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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왕 -이기수

 

 

토끼가 나타나곤 했다. 남자는 화랑에 가서 여우 그림을 샀다. 조그마한 방의 벽면에 꽉 들어차는, 흰 털을 가진 커다란 북극여우의 그림이었다. 그렇게 큰 북극여우는 실재하지 않을 것 같았다. 괜찮은 묘사력을 가진 어느 작자가 고양이과 맹수들의 이미지를 조합하여 상상 속의 여우를 만들어낸 모양이었다. 어쨌든 그는 그것이 토끼를 쫓는 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다.

 

그는 눈언저리에 오는 경련을 느끼며 덫을 꺼냈다. 군데군데 슬어 있는 녹이 손끝에 닿을 때마다 스렁스렁, 소리가 났다. 마치 몸의 신경이 곤두서는 소리가 용수철을 통해 공명하는 것 같았다. 덫은 좋은 먹잇감을 알아보고는 이처럼 울다가 어느 순간 아귀를 다물 것이다. 그의 손가락은 아스라하게 덫의 아귀를 피해갔다. 언젠가 회사 사무실에 돌아다니는 쥐를 잡으려고 끈끈이를 놓았던 것이 생각났다. 사무실이 매점과 가까이 있어서인지 자꾸 쥐가 나타났다. 신기했다. 서류 뭉치와 컴퓨터 따위가 놓여 있는 책상들 사이로 어찌 쥐가 돌아다닐까. 과장은 한쪽 뒷다리가 끈끈이에 걸려든 쥐를 발로 짓눌러 끈끈이 전체에 완전히 달라붙게 만들었다. 과장이 놈을 밟을 때마다 놈의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과장은 중얼거렸다.

 

“신기하단 말이야. 고층 건물 12층에서 이런 쥐새끼가 돌아다닌다는 것이. 도저히 매치가 되지 않아.”

 

과장은 이제는 즐기는 듯, 이미 숨이 끊어진 쥐를 계속 발로 밟고 있었다. 죽은 쥐의 몸에서는 더 이상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는 토끼가 나타났던 곳들을 골라 세 개의 덫을 놓았다. 한 시간여에 걸친 작업 탓에 그의 몸은 약간 나른했고, 축축했다. 심호흡을 하고 자리에 앉았다. 이내 그는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초조해졌다.

 

그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방으로 가서 냉장고 문을 열었다. 며칠 동안 먹을 수 있도록 준비된 통조림과 육가공 제품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탄산음료를 꺼냈다. 그것을 한 모금 들이켜자 몸에 붙어 있던 미미한 열기가 기도를 따라 밑으로 내려갔다.

진열된 통조림들을 보니 간밤에 꾸었던 꿈이 생각났다. 꿈속에서 그는 수술실로 실려가고 있었다. 그는 의사에게 물었다.

 

“선생님, 어디가 잘못된 거죠?”

 

마스크를 쓴 의사의 눈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신장에 깡통이 들어갔군요. 깡통을 제거해야 합니다.”

 

“깡통이요?”

 

“통조림 껍데기 말입니다. 꽁치 통조림.”

 

그는 냉장고 속의 통조림을 떠올렸다.

 

“아니! 그것이 언제 거기에 들어갔지?”

 

그러나 의사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그를 수술실로 데려가 마취시켰다. 그는 꼼짝도 하지 못하고 수술이 이루어지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의사가 그의 몸에서 통조림을 꺼내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통조림 표면의 숫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목소리가 마취된 기도를 뚫고 바깥으로 튀어나왔다.

 

“아니 저건! 어제 먹은 것이 아니잖아!”

 

통조림 표면에는 ‘1983. 6. 15’라는 유통기한이 적혀 있었다.

 

철커덕, 소리에 그는 눈을 떴다. 잠이 들었던가 보았다. 잠시 후 왼쪽 손으로부터 통증이 전해져 왔다. 대수롭지 않겠지, 라는 생각과는 달리 통증은 점점 더 극심해져 심장까지 역류했다. 그는 그제야 비명을 질렀다. 벌떡 일어나 자신을 물고 있는 덫의 아귀를 벌리려 안간힘을 썼다. 손에서 덫을 풀어낸 뒤에야 요동치던 그의 심장도 가라앉았다.

 

“너도 이제 홀로서기를 해야지.”

 

애틋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충고하던 형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형의 충고를 들은 지 3주 만에 직장에 사표를 냈다. 아무도 그를 해고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직장 동료 모두가 자신을 싫어한다고 생각했다. 옆자리의 여직원이 한숨을 쉬며 서류 뭉치를 탁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은 것은 그에게 화가 났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창가에서 커피를 마시는 두 남자 직원이 창밖으로부터 한 번도 눈을 떼지 않은 것은 그의 욕을 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형은 자신에게 다 말해 보라고 했다. 그는 그런 형을 위선자라고 생각했다.

 

“과장이 나를…… 쥐새끼 취급했어.”

 

그는 과장이 덫에 걸린 쥐를 밟을 때 나던 소리를 기억했다.

 

“멍청한 녀석아. 그건 그냥 과장이 농담으로 한 말일 뿐이야!”

 

그는 덫이 낸 상처를 살폈다. 빨간 상처 주변으로 녹이 묻어 있었다. 입으로 그것을 빨아냈다. 연고를 어디에 두었더라. 두리번거리던 그는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동작을 멈추었다.

 

여우 그림이나 강한 빛 따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만히 벽면에 붙어 있는 그것, 토끼였다.

 

‘나타났군…….’

 

그는 토끼를 향해 겨누듯 몸을 돌렸다. 숨을 쉬고 있는지 믿기 힘들 정도로 미동이 없지만 분명한 것은 놈의 눈이 정확히 그의 눈을 향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생명이 붙어 있는 것의 눈 같지 않았다.

 

남자의 모든 생각이 토끼가 보여주는 그 모습에 갇혔다. 어느 누구에게도 공감을 얻을 수 없는 상황. 이런 이야기를 형에게 하면 믿을까. 그가 정녕 괴로워하는 것은 그것인지도 몰랐다. 자신의 어떤 생각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 예를 들어 고등학교 때 그는 옆자리의 친구에게 ‘백 워드 매스킹’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1주일 동안 백 워드 매스킹에 빠져 있었다. 그는 녹음기를 거꾸로 돌리기 전과 후에 모두 의미가 성립되는 말들을 찾아 노트에 적었다. 친구는 그가 보여준 노트를 밀어냈다. 흥, 친구의 콧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토끼에 대해 이야기를 했더라도 아마 그 친구는 그렇게 콧소리를 냈을 것이다.

 

시간이 더 지나자 토끼의 다리가 공중으로 떠올랐다. 토끼는 공 모양의 우주선처럼 허공에 부양했다. 남자가 앉아 있는 왼쪽으로 서서히 비행해서 스쳐가듯 반대편 벽을 향했다. 남자가 벌떡 일어나는 순간 관성을 얻은 토끼의 몸은 그대로 벽 속으로 사라졌다.

 

1983년 6월 15일 그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예전의 일기를 꺼내어 보았다. 그러나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은 고등학교 때의 기록뿐이었다. 1983년이면 그가 열한 살이었을 때였다. 왜 하필 꿈속에 그 날짜가 떠오른 것일까. 그는 잠시 고민해 보았지만 이내 그날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알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 하필 그 날짜인가라면 몰라도 통조림이라 하면, 새삼스러울 게 없었다. 그는 그날도 냉장고에 있는 통조림 중 하나를 골라 반찬으로 삼았을 테니까. 그의 아버지는 돈 잘 버는 사업가였고 어머니는 낮 동안 아버지가 번 돈을 다 쓰지 못해 저녁, 때로는 밤까지 집을 비우는 여자였다. 어머니는 자신이 집에 없을 때를 대비해 냉장고에 통조림을 넉넉히 준비해 두었다. 6월 15일은 모르긴 몰라도 아마 어머니가 집을 비운 날 중 하나일 터였다. 부모님이 없는 집에서 형은 그의 주인, 혹은 왕으로 군림하려고 했다. 그러니까 그는, 아침이면 도시락으로 싸갈 통조림을 고르고 방과 후에는 트집 잡기 좋아하는 형에게 두들겨 맞는 아이였다. 지금이야 형은 웃으며 ‘그때는 장난이었지만 너는 아마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을 거’라며 생각해 주는 체하지만 그는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형은 그야말로 숨을 쉬기 힘들 정도로 그를 닦달하곤 했던 것이다. 6월 15일, 아마도 그는 형에게 두들겨 맞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형은 가을이면 송충이를 잡아 죽이는 것을 즐겼다. 그에게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서 송충이를 잡아오라고 시켰다. 형은 놈들을 책상 위에 놓고 한 마리씩 라이터 불꽃으로 태웠다. 털이 타 없어져 버린 송충이는 몸을 마구 뒤틀었다. 불꽃을 치우면 죽은 척을 해야 살 수 있는 줄 알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시 불꽃을 가져다 대면 공중에 튀어오를 듯이 놀라며 몸을 뒤틀었다. 송충이가 죽은 척을 하지 않았다면 형은 그렇게까지 그 일에 스릴을 느끼지는 않았을 것이다. 불에 타 죽은 줄만 알았던 송충이가 다시 몸을 뒤틀 때마다 형은 웃었다. 죽은 척으로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은 송충이가 책상 모서리로 빠르게 기어갈 때 형의 눈은 더욱 커졌다. 송충이의 반응은 벌레의 지능이 생각보다 높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그럴수록 살생의 쾌감은 커졌다. 형은 나뭇가지로 거의 목숨이 떨어진 송충이의 머리를 눌러 고정했다. 그러고는 다른 나뭇가지로 송충이의 몸을 머리로부터 꽁무니까지 쓸어내렸다. 액체로 변한 송충이의 내장이 머리에서 꽁무니까지 밀렸다. 그러나 꽁무니가 터지거나 액체가 밖으로 튀어나오지는 않았다. 불에 노랗게 익은 송충이의 외피가 질기게 굳어 잘 터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형의 그러한 행동은 송충이의 숨이 완전히 끊어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조그마한 움직임이라도 있다면 형은 다시 송충이의 몸을 괴롭혔다.

 

“이꼬트.”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에 그는 눈을 떴다. 이꼬트. 귀를 기울였다. 누구일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예상했던 것과 달리 어느 곳에도 토끼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토끼를 느꼈다. 실체가 없어도, 방안에 토끼가 마치 기체처럼 스며들어 있었다. 토끼의 벽, 토끼의 바닥, 토끼의 장롱, 토끼의 텔레비전……. 그러나 다시 단발적으로 들리는 그 소리에 그의 생각은 정지했다.

 

“이꼬트…….”

 

소리인가. 아니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텔레파시인가. 토끼의 언어인가. 그는 ‘이꼬트’가 무슨 뜻인지 생각했다. 이내 자연스럽게 그 의미가 떠오를 것만 같았다. 이꼬트. 그것은 그냥 이꼬트이다. 이꼬트를 수긍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다시 한 번 천천히 주위를 살피다 벽면의 여우 그림 앞에서 멈추었다. 열풍을 만난 것처럼 숨이 멎었다. 그가 걸어 두었던 여우 그림에 변화가 생겼다. 커다란 앞발, 두터운 가슴팍, 모든 것이 그대로였지만, 그것은 더 이상 여우 그림이 아니었다. 이글거리는 이마 위로 솟은 두 개의 기다란 귀가 눈에 밟혔다. 벽 속의 여우 그림은 토끼가 되어 있었다. 이꼬트……. 토끼의 입술에는 움직임이 없었다. 그러나 정확히 그를 노려보는 녀석의 두 눈을 보자 모든 것이 분명해지는 느낌이었다. 토끼는 기체 따위로 존재하지 않았다. 벽 속의 실체와 함께 텔레파시도 명쾌해졌다. 이꼬트는 토끼의 언어가 아니었다. 단순한 말장난일 뿐이었다. 그가 고등학교 때 했던 말놀음을 가지고 토끼가 그를 놀리고 있는 것이었다. 백 워드 매스킹. 이꼬트는 ‘토끼’라는 뜻이었다. 이꼬트의 모음과 자음을 분리하여 순서대로 늘어놓으면 ‘ㅣ-ㄲ-ㅗ-ㅌ’였다. 토끼는 노골적으로 그를 비웃었다.

 

“누구십니까…….”

 

토끼의 얼굴에 웃음이 가셨다.

 

“나는 이꼬트다. 이꼬트.”

 

토끼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덧붙였다.

 

“하지만 예언자라고 불리는 것이 더 좋다.”

 

“예언자……?”

 

“내가 예언을 하기 때문이지. 토끼의 일, 인간의 일, 세상의 모든 일을 예언하지. 게다가 아주 구체적으로 예언하지. 밥상머리에서 있는 일까지 모두. 이를테면…… 너는 큰일 났어.”

 

토끼는 그에게 경고했지만 그는 놀림받는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림을 떼어 내 다시 화랑에 가져다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오히려 토끼에게 경고했다.

 

“너를 그림째 떼어다가 화랑에 가져다줄 거다.”

 

토끼는 다시 웃었다. 놈이 이렇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소용없어. 나는 기체로 존재하니까. 네가 그림을 떼다 버려도 나는 이 방 어디에든 존재할 테니까. 어느 사물 안에도 들어갈 수 있으니까. 토끼의 목소리가 들렸다.

 

“심지어 너의 기억 속에도.”

 

세 개의 덫이 아귀를 다물며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그러나 그것들이 삼킨 것은 투명한 공기 자락일 뿐이었다. 여덟 개의 전구 중 하나가 껌벅거렸다. 방은 한결 어두워졌다. 그는 토끼에게 물었다.

 

“나에게 왜 이러는 거지?”

 

토끼는 대답했다.

 

“곧 너의 몸에 변화가 생길 것이다.”

 

“변화?”

 

“너는 병에 걸렸기 때문이다. 네가 어렸을 적에 꽁치 통조림과 함께 먹었던 쇳가루가 모여 병이 되었어. 통조림 덕에 너는 병신이 되었어. 통조림은 이상한 욕심을 만들거든. 욕심이란 사람이 무언가를 하고 싶어 안달이 나는 것이거든. 쇠를 구부리고 싶어하지, 돌을 먹고 싶어하지, 자신의 몸을 둘로 나누고 싶어하지, 항문으로 먹고 입으로 싸고 싶어하지, 뒤로 걷고 싶어하지, 시간을 거꾸로 돌리고 싶어하지, 입으로 보고 싶어하지, 눈으로 듣고 싶어하지, 땅에서 하늘로 떨어지고 싶어하지, 여름에 눈을 기다리지, 제 집도 도둑처럼 창문으로 드나들고 싶어하지. 이 모든 것을 하고 싶어 환장하지. 냄새를 들어야 하는데 그게 안 되니까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돌아버리지. 그것이 이상한 욕심이다.”

 

구름처럼 짙은 침묵이 깔렸다. 천둥처럼 다시 토끼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는 왕이 될 것이다. 토끼왕!”

 

왕! 왕! 왕!

 

……왕?

 

“그게 무슨 소리지?”

 

토끼가 대답했다.

 

“네가 병신이기 때문에 너에게 왕좌를 주려는 것이다. 너는 학교에서도 빌빌댔고 직장에도 적응을 못 했다. 지금은 아예 아무 일도 하지 못하는 사회 부적응자야. 가족마저도 네가 일원이 아니기를 바라. 게다가 토끼들은 대부분 자신을 잔인하게 다룰 우두머리를 원하지.”

 

“나에게는 잔인함이 없어.”

 

서서히 두통이 밀려왔다. 두통에 다섯 단계가 있다면 지금은 네 번째 단계에서 다섯 번째 단계로 넘어가는 중간일 듯했다.

 

최고의 폭군이 되는 상상을 했다. 상상으로는 누구든 잔인해질 수 있었다. 누군가를 죽이는 생각을 수백 번도 할 수 있으니까. 예언자의 말처럼 그는 토끼왕이 될지도 몰랐다. 토끼왕이 된다면 트집을 잡아 토끼 한 마리를 가둘 것이다. 녀석의 귀에 구멍을 뚫고 철사를 꿰어 서서히 잡아당길 것이다. 귀가 뽑혀 나올 때까지. 그는 자신이 예언자의 말대로 가족들에게도 버림받았는지 생각해 보았다. 가끔씩 가족들에게 전화가 오지만 오히려 그가 귀찮아했다. 누가 누구를 버린 것인가. 어렸을 때 형에게 얻어맞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형은 이소룡의 영화를 보고 난 뒤에 쌍절곤을 사달라고 조르더니 부모님이 안 계실 때마다 그것으로 그의 머리를 때렸다. 형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아직 초등학생이라 과학 선생님이 없겠지만, 내가 나의 과학 선생님께 들은 이야기를 해주지. 첫째, 한국 사람은 맞아야 된다는 것이야. 둘째는 바로 생물은 고통에 적응한다는 것이지. 일일이 다 설명해 줄 수는 없지만, 너는 쌍절곤으로 맞는 걸로는 모자라. 내가 점점 힘을 더 주어 쌍절곤을 휘둘렀지만 너는 별로 아파하는 것 같지도 않더라. 어머니가 집을 비우면 너를 책임지고 교육하는 일 때문에 내 숙제를 잊을 때도 있어. 그런데 너는 몇 번씩 얘기한 것도 한 귀로 흘려듣고 똑같은 잘못을 범하지.”

 

형은 그의 음낭을 걷어찼다. 그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형은 손바닥으로 그의 얼굴을 가격했다. 그는 부모님 방으로 도망가 문을 잠갔다. 그리고 자신의 얼굴을 손톱으로 마구 긁어 손톱자국을 냈다. 그는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려 일부러 어머니가 올 때까지 자지 않고 기다렸다. 어머니는 새벽 2시가 넘어서야 들어왔다. 그러나 그의 얼굴을 본 어머니는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아마 외출해서 만났던 사람과 짜증스러운 일이 있었던가 보았다. 그녀는 마치 자신을 귀찮게 하지 좀 말라고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내일 약을 발라줄 테니 오늘은 어서 들어가 자라고 말했다. 이렇게 밤늦게까지 자지 않은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는 자신의 몸속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통조림을 꺼내듯 오래된 기억 하나를 끄집어냈다. 그가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거실의 탁자 위에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발코니의 의자에 형이 앉아 무심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형의 손가락에 희고 가느다란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 담배였다. 그는 상자 속에 무엇이 들었나 궁금하여 탁자 앞으로 갔다. 그리고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상자 속에는 하얀 토끼 한 마리가 피를 흘리며 할딱대고 있었다. 옆구리의 하얀 털이 빨갛게 물들어 상자 바닥까지도 축축하게 적시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지만 형이 상처를 입힌 것이 틀림없었다. 그는 복부 한가운데로부터 얼음 조각으로 긁듯 척추로 이어지는, 통증과도 같은 소름을 느꼈다.

 

그는 잠시 후 형이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을 지나 주방으로 가는 것을 보았다. 형은 그곳에서 슈퍼마켓에서 물건을 담아 준 흰 비닐봉지를 가지고 탁자 앞으로 왔다. 그리고 주저하지 않고 토끼를 집어 올려 그 비닐 속에 넣었다. 형은 공기가 통하지 않도록 비닐의 입구를 막은 다음 발코니로 가 그것을 창밖으로 던졌다. 그리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곧 방문 너머에서 텔레비전 소리가 들려왔다. 형이 좋아하는 쇼 프로그램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는 조용히 현관을 나서 발코니 밖의 잔디밭으로 갔다. 형이 버린 비닐봉지가 스륵, 스륵 소리를 내며 떨고 있었다. 그는 그곳으로 다가가 그 앞에 꿇어앉았다. 반투명한 비닐의 안쪽 면에 빨간 피가 묻어 있었다. 공기가 부족한 탓인지 토끼는 몸을 뒤틀며 괴로움을 호소하고 있었다. 안개 속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황량한 겨울의 나뭇가지처럼 토끼의 주둥이, 발, 귀가 비닐의 벽과 그의 가슴을 함께 쳤다.

 

구해줘야 해.

 

그는 비닐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비닐이 손에 닿기 직전 그는 동작을 멈추었다. 토끼는 죽음의 두려움을 느낀 듯 더욱 거세게 몸을 뒤틀었다. 흰 비닐이 점점 빨개지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일까. 그는 천천히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기를 기다렸다.

 

토끼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비닐봉지를 치워야 할지 어쩔지 고민했다. 6월 하늘에 태양이 뜨겁게 빛났다. 그는 다시 비닐봉지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때 완전히 죽은 줄만 알았던 토끼가 파륵, 몸을 떨었다. 그리고 그는 분명히 들었다. 토끼가 그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을.

 

‘악마.’

 

소리다. 토끼의 세상은 소리로만 존재하는가. 여러분. 우리들의 새로운 왕입니다. 새 왕은 악마입니다. 우리에게 최고의 폭군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몸을 모두 분리해 토끼 나라를 피바다로 만들 것입니다. 들어 보십시오. 왕이 취임사를 시작하겠습니다.

 

…… 토끼 왕국이 있기나 한 것인가. 마치 예언자와 그가 나누는 둘만의 대화 같았다. 취임사를 요구하는 예언자의 박수 소리가 외로이 허공에 공명하고 있었다.

 

“취임사라…… 글쎄…… 저는…… 왕이라, 허허허, 허허허허, 글쎄, 허허허허허.”

 

“새 왕은 반장은커녕 분단장 한 번 해본 적이 없는 한심한 인간이라는군요. 오로지 할 줄 아는 것은 토끼를 잡으려고 방구석에 덫이나 놓는 일뿐입니다.”

 

침묵이 흘렀다. 그가 있는 곳은 토끼 왕국도, 왕궁도 아니었다. 그의 방일 뿐이었다. 아무도 없는 방 안에 혼자 누워 있는 것일 뿐이었다. 그는 눈을 뜨고 그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너무 어두워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었다. 예언자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귀가 가려웠다. 몸이 근질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사위가 너무도 조용했다. 그는 약간의 두려움을 느꼈다. 꽤 오랜 시간 그런 침묵이 계속되자 그의 불안감은 더 커졌다. 폭력은 침묵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아주 가까운 어디에선가 살인이 일어나고 있을 것만 같았다.

 

예언자가 예언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미래에는 이상한 욕심으로 가득한 병신들이 세상에 널릴 것이다. 어깨가 간지러웠다. 손으로 뒷목을 쓰다듬었다. 손에 까칠한 느낌이 전해져 왔다. 그는 무언가를 작정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면실로 가려다 한쪽 무릎이 꺾였다. 세면실의 불을 켜려고 했지만 전구가 나갔는지 어둠이 가시지 않았다. 그는 다시 뒷목을 쓰다듬었다. 익숙하지 않은, 까칠한 그 느낌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그는 손을 뒷목으로부터 쓸어올려 뒤통수로 가져갔다. 무언가 튀어나와 있는 것 같았다. 손을 더 위로 쓸어올렸다. 그는 곧, 자신이 커다란 한 마리의 토끼가 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방에서 탈출해야 했다. 그는 겨울용 목도리를 꺼내 급하게 머리에 감았다. 우스운 꼴일 테지만 토끼 귀가 달린 것보다는 나았다. 현관으로 가 문고리를 돌렸다. 탈출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손쉽게 이루어졌다. 그는 빛 속으로 뛰어들었다. 너무 밝은 빛이었다. 그는 마구 달렸다. 빛들이 사방에서 그를 쫓아오고 있었다. 어림없는 속도였지만 다행히 빛의 손아귀에 완전히 잡혀 들어간 것 같지는 않았다. 절뚝거리면서 최대한 빨리 달렸다. 통증도 없는데 왜 자꾸 다리가 절뚝거리는 것일까. 긴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살인 사건이 일어나는 꿈 말이다. 그러한 사건에 연루되는 것은 끔찍한 일이었다. 숨이 가빴다. 그는 비틀거리다 그만 앞으로 고꾸라졌다. 자연스럽게 두 손으로 땅을 짚게 되었다. 그런데 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뒷발로 땅을 박찼다. 몸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그와 함께 앞다리도 빠르게 움직였다. 그는 그가 예전에 달려 보지 못한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달리자 그저 밝기만 하던 세상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건물이며 자동차며 사람들이며……. 그는 사람들을 피해 무작정 앞으로 내달렸다. 잠시 후 잔디밭에 도달했다. 그는 다리를 들고 뒤로 자빠져 숨이 넘어갈 듯 헐떡였다. 도대체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한참을 그렇게 누워 있는데 어디선가 예언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왕을 시켜줬더니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역시 병신은 병신이구나. 첫 번째 토끼를 어떻게 죽여야 할지 회의하느라 모두가 바쁜데.”

 

첫 번째 토끼를 어떻게 죽여야 하냐니. 그는 자신이 왜 그런 것을 생각해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예언자에게 자신이 왜 그런 것을 고민해야 하는지 반문했다. 또 자신은 그렇게 잔인한 인간, 아니 토끼가 아니며 왕이 국민을 어떻게 죽일까 생각하는 나라는 좋은 나라가 아니라는 말도 했다. 예언자는 웃었다. 약간 황당하다는 웃음 같기도 했고 그의 긴장을 풀어준 다음 어떤 이야기를 꺼내기 위한 것 같기도 했다. 그는 잠시 예언자의 웃음소리가 환상처럼 느껴져 다시 한 번 자신의 뒷목을 만지려 했지만 이제는 앞발이 뒤통수까지 올라가지 않았다. 예언자는 웃음을 멈추었다.

 

“법과 보복이 없었다면 넌 이미 수십 명의 사람을 죽였을 거야.”

 

법과 보복이라니.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그가 수십 명의 사람을 죽였을 거라는 말은 어처구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예언자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래서 수십 마리의 토끼를 죽인 거야. 토끼를 죽인다고 해도 대가를 치르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지.”

 

예언자는 다시 웃었다. ‘하지만 토끼는 반드시 보복을 한다네’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미운 사람들이 떠올랐다. 중학교 때의 수학 선생님, 아르바이트를 할 때의 편의점 주인, 훈련소의 조교, 회사에 있을 때의 과장. 생각해 보니 모두 죽여 버리고 싶다고 한 번쯤은 생각해 본 인간들이었다. 그러나 가장 강렬히 떠오르는 얼굴은 형의 얼굴이었다.

 

형이 버린 토끼를 질식사시킨 후 그는 아무도 모르게 토끼를 사 가지고 오곤 했다. 학교 앞 노점상에서 어떤 노인이 금요일마다 토끼를 팔았다. 마침 금요일은 특별활동 때문에 형이 학교에서 늦게 돌아오는 날이었다. 그는 금요일마다 토끼를 상자 속에 집어넣고 죽을 때까지 학대했다. 불과 물과 쇠와 나무, 모든 것이 그의 잔혹한 쾌감을 충족시켜 줄 도구가 되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토끼에게 명령을 내리고 죄목을 설명하곤 했다.

 

‘네가 왜 죽어야 하는지 알려주지…….’

 

그는 그 순간 토끼의 군주였고 집행자였다. 예언자의 목소리가 그의 회상을 깨웠다.

 

“자…… 제안해 봐라…… 첫 번째 토끼를 어떻게 처리할지…….”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예전에 토끼를 학살했든 어찌했든, 지금 그런 짓을 한다는 것은 그에게 괴로움을 안겨줄 뿐이었다. 그는 앞발을 땅에서 떼고 두 발로 서려고 했다. 하지만 마치 누군가가 척추를 내리누르고 있는 것처럼 상체가 올라가지를 않았다. 그는 몇 번 같은 시도를 했지만 무위에 그쳤다. 그의 가슴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라 콧구멍뿐 아니라 귓구멍에서까지 열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그는 예언자를 향해 소리 질렀다.

 

“이 더러운 새끼. 빨리 나를 두 발로 걷게 해 놔. 지금 당장.”

 

그러나 예언자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너도 죽고 싶은 거냐? 널 갈기갈기 찢어 죽여 버릴 테다. 주둥이부터 항문까지 뒤집어 놓을 거야. 내장이 밖으로 나오고 털북숭이 가죽이 내장이 되도록. 그런 다음 낫으로 네 몸뚱아리를 하나하나 분리시켜 놓을 거야. 절대 쉽게 죽이지 않을 거야. 심장도 네 몸이 모두 걸레 조각이 된 뒤에야 터뜨려 버릴 거야!”

 

예언자는 웃었다. 그리고 태연히 대꾸했다.

 

“왕께서 그렇게 하신다면 마땅히 받아들여야지요.”

 

예언자가 주둥이로부터 자신의 몸을 뒤집는 환상이 눈앞에 떠올랐다. 그는 너무도 놀라 껑충 튀어 올랐다. 예언자의 내장이 바깥으로 모두 드러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곧 그가 말했던 것이 현실이 되었다. 예언자의 몸에 낫 자국이 생기기 시작했다. 피를 뿜으며, 내장이 둘로, 셋으로, 넷으로 갈라졌다. 그의 내부에서 두려움과도 같은 어떤 울렁거림이 심하게 몸을 뒤틀었다. 그러나 그 울렁거림의 정체는 순도 백 퍼센트의 공포만은 아니었다. 그것이 백 퍼센트의 공포감이 아니라는 사실이 그에게 백 퍼센트의 공포감보다 더 큰 공포감을 주었다. 순도 백의 원액보다 맛이 강한 순도 오십의 원액이랄까. 그러한 울렁거림은 아주 짧지만 강렬했던 기억들과 마치 신경조직처럼 연결되어 있었다. 라이터 불에 송충이가 몸을 뒤틀 때의 기억, 무당벌레를 가둔 비커 속에 살충제를 뿌릴 때의 기억, 비닐 속의 토끼가 그에게 ‘악마’라고 외칠 때의 기억. 그는 예언자의 심장이 막 떨어져 나가려는 것을 보고 다급하게 예언자에게 말했다.

 

“정말로…….”

 

그러나 그가 머뭇거리는 사이에 예언자의 심장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는 자신이 ‘정말로’ 다음에 무슨 말을 하려 했던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정말로 미안해’, ‘정말로 너를 죽여버리고 싶어’, ‘정말로 괴로워. 이 악몽에서 나를 벗어나게 해줘’.

 

잠시 후 예언자의 시신이 눈앞에서 사라지고 무거운 침묵만이 흘렀다. 그는 너무 춥다는 생각에 몸을 떨었다. 하지만 하늘에서는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이렇게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는데도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보니 그는 병이 들었는지도 몰랐다. 곧 어디선가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예언자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 말을 쉽게 알아들을 수 없었다. 백 워드 매스킹인가. 곧 말하는 것이 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들의 말이 백 워드 매스킹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너무도 많은 사람이 동시에 말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알아들을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중 가장 크고 선명하게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그것은 장사꾼의 목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한 마리에 만 원, 무조건 만 원. 물지 않습니다. 냄새가 나지 않습니다. 한번 확인해 보세요. 냄새가 나지 않습니다. 만지지는 마세요. 냄새를 맡아 보세요. 어이 꼬마, 만지지 말고 코만 갖다 대 보란 말이여. 쉽게 죽지 않습니다. 물지 않아요. 한 마리에 무조건 만 원.”

 

그는 다시 주위를 자세히 둘러보았다. 방처럼 네모난 종이 벽이 사방을 막고 있었다. 그는 아마도 누런 종이 상자 속에 갇혀 있는 모양이었다. 그가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는 뻥 뚫려 있는 천장으로 사람들의 얼굴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것을 보고는 놀라 움츠러들었다.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은 대개 어린아이들이었다. 그들이 웅성거리는 소리 때문에 고막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누군가가 자신을 그곳에서 꺼내 주었으면 했다.

 

잠시 후 그의 소원이 이루어졌다. 장사꾼이 그가 들어 있는 상자를 통째로 들어 올렸다. 장사꾼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주 건강한 놈이여. 코를 봐. 촉촉하잖어. 집에 가져가서 잘 키우거라.”

 

그러나 장사꾼의 말과 달리 그의 몸 어딘가에 이상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 이상함은 곧 커다란 병으로 악화돼 그를 죽게 만들지도 몰랐다. 상자가 허공에 뜬 것 같았다. 발밑이 허전했다. 그는 그의 새로운 주인이 그를 잘 치료해 건강하게 키워 주었으면 하고 소망했다. 뚫린 천장으로 주인의 얼굴이 잠깐잠깐씩 비쳤다. 그런데 그 얼굴이 어딘지 익숙했다. 그의 가족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토끼에게 사람 가족이 있을 리가 있겠는가. 아마 전생에 그의 친형이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쨌든 그런 기시감이 그를 더욱 안심하게 만들었다. 6월 하늘의 따스한 햇살이, 부들거리던 그의 몸을 기어이 조금씩 녹이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1983년 6월 15일의 따스한 햇살이었다.

 

 

 

 

 

 

[당선소감] "세상세 내놓기 두렵지만 가치 있는 작품이기를" 이기수

 

소식을 듣고 소설을 다시 한 번 읽어 보았습니다. 세상에 내놓기 두려운 마음이 앞섭니다. 한 글쟁이의 작품이 세상 안에서 갖게 되는 존재 가치는 무엇일까요? 제 나름대로 내려놓은 답과 이 작품에는 꽤나 먼 거리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끔은 글을 쓰며 허송세월 보내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글이 잘되면 조증, 안되면 울증입니다. 글을 못 쓰는 저 자신에게 무척 미안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저를 믿어 주셨던 분들께 무척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고백하건대 착실하고 맑은 저의 아내가 아니었다면 이런 대단한 운도 저에게는 없었을 겁니다. 귀여운 내 딸 루비 사랑한다. 자극이 되었던 문우들과 내 소설을 가장 잘 이해해 주셨던 최학 교수님, 제가 이십 대의 불안에 떨고 있었을 때 강한 빛으로 이끌어 주셨던 이순원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신춘문예 당선이라는 것이 운이 따르지 않으면 결코 주어지지 않는 상이라는 것을 압니다. 이런 행운을 저에게 주신 매일신문사와 심사위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마지막으로 끝없는 믿음으로 성원해 준 저의 모든 가족들, 전화로 축하해 주신 분들, 나의 절친들, 왠지 제가 갚을 수 없는 빚을 진 기분입니다. 감사합니다.

 

이기수

 

◆ 약력

1978년생

우송정보대 문예창작과 졸업

가정방문 교사

 

 

 

◇심사평…기억-현실, 환상-실체 넘나들며 신선한 반전 돋보여    

 

오래전부터 인문학의 위기가 여러 입으로 회자되고, 활자의 힘이 예전과 같지 않은 이 시대에, 수많은 재능들이 질 높은 작품들을 투고하여 문학에 대한 우리 사회의 열정이 여전히 식지 않았음을 다시 확인해 주었다. 예심을 통과한 아홉 편의 작품 가운데서 심사위원들은 '토끼왕' '밤길' '어디, 흔들리나요?' 등 세 편의 소설에 주목했다.

 

'어디, 흔들리나요?'는 대상 작품들 가운데 가장 잘 읽히는 작품이었다. 문체가 유려하여 서술에 막힘이 없고, 이야기를 끌고나가는 힘도 나무랄 데 없었으며, 전체적인 짜임도 훌륭했다. 그러나 소설의 주제가 자못 위험하다고 생각되었다. 무엇보다도 한일 간 국제결혼한 부부의 침실 갈등을 민족 갈등과 등치하는 설정에는 무리한 점이 없지 않았다. 과도한 의식은 자주 나태한 의식과도 연결된다. '밤길'은 우선 높은 묘사력으로 주의를 끌었으며, 균형감 있는 인물 설정, 과거사와 현대사의 적절한 배치 등 소설의 전통적 기법을 잘 활용한 수작이었다. 그러나 안정된 그만큼 주제가 상투적이었고, 신인다운 패기를 발견하기도 어려웠다. 소설의 초입에서부터 깔아 놓은 복선을 크게 활용하지 못했다는 점도 이 작품의 약점으로 지적된다. 곁가지가 많은 구조와 복합적인 구조는 다르다.

 

당선작으로 선정된 '토끼왕'은 기법의 관점에서 볼 때 난도가 매우 높은 작품이다. 기억과 현실, 환상과 실재를 교묘하게 배치하여 극적 반전의 플롯을 구성해 낸 작가의 역량이 높이 평가되었다. 한 편의 환상소설 안에서 주인공의 심리 변화를 꼼꼼하게 계산해 낼 수 있었다는 점은 이 신인 작가의 과학적 인식 능력을 증명해 준다. 당선자가 환상적 서술과 이상심리에 기대지 않고 현실과 정면 대결하는 소설에서 성공할 때, 그 작가 의식의 폭이 훨씬 더 넓어질 것이라고 심사위원들은 생각한다. 응모자들의 정진을 빌며, 당선자에게 축하의 인사를 보낸다. 문학이라는 이 고달픈 여정에는 늘 다시 시작하는 길밖에 다른 길이 없다.

 

본심: 황현산(문학평론가)`김형경(소설가) 예심: 우광훈(소설가)`박정애(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