어들이는 방식이
실제 정치의 동원 방식과 닮았다는 통찰을 가져옵니다.
김기태는 그 동원을 “영웅”이 아니라 “두 사람만으로도 가능한 인터내셔널”로 축약해 보여준다는 것이고요.
6) 5절: “무플러들의 음악으로서, 문학” — 최종 결론(문학의 자리)
마지막 절은 ‘독자’ 모델을 확장합니다.
- 댓글러 vs 혐오 댓글러의 대비를 세운 다음
- 더 많은 존재로서 “무플러(아무 말 안 하지만 트래픽을 만드는 사람)”를 호출합니다.
이게 중요한 이유:
- 문학이 다루는 “공통감각”은 말/의견(댓글)만이 아니라
리듬·패턴·체류(트래픽) 같은 비언어적 참여로도 생긴다는 주장입니다.
그래서 김기태의 음악적 수사는
- 번역 불가능성(콩글리시적 기울기) 문제까지 걸어가며
- “영어보다 더 큰 공통어”를 상상하는 결론으로 수렴합니다.
마지막의 “아기가 꺄르륵 웃는 소리”는 결정타예요.
- 완전하고 간명하며, 누구의 국어도 아니면서 모두가 알아듣는 것 같은 소리
→ 이게 이 평론이 상상하는 초국가적 공통선의 표상입니다.
7) 이 평론의 ‘기술’(잘 쓴 점) 5가지
- 점층 구조가 명확함:
가사(공공재) → 떼창(공통감) → 전기기타(가사 없는 언어) → 소음(구성/규정투쟁) → 가장자리(윤리) - “보통 사람”을 빈곤/상처의 심연으로 만들지 않고, 공유 가능한 리듬으로 복권함.
- 개념(칸트·랑시에르·아탈리 등)을 “나열”하기보다, 소설 장면을 관통시키는 방식으로 씀.
- 반복 문장(“음악은 들려오는 것이다”)을 서사의 후렴처럼 배치해 글 자체를 음악적으로 만듦.
- 결론이 “문학의 사회적 효용”을 설교하지 않고, **구체적 감각(웃음소리/댓글/문/리프)**으로 착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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