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슈게이징 / 김설옥

 

 

밤은 보이지 않는 소리들을 품고 있었다. 로얄 타운 뒷담으로 통하는 길목 어귀에 덩그러니 앉아 있던 검은 고양이가 별안간 귀를 쫑긋 세우더니 어둠 속으로 후다닥 사라졌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몸을 숨긴 채 그것을 보고 있던 정혜가 얼른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큰 길 쪽에서 자동차 달리는 소리가 가까워졌다가 다시 멀어지기를 되풀이할 뿐 별다른 기척은 없었다. 차 소리는 쐐쐐 날카롭게 몰아치는 눈바람에 묻혀 얼핏 파도 소리 같기도 하고, 긴 터널 속에 들어와 있는 것도 같았다. 그녀는 휴대폰을 열어서 재차 시간을 확인했다. 움직이기에 딱 적당한 시간이었다. 지금이야, 바로 지금. 정적이 웅덩이처럼 고인 곳을 훌쩍 건너뛰며 정혜는 자신이 한 마리의 고양이 같다고 생각했다.

도둑고양이가 어디 있어? 고양이는 고양이일 뿐이지. 지니의 말이었다. 어디서 그럴싸한 문구를 찾아내는지 잊을 만하면 꼭 댓글을 달아서 기를 죽이고는 했다. 오후에도 누구와 다툰 이야기를 하던 끝에 고양이에게 아파트와 빌라가 무슨 차이가 있으며 고귀한 곳과 후진 곳, 안과 밖이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며 갖은 너스레를 떨더니, 이따가 고양이처럼 그냥 통과하면 된다는 말씀, 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가슴이 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정혜는 엄연히 가택침입을 시도하는 중이었고, 목적지는 다름 아닌 케이의 집이었다. 건물 안으로 통하는 유리문 위에 ‘CCTV 촬영 중’이라는 팻말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CCTV가 연결된 경비실은 비어 있을 시간이었다. 그것은 고양이처럼 경계를 넘나드는 물체를 단순히 기록하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리라. 정혜가 유리문을 열고 몸을 안으로 들여놓았다. 불 꺼진 건물 안은 동굴처럼 어두웠다. 너무 적막하기 때문인지 사람 사는 곳 같지가 않았다. 

그녀는 엘리베이터를 타는 대신 계단 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그것은 지니가 알려준 주의사항 가운데 하나였다. 엘리베이터를 타지 말 것, 형광등을 켜지 말 것. 사람 편하자고 만들어 놓은 거라면 뭐든 일단 피하고 볼 것. 기타 등등. 소리를 죽이기 위해 발가락에 힘을 주고 앞쪽부터 천천히 땅에 붙였다가 조심스럽게 떼며 걸었다. 1111호 디지털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누르는 손끝이 자꾸 헛짚어졌다. 이윽고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크게 들리는가 싶더니 몸이 안으로 쑤욱 빨려 들어갔다. 정혜는 흠칫 뒤를 돌아보았다. 누가 등을 떠미는 것 같은 착각이 든 때문이었다. 휘유, 정혜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니의 능력이 새삼 놀라웠다. 어떻게 번호를 알았을까? 하여튼 고수라니까.

그녀로부터 아파트 위치를 비롯해 경비 몰래 단지 안에 진입하는 요령, 가정부와 매니저가 들르는 날짜와 시간대, 그리고 현관 비밀번호를 전수받던 날 정혜는 완전히 항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멤버들의 주민등록번호나 휴대폰 번호를 비롯한 신상정보, 스케줄 같은 것들은 약간의 돈과 시간만 투자하면 어떻게든 알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아파트 현관 비밀번호는 굉장한 고급 정보였다. 

언더그라운드를 박차고 메이저로 나온 슈게이징 그룹 ‘불청객들’에 대해 지니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장르 자체가 생소했다. 낮은 음으로 속울음을 참듯이 노래하는 케이에 대해 처음에는 꼴불견이라는 반응이 많았다. 발끝만 바라보며 쉰 소리를 내다 들어가 버리는, 튜닝도 리듬도 예측할 수 없는 팝. 어느 음악 잡지의 편집자가 신발(슈)만 보고(게이징) 노래하는 불친절한 무대매너를 두고 비아냥대던 표현이 그대로 이름이 된 장르. 하지만 그 억제된 슬픔 속에 마술이 있었다. 불청객들의 리드보컬 케이의 그 훼손할 수 없는 쓸쓸함이 모든 것을 증명했다. 혈관을 통해 무언가 몽롱한 것이 계속 주입되고 있는 듯이 불쾌한 매력을 수줍게 감추고 있는 모습, 그것이 케이의 내부를 향해 하루살이 떼처럼 모여드는 오다쿠를 만들었다. 

정혜는 현관에 오도카니 선 채 어둠이 깔린 집 안을 잠시 응시했다. 정면으로 보이는 발코니 유리 바깥에서 눈은 여전히 어지러운 선을 그으며 쏟아지고 있었다. 케이는 다음 앨범 뮤직비디오 촬영차 외국에 나간 상태이고, 집안 살림을 맡아 하는 가사 도우미는 새벽 일찍 다녀갔다. 적어도 내일 아침까지는 올 사람이 없다는 의미였다. 워낙 스케줄이 바쁜 그였지만 이렇게 하루 오롯이 집을 비우는 일은 흔치 않았다.

정혜는 유리에 이마를 대고 서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작은 분수대를 중심으로 아파트들이 둥글게 늘어선 단지 일대는 고요히 빛나는 밤의 항구 같았다. 분수대를 둘러싼 각 동을 중심으로 다시 1미터 높이의 벽돌담이 울타리처럼 둘러져 있었다. 유심히 보니 분수대 모양이 꽤 특이했다. 전기로 돌아가는 방식이었는데, 분명히 꺼져 있음에도 얼핏 작동되는 것처럼 보였다. 꼭대기에 장식된 고래 조각상 등판에서 눈 녹은 물이 떨어지면서 빚는 현상이었다. 

이치대로 하자면 고래의 둥근 등 때문에 물이 고이지 않아야 했다. 하지만 꼬리지느러미를 치켜 올린 형태로 조각하는 바람에 등과 꼬리 사이에 오목한 홈이 생기고 말았다. 그래서 눈이나 비가 오면 물이 고여 있다가 저런 식으로 흘러내리곤 하는 것이다. 그녀는 조각이 잘못 만들어졌다고 생각했다. 물이 한꺼번에 와르르 쏟아지면 몰라도 저렇게 찔끔찔끔 떨어지고 있으니 좀 구차해 보였기 때문이다. 눈발과 부연 안개 속에서 늘씬한 은회색 건물들을 보좌삼아 우아하게 서 있는 분수대는, 그 자태와 어울리지 않게 궁색한 물방울 때문에 정치인이나 유명한 예술가를 어설프게 흉내 내는 코미디언처럼 우스꽝스러웠다.

지 니에게 인증샷을 보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저것이야말로 그녀의 취향에 딱 들어맞는 광경일 것이다.

지니는 멤버들에 대해서라면 뭐든지 꿰고 있는 ‘전설의 오다쿠’였다. 멤버들뿐 아니라 다른 것에 대해서도 잘 알았다. 왕성한 활동력, 특별한 인맥이나 남다른 재주 등으로 팬덤 내에 닉네임을 날린 네임드 팬들의 관계도나 사생활 같은 조잡한 것부터 시작해서 바흐나 라흐마니노프, 디에고 리베라와 샤갈, 혹은 도스토예프스키, 나쓰메 소세키, 혹은 루쉰이나 체 게바라 따위의 있어 보이는 이름까지 분야와 종류를 가리지 않고 무엇이든 줄줄 꿰었다. 대다수의 팬들이 멤버들의 사적인 정보를 조사하거나 수집하는 일을 천박하다고 여겼으며, 그 천박한 짓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자행하는 ‘비공식 팬’들을 손가락질했다. 하지만 그런 비난에서도 지니는 예외였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우선 그녀는 자신에게 향해지는 비판을 거뜬히 무효화 시킬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언변을 가졌고, 워낙 발이 넓어서 변호해 줄 인맥도 많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녀가 행동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정혜 같은 애들이 같은 팬 사이에서도 욕을 먹는 가장 큰 이유는 멤버들에게 전화를 걸거나, 집에 찾아가거나 해서 실질적인 피해를 입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니는 집에 찾아가기는커녕 공개방송이나 콘서트, 심지어는 팬미팅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저들에게 그녀는 오직 모니터 속에만 존재했다.

지니를 실제로 만난 사람이 없기 때문인지 이런저런 소문도 많았다. 팬들의 여론을 파악하고 컨트롤하기 위해 소속사에서 심어 놓은 직원이라는 말도 있었고, 유명한 정치인의 딸이라 신분을 밝히지 못하는 것이라는 소리도 있었다. 하지만 지니는 일련의 소문을 부정하며 자신은 외국에 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온라인에서만 활동하는 것이라고 했다. 

정혜는 그녀의 말을 믿었다. 자신에게 집 주소와 모바일 넘버를 알려주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다알리아 스트리트, 브리스번, 큐엘디, 오스트랄리아 어쩌고 하는 알파벳 주소는 얼마든지 가짜로 지어낼 수 있었다. 직접 통화를 해 본 적이 없는 전화번호 역시 백 퍼센트 믿을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정혜는 지니가 굳이 그렇게까지 구차하게 알리바이를 만들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아는 한 지니는 누구보다 자존심이 센 사람이었다.

정혜는 발코니에서 떨어져 거실을 한 번 쓱 둘러보고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토록 갖고 싶다던 케이의 부츠를 훔쳐내는 데 성공하면 지니는 자신을 완벽하게 신용할 것이고, 앞으로 더 많은 비밀을 알게 해줄 것이다.

거실은 침침했다. 하지만 섣불리 불을 켤 수는 없었다. 매시 정각마다 단지를 구석구석 돌며 순찰을 하는 경비는 이 집이 밤 동안 비어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리라. 만약 발코니로 빛이 새어나가는 것을 발견하면 의심을 사게 될 것이 분명했다. 정혜는 휴대폰을 열어 주변을 비춰보았다. 케이의 가장 깊은 곳을 알고 있는 비밀스런 소품들이 윤곽을 드러냈다. 2G 폴더폰에서 나오는 희미한 광선이 가죽 소파 한 귀퉁이를 비췄다가 바닥에 깔린 카펫으로 옮겨갔다. 안타까운 점이 있다면 빛이 너무 희미하다는 것이었다. 수명이 거의 다해서 하루에 서너 번은 배터리 충전을 해줘야 하는 고물 휴대폰이었다. 이럴 때 스마트 폰으로 플래시 어플을 다운받아 사용했다면 좋았으리라. 하지만 정혜에게는 수십만 원짜리 기계를 턱턱 살 만한 능력이 없었다. 

- 아나, 네 애미 내다 팔아라.

정혜의 엄마는 뭔가를 사달라고 하면 항상 그렇게 말하곤 했다. 돈이 없다는 표현을 좀 사납게 에두른 말이었다.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일하면서 왜 늘 돈이 없는 건지, 그렇게 번 돈이 다 어디로 가는 것인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다만 돈 없는 엄마와 아빠가 싫었고 천하의 불효자식 같은 생각을 하는 스스로가 싫었고, 자신을 그렇게 낳아 놓은 엄마와 아빠가 다시 싫었다. 이따금 미안하거나 애잔한 마음이 들 때도 있었지만 그런 기분은 오래 가지 않았다. 좋을 때보다 싫을 때가 더 많았다. 그녀에게는 모든 것이 그랬다. 정혜가 언제나 변함없이 좋아하는 건 오직 케이 뿐이었다. 

그녀는 휴대폰을 닫은 뒤 입고 있던 점퍼 안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어차피 눈이 어둠에 적응이 되어서 아주 불편한 정도는 아니었다. 정혜가 발코니 쪽에서 제일 가까운 방으로 다가가 문고리를 잡아 비틀었다. 널찍한 방 한가운데 새하얀 이불보가 덮인 킹사이즈 침대가 놓여 있었다. 일순 정혜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녀는 침대 위로 휙 몸을 던졌다. 케이가 자는 침대였다. 그의 온기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부들부들하고 좋은 냄새가 났다. 

문득 지니가 짝사랑하는 사람의 집에 몰래 들어가 마스터베이션을 하는 여자 이야기를 해줬던 것이 떠올랐다. 지니는 그것이 로망이라고 했다. 누군가 방에 숨어들어서 자신의 침이 말라 붙은 베개에 코를 박은 채 야릇한 신음소리를 내다 가는 것. 그러면 자기는 집에 돌아와서 ‘좀 이상한 걸. 평소하곤 뭔가 달라’하고 고개를 갸우뚱하지만, 결국엔 아무것도 모른 채 그 베개에 머리를 대고 잠드는 것이. 

- 이상해. 변태 같애. 

- 동의. 하지만 알잖아. 사람은 누구나 조금씩은 이상하고 조금씩은 변태야. 

- 음, 나도 동의.

- 당연하지. 

정혜가 지니와의 대화를 떠올리며 케이의 베개를 샅샅이 뜯어보았다. 침 마른 자국 같은 건 없었다. 확실히 케이는 천사처럼 얌전하게 잘 것 같은 이미지였다. 그녀는 케이의 얼굴을 그려보려고 애쓰며 옷 속으로 손을 넣어 자신의 가슴을 문질렀다. 하지만 아무리 집중하려고 해도 흥이 돋지 않았다. 

- 방법이 틀렸다니까. 혼자 할 땐 곁다리는 생략하고 곧장 3루로 달려야지. 

어디선가 지니가 말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난 3루가 어딘지 모르겠는 걸. 정혜가 진저리를 치며 대자로 누웠다. 텅 빈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 무늬 없는 진갈색 벽지가 발라져 있었는데, 어둠 때문에 거의 검정색처럼 보였다.

자기 몸을 만지면서 흥분한다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그녀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호기심에 몇 번 시도해보긴 했지만 손가락과 함께 기분만 찝찝해질 뿐 좋은 점이라곤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하기야 섹스도 별다를 건 없었다. 정혜는 고등학교 일 학년 때 처음으로 남자와 잤다. 상대는 아르바이트에서 만난 오빠였는데 내심 짝사랑하고 있었다. 방학을 맞아 그의 자취방에 놀러갔다가 같이 술을 마셨고, 머리가 어질어질해서 잠깐 침대에 몸을 기댔더니 그가 슬금슬금 따라 누웠다. 안 돼. 나 오늘 그날이란 말야. 정혜가 말하자 오빠는 괜찮다고 했다. 약간 겁이 났지만 눈 딱 감고 해버리면 그와 사귈 수 있을 것 같기도 했고, 친구들에게 경험담을 자랑하고 싶기도 해서 내버려 두었다. 남들은 첫 경험 때 죽도록 아팠다는데, 너무 취했기 때문인지 아픈 것도 몰랐다. 일을 치르고 나선 곧장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나보니 이불에 피가 흥건했다. 

- 오빠, 일어나 봐. 어떡해. 나 피나.

정혜는 옆에서 잠들어 있는 오빠의 어깨를 흔들었다. 그가 부스스 일어나 이불을 들춰보더니 인상을 구겼다.

- 에이 씨발. 가지가지 하네.

피를 보니 뒤늦게 허벅지와 사타구니 사이가 욱신욱신 아려 왔다. 뱃속 내장이 당기고 저릿저릿한 것 같기도 했다. 그녀는 괜히 서러운 기분이 들어서 훌쩍훌쩍 울었다. 

- 울긴 왜 우냐? 생리해서 그런 건데. 병신.

그는 거친 손길로 이불을 걷어내며 윽박질렀다. 

이후로도 다른 사람들과 몇 번 더 해봤지만 마찬가지였다. 컨디션에 따라 조금 더 아프거나 덜 아픈 정도의 차이였다. 지니는 정혜가 아직 제대로 된 섹스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정말 확실하게 하면 더 없이 좋은 게 섹스라고 했다. 

- 한국 애들보다 여기 남자가 더 잘하는데. 놀러 올래? 시티 관광도 시켜 줄게.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그 제안을 받을 때마다 정혜는 지니가 백인 남자와 섹스하는 장면을 상상하곤 했다. 몸에 털이 숭숭 난 덩치 밑에 깔린 채 낑낑 신음하는 그녀의 모습을 그려보면 어째선지 가슴이 홧홧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정혜는 이따금 자신이 레즈비언은 아닐까 생각했다. 남자랑 할 때 아무 느낌을 받지 못하는 것도 그런 이유는 아닌가 하고. 하지만 지금까지 자기가 좋아했던 사람은 다 남자였고, 섹스는 별로지만 키스하는 건 꽤 좋았다. 그런 걸 봐선 아마 지니의 말대로 제대로 된 섹스를 못했을 뿐인지도 몰랐다. 그녀는 키스도 혼자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정혜가 입맛을 쩝 다시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조금 더 누워있고 싶었지만 신발을 찾는 게 우선이었다. 주변을 둘러봤지만 그 방 안에는 침대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언젠가 잡지에서 케이에게 약간의 결벽증이 있다는 인터뷰 기사를 읽었던 것 같다. 모든 기사가 에디터 취향의 닭살 돋는 문장으로 구성된 패션 잡지에서였다. 심플 이즈 베스트. 모던한 분위기를 좋아해요. 집에 가구도 거의 없죠. 웃음. 정혜는 인터뷰를 읽으며 케이가 정말 그 대목에서 웃었을까 궁금해 했던 것이 떠올랐다.

어쨌든 인터뷰 내용 자체는 사실에 가까운 듯 했다. 케이의 집에는 가구는커녕 집안을 장식하기 위한 작은 액자나 화분 하나도 없었다. 다른 스타들이 흔히 그러듯이 자기 화보 사진을 대문짝만하게 걸어 두지도 않았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팬들이 선물하는 편지와 인형 같은 것들을 귀찮아해서 다 버린다는 소문을 들었던 것도 같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사실 케이가 여러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나 평소 태도로 추정컨대, 그렇게 실용성 없는 선물을 싫어하리라는 사실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바였다. 불청객들 정규 앨범 2집 히든 트랙에 수록된 케이의 자작곡 ‘To be, or not to be’에 그런 가사도 있지 않았던가. 너는 쓸모없는 놈. 사용되지 못하는 놈. 그저 존재함으로써 존재하는 놈.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라면 이제 그만 사라져 버려. 사라져 버려. 사. 사. 사라져 버려.

그래서 정혜는 종이학이나 인형, 팬레터 따위는 결코 선물하지 않았다. 주로 선물하는 건 케이가 좋아하는 수입 초콜릿이나 목에 좋은 캔디 같은 것들이었다. 언제나 그 자리에서 먹어치울 수 있을 만큼 적은 양으로, 방송국이나 공연장 근처에 주차된 그의 밴 앞에서 기다렸다가 직접 전달했다. 정혜가 먹을거리를 내밀면 케이는 잠시 망설이는 듯 그것을 잠시 내려 보다가 아무 표정 없이 휙 낚아채 가곤 했다. 그가 선물을 받으면 정혜는 허리를 접으며 고맙습니다, 하고 인사했다. 그러면 케이는 습관처럼 고개를 한 번 까딱하곤 아무 말도 없이 돌아서 차에 올라탔다. 쉽사리 감동하지 않는 태도는 케이가 평소에 추구하던 음악과도 묘하게 어울려서, 서운하기는커녕 도리어 고맙게 생각됐다. 

그 무심한 표정을 일 초라도 더 보려고 차창에 얼굴을 들이대다가 매니저와 말다툼을 하기도 했다. 한심한 년들, 그 열정으로 부모님 생일상 한 번 차려 드려라. 매니저가 그렇게 욕을 하면 정혜는 무리를 지어 다니던 다른 팬들과 입을 모아 소리를 지르며 반박했다. 생일상 차려 줄 부모가 없는데 어쩔래. 우리 덕에 월급받고 사는 주제에. 오빠 수발이나 똑바로 들어, 하면서. 

정혜는 불청객들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침실 밖으로 나왔다. 쓸모없는 놈. 사용되지 못하는 놈. 보컬을 담당하는 케이가 드물게 작곡과 편곡, 드럼과 베이스 반주까지 완전히 혼자 맡아 만든 노래. 지직거리는 전자음을 많이 삽입하고 요즘 유행하는 후크 송 스타일을 접목시켜 같은 노랫말이 여러 차례 반복되는, 불청객들의 노래 중에서도 정혜가 제일 좋아하는 곡이었다. 사라져 버려. 사. 사. 사라져 버려. 흥이 오른 그녀의 발가락이 움찔거렸다.

드레스 룸은 현관 바로 옆에 있었다. 케이가 자신의 페이스 북에 올린 셀프 카메라 사진에서 배경으로 자주 등장했던 바로 그 곳이었다. 다행히 밖으로 뚫린 창이 없었다. 문이 난 쪽을 제외하고 벽 세 개가 죄다 전신이 비치는 거울로 되어 있었다. 어두운 거울 속에 멀거니 서 있는 세 개의 인영을 발견하고 무서워진 정혜는 얼른 문 근처 벽을 더듬어 불을 켰다. 따뜻하고 노리끼리한 색감의, 화장실에서 주로 쓰는 백열등 빛이었다. 사람을 예뻐 보이게 하는 조명이었다. 거울 속 유달리 매끈해 보이는 자신의 얼굴을 보며 정혜는 케이가 이곳에서 주로 셀카를 찍는 이유를 짐작했다. 거울이 없는 쪽 벽에는 커다란 2층으로 된 커다란 행거가, 방 가운데 빈 공간엔 옷가게에서나 쓰는 고급 유리 선반에 가방과 모자, 선글라스 따위가 단정히 놓여 있었다. 전부 그가 즐겨 착용하는 것들이었다. 

정혜는 낯익은 물건들을 괜히 한 번씩 쓸어 보았다. 그의 공항 파파라치 사진에서 봤던 알 없는 뿔테 안경을 집어 껴보기도 하고, 얼마 전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했을 때 썼던 캡 모자도 써 보았다. 물건을 실컷 만져보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돌아보니 벽의 거울은 모두 붙박이장의 문이었다. 그녀가 후다닥 달려들어 거울 문을 밀어 열었다. 그의 깔끔한 성격을 반증하듯 벽마다 색깔과 종류에 따라 나눈 옷이 들어차 있었다. 

하얀 부츠를 찾아낸 장소는 셔츠 전용 옷장 바로 곁에 있는 벽걸이였다. 원목으로 된 열두 칸짜리 벽걸이에 칸마다 두 켤레씩 부츠가 들어차 있었다. 그 중 사슴가죽 소재의 하얀색 미드카프 부츠가 케이의 상징물이었다. 정혜는 손을 떨며 부츠를 꺼내 들었다. 

무대 위에서 케이는 그 하얀 부츠를 신고 긴 속눈썹을 내리깐 채 노래했다. 그가 내뱉는 노랫말은 흡사 소음에 가까운 의미 불명의 전자음과 뒤섞여 서서히, 서서히 아래로 가라앉았다. 정혜는 그의 음성이 지닌 보이지 않는 무게가 온전히 배어 있는 부츠를 가만히 끌어안았다. 가슴이 벌떡벌떡 뛰었다.

계획대로 부츠를 손에 넣으니 엄청난 대업이라도 이룬 것처럼 뿌듯했다. 한시라도 빨리 지니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다시 한 번 스마트 폰이 아쉬운 순간이었다. 그것만 있었다면 곧장 인터넷에 접속해서 대화 요청을 했으리라. 어쩌면 무료 영상 통화 어플을 이용해 직접 부츠를 보여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아쉬운 대로 사진을 찍어 두기 위해 휴대폰을 열었다. 카메라를 켜고 드레스 룸 여기저기를 꼼꼼히 촬영했다. 화질이 나빠서 걱정했지만, 그 덕분에 오히려 생각지도 못한 컷이 나왔다. 노이즈가 점점이 박힌 사진은 오래된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예스런 맛이 있었다. 사진을 찍고 나니 때마침 정확히 자정이었다. 액정에 출력된 0자 세 개가 어쩐지 굉장히 좋은 징조처럼 느껴졌다. 정혜가 싱글벙글 웃으며 불을 끄고 방 밖으로 나왔다. 

얼마 후면 부모님이 집에 돌아올 시간이었다. 그들은 정혜가 집에 없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리라. 그녀는 두 사람과 얼굴을 맞대고 마지막으로 대화한 게 언제였는지 떠올리는 것조차 어려웠다. 

엄마는 이른 오전엔 패스트푸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밤엔 이십 사 시간 분식집 주방 도우미를 했다. 명절이고 주말이고 하루도 쉬는 날이 없었기 때문에 날마다 피곤해했다. 집에 오면 이를 빠득빠득 갈며 자는 것 말고는 하는 일이 없었다. 

아빠 역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지는 정혜도 알지 못했다. 한 때는 대기업 하청업체에서 생산직 일을 했었는데, 재작년 정리해고를 당한 후부터는 공사장이나 공장 일용직을 떠도는 모양이었다. 신경질적이고 무뚝뚝한 엄마와는 달리 아빠는 다정한 성격이었다. 어쩌다 일찍 들어오는 날이면 떡볶이나 아이스크림 같은 군것질거리를 정혜의 손에 쥐여주며 말하곤 했었다. 우리 딸, 말상대 하나 없이 날마다 외롭지. 동생 하나 낳아줬어야 했는데 미안해. 아빠가 그렇게 말할 때마다 정혜는 어깨를 으쓱하며 괜찮다고 답했다. 

그것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동생이 갖고 싶었던 적도 없었고 부모님이 일을 줄이고 집에 있어줬으면 한 적도 없었다. 사실 정혜는 자신의 외로움을 즐기는 편이었다. 외롭다는 단어가 주는 서글프면서도 안락한 느낌이 그녀는 좋았다. 가능하면 오랫동안 외롭고 싶었고, 그렇게 고독하기를 꿈꾸는 자신이 특별한 사람처럼 여겨졌다. 지니는 제대로 외롭지 않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정말 외로운 사람은 절대로 외로움을 좋아할 수 없다고. 

- 너도 언젠가는 외롭다는 게 뭔지 확실히 알게 될 거야. 그럼 분명 지금 한 말을 후회할 걸. 그리고 외롭지 않을 수 있다면 뭐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

대화창에 올라온 지니의 말을 보면서 정혜는 정말 외로움을 싫어한다면 왜 그것을 자랑스러워하는지 따지고 싶었다. 제대로 하는 섹스를 자랑했던 것처럼 지니는 제대로 된 외로움을 은근히 뽐내고 있었다. 지니가 정혜를 무시하는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지만 그때만큼은 정말로 억울했다. 하지만 반박하지는 않았다. 그녀의 자긍심을 존중해주고 싶기 때문이었다. 다만 확실한 외로움에 대해서 오래도록 생각했다. 그녀는 외로움과 전쟁하면서 살고 싶지는 않았다. 그것과 맞붙어 승리할 자신도 없었다. 설령 외로움을 자신의 삶에서 내모는 데 성공할 방법이 있다 할지라도 전혀 행복할 것 같지 않았다. 따라서 정말 지니의 말처럼 언젠가 외로움을 이기기 위해서 무슨 짓이든 불사하는 날이 온다면, 차라리 그냥 깨끗하게 백기를 들고 죽어 버리겠노라고 다짐했다. 

어둠이 내린 거실을 잠시 둘러보던 그녀가 소파로 다가가 엉덩이를 털썩 내려놓았다. 사위는 여전히 고요했다. 발코니 너머에서 쏟아지는 눈은 한층 더 신경질적으로 변해 있었다. 바람이 제멋대로 불고 있는 모양이었다. 검은 도화지 위에 하얀 수채물감을 마구잡이로 흩뿌려 놓은 것 모양 하늘 꼴이 난잡했다. 

갑자기 코끝이 간지러웠다. 앗취. 앗취. 아앗취. 정혜가 자기도 모르게 몇 차례 재채기를 하다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옆집 쪽에서 현관문 여닫는 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벽에 살며시 귀를 대보았다. 혹시 누가 초인종을 누르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걱정스러웠다. 주인 없는 집에 몰래 들어온 것만도 심각한 범죄인데, 물건까지 훔쳤다면 두말할 여지도 없었다. 하지만 한참 시간이 지나도 이어지는 소리는 없었다. 하기야 이런 고급 아파트에서 재채기 소리가 새어나갈 만큼 방음 처리를 형편없이 했을 리도 없고, 설령 들렸다 해도 도둑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며, 도둑이라고 생각한다면 경찰을 부르지 벨을 누르지는 않을 터였다. 정혜가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긴장이 풀려선지 목이 말랐다. 발소리를 내지 않도록 조심하며 부엌으로 가서 냉장고 문을 열었다. 정혜의 입이 떡 벌어졌다. 냉장고 안에는 다른 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반찬통이나 물 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대신 편의점에서 파는 즉석 식품과 음료수, 그가 좋아하는 과자나 초콜릿 같은 것들이 종류별로 열을 맞춰 늘어서 있었다. 자로 잰 듯 어찌나 정연하던지 살짝 소름이 돋았다. 참으로 케이의 냉장고다운 모양새였다. 아무리 목이 말라도 차마 손을 댈 수가 없었다. 그 질서를 흐트러뜨리는 건 케이에 대한 반역 같았다. 정혜는 다시 문을 닫았다. 

마실 것을 눈앞에 두고도 그냥 돌아서려니 점점 더 갈증이 심해지는 것 같았다. 차라리 빨리 집에 돌아가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더 머무르고 싶기도 했지만, 어차피 너무 오래 있는 것은 위험했다. 돌아가기로 마음을 굳힌 그녀는 혹시 흔적을 남기지는 않았는지 자신의 행적을 곰곰이 되짚어 보았다.

정혜는 현관으로 다가가서 숨을 한 번 들이마신 다음, 천천히 문을 열었다. 복도에 나오니 벌써부터 추위가 느껴졌다. 최대한 신경 썼지만 밖이 워낙 조용해서 문 여는 소리가 크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녀가 잠시 멈춰선 채 눈만 깜빡이다가, 이번에는 숨을 천천히 내쉬면서 문을 닫았다. 띠리리리링. 짧은 멜로디가 복도를 울렸다. 자동 도어락이 작동되는 소리였다. 순간 흠칫했지만, 조금 전 옆집 현관문이 열렸을 때 도어락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너무 긴장을 해서 실제보다 요란하게 들리는 것이리라. 정혜가 애써 가슴을 누르며 계단 쪽으로 서서히 걸음을 옮겼다. 건물 뒤쪽 비상구로 통하는 계단이었다.

계단은 자동 센서 전등도 창문도 없어서 집안보다 훨씬 더 어두웠다. 하지만 경비가 지키고 있는 로비를 거치지 않으려면 이 계단을 이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휴대폰을 열고 어설픈 빛에 의지하여 더듬더듬 층계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온몸이 오돌오돌 떨렸다. 서늘한 온도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그냥 불안하기 때문인 것 같기도 했다. 올라올 땐 케이의 집에 들어갈 마음에 너무 들떠서 느끼지 못했는데, 막상 십 일 층 계단을 들키지 않고 내려갈 생각을 하니 까마득했다. 몇 번이나 발을 잘못 디뎌 비명을 지를 뻔했지만 겨우 참았다. 어떻게 왔는지도 모르게 1층에 도착해서 층계 옆에 붙은 쪽문을 열었다. 바깥바람이 와락 끼쳤다. 드디어 밖이었다. 건물 옆쪽으로 돌아 나가서 담 하나만 넘으면 끝이었다. 그녀는 몰아치는 눈발 속으로 사뿐사뿐 걸어 들어갔다.

- 거기, 너!

예상하지 못했던 목소리에 온몸에 피가 다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소리가 난 쪽을 흘끗 돌아봤다. 모자에 재킷까지 갖춰 입은 군청색 경비복과 허리춤에 찬 무전기 때문에 언뜻 경찰처럼 보였다. 하지만 기껏해야 아파트 경비원이었다. 모자 밑으로 보이는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것이 나이도 꽤 지긋한 듯했다. 

꽤 오래된 일이긴 하지만, 정혜는 진짜 경찰도 따돌려 본 적이 있었다. 연말마다 하는 가요 시상식 날이었다. 메이저 데뷔를 성공적으로 마친 불청객들의 리더 윤과 섹시한 이미지로 이미 탑 스타였던 가수 리에의 스캔들 때문에 한참 시끄러울 무렵이었다. 윤이 먼저 수작을 걸었네, 리에가 여우처럼 꼬리를 쳤네 실랑이를 벌이다가, 누가 먼저인지 모르게 서로 밀쳐대기 시작하면서 몸싸움으로 번졌다. 한 때 ‘빠돌이와 빠순이의 대격전’이라는 별칭으로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었던 바로 그 패싸움이었다. 정혜가 속한 불청객들의 팬은 모두 여자였지만 상대 쪽은 절반 이상이 남자였다. 정혜 패거리가 거의 일방적으로 코너에 몰리는 분위기 속에서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경찰이 우르르 나타났다. 누군가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것이었다. 팬들은 우왕좌왕하다가 허탈하게 붙들렸다. 그녀는 경찰을 따돌리는 데 성공한 얼마 안 되는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잡힌 이들 대부분은 훈방조치되었지만, 개중 주도자로 지목된 몇 명은 골머리 깨나 썩어야 했다. 만약 붙잡혔다면 정혜 역시 거기에 속했을 것이다. 

그날을 떠올리며 정혜가 호기롭게 돌아서 후다닥 달음박질했다. 눈 녹은 물이 촥촥 소리를 내며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 야!

남자가 호루라기를 불며 따라 붙기 시작했다. 보기보다 몸이 잽쌌다. 제발, 제발. 잡히면 안 돼. 정혜는 얼굴을 구기며 미친 듯이 뛰었다. 눈 때문에 길이 너무 미끄러웠다. 게다가 어수선하던 예전 패싸움 때와는 달리 일대일 경주였다. 결국 담을 코앞에 두고 다리에 힘이 풀려 콰당 미끄러지고 말았다. 정혜가 뒤를 바라보았다. 경비는 손 뻗으면 바로 잡힐 것 같은 거리에서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었다. 어깨를 들썩이며 달리는 그의 얼굴에서 허연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아이, 씨발. 제발, 제발. 그녀는 후다닥 일어나서 담 위에 손을 얹었다. 몸에 힘을 주고 도움닫기를 하려는 순간 그가 정혜의 목덜미를 홱 낚아챘다.

- 너 뭐야?

그가 험악한 목소리로 물었다.

- 왜 도망갔어?

경비는 그녀의 목덜미를 움켜쥔 채 경비가 다그쳤다. 

- 뭐야, 무슨 짓 했어?

아무 짓도 안 했어요. 그냥 궁금해서 들어와 본 거에요. 한 번만 봐주세요. 싹싹 빌어 보기라도 해야 할 것 같았는데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입이 마르고 목구멍이 짝짝 갈라졌다. 머리가 핑 돌았다. 정혜는 눈을 질끈 감았다. 

- 여기서 무슨 짓 했어. 집 전화번호 대. 빨리. 

경비는 정혜를 끈질기게 흔들며 물었다. 너 빠순이 맞지? 케이 찾아 왔지? 다 아니까 솔직하게 불어. 경비가 왁왁 고함을 질러대는 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기왕 이렇게 된 이상 얼굴에 철판 깔고 묵비권을 행사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심장이 팔딱팔딱 빠른 속도로 뛰었다. 흡사 케이의 노래 속 드럼 반주 같았다. 쿵. 쿵. 쿠다다다 쿵. 쿵. 사라져버려. 쿵. 쿵. 사라져버려. 쿵. 쿵. 쿠다다다 쿵. 속이 울렁거리면서 난데없이 눈물이 핑 돌았다. 울음을 터뜨리지 않기 위해 정혜는 양쪽 광대뼈에 힘을 주고 이를 악물었다. 

앨범 발표 직후 케이의 자작곡은 표절시비에 휘말렸었다. 노래에 사회 비판 메시지를 담았다느니 새로운 시도라느니 잘난 척하더니, 다 그렇지 뭐. 개나 소나 지가 서태진 줄 알지. 어차피 짝퉁일 뿐인데.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며 케이의 노래를 비웃었다. 너나 사라져 버려. 너나. 다행이라 해야 할지, 정식으로 활동한 곡이 아니라 기사가 뜨거나 크게 회자되지는 않았다. 그래도 저들은 케이의 페이스 북에 찾아와 끈질기게 댓글을 달았다. 니가 돈 써서 기사 막았지. 자본주의의 노예가 아웃사이더를 표방하다니 용서할 수 없다. 너나 사라져 버려. 물론, 케이는 그런 글은 본 척도 하지 않았다. 

- 앗쭈, 이 발랑 까진 년 보게. 웃어? 

경비가 팔을 들어 올리더니 그녀의 뺨을 갈겼다. 눈앞에 번개가 번쩍 치면서 확 열이 치밀어 올랐다. 정혜가 눈을 있는 대로 홉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 뭘 봐. 네깟 게 눈알에 힘주면 내가 무서워 할 줄 알아. 

그가 이번에는 손바닥으로 머리를 내려쳤다. 정혜의 고개가 아래로 홱 고꾸라졌다. 흙탕물에 엉망이 된 신발 끝이 시야에 들어왔다.

- 요즘 것들은 통 안팎 구분을 못 한단 말이야. 우리 집에도 딱 너 같은 년이 있거든. 아무데서나 팔랑팔랑… 집도 절도 없는 고양이 새끼들 같이.

경비는 빈정거리며 그녀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몸이 의지와는 상관없이 앞뒤로 흔들렸다.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정혜는 고양이의 세계를 그런 식으로 비유하는 것이 흔한 일인가 생각했다. 더불어 경비원이 입주자의 현관 비밀번호를 안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하는 생각도. 문득 뒤통수를 한 대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머릿속이 아찔해졌다. 

- 그만 때려. 개새끼야.

그리고 참을 수 없이 화가 치밀었다. 정혜는 모자 아래로 삐져나온 경비의 머리카락을 잡아채며 와락 달려들었다. 그의 모자가 공중에서 팽그르르 돌며 저쪽으로 날아갔다. 졸지에 산발이 된 흰머리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게 된 경비가 욕지거리를 하며 정혜의 팔을 붙들었다.

두 사람은 아무렇게나 뒤엉켜 몸싸움을 하기 시작했다. 발음이 다 뭉개져 무슨 의민지 잘 알아들을 수도 없는 고성이 오갔다. 바닥에 고여 있던 물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때아닌 난리에 B단지의 정적은 깨진 지 오래지만 밖을 내다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옷과 얼굴에 흙탕물을 잔뜩 묻힌 채 거지꼴이 된 두 사람과 달리 로열 타운 건물은 얄미울 만큼 산뜻했다. 

바람은 차고, 땅은 뜨거웠다. 

〈끝〉


 

 


 

광주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부문 당선 소감
“얼굴 붉히지 않고 꿈 밝힐 수 있게 돼 감사”

 

원고를 보내고 돌아오던 길이 생각납니다. 날씨는 흐리고, 거리에는 전날 내린 눈이 막 얼어붙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미끄러운 눈길을 더듬더듬 걸으면서 ‘이제 그만 둘까’ 하는 생각에 시달렸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할 만큼 했다 싶어서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글을 쓴다는 것이, 글을 쓰고 싶다는 것이 큰 잘못처럼 느껴졌습니다. 가족에게 폐 끼치지 말고 마음 접는 것이 어떨까. 

뉴스에서는 기온이 올랐다는데 이상하게도 온몸이 으슬으슬 떨리고 머리가 무거웠습니다. 감기 기운이 있는 것 같아서 약을 먹고 잠깐 누웠다가 기절하듯 잠들었습니다. 한참 자다가 기척이 느껴져서 깨어보니 어머니께서 이불을 바로 덮어주고 계셨습니다. 엄마아, 괜히 한 번 불렀더니 대답 대신 눈을 깜박 감았다 뜨시더군요. 어둠 속에 조용히 떠 있는 그 눈을 들여다보다 언젠지 모르게 다시 잠들었습니다. 어머니가 편찮으세요.

감기 때문이었을까요. 올해는 웬일로 원고를 보냈다는 사실을 깜빡 잊고 지냈습니다. 긴장을 풀고 있는 상태에서 당선 통보를 받았습니다. 어찌나 낯설었는지…. 네, 네 소리만 하다가 전화를 끊고 나니 기쁨보다는 불안함이 밀려왔습니다. 장난 전화는 아닌가, 문제가 생겨서 취소되는 건 아닌가. 당선 소감을 쓰고 있는 지금도 실감이 나지 않고 얼떨떨한 기분입니다.

누가 “무슨 일 하세요?” 물어올 때, 한 치의 부끄러움과 죄책감도 없이 “소설 씁니다” 하고 답하는 것이 꿈입니다. 이제 얼굴을 붉히지 않고 꿈을 밝힐 수 있게 되나 봅니다. 

미숙한 제가 첫걸음을 뗄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지금껏 해온 것보다 더 열심히 공부하고, 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항상 저를 지켜봐주시는 부모님,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그리고 숭의여대와 서울디지털대학 선생님들께도 인사 올립니다.

▲1986년 서울생 ▲숭의여대 문예창작과졸업 ▲서울디지털대 문예창작과 졸업

 

 

신춘문예 단편소설 부문 심사평

 

소설은 그냥 이야기가 아니다. 어떤 이야기가 현실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현실과는 또다른 낯선 모습을 통해 우리에게 역설적으로 다시 현실의 문제를 이야기해야 한다. 예심을 통해 올라온 10여편의 작품 중 최종적으로 골라낸 것은 ‘스며들다’, ‘과녁’, ‘선로의 시선’, ‘슈게이징’이다. 

‘스며들다’는 이미 죽은 자의 시선을 통해 자신이 죽기 전의 일들과 죽은 다음 빈자리를 이야기하는 방식인데 수화와 같은 색다른 매개를 동원하기는 했지만 너무 평이한 문장에 이야기 역시 평면적으로 이루어져 신선함이 부족했다.

‘과녁’은 아버지를 죽이는 아들의 이야기로 설정은 충격적이지만 소설의 얼개는 지극히 단순한데다 그것마저 억지로 짜맞추어 진행하는 느낌이다. 특히나 인물간의 관계가 지나치게 작위적이다.

‘선로의 시선’은 기차 여행중에 지금은 종교인으로 변신한 예전 고문기술자와의 마주침에 대한 이야기인데 현실의 이야기를 뛰어넘는, 그러면서도 아프게 현실을 바라보게 하는 소설적 장치로서의 낯섦이 부족하다. 기차여행과 고문기술자와의 마주침 얘기가 기차의 두 선로처럼 서로 어울어져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슈게이징’은 어느 아이돌가수의 사생활까지 관섭하고 그 속에 침입하는 극성팬의 이야기로 다른 응모작들보다 재미있게 읽힌다. 소재가 재미있다기보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문장의 활력과 탄력이 느껴진다. 작품 결말이 약간 안이하긴 하지만 밀도있는 문장으로 사생팬의 세계를 잘 형상화낸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올린다. 당선자도 낙선자도 부디 문장의 세계로 정진하길 바란다.

* 정 찬
▲부산 출생 ▲1983년 중편 ‘말의 탑’으로 등단 ▲동인문학상, 동서문학상 등 수상 ▲대표작 중편 ‘슬픔의 노래’, 소설집 ‘베니스에서 죽다’, 장편 ‘광야’, ‘빌라도의 예수’, ‘유랑자’ 등

*이순원 
▲강원도 강릉 출생 ▲1988년 문학사상에 단편 ‘낮달’로 등단 ▲동인문학상, 현대문학상, 한무숙문학상, 효석문학상 등 수상 ▲대표작 장편 ‘수색, 그 물빛 무늬’, ‘아들과 함께 걷는 길’, 중편 ‘은비령’, 단편 ‘첫눈’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