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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무(無)의 정치, 혀의 신학 - 김혜순론 / 오경진

 

“마지막으로 파멸되어야 하는 원수는 죽음입니다.”(코린토1서 15:26) 사도 바울은 단언한다. ‘마지막 원수’인 죽음은 파멸될 수 있다고, 극복할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이는 죽음을 넘은 뒤 다시 만나자는 ‘약속’이기도 하다. 이 약속은 믿을 만한 것인가. 소박한 진실인가, “신성한 거짓말”(니체)인가. 누구든 일단 믿어볼 수 있을 것이나, 누구도 끝까지 확신할 순 없을 것이다.

왜 그런가. 죽음(死)은 살아있음(生)의 부정(否定)이기에, 산 것의 차원에 속한 우리는 살아서는 도저히 죽음에 도달할 수 없기에 그렇다. 나이듦(老) 혹은 아픔(病)을 통해 간극이 좁혀질 수는 있으나 절대로 가닿을 수는 없다. ‘점근선’에 무한히 가까워지는 어느 곡선 함수의 그래프를 상상해 보라. 곡선은 점근선에 한없이 가까워지지만, 결코 거기에 닿지 않는다. 무한대(無限大)의 개념을 통해야만, 비로소 선과 선은 점으로 만난다.

유구하고도 유일한 인간의 욕망, 바로 죽음의 초극(超克)이다. 그러나 유한에 속한 우리에게는 도저히 무한을 손에 쥘 방법이 없다. 그래서 발명된 게 바로 신(神)이다. 점근선 너머에 존재하는, 무한을 뛰어넘는 무한. 유한한 인간이라도 ‘믿기만 하면’ 누구나 이 무한 옆에 다가설 수 있다고 약속하는 기독교(혹은 바울의 철학)는 그렇게 역사상 가장 강력한 ‘가르침’이 됐다. 그러나 그것으로 다 된 것인가. 정말로 죽음은 극복되었는가. 믿는 것만으로 우리는 죽음의 공포를 완전히 떨쳤는가. 애당초 우리가 무엇을 완전히 믿는 게 가능한가. 우리는 바울을 ‘거짓말쟁이’로 추궁하며, 멋대로 신을 ‘살해해’ 버린, 그리하여 훗날 미치광이로 죽음을 맞이한 문헌학자(니체)의 문장을 통과한 시대에 살고 있다. 정말 신이 죽었는지, 죽을 수는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전지전능하다고 여겨졌던 그 신이 이제는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죽음을 ‘극복하려는’ 전통을 부정해 보는 것이 이 글의 목표다. 죽음을 생의 종말, 혹은 개체의 소멸로 보지 않을 것이다. 죽음을 ‘본능을 거스르는’ 사태 대신 ‘공동체’를 열어젖히는 계기로서 해석할 것이다. 이를 위해 구체적으로 음미할 텍스트는 바로 김혜순의 시다.

김혜순은 그로테스크한 몸의 언어로 죽음과 죽음 이후의 경지를 노래한다. 그것은 앞서 가부장적인 세계의 질서를 폭로하고 해체하는, “정치적으로 급진적인”(이광호) 여성의 언어로 이해됐다. 하지만 김혜순의 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감각의 언어로, 감각이 포착할 수 없는 형이상학의 세계를 붙잡는 ‘부정의 철학’이기도 하다. 김혜순은 이렇게 말한다. “시는 자신 안의 부재에 거주함으로써, 자신의 죽음을 그 죽임에 맞댐으로써 중심의 영역을 가로지를 수 있다.”(『여성, 시하다』) 시에서 죽음은 ‘나’를 ‘너’로, ‘너’를 ‘나’로 만드는 일이다. 죽음을 통해, 죽음의 시를 쓰는 것을 통해 우리는 연대하고 공동체를 만든다. 이렇게 김혜순의 문학은 저 영원한 어둠에 놓인 죽음의 무대를 잠시나마 밝힐 작은 빛이 될 수 있다. 요컨대 그의 시는 ‘없음’(無)의 세계를 통치하는 정치이자 무한의 죽음으로 몰락한 신의 흔적을 더듬는 혀의 신학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찾는 부정의 리듬
죽음의 공포는 생리학적이고, 보편적이다. 그래서 상실이고, 슬픔이다. 문화인류학자 어니스트 베커는 모든 인간 활동의 목표를 “죽음이 인간의 최종 목적지임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렇다. 죽음은 피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왜 죽어서는 안 되는가. 모든 삶의 귀결은 결국 죽음인데, 왜 우리는 죽음에 저항하려는가. 스스로 특별한 ‘영웅’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게 베커의 결론이다. 그리고 이것은 유기체라면 어쩔 수 없이 가지고 태어나는 ‘자기애’에서 비롯된다고 그는 덧붙인다.[2] 죽음은 왜 슬픈가. 왜 눈물이 나는가. 김혜순은 이 질문을 안고 ‘죽음 다음’으로 나아간다.

둥그런 배를 안고 여자가 모로 누워 있다

숨길 수 없는 우물이

핏속을 돌다 어느 날 터졌다

터진 수맥을 품고

그 여자가 하루 종일 웃었다

평생의 모든 순간들이 너무 우스워

죽은 여자는 울다가 웃었다



고층 빌딩을 닦는 사람처럼

너는 네 몸 밖의 유리창에

매달려 눈물을 닦았다

너는 저 세상에서 왔건만

지금 너는 저 세상을 임신 중이다

분만대에서 태어나는 중인 신생아처럼

제 무덤 속에 목을 집어넣은 여자가

휴대폰의 제 사진을 들여다보는 시간

「묘혈」, 『죽음의 자서전』

둥그런 배를 품고 죽어서 누운 여자의 모습은 마치 봉분(封墳)을 연상케 한다. 시에서 죽은 여성은 ‘웃다가 울고, 울다가 웃는’다. 몸의 바깥으로 떨어지는 ‘눈물’. 왜 죽음은 눈물로 이어지는가. 생(生)에 도대체 무엇이 있었길래, 여자는 ‘무덤’ 속에 목을 집어넣고 ‘휴대폰’에 있는 제 사진을 들여다보는가. 그녀의 평생은 ‘우스웠던 순간의 집합’이다. 그렇다고 해서 죽음은 절대로 기꺼운 일이 될 수는 없었다. 혹시 두고 온 것은 없을까. 찬란했던 사랑의 순간은 없었을까. 화자는 돌아본다. 죽음 이후에도 여전히 생은 강력한 유혹이다. 이제 막 태어나는 중인 ‘신생아’의 본능처럼. 여자는 죽음을 ‘임신’하고 있다. 임신은 끝이 아니라 탄생과 시작이다. 순환을 상징하는 원처럼 둥근 배, 그 안에 담긴 죽음. 죽음은 끝이나 종말이 아니다.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가기 위한 사건이다. 시인은 ‘저세상’이라고 하지 않고 ‘저 세상’이라고 썼다. 시인이 예비하고 있는 죽음 이후의 세계가, 하나의 단어로 쓰일 만큼 관습화한 곳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구멍, 나의 거지.

구멍, 나의 왕자.

구멍, 내 몸의 움직임을 위한 콘크리트.

구멍, 나의 아득한 만다라.

구멍의 원활한 교통, 그것이 삶이다.

구멍이 나의 길이요 진리니, 나의 시작이요 마지막이니, 당신은 당신의 구멍을 다해 구멍하라.

내 구멍의 정체, 내 구멍의 고독. 내 구멍의 중독.

내 구멍의 관제탑에 앉아 계시는 이 누구신가?

내가 내 구멍의 미로 속을 실을 풀며 간다. 구곡양장의 머나먼 길.

「맨홀 인류」 부분, 『슬픔치약 거울크림』

색(色)은 백(白)으로, 백은 공(空)으로. 내부가 텅 비어있는 구멍(○)은 삼라만상을 포괄하는 절대적인 법칙이자, ‘없음’의 형식이다. 모든 ‘있음’은 결국 ‘없음’으로 빨려 들어간다. 죽음이란 결국 이 과정을 유기체의 언어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탐구해야 할 곳은 이 구멍의 세계다. 구멍은 김혜순의 시 세계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언젠가 “시의 한가운데 구멍 뚫려 있는 자리, 장소 없는 장소가 시의 장소”(『여성, 시하다』)라고 말한 바 있다. ‘시작’이자 ‘마지막’인 곳. 그곳에 다가가기 위해 우리는 ‘구멍을 다해 구멍’해야 한다. 그렇게 ‘구멍하고’ 있는데, 뜬금없이 관제탑에 앉아 계시는 이가 보인다. 도대체 누구신가?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를 끌어내신, 그 분일까?

아님께서 아님을 아니하시고 아님에 아니하고 아니하시니 아님이 아니하온지라

아님을 아니하고 아니하여 아니하대

아님이 아닌 아님은 아님이 아니나니 아님이 아님의 아님이요

아닌 아님은 아님이 아니나니 아님이 아님을 아니할 아님이요

「아님」 부분, 『죽음의 자서전』

부정을 부정하기. 부정의 부정의 부정을 부정하기. 자칫 장난스럽게 보이는 이 반복과 변주는 치열한 부정의 시학이요, 강력한 부정신학(否定神學)이다. ‘아님께서 아님을 아니하시’는 것으로 시작되는 이 부정의 말놀이는 ‘있음’의 언어로 ‘없음’을 파고들려는 몸부림이다. 성공하는가. 아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애초에 성공할 수 없었다. 그러나 실패가 오히려 성공이다. ‘있음’의 세계에서 실패하는 것만이 ‘없음’의 세계에 빛을 비춘다. 대차게 실패하기 위하여, 시인은 ‘아님의 리듬’을 직조한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알라모아나」, 『싱크로나이즈드 바다 아네모네』)을 불러내는 주문. 아님의 반복과 변주 속에서 ‘Lord No’(최돈미)는 잠시 모습을 보인다.

돼지와 테트리스의 정치신학
개별자에 갇혀서는 죽음을 끝이 아닌 시작으로 볼 수 없다. 주체를 넘어서는 보편의 사유가 요청된다. 하나를 넘어선 여럿. 그것을 위해 복무하는 죽음. 헤겔은 일찍이 죽음이 개별을 초월하고 공동체를 이루는 사건이 된다는 사실을 직시했다. 정신적 자기의식(Selbstbewusstsein)을 지닌 존재에게 죽음은 자연적인 의미의 죽음, 즉 “자연적 보편성 속에서 종결되는 운동의 결말”을 뛰어넘는다고 그는 해석했다. “죽음은 … 개별자의 비존재에서 벗어나 자신의 신앙 공동체 속에서 살고 그 속에서 날마다 죽었다가 부활하는 그런 정신의 보편성으로 거룩하게 변용된다.”[3] 자기 안에 갇힌 주체의 정신을 인륜성(Sittlichkeit)이라는 공동체적 개념으로 확장하고 고양하는 것. 죽음의 소임은 이것이다.

『날개 환상통』 시인의 말에 김혜순은 이렇게 썼다. “우리 엄마/우리 아빠//이제 보니/우리는/작별의 공동체” 헤겔의 공동체와 김혜순의 공동체를 곧장 이어 붙일 수 있을까. 그러려면 ‘신앙’(헤겔)과 ‘작별’(김혜순)이라는 거대한 두 단어가 해명돼야 한다. 그 고리가 김혜순의 시에서 발견된다. 바로 ‘돼지’다. 시를 한 편 읽을 것이다. “아무래도 돼지를 십자가에 못 박는 건 너무 자연스러워, 의미 없어”로 시작해서 “기쁘다 돼지 오셨네/만백성 맞으라!”로 끝나는, 지극히 신학적이고 정치적인 장시(長詩) 「돼지라서 괜찮아」(『피어라 돼지』)다.

우리는 어느 날 다큐멘터리를 찍는다. 영원히 생존할 자아를 위한 장기(臟器) 농장 프로젝트 촬영 중이다. … 나는 당신의 염통이 되려고 길러진다. 나는 당신의 폐가 되려고 길러진다. 나는 당신의 피부가 되려고 길러진다. 나는 당신의 쓸개가 되려고 길러진다. 심지어 나는 당신의 뇌가 되려고 길러진다. … 당신은 연두색 형광조끼를 입고 와서 내 사지를 묶어서 질질 끌고 간다. 당신은 내 간, 당신은 내 콩팥, 당신은 내 심장, 당신은 내 눈알, 당신은 내 피부, 간절히 울부짖어도 당신은 내가 당신인 줄도 모르고 나를 끌고 간다.

「돼지라서 괜찮아 — 돼지에게 돼지가」 부분, 『피어라 돼지』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나는 주님이다.”(레위기 19:18) 지구상에서 ‘돼지’만큼 모세의 계명을 잘 지키는 존재가 있을까. 돼지는 철저히 ‘당신’을 위해 길러진다. 당신은 인간, 이 글을 읽을(수 있는) 우리다. 돼지, 우리의 피부요 우리의 쓸개요 우리의 뇌.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돼지인 줄 모르고’ 돼지를 죽인다. 돼지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게 자연스러운 이유, 돼지가 만백성이 맞아야 할 구주(救主)의 자리를 대체할 수 있는 이유는 분명해진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올랐던 예수,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했던 예수, 그런데도 온갖 모욕을 당하며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돼지를 죽이는 인간과 오래전 예수를 죽였던 인간은 과연 다른가? 예수의 몸과 돼지의 몸은 ‘희생’이라는 단어로 수렴한다. 이 ‘신성모독’에서 우리는 사랑의 본질을 확인한다. 내 육신의 죽음을 앞뒀음에도 타인에게 향하는 것.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속죄의 제물로 내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이루어진 속죄는 믿음으로 얻어집니다. 사람들이 이전에 지은 죄들을 용서하시어 당신의 의로움을 보여 주시려고 그리하신 것입니다.”(로마서 3:25) 신은 십자가의 고통을 통해 드러난다. 한 저명한 신학자의 말을 빌리자면 십자가는 “(신이) 죽임으로써 살리는 분이라는 사실을 엄숙하게 기억하는 것”[4]이다.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에 떠는 저 몸에서 우리는 신의 빛을 본다. 고통스러운 몸을 그리는 김혜순의 언어도 그렇게, 사랑과 연대로 나아가는 정치적, 신학적 실천이 된다.

모니터를 켜고 벤야민은 테트리스를 시작한다. … 20년 묵은 시영아파트를 무너뜨리고 다시 그 자리에 고층 아파트를 짓겠다고 주민들이 모두 떠난 명일동 재개발 아파트 군단이 창 앞에 도열해 있다. … 지수가 올라갈수록 천국이 가깝다 한다. 또 하나, 시멘트 빌딩이 높아져 하늘에 닿으면 그 나라는 멸망한다는 규칙. 빌딩이 높아질수록 이 땅에 살아 남아 있을 수 있는 시간은 짧다 한다. … 이 전자 게임은 보이지 않는 천사와의 싸움이다. 하늘에서 시멘트 덩어리를 던지는 보이지 않는 천사. 이 땅에 보이지 않는 집을 짓는 것은 벤야민의 몫이고, 시멘트 덩어리를 던지는 것은 천사들의 몫이다. … 한쪽에선 301동이 지축을 뒤흔들며 단 한 번에 무너져내린다. 아직도 이사를 떠나지 않은 벤야민의 방이 부르르 떤다. 地球時計가 무거운 몸을 뒤채는 소리를 곁에서 들을 때처럼 302동 303동 차례로 무너지는 소리를 참을 수 없다.

「벤야민의 테트리스」 부분,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벤야민’은 그저 텅 빈 기표일지도 모른다. 시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테트리스 게임을 하고 있는 벤야민이 ‘발터 벤야민’임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나 ‘하늘’, ‘천사’, ‘하나님’, ‘멸망’…. 이 시어들에서 우리는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저 매혹적인 유대인 철학자의 얼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쇠락하고자 애쓰는 것, … 이것이 세계 정치의 과제이며 이를 위한 방법은 ‘허무주의’(니힐리즘)로 불릴 수 있다.”[5] 벤야민이 1921년 작성한 짧은 에세이 「신학적·정치적 단편」의 의미심장한 마지막 문장은, 신학과 정치의 불가분한 관계를 암시한다.

세속의 정치를 생각한다. 그것의 과제는 ‘쌓아 올리는’ 것이다. 견고한 벽을 짓고 그 안에서 안락하게 영속(永續)하는 것이다. 벽은 저들과 우리를 가르는 경계. 정치가 “적과 동지의 구분”이라고 했던 칼 슈미트의 정의대로 적대(敵對)를 자양분으로 삼는 현실의 정치는 점차 혐오와 테러의 수위를 높이며 자기들만을 위한, 강고한 성을 구축하고 있다. 그러나 벤야민과 김혜순의 정치는 정반대다. 그들에게 정치는 “쇠락하고자 애쓰는 것”이고, “무너져 내리는 것”이며 결국 몰락하는 것이다. 천사들이 던지는 ‘시멘트’는 신의 시험이다. 그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시멘트 빌딩을 계속 높이는 것은 멸망으로 이어진다. 벤야민, 어쩌면 우리의 ‘몫’은 지상에 보이지 않는 집을 짓는 것. 즉, 우리가 철저히 지상에 속한 존재임을 알고 끊임없이 몰락을 반복하는 것이다. 한 줄이 채워지면 그 줄이 사라지는, 이것을 무한히 반복해야 하는 게임인 테트리스는 신과 인간 사이의 거리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은유다.

‘301동’이 무너지고, ‘302동’과 ‘303동’도 차례로 무너진다. 시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벤야민은 이제 레벨 13의 시멘트 언덕을 기어오르기 시작한다.” 도대체 시멘트 언덕을 어디까지 올라야 할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이 정치와 시의 전부다. 시몬 베유는 이렇게 말한다. “죽은 자들에게 바쳐진 사랑은, 미래를 전범 삼아 생각해 낸 거짓의 불멸성을 향하지 않는 한, 전적으로 순수하다. 더 이상 새로운 그 어떤 것도 줄 수 없이 이미 끝난 삶을 욕망하기 때문이다.”[6] 영원 속에서 한없이 가라앉는 것. 세계의 중력을 음미하고 낮은 데로 향하는 것. 몰락과 죽음을 끌어안는 것. 어쩌면 무너져 내리는 것만이, 완고한 저 적대의 성을 깨뜨릴 수 있는 유일한 힘일지도 모른다.

사랑의 죽음, 혹은 죽음의 사랑
나는 지금 아름다운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

물도 없는데

물속에 있는 듯

내 코에서 돋아나온 문어 같은 조갯살 같은 코끼리의 간 같은

널찍한 혀 같은

나는 식물도 동물도 어류도 파충류도 아니야.



네게 노래 불러주면 나는 성별이 달라져

여자가 되었다가

남자가 되었다가 다시 여자도 남자도 아닌 자가생식의 성

너와 뒤척이면서 나는 인종이 달라져

레드 인종 블루 인종 핑크 인종

고음을 낼 땐 설치류의 얼굴이었다가

저음을 낼 땐 물에 사는 조류의 얼굴이었다가

내 몸에서 내 몸이 돋아 나올 때

내 몸이 세상 전체일 때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 부분, 『싱크로나이즈드 바다 아네모네』

김혜순 스스로 명명한 ‘죽음 트릴로지’(『죽음의 자서전』·『날개 환상통』·『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 이후 나온 최근작 『싱크로나이즈드 바다 아네모네』는 다소 발랄하다. 죽음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일까. 아니다. 시인은 여전히 죽음을 논하고 있다. 그렇다면 발랄함과 죽음이 어째서 하나로 놓일 수 있는가? 김혜순은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죽음이 격렬한 슬픔이기만 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죽음이 동시에 지극한 ‘사랑’과도 맞닿을 수 있다는 사실을.

시인은 몸의 운명인 성(性)과 종(種)의 구분을 어떻게 깨뜨릴 수 있을지 탐구한다. ‘식물도, 동물도, 어류도, 파충류도 아닌’ 나. 여자였다가, 남자였다가 여자도 남자도 아닌 존재가 되는 나. 그렇게 내 몸은 세상 전체가 된다. 세계는 무상(無常)하다. 세계에 속한 몸 역시 끊임없이 변화하기에 그것을 붙잡는 방법은 끝없는 부정뿐이다. 그래서 김혜순의 시는 부정의 춤을 춘다.

‘노래’란 타인에게 예술로 말을 거는 것, 바로 시다. 시에서 우리는 몸으로 세상을 담을 수 있다. 몸이 세상이 되면, 그 안에 있는 모든 존재를 품을 수 있을 터. 그것보다 큰 사랑이 있을까. 이런 게 ‘십자가의 사랑’ 아닌가.

사랑을 보여줘 하면

내 옷을 찢어야 하나

춤이라도 춰야 하나



얼른 보여줘 자꾸 보여줘 하면

둘이 같이 비닐을 쓰고 비를 맞자

이 비닐을 벗고 싶을 때까지 사랑하자

그렇게 말하자

아니면 좁디좁은 우주선에 둘이 타고 우주로 나가서

냄새 지독하고 폐소공포증 터지는

우주선에서 내리고 싶을 때까지 사랑하자 그렇게 말하자

「연인과의 타이틀매치」 부분, 『싱크로나이즈드 바다 아네모네』

이제 시인은 정말로 ‘달콤한’(?) 사랑을 말한다. 사랑이야말로 인간이 몸으로 수행하는, 가장 인간적인 것이다. 그러나 김혜순이 사랑을 포착하는 방식은 통상적이지 않다. 화자는 ‘비닐을 벗고 싶을 때까지’ 그리고 ‘폐소공포증 터지는/우주선에서 내리고 싶을 때까지’ 사랑을 속삭이라고 권유한다. 죽기 직전까지, 사랑하자는 말이다. 이는 연인들이 으레 서로에게 속삭이곤 하는 “죽을 만큼 사랑해”의 김혜순식 표현이다.

앞서 등장했던 헤겔은 ‘사랑’에 관해서도 의미 있는 글을 여럿 남겼다. 그는 젊은 시절 쓴 아주 짧은 단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랑은 모든 대립을 배제한다. … 사랑은 여전히 분리된 것, 개별성에 관해 분노한다.” 그렇다. 사랑은 ‘나’와 ‘너’를 합치는 일이고, 외따로 떨어져 있는 것에 분노하는 일이다. 그는 이렇게도 덧붙인다. “사랑하는 자들은 죽어 있는 많은 것과 연결되어 있다.”[7] 죽음과 함께 사랑이 끝난다면, 그것이 어찌 사랑일 수 있을까. 어떤 사랑은 죽음으로 완성되기도 한다. 트리스탄과 이졸데, 두 사람의 사랑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리워하고 갈망하던/사랑의 죽음이여!/네 품속에서/거룩하고 따스한 네게 바쳐져서,/깨어남의 고통에서 벗어나라!”[8]

사랑이란 게 대체 뭘까요? 사랑이란 것은, 자기 안에 중심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모종의 결핍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다른 누군가가 필요한 거죠. 다른 사람이 없이는 못 살겠다는 겁니다. … 사랑은 나의 결핍을 고백하는 겁니다. 완전한 상태가 되어서도 인간은 ‘내’가 아니라 ‘우리’로 존재할 거라는 겁니다. 결핍은 완전함 자체 안에서도 존재할 거라는 뜻이죠. 「고린도후서」에 이렇게 쓰여져 있듯이 말입니다. “너의 힘은 너의 약함 속에서 작용한다.”

야콥 타우베스, 『바울의 정치신학』[9]

‘나’는 ‘나’의 죽음을 경험하지 못한다. 타인의 죽음을 ‘목격’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에 슬퍼하는 것, 애도하는 것, 그리고 나 역시 죽을 수 있음을 깨닫는 것. 죽음과 사랑이 함께 놓일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타우베스는 인간이 ‘완전한 상태’가 되어도 ‘우리’를 향해 나아갈 거라고 확신한다. 아니, 그의 말은 수정돼야 한다. ‘오롯이’ 있는 나는 결코 ‘완전’할 수 없다. ‘나’는 반드시 ‘너’를 필요로 한다. ‘나’는 ‘너’로써 완성된다.

“사람은 ‘너’에게 접함으로써 ‘나’가 된다.” 부버에게서 ‘나’와 ‘너’는 서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나-너’가 “‘근원어’(Grundworte)로서 ‘짝말’(Wortpaare)”이라고 주장한다. ‘나-너’의 ‘관계’가 존재와 세계의 본질 중 하나라는 해석이다. “자기의 존재를 기울여 거듭난 관계에의 힘을 가지고 ‘너’의 세계로 나가는 사람은 자유를 깨닫게 된다.”[10] 사랑은 결핍을 깨닫는 일이고, ‘나’와 반드시 함께 있어야 하는 ‘너’의 없음을 고백하고 찾는 일이다.

인간은 결핍으로 사랑을 찾고,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슬퍼하며 그것으로 나 역시 죽을 수 있음을 안다. 그리고 나의 죽음이 ‘나’를 넘어 ‘우리’를 결집한다는 걸 비로소 인식한다. 이렇게 죽음은 공동체의 사건이 된다.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는 저 ‘참사’들을 보라. 우리는 죽음의 슬픔으로서만 서로를 확인하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타자를 통해, 사랑을 통해 ‘나’를 넘어서서 진정한 ‘우리’가 되는 것. 여기서 레비나스의 말을 빌려올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얼굴에서 타인의 에피파니를 전제함과 동시에 하나의 지평을 보여 줄 필요가 있다. 이 지평에서 자아는 죽음을 넘어서 자신을 지탱하며, 또한 자기로의 복귀로부터 자기를 회복한다. 이러한 지평이 사랑과 번식성의 지평이다.”[11]

나는 목소리는 듣지 못하고

뼈만 보는 사람이 되었어

살 속만 보는 사람이 되었어

백만 명의 인파가 한 사람의 노래를 따라 부를 때

턱이 열리고 윗니와 아랫니 턱뼈와 코뼈

각자의 손에 뜬 빛을 받은 뼈들이 몸을 흔드는 광경

악기 소리는 들리지 않고 백만 개의 뼈들이 내는 소리



이 뼈들이 백만 개의 빛을 들고

백만 개의 연기가 공중에서 만나 사랑을 나누고



제 뼈를 갈아 노래를 부르는 것 같은 저이는 누굴까

「백만 명의 뼈」 부분, 『싱크로나이즈드 바다 아네모네』

뼈는 죽음 이후에 드러나는 물질이다. 살의 안쪽에 있는 것이다. ‘뼈만 보는’ 화자는 삶 가운데서도 죽음을 응시한다. 그곳에 악기는 없지만, 백만 개의 뼈들이 내는 소리가 있다. 심지어 제 뼈를 갈아 노래를 부르는 것 같은 이도 있다. 이곳에는 시인과 시가 있다. “우리는 엄마의 몸이라는 구멍, 엄마의 몸이라는 떠남, 엄마의 몸이라는 죽음과 함께 자랍니다. 우리는 엄마의 죽음으로 ‘내’가 되었지만, 그 죽음 때문에 죽음을 향해 달려가게 되지요.”(『김혜순의 말』) 우리가 도달하려는 죽음은, 우리를 서로에게 밀어붙이고, 상실과 슬픔을 넘어 공동체를 결속한다. ‘백만 개의 연기가 공중에서’ 만나는 사랑은 그런 것이다. 저 멀리,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부터 도착한, 죽음과 정치의 문제를 치열하게 사유한 어느 철학자의 글이 어쩌면 여기에 포개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죽음은 정확히 내가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대상이자 그 너머에 있는 지평이다. 하지만 또한 죽음은 자유와 부정이 작동하는 공간이기도 하다.”[12] 이제 우리는 비로소 김혜순의 장시 「작별의 공동체」(『날개 환상통』)가 무엇을 말하는지 해명할 수 있다.

무풍지대와 작별의 공동체
우리가 영원을 시작하던 시절

늘 시작만 하던 시절



흐린 날개들이 있었다

불가사의하게 긴 속눈썹을 깜빡거리면서

무한히 작아진

추방된 빛처럼

투명한 쌀알갱이들이 쏟아져 내리듯

작은 영혼들이 있었다



우린 이미 죽음을 시작했으므로

모두 평등이었는데

그땐 왜 몰랐을까



그곳엔 시작도 없고 마지막도 없고

이미도 없고

아직도 없고

여자도 없고

아빠도 자식도 없잖아

그래서 평평하잖아

그래서 무한하잖아

「작별의 공동체—작별의 신체」 부분, 『날개 환상통』

‘우린 이미 죽음을 시작했’다는 화자의 선언. 죽음은 ‘시작될’ 수 있는가. “나는 죽었다.”(I am dead.)라는 말을 생각한다. 일상적으로는 자주 쓰이지만, 잘 보면 절대로 성립할 수 없는 발화(speech)다. 죽은 존재가 어떻게 말하는가. 죽은 자의 혀가 어떻게 떨릴 수 있는가. “나는 죽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러나 ‘없는 것’은 전적으로 ‘말’일뿐이다.

“말(speech)과 언어(language)의 한계는 다르다. … 우리가 ‘언어’라고 부르는 것은 자기 자신보다 오래 살아남는 존재에 다름 아니다.”[13] “나는 죽었다”고 말할 순 없지만, 그렇게 ‘쓸’(writing) 수는 있을 것이다. “나는 죽기 전에 죽고 싶었다.”(『죽음의 자서전』 시인의 말) 시인의 욕망은 오로지 시쓰기, 문학을 통해서만 채워질 수 있을 것이다.

김혜순은 문학을 “독재정권 속에서 무풍지대 같은 공간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정의한 적 있다.(『김혜순의 말』) 어떤 곳일까. 이런 말들로 설명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끊임없이 죽음이 시작되는 공간, 너무나도 ‘없어서’ 바람조차 불지 않는 무풍지대, 로고스적인 적대의 법칙이 통하지 않는 무의 세계, 현실에서 추방된 ‘부재자’들이 사랑하는 공간, 만물이 ‘평평’하고 ‘무한’한 곳, 죽음 그 자체인 곳, 와해를 통해서만 끈끈해질 수 있는 ‘없음의 유토피아’. 현실에 이런 곳은 없다.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므로 이곳은 역설과 이율배반의 언어로만 포착할 수 있다. 시는 그런 것이다. 끝없는 소멸, 그 무한한 ‘지움’ 가운데에서만 영원히 ‘쓰이는’ 것. 그렇게 새롭게 피어났다가, 다시 사라지는 것. ‘없음’과 ‘없음’ 사이에 아주 잠시 ‘있는’ 것, 그리고 다시 ‘부정’의 여정을 떠나는 것.

[1] 이 글은 김혜순이 가장 최근 발표한 『싱크로나이즈드 바다 아네모네』(난다, 2025)를 비롯해 그의 시집 열다섯 권 모두를 비평의 대상으로 다룬다. 다만 죽음에 관한 시인의 생각이 첨예하게 드러난 ‘죽음 트릴로지’(『죽음의 자서전』·『날개 환상통』·『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에 조금 더 밀착한다. 작품 인용 시 작품명과 함께 작품이 실린 시집명도 병기하되, 페이지는 따로 밝히지 않는다.

[2] 어니스트 베커, 『죽음의 부정』, 노승영 옮김, 복복서가, 2023, 29~50쪽.

[3]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정신현상학』 2권, 박준수 옮김, 아카넷, 2022, 758쪽.

[4] 칼 바르트, 『로마서』, 손성현 옮김, 복 있는 사람, 2017, 283쪽.

[5] 해당 문장의 독일어 원문은 이렇다. “Diese zu erstreben, auch für diejenigen Stufen des Menschen, welche Natur sind, ist die Aufgabe der Weltpolitik, deren Methode Nihilismus zu heißen hat.” 국내 소개된 여러 버전(조효원·최성만·김영룡)의 한국어 번역을 참조해 이 글의 맥락에 맞게 수정했다. ‘쇠락’으로 옮긴 단어는 이 문장 바로 앞에 있는 ‘Vergängnis’로 덧없음, 소멸, 무상함, 몰락, 스러져 가는 것 등의 의미를 담고 있다.

[6] 시몬 베유, 『중력과 은총』, 윤진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1, 92쪽.

[7] 헤겔, 『청년 헤겔의 신학론집』, 정대성 옮김, 그린비, 2018, 445~449쪽. 일부 번역은 독일어 원문과 대조해 수정했다.

[8] 리하르트 바그너, 『트리스탄과 이졸데』, 안인희 옮김, 풍월당, 2021, 261쪽. 인용한 부분은 2막 2장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이중창.

[9] 야콥 타우베스, 『바울의 정치신학』, 조효원 옮김, 2012, 133~134쪽. 저자의 강연을 번역한 것으로 가독성을 위해 군말은 생략했다.

[10] 마르틴 부버, 『나와 너』, 표재명 옮김, 문예출판사, 1995, 7~77쪽. 이 책에서 부버는 ‘나-너’ 외에 다른 근원어로 ‘나-그것’이 있다고도 밝히며 자신의 논지를 펼쳐 나간다.

[11] 에마뉘엘 레비나스, 『전체성과 무한』, 김도형·문성원·손영창 옮김, 그린비, 382쪽.

[12] 아쉴 음벰베, 『죽음정치』, 김은주·강서진 옮김, 동녘, 2025, 176쪽.

[13] 대니얼 헬러-로즌, 『에코랄리아스』, 조효원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5, 194~199쪽

 

 

  <당선소감>

 

   언어뿐인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그저 끝없이 쓰는 것

‘죽음’은 유구한 질문이자 무한한 공포였다. 몸의 소멸은 정말로 정신의 ‘없음’이 될까. “나는 죽기 전에 죽고 싶었다.” 김혜순 시인의 문장 앞에서 생각한다. ‘나’는 죽을 수 있는가. ‘죽은 나’는 ‘나’가 아니므로 ‘나’는 죽을 수 없다. ‘죽기 전에 죽는 것’은 불가능한 욕망 아닌가.

사춘기 소년은 죽음이 두려워 온몸을 떨었다. 무상한 세계에서 모든 게 스러질 거란 허무. 유한의 무게에 짓눌릴 때 문학으로 파고들었다. 언어뿐인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끝없이 말을 하고 글을 쓰는 것. 그러나 글이 말보다 한 수 위다. 말이 사라져도 글은 남아 ‘나’를 넘어서니까.

“오 쓴다는 것, 써야 한다는 생각에/내가 얼마나 높이높이 내 희망과 절망을 매달아 놓았던가를/내가 얼마나 깊이깊이 중독되어왔던가를”(최승자, ‘워드 프로세서’)

문학이라는 미로에 나를 가둔 스승 조효원 교수님과 든든한 문우(文友) 양순모 박사에게 오늘의 기쁨을. 김미경·홍지민 선배가 없었다면 제 문장은 완성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부족한 글에서 가능성을 봐 주신 우찬제 교수님과 귀한 지면을 내어 준 조선일보사에도 깊은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하늘에 계신 어머니와 지상에 계신 아버지. 죽음은 어떤 것도 끝낼 수 없기에 우리는 여전한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나의 ‘즐거운 편지’를 받아야 할 사람. 한없이 ‘사소하고 구체적인’ 사랑을 전합니다.

연세대 독어독문학과 졸업, 연세대 비교문학 석사과정 / 신문기


 

  <심사평>

  

  비평 주체와 텍스트의 긴장감 넘치는 대화

대폭 늘어난 응모작들은 저마다 비평적 열정과 도전적 감수성으로 빛났다. 문학에 대한 진지한 관심과 수행이 K-문학의 질적 도약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하며 신인들의 비평적 목소리를 경청했다. ‘애도로서의 삶, 봄밤의 윤리: 백수린론’, ‘장면들의 전개도, 정물화에서 큐비즘으로: 이기리론’,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 치열한 동시대 감각’, ‘잔영과 여음’ 등은 끝까지 잘 읽힌 평문이다.

노벨문학상 효과로 많았던 한강론 중 ‘‘몸 된’ 언어로 부르는 진혼곡’에 눈길이 오래 머물렀다. 한강의 텍스트들을 가로지르며 육화된 기억과 신체화된 언어로 감정 공동체가 빚어지는 양상을 잘 분석했는데, 일부 문장들이 불안정해 보여 안타까웠다. ‘플레로마의 새’는 기품 있는 문장으로 최승자 시 세계를 숙고한 글인데, 비평적 관점의 그물 사이로 빠져나가는 시적 에너지의 잉여를 성찰케 했다. ‘사물의 심연, 혹은 폐허 위에서 추는 객체들의 무도(舞蹈)’는 진중한 발상과 접근으로 눈길을 끌었지만, 제재인 운동화뿐 아니라 그것을 빚어낸 텍스트의 객체 지향 존재론도 함께 고려했더라면 더 좋았겠다.

당선작인 ‘무(無)의 정치, 혀의 신학―김혜순론’은 인문학의 중층적 맥락을 가로지르며 성찰의 복합성을 수행한 글이다. 풀기 어려운 김혜순의 시적 징후의 매듭을 풀어보려는 언어의 공동체가 어떻게 형성될 수 있을지 그 가능 세계에 도전한다. 비평 대상에 이끌리지도 않고 대상을 재단하지도 않는, 비평 주체와 텍스트의 긴장감 넘치는 대화가 어지간하다. 그 비평적 열정과 예지를 헤아리며 당선의 영예를 선사한다. K-문학의 도약으로 비상할 비평적 실천을 예감하며 미리 감사와 축하의 인사를 보낸다.

심사위원 : 우찬제·문학비평가


 

  <AI와 함께하는 작품 분석>

 

1) 이 평론의 핵심 주장 3줄

  1. 죽음을 ‘개체의 종말’로만 보면 공포/자기애/부정의 장치(종교·영웅주의)에 갇힌다.
  2. 김혜순의 시는 죽음을 ‘끝’이 아니라 ‘관계(나→너)’를 여는 사건으로 재배치한다.
  3. 그 과정에서 시는 **무(無)를 통치하는 정치(연대·작별의 공동체)**이자, 보이지 않는 신을 더듬는 **혀의 신학(부정신학적 언어 수행)**이 된다.

2) 글의 큰 설계: “신학→부정→정치→사랑”의 이동

이 글이 설득력 있는 이유는 논지의 이동이 “감정”이 아니라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이에요.

(1) 서두: 바울–니체–점근선

  • 바울(부활 약속)로 시작해, 니체(‘신성한 거짓말’/신의 약화)를 통과합니다.
  • “죽음은 살아서 도달할 수 없다”를 점근선 비유로 밀어붙이면서, 유한/무한의 간극을 일단 단단히 세웁니다.
    → 여기서 비평의 질문이 확정돼요: “그럼 우리는 죽음을 어떻게 다룰 수 있나?”

(2) 방향 전환: “죽음 극복”을 거부하고 “죽음과 함께”로

이 글의 야심은 “죽음을 극복한다”는 전통(종교/영웅서사)을 뒤집고,
죽음을 공동체를 여는 계기로 읽겠다고 선언하는 데 있습니다.
→ 이 선언이 이후 모든 작품 분석의 ‘렌즈’가 됩니다.

(3) 본론: 김혜순 시를 ‘부정신학+정치신학’으로 조립

  • 1부: 보이지 않는 신을 찾는 부정의 리듬(구멍/아님/죽음의 임신)
  • 2부: 돼지와 테트리스의 정치신학(희생·십자가·재개발·몰락의 정치)
  • 3부: 사랑의 죽음/죽음의 사랑(성·종·인종의 변주, 연인의 ‘끝까지 사랑’)
  • 결론: 무풍지대/작별의 공동체(문학=현실 밖의 “장소 없는 장소”)

3) 키워드 해석: 제목이 이미 논지다

A. “무(無)의 정치”

여기서 ‘정치’는 선거/제도보다 더 넓은 뜻이에요.
누가 ‘우리’에 들어오고, 누가 밀려나는가를 가르는 힘의 배치가 정치라면,
김혜순의 시는 “있음(정상/주체/성공/영속)”의 질서가 쳐놓은 경계 바깥—
부재자, 죽은 자, 희생된 몸이 들리는 자리로 독자를 끌고 갑니다.
→ ‘무’는 공허가 아니라, **배제된 것들이 모이는 장(場)**이 됩니다.

B. “혀의 신학”

‘신학’이 원래 “신을 말하는 학문”이라면, 이 글에서 신학은 정반대로 움직여요.

  • 보이는 신, 확실한 구원, 단정적 교리를 말하지 않고
  • 말로는 붙잡을 수 없는 것(죽음/부재/신)을 ‘부정의 언어’로 더듬는 수행이 됩니다.
    그 수행의 기관이 ‘혀’인 이유는 중요해요.
    김혜순 시에서 언어는 관념이 아니라 몸의 기관이고, 혀는 “로고스(정상 언어)”가 감추는 고통/구토/침/울음까지 끌어올립니다.
    → 그래서 ‘그로테스크한 몸의 언어’가 단지 충격이 아니라, **형이상학(죽음 이후)**을 만지는 방식이 됩니다.

4) 작품 읽기 포인트: 인용된 시들이 논리를 “증명”하는 방식

이 평론은 작품을 장식으로 붙이지 않고, 핵심 개념을 작품 속 이미지로 “작동”시켜요.

① 「묘혈」: 죽음은 끝이 아니라 “임신”

  • 죽은 여자의 둥근 배, “저 세상”을 “임신”하는 이미지.
    → 죽음을 종결이 아니라 다른 차원의 탄생으로 바꾸는 장치.
    특히 “저세상”이 아니라 “저 세상”이라고 띄어 쓰는 해석은, 비평이 텍스트의 미세한 표기를 통해 자기 논지를 밀어올리는 좋은 사례예요.

② 「맨홀 인류」/「아님」: ‘구멍’과 ‘부정’은 실패로 성공한다

  • 구멍(○)은 “시작이자 마지막”, “장소 없는 장소”.
  • 「아님」의 끝없는 부정은, ‘있음의 언어’로 ‘없음’을 말하려다 필연적으로 미끄러지는 실패를 반복합니다.
    그런데 이 평론은 그 실패를 “결함”이 아니라 부정신학의 정수로 읽죠:

말로 붙잡히지 않는 것을, 말이 무너지는 방식으로만 드러낼 수 있다.

③ 「돼지라서 괜찮아」: 십자가를 ‘윤리’가 아니라 ‘정치’로 확장

돼지는 “당신의 장기”가 되기 위해 길러지고, 인간은 “내가 당신인 줄도 모르고” 끌고 갑니다.
→ 타자의 희생 위에 선 공동체(우리)의 비밀이 폭로돼요.
비평은 여기서 “돼지=예수”라는 위험한 병치를 일부러 택합니다. 왜?
‘희생’이 사회 시스템에서 얼마나 쉽게 ‘자연스러움’이 되는지를 보여주려는 거죠.
그래서 이 대목이 제목의 “정치”를 가장 노골적으로 증명합니다.

④ 「벤야민의 테트리스」: ‘쌓기’의 정치 vs ‘무너짐’의 정치

재개발 아파트, 지수, 시멘트 덩어리, 천사, 멸망 규칙.
→ 근대/자본의 논리(더 높이, 더 견고히, 더 영속)를 테트리스 게임으로 알레고리화합니다.
이 글이 강한 지점은 여기예요:

  • 현실 정치는 “적/동지 구분”으로 성을 쌓고
  • 김혜순(그리고 벤야민)의 정치는 쇠락·몰락·무너짐을 감수하는 정치라고 뒤집습니다.
    즉 “버티기”가 아니라 “무너짐을 견디기”가 공동체의 조건이 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⑤ 『싱크로나이즈드 바다 아네모네』: 죽음과 발랄함의 결합

겉으론 ‘발랄’하지만, 여기서 발랄함은 죽음을 지우는 게 아니라
죽음과 함께 사는 방식(변주/탈주/부정의 춤)으로 읽힙니다.

  • 성/종/인종이 바뀌는 몸 → 주체 경계가 해체됨 → “나”가 “세상 전체”가 됨
    → 죽음이 열어젖히는 ‘나-너’의 확장을 시적 몸으로 보여주는 셈이죠.

⑥ 「작별의 공동체」/무풍지대: 문학의 장소론으로 결론

“우린 이미 죽음을 시작했으므로 / 모두 평등”
→ 죽음이 ‘평평함(무한함)’을 연다는 결론은,
앞의 ‘구멍’과 ‘무’의 논의를 사회적 평면으로 가져오는 종착점입니다.
그리고 “무풍지대”는 문학을 현실의 억압(독재/폭력/혐오)에서 잠시 벗어나게 하는
역설적 피난처이자, 배제된 것들의 임시 공동체로 규정돼요.


5) 이 글의 강점(왜 당선작으로 강하게 보였는가)

  • 개념이 텍스트를 ‘설명’하지 않고, 텍스트가 개념을 ‘발명’하게 만든다.
    (구멍/아님/돼지/테트리스 같은 이미지가 논지의 엔진 역할)
  • 이론 인용이 많지만, 대체로 “권위 장식”이 아니라 논리의 교각으로 쓰입니다.
    (바울→니체→부정신학 / 베커→죽음 부정 / 헤겔→공동체 / 타우베스·부버·레비나스→나-너·우리)
  • 무엇보다 “죽음”을 슬픔으로만 두지 않고, 연대·작별·사랑의 정치로 전환시키는 확장성이 큽니다.
    심사평의 “비평 주체와 텍스트의 긴장감 넘치는 대화”가 바로 이 지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