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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불과 빛이 겨울의 가장자리를 녹이던 밤 - 신해욱 시 ‘자연의 가장자리와 자연사’의 정동 읽기 / 황석현

 

겨울에 아궁이나 모닥불 앞에 앉아 있던 때를 떠올리면, 온기는 외부의 추위를 바로 밀어내지 않고, 서서히 주변을 데워 갔다. 먼저 아궁이 속의 불이 타오르고, 빛이 흔들리고, 그 흔들림이 얼굴에 닿기까지 짧은 리듬의 시간성이 걸렸다. 불의 뜨거움이 따뜻함으로 몸에 닿기 전, 불은 공기를 데우고, 그 파동은 미세하게 움직이며 몸의 경직을 풀어주었다. 따뜻함은 언제나 조금 느리게 뒤따라 왔다. 빛의 일렁임과 공기의 진동, 서서히 도착한 온기야말로 겨울의 불 앞에 앉아 있을 때 경험되는 가장 기본적인 리듬이다. 이 리듬은 시 속에서 아궁이의 불이 켜지는 순간과 동일한 방식으로, 우리의 감각이 다시 세계와 맞닿는 방식을 보여준다. 우리의 감각은 환유적 접촉에서 시작하여 정동의 은유로 다가온다.

 

‘비극’의 흰 얼굴을 뵌 적이 있느냐?

그 손님의 얼굴은 실로 미(美)하니라.

검은 옷에 가리워 오는 이 고귀한 심방에 사람들은 부질없이 당황한다.

실상 그가 남기고 간 자취가 얼마나 향그럽기에

오랜 후일에야 평화와 슬픔과 사랑의 선물을 두고 간 줄을 알았다.

그의 발 옮김이 또한 표범의 뒤를 따르듯 조심스럽기에

가리어 듣는 귀가 오직 그의 노크를 안다.

묵이 말라 시가 써지지 아니하는 이 밤에도

나는 맞이할 예비가 있다.

일찍이 나의 딸 하나와 아들 하나를 드린 일이 있기에

혹은 이 밤에 그가 예의를 갖추지 않고 올 양이면

문밖에서 가벼이 사양하겠다!

정지용, ‘비극’

 

정지용의 ‘비극’은 죽음의 관념을 찾아오는 손님처럼 묘사한다. 그러나 그 손님은 공포의 그림자가 아닌, “흰 얼굴”을 지니고 “고귀한 심방”으로 다가온다. 시에서 감각되는 색채는 칠흑 같은 어둠 대신 “흰 얼굴”과 “검은 옷”이라는 대비로 구성되며, 두 색이 부딪히는 경계에서 미묘한 정동적 긴장이 형성된다. 시 속의 화자는 죽음을 거부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그 방문의 감각을 섬세하게 맞아들이려고 한다. “묵이 말라 시가 써지지 아니하는 이 밤에 / 나는 맞이할 예비가 있다.”라는 구절은 감각이 일정한 지점에서 무뎌지고, 다시 조정되는 순간을 보여준다. 말이 멈추는 순간의 정적(靜寂), 어둠 속에서 준비하는 몸의 자세, 죽음을 맞이할 예의를 갖추는 마음의 리듬은 모두 정서라기보다 감각의 변환으로 볼 수 있다.

이 시에서 더욱 두드러지는 것은 개인적 비극의 서사 이전에 몸·장소·시간성의 감각이 변화하는 방식이다. “딸 하나와 아들 하나를 드린 일이 있기에”라는 구절은 죽음과 상실을 직접적으로 진술하지 않는다. 오히려 상실 이후에 남아 있는 방 안의 분위기와 서늘함이 정동적 잔향으로 남아 있다. 시에서 화자는 죽음을 비관하거나 절규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체득한 자연의 섭리라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그 방문객이 “예의를” 갖춰오면 “맞이할 예비”를 한다. 이 “예비”는 시 속에서 감정의 고조나 억압이 아닌 몸을 하나의 리듬으로 정돈하는 정동적 행위로 볼 수 있다. 이는 감각의 무뎌짐이나 과잉도 아니고 지속되는 정동의 평형 순간이라고 볼 수 있다. “예의를” 갖춘 비극은 갑작스럽게 들이닥치는 사건이 아니며 밤의 온도차와 어둠의 시각성 속에서 천천히 스며드는 감각으로 나타난다. 이 점에서 정지용의 ‘비극’이 말하는 죽음은 폭력적 단절이 아닌, 감각의 층이 옅어지고 세계와의 접촉에서 ‘감각이 느슨해지는 저편’에 가까운 장면이다.

이러한 정동의 은유적 사유는 신해욱의 시 ‘자연의 가장자리와 자연사’에 나타나는 겨울 감각과 호응한다. 정지용의 ‘비극’이 죽음을 공포나 절규로 다루지 않고, 감각의 변환으로써 흰빛과 검은빛의 대비, 언어의 침묵, 방문객(죽음)을 준비하는 신체의 리듬으로 제시하듯, 신해욱의 시에서도 눈밭·불·동면이라는 이미지가 생사(生死)의 경계를 서사적 사건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대신 세계의 온도, 숨의 강도, 반복되는 말의 리듬을 통해 감각이 어떻게 변하고 회복되는지를 보여준다. 정지용의 ’비극’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자세가 정돈된 호흡과 정동의 지속과 평형 상태라면, 신해욱의 시에서 겨울을 버티는 방식은 내부에서 조율되는 불의 은유와 반복의 리듬이다. 두 시 모두 외부의 차가움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 세계 안에서, 감각을 조정하며 몸을 다시 세계로 연결하려는 정동의 시적 서사를 보여준다.

 
눈밭은 깊었다. 이상하다. 재가 날렸는데. 매캐했는데. 우리는 초토를 헤매고 있었는데. 눈밭이 깊었다. 다 왔나 봐. 잿더미 속에 흩어진 다랑쉬돌을 따라. 저쪽인가. 우리는 다랑쉬돌을 흘리며. 흘린 돌을 주우며. 바람이 불었지. 우리는 비틀거렸는데. 눈이 매웠는데. 눈을 비비자 계절에 휩쓸려. 다 온 거야. 불시착을 한 것 같은데. 우리는 지리에 밝았다. 다 왔어. 우리는 그을음을 덮어쓴 채로. 푹신하다. 눈밭에 묻혀. 소리 소문 없이. 빠짐없이. 다행이야. 다랑쉬돌을 품고. 다 온 거야. 다랑쉬굴에 들었다. 우리는 우리의 불을 피웠다. 비로소 일렁이는 것. 비로소 따뜻한 것. 그림자는 커다란 것. 우리는 우리의 불을 쬐었다. 긴장은 풀리는 것. 발은 녹는 것. 우리는 기운을 내어. 다랑쉬! 아끈다랑쉬! 다랑쉬말을 익혔다. 우리는 동면에 들기로 했다. 우리의 숨구멍을 열고. 동그랗구나. 우리의 돌을 토닥이며. 다랑쉬, 다랑쉬, 자장가를 불렀다. 밤은 길었다. 눈밭은 깊었다.

신해욱, ‘자연의 가장자리와 자연사’

 
자연의 가장자리와 자연사라는 제목은 시적 정동 장(場)을 함의한다. ‘자연의 가장자리’와 ‘자연사’라는 개념은 인간의 몸이 세계의 리듬 속으로 천천히 스며드는 상태를 사유하게 한다. 자연의 가장자리는 세계의 끝이나 자기 소외의식이 아닌, 인간 감각이 자연의 리듬과 충돌하거나 맞물리는 경계의 지점으로 볼 수 있다. 자연사는 일반적으로 생명 활동이 멈추는 과정과 순간을 가리키지만, 이 시에서 읽을 수 있는 자연사는 우리의 감각이 본래 리듬으로 되돌아가는 움직임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불교의 사유로 본다면, 이러한 자연사는 한 생이 사라지는 비극적 종착점이라기보다 모든 존재가 서로 기대어 나고 사라지는 무상(無常)과 연기(緣起)의 한 장면처럼 보인다. 끝과 시작이 분리되지 않고, 감각과 숨의 리듬이 다른 방식으로 이어지는 자리에 ‘자연사’가 놓인다. 이러한 관점에서 자연은 몸의 감각들을 마주하고, 흡수하는 거대한 생활세계의 호흡 장이 된다. 메를로퐁티가 말했듯이, 우리의 몸은 세계의 살과 분리된 것이 아닌 그 살 속에 파묻히고, 스며들며, 감응하는 존재다.

이러한 정동적 사유는 이 시가 보여주는 겨울의 장면과 이어진다. “그을음을 덮어쓴 채로” 도착한 피폐한 몸, “눈밭에 묻혀” 멈춰 있는 피부 감각, 그리고 “우리의 불”로부터 다시 시작되는 생의 온기와 정동의 리듬. 이 시에서 중요한 것은 죽음이나 생존의 서사가 아니며 감각이 둔화하고 회복되며 다시 자연 세계의 일부가 되는 정동의 순환이다. 시에서 겨울을 버티려고 필요한 것은 사건의 해결과 극복이 아닌, 거칠어지는 내부의 호흡을 정교하게 조율하는 리듬이다. 이런 점에서 이 시는 자연의 가장자리에 놓인 존재가 어떻게 자기 체온을 유지하고, 어떻게 서로에게 기대어 다시 세계의 감각으로 귀환하는지를 섬세하게 보여준다.

겨울의 차가운 표면 위에 놓인 “눈밭”과 몸에 묻은 “그을음”, 그 위에서 켜지는 “우리의 불”, 그리고 몸에 쥐고 몸을 감싸는 “다랑쉬돌”과 “다랑쉬굴”. 이 시는 차가움과 따뜻함, 단단함과 포용, 외부와 내부가 서로 교차하며 만드는 감각적 지형을 중심에 놓는다. 무엇보다도 반복되는 1인칭 복수 “우리”는 이 지형 속에서 개별적 존재가 아니라 함께 체온을 나누는 존재들로서의 복수형 화자를 드러내며, 겨울의 깊이를 통과하는 집단적 호흡을 형성한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사건이나 설명 없이 감각의 변화만으로 정서적 분위기를 구축한다.

정동 시학 관점에서 보면, 이 시는 명명된 감정보다 먼저 작동하는 몸의 리듬과 온도의 변화를 섬세한 단위로 포착한다. ‘슬프다’와 ‘기쁘다’라는 감정의 언어로 번역되기 이전의 상태, 몸과 공간이 서로 맞닿으며 발생하는 미세한 진동을 중심에 두는 것이 정동 시학의 핵심인데, 이 시는 그 진동을 “불을 쬐었다”, “푹신하다”, “눈밭에 묻혀”, “그림자는 커다란 것”, “동면에 들기로”와 같은 이미지로 삶의 구체성과 감응의 구체성을 드러낸다. 말보다 먼저 도착하는 촉각적 변화, 설명되지 않은 긴장과 이완의 파형, 공동체적 몸이 만들어내는 정서적 안정감 등이 바로 이 텍스트에서 읽을 수 있는 정동적 흐름이다.

이 시는 감정의 직접적인 진술 없이도 깊은 정서를 형성하는 방식의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정동 시학의 독해 가능성을 잘 보여준다. 이 시에서의 정서가 서사나 주제보다 감각적 미세지형을 통해 구축되기 때문이다. 텍스트 전체를 지배하는 이미지는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겨울의 한 장면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서 작동하는 온도·촉각·숨의 리듬은 촘촘하다. “우리의 불”, “우리의 돌”, “우리의 숨구멍”이라는 반복적 구조는 공동체적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내적 진동을 드러내며, 이는 정동 시학이 탐구하는 감응의 윤리와 맞닿는다. 또한 시가 끝내 정확하게 말하지 않는 부분, 왜 이들이 “눈밭에 묻혀” 겨울에 도착했는지, 무엇을 지나왔는지는 텍스트 안에서 확정되지 않지만, 바로 그 공백 덕분에 감각·온도·리듬이라는 비언어적 층위가 오히려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불이 켜지는 순간 이후에 놓인 “비로소 일렁이는 것. 비로소 따뜻한 것.”이라는 두 문장은, 감각 할 수 있는 ‘것’이 파동의 시간성을 두고 도착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비로소’라는 단어가 반복된다는 점은, 몸이 추위의 긴장 상태에서 천천히 풀려나는 과정을 미세한 단위로 포착한다. 시에서 불이 등장하기 전까지의 공간은 “눈밭에 묻혀” 있다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깊고 차갑다. 그 차가움은 몸을 경직시키고, 감각을 둔화시키며, 세계를 선명하게 인지하지 못하게 하는 몸의 외부 환경으로 작동한다. 불이 켜진 후에도 즉각적으로 따뜻해지는 것이 아닌 먼저 “일렁임”이라는 움직임의 감각이 도착하고, 그 뒤에 “따뜻한” 것이 따라온다. 이는 냉기 속에서 오랫동안 조여 있던 감각이 단계적으로 풀리며, 긴장에서 이완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나타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일렁임”이 온기보다 먼저 인지된다는 점이다. 일렁임은 아직 명확한 온도의 변화 상태가 아니며 고정되어 있던 불의 표면이 아주 조금 흔들리는 정도의 미세한 움직임이다. 따뜻함이라는 안정된 상태 이전에, 몸이 경직을 풀며 작은 파동을 감지하는 순간이 자리한다. 이 짧은 문장들은 긴장→전환→해소의 흐름을 빠르게 요약하는 것보다 감각의 층위를 분리해 보여준다. 차가움 속에서 불빛이 번지고, 그 빛이 공간을 흔들어 놓으며, 몸이 그 흔들림을 먼저 감지하는 순간을 포착하는 것이다. 이 미세한 리듬의 시간성 층위는 정동 시학의 관점에서 감정 언어 이전에 도착하는 감각의 전이를 드러내는 장면으로 읽을 수 있다.

“다랑쉬돌”과 “다랑쉬굴”이라는 두 요소는 이름도 다르고 물성이 다르다. 돌은 단단하고 서늘하고 고체인 물질로 쉽게 변하지 않는 물질성을 가진다. 반면 굴은 몸을 들이는 공간이며, 광활한 외부가 직접적으로 닿지 않는 포용의 형태를 가진다. 시는 이 둘을 나란히 배치함으로써 경직됨과 포용성, 바깥의 세계와 안쪽의 세계를 자연스럽게 대비시킨다. 외부에서는 “눈밭”의 차가움과 “그을음”의 잔여물이 몸을 둘러싼다면, 굴 안에서는 돌의 질감과 쓰임, 불의 열기가 공존하며 내부 공간만의 정동적 분위기가 형성된다. 이 감각적 차이는 공간을 정동의 전환을 가능하게 하는 장(場)으로 만든다.

내부와 외부의 대비는 물리적 구분을 넘어 감각의 방식까지 달라지게 한다. 눈밭의 세계는 차갑고 깊으며, 몸을 무겁게 눌러 침잠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반대로 굴 속은 깊은 겨울이라는 외부의 조건에서도 최소한의 온기와 리듬을 만들어내는 공간으로 나타난다. 시는 그 내부를 과도하게 따뜻하거나 편안한 장소로 그리지 않지만, 적어도 외부의 냉기가 직접 들이치지 않는 안정감이 존재한다. 이 차이는 “동면에 들기로 했다”라는 선택이 가능해지는 전제 조건이며, 감각이 혹한이라는 외부의 압력에서 벗어나 내부의 리듬에 맞춰 재배열되는 장면이다.

그 내부에서 행해지는 “돌을 토닥이며”라는 동작은 촉각적 의미를 지닌다. 토닥임은 세게 두드리는 행위가 아니라, 반복적이고 부드러운 접촉이다. 이 부드러운 접촉은 돌의 단단한 물성과 상반되며, 경직됨에서 이완되는 정동적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단단한 돌을 두드리지 않고 “토닥”인다는 표현은, 몸이 외부의 차가움에서 내부의 안정으로 옮겨왔음을 보여주는 작은 신호처럼 작동한다. 토닥임의 촉각은 보호를 요청하거나 위로를 건네는 감정보다 앞서는 신체적 행위이며, 이 시에서는 그 촉감 자체가 자장가의 리듬으로 이어진다.

토닥임 이후에 이어지는 “다랑쉬, 다랑쉬, 자장가를 불렀다”는 반복은 내부 공간 전체를 하나의 호흡으로 묶어내는 역할을 한다. 돌의 단단함과 굴의 포용성 위에 얹힌 이 반복적 발화는, 외부 세계의 차가움과 깊이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내부에서만 작동하는 리듬을 세운다. 그 리듬은 거대하지 않고, 커다란 의미를 선언하지도 않는다. 다만 겨울의 세계 속에서 몸을 낮추고 호흡을 맞춰가는 섬세한 안정의 흔들림이다. 이 작은 리듬이 축적되면서 시는 동면을 준비하는 집단적 감각의 장면을 완성한다.

“다랑쉬말을 익혔다”는 문장은 언어 습득 이상의 감각적 전환을 내포한다. 이 표현에서 말은 의사소통을 위한 규칙이나 정보의 전달보다, 공간의 리듬과 호흡을 받아들이는 감각적 행위에 가깝다. 텍스트 내부에서 ‘다랑쉬말’이 어떤 언어인지, 실제 언어인지, 장소의 이름과 어떤 관계를 갖는지 알 수 있는 직접적 단서는 없다. 그러나 이 문장 자체가 보여주는 것은 새로운 환경에 대한 적응과정이 의미의 해석 대신 감각의 변화로 일어나는 방식이다. 말의 ‘의미’보다 먼저 그 말의 ‘소리’와 ‘리듬’을 익히는 행위처럼, 이 구절은 몸이 먼저 “굴”이라는 공간의 호흡과 파형을 받아들이는 순간을 드러낸다.

말을 익히는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배움’보다 ‘조율’이다. 언어가 지닌 소리의 반복, 장단, 발화의 리듬은 몸의 긴장도를 바꾸고, 화자의 호흡을 새로운 공간의 리듬에 맞추게 한다. 이 시에서 감각의 변화는 항상 촉각·온도·움직임을 통해 표현되는데, 언어를 익히는 행위도 같은 층위에서 이해할 수 있다. 말이 지닌 억양이나 호흡의 길이가 화자의 신체 감각에 영향을 주고, 그 영향을 통해 내부 공간에서의 행동인 불을 쬐거나 돌을 토닥이는 행위가 새로운 규칙성을 얻는다. 언어는 설명의 도구 이전에 고유한 감각적 리듬의 매개로 작동한다.

또한 이 언어 습득은 개별적 행위가 아니며 공동체적 호흡의 확장이다. 시 전체에서 “우리”라는 복수 화자가 반복되듯, “다랑쉬말을 익히는” 주체도 단일한 개인이 아니라 하나의 집단이다. 이들에게 말은 하나의 기술이나 이해의 단계보다는 함께 나누는 호흡을 조율하는 장치다. 반복되는 단문과 감탄하는 호명, 그리고 이어지는 자장가의 반복은 모두 이 언어적 리듬이 공동체 내부의 감각을 통합하는 방향으로 작동함을 보여준다. 말이 익혀지는 순간, 이들은 “굴”의 일부가 되고 서로의 일부가 된다. 이는 외부의 차가움 속에서 온기를 형성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며, 이 시가 겨울의 깊이 속에서도 공동체적 생존의 가능성을 단단히 붙들고 있는 지점으로 볼 수 있다.

이 시에서 반복되는 어휘들은 의미의 강조보다 리듬의 형성에 더 가까운 역할을 한다. “비로소”, “우리의”, “다랑쉬”, “길었다”, “깊었다”와 같은 반복은, 각각의 단어가 지닌 의미보다 그 소리와 간격이 만들어내는 파형이 더 중요하게 작동한다. 반복될 때마다 어휘는 동일한 의미를 덧붙이는 것이 아닌, 일정한 간격으로 몸의 긴장도를 조절하는 작은 파동을 만든다. 이 파동은 감정의 증폭보다 감각의 균일화와 안정에 가까운 방향으로 움직이며, 내부 공간이 점차 차분한 리듬에 맞춰지는 과정을 드러낸다.

단문 구조 역시 이러한 파형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낸다. 짧은 숨을 내쉬듯 짧게 끊어지는 문장들은 하나의 의미를 길게 이어가기보다, 호흡을 반복적으로 단정시키는 방식으로 배열되어 있다. 이 짧은 문장들은 외부의 차가움 속에서 긴장한 몸이 숨을 길게 내쉬지 못하고 짧게 호흡하는 것과 닮아있다. 문장이 짧게 끊길 때마다 독자는 불규칙한 호흡이 안정되는 과정을 따라가게 되며, 시 전체의 정동은 갑작스러운 고조나 하강 없이, 낮고 부드러운 수준에서 계속 이어진다. 이런 단문 구조는 시의 서사적 흐름을 내부의 온도와 호흡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이러한 반복과 단문 구조가 최종적으로 도달하는 지점은 동면의 준비이다. “다랑쉬, 다랑쉬, 자장가를 불렀다”라는 구절은 발화의 반복이 불러오는 안정감을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자장가는 잠을 재우는 노래로 의미를 전달하는 노래라기보다 신체의 리듬과 내부의 온도를 조절하는 기능을 지닌다. 이 시의 자장가 역시 특정 정서를 표현하지 않고, 내부 공간을 하나의 박동에 맞추어 안정시키는 역할을 한다. 반복되는 호명이 “굴”의 울림으로 퍼지고, 짧은 문장들이 호흡을 조율하며, 그 호흡이 쌓여 동면이라는 상태에 가까이 다가간다. 이때의 동면은 차가운 외부 세계 속에서 내부의 온기를 지켜내기 위한 생존의 리듬이다. 시의 마지막 부분에서 드러나는 이 조용한 리듬은, 겨울의 깊이를 견디는 방식으로서의 집단적 유대감과 안정감을 보여준다.

이 시가 그려내는 정동의 핵심은 겨울이라는 혹독한 조건을 어떻게 버티느냐는 질문에 놓여 있다. 겨울은 여기서 감상적 계절이 아니다. 몸을 움츠러들게 하고 감각을 둔하게 만드는 외부의 압력으로 작동한다. “눈밭에 묻혀” 있는 장면은 이 압력의 깊이를 드러내고, “그을음을 덮어쓴 채로” 도착한 몸의 상태는 이미 긴 시간의 축적된 피로를 보여준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이 시가 제안하는 방식은 외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내부의 리듬을 조정하는 쪽이다. 세계를 견디는 것은 감각을 조절하고 섬세한 안정의 리듬을 만들어내는 정동의 문제로 볼 수 있다.

이 지속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공동 생존의 윤리이다. 시의 화자는 끝까지 “우리”라는 복수형을 고집하며, 단일한 자아보다 집단적 몸을 중심에 둔다. “우리는 우리의 불을 피웠다”라는 구절은 불이 외부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 공동체 내부에서 만들어졌음을 보여준다. 프로메테우스의 불이 자율성과 의지와 이성의 표상이라면, 홍익(弘益)의 불(빛)은 개별적 생존이 아닌, 서로에게 체온이 되고 서로를 지탱하는 안정의 근원이다. 인간은 결국 자율의 불빛과 공존의 빛, 이 두 리듬 사이에서 자신을 찾는다.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는 타자를 동정하는 감정이라기보다 서로의 고통을 함께 견디며 건너가려는 감응적 실천으로 볼 수 있다. 시가 그려내는 “우리의 불”, “우리의 돌”, “우리의 숨구멍”은 바로 그런 자비의 감응이 구체적인 온기와 숨, 돌의 촉감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우리의 돌”, “우리의 숨구멍”이라는 소유성은 공간과 호흡, 생존의 방식이 집단적으로 공유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 윤리는 이 시가 외부 세계를 무력하게 바라보는 대신 내부적 연대로 겨울의 차가움을 버티는 방식을 제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행위가 도달하는 지점은 감각적 귀환의 순간이다. 불의 열기가 퍼지고, 돌의 단단한 표면을 토닥이며, 자장가의 반복을 통해 내부의 리듬이 안정될 때, 이들은 외부 세계로부터 다시 감각을 되찾는다. 마지막 구절의 “밤은 길었다. 눈밭은 깊었다”는 지나온 외부 환경이 달라지지 않았음을 분명히 한다. 그러나 이 변하지 않는 세계 속에서 내부의 몸과 호흡은 이미 다른 상태에 도달해 있다. 차갑고 깊은 겨울 속에서도 몸을 지지하는 온기와 호흡이 돌아왔다는 의미에서, 이 시가 보여주는 귀환은 밖으로 향하는 회귀가 아닌, 내부의 감각이 회복되는 귀환이다. 이 귀환은 생존의 기술보다는 서로에게 기댄 감각적 리듬이 만들어낸 작은 회복의 순간이다. 이 시는 거대한 저항이나 극적인 변화 대신, 겨울을 버티기 위한 감각적 움직임들을 포착한다. 불의 일렁임, 돌의 촉감, 반복되는 말의 리듬이 어떻게 몸을 다시 세계와 연결하는지를 보여주는 정동의 시적 서사로 읽을 수 있다. 우리의 감응은 정동이라는 다리를 오고 가며, 경험의 결과 사고의 틀을 조금씩 바꾸어 놓는다.

 

 

  <당선소감>

 

   견디는 바탕에 대하여

2025년 12월 초입,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생각들을 잠시 비우고, 차갑지만 청량한 겨울 바람도 쐬러 열차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주관한 인문열차 프로그램 참여자로 선발되어 배낭 하나 메고 떠난, 뜻밖의 호사를 누린 풍요로운 여정이었습니다. 영남권 목적지까지 세 시간이 훌쩍 넘는 거리였지만, 주최 측에서 마련해 주신 여러 프로그램 덕분에 지루할 틈이 없었고, 함께한 분들과 인문에 관한 생각을 깊게 나누는 시간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세계와 깊게 얽힌 자신의 삶을 성찰하며, 때로는 고통스럽고 힘들지라도 인문적 삶을 지키며 살아가는 분들이 참 많다는 것도 새삼 느꼈습니다.

프로그램 일정 가운데 대구 군위군의 사유원을 찾는 순서가 있었습니다. 수십 년 동안 터를 닦고 가꿔 온 산속의 넓은 정원은, 그 자체로 하나의 사유 공간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것은 108그루의 모과나무와 가지마다 매달린 잘 익은 모과, 그리고 그곳에 두텁게 퍼져 있던 모과 향이었습니다. 불교에서 108은 흔히 108번뇌를 상징하는 수라고들 합니다. 하지만 모과나무 108그루와 그 사이를 흐르는 향기 속에서는, 이상하게도 번뇌보다는 맑은 숨이 먼저 느껴졌습니다. ‘머릿속에 가득한 생각’을 비우겠다는 이번 여행의 목표가 그 자리에서 비로소 이루어지는 듯했습니다. 한 해의 번뇌를 씻어내는 종소리의 수가 모과와 그 향기 속에서 울리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도 ITX 열차에 타고 서울역으로 향했습니다. 그 사이 서울에는 눈이 한껏 내려 도로는 더욱더 혼잡해져 있었고, 열차가 플랫폼에 들어설 때마다 창밖으로 펼쳐진 철로가 유난히 또렷하게 보였습니다. 문득, 문학은 기차가 아니라 철로에 더 가까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수많은 발자국과 열차의 무게, 바퀴의 마찰을 묵묵히 견디면서도, 철로는 철로의 형태를 잃지 않은 채 우리를 각자의 목적지까지 안내해 줍니다. 문학이라는 것도 그런 바탕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돌아보면 저 역시 오래도록 문학이라는 바탕 위에 머물러 왔더군요. 때로는 그 위에서 버티고, 때로는 그 안에 기대면서. 사람들이 머물고 떠나고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주는 존재, 서로 다른 목소리와 무게를 견디면서도 그 무게에 깔리지 않고, 문학의 어떤 형식으로든 계속 이어지는 기질. 문학이 그런 바탕을 내어주었기에, 저도 언어로 사유하고, 언어로 버티는 연습을 이어올 수 있었습니다. 이번 수상을 계기로 저 또한 누군가에게 잠시 머무를 수 있는 작은 철로 한 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 바탕을 빌려 제가 하는 언어의 놀이에 기꺼이 귀 기울여 주신 불교신문과 방민호 심사위원분, 그리고 제 글을 떠올려 주실 모든 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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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사평>

  

  시 작품을 읽어내려갈 수 있는 능력

오랫동안, 까다로운 불교신문 당국 덕분으로 당선작을 내지 못했다. 잔치를 벌여 놓으면 당선자를 내는 게 가급적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명분이 있어야 한다. 선구안을 보여주든지, 실력을 보여주듯이, 남이 잘 안 하는 작업을 보여주어야 한다. 투고 편수가 많지 않은데 선정하려면 어떤 특장이든 갖추고 있어야 한다.

올해는 투고 편수가 급증했다. 평론은 좀처럼 빛이 안 나는 세상인데, 눈을 밝혀서 제대로 된 평론이 있는지 찾는다. 있다. ‘자연의 가장자리와 자연사’의 ‘정동 읽기’. 분석 대상이 별 명분 없이 낡지 않았다. 평론이라 해서 어느 정도까지 허용될 법한 문장의 서투름도 아니다. ‘정동’ 유행에 이론만 적당히 제시하고 적용력 없는 글도 아니다. 자신이 어떻게 소화했는지를 확실히 보여주려는 ‘의지’가 보인다.

분석한 신해욱 시의 ‘다랑쉬’는 제주말인 것 같다. 그 아슴아슴한 의미의 세계를, ‘정동’의 개념을 확실히 알고 밀어붙이는 힘에, 까다로움 피우는 눈이 결국 승복한다. 몇 개 안 되는 주석에 번호 붙이는 외각주를 써야겠는지? 내각주 방식도 있다. 장을 나누지 않고 이어 쓰는 방식에 약점은 없겠는지? 당선작을 물리기에는 작은 것들이다. 평론의 사유력과 예술성이 있다. ‘자연의 가장자리와 자연사’의 정동 읽기의 작가에게 축하를 드린다.

심사위원 : 방민호


 

  <AI와 함께하는 작품 분석>

 

1) 제목이 이미 논지다

「불과 빛이 겨울의 가장자리를 녹이던 밤」

  • 핵심은 ‘겨울(혹독함)’을 한 번에 녹이지 않는다는 데 있어요.
  • “불(열)”보다 먼저 “빛(일렁임)”이 오고, 그 뒤에 온기가 따라오는 지연된 도착(느린 시간성)이 제목부터 암시됩니다.
  • 부제 “정동 읽기”는, 이 시를 감정(기쁨/슬픔)으로 번역하기 이전의 층위—온도, 촉각, 호흡, 리듬—에서 읽겠다는 선언이에요.

2) 전체 구조: ‘불 앞의 체험’ → ‘죽음을 맞는 감각’ → ‘겨울을 버티는 감각’으로 이어지는 3단 브리지

이 글은 논문식 목차 대신, 감각의 다리를 세 겹으로 놓습니다.

(1) 체험적 서문: 불의 리듬(빛→진동→온기)

첫 단락은 분석이 아니라 감각을 재현하는 프롤로그예요.

  • “불이 타오르고 / 빛이 흔들리고 / 그 흔들림이 얼굴에 닿기까지 짧은 리듬의 시간성”
  • 여기서 평론가가 하는 일은 “정동”을 정의하는 게 아니라, 독자의 몸에서 **‘정동이 작동하는 방식(먼저-나중, 파동-도착)’**을 깨우는 겁니다.

포인트: 이 글은 ‘설명으로 설득’하기보다, 독자의 감각을 먼저 조율한 뒤 논지를 밀어붙여요.

(2) 정지용 ‘비극’ 인용: 죽음을 “사건”이 아니라 “방문/리듬”으로 바꾸는 장치

정지용의 ‘비극’은 죽음을 손님으로 만듭니다.
평론가는 이 인용을 통해 “죽음”을 다음처럼 재배치해요.

  • 공포/절규의 심리극 → **색채 대비(흰 얼굴/검은 옷), 정적, 예비(준비)**라는 감각 장면
  • “묵이 말라 시가 써지지 아니하는 이 밤” = 언어가 멈춘 자리에서 감각이 다시 배열되는 순간

여기서 중요한 건 ‘상실 서사’가 아니라, 상실 이후 남는 방의 온도·자세·호흡 같은 잔향입니다.
즉 “정동”을 사후의 공기로 읽죠.

(3) 신해욱 시로 진입: “겨울 감각”이 죽음/생존을 대체하는 순간

이제 신해욱 시에서는

  • 무슨 사건이 있었는지, 왜 초토를 헤매는지, 왜 ‘동면’인지가 명확히 설명되지 않아요.
    평론가는 이 공백을 “서사 결핍”이 아니라 정동이 선명해지는 조건으로 해석합니다.

3) 평론의 핵심 주장 3개

A. 이 시의 ‘죽음(자연사)’은 비극적 종착이 아니라 “감각의 귀환”

평론가는 자연사를

  • 생명활동의 종료(의학/상식)
    가 아니라
  • “감각이 본래 리듬으로 되돌아가는 움직임”
    으로 다시 씁니다.

그래서 불교 개념(무상/연기)을 끌어오는데, 이때 불교는 교리 해설이 아니라 끝-시작의 분리 해체를 위한 사유 장치로 쓰여요.

B. 시의 중심은 ‘감정’이 아니라 ‘온도·촉각·숨의 파형’

“슬프다/기쁘다”가 아니라

  • “푹신하다”
  • “발은 녹는 것”
  • “비로소 일렁이는 것. 비로소 따뜻한 것.”
    같은 감각 문장이 정서를 만든다는 주장입니다.

즉 정동 읽기란:

감정을 ‘말로’ 붙잡기 전에, 몸이 먼저 겪는 변화를 추적하는 읽기.

C. ‘우리’는 주제(연대)가 아니라 “공동 호흡의 장치”

평론에서 가장 설득력 있는 부분 중 하나가 이거예요.
신해욱 시의 “우리”는 “다 같이 힘내자” 메시지가 아니라,

  • 불을 피우고
  • 돌을 토닥이고
  • 자장가를 반복하는
    집단적 호흡(리듬)의 형식이에요.

4) 평론가가 잘 잡아낸 시의 핵심 장치들

1) “비로소”의 2단 전이: 일렁임(움직임) → 따뜻함(상태)

평론이 아주 구체적으로 포착한 대목:

  • 따뜻해지기 전에 먼저 “일렁임”이 온다
  • 즉, 안정(따뜻함) 이전에 **미세한 흔들림(전환의 신호)**이 먼저 감지된다

이건 “정동”의 정석적인 장면이에요.
감정은 나중에 이름 붙고, 먼저 몸의 미세 변화가 도착하니까요.

2) 다랑쉬돌/다랑쉬굴의 물성 대비

  • 돌: 단단함/서늘함/변하지 않음
  • 굴: 포용/내부/바람 막음
    평론은 이 대비를 “상징”으로만 읽지 않고, 정동의 전환이 일어나는 공간 조건으로 읽습니다. (밖=압력, 안=조율 가능)

3) 단문과 반복을 “호흡의 기술”로 읽기

평론이 시의 형식을 “내용”으로 번역하지 않고,

  • 짧게 끊기는 문장 = 짧은 숨
  • 반복되는 말 = 안정화 파형
    으로 잡아낸 건 강점이에요.
    이런 읽기가 “정동 시학”과 잘 맞습니다.

5) 이 평론 자체의 문장 전략: ‘정동’을 말하면서, 글도 정동적으로 움직인다

이 글은 **논증문인데도 ‘서정적’**이에요. 이유는 분명합니다.

  • 이론(정동)을 설명하는 순간에도
    “빛의 흔들림/공기의 진동/서서히 도착한 온기”처럼 감각 어휘로 계속 밀어요.
  • 결과적으로 독자는 ‘정동’이 뭔지 정의를 외우기 전에,
    **정동적 독해의 속도(느림, 파동, 지연)**를 몸으로 먼저 겪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