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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박 / 진서윤



수박밭에는 여물지 않은 태양들이 숨어있었다.


햇빛 줄기가 연결된 곳엔 푸르스름한 심장이 떠있고 폭염이 몰려들고 있었다. 

양말 목 풀린 실밥처럼 

몸이 헐 것 같은 날

거꾸로 자라는 덩굴의 비린 향이 꼼지락거렸다.


직선의 나이에 곡선의 통증이 붉다

모래밭 이랑마다 층층이 쌓이는 바람말이를 먹었다

누군가 손등으로 통통 두드려보고 갔다 

그때 문득, 통증에 씨앗이 생겼다.


세상의 모든 음(音)은 보이지 않는 발자국처럼 익어가고 서리라는 말을 들으면 붉은 당도(糖度)가 끈적거렸다.


달의 필라멘트가 끊어진 밤 

고양이가 지나갈 때마다 감지 등(燈)이 켜지고 

닿기만 해도 탁! 터질 준비가 되어 있는 만월(滿月)

수박 속에는 검은 별들이 유영하고 있을 것이다.


푸른 굴절무늬로 온몸을 묶어 놓은 여름, 허벅지 아래로 붉은 씨앗 한 점(點) 떨어졌다.

이후 모든 웃음을 

손으로 가리는 버릇이 생겼다.


들판 너머 여름이 이불 홑청 끝자락처럼 가벼워졌다 

마르지도 젖지도 않은 이파리를 허리에 감고 

수박들이 붉은 속셈으로 익어간다.

 

 

 

 

 

 

[경남신문 신춘문예]시 당선 소감

유난히 분주했던 해였습니다.

근무처를 옮긴 타지의 항구에서 서쪽의 나라에서 들어오는 배를 바라봅니다. 배에서 내리는, 오래 속이 흔들린 사람들의 표정을 알게 됐습니다. 그것은 오래 속이 흔들린 내 표정과 같았습니다. 시를 쓰는 일은 늘 속을 울렁거리게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오늘 당선 통보 전화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기뻐해도 돼? 같이 교육 중인 옆 동료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그녀는 당연하다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려 주었습니다. 마음 놓고 기뻐하겠습니다.

오래 변방에 머물렀지만 뜻한 대로 살게 되지 않았던 것이 저의 자양분이 되었다는 걸 알게 되어 기쁩니다. 세상에 떠도는 이야기를 귀담아들으며 특별한 경험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다. 서로 떨어져 있으니 가족의 출처가 더 선명하게 보입니다. 

사랑하는 딸 윤지와 연우 그리고 남편 강권구 씨, 가족이어서 또한 감동이었습니다. 처음 시 창작 법을 가르쳐주신 창신대학교 이상옥 교수님, 표성흠 교수님, 박노정 교수님, 언제나 독려해 주시는 이월춘 선생님, 장예은, 이영탁 문우님 고맙습니다. 무엇보다 삶의 자장권 안에서 필연으로 다가온 문학이 저를 이끌어 왔음을 믿습니다. 유홍준 박서영 시인님, 김경복 교수님, 서툰 저의 글을 뽑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서쪽의 저녁에서 배가 들어옵니다. 그 흔들린 뒤끝의 얼굴들을 오래 찬찬히 살필 것입니다. 앞으로 제 시도 그와 같을 것입니다.

◇1960년 함안 출생 ◇창신대 문예창작과 졸업 ◇제6회 세관문예전 시 부문 최우수 ◇2007년 경남여성백일장 장원 ◇2010·2011년 공무원문예대전 시 부문 동상

 

 

 

 

[경남신문 신춘문예]시 심사평


올해 시 부문에는 많은 작품이 투고되어 저마다 재기와 패기를 선보였다. 다만 일상생활에 지친 감상적 모습들이 많이 보인다는 점에서 시의 생기가 피로사회의 여파로 다소 잠식된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를 가지게 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과 그 의식을 언어적 세련미로 형상화해낸 뛰어난 시들이 꽤 발견되어 그나마 안도할 수 있었다. 

최종 심사에 오른 작품 중 ‘거푸집’은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패기 있게 시적 대응을 했으나 형상성이 너무 사변적이고 무거워 주저하게 되었고, ‘꼬리에 꼬리를 밟아본 꽃’은 표현의 신선함과 삶에 대한 인식의 재치는 돋보였으나 작위적인 전개와 구성이 문제되었다. ‘기린을 소재로 한 얼룩’은 산업도시 사회의 고독과 단절을 잘 포착했으나 감상에 치우친 면이 강했고 무기력하게 마무리한 점이 아쉬웠다.

‘허물어진 것들은 따뜻하다’는 마지막까지 놓지 않았던 작품이다. 허물어진 집이 재로 다시 건축된다는 발상이나 “따스함을 끝까지 놓지 않았던/ 저 집의 일생은 불이었다”라는 표현은 매우 신선하고 감동적이었다. 그러나 세련된 진술과 자못 낯익은 시상들은 어디에선가 본 듯한 느낌이었고, 신인으로서 가져야 할 패기를 놓쳐버리고 있다는 점에서 아쉬움으로 지적되었다. 

당선작 ‘수박’은 이미지의 참신함이 돋보였다. 수박의 성장을 인간의 삶에 비유해 삶의 여러 단면을 성찰하고, 무엇보다 그 시적 전개마다 놀라운 언어감각이 심사위원들을 감동시켜 높은 점수를 받았다. 특히 ‘수박밭’과 ‘밤하늘’의 연계성을 지상의 어둠과 우주의 비밀로 해석해 감각적인 언어로 잘 꿰매고 있어 발상의 신선함을 샀는데, 이러한 점은 투고한 다른 작품들에도 고루 나타나고 있어 삶에 대한 깊은 성찰과 그에 합당한 언어 감각과 형상성을 지니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당선자가 더욱 정진해 한국시단을 밝히는 푸른 별이 되기를 기대한다. 

<심사위원 김경복·유홍준·박서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