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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쇄, 회로 / 이호

 

창문 앞에 섰을 때 그 사람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온통 주차장이 되어버린 주차장이었다.
… 멈춰있지도 않았다. 덜덜거리고 있었다 분노 때문인지, 걱정 때문인지, 불안 때문인지 
겁에 질린 채로 주차장이, 주차장이 되어 있었다
차들은 목적지를 지나쳐버렸고 어디서 브레이크를 밟을지를 알지 못했다
미끄러지는 차들과 사람들이 위태로워 보였다 그들은 얼마나 빠른 속도로 가야 했던 걸까

 

 

〈CAM 001〉

아침 여덟 시에, 그 사람은 창문을 열었다.

창밖은 자동차로 가득했고, 시동을 거는 소리와 기화된 가솔린을 빨아대는 엔진 소리, 차를 빼달라고 외쳐대는 전화벨이 누군가를 부르고 있었다. 차들의 행렬이 씨줄과 날줄이 되어 엉클어지고 있었다. 아파트 입구에 한참 동안 멈춰 서서 경비의 수신호에 순종하던 경차가 참다못해 차창을 내리고는, 경비를 향해 조심스러운 푸념을 내뱉었다. 희끗희끗한 머리를 제모로 가린 경비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짓고 손바닥을 내밀어 허리를 굽히면서도 다시 외제차에 먼저 수신호를 보냈다. 그 사람은 창문 밖으로 손을 내어, 겨우 액셀을 밟으며 움직이기 시작하는 경차의 뒤를, 장난감 자동차를 밀어주듯이 손가락으로 살며시 밀었다. 승합차가 피곤한 듯이 스물스물 들어왔고 비어있는 자리에 주차한 뒤, 잔뜩 웅크린 짐승을 뱉었다. 그러고는 한동안 조용했다.

그 사람은 인터넷 서핑을 하고 있었다. 외국 신문 사이트의 연예, 스포츠, 가십 기사나 출처 모를 소문들을 찾고는 열시 반 정도가 되어 눈길을 끄는 기사 두세 개를 골라 대강 번역을 하고 이메일을 보냈다. 하루의 지루함이 느껴지기 시작하는 열한 시쯤 인터넷 신문의 기사 목록은 새롭게 갈아 채워져 있었고, 인생의 지루함을 느끼기 시작하는 오후 세 시를 넘겨 좀 더 지릿지릿한 느낌으로 기사 목록은 변해 있었다. 하루가 무사히 끝날까가 불안해지기 시작하는 오후 다섯 시쯤이 되었을 때, 그 시시한 이야기들이 누군가로 하여금 엉덩이를 들고 잠시 쉬어야겠다는 마음이 들게 할 정도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오후 여섯 시, 그 사람은 다시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아침에 나간 차들이 모두 돌아올 거라고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퇴근 시간을 지킨 몇몇 자동차가 주차장을 어지럽게 만드는 모습을 그 사람은 마냥 바라보고 있었다. 그 사람은 거실로 돌아와 엉망진창인 일일 드라마와 TV 뉴스를 보고 별난 세상 이야기를 한동안 지켜보았다. 다음 날 아침을 위해 기삿거리를 몇 개 찾았고, 그 사람은 이불 속으로 숨어들어가듯이 혹은 미끄러지듯이 사라졌다.

〈CAM 002〉

그날 아침도 여전히 주차장은 시끄러운 소리를 내고 있었다. 어떤 움직임을 감지하고 반쯤 눈을 떴다. 그 사람은 몸을 이리저리 뒤적거려 이불 속에서 빠져나오고 있었다. 따뜻하게 데운 물 한 잔을 들고 창문 앞에 섰을 때 그 사람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온통 주차장이 되어버린 주차장이었다. 웅성웅성하는 소리로 아파트 이랑이 울렸다. 움직이지도 않고 멈춰있지도 않았다. 덜덜거리고 있었다. 분노 때문인지, 걱정 때문인지, 불안 때문인지, 겁에 질린 채로 주차장이, 주차장이 되어 있었다. 경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경비는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달려오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에, 그러니까 그 사람이 꽤 어릴 때였던 것 같다. 지금은 그 사람 혼자 살게 된 바로 이 집에 명절날 친척들이 잔뜩 모여서 뉴스를 보고 있던 광경이었다. 마루 가득, 누구 한 명 화장실에라도 가려고 일어서면 엉망진창이 되어 버릴 것 같은 밀집 지구였다. 뉴스에서는 명절 도로 상황을 알려주고 있었고, 어렸던 그 사람이 갑자기 소리쳤다.

―명절에는 왜 길이 막혀요?

한꺼번에 차들이 몰려나오기 때문이라고 누군가 대답해 주었지만 그 사람은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친척들은 다시 무슨 다른 이야깃거리에 빠져 그 사람은 신경 쓰지 않았다. 아무도 들을 수 없는 소리로 그 사람은, 차들이 몰려나와도 각자 자기 길을 어서 찾아서 가면 되는 게 아니냐고 말했지만 누구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20여 년이 흐른 그때, 기시감 속에서 그 사람이 본 창문 밖 풍경은 그때처럼 자동차들로 붐볐지만 어디에서도 길을 막고 있는 사람을 볼 수는 없었다. 단지 좁은 문과 길과 자동차들이 보였다. 먼저 나온 사람이 먼저 가고, 그 뒤의 차들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오전에 해야 할 일을 끝내고 환기를 하려 창문을 열었을 때, 주차장은 드문드문 차가 주차되어 있고 경비가 그 사이를 지나다니고 있었다. 잠시 멈칫한 경비가 방금 지나친 차로 돌아가 차 앞유리를 살펴보고 손을 모아 차 안을 잠시 들여다본 뒤에 발걸음을 돌려 경비실로 향했다. 잠시 후 경비가 차 쪽으로 걸어가,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반으로 갈라내고 차 앞유리에 붙이고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외부 차량에 붙이는 경고장의 붉은색은 자극적이었고 검은색은 냉철해 보였으며 하얀색은 허무해 보였다. 경비는 경비실 앞의 의자에 푹 파묻혀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그 사람이 넉 달 전부터 책상 위에 놓아두기만 한 초콜릿에 손을 살짝 뻗었다가 거두었다.

그 사람이 다시 일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을 때쯤, 창밖에서 큰소리가 났다. 그 사람이 의자에서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자 경비실 앞에 아까 경고장을 붙인 차가 서 있었다. 차 주인과 경비가 대화를 하느라 아파트가 울렸다. 차 주인이 손가락질을 하며 말을 하면, 경비는 조곤조곤하면서도 목소리 크기에서는 지지 않는 뚝뚝한 말투로 그 손가락에게 이야기했다.

―아파트를 방문하시면 경비실에서 방문증을 발부받으셔서 걸어놓으셨어야죠.

―아니, 경비실에 아무도 없고 한참을 기다려도 오지 않는데 방문증 받으려고 하루 종일 기다리란 말요?

―그러면 메모라도 해서 놔두시든가 하셨어야죠. 어쨌든 규정이 그래서 그런 거니 할 수 없습니다.

―내가 내 어머니 보러 온 것도 누구한테 보고를 해야 한단 말요! 천년만년 주차하는 것도 아니고 그거 잠깐 들여다보고 나온 건데 당신은 부모도 없소!

차 주인이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제가 사장님이 어머님 보러 오신 건지 어떻게 알고 그랬겠습니까. 근데 그래서 뭘 어쩌란 말입니까. 보고 나오셨으면 가실 길 가시면 되지, 아파트 시끄럽게.

경비는 여전히 의자에 앉은 채 따박따박 말을 받아내고 있었다.

―이 경고장 이거 뭐요. 이거 당장 떼시오!

―전 그거 못 뗍니다. 그거 물 조금 뿌린 뒤에 긁어내시면 금방 떨어지니까 돌아가셔서 떼십시오.

―아니, 이 사람이! 잘못한 게 없는데 내가 왜 떼! 빨리 떼요!

―저는 규정대로 했습니다. 서로 뭘 모르고 한 거니까 다음부터 안 붙일 테니 돌아가십시오. 아파트 시끄러워서 민원 들어옵니다.

―민원이라니! 내가 말하는 건 민원이 아닌가! 아파트 사람만 사람이오! 사람을 불편하게 했으면 책임을 져야지!

차 주인은 거의 반말에 가까운 말투로 소리쳤다.

―자꾸 그러시면 경찰에 연락하겠습니다. 좋은 말로 하시면 될 걸 자꾸 큰소리를 내시고 그러십니까.

―하! 경찰! 한번 불러보시오!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것도 없는데 오란다고 올까! 잡을 놈 안 잡고 약한 놈들만 잡아대니 좋다고 오겠구먼! 경찰하고 친해 좋겠소!

운전석 문에서 쾅 하는 소리가 나고 낡은 차가 검고 탁한 연기를 내뿜으며 떠났다. 경비는 그 연기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하얀색 담배를 꺼내 물고 가래침을 옆에 있는 화분에 칵 하고 뱉었다.

퇴근 시간, 차가 들어오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그 사람은 하던 일을 갈무리하고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낡은 소형차가 주차 공간을 그려놓은 흰색 박스의 바로 앞에 주차를 했다. 아직 다른 곳에 주차할 공간이 많았지만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는 작은 건물에 기댄 채로 소형차는 흰색 박스를 가로막고 있었다. 그 사람은 창밖으로 손을 뻗어, 엄지와 검지로 소형차를 살짝 들어 올려 흰색 박스 안으로 돌려 넣으려 해보았지만 헛손질이었다. 차 한 대가 주차할 수 있는 그곳을 가로막고 선 소형차는 가로세로가 그어져 줄줄이 늘어선 규칙적인 선들과는 어쩐지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그때 경비는 순찰을 돌고 있었거나 반대편 경비실에서 커피 한잔을 마시고 있는지도 몰랐다. 아무튼 익숙하지 않은 그 모습이 어색하고 어딘지 마음에 걸렸는지 그 사람은 계속 주차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점점 들어오는 차들은 마치 그 차를 피하는 것처럼 다른 곳에 주차를 했다. 아무도 경적을 울리거나 불평하지 않았다.

날이 어둑해진 지도 꽤 되었고 주차장은 거의 가득 채워져가고 있었다. 소형차가 가로막은 자리만 남아있었다. 잠시 후, 아파트의 가로등 불빛이 막 들어오는 검은색 세단을 비췄다. 주차장에는 더 이상 자리가 없었다. 소형차가 가로막은 자리만이 남아있었다. 검은색 세단이 소형차 근처에서 멈추고, 열리는 문 너머로 누군가가 내렸다. 소형차 앞으로 가서 앞 유리를 기웃기웃하다가 손을 모아 차창에 대고 차 안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차 뒤쪽으로 가서 한번 밀어보지만 움직이지 않자 경비실 쪽으로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경비실에서 검은색 세단의 주인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아직 시동이 켜져 있는 검은색 세단의 주인은 소형차를 한번 노려보다가 차에 타고 천천히 움직여 소형차 바로 옆에 세웠다. 닿을 듯 말 듯 거리는 아슬아슬했다. 말하자면 차들이 지나가는 도로 한복판에 세운 것인데, 그 작은 차는 이제 사방이 막혀버린 신세가 되고 말았다. 아니 그 작은 차가 갈 수 있는 곳이라고는 주차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흰색 박스 안의 주차 공간뿐이었다. 검은색 세단의 사이드브레이크 소리는 요란한 소리를 냈고, 검은색 세단의 전조등은 눈을 감았다.

그 사람은 초콜릿을 한 개 들어 포장을 벗긴 뒤, 알맹이를 한참 동안 노려보다가 원래 있던 자리에 돌려놓고 포장지만 조금 핥아낸 뒤 쩝쩝거리며 침대 위 이불 아래로 사라졌다.

〈CAM 003〉

그날, 그 사람은 일할 생각이 들지 않았나 보다. 해가 뜬 후 느지막이 일어났고 폭식을 하려는 듯이 냉장고와 찬장을 한참 뒤적였지만 먹을 만한 것은 없었다. 위액 맛 우유, 눈밑 색깔같이 검게 변한 햄, 센 머리칼같이 부스럭거리는 식빵, 노(老)사과, 검버섯이 핀 밥솥.

그 사람이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어디로 갈지 알 수 없었지만, 엘리베이터를 타고 있었다. 현관문을 나서면 바로 앞, 오래도록 그곳, 가장 좋은 자리를 그 사람의 차가 차지하고 있었다. 다른 차들이 없는 사이에 주차를 해놓고 몇 주째 그 자리에 상주하고 있던 차였다. 배기가스가 경계석과 화단을 손상하니 후면 주차를 지양해달라는 벽보가 간절한 마음을 품은 채 여기저기 붙어있었지만, 그 사람의 후면 주차 태도는 꽤나 당당했다. 그 사람의 차는 다른 차들이 거리로 나오지 않을 때에야 비어있는 도로를 질주했고, 다른 차들이 돌아오기 전에 돌아와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했다. 그 사람도, 그리고 그 누구도 치사하다고 생각하진 않는 것 같았다. 그 사람은 편리함을 선택하는 대신에 평범함을 포기했으니 공평한 일이었다.

그 사람은 차를 몰아 마트나 시장이 아니라 근처의 화랑으로 향하고 있었다. 현관에 쌓여있던 신문 더미 위에 끝나가는 사진전 전단지가 있었다. 무슨 사진전인지도 그 사람은 눈여겨보지 않았지만 그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덜덜거리는 자동차의 진동이 텅 빈 장기를 감싸고 있는 허리와 건강하지 못한 배출기관을 보호하고 있는 엉치뼈를 안마하듯 두드리고 있었다.

아무리 한가한 시간이라도 도로에 차 몇 대 정도는 달리고 있었다. 어디로 무슨 일 때문에 도로에 나와 있는지 모르는 차들이었지만 두려운 속도였다. 그 사람은 그 줄에 살며시 끼어들어 액셀을 밟기도 하고 떼기도 했다. 계속 액셀을 밟을 수는 없었고 일정한 속도로 달릴 수도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 사람은 금방 피곤해했다. 규칙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 규칙인 규칙은, 그 사람에게는 운전을 하면 피곤해진다는 규칙 이외의 그 어떤 목적도 의미도 아닌 규칙인 것 같았다.

그리 크지 않은 화랑이었고 주차장에는 차 넉 대 정도가 주차할 수 있을 공간밖에 없었다. 그 사람은 남은 두 자리 가운데에서 구석 자리를 골라 차를 대고, 주택가에 들어선 화랑 앞에 내렸다. 한산하지만 입구는 호화로웠다. 벽을 일부러 쌓아 햇빛을 가려서 어둡게 해놓았지만, 황금색 조명만은 밝았다. 입구를 장식하고 있는 붉은색 철제 기둥들이 늘어서있어 마치 토리이(鳥居)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붉은색 페인트는 칠을 한 지 오래되지 않은 듯 어색하게, 그렇지만 악착같이 구조물에 들러붙어 있었다. 그 사람은 접수대에 돈을 내고 표를 받았다.

전시장에는 스무 점 남짓한 사진이 걸려있었고 관람객은 없었다. 혼자서 관람하는 전시는 조용하고, 난잡하지 않았다. 사진을 대충 지나치며 한 바퀴를 돌고, 벽을 따라 걸었다. 중앙의 패널을 거쳐 순환하며 걷는 진로는 엎어놓은 '8'자 모양, 그러니까 무한대를 나타내는 표지의 모양, 또는 벌들이 멀리 있는 꿀을 찾았을 때 추는 춤의 모양 같았다. 사진들은 전쟁터, 폐허, 도시의 뒷모습, 그리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통과 절망, 슬픔과 유약함, 한 포기의 포기들을 담은 채로 황금색 조명들에 빛나고 있었다. 세 바퀴째가 되어, 그 사람은 사진들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가이드 같아 보이는 사람이 전시장으로 들어왔다. 여자치고는 조금 큰 키에 마른 큐레이터는 그 사람 혼자만 있는 것을 보고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그 사람에게 다가왔다.

―작품을 해설해드리려고 하는데 들으시겠습니까?

―그럴까요.

그 사람은 무신경하게 대답했다. 혼자서 미인 큐레이터의 해설을 독차지하는 호사(好事)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길까 하는 기대감은 없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단체 관람객 입장하십니다.

가이드의 귀에 걸려있는 무선 이어폰을 통해 그런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아, 손님. 죄송합니다만 다른 관람객들과 함께 이동하시면 전시된 사진들이 어떤 작품들이신지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익숙하신 한국어였다. 곧 중고생으로 보이는 한 무리가 들어오셨고, 그 사람은 그들의 뒤에 섰다. 가이드는 작가의 이력과 경향을 말하고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학생들에게 물었다.

―학생 분들 같으신데 평소부터 사진에 관심이 많으셨나요?

―아니요, 저희 그냥 방학 숙제 하려고 왔는데요.

어느새 작품 설명이 끝났고 학생들은 가이드를 졸라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사진 전시장을 벗어나고 있었다. 그 사람이 여섯 바퀴째를 돌며 사진들을 스쳐 지나가고 있을 때 학생들의 무리는 다시 들어와 킥킥거리며 한 바퀴를 휙 돌아 전시장을 빠져나갔다. 경쾌한 그들의 관람이 사라지고 전시장은 다시 조용해졌다.

그 사람은 한동안 걷다가 한 사진 앞에 발을 멈췄다. 예쁜 소녀였다. 나이는 열 살 남짓으로 보였고. 사진의 밑에 '카불 거리의 어린 소녀'라는 팻말이 붙어있었다. 괄호 안에는 'A young girl on the street of Kabul'이라는 원제가 적혀있었다. 어린 소녀는 조금 지저분하지만 전쟁통의 아프간치고는 꽤나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다. 손을 앞으로 모아 치마 앞자락을 꽉 쥐고 한껏 멋을 낸 머릿결이 조금 삐쳐있었지만 앙다물지 않은 입술은 예쁜 빛깔이었다. 그리고 카메라 렌즈를 쳐다보고 있는 그 눈빛은 아마 거리의 소녀, 몸을 파는 소녀의 눈빛이었다.

전쟁에 내몰린 소녀가 그 사진을 찍고 있던 카메라맨에게 몸을 팔고 있었다. 어른들의 전쟁에 내몰려 어른들의 돈에 몸을 파는 그 눈빛은 카메라맨을 유혹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편 알 수 없는 눈빛이었다. 소녀의 눈에 눈물의 흔적은 없었다. 분노에 차있지도, 절망에 빠지지도 않은 눈을 하고 있었다. '카불 거리의 어린 소녀'가 아니라 '카불의 어린 거리 소녀'였겠지만 팻말에는 'A young street girl in Kabul'이라고 쓰여 있지는 않았다. 조용해지는 전시장에서 그 사람은 그 소녀를 한참 동안 바라보고는, 발길을 홱 돌렸다.

출구로 나가기 직전에 걸려있는 사진 앞에서 그 사람은 다시 발을 멈췄다. 수도승이 탁자에 왼손을 올린 채 의자에 앉아 있는 사진이었다. 그의 앞 탁자에 반쯤 마신 콜라병이 놓여있고, 수도승 뒤로 콜라 상표가 사진에 담기지 않을 정도로 크게 그려져 있었다. 보시로 받은 콜라를 마신 수도승의 눈빛이 마치 참선을 하듯이 멍하게 허공을 향하고 있었다. 그 사람은 화랑을 나왔다.

그 사람은 시동을 걸고 한산한 도로로 차를 몰아갔다. 아파트로 돌아왔을 때, 주차장의 그 자리는 여전히 비어 있었고, 그 사람은 후진으로 주차를 했다. 주차 공간은 넓었기 때문에 차를 주차하고도 흰색 선 안에는 아직 빈 공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 사람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 창을 열어 기사들을 읽어보고 있었다. 그날은 기사를 쓰는 사람이 아니라 기사를 읽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 같았다.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다가 마우스에서 손을 떼고 키보드에 손을 올려 이런저런 댓글을 달기도 했다. 전날에 그 사람이 번역해 보낸 기사가 보였다. 그 사람은 마우스 버튼을 눌러 기사를 열람했고, 별것 아닌 기사에 댓글이 몇 개 달려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제목 예술이네. 낚였지만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지 않아'라는 댓글을 한참 동안 보고 있었다. 비뚤어진 흰색 화살표가 '제목이 예술'이라는 문구에 닿아 있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책장이 아닌 서랍을 열어 국배판 도스토옙스키 전집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힘겹게 꺼내 펴들었다. 그 책에는 낡은 책갈피가 하나 끼워져 있었는데, 책장과 달라붙어 떼어낼 때 마치 찢어질 듯한 소리가 났다. 8페이지. 책갈피가 끼워져 있던 거기로부터, 그 사람은 그 뒤를 읽어본 적이 없었다. 거기를 넘기지 못했다. 거기에 무슨 중요하고 감동적인 구절이 있어서는 아니었고, 다만 언제나 항상 그 페이지 위에서 잠들었다. 싸구려 책갈피에는 누군가가 했던 말이었는지 그런 문구가 쓰여 있었다.

―인생은 길고 예술은 짧다.

〈CAM 004〉

아침, 그 사람은 늦잠에서 겨우 깨어났다. 하루를 쉬었지만 부진을 면치 못한 것 같았다. 아침 일을 놓치고 어떻게든 오후 기사를 맞춰보려고 해외 가십 기사들을 뒤적거렸다. 스포츠 스타가 도박으로 수억원을 날리고 포토존에서 유명 가수의 드레스 끈이 풀려서 가슴이 노출되고 연기력이 출중하던 배우가 사업에 실패한 뒤 영화계에 돌아와 찍은 화끈한 베드신이 있는 영화가 죽을 쓰고 있었다. 뭔가 예전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그 사람은 웃거나 혹은 종종 재미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스타 부부의 이혼 기사가 톱뉴스에 올라 있었다. 이미 1년 전에 서로 마음을 돌리고 제 갈 길을 가고 있었지만 양육권과 재산 분배에 대한 소송은 여전히 진행되고 있었다. 어차피 돈은 절반씩만 갈라도 평생 다 쓰지도 못하고 죽을 만큼 있는데도 그렇게 목을 맸다. 결국 돈이 문제가 아니라는 듯이 두 사람 다 조금이라도 더 뜯어내 주겠다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 사람은 창문을 열어 주차장을 내다보았다. 창문 밖, 맞은편 동 앞에 버스가 한 대 서있었다. 낮은 차 다섯 대가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을 차지하고 가로로 서서 사람들을 기다리는 버스는 어딘지 모르게 장의차 같은 모양이었다. 불을 붙인 담배가 다 타들어갈 즈음에 사람들이 나오고 관이 실리고 있었다. 상복들과 관을 실은 차가 천천히 아파트를 빠져나가고, 방금까지 버스가 서있던 그 자리에 우울한 잔상이 남았다. 한 집에서 울음소리가 나고 장의차가 들어오고 관이 실리고 장의차가 빠져나가는 동안, 그 차 근처에서는 경비 말고는 아무도 볼 수 없었다. 죽은 사람을 제대로 보내지 않아 남겨져버린 요기(妖氣)가 이상하게도 닫힌 창문들 안으로 스물스물 들어가려고 애쓰지 않고 그곳에 머물러 주차장을 떠돌고 있었다. 왠지 그 요기가 수많은 창문이 뱉어놓은 것이라는 듯이.

―옆집 할머니가 죽었대요. 그래? 부조나 좀 해줘. 이사 안 가면 나중에 우리 장례식 때 부조 좀 해주겠지. 아이. 뭣하려고 그래요. 그냥 그렇다는 거지. 근데 그만 그 상조 붓던 게 망했다나 봐요. 망한 게 아니라 그냥 돈 끌어모으고 튀었다나 어쨌다나. 그래? 우리 붓는 상조도 그러는 거 아니야? 해약을 해야 하나. 그러게나 말이에요. 아는 사람 부탁으로 들긴 했는데 이거 원 돈 떼일까 불안해서. 근데 해약하면 위약금 물어주고 나와야 하는 거 아니에요? 계속 넣자니 불안하고 빼자니 돈이 아깝고. 참 그것 어떻게 하나 우리 등골만 빠지는 셈이네. 이럴 줄 알았으면 들지 말걸. 나중에 좋은 수의 지으려면 돈을 더 내야 한다지 아마? 가시는 길 외롭잖게 해준다는 말이 좋은 말이 아닌가 보오.

환청이었다. 그 사람은 하던 일을 끝내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이상한 소리가 나고 있었다. 아직 어두웠고, 13층 높이인 그런 곳에서 소리가 날 리가 없었다. 시계는 새벽 세 시 삼십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 사람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조심스럽게 창문 쪽으로 기어갔다. 끼익끼익거리는 음산한 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려왔다. 그 사람이 고개를 슬며시 들자 창문으로 뭔가가 휙 하고 바람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그 사람은 멈칫 움츠러들며 이불을 파고들었다. 점잖은 천둥소리처럼 웅웅거리는 소리가 자꾸 귓전을 긁어댔다. 그 사람은 용기를 내어 이불을 걷고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사다리는 위로 뻗어 있었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이삿짐센터의 트럭에서 사다리가 뻗어나와 그 끝은 18층 정도에 걸쳐져 있었다. 그 새벽에 야반도주라도 하는 것인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누군가가 돈을 떼먹고 도망가는 것이거나, 아니면 단지 이사할 시간을 그때밖에 내지 못했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갑자기 해외나 지방 발령이 난 사람이 급하게 짬을 낸 것일 수도 있었다. 아니면 밤에만 활동하는 야행성 인간일 뿐이었거나. 시끄러운 소리는 이내 멈췄고 트럭이 떠나는 소리가 들렸고, 그 사람은 다시 잠이 들었다.

귀신이 술을 마시다가 그 사람을 술안주로 잡아먹으려고 했다. 그 사람은 제발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빌었고, 귀신은 그 사람더러 춤을 추라고 했다. 그 사람은 꿈속에서 춤을 아주 잘 췄고 귀신은 그 사람이 추는 춤을 보고 껄껄 웃으면서 술을 들이켰다. 한참 동안 춤을 춰서 어깻죽지가 움찔거리기 시작했을 때 문이 열렸고, 다른 귀신이 다른 것 한 마리의 목덜미를 손에 쥐고 이상한 광경이라도 본다는 듯이 문간에 서서 말했다.

―어이, 이보게. 아직 술안주를 안 잡으면 어떡하나. 벌써 다 먹은 줄 알고 하나 더 잡아왔는데.

―아니, 이보게. 이 친구 춤을 아주 잘 추네. 술맛이 나서 아직 잡아먹지 않았지.

―그럼 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하나만 잡으면 되겠군. 새로 잡은 놈을 삶을까?

뒤에 잡혀온 것이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제가 춤을 더 잘 춥니다. 제가 춤을 출 테니 많이 뛰어 살코기가 쫄깃할 이놈을 잡으십시오.

그랬던가. 어깻죽지가 뻐근하고 허벅지가 땅겨오는 것이 달음질친 오골계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 그렇다고 그 사람도 잡아먹힐 수는 없는 노릇인가 보았다.

―춤은 오래 보셨으니 질리실 터입니다. 대신에 노래를 부르겠습니다.

―아아, 노래는 됐어. 노래 좋아하다 크게 손해 본 녀석이 있어서. 어쨌든 둘 중에 하나를 잡긴 해야겠으니 어떻게 한담?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씩들 해봐. 더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풀어주고 돌아갈 여비까지 주지.

장의차 버스와 이삿짐 트럭 이야기가 마음에 든 귀신들은 이야깃거리라곤 없는 지루한 인생인 나중에 온 것을 잡아먹었다. 아침이 되어 몸을 일으켰을 때, 그 사람은 팔을 어깨 위로 올리지 못했다. 혀에 혓바늘이 돋았는지 앞니로 긁으며 그 사람은 창문을 열었다.

〈CAM 005〉

새벽 세 시. 그 사람은 잠이 들기 위해서였는지 우유를 마시기도 하고 책을 펴들기도 했지만 잠이 들지 않았다. 창문을 열고 잠든 차들을 보며 잠을 간절히 청하고 있을 때, 오토바이 소리가 마치 차들을 깨우려는 듯이 아파트 이랑을 울리며 나타났다. 신문을 배달하는 오토바이가 아파트 입구로 들어서고 있었고 약간 심심하기까지 했던 것 같은 그 사람의 눈이 신문 배달부를 따라다녔다. 이 건물에 신문을 다 돌리고는 반대편 건물로 오토바이가 끼리릭거리며 차들을 헤치며 지나갔다. 신문이 다 돌아가고 신문 배달부는 돌아갔다. 그 사람은 창틀에 턱을 괴어놓고 선 채로 선잠이 들었다.

시끄러운 소리가 났고 그 사람은 화들짝 놀라며 꺾이는 무릎을 황급히 바로 세우면서 눈을 떴다. 긁힌 자국이 선명한 차 앞에서 무언가 발을 구르고 있었다. 경비가 걸어오고, 출근길의 것들이 잠깐씩 발길을 멈춰 구경을 하면서 지나갔다. 누군가가 경비를 나무라고, 경비가 웅얼거리며 투정을 했다. 잠시 후, 경비실에서 누군가가 돌아와 욕지거리를 하며 차 문을 쾅 닫고 시끄러운 엔진 소리와 함께 정문을 나섰다. 오후 두 시, 작업복을 입은 사람들이 와서 CCTV를 곳곳에 추가로 설치했다. 곧 해가 졌다.

그 사람은 그날도 잠을 자지 않았다. 차를 걱정하는 것 같았다. 자신이 졸린다는 사실에 화들짝 놀라며 잠을 자서는 안 된다는 듯이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오토바이 소리에 그 사람은 눈을 떴다. 신문이 돌아가고 있었다. 건물 안으로 신문이 들어가고 건물 밖으로 사람이 나오는 장면이 반복되었다. 그리고 오토바이가 끼리릭거리며 반대편 건물을 향해 차들을 헤치며 지나갔다. 오토바이가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돌려 새로 설치된 CCTV들을 둘러보았다. 차들을 뚫고 지나가는 속도가 그 전날만 못했다.

해가 뜨고 출근 시간이 되자 주차장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차에 올라타기 전, 자신들의 차를 한 바퀴씩 돌면서 살피고, 아무것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그제야 차에 올라타고 하루의 시동을 켰다. 그날 아침은 아무도 차 앞에서 발을 구르거나 소리치지 않았고, 대신 누군가 자신의 차 가까이로 지나갈 때, 차 주인은 흠칫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더 이상 큰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해가 저물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동차 경보음이 시끄럽게 나고 있었다. 그 사람이 창문을 열고 내다봤지만 번쩍번쩍하는 경고등 주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누군가 나와서 차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한 채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뒤, 또다시 경보음이 시끄럽게 울렸다.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번엔 아무도 나오지 않은 채 경보음만이 사라졌지만, 잠시 후 창밖으로 강한 바람 소리가 나고는 경보음이 다시 울었다. 그 사람이 다시 아무것도 없는 줄 알았던 주차장을 내다봤을 때, 아주 작은, 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것이 날쌔게 자동차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고 있는 것을 보았다. 헛것이었다.

〈CAM 006〉

그날은 눈이 오고 있었다. 그 사람은 감기에 걸린 거친 목구멍으로 기침을 했다. 아침부터 눈이 엄청나게 내려 창틀에 쌓여있었다. 털어냈지만 금세 다시 쌓였다. 열이 꽤 많이 나고 있었다. 쑤시고 아파 보였다. 약을 먹고 오래 잤지만 쉽게 낫지 않는 것 같았다. 잠도 더 이상 자지 않았다. TV를 켜고 뉴스 채널을 틀자 몇 십 년 만의 폭설이라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앵커의 말투가 아무래도 좀 호들갑스럽게 들렸다.

'하늘도 무심한 듯' '다들 힘든 상황에서' '우리 모두 함께 힘을 합쳐' '결국 지나갈 것이니 견뎌내야' '체인조차 미끄러질 정도의' '이런 눈에도 출근길을 나서는' '한순간의 방심으로 연쇄 추돌이 일어난' '제설 작업에 총력을 다하는' '재난대책본부를 꾸리고' '예상하지 못한 많은 눈에' '주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요청' '무엇보다 서민들의 생계가 걱정' '다른 모든 일을 제쳐두고 해결해야' '국비를 들여 눈을 제거하기 위한 기술을' '사업자를 선정하고 전국에 투입' '비용이 얼마가 들든 상관없이' '대기업의 생산 활동에 차질이 없도록 각별히' 등의 문구들이 순식간에 자막과 스피커를 뒤덮었다. 뉴스의 말미에 한 달 전부터 질질 끌어오고 있는 정경 유착 비리 사건이 이제는 끝물이라는 듯이 짤막하게 보도되었고, 대기업들을 위시한 주가가 갑자기 큰 폭으로 상승하고 있었다.

그 사람은 선잠에서 깨어 창문을 열고 주차장을 내다보고 있었다. 다시 쌓이고 있었지만 주차장에 내린 눈은 많이 치워져있었다. 퇴근 시간이 되어 차들이 들어오지만 조금 미끄러지기도 하면서 속도를 높이지 않았다. 차들은 목적지를 지나쳐버렸고 어디서 브레이크를 밟을지를 알지 못했다. 차들의 지붕에 많은 눈이 쌓여있었지만 무거워 보이지는 않았고, 빨라졌지만 멈추기가 쉽지 않은, 후진을 하기에도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목적지를 지나친 차가 항상 하던 그곳이 아니라 다른 곳에 주차를 하고 있었다. 미끄러지는 차들과 사람들이 위태로워 보였다.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면 되는 일이지만 눈밭이나 빙판 위에서 넘어지는 건 아무래도 더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들은 얼마나 빠른 속도로 가야 했던 걸까. 어디서 브레이크를 밟아야 하는 것인지 차를 타고 운전한 지가 오래되어서 잘 모르겠다는 듯이 그 사람은 창문을 닫았다. 빙판길을 달려본 것도 오래전이고, 사고가 나 본 것도 그 사람에게는 오래전 일이었다. 창틀에 눈이 많이 쌓여있었지만 창문을 닫는 데에는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았다.

그 사람이 다시 잠에서 깼지만 감기는 아직 낫지 않았다. 미열과 과수면으로 괴로운 듯 그 사람은 눈을 비볐고 너무 많이 비빈 가늘게 뜬 눈에서 눈물을 닦았다. 반쯤 떠진 눈에 희뿌연 해 뜰 녘의 푸른빛이 비쳤다. 욱신거리는 어깨를 움츠려 뒤척이려고 했지만 신음을 내며 그 사람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창밖에서는 삭삭 하는 소리와 까드득까드득 하는 소리가 나고 있었다. 바삭바삭한 이불을 힘겹게 걷어내고 그 사람이 엉거주춤 일어섰다. 창문을 열었지만, 차가운 바람은 그 사람의 미열을 식혀주지 못했고 그 사람은 현기증이 나는 듯 휘청거렸다. 창밖에서 나는 삭삭 까드득까드득 하는 소리는 플라스틱 삽으로 눈을 치우는 소리였다. 출근 시간에 맞춰 눈을 치워놓기 위해 경비의 손이 능숙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주민 몇 명이 나타나 삽을 들고 같이 눈을 치우고 있었다. 삭삭 까드득까드득. 밤사이에 얼어붙은 눈이 삽에 부딪히는 소리가 그 사람의 뇌를 긁어댔다. 새로운 노래를 넣은 지 아주 오래된 MP3를 귀에 꽂고 식빵을 한 조각 구워 먹은 다음, 약을 먹었다. 수면제 성분이 강한 약이었던지 금방 잠이 들었다. 오랜만에 꿈을 꾸지 않고 잠을 자는 듯했다.

그 사람은 창문을 열고 팔꿈치를 창틀에 괸 채로 담배를 한 개비 꺼내 물었다. 불을 붙이고 입김을 후 불며 주차장을 훑어보았다. 눈 때문에 차를 놓고 출근한 사람이 많은 듯 주차되어 있는 차가 많았다. 낮이라 굳이 치우지 않은 눈이 꽤 쌓여있었다. 아직 눈발이 굵게 내리고 있었다. 담배가 타들어가는 소리까지 들릴 만큼 조용했다. 눈송이가 담배 위에 내려앉아 불을 꺼보려고 녹았지만 담뱃불에 눈의 온도가 더해질 뿐이었다. 그 사람은 다 타들어가는 담배를 창틀에 쌓여있는 눈에 살짝 대어 껐다. 창밖으로 살짝 던지자 바람과 눈을 타고 인도를 건너 주차장 쪽으로 꽤 멀리 날았다.

불 꺼진 택시 하나가 누군가를 태우고 들어와 주차장 한편에 차를 세우고 있었다. 뒷좌석에서는 아이 둘이 내렸고 운전석에서 기사복을 입은 남자가 내렸다. 아이들이 눈이 쌓여있는 곳을 향해 달려가 푹 몸을 내던졌다. 택시 기사가 쿠당 하는 소리를 내며 차 문을 닫고 담배를 꺼내 태우는 사이, 아이들은 뒹굴고 뭉치고 뿌리고 달리고 뛰고 있었다. 택시 기사는 담배꽁초를 눈 위에 내던졌고 차 안으로 들어가 앉았다. 아이들은 커다랗게 쌓인 눈덩이를 파서 만든 조그만 굴에 들어가 앉았다. 눈 굴이 무너질까 봐 천장을 토닥토닥하면서 더 파내던 아이들은 굴 안에다 성을 쌓고 놀았다. 서로 만든 성을 무너뜨리고 다시 쌓았다. 아이들의 아빠로 보였던 택시 기사는 그런 모습들에 관심도 신경도 쓰지 않았고, 피곤한 듯 차 안에서 찡그린 표정으로 잠이 들어 있었다. 그 사람은 창틀에 쌓인 눈을 조금 모아 뭉쳐 택시와 아이들이 있는 쪽으로 살짝 던졌다. 눈이 잘 뭉쳐지지 않아서 바람에 흩날렸다.

아이들이 택시에 타고 떠난 뒤,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그 사람은 현관을 나섰다. 아이들이 놀았던, 눈을 쌓아놓은 곳으로 다가갔다. 파자마 차림에 슬리퍼를 신고, 겉에는 얇은 리넨 가운만 입고 있어 조금 추워보였다. 눈을 집어 조금 뭉쳤지만 잘 뭉쳐지지 않았다. 손가락 사이로 부스러져 내렸고 손바닥과 손가락 여기저기에 눈이 조금 묻었다. 그 사람은 눈을 한 움큼 크게 쥐어 꾹꾹 힘을 주어 눌렀지만 금방 부스러졌다. 묻은 눈이 녹기 시작하자 손이 시렸는지 손을 비비며 입김을 손에 불어댔다. 가운에 손을 쓱쓱 비벼 닦았다. 손바닥 두 개를 모아 눈을 담아 올리고 두 손을 포개어 다시 한 번 힘을 주어 눌렀다.

눈앞이 아득해지는 듯. 손이 시렸다. 찢어질 것처럼 아파왔다. 계속 힘을 주었지만 이번엔 발이 시리기 시작했다. 뭉치다가 부스러진 눈가루가 맨 발등에 떨어졌다. 그것은 차가움이었다. 발에 쌓인 눈을 털어내지도 않고 그 사람은 계속 뭉쳤다. 눈이 점점 뭉쳐졌고 손의 온기에 녹은 물이 눈덩이에 스며들어 단단해지기 시작했다. 목련꽃 봉오리만큼 눈덩이가 뭉쳐졌다. 그 사람은 아직 조금 뻐근한 어깨를 들어 올려 눈덩이를 어디론가 던졌다. 눈덩이는 차 뒷문에 맞고 부스러져 떨어졌지만 차는 꿈쩍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손바닥을 다시 모아 아까보다 많은 눈을 그러모았다. 눈덩이는 조금 더 크게 뭉쳐졌고 테니스공만 한 크기가 되었다. 그 눈 뭉치를 옆에 놓아둔 채, 더 많은 눈을 모아 뭉치기 시작했다. 이번엔 달고 시원한 배만큼 크게 뭉쳐졌다. 그 사람은 큰 눈덩이 위에 작은 눈덩이를 얹어서 손에 들고 집으로 들어갔다. 찬장에서 가로로 기다란 접시를 꺼내 눈 뭉치를 위에 얹었고 TV 앞에 놓아두었다. 손발이 시렸다. 화장실로 가 따뜻한 물을 틀어 손발을 녹이고 바싹 마른 수건으로 물기를 닦았다. 화장실을 나오자 눈사람이 새치름하게 앉아있는 모습이 보였다. 잔열과 근육통이 남아있었지만, 그 사람은 남아있는 약 한 봉지를 뜯지 않고 서랍 속에 넣었다.

여기저기서 다시 아침이 왔고 삭삭 까드득까드득 하는 소리에 그 사람은 눈을 떴고 거실로 나갔다. 그 사람은 눈사람이 녹은 접시의 물을 싱크대로 가져가 접시를 기울여 흘려 보내려다가, 접시를 머리 위로 높이 들고 기울여 흐르는 액체를 입 안으로 흘려 넣었다. 미지근하고 찝찔한 액체가 목구멍을 지나 흘러들어 갔다. 양말, 그리고 외투를 입고 운동화를 신은 다음, 현관을 나섰다. 누군가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현관 앞에 세워져있는 초록색 플라스틱 삽을 집어 들었다. 삭삭 까드득까드득. 눈이 오기 시작한 지 사흘째가 되는 날이지만 여전히 폭설이 내리고 있었다. 천천히 정문을 나서려는 차들에 길을 비켜주면서 그 사람의 눈삽이 땅에 부딪혔다. 삽은 눈으로 덮여있던 아스팔트에 튕겼고 그 사람은 손바닥이 저렸다. 눈을 치우러 나온 한 주민이 삽질하는 법을 알려 주었고 점점 나아지는 서투른 삽질로 눈을 한참 걷어낸 다음 허리를 펴고 뒤를 돌아보자 그 자리에는 또 눈이 소복이 쌓여있었다. 그 사람은 팔과 등에 땀이 흐르고 가슴 바깥쪽의 팔과 연결된 기다란 근육이 뻐근함을 느꼈다. 옆에서 삽질을 하던 경비가 허리를 펴고 쉬면서 그 사람을 빤히 바라봤다. 당번들만 청소를 하는 건데 왜 나와서 눈을 치우고 있느냐고 물어보는 경비의 질문에 그 사람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만 눈을 치울 뿐이었다. 감기는 더 심해졌던 걸까. 다 나아 사라져버렸던 걸까. 감기는 눈도 코도 입도 없는 눈사람 모양을 하고서 아마 그 사람의 배 속에서 계속 살게 되었던 것이겠지만, 적어도 그 사람이 삽을 들고 눈을 치우는 동안에는 녹지 않았던 것 같다. 그 사람이 눈을 치우다가 잠시 눈을 들었을 때, 주차장 입구에 몰려있던 차들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고, 거기서 그 사람은 더 이상 위기감이라든가 안타까움이라든가 하는 감정을 느끼지 않았다. 다만 차들이 그 사람의 곁을 지나가면서 한 번씩 그 사람을 쳐다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뿐이었다.

<끝>

 

 

 

 

[당선소감] "작가로서 면허증 받았다…졸음운전은 하지 않을 것"

 

내 인생에 무례한 젊음이었습니다. 원하지 않는 대학과 학과를 선택해야 했기 때문에 사람을 사귀는 것도 책을 읽는 것도 내 인생에 무례한 짓이었던 적이 있습니다. 스스로에게 무례해지고 싶었습니다. 아무 의미 없는 삶에 지키고 싶은 예의란 없었습니다.

어느 새해 첫날. 그러니까 2011년 1월 1일이었고, 새벽이었습니다. 문득 글을 쓰고 싶은 생각에 사흘을 잠들지 않고 썼습니다. 나는 여전히 나의 육체에 무례했습니다. 그리고 100번 낙선할 상상을 했고, 그렇게 되면 구천을 떠돌지 않을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단이 일어나고 보니 저승에서도 무례하고 오만한 것은 꺼리나 봅니다. 예(禮)를 좀 배워야 쓰겠습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소중한 것들을 아끼고 낮은 곳에 머무르겠습니다. 할머니와 부모님, 형님 내외와 친지분들께 조금이나마 기쁨이 되기를 바랍니다. 많은 가르침을 주고 계시는 김경수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운전면허증을 처음 받던 때를 기억합니다. 무심한 척 사각의 플라스틱 조각을 받았지만 속으로는 온갖 기대와 망상을 먹었더랬습니다. 하지만 처음 차로에 난입한 것은 그로부터 1년 반이 지나서였고 형의 자동차였습니다. 그마저도 시동을 꺼뜨리고 버스 기사에게 따귀를 맞고 이계(異界)를 달리다가 겨우 귀가했었습니다. 이제 문단의 필기시험을 치렀으니 앞으로 이런저런 사고가 날 것임을 압니다. 졸작을 쓸 것에 대비한 보험 따위는 없을 테니, 오롯이 저의 과실이 되겠지요. 졸음운전 하지 않는 작가가 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씻을 수 없는 그리움으로 그분을 불러봅니다. 할아버지.

▲1983년 경남 마산 출생

▲충남대 경영학과 졸업, 영어영문학과 복수전공

▲현 서강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사과정

 

 

 

[심사평] 전통적 소설의 틀 버린 글이 새로움에 희망을 걸었다

 

예심을 거쳐 본심 위원에게 넘어온 작품은 모두 8편이었다. 엄청난 투고작의 홍수 속에서 살아남은 생존작들인 만큼 그에 걸맞은 문학적 신선도와 완성도를 구비하고 있을 걸로 기대됐다. 그러나 막상 읽기 시작하니 아직도 습작기를 벗어나지 못한 범박한 수준의 작품이 상당수였다.

아쉬움과 실망이 교차하는 가운데 그래도 '수조'와 '폐쇄, 회로'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위안이 되었다. '수조'는 단편소설의 정석과도 같은 작품으로 공모제가 요구하기 마련인 신인 작가로서의 기량과 미덕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물탱크 청소부의 시각을 빌려 우리 사회의 암울한 단면을 포착하고 있는 이 작품은 환경오염에서부터 취직난이나 빈곤층의 증대 같은 당대의 주요 현안들을 적절히 배치해 놓고 있다. 집요한 묘사력도 인상적이었다. 이처럼 이 작품은 전체적으로 무난한 수작이지만 상대적으로 소재나 그 처리 방식에서 기성 작품과 분명히 구분되는 차별성을 획득하지 못했다는 난점을 지니고 있다.

반면 '폐쇄, 회로'는 실험성이 강한 이색적인 작품이었다. 전통적인 소설 양식이 요구하는 인물도 사건도 등장하지 않는 이 작품은 거대도시에서 익명으로 살아가는 현대인의 존재 방식을 캠코더로 찍어 기록하듯 옮겨놓은 독특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특별한 이야깃거리가 사라져버린 시대에 소설이 시도할 수 있는 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이 작품은 매일같이 순환하는 일상성에 매몰돼 살아가는 한 인물의 삶을 지극히 건조하고 냉철한 시각으로 따라가고 있다. 모든 게 간접화된 창문이나 화면 저편의 풍경으로 치환되어 살아가는 현대적 삶의 조건을 이 작품은 고전적 기승전결을 회피한 듯한 파편화된 형식으로 드러내고 있다.

두 선자는 익숙한 형식의 수작과 낯선 형식의 문제작 사이에서 고민하다 이번엔 새로움의 추구 쪽에 내기를 걸어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