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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치를 든다. 

팔과 손등에 툭 튀어나온 검푸른 핏줄이 잊히지 않는 과거처럼 꿈틀거린다.

묵직한 절망의 무게를 느낀다. 

페트병 허리 부분을 잘라 만든 못통을 들어 거의 코에 박다시피 들여다본다. 별반 차이점이 없는데도 콘크리트 못을 신중하게 고른다. 까마귀의 부리처럼 뾰족한 니퍼로 못 몸통을 꽉 잡고 벽에 댄다. 사정없이, 그렇지만 펑퍼짐한 못대가리를 정확히 때린다. 탁, 탁, 탁, 나는 이 소리에 점령당했다. 뭔가를 뚫고 지나가는 이 소리, 이 울림. 지독히 쓰디쓴 인생 맛이 나듯. 온몸이 떨리고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의 카페인이 필요하다. 어떤 수단, 또는 어떤 주술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 사건에 대해 감상 후기 같은 말을 떠벌리거나, 또는 알아듣기 쉽게 이름을 붙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일반적으로 '죄'라고 불리는 그 사건을 나는 어떻게 불러야 할지 아직 모른다.

첫 망치질, 정중앙으로 힘이 정확히 전달되지 않으면 못이 흔들리게 되고 못이 뚫고 들어간 구멍이 커진다. 그러면 망치질을 할 때마다 구멍 주위의 콘크리트가 떨어져나가 못을 지지하지 못해 아예 박지 못하거나 박더라도 아무 것도 걸 수 없게 된다.

다시 망치를 휘두른다. 틱, 빗맞아 불똥이 튀며 못이 누워버린다. 

망치에서 전해진 진동이 두꺼워진 팔뚝을 타고와 가슴께 먹먹하게 머문다.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머리가 보낸 신호를 몸이 곧바로 받아들여 실행하지 못한다. 무엇보다 금방 지친다. 조율되지 않은 바이올린처럼 머리가 아프다. 오래된 전구가 깜빡이는 것처럼 끊겼다 연결되는, 그러나 절대로 끊어지지 않고 한 없이 늘어나 점점 멀어지는 느낌. 도대체 어디에서 멀어지는 것일까?

뜬금없이 예수가 목수였다는 사실이 떠오르고 유다가 떠오른다. 유다는 과연 배신자였을까? 그도 계획의 일부였다. 배신자라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인물이다. 유다에게 죄를 물을 수는 없다. 나는 눈을 질끈 감는다. 이건 무슨 논린가! 유다는 살인자다. 그건 부정할 수 없다. 방금 전, 잠시지만, 나는 나를 이해할 수 있다는 공포를 느꼈다. 

예전에 아이가 교회를 갔다 와서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예수님을 왜 죽였어?"

죽었어가 아니라 왜 죽였냐고 물었다. 나는 일반적인 답 정도는 알기에 말해줬다.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

"그래서 죽인 거야?"

어감이 이상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했으니 틀린 말은 아니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는 놀란 듯 나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나는 아이에게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다. 나는 죽음이 죄를 사한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지금도 여전히 믿지 않는다. 죽음은 그냥 죽음이다. 그냥 없어짐의 다른 표현이다. 죽음이 심각하고 거창하고 끈질긴 이유는 우리가 살아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죽은 자들을 잊지 못하고 끝없이 불러내기 때문이다. 

거의 울상이었던 아이는 갑자기 아이들이 가지는 특유의 조울증 같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말했다. 

"뭐, 상관없어!"

뭐가? 나는 당황했다. 뭐가 상관없는 건가? 순수한, 지독히 순수한 아이는 내가 모르는 무엇을 알아 챈 것일까? 순수는 과연 무엇을 깨달은 것일까? 

이곳에 이미 만들어 놓은 하얀색 페인트칠을 한 선반을 걸 것이다. 선반 위에는 내가 줄을 쳐가며 두 번 이상 읽은, 그래서 새로운 느낌이 없는 전공서나 실용서 따위의 책을 올려놓을 것이다. 벌써 먼저 읽어야 할 우선순위를 정해놓았다. 모든 것이 다 계획되었다. 언젠가부터 나는 어항 속의 물고기처럼 계획 속에서만 숨을 쉰다. 계획을 다 마치면, 아니 마치기도 전에 새로운 계획을 세운다. 나에게 인생은 연속적인 어떤 흐름이 아니다. 이제 축적이다. 절단면이 분명한 싸임. 어느 순간 끊겨도, 아니 순간 순간 끊어져 있다. 나는 그렇게 다시, 재빨리 방금 전의 인생 위에 뭔가를 쌓아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순간 순간 나는 죽음을 경험한다. 그리고 숨을 쉬기 위해 계획이란 도구로 강렬하게 가슴을 펌프질 한다. 

선반을 다 만든 후에는 바퀴가 달린 나의 새로운 다리가 자유로울 정도로 넓고 높은 책상을 만들 것이고 오랫동안 팔꿈치를 대고 무언가를 쓸 것이다. 

니퍼를 잡고 있는 왼손에 닿은 벽이 차갑다. 

지저분하게 뚫린 구멍 바로 옆에 못을 다시 박는다. 못이 서서히 차가움을 뚫는다. 못대가리가 몇 번의 망치질로 순식간에 뜨거워진다. 전기 드릴로 나사못을 박아 가구를 만들면 쉽다고 들었지만 무슨 고집인지 나는 망치로 못을 박는다. 나무에 컴퓨터용 흑색 수성 사인펜으로 못이 들어갈 곳에 작은 점을 찍고 오랫동안 보고 있으면 점이 멀어지며 소실점으로 변한다. 곧 점은 춤을 추듯 도망친다. 나는 나비를 쫓아 포충망을 휘두르듯 망치를 휘두른다. 못이 정확히 원하는 곳에 박히자 당혹스러울 정도로 흡족한 마음이 감각도 없는 다리에서부터 차오르는 듯하다. 

어둠이 집 안으로 스민다. 나는 곧바로 망치질을 멈춘다. 서둘러 손에 들려있는 연장을 내려놓는다. 가슴이 심하게 뛴다. 결국 참지 못하고 왼손으로 오른손목을 목을 비틀듯 살짝 비틀었다가 놓는다. 벌써 밤. 항상 밤. 밤에 형광등 아래에서 하는 망치질은 뚫을 수 없는 두꺼운 철판에 못으로 스크래치를 하는 소리 같다. 귀를 막아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 이건 공포처럼 내부에서부터 올라오는 소리다. 같은 종류의, 같은 동족의 살갗에 박는 소리, 그래서 비명. 진정한 살인 같은 느낌. 그건 불쾌하고 두려운 느낌인데, 구체적으로 따지고 들면 어떤 깨달음 같기도 한데 알 수 없다. 단순히, 절대로 표면을 긁어낼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살을 벗겨내고 뼛속까지 긁어내도 뭔가가, 아니 모든 것이 다 남아있다는 느낌!

나는 어둠을 뚫는 방법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몇 번을 빤 후 계속해서 먼 어딘가로 모스부호를 보내듯 라이터를 켰다 껐다를 반복한다. 그러다 멀리 어딘가 있을 무언가를 찾듯 밖을 본다. 비가 내리고 있다. 불이 켜진 가로등 바로 밑을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을 정도의 가는 비다. 비는 마치 아래서 위로 솟구치는 듯 보인다. 비가 온다는 것을 인식했기 때문인지 마치 없던 냄새가 고인 듯 아래에서 확 피어올라온다. 좌절된 욕망에 젖은 한 인간이 뿜어내는 지독한 냄새.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빈 공간은 항상 요란하다. 나는 그것을 잠시 느낄 뿐이다. 

지난 달 나는 집 벽에 붙어있는 모든 것을 다 철거했다. 처음에는 버릴 것을 골라내느라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곧 골라낼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버렸다. 아내와 아이의 물건은 차마 버릴 수 없었다. 아주 작은 것, 아이가 가지고 놀던 팔이 떨어진 인형, 진작 방구석에 처박혀 있던 인형을 쓰레기봉투에 쑤셔 넣자 신기하게도 그 다음은 어렵지 않았다. 그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새로운 가구를 사려고 인터넷을 뒤지고 가구점에도 가봤지만 변한 내 높이에 맞는 가구가 없었다. 그래서 직접 모든 가구를 만들기로 했다. 이것이 시작이다. 그리고 끝이기도 하다. 이 느낌은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무언가를 상상하는 것과 비슷하다. 내가 가구를? 마치 우주인이 되는 것과 비슷한. 슈퍼맨이 되는 것과 비슷한. 의사는 나에게 다시는 걷지 못할 거라고 말했다. 나는 이것이 시작이고 끝이라고, 나는 살아있지만 죽어있다고 말하고 싶은지도 모른다. 나는 눈물을 단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나는 슬픔을 믿지 않는다. 몇 주 전에 못을 검지와 엄지로 잡고 있다가 망치로 잘못 휘둘러 손가락을 내리 찍어 눈물을 흘리면 어쩌나 싶어 곧바로 철물점에 전화를 해 니퍼를 배달시켰다. 철물점 주인은 나를 아무것도 모르는 봉으로 생각하는지 아주 친절하다. 그건 맞다. 나는 책상에 앉아 컴퓨터 자판이나 두드렸지 책상을 어떻게 만드는지 모른다. 나는 철물점 주인장이 추천해 주는 대로 연장을 다 샀다. 

"니퍼 말고 못을 잡는 도구가 따로 있는데요."

이번에는 필요 없다고 말했다. 나는 정말 무엇이 필요한지 알지 못한다. 

과거뿐만 아니라 미래까지 모두 계획된 운명의 일부 같다. 그날 내가 과속으로 차를 몰게 된 것도 계획된 것이기에 나는 천천히 차를 몰 수 없었다. 나는 이제 자유롭다. 믿지도 않는 신을 찬양하러 아내를 따라 교회에 가지 않아도 된다. 전에 만난 적이 없거나, 안면이 있더라도 말 한마디 나눈 적이 없는 교인이 마치 십년지기 친구처럼 살갑게 굴어도 어색하게 웃지 않아도 된다. 남편의 의무도 아빠의 사랑도 강요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제는 내가 만든 계획 속에서 산다. 

나는 고개를 돌려 주위 사람들이 나를 보듯 창밖의 풍경을 본다. 모든 시선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뭇잎의 녹색이 창백하게 질리듯 짙어졌다. 추웠다가 바로 여름이다. 몇 주째 맑은 날이다. 하늘은 유난히 투명하다. 햇볕은 유리조각처럼 날카롭다. 뉴스에서는 가뭄이라고 난리다. 

마당에는 어머니가 뽑아놓아 한쪽에 수북이 쌓아 놓은 풀들이 태양열에 축 늘어져 말라가고 있다. 이번 여름은 길 것이 분명하다. 밑에 깔린 풀들은 흐물흐물 검게 녹아내리고 있다. 불현듯 무덤이 떠오른다. 아무리 말려도 아이는 마당에서 흙을 가지고 놀았다. 비가 온 후 흙탕물이 되었을 때를 가장 좋아했다. 내가 아이와 만들어 놓은 모래성은 진작 무너졌고 그 위에 꽂아둔 정체를 알길 없는 슈퍼 영웅의 상징이 그려진 깃발도 사라졌다. 영웅의 깃발 가운데에는 S자 대신에 십자가가 그려져 있었는데, 그 이유를 아이에게 물었다. 아이는 마치 나에게 알려주게 되어서 기쁘다는 듯 들떠서 말했다. 

"예수님은 죽어도 다시 살아나잖아. 불사신이야." 

아이가 유치원에 다니기 전의 일이니, 벌써 오년을 훌쩍 지난 일인데 이제야 또렷하게 떠오른다. 어디로 갔을까? 슈퍼 영웅의 깃발은. 담벼락 밖의 가로등이 켜져 있다. 시간을 확연히 느낄 때는 어둠 속에 모든 것이 가라앉아 있을 때뿐이다. 빛은 보이는 것, 보여야 마땅한 것을 들어내고, 어둠은 보이지 않는 것, 보일 수 없는 모든 것을 은밀히 투사한다.

부엌으로 가자 어머니가 식탁에 저녁 식사를 차리고 있다. 나는 최대한 소식을 한다. 똥이 나올 때마다, 언제 똥이 나오는지 모르지만, 여하튼 똥이 나올 때마다 곤욕이다. 언제나 그렇듯 젓가락으로 반찬을 깨작거리는 나를 어머니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힐긋힐긋 본다. 그렇지만 나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는다. 그리고 나에게 보이지 말아야겠다는 듯, 그러니까 내가 보지 않았으면 한다는 식으로 고개를 돌려 눈물을 훔친다. 더 잘 보인다. 왜 그럴까? 왜 부모는 자신이 자식 때문에 아프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안달하는 것일까! 

나는 어머니에게 말한다. 

"어머니 시골집으로 돌아가세요."

"아야, 그래도 내가 옆에서 돌봐줘야지. 몸도 성치 않은데."

몸도, 라는 말이 나를 고약하게 만든다. 몸 말고 또 무엇이 성하지 않은데! 나는 다시 극도로 정중하게 다시 말한다. 뱉어진 말들이 쩍쩍 갈라지듯 더욱 건조한 말투로. 어머니는 그런 나를 보며 당황하더니 울상으로 변한다. 그래도 어머니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마치 그래야 부모라는 듯이. 그런데 무엇을 포기하지 않는 것인지 도무지 모르겠다. 어머니는 무심히 밥상 위에 놓인 갈치구이를 쓱 민다. 나는 녹색 시금치 무침을 젓가락으로 집는다. 부모가 되어보면 부모의 마음을 이해한다고 하는데, 나는 그럴 여유가 없다. 내 문제만으로도 벅차서 숨이 막힐 지경이다. 내 아이가 나를 이렇게 대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그건 모든 부모의 운명이다. 그리고 모든 자식의 운명이기도 하다. 유전자처럼 계획된 무엇. 그런데 나에게는 이제 그런 운명도 허락되지 않는다. 갑자기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고 싶지 않아 밥알을 튀기며 깔깔깔 웃는다. 어머니는 커진 눈으로, 마치 정지화면처럼 나를 본다. 

어머니는 잠시 말이 없다가 텔레비전으로 눈을 돌린다. 나는 그때서야 텔레비전이 켜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어머니는 볼륨을 높인다. 그러다 느닷없이 혼잣말이라도 하듯 말을 뱉어낸다. 

"저 미친놈! 왜 저런 다냐?"

나는 어머니를 가만히 본다. 어머니는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나에게 얼굴을 들이밀며 말을 한다. 

"말세야. 말세. 저 미친놈을 봐라. 어떻게 사람이 사람을 죽이냐? 천벌을 받지! 쯧쯧쯧." 

나는 여전히 어머니를 가만히 본다. 어머니는 황급히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린다. 어머니는 텔레비전을 끄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간다. 

나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힘껏 몇 번 빤 후에 라이터를 켰다 껐다를 반복한다. 작은 방의 열린 문을 통해 어머니가 나를 몰래몰래 훔쳐본다. 그러더니 짐을 싸기 시작한다. 지금 당장, 한밤중에 시골로 내려갈 갈 것도 아니면서 주섬주섬 자신의 물건을 챙긴다. 엄마를 향해 담배연기를 트럼펫을 불듯 길게 뿜어낸다. 그리고 생각한다. 나도 그렇다. 나도 내가 왜 미쳤는지 알 수 없다. 

알람을 맞춰놓고 힘들게 침대에 눕는다. 스탠드를 밤새 켜 놓는다. 어둠이 무서운 것은 아니다. 어둠의 눅눅함, 또는 무게감이 싫다. 나는 여전히 어둠을 뚫을 방법을 찾는다. 나에게 어둠이 무슨 의미인지를 진지하게 생각할 때가 많다. 항상 결론은 어둠을 뚫고 빛을 찾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어쩌면 더 깊은 어둠, 어둠의 핵심을 보려는 행위일 수도 있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리며 잠에서 깬다. 나도 모르게 잠들었다. 맞춰놓은 알람시간보다 30분 일찍 눈을 떴다. 어머니는 아침밥상을 느릿느릿 차리고 있다. 나는 거실에 나와 그 모습을 지켜본다. 조금 후 어머니는 힘없는 모습으로 가방을 들고 주저주저 한다. 어머니는 짧게 고개를 돌려 나를 본다. 그리고 집을 나선다. 나는 그냥 어머니를 조각상처럼 바라본다. 조각상이 움직이네, 하고. 

어제 꿈에서 아내가 나타났다. 

아내는 인상파 그림처럼 보였다. 점으로 보이기도 하고, 뭉개진 선과 덕지덕지 칠해진 물감의 덩어리로 보이기도 했다. 정확히 말하면 그렇게 상상됐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내는 없었다. 꿈속에서도 나는 그것을 확실히 인지했다. 그러니까 꿈속에서 내가 아내를 보는 것은 꿈을 꾸는 중이라는 것을 알았다. 실제로 그들이 나타난다면, 그리고 나에게 따져 묻는다면 나는 겁을 집어먹고 안방으로 달려가 문을 걸어 잠글지도 모른다. 예전에도 그랬듯이, 지금도 그렇듯이 나는 대답할 어떤 말도 준비하지 못했다. 아,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이게 다 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 입술을 달싹거린다. 마치 주술을 외우듯. 

아내와 나는 자주 싸웠다. 특별한 사건 없이 사소한 것으로 싸웠고, 이혼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고, 다른 부부도 그렇기에 위안이 되었다. 그러다 서로를 받아들이면서 싸움은 천천히 줄었고, 그것은 서로에 대한 인정이라고 치부했지만 사실 무관심이었다. 싸움이 좋은 건지, 무관심이 좋은 건지는 아직도 모른다. 그러다 아들을 낳았고, 아들에 대해서만은 진지하게 서로의 의견을 묻고 고민했다. 어떤 아이로 키울지에 대해. 마치 우리가 선택한 대로 곧 아이의 미래가 될 거라는 듯이. 아이에 대해 무슨 이야기를 했지? 잠시 동안 생각한다. 그런데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나는 부자다. 보험금이 많이 나왔다. 두 사람의 죽음으로 내가 평생 벌어도 못 벌 돈을 받았다. 어느 날 그리 친하지도 않았던 고등학교 동창이 찾아와 생명보험에 들게 했다. 나는 거들먹거리며 아내와 나, 두 사람의 생명보험을 들었다. 그런데 아이의 죽음에 대해서도 돈을 받을 수 있었다. 왜 그런지 나도 모른다. 빌어먹을! 누군가 나를 의심해 주기를 바랐다. 그런데 아무도 나를 의심하지 않았다. 의심할 부분이 있었지만, 의심까지 갈 정도의 무엇이 없었다. 부지런하고 책임감 있는 가장, 나쁘다고 할 수 없는 직장, 그리고 가정적인 아내, 토끼 같은 아이. 무엇보다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는 내성적인 성격이지만 눈치는 빨라 주위 사람들에게 온화하게 비쳤다. 그리고 타고난 재능처럼 항상 모든 문제에 좋은 변명거리를 갖고 있었다. 나는 요즘 사람들에게 슬프다고 말하거나 그냥 입을 다문다. 

내일부터는 책상을 만들 것이다. 밤새 도안을 그릴 것이다. '그럴 것이다.' 왜 나는 현재가 아닌 미래에 가 있는 것일까? '지금'은 아무 것도 없다. 내 몸은 텅 비어있다. 

직장 동료이면서 친구인 상철이 찾아왔다. 그는 약간 놀란 표정으로 내 다리를 본다. 병원에도 몇 번 왔기에 그리 신기한 일도 아닐 텐데, 환자복이 아닌 평상복을 입고 있으니 이제야 실감이 나는 듯한 표정이다. 그는 거실과 열린 방으로까지 길게 들어찬 목재, 그리고 날카로운 온갖 목공도구들을 바라보며 미심쩍게 뭐하냐고 묻는다. 

"책상을 만들어."

"왜?"

그는 왜라고 묻자마자 다른 사람들처럼 빠르게 뭔가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빠르던 늦던 하나같이 똑같은 방식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마음먹기에 달렸지."

그리고 덧붙인다. 

집을 고치는 행위는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라고. 가까운 누군가를 잃으면 집을 고치는 행위를 통해 다시 온전히 되기를 바란다고, 그런 희망의 표현이라고. 의미심장하게 반복적으로 짧게 고갯짓까지 한다. 

"이제 모든 게 다 잘 될 거야!"

나는 그에게 묻고 싶었다. 뭐가? 나는 아무 말 없이 친구를 위해 원두커피를 갈고 칼리타 드리퍼에 여과지를 얹고 원두를 담아 뜨거운 물을 쪼르르 떨어트려 커피를 내린다. 상철은 드립포트를 빙글빙글 돌리며 가는 물줄기를 흘러내리는 나를 신중하게 관찰한다. 

상철과 나는 같이 입사했고 성격도 비슷했고 업무 스타일도 비슷했다. 친구이면서 경쟁자였다. 같이 진급을 했다. 대리를 단 후에 내가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정말 열심히 일했다. 그것이 유일한 취미였고, 유일한 인생이었고, 유일한 성취감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잠을 잘 수 없게 되었다. 특히 일요일 밤이면 내일 출근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잘 보이지도 않는 천정의 사방무늬만 밤이 지나 날이 밝도록 보고 있었다.

어느 날 머리가 아파오더니, 온몸이 뜨거워졌고, 목구멍이 부었고, 겨드랑이 어디쯤에 통증이 생겼다. 가슴이 답답해졌다. 두근거렸다. 약간의 공포와 함께. 아내는 나에게 말했다. 아이를 위해 강남은 못가도 잠실 쪽으로 이사를 가자고! 우리도 이제 아파트에서 살 때가 되지 않았냐고! 나는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그러자고 말했다.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는 당연하다는 듯이. 

그날 밤, 나는 옆에 누워있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 

"피곤해. 요즘 이상하게 피곤해."

아내는 내가 누워있는 반대쪽, 격자무늬가 새겨진 흰색 장롱 쪽으로 돌아누우며 말했다.

"빨리 자. 나도 피곤해."

나는 다시 아내의 등에 대고 말했다. 

"정말이야."

"나도 그래."

아내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내의 귀 가까이에 대고 말했다. 

"나는 당신이 무서워!"

아내가 벌떡 일어나더니 나에게 말했다. 

"정말 왜 그래? 나도 피곤해 죽겠어."

나는 아내가 잠들 때까지 가만히 옆에 방전된 장난감처럼 누워있었다. 곧 아내의 고른 숨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침대에서 일어나 아이의 방으로 갔다. 아이는 CF광고 속 행복한 아이처럼 자고 있었다. 하얗고 통통한 발이 이불 사이로 비쭉 나와 있었다. 나는 아이의 발을 살짝 쥐었다. 따뜻했다. 이렇게 1mm도 떨어져 있지 않고 붙어있는데, 왜 계속 간절해지고 애원하게 되는 것일까! 나는 이 아이를 소유했지만 소유한 것이 아니었다. 이 간격이, 모든 관계에서 이 간격이 나를 미치게 했다. 나는 다시 발을 살며시 쥐었다. 마치 작은 동물을 쥐고 있는 듯 했다. 손아귀에 쥐고 힘을 주면 쉽게 내장이 터지는 연약한 동물을. 

상철은 여전히 내 다리를 힐끔힐끔 본다.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상철은 커피를 홀짝이는 내 모습을 보며 이맛살을 찌푸린다. 커피에서 지푸라기 맛이 느껴져 각설탕 두 개를 넣고 소라모양으로 빠르게 휘젓는다. 마셔보고 여전히 지푸라기 맛이 느껴져 각설탕을 두 개를 더 넣고 더 빠르게 휘젓는다. 또 마셔보고 각설탕 넣고 휘젓는다. 그런 나를 상철은 놀란 듯 바라보다 회사 일을 꺼낸다. 

"김 부장, 생각해보면 불쌍해! 완전 폭탄이었잖아.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만 주고. 그런데 막상 죽고 나니까 섭섭하더라고. 막 무시했던 게 떠오르기도 하고."

나는 상철의 말을 끊고 다짐하듯 말한다. 

"책상을 다 만들면 앉아서 뭔가를 쓸 거야."

상철은 다시 나를 뚫어지게 본다. 조금 우물쭈물하더니 묻는다. 

"혹시 유서를 쓰려는 것은 아니지. 하하하."

마치 농담이라도 된다는 듯이. 그리고 급하게 미소를 짓는다. 아, 자살. 내가 죽을 수 있구나. 그렇게 생각할 수 있구나. 내가 자살을 해도 이상하지 않구나. 나는 웃는 상철의 면상에 침을 뱉고 싶어진다. 나는 상철의 말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제길, 지금까지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다. 죽고 싶다는 생각도 안했다. 삶과 죽음 자체가 증발한 상태, 사방에 붙잡을 것 없이 허공에 떠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죽고 싶은 마음이 싹 달아났다. 사고 이후에 죽고 싶은 적이 없으므로 틀린 표현이지만, 그렇게 느낀다.

나는 비명을 지른다. 

"내가 왜 죽어." 

놀란 상철의 눈이 커지고 물 밖에 나온 물고기처럼 입을 쩍 벌린다. 그 순간 나는 똥을 지린다. 냄새로 알 수 있다. 상철은 커피를 마시지도 않고 잔 테두리만 바라보다 마치 기차나 버스를 탈 시간이 되었다는 듯 바쁘게 일어난다.

"미안해. 이제 가봐야겠다."

젠장. 뭐가 미안하단 말인가! 친구들 사이에서 그렇지 않아도 불쌍한 놈인데, 이제 미친놈까지 되었다. 절망은 그냥 절망이다. 다른 무엇이 아닌데 사람들은 그것을 무엇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절망은 무엇이 되어 버린다. 주위의 편견으로 더 삐뚤어지는 양아치처럼 절망은 나에게 침을 퉤퉤 뱉어댄다. 나는 아무 것도 저지할 수 없다. 내 이야기는 내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들이 떠드는 이야기일 뿐이다. 그들에게 나는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을 잃은 불쌍한 사람이다. 어쩔 수 없이 나는 그들을 저주한다. 내 절망을 그들이 빼앗아 갔다. 

나는 팔 힘으로 간신히 휠체어에서 내려와 바닥에 눕는다. 추리닝과 팬티, 그리고 기저귀를 벗는다. 고개를 사타구니 사이에 처박고 있는 쭈그러진 성기를 손으로 잡아들어 물끄러미 본다. 나는 옆구리 밑쪽에 달린 반투명 비닐봉지 같은 플라스틱 오줌통을 툭툭 건드린다. 물을 많이 마시지 않아 찔끔찔끔 새어나오는 오줌은 샛노랗다. 점점 우울처럼 묵직해진다. 아직 교체할 때가 되지 않았다. 물티슈로 엉덩이를 닦는다. 버릇처럼 벗은 기저귀에 코를 갖다 댄다. 냄새가 삶처럼 지독하다. 새 기저귀로 갈아입고 똥이 묻은 기저귀는 엉덩이를 닦은 물티슈와 함께 꽁꽁 싸매 비닐봉지에 넣어 쓰레기통에 버린다. 

나는 힘겹게 휠체어에 앉아 다시 망치를 든다. 힘껏 내려친다. 그 순간 경련이 온다. 망치가 니퍼를 잡고 있는 엄지손톱을 내리친다. 악, 저절로 손톱으로 칠판을 긁는 듯한 비명이 터져 나온다. 나는 두 눈을 급히 감는다. 절제. 아니 무감각. 나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손바닥에 못이 박힐 때 예수는 눈물을 흘렸을까? 그런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아마, 예수를 신격화하기 위해, 인간처럼 처량하게 울리 없다는 전제로 처음부터 기록할 마음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진짜 신일지도 모른다. 눈물이 없는. 심판을 내릴 때도 부드럽게 아주 부드럽게 속삭이는 나지막한 신의 분노처럼, 나는 눈물이 아니라 분노가 치민다. 분홍빛으로 상기된 손톱이 차츰 검붉게 변한다.

텔레비전을 튼다. 아무 생각 없이 채널을 돌린다. 

액션 영화가 방영되고 있다. 텔레비전 볼륨을 방안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크게 높인다. 주인공은 빗발치는 총알을 다 피하고 테러리스트를 다 죽인다. 그 와중에 가슴에 폭탄을 단 테러리스트가 주인공의 동료를 야비한 표정을 지으며 뒤에서 안는다. 그리고 터진다. 주인공은 동료를 잃고 오열한다. 주인공은 테러리스틀 수십 명을 죽였고, 자신의 동료는 한 명 죽었다. 그래도 주인공은 오열하고 죽은 테러리스트들은 말이 없다. 

갑자기 눈물이 마구 쏟아진다. 아, 뭐지. 절대 눈물을 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갑자기, 아니 예전부터 그래야만 했다는 듯이, 눈을 한번 끔뻑일 때마다 상해 녹아내린 양파처럼 지저분하게 눈물을 질질 짠다. 괜히 검게 변한 엄지손톱을 노려본다. 입을 다물 수 없어 턱주가리가 아프다. 주인공의 죽은 동료가 불쌍해서 흘리는 눈물이 아니다. 주인공의 눈물에 동요돼서 흘리는 건 더더욱 아니다. 이상하게, 정말 이상하게,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나와 무관한, 동정의 가치가 없는 테러리스트의 슬픔이 내 몸속을 파고든다. 나는 뭔가를 설명하려하지만 아무 것도 설명할 수 없다. 눈물을 멈출 수 없다. 테러리스트의 가슴에 단 폭탄이 터질 때의 찢어지는 가슴이 느껴진다. 모든 것이 사라졌다. 

도무지 아무것도 참을 수 없다. 

설계도를 따라 그대로 만들었는데도 책상 다리가 부실하다. 팔꿈치로 몸무게를 실을 때마다 책상 어디선가 신음처럼 삐걱거리는 소리가 난다. 책상 다리 사이에 각목을 X자로 덧대어 못을 박는다. 다행히 불길한 삐걱거림은 사라진다. 상체를 기대어 뭔가를 쓰기에는 충분해졌다. 

널찍한 책상. 휠체어를 앞뒤로 넣고 빼고 하는 책상이 아니라 제자리에서 빙글 돌아도 거치적거리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책상. 나는 내가 획득한 이 작은 자유에 미소를 짓는다. 아니다. 목이 멘다. 어제 이후로 나는 내가 우는 것인지 웃는 것인지 알 길이 없다. 글을 쓰기 시작한다. 이 글의 독자는 따로 없다. 아무도 읽지 않을 것이다. 결국 이야기가 될 수 없다. 이야기가 되려면 누군가 읽어야 한다. 하지만 읽은 사람들은 내 이야기를 빼앗아 갈 것이다. 그들은 나를 살인자라고 부를 것이다. 

아내와 아이와 함께 친정에 갔다. 장인어른은 나에게 이사 갈 잠실 아파트가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주변 상권은 괜찮은지, 재개발은 되는 곳인지, 얼마나 오를 것인지 상세히 물었다. 나는 질문을 받으면 곧바로 대답했다. 자동인형! 그렇게 이런 일은 버튼을 누르면 튀어나오듯 생각하지 않고도 말할 수 있었다. 장인어른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고, 그러다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척 했고, 아내는 뭐가 자랑스러운지 집에서는 볼 수 없는 미소를 입에 걸쳤다. 

돌아오는 길이었다. 대관령을 넘을 때였다. 아이는 빙글빙글 나선형으로 난 도로 탓에 멀미가 난다고 운전석 뒤를 신발로 툭툭 쳐댔다. 아내는 여전히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그때 나는 아내가 왜 미소를 멈출 수 없는지 깨달았다. 아내는 장인어른에게 인정받는 게 그 무엇보다 중요했고, 그리고 앞으로 자신의 아이에게 인정받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럼 나는?

아이는 뒷좌석에 뜨거운 열기에 늘어진 고무처럼 앉아 스마트폰으로 오락을 하는지 효과음이 들렸다. 핑. 퐁. 악. 그리고 다시 핑. 퐁. 악, 또는 윽. 가끔은 꽥. 아내는 계속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는 브레이크를 밟지 않았다. 그냥 아이에게 스마트폰을 내려다보고 있으면 더 멀미가 날거라고 말하고 싶었다. 내 정신은 멀쩡했다. 그 어느 때보다 또렷했다. 핸들을 꺾지도 않았다. 정신이 멀쩡했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반응해야할 위험 신호를 무시할 만큼의 의지를 가지고, 또는 이성적인 판단을 가지고 절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감정보다 이성이 더 무섭고 고약하고 비이성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뒤늦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나는 깨어나자마자 곧바로 하반신이 마비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늙은 여자 간호사가 득달같이 달려와 안타까운 눈빛으로 내 다리가 마비되었다는 것을 알려줬다. 나는 다리를 오랫동안 내려다보았다. 하얀 붕대와 하얀 석고로 고정된 다리가 성난 이빨이 되어 땅을 물고 있는 듯 보였다. 오기로라도 절대로 놓아주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일주일 후, 아내와 아들이 죽었다는 것을 어머니가 눈물바람으로 알려줬다. 아마도 내가 충격을 받을 것을 염려해서 늦게 알려줬을 거라 추측했다. 그냥 그랬다. 어쩌면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단 한 번도 아이와 아내에 대해 입에 올리지 않았다.

차는 가드레일을 뚫고 10미터 쯤 되는 높이에서 떨어졌다. 차는 뒤집혀 떨어져 천정이 완전히 찌그러졌다. 나는 처음 가드레일을 받을 때 앞 유리창을 뚫고 튕겨져 나갔다. 아내와 아들은 모두 차 안에 있었다. 그렇게 들었다. 안전벨트를 매지 않아 나는 살았다. 

깨고 나서 몇 주 후 타는 듯한, 쥐어짜는 듯한, 똑 쏘는 듯한 통증이 똥구멍 주위로 나선형으로 퍼졌다. 나는 다급하게 의사를 찾았는데, 나타난 의사는 내 희망을 일찍부터 파괴하는 것이 좋다는 듯 그건 환상통증입니다, 라고 무덤덤하게 말했다. 몇 가지 약을 처방해줬다. 나는 곧바로 핸드폰 인터넷으로 약 성분을 찾아봤다. 통증이 있는데 의사는 진통소염제 같은 약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항우울제를 처방해줬다. 나는 침대에 누워 발광하듯 의사에게 소리를 질렀다. 

"내가 미쳤어. 말해봐. 내가 미쳤냐고?"

의사는 나보다 나이가 열 살은 많은 사람으로 보였다. 반말을 찍 내뱉고 난 후에, 잠시 동안 정적이 흘렀는데, 그 순간 내가 진짜 미쳤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의사는 당황한 기색도 없이 한없이 중립적인 눈으로 나를 슬쩍 보고 고개를 내려 다시 차트를 보았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오, 나는 의사에게 경의를 품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내가 한순간 희망을 품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작 땅에 박고 있는 다리를 뽑아낼 희망 따위를 바라지는 않았다. 더 큰 무엇을. 헛웃음이 나왔다. 희망은 독이다. 식상하지만 절묘했다. 

짙은 어둠이 창에 달라붙어 있다. 다시 밤이다. 지겹도록 찾아온다. 어둠이 핏방울처럼 방안으로 농밀하게 스민다. 방금 전에 갓 내린 커피처럼 검다. 지독히 검다. 나는 어둠을 한 목음 넘긴다. 진한 카페인을 마신 것처럼 정신이 몽롱해진다. 

이제 글을 마칠 때가 됐다. 나는 이미 이 글을 다 쓴 후에 할 계획을 세워 두었다. 둥그런 티탁자를 만들 것이다. 인터넷에 허브나 녹차, 홍차 같은 차와 차를 우려낼 수 있는 도자기 세트도 주문해 놓았다. 버틴다는 것, 살아남는다는 것, 모든 것이 계획의 일부일 뿐이다. 그렇게 차곡차곡. 그렇게 계속 허황하게 불어나는 무엇. 그리고 짜부라져 한 사람 인생에 압축되는 무엇.

나는 획득할 것이다. 헛되이 구원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살고자 하는 아주 작은 희망, 혹은 용기 따위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무엇 때문에 내가 구원을 받아 희망적인 삶을 살아야 한단 말인가! 근육, 뼈, 내장, 피부, 그 안에 흐르는 피, 그 모든 생명을 통제하는 곳 대신 자리한 텅 빈 공간, 절망이 나를 원한다면 기꺼이 그 속에 기거할 것이다. 절망에는 선악이 없다. 옳고 그름도 없다. 이곳이 죽은 이들이 나에게 마련해 준 유일한 보금자리다. 

어둠 속에서 갑자기 아이가 나타난다. 나는 잠깐 놀라지만 곧 아이가 죽었다는 것을 기억해낸다. 모든 것이 기억에 불과하다는 것을 마치 깨달은 적이 없다는 듯 깨닫는다. 과거 그때, 죽음이 끈질긴 것처럼 그렇게, 기억 속의 그때처럼 아이는 자지러지게 웃음을 터트리고 장난스런 미소를 얼굴 전체에 걸친다. 그리고 말한다. 

"뭐, 상관없어!"

왜 상관없는 것일까? 올바른 물음은 곧 처음이고 끝이다. 나는 브레이크를 밟을 수 없었던 그때처럼 육중하게 접혀 쌓인 어둠의 계단을 밟고 앞으로 걸어 나간다. 아이는 진작 사라졌다. 여전히 정적이 깊다. 불이 다 꺼진, 아무도 없는 무대는 거대한 무덤 같다.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어둠의 밀도가 점점 높아진다. 심판대 같은 무대 한 가운데 홀로 서 있다. 곧 어둠은 폭발한다. 그리고 나는 우주처럼 거대한 검정 알에서 깨어난다.

그렇게, 유일하게 죄를 사하는 방법은 부활이다.

 

 

 

소설 당선소감 - "무거운 펜 신중히 휘두르는 글쟁이 되고파"

 

그날은 방안에서 이불을 싸매고 누워 축 늘어져 있었습니다. 매서운 한파라고 뉴스앵커는 아침부터 연방 떠들어댔습니다. 밖으로 나가 나무장작을 한 아름 안고 들어왔습니다. 우리 집에는 작은 주물난로가 있습니다. 난로의 주둥이에 해당하는 작은 문을 열고 진홍빛 불씨를 향해 장작을 집어넣었습니다. 곧 난로는 타닥타닥 소리를 냈다. 불꽃이 악몽처럼 시커먼 주물을 핥았습니다. 

그때쯤 전화가 왔습니다. 당선 소식을 듣고, 아니 전화를 끊고 나서야 휴대폰을 든 손이 마구 떨렸습니다. 심장이 두근거리면서도 부끄러움이 치솟았습니다. 급하게 내가 보낸 글을 컴퓨터 화면에 띄웠습니다. 그리고 읽어 내려갔습니다.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난로 앞에 쭈그리고 앉아 불꽃을 보며 당선의 의미를 생각했습니다. 근육질 팔로 무거운 망치를 휘둘러 달구어진 철판을 두드리는 늙은 대장장이가 떠올랐습니다. 불꽃을 보며 환하게 웃는, 내가 그였다면. 그처럼 온몸으로 인생을 밀고 나갔다면. 

이제 제 손에 펜이 들려지게 되었습니다. 제 팔에는 근육이 없습니다. 수상 소감을 쓰려고 든 작은 펜을 수전증 환자처럼 부들부들 떨며 간신히 고정하고 있습니다. 전에는 몰랐던 참으로 무거운 펜입니다.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여전히 왜 내가 됐지, 라는 생각이 꼬리를 뭅니다.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내 팔에 중력을 거스르는 근육이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무한히 무거운 펜을 정확하고 신중히 휘두르는 글쟁이가 되고 싶습니다.

 

소설 심사평 - "내면의 적나라한 균열 직시·긍정 힘 매력"

 

본심에 오른 작품은 '칼', '하루', '밤의 탈피', '끈', '부활' 등 모두 다섯 편이었다. 독특한 시공간을 설정한 '칼'은 문장도 매끄럽고 감각 또한 예리했다. 모두 구체성과 꼼꼼함에서 나오는 힘이었다. 하지만 작가의 의중을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다는 단점이 지적되었다. 작가의 의중이 명확하지 않으니, 소설은 그저 단순한 이야기와 판타지물로 머물고만 느낌이다. 보다 현실에 깊게 뿌리박힌 이야기를 쓴다면 조만간 작가의 이름을 다시 한 번 접하게 될 것이라 믿는다. '하루'와 '밤의 탈피','끈'은 몇몇 인상적인 장면에도 불구하고, 성긴 마무리와 식상한 상징으로 인해 선택에서 배제되고 말았다. '하루'에서는 아내의 변심이 익히 예상되었고, '밤의 탈피'에서는 주인공 '나'의 상처가 감상적이고 모호하다는 평가가 나왔다. '끈'은 '뜨개질'의 상징성이 너무 빈약하였다. 아쉽지만 다음 작품을 기다려보기로 했다.

이번 전북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은 '못'이었다. '못'은 일종의 캐릭터형 소설이었다. 소설 속 사건은 어쩌면 진부하기 그지없는, 교통사고로 아내와 아들을 잃은 한 남자의 일상이 전부이다. 물론 그 교통사고에는 남자의 의도가 다분히 들어 있는 것이지만, 문제는 사고 자체가 아니었다. 이 소설에서 심사위원들이 주목한 지점은 우리 사이의 보이지 않는 균열과, 그 균열이 결국 '나'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인식, 그리고 다시 그 균열을 봉합하기 위한 한 인간의 적나라한 내면 투쟁 그 자체였다. 이 소설 속 질문은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균열'을 똑바로 바라보게 하고, 또 한편 '균열'을 긍정하게 만드는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군데군데 불안한 문장과, 들쑥날쑥한 플롯이 어떤 극적 계기 효과를 반감시키는 것이 사실이나, 날것 그대로의 신인 목소리로 긍정하기로 했다. 당선을 축하하고, 꾸준한 건필을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