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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버스 / 문미순

 

 

하쿠나 마타타! 하쿠나 마타타! 세아는 또 ‘잠보’라는 인사말 대신 하쿠나 마타타라고 한다. 선생님만 보면 왜 자꾸 하쿠나 마타타라고 하고 싶죠? 하쿠나 마타타는 ‘문제없다’라는 뜻의 스와힐리어다. 세아는 들어서자마자 시원한 마실 거리부터 찾는다. 도통 고민할 일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아이다. 수업은 이미 시작되었다. 나는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질문을 던져댄다. 움리 가니? 미미 닐리카와 쿠미 나 타노. 세아는 숨찬 얼굴로 열다섯 살이라고 대답한다. 제니 음냐마 와코 파보리테? 미미 카마 파루. 세아가 좋아하는 동물은 의외로 코뿔소다. 꿈도 킬리만자로에서 상처 난 동물들을 치료하는 것이란다. 

세아는 원피스 한쪽이 흘러내린 줄도 모른 채 문제를 푼다. 나는 세아의 어깨끈을 올려주려다가 손가락을 내려다본다. 자세히 보니 손톱 밑이 해어져 핏빛이다. 꽤나 오래된 습관인지 그중 엄지와 검지는 까맣게 죽어있다. 세아는 습관처럼 또 손톱 끝을 물어뜯는다. 내가 손톱을 본다는 걸 알았는지 재빨리 등 뒤로 감춘다. 나는 나무라는 어투로 눈에는 칸막이가 없다는 속담 하나를 중얼거린다. 세아는 입술을 쫑긋 모았다가 무언가 생각난 듯 큰소리로 외쳐댄다. 우쿠피가오 은디오 우쿠푼자오! 세아의 입은 생각 없는 붕어처럼 뻐끔거린다. 너를 꾸짖는 자가 너를 가르치는 자라니 제법이다. 세아가 낯설면서도 어쩐지 낯설지 않다. 갑자기 세아의 입속을 들여다보고 싶은 충동이 인다. 나는 손바닥이 아프도록 힘껏 주먹을 말아 쥐었다 편다. 진한 콧숨이 나도 모르게 훅 빠져나온다. 세아는 어느새 엄지손가락을 입가로 가져가 잘근댄다. 

아이들이 모두 돌아간 시간, 나는 컴퓨터를 켜고 TV로 연결된 전선을 확인한다. 프레첼을 볼 가득 담아 와 일인용 소파에 몸을 파묻는다. 영화를 보기 위한 절차들을 마치면 이제 저장된 영화를 클릭하기만 하면 된다. 회색 TV화면에 코발트빛이 퍼진다. 영화를 TV로 연결해 보는 발상은 어떤 남자가 일러준 것이다. 영화를 좋아하는 여자에게 남자가 해줄 수 있는 작은 호의였다. “이러면 눈이 덜 피로할 거야.” 남자가 복잡한 작업을 끝내고 고개를 들었을 때 나도 모르게 기침이 쏟아졌다. 나는 누군가 내게 친절하게 굴면 기분이 좋지 않다. 남자가 다녀간 다음 날 핸드폰 번호를 바꾸고 방을 옮겼다. 굳이 이유를 묻는다면 저 이상한 전선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다. 

컴퓨터가 부팅되는 사이 나는 프레첼을 먹기 시작한다. 단단한 밀가루 과자지만 무료함을 달래기에 이것만 한 것도 없다. 거실을 이리저리 걸으며 어금니와 아래턱을 부지런히 움직인다. 씹어대는 동작만 있을 뿐 맛을 느낄 수 없다. 손의 떨림 때문인지 과자는 자꾸 바닥으로 떨어진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 과자가 발에 밟혀 으스러진다. 문득 붕어처럼 뻐끔거리던 세아의 입이 떠오른다. 나는 잠시 세아를 생각하다 컴퓨터 앞으로 다가가 앉는다. 마침 핸드폰 화면에 낯선 전화번호가 뜬다. 먼 곳에서 온 전화란 걸 알지만 받지 않는다. 받아 놓은 영화들을 훑어 내리다 벨넵 감독의 영화를 클릭한다. 화면에는 탄자니아 세렝게티의 풍경이 펼쳐진다. 전화는 계속 울리다 사라지고 부재중 전화란 메모가 뜬다. 

끝없이 펼쳐진 광활한 초원. 드문드문 우산을 펼쳐놓은 듯 나무들이 박혀있다. 내리쬐는 태양 아래 한가로이 풀을 뜯는 얼룩말, 흰 턱수염의 누와 작은 몸집의 톰슨가젤이 놀고 있다. 한곳에서 사르르 풀 쓸리는 소리가 난다. 귀 밝은 얼룩말이 먼저 눈치를 채고 달음박질친다. 이어 누가 달리고 톰슨가젤도 뛰어간다. 순간 풀숲을 헤치고 쥬마가 나타난다. 탄탄한 두 다리와 탄력 있는 검은 피부. 그는 어디로든 거침없이 달려갈 듯하다. 나는 화면을 정지한 채 그를 바라본다. 그는 초원 한가운데서 손을 흔들며 웃고 있다. 그의 까만 눈동자가 내게 무어라 외쳐대는 것만 같다. 나는 달려가 그와 노래하고 춤추고 뛰어다니고 싶다.

핸드폰 화면에 다시 낯선 번호가 뜬다. 받지 않으면 언제까지라도 울릴 기세다. 가만히 통화버튼을 눌러본다. 현지인과 재혼해 탄자니아에 살고 있는 세 번째 엄마다. 엄마는 혼자 몸으로 한국에서 나를 키우다 탄자니아로 흘러 들어갔다. 내 어릴 적 기억은 탄자니아의 초원과 한국의 집들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다. 4년 전 혼자 한국으로 떠나올 때 엄마는 미안하다며 울었다. 그러면서 내 손에 적지 않은 돈을 쥐어주었다. 멀리서 엄마가 명랑한 목소리로 묻는다. 한 번 다녀가지 않을래? 그저 안부인사란 걸 알기에 내 대답은 짧고 명료하다. 나는 아무도 원치 않게 태어나 버려진 아이였다. 내가 세 번이나 파양된 아이란 사실을 안 건 열네 살 무렵이었다. 한때 나의 부모였던 이들은 필요에 따라 나를 거두거나 물렸다. 그러니 나는 계속 어딘가로 옮겨 가는 중이었다. 

비록 세 번째 엄마지만 그이의 전화를 받고 나면 기분이 좋지 않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을 억지로 떠올리는 기분이다. 엄마의 친절한 목소리를 들으면 왜 다시 마음을 다잡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전화를 끊고 난 뒤 나는 무작정 차를 몰고 밖으로 향한다. 이상하게 마음이 가라앉지 않는다. 어둠이 자동차 불빛에 밀렸다 다가섰다를 반복한다. 마치 내 몸이 어둠 속을 헤매며 가야 할 곳을 찾는 듯하다. 마침 세아에게서 전화가 걸려온다. 선생님, 오늘 선생님 집에 가도 돼요? 언뜻 세아의 핏빛 손가락이 떠오른다. 뜻밖의 질문에 나는 움찔 물러서고 본다. 너 오늘 수업 아니잖니? 세아가 조금 뜸을 들인다. 그냥 우리 집에 아무도 없어서요. 선생님하고 얘기하면 안 되나요? 나는 별 생각 없이 대답한다. 삼십 분쯤 후에 도착할 거야.

세아는 냉장고에서 꺼내온 것들을 바닥에 쏟아 놓는다. 맥주 캔 서너 개와 치즈, 아몬드와 감자칩, 초콜릿 쿠키와 오렌지까지. 나는 무엇부터 먹어야 할지 망설인다. 세아가 득의에 찬 얼굴로 외쳐댄다. 침대 밑에 있는 것을 원하면 허리를 구부려라! 세아와 나는 자매처럼 깔깔거리고 한참을 웃어댄다. 나는 늘어놓은 맥주 캔 중 하나를 들어 딴다. 거품이 부글대며 탁자 위로 흘러내린다. 세아는 긴 여행 중의 첫 밤처럼 들떠 있다. 엄마는 학교 수업에 갔다 돌아오면 꼭 맥주를 마셔요. 그걸 마셔야 하루가 끝난 것 같데요. 학교 무용실에서 하루 종일 구령을 외치다 보면 녹음테이프가 된 기분이 든다나요? 세아의 입은 목줄을 풀어놓은 강아지마냥 통통거린다. 공연 때는 엄마 얼굴도 못 보고 잠드는 날이 많아요. 외국 나가서 공연할 때는 더하구요. 

나는 세아에게 맥주를 권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하고 망설인다. 세아의 얼굴은 그런 생각들 따위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 듯하다. 변호사가 되기를 바라는 부모와는 달리, 특수 외국어를 배워 대학에 지원하고 싶어 하는 세아는 말을 배우는 속도가 꽤나 빠르다. 세아는 조잘대고 먹고 탁자를 두드리며 웃는다. 몸을 흔들고 노래를 흥얼거리다 창밖으로 소리를 질러대기도 한다. 내가 초콜릿을 입에 넣으며 권하자 고개를 젓는다. 우리 오빠는요, 기분이 좋으면 초콜릿과 사탕을 잔뜩 사들고 와요. 그런 날은 오빠 말로 대박을 친 날이에요. 무슨 대박? 오빠는 대학생인데 아빠처럼 벌써 사장님이거든요. 인터넷에서 파티용품들을 파는데 얼마나 바쁜지 얼굴 보기도 힘들어요. 오늘은 아빠 엄마 오빠까지 모두 외국으로 나간 날이에요. 나 혼자 집을 지키죠. 외로운 파수꾼처럼요. 저희 집 무지 웃기죠. 네? 

세아는 느닷없이 내 손을 잡아끌며 옥상으로 가자고 한다. 이 밤에? 뭐 어때요. 난 수시로 가는데. 세아가 엘리베이터를 타더니 꼭대기층을 누른다. 세아의 눈은 전에 없이 흥분으로 가득하다. 나는 엉겁결에 세아를 따라 옥상으로 올라간다. 세아는 옥상 난간으로 달려가 빨리 오라고 손짓을 한다. 나는 한 번도 올라와 보지 않은 옥상을 세아는 제 집처럼 뛰어다닌다. 세아의 나풀대는 몸짓에 현기증이 인다. 저맘때의 내 모습이 생각나지 않는다. 선생님. 토토로 아세요? 토토로? 네, 만화영화 이웃집 토토로요. 세아는 난간 아래를 내려다보며 환호성을 지른다. 그러다 다시 난간 틀에 몸을 기대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세아는 막 하늘에서 누구를 보기라도 한 듯 양손을 크게 벌려 흔든다. 

토토로는 숲속에 사는 나무 요정인데요, 순수한 아이들 눈에만 보이는 상상의 동물이에요. 곰처럼 거대한 몸집에 복실한 털이 있는데 언제나 고양이버스를 타고 다니죠. 고양이버스? 네, 세상 어디든 승객이 가고 싶은 곳은 다 데려다 주는 버스요. 거기 영화에 보면 몸통을 크게 부풀려 만든 고양이버스가 나오거든요. 먼 곳을 바라보는 세아의 눈이 설렘으로 가득하다. 전 가끔 고양이버스를 타고 세상을 날아다니는 꿈을 꿔요. 그렇게 세상 속을 날아다니다 보면 얼마나 신나는지 몰라요. 킬리만자로든 세렝게티든 어디든 마음대로 갈 수 있거든요. 정말이지 하나도 외롭지 않아요. 고양이버스에서 내려다보면 엄마도 아빠도 오빠도 다 보이거든요. 어디서든 나랑 같이 있는 것 같잖아요. 곧 돌아올 거니까, 일부러 나만 혼자 남겨 놓은 건 아닌 거니까.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어요. 세아가 다시 난간 아래를 굽어본다. 참, 제가 왜 높은 곳을 좋아하는지 아세요? 나는 그저 어깨를 으쓱 들어 올릴 뿐이다. 고양이버스가 오는 걸 보려구요. 아이는 눈을 감고 기도를 하는지 잠시 말이 없다. 마치 두 손을 모아 빌기만 하면 고양이버스가 달려오기라도 할 듯이.

세아는 밤이 깊도록 재잘대다 막 잠이 들었다. 꽤나 피곤했는지 가늘게 코까지 곤다. 나는 담요를 덮어주고 살며시 밖으로 나온다. 벌써부터 세아가 귀찮아진다. 내 공간으로 세아를 끌어들인 게 후회스럽다. 누군가 내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싫다. 나는 편의점에서 물을 산 뒤 주변을 배회하다 발걸음을 돌린다.

무슨 일인지 집 밖에서 비상벨소리가 흘러나온다. 전자키로 된 문은 가끔씩 문제를 일으켰다. 안쪽에서 출입문이 열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흩어진 신발과 담요, 책과 신문들로 집안이 어지럽다. 나는 아이의 이름을 큰소리로 부른다. 세아가 겁에 질린 얼굴로 베란다 난간을 잡고 서있다. 세아가 내 얼굴을 보자 달려들 듯 안겨 온다. 그러고는 매섭게 쏘아붙인다. 어디 갔었어요? 왜 나만 두고 갔어요! 세아의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흰빛이다.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요? 세아는 폐쇄 공포증이라도 있는 걸까. 떨고 있는 세아를 보니 내가 큰 잘못을 저지른 것만 같다. 세아는 씩씩거리며 양손으로 눈가를 닦아낸다. 세아의 등을 토닥이는데 등 뒤로 의자 하나가 보인다. 갑자기 내 등골이 오싹해 온다.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세아는 정말 뛰어내리기라도 했을까. 

그날 밤 나는 빈 들판에 홀로 서 있었다. 나는 작은 아이였고 누군가 내 어깨를 꽉 잡았다. 아무도 나를 원하지 않는 것 같았다. 엄마는 고개를 숙인 채 내게서 멀어졌다. 내 울음소리에 몇 번 돌아본 것 같은데 이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또래의 많은 아이들이 나를 쳐다보았다. 모두가 모르는 아이들뿐이었다. 진흙과 마른 풀로 지붕을 덮은 작은 집들, 일터에서 돌아오는 사람들이 보였다. 나는 매일 황량한 들판을 바라보며 기다렸다. 그러면 누군가 멀리서 다가오는 듯했다. 너무 멀어서 내 눈에는 잘 보이지 않았다. 누구인지 알려 하면 할수록 형체는 흐려지고 곧 잠에서 깨어났다. 내게 손을 흔드는 사람이 엄마인지 아이들인지 혼란스럽다. 그들은 엄마였다가 아이들이었고 영화 속 다른 주인공들이기도 했다.

아침에 일어나니 세아는 가고 없었다. 탁자 위는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아이가 다녀간 흔적이라곤 남아 있지 않다. 어젯밤 무슨 일이 있기나 했었는지. 나는 커피를 한잔 커피메이커에서 내려 마시고 창밖을 내려다본다. 도심 한가운데로 한낮의 시간이 흐른다. 신호를 받고 멈춰 선 차들과 건널목을 건너기 시작하는 행인들. 그들은 교대로 동작을 지시받은 로봇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다. 한쪽이 움직이면 한쪽은 멈춘다. 한쪽은 초조하고 한쪽은 활기차다. 그저 움직일 뿐 살아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천재지변이 없는 한 교차로의 동작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마음이 편하다. 그저 이뿐이면 된다. 거리를 내려다보듯 나는 저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있으면 되는 것이다. 멀리서 핸드폰 소리가 조용히 울린다.

처음으로 내가 스와힐리어를 가르친 사람은 탄자니아에서 막 사업을 시작한 남자였다. 나는 한국에 들어와 모든 것이 낯선 때였다. 스와힐리어가 제법 능숙해진 남자는 내게 무언가 도움을 주고 싶어 했다. 어느 날인가 아프리카 박물관의 학예연구팀에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소장 자료를 관리하고 전시실의 운영을 돕는 일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정식으로 어딘가에 소속이 되고 사람들과 엮이는 게 싫어서였다. 남자는 왜 재능과 기회를 썩히느냐며 이해할 수 없어 했다.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허다하게 많다는 걸 왜 모르는 걸까. 태어나자마자 정원이 딸린 대문 앞에 버려지기도 하는 일 같은. 남자가 재차 권하고 다그쳤지만 나는 어쨌든 승낙할 수 없었다. 다음 수업에 나는 남자를 가르치러 가지 않았다. 더불어 핸드폰을 바꾸고 오피스텔도 옮겨버렸다. 

전화가 울리다 끊어지고 또 울린다. 그러고도 한참을 더 집요하게 울어댄다. 여보세요? 어머. 너 맞구나. 은호 맞지? 나야 나. 진선이. 친구는 어떻게 내 전화번호를 알아냈을까. 응대해야 할 잠깐의 시간조차 버겁게 느껴진다. 너는 탄자니아에서 아예 나왔다더니 어쩜 그렇게 연락이 없니? 나도 얼마 전에 나왔는데. 진선은 탄자니아 한인교회에서 알게 된 친구였다. 끝없이 이어지는 친구의 수다를 나는 무심하게 들어 넘긴다. 한때 마음을 주고받던 친구라는 사실이 무색할 지경이다. 친구는 기어코 내일 만나자는 약속을 받아낸 후에야 전화를 끊는다. 

광화문역 맥도날드 분점은 적막감이 들 정도로 한산하다. 친구는 아직 오지 않은 모양이다. 나는 커피를 사들고 이층으로 올라가 햇빛이 덜 비치는 구석자리를 찾아 앉는다. 두 칸 건너편 테이블에 트렌치코트를 입은 작은 몸집의 할머니가 보인다. 노인네는 커피 한잔과 영자신문, 세 개의 낡은 쇼핑백을 앞에 놓고 졸고 있다. 왠지 한여름 맥도날드 가게의 풍경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있을 때 친구가 웃으며 걸어온다. 어쩜 너는 그대로구나! 친구는 검게 그을린 피부에 흰 이를 활짝 드러낸다. 어딘가 희미하게 파파야 냄새를 품고 있는 듯하다. 나는 잠시 현기증을 느끼며 친구를 바라본다. 순간 할머니의 머리가 푹 꺾였다가 이내 놀란 듯 고개를 쳐든다. 가만히 쳐다보니 자그맣고 하얀 얼굴이다.

내 시선은 자꾸 할머니에게로 향한다. 친구도 힐끔 할머니를 쳐다본다. 너 저 할머니 모르니? 맥도날드 할머니잖아. 맥도날드 할머니? 나는 그 말이 낯설어 다시 묻는다. 그래. 맥도날드에서 커피 한 잔만 먹고 산다는 할머니. 옛날에 외무부에도 근무했던 인텔리라던데. 지금은 거처도 없이 하루 종일 맥도날드 가게만 돌면서 산다더라구. 주변 사람들 도움도 다 거부하고 말야. 나는 할머니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묻는다. 이유가 뭐야? 왜 저렇게 사는 건데? 모르지. 방송에 보니까 뭐 백마 탄 왕자를 기다린다나. 자기 방식대로 남은 생을 산다나. 아 참, 저 할머니도 아프리카 어디에선가 산 적이 있대. 세계 각지를 안 돌아다닌 데가 없나 봐. 지금은 자신을 구원해 줄 단 한 사람을 기다리겠대. 친구가 커피 잔을 입으로 가져간다. 내가 보기엔 과대망상증 환자 같아. 아담이 어쩌고저쩌고 그러더라고. 

친구의 말은 내 귀에 거기까지만 들린다. 나는 할머니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다. 낡고 때가 낀 트렌치코트와 구닥다리 쇼핑백 세 개가 할머니의 고단한 삶을 말해주는 듯하다. 그런데도 어쩐지 할머니는 빈 들판에 홀로 서 있는 투사 같다. 언제라도 싸울 준비가 되어 있는 고독하고 외로운 투사. 나는 왠지 또 다른 나를 보듯 할머니가 낯설지 않다. 친구가 내 이름을 부른다. 우리 이제 자주 보자. 너랑 나랑 진짜 친한 친구였잖니. 누군가 또 내게 버거운 관계를 강요하는 것만 같다. 돌아오는 지하철 안은 몹시도 붐볐다. 어서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생각뿐이다. 지하철에서 내리자마자 나는 집 근처의 이동전화 판매 대리점을 다시 찾았다. 직원은 언제나처럼 친절하고 상냥하다. 나는 단호히 전화번호를 바꾸고 친구의 번호를 삭제했다. 

핸드폰을 바꿀 때 나는 가르치는 아이들 외의 번호들은 지워버린다. 그러면 내 주위가 원래대로 정리가 된 듯 깨끗해진다. 나를 귀찮게 하는 것과 귀찮게 할 모든 관계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느낌이 여실해지는 것이다. 이제부터 아무 감정의 티끌 없이 새날을 시작하면 된다. 행여 누구와 얽히는 걸 싫어하는 내가 딱 한번 동호회에 가입한 적이 있다. 아프리카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었다. 가끔씩 영화평을 올리곤 하던 사이트의 사람들과 만나는 자리였다. 아무도 서로의 사생활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같은 기호를 공유하는 관계여서 좋았다. 

한 여자가 내가 올리는 영화평을 눈여겨본다면서 말을 걸어왔다. 그녀는 아프리카 전문 영상제작사의 PD였다. 여자는 다큐멘터리 제작 프로젝트에 참가해 줄 것을 제의했다. 영화 제작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언어교육을 맡아 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갑자기 꺼낸 직업 얘기에 나는 조금 놀랐다. 그녀가 제시한 급여나 근무조건은 웬만한 회사보다 나았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 일이었지만 완곡하게 거절했다. 그녀 역시 거절하는 나를 의아해했다. 그냥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를 새로 알고 관계를 넓혀 나가는 게 내겐 어려운 숙제였다.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자신의 호의를 거절한 내게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었다. 그녀가 비웃음이 섞인 싸늘한 시선을 내게 던졌다. 이제 나는 어디에도 영화평을 올리지 않는다. 전화번호를 바꾸고 영화모임에서도 탈퇴했다. 그저 나 혼자 영화를 즐기고 사랑하면 되었다. 영화가 나를 배반하는 경우는 없을 테니까. 

소파에서 영화를 보다 잠이 들었나 보다. 꿈속에서는 파티가 한창이었다. 정원에는 푸른 관목들과 라벤더, 로즈마리가 넘쳐났다. 나는 크림색 드레스에 분홍빛 리본을 달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쥬마가 웃으며 다가와 내 손을 잡았다. 쥬마는 정원을 가로질러 풀숲으로 가려 들었다. 그 사이 음악이 바뀌고 쥬마가 내 손을 놓았다. 음악은 더 빠르게 흐르고 파트너가 자꾸 바뀌었다. 어지럽게 돌아대던 나는 쥬마를 찾을 수가 없었다. 내 손을 잡고 있는 파트너는 마콜라였다가 에사였다가 고빌라로 변했다. 나는 울면서 쥬마의 이름을 불렀다. 돌고 또 돌아봤지만 쥬마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한참을 울다가 잠에서 깨어났다. 

세아는 부모가 집을 비운 날이면 전화를 걸어오곤 했다. 나는 내 공간으로 누군가를 들이는 걸 싫어하면서도 이상하게 세아에겐 그러지 못했다. 세아는 올 때마다 자기 집 냉장고에 있는 것들을 잔뜩 싸들고 왔다. 어느 날엔가는 아빠가 아끼는 술이라며 코냑을 가져온 적도 있었다. 세아는 내게 어린 시절 이야기와 고등학교, 대학교 시절을 물었다. 이제 세아는 탄자니아에서 사귀었던 남자친구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른다. 이야기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다던데? 내 장난스런 엄포에 세아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다. 제 귀는 배고픈 채로 자러 가지 않는다며 키득키득 웃는다. 

글쎄, 검게 반짝이는 피부에 야생마 느낌이 나는 남자였어. 마음 안에 아무런 제약이나 굴레도 없는 사람. 그래서 어디든 마음대로 가고 제멋대로 사는 사람. 그런대로 편안하고 쿨하게 지냈어. 그런데 왜 헤어졌어요? 세아가 눈을 치뜨며 묻는다. 어느 날 그 사람이 정색을 하고 말하는 거야. 내가 무섭다구. 왜요? 어쩌면 그렇게 반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냐는 거야. 나는 다 버릴 준비가 돼 있는데 왜 너는 흔들리지도 않는지 무섭대. 뭐가 무섭다는 건지. 그 순간 그 사람이 싫어졌어. 그래서 헤어졌어. 전화번호도 바꾸고.

나는 프레첼 하나를 꺼내서 우두둑 우두둑 깨어 문다. 난 친절한 사람들이 싫어. 끝까지 친절하지도 못 할 거면서 칠칠맞지 못하게 인정을 흘리고 다니는 사람들이 싫어. 다시 프레첼 하나를 집어 든다. 세아가 왠지 조금 슬퍼 보이는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선생님은 어느 때 보면 이 세상 사람 같지가 않아요. 항상 어딘가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처럼 보여요. 이곳이 싫으세요? 이 세상이 싫어요? 모르겠어. 나는 뭔가 독한 것을 원하는데 막상 그것이 내 앞에 오면 마주하기 싫어. 머릿속이 띵하도록 얼얼한 게 좋은데 그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나도 내가 원하는 것이 뭔지 모르겠어. 내가 코냑 병을 집어 들자 아이가 눈치 빠르게 얼음을 가져와 넣어준다. 

내가 술을 마시는 동안 세아는 TV를 본다. 딱히 TV를 보는 것 같지도 않다. 세아는 제 손가락을 물어뜯으며 무슨 생각에 빠져 있는 듯하다. 세아의 까맣게 죽은 손톱이 눈에 들어온다. 수시로 물어뜯은 탓인지 손톱이라고는 성한 게 없다. 너는 뭐가 그렇게 무섭니? 세아는 가만히 나를 보더니 다시 손톱 끝을 물어뜯는다. 세아의 손을 입에서 떼어내려 하자 벌떡 일어나 창가로 간다. 저는요, 혼자 있는 게 싫어요. 외로움이 무서워요. 나는 언뜻 아무도 없는 거실에 홀로 앉아 있는 아이가 떠오른다. 세아는 오피스텔 아래를 한참 동안 내려다본다. 

선생님, 제가 무서움 퇴치법 하나 알려드릴까요? 세아의 얼굴은 어느새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변한다. 일단 풍선을 방 안 가득 불어놓는 거예요. 천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요. 수소가 든 풍선이면 더 좋고요. 방 안 가득 풍선을 불어 놓았으면 이제 준비 끝이에요. 진짜 심심하고 외로울 때 갑자기 찾아오는 게 있어요. 그거요, 무서움이요. 딱 그런 마음이 들기 시작하면 하나씩 터뜨리면 돼요. 방 안이 금세 뿌예져요. 그 풍선 안에 밀가루가 조금씩 들어있거든요. 그럼 하늘에서 눈이 오는 것 같겠죠? 아이가 손뼉을 치면서 좋아라 한다. 이럴 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나는 조금 난감하다.

아, 그리고 또 하나 있어요. 이건 좀 건강에는 안 좋을 수도 있어요. 우리 아빠가 담배 수집광이거든요. 아빠 트렁크에 여러 나라 담배가 한 가득이에요. 외국에 다녀오실 때마다 사오시거든요. 몇 개씩 없어져도 몰라요. 그걸 피우는 거예요. 방 안이 하얘질 때까지 말이에요. 안개가 자욱한 거 같겠죠. 모든 게 다 희미해져요. 내가 이 방 안에서는 혼자라는 것조차 알아챌 수 없어요. 적어도 나는 안개와 함께 있는 거니까 혼자일 때보다야 당연 덜 무섭죠. 안개랑 같이 있는 거잖아요. 

우리 영화 볼까. 네, 신나는 걸로요. 세아가 제 팔로 내 허리를 둥글게 끌어안고 머리를 기대 온다. 나는 세아의 어깨를 안고 정수리에 볼을 문질러 준다. 태양으로부터 나를 구해 줘, 내가 너를 비로부터 구해 줄 테니! 엄마와 아이처럼, 물과 산호석처럼! 세아는 키득키득 웃고 발가락을 꼼지락거린다. 세아는 항상 내 옆에 붙어 앉는다. 영화를 볼 때나 음악을 들을 때 발가락이라도 닿아 있어야 편안해한다. 세아는 내가 느끼지 못하는 어떤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는 듯하다. 내가 언제고 달아날 준비를 한다면 세아는 끝없이 누군가와 붙어 있으려 든다. 영화가 끝날 무렵 이상한 느낌에 옆을 돌아본다. 전혀 슬픈 영화가 아니었는데 세아가 울고 있다. 처음에는 조금씩 흐느끼는가 싶더니 나중에는 걷잡을 수 없이 울어댄다. 엉거주춤 세아를 품에 안고 한참을 다독인다. 세아의 몸집은 새처럼 가늘고 앙상하다. 나는 갓난아기를 재우듯 가만히 등을 두드린다. 위로라고 하기엔 어설프지만 하여간 세아는 울음을 그친다. 잠이 드는지 숨소리마저 잦아든다. 아이의 호흡은 어느새 내 호흡과 박자를 같이하듯 조용히 오르내린다. 

그러나 그뿐, 세아에 대한 내 감정은 거기까지다. 세아는 분명 나를 자극하지만 순간의 감정에 지나지 않는다. 세아를 소파에 누이고 커피를 한잔 드롭으로 내려서 마신다. 언젠가 이런 비슷한 감정을 느낀 듯도 하다. 그때도 나는 어떤 남자와 같이 영화를 보고 있었다. 영화는 조금도 야하지 않았고 별 사연도 없었다. 영화 속 남녀는 뜨겁지도 슬프지도 않게 헤어졌다. 그런데 영화가 끝나고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몸을 섞었다. 나는 섹스 도중 많이 울었던 것도 같다. 남자가 격렬해질수록 내 슬픔도 따라서 격렬해졌다. 우리는 무언가에 지독히 굶주린 사자들처럼 으르렁거렸다. 한참을 포효하듯 진저리를 쳤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전화번호를 바꿔버렸다. 이상하게도 남자를 다시 대면할 용기가 없어서였다. 

기말고사 기간이 다가왔다. 한동안 아이들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내 기분이 홀가분해졌다. 훌쩍 도시를 떠나 어디로든 쏘다니고 싶었다. 그냥 이대로 모아둔 돈이 떨어질 때까지 떠돌아다녔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수업을 채우지 못한 아이들과 수업료 문제를 매듭짓고 전화번호도 바꾸었다. 그리고 나는 아무 생각 없이 하이에나처럼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 돌아왔다. 도시는 다시 말쑥한 얼굴로 나를 반겼다. 여행의 피로가 풀려 가고 있을 때쯤 세아가 집으로 찾아왔다. 

세아는 조금 화가 난 얼굴이다. 대뜸 속담 시합을 하자며 내기를 걸어온다. 제가 이기면 선생님은 제 소원 하나 들어주기예요. 제법 당돌한 말투다. 니 소원이 뭔데? 지금은 말할 수 없어요. 이기고 말할게요. 무언가 세아를 화나게 한 일이 있는 듯하다. 좋아, 그럼 니가 먼저 시작해 봐. 나는 세아의 얼굴을 살핀다. 세아는 뭔가를 쏟아내려는 듯 한껏 복받쳐 있다. 나는 이기고 싶지도 않지만 일부러 져주고 싶지도 않다. 세아가 속담 하나를 던진다. 레오니 레오 아세마예 케쇼니 음워응고(오늘은 오늘이다 내일이라고 말하는 자는 거짓말쟁이다)! - 킬라 초음보 꾸와 위음빌레(모든 배는 자신만의 파도가 있다). - 에오니 야코 케쇼 시오(내일이 아니라 오늘이 너의 날이다)! - 킬라 키응아라쵸 우시네 니 드하바부(빛나는 모든 것이 금이라고 생각지는 말아라). - 네오니 시쿠야 음웨레부 케소야 음푸음바부(오늘은 똑똑한 자의 날이고 내일은 멍청한 자의 날이다)! - 쿠리드히카 카마 우나 키콤베 차마지와 야타무(만약 한잔의 달콤한 우유를 가지고 있으면 만족해라). - 응곤자! 응곤자! 후미자 마툼보(기다려 기다려 이것은 위장을 상하게 한다)! …… 세아는 내게 울 듯이 덤벼든다. 나를 이길 수도 없겠지만 나도 무슨 오기에서인지 하나하나 받아친다. 어쩌면 세아의 소원을 듣기가 거북했는지도 모른다. 흥분하지 않았다면 세아는 더 많이 말했을 것이다. 나를 이기기 위해 꽤나 많이 준비했을 테니까. 

주먹을 쥐고 파르르 떨고 있던 세아가 소리친다. 다들 뭐가 그렇게 바쁜 거죠? 왜 그렇게 딴청들을 피우는 거냐구요. 날 좀 봐 주면 안 되나요? 내가 놀라 세아에게 한 걸음 다가서자 거칠게 밀어낸다. 선생님도 똑같아요. 어디로든 도망갈 궁리만 하잖아요. 엄마두 아빠두 오빠두 다 나 따윈 생각조차 않는다구요! 나는 다시 세아를 달래려 다가선다. 울부짖던 세아는 입술을 앙다문 채 내 등 언저리를 쳐대기 시작한다. 한 번 두 번 세 번 ······. 세아의 흐느낌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다. 내가 무슨 색깔을 좋아하는지, 어떤 노래를 좋아하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어젯밤 무슨 꿈을 꿨는지, 내가 얼마나 밤하늘 보기를 좋아하는지 물어 봐 주면 안 되나요? 세아의 말소리는 흐느낌에 뒤섞여 분명치가 않다. 세아의 흐느낌에 내 마음도 따라서 조금씩 격해져 온다. 우는 세아를 달래며 나는 오히려 나를 달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세아는 제 슬픔에 겨워 한참 동안이나 울다 소파에서 잠이 든다. 세아의 핏빛 손톱을 만지자 세아가 조금 꿈틀거린다. 세아의 손끝을 잡고 나는 가만히 내 안의 풀무질 소리를 듣는다. 툭 투득 툭 투득 ······. 하지만 잘 들어보면 그것은 세아의 슬픔에 동요되어서 나는 소리가 아니다. 그것은 내 안으로 들어오려는 세아를 애써 밀어내는 소리다. 

꿈속에서 나는 누군가와 심하게 싸우고 있었다. 싸우고 있다기보다는 상대방을 죽일 듯이 몰아붙였다. 때리고 짓밟고 욕하고 사정없이 물어뜯었다. 상대방은 이미 대항할 힘을 잃었는 데도 나는 끝장을 보려 했다. 내 두 손과 발은 쉴 새 없이 상대방의 몸을 향해 덤벼들었다. 바닥에 피가 흥건하고 얼굴은 흉하게 일그러졌다. 정신없이 소리치고 욕지거리를 퍼붓다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갑자기 맞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고 싶어졌다. 나는 고개를 숙여 얼굴을 살폈다. 피로 얼룩져 잘 알 수 없었다. 한참을 들여다봐야했다. 아, 피투성이가 된 사람은 바로 나였다. 나는 훅 숨을 들이마시며 잠에서 깨었다. 

나는 다시 잠을 청하려 몸을 뒤척인다. 설핏 잠이 들려 할 즈음 누군가 침대 안으로 들어온 것 같다. 누가 가만히 내 허리를 끌어안는다. 꿈속 같기도 하고 아닌 듯도 하다. 손길은 내 몸 곳곳을 파고들며 부드럽게 출렁인다. 등 뒤로 밀착된 몸이 조금씩 움직이더니 가슴을 움켜쥔다. 손길은 내 몸 깊숙한 곳까지 밀고 들어온다. 나는 놀라 몸을 움츠리며 뒤쪽으로 돌아눕는다. 세아일까. 몸에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듯하다. 숨을 멈추고 잠시 멈칫거린다. 다시 머리카락 몇 올을 손가락에 감아쥐고 가만히 비벼댄다. 풀피리처럼 가는 숨소리가 힘겹게 오르내린다. 꿈이라면 제발 깨고 싶다. 머리끝에서 발끝으로 전해 오는 미세한 떨림을 견딜 수가 없다. 거북하고 불편한 느낌 사이로 섞여 드는 이 감정을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다. 외로움인가 하면 슬픔이고 애처로움인가 하면 두려움이다. 

눈을 뜨니 어느새 아침이다. 세아는 집에 가려는지 옷을 단정하게 입었다. 나는 잠을 설쳐 조금 멍한 기분이다. 세아의 얼굴을 쳐다보기가 민망하다. 세아가 현관 앞에 앉아서 운동화 끈을 맨다. 나는 세아의 등에 대고 잠긴 목소리로 묻는다. 너는 뭐가 되고 싶니? 아이가 나를 쳐다본다. 뭐가 되고 싶은지 생각해 본 적 있어? 세아는 운동화 끈을 다 묶을 때까지 아무 말이 없다. 뭐가 되고 싶은지 모르겠어요. 저도 예전엔 그런 거 많이 생각했었는데······. 전 지금이 좋아요. 선생님하고 있는 지금이 좋아요. 다른 건 생각 안 할래요. 

나는 조금 뜸을 들인 뒤 모질게도 말한다. 어쩌면 오래전부터 준비한 말인지도 모른다. 이제 공부하러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네? 왜요? 이제 그만 가르치고 싶어. 세아가 놀란 얼굴로 묻는다. 왜 그러는 건데요? 제가 뭐 잘못한 거 있나요? 아니. 그냥 좀 쉬려구. 나는 애써 거짓말을 지어낸다. 세아가 신발을 차버리고 다가온다. 선생님 비겁해요. 선생님도 내가 좋으면서 또 도망가려는 거지요! 나는 세아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본다. 니가 뭘 아니? 니가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함부로 말하니? 가! 당장 가! 세아의 눈이 빨개지면서 눈물이 고인다. 가라구! 내 말 안 들려? 가란 말야! 나는 눈에 띄는 책 몇 권을 세아를 향해 집어던진다. 파르르 떨며 참고 있던 세아가 갑자기 컵을 들어 내리친다. 여러 조각의 파편들이 책들 위로 난무한다. 세아가 씩씩대며 나를 노려본다. 겁쟁이! 세아는 울면서 깨진 컵 조각을 맨발로 짓이기며 뛰쳐나간다. 

세아가 나간 뒤 거칠게 닫히던 문소리는 내 안에서 한참을 서성댄다. 속이 울렁거린다. 나는 화장실로 가서 속의 것을 게워 낸다. 먹은 것도 없는데 꾸역꾸역 신물이 올라온다. 입에서 시큼한 냄새가 난다. 나는 변기를 붙들고 주저앉는다. 궤도를 벗어난 로켓이 컴컴한 우주 속을 한없이 돌고 있는 기분이다. 나는 무언가에 세차게 얻어맞은 듯 기운을 차리기가 힘들다. 아직도 꿈속인가 싶어 조금 전 피가 흥건했던 바닥을 떠올린다. 피는 없고 꿈속도 아니다. 여기는 분명 내 집 화장실이다. 

겉옷을 걸치고 집을 나선 건 정신이 조금 들었을 때다. 신호가 바뀌자 달려가는 차들을 바라보며 나는 건널목에 선다. 이제는 행인들이 걸어갈 차례다. 나는 왠지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다. 마치 걷는 방법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그 자리에 서 있다. 아무 일도 없었던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고 싶다. 내 문 안으로 들어오려는 세아가 싫다. 세아는 꿈속에서조차 내 몸을 휘젓고 다니는 것만 같다. 나는 내 안의 문을 닫기로 한다. 설령 문밖에서 세아가 울고 있다 해도 말이다. 방금 도착한 버스에서 한 무더기의 사람들이 쏟아져 내린다. 헤어지기 싫은 젊은 남녀가 서로를 끌어안는다. 나는 퀭한 두 눈을 들어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다시 초록불이다.

빠른 걸음으로 건널목을 건넌다. 내가 두어 번 간 적이 있는 이동통신회사 대리점이 보인다. 친절한 여직원이 반갑게 나를 맞는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네, 핸드폰 좀 바꾸려구요. 전화번호도 바꾸시는 건가요? 나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속이 텅 빈 탓인지 몸이 자꾸 떨려 온다. 여직원은 새 전화번호를 고르라며 나를 부른다. 얼마 전에도 바꾸셨는데 또 바꾸시네요? 마치 나를 아는 듯한 표정으로 웃고 서있다. 나는 기습공격을 당한 사람처럼 눈을 동그랗게 뜬다. 한참을 입을 뗄 수가 없어 쭈뼛거린다. 

그때 핸드폰에 문자가 들어온다. 속담처럼 짤막한 단문의 문자다. <나, 고양이버스 타러가요>. 순간 머릿속은 방전된 배터리처럼 하얗게 비어버린다. 내 안에서 누군가 나를 부르는 듯하다. 마치 큰 소리로 무언가를 외쳐대는 것만 같다. 나는 핸드폰을 들고 도망치듯 대리점을 뛰쳐나온다. 손님! 손님! 여직원의 커다란 목소리가 뒤통수에 따라붙는다. 교차로의 초록색 신호등이 무슨 말을 하려는 듯 깜박거리고 있다. 나는 그 불빛을 좇아 세아의 집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간다.<끝>

 

 

 

 

나를 단련시켰던 절망… 또 미욱하게 걸어갈 것

소설 당선소감

 

 

젊은 조지 월러드는 새벽 네 시에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사월이라 나무의 어린잎들이 이제 막 새싹을 터뜨리며 나오고 있는 중이었다. 와인즈버그 주택가 가로수인 단풍나무의 씨앗에는 날개가 달려 있다. 바람이 불 때면 미친 듯이 빙글빙글 원을 그리며 사방으로 날아 하늘을 가득 뒤덮으며, 발아래에 카펫을 깔아 놓는다.

‘와인즈버그, 오하이오’의 마지막 장인 ‘출발’을 읽고 있었다. 와인즈버그 마을의 청년 조지가 작가가 되기 위해 고향을 떠나는 날의 아침 풍경이 눈에 선했다. 응모를 끝내고 모처럼 읽기에 빠져든 중이었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고개를 들었을 때, 밖은 눈이 올 듯 뿌연 회색빛이었다. 시간을 보려 핸드폰을 집어 드니 꺼져 있었다. 핸드폰을 다시 켜자 이미 도착해 있던 메시지 한 통. “문화일보 ○○○입니다. 연락바랍니다.” 이제껏 느껴 보지 못한 흥분과 전율로 나는 가슴이 뛰었다. 돌이켜 보니 ‘출발’을 읽던 그 시간, 나도 조지처럼 오래도록 꿈꿔 왔던 그곳으로 달려가는 중인가 보았다.

부족한 제 글을 뽑아주신 박범신 선생님과 김원우 선생님, 감사합니다. 출발은 언제나 설레고 두렵지만, 그간의 절망이 저를 단련시켜 주었다면 다시 또 미욱하게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더디고 미련한 저를 가르치고 이끌어주신 최인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같이 공부하며 고생했던 최인소설교실 문우들과 이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오랜 시간 저를 믿고 기다려 준 가족들, 이름을 모두 나열하진 않지만 변함없이 응원을 보내 준 소중한 친구들. 미안하고 고맙습니다. 이제 다시 신발 끈을 조여 매야겠습니다. 갈 길이 멀기 때문입니다.

▲ 1966년 경기 이천 출생
▲ 건국대 철학과 졸업

 

 

주제의식 집요하게 파고드는 소설 작법 인상적
소설 심사평

 

 

본심에 올라온 작품은 여섯 편이었다. 그중 다음의 네 작품은 제가끔의 장단점을 가진 채 상당한 성취를 보여주었다.

‘달팽이를 키우는 사연’(이정현)은 대학원생 세 명의 자기방기적 일상을 소상하게 기술하고 있다. 그 생생한 디테일에도 불구하고 작의를 끌어내는 능력은 미흡하다.

‘분실’(한기옥)은 ‘그’의 자기 정체성을 찾아 헤매는, 소위 카프카류의 존재증명기이다. 분석적인 문체감각도 돋보인다. 하지만 오피스텔의 5층이 없어졌다는 설정과 ‘그’의 신원이 낭패를 겪는다는 도식은 연결고리가 없는 억지조작으로 비친다.

‘텅 빈 학교운동장엔 태극기만 펄럭이고’(이해동)는 초등학교에서 벌어지는 ‘왕따’ 이야기를 사실극으로 만들어내고 있다. 더욱이나 귀뚜라미와 거미를 키우면서 터득하는 그 약육강식의 세계가 이 시대의 공교육 현장에 대한 비유라는 암시도 공감대를 넓혀간다. 그러나 이 소년물 세태소설에 동원된 여러 소재들은 너무 상투적이다.

‘고양이버스’(문미순)는 동부 아프리카의 유력한 언어인 스와힐리어를 가르치고 배우는 ‘나’와 아이의 교유기이다. 인과관계가 느슨하다든지, 외국어의 낭자한 과시벽 따위는 이 소설의 약점이라 할 만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소통만능시대’에 어떤 단절을 희구하는 주인공의 ‘나 찾기’ 고투는 핍진하다. 주제의식을 도외시하는 작금의 소설적 경향에 좋은 사례일 수 있어서, 다소의 무리를 무릅쓰고라도 당선작으로 올려놓는 데 두 선자는 흔쾌히 동의했다. 당선을 축하하며 착실한 정진을 거듭하기 바란다.심사위원 박범신·김원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