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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알의 여자 / 손솔지

 

여자의 어릴 적 꿈은 알사탕이 되는 것이었다. 어깨가 더 좁아지고 몸이 점점 더 조그마하고 달콤해져서 동글동글한 알사탕이 되었으면, 하고 바랐다. 이왕이면 새하얗고 시원한 향이 나는 박하사탕이 되고 싶었다. 여자의 아버지가 삼겹살집에서 나올 때 카운터에 구비된 이쑤시개와 함께 한 움큼 쥐어오던 그 박하사탕처럼 작고 새하얗게. 아 달다, 아버지는 트림을 하며 만족한 듯 중얼거리곤 했다. 아 예쁘다, 참 작아. 여자가 레이스 달린 새하얀 원피스를 입을 때면 아버지는 꼭 칭찬했다. 아버지는 여자를 허벅지 위에 앉히고 하얀 레이스 자락 밑으로 드러난 그녀의 말랑말랑한 무릎을 조몰락거렸다. 그럴 때 여자의 바람은 간절해지곤 했다. 더 조그맣고 하얗게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버지의 입속은 따뜻할 것이다. 아버지의 혓바닥은, 여자의 곱게 딴 머릿단을 쓰다듬는 커다란 손바닥처럼 커다랗고 부드러울 것이다. 그런 아버지의 입속에서 혓바닥에 이리저리 쓸리며 점점 녹아간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행복했다.

 

그녀는 가끔 꿈속에서 알사탕이 되었다. 그 꿈은 여자의 하얗고 보드랍던 뺨에 여드름 꽃이 필 무렵까지 계속 되었다. 꿈속에서 여자는 그 어떤 사탕보다 달콤했고 부드럽게 금방 녹아 세상 그 어떤 것보다도 작아졌다. 하지만 눈을 뜨면 그녀의 몸은 꼭 하루만큼 알사탕에서 멀어졌다. 줄어들길 바랐던 팔과 다리는 날이 갈수록 길고 가늘어졌고 거짓말처럼 가슴이 부풀었다. 레이스가 누렇게 변색된 새하얀 원피스는 얼굴과 팔 한쪽만 끼어 넣어도 투득, 실밥 터지는 소리가 났다. 겨우 두 팔과 얼굴을 다 집어넣으면 치맛자락은 그녀의 팝콘같이 부푼 젖가슴에 뭉친 채로 걸려있었다. 여자는 새하얗게 되고 싶어 매일 칼슘 우유를 한 컵씩 마셨던 것을 후회했다. 여자가 억지로 치맛자락을 가슴 밑으로 끌어내렸을 때 투득, 투득, 원피스는 갈라졌다.

 

"안에 아직도 멀었어?"

 

신경질적으로 화장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여자는 빠르게 생리대를 뜯었다. 팬티를 입고 일어나서 치맛자락을 끌어내렸다. 변기 안에 무겁게 가라앉은 생리 혈이 스멀스멀 변기구멍 쪽으로 새까맣게 몰려 기어갔다. 붉다 못해 검붉은 색이 나는 핏물은 분명 여자의 몸속에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여자는 매 달마다 보는 것이지만 그 붉은 빛깔이 못내 신기해서 허리를 숙여 변기 안을 구경했다. 금세 또 노크소리가 들려와 그녀는 아쉽게 변기 물을 내렸다. 문 앞에서 팔짱을 끼고 서있던 동료는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오는 여자의 어깨를 툭, 치듯 스치고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여자가 다니는 회사에는 화장실 안에 변기가 하나뿐이었다. 여자는 한 쪽 벽에 웅크리듯 달라붙은 세면대 앞에 섰다. 거울에는 여기저기 튄 물방울이 그대로 말라붙어 있었다. 그 지저분한 거울에 비치는 얼굴을 바라보며 손을 씻었다. 이제 여자의 얼굴 어디에도 여드름의 흔적은 없었다. 가볍게 화장을 한 그녀의 뺨은 보드라워보였고 동그란 이마는 매끈했다. 여자는 목이 가늘고 피부가 하얘서 연분홍빛 블라우스가 잘 어울렸다. 알사탕이 되는 것을 포기했지만 그래도 그녀에게 다행인 점이 있다면 여전히 피부가 하얗다는 것이었다. 어릴 적부터 여자는 언제나 그늘을 찾아 앉아있었다. 그래서 지금도 그녀의 피부는 푸른 핏줄이 비칠 정도로 하얗다. 여자는 가슴이 팝콘처럼 부풀어버리고 나서부터 리본으로 장식된 브래지어만 입었다.

 

여자의 교복 단추가 가슴께에서 힘겹게 잠길 때, 독서실 옆자리에 앉아있던 남학생은 여자에게 화이트를 빌렸다. 독서실 칸막이에 기대어 여자가 꾸벅꾸벅 졸 때쯤 남학생은 여자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몰래 숨어들어간 여자화장실 가장 끝 칸막이에서 남학생은 속삭였다. 아 예쁘다. 꼭 선물 같아. 벌어진 여자의 교복 셔츠 사이로 꽃분홍의 리본이 보였다. 가슴 가운데에 리본이 붙어있는 그 브래지어는 여자가 가장 아끼는 속옷이었다. 남학생은 크리스마스 선물을 개봉하는 설레는 손길로 브래지어 버클을 풀었다. 그 다음 달 여자의 생일에 남학생은 브래지어를 선물했다. 여자가 가진 것보다 더 큰 리본이 달린 브래지어는 담겨있던 상자의 포장지와 똑같은 빨간색 도트무늬였다. 여자는 남학생이 떨리는 손길로 교복 단추를 끄를 때마다 다른 색의 리본이 달린 브래지어를 입었다. 여자는 매일 매일 새로운 선물이고 싶었다. 남학생이 기대 가득한 눈빛으로 화장실 문을 잠글 때 여자는 가슴이 벅찼다. 남학생은 매점에서 사먹는 푸딩보다 여자의 속살이 더 부드럽다고 속삭였다. 남학생이 가장 좋아하는 간식은 푸딩이었고 여자의 젖가슴은 그것보다 더 몰캉거렸다. 그 사실이 여자는 자랑스러웠다. 남학생은 수능 성적표가 나오자 여자에게 말했다. 이제 연락하지 마, 이 싸구려 군것질 같은 년.

 

"색이 너무 싸 보이지 않아?"

 

다른 동료의 옆자리로 와 앉은 동료는 아직 물기가 남은 손을 치마에 닦으며 그 물음에 대답했다. 아냐, 올봄에는 핫핑크가 유행이잖아. 그런가? 하고 되묻는 그 입술은 여자가 좋아하는 색이었다. 지금 여자의 블라우스 안에 입은 브래지어에는 동료의 립스틱과 똑같은 색의 리본이 달려있었다. 여자는 아직도 리본이 달린 속옷만 입었다. 여자는 이제 또 다른 남자를 위해 준비된 선물이었다.

 

"변 과장이 자꾸 입술을 쳐다보는 것 같단 말이야."

 

"그 변태새끼가? 께름칙하다. 얼른 지워."

 

티슈로 입술을 꾹꾹 지워내는 동료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여자는 입모양으로 변태, 하고 중얼거렸다. 여자가 생각하기에 남자는 변태하기 전의 애벌레 같았다. 여자의 몸 위에서 꿈틀거리는 남자의 손가락은 마디가 두껍고 자글자글 주름이 많았다. 틀림없는 애벌레였다. 검다 못해 푸른, 잎사귀 같은 그녀의 체모 사이를 그 손가락이 꿈틀꿈틀 기어갈 때 여자는 간지러움에 몸을 움츠렸다.

 

애벌레는 여자에게 생소했다. 어린 시절 여자의 집에는 언제나 화려하게 변태한 후의 나비들만이 있었다. 여자는 아버지가 쥐어준 사탕을 입에 넣으며 액자를 가리켰다. 내 원피스 같아요. 흰 배추 나비라고 하는 거야. 아버지는 여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제각기 무늬가 다른 나비들은 날개 이곳저곳이 가느다란 핀에 찔린 채 액자 안에 살포시 정렬되어 있었다. 크기도 제각기고 개중에는 괴기스러울 정도로 큰 나비도 박제되어 있었다. 하지만 절대로 움직이는 법이 없었기 때문에 여자는 그 나비 위로 덮인 유리에 손을 댈 수도 있었다. 그런 용기 있는 행동은 아버지의 눈을 피해서 해야 했다. 아버지는 여자가 액자들을 건드리면 무섭게 화를 냈다. 활짝 핀 꽃은 곧 져버려. 예쁘지가 않지. 가장 예쁠 때는, 피어나기 전이야. 그래서 가장 아름다울 때 찍어둬야 하는 거야. 아버지는 풍경 사진을 잘 찍었다. 그래서 여자는 설레는 마음으로 아버지의 카메라 앞에 서있었다. 다리가 긴 카메라 삼각대는 여자보다 키가 컸다. 아버지는 카메라 앵글을 잘 맞추기 위해 뜸을 들였다. 여자는 그 시간이 너무 심심해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날따라 요구르트 배달을 빨리 끝낸 어머니가 방문을 열었다. 아직 아버지는 앵글을 잡지 못한 상태였다. 방문 앞에 허물처럼 떨어져있던 여자의 원피스를 어머니가 주웠다. 우뚝 멈춰선 어머니의 발 앞에는 징검다리처럼 여자의 팬티가, 그 앞에는 레이스가 달린 여자의 양말이 떨어져 있었다. 여자는 알몸으로 아버지 방에서 어머니에게 끌려나온 이후, 아버지를 보지 못했다.

 

아버지는 희귀한 나비를 찾아서 여행을 떠났다고 했다. 여자는 어머니의 말에 수긍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아버지와 함께 여행을 떠났다면 좋았을 텐데. 어머니는 여자가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아버지에게서 온 편지 한 통도 보여주지도 않았고, 아버지와 전화 통화를 하는 모습도 본 적이 없었다. 아주 먼 오지로 떠났다고 했다. 어머니는 혹시 여자가 알사탕처럼 작고 달콤해질 것 같아서 두려웠던 게 아닐까. 여자는 어린 시절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그런 예상에 더 확신을 갖곤 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허벅지 위에 여자가 앉아있는 것을 보는 족족 여자를 끌어내렸고, 아버지의 방을 구경하러 가면 자꾸만 방문을 열었다. 어머니는 여자보다 키가 크고 피부가 누랬으니 여자가 자신보다 먼저 아버지의 알사탕이 될까봐 두려웠을 것이다. 여자는 지금도 그렇게 확신한다.

 

"변태는 식욕도 왕성해."

 

"맞아, 그 먹는 모습을 보면 저절로 다이어트가 된다니까. 속이 울렁거려. 이게 무슨 회식이야. 저 혼자의 만찬이나 다름없지."

 

여자가 화장실 칸막이에서 나와 손을 씻자 세면대 앞에서 맞담배를 피우던 동료 둘은 여자를 싸늘하게 훑어보았다. 그러다가 이내 그녀에게서 신경을 끄고 담배연기를 서로 후욱, 뱉어냈다.

 

"너 봤어? 그깟 놈도 마누라가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지 않아? 어디 꼽추 같은 게 애처가 흉내 내려고 회식자리에 떡하니 꽃다발이랑 과일 바구니를 옆에 두고. 먹기는 또 돼지같이 처먹고."

 

길게 이어지는 담배 연기에 콜록거리며 여자는 화장실을 나왔다. 시끌벅적한 테이블의 빈자리에 쏙 들어가 앉았다. 바로 앞자리에 마주앉아있는 남자의 이마에서 땀이 촉촉하게 배어나왔다. 여자는 그 까무잡잡한 이마를 손으로 쓸어 닦아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남자는 소매가 맘대로 둘둘 접힌 팔뚝으로 제 이마를 쓱 닦아냈다. 그리고는 다시 열중해서 살점이 달라붙어있는 돼지 뼈를 쪽쪽 빨아먹는다. 남자는 자신을 바라보는 여자를 흘깃 쳐다보곤 다시 뼈를 발라 먹는다. 여자는 고개를 숙여 젓가락을 쥔 자신의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남자는 어젯밤 여자의 손가락을 입에 넣고 쪽쪽 빨았다. 그건 남자의 버릇이었다. 남자는 여자의 다섯 손가락을 차례로 빨아대며 중얼거렸다. 달다, 너무 달아. 여자는 순간 손가락이 축축해지는 느낌이 들어 젓가락을 내려놓고 손을 마주 비벼댔다.

 

남자는 사래가 들려 쿨럭이며 입을 막았다. 여자는 어깨를 들썩이는 남자 앞으로 물 컵을 쓱 밀어주었다. 남자는 잔기침을 하며 여자를 흘깃 쳐다보았다. 벗겨진 이마 위로 잘 빗겨져있던 적은 양의 머리칼이 흐트러져 흘러내렸다. 남자는 여자가 밀어준 물 컵을 놔두고 다른 컵에 물을 따랐다. 남자는 회사 사람들과 있을 때 여자가 아는 척 하는 것을 싫어했다. 여자를 똑바로 쳐다보는 적도 없었고 여자에게 말 한마디 걸지 않았다. 그럴 때에 남자에게 있어서 여자는, 옆에 놓인 꽃다발이나 과일 바구니 같은 것이었다. 여자는 며칠 전에 태어났다는 남자의 셋째 아이 이름을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예쁜 이름이지? 아주 조그맣고 예뻐. 남자는 잠들기 전 그렇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여자아이는 말이야, 남자애들이랑 또 달라. 미스 안은 아직 애를 안 낳아봐서 모르겠지만, 여자아이는 품에 안는 느낌부터 다르다니까. 뭔가 좀 더 말랑말랑하고 향긋한 느낌이라고. 여자는 앞 접시에 담긴 감자를 젓가락으로 조그맣게 부수었다. 우리 집 여편네는 원래 몸에 살집이 좀 있어서, 내 딸도 그렇게 클까봐 걱정이야. 내 딸이 미스 안을 닮았으면 좋겠는데. 그러면 좀 더 여리하게 클 것 아니야. ? 남자는 모로 몸을 구부린 여자의 자그마한 발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다 먹었으면 이제 일어나지."

 

포식한 남자가 일어나며 말했다. 남자의 무릎 부근에서 두둑, 하고 뼈 소리가 났다. 사람들은 다들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챙겼다. 남자는 옆에 놓았던 꽃다발과 과일바구니를 부스럭거리며 챙겨 들었다.

 

"과장님, 정말 애처가십니다."

 

사람들은 그 말에 웃거나 동의하는 말을 두어 마디 던져주었다. 남자는 쑥스러움과 귀찮음이 섞인 표정으로 자신의 손에 들린 것들을 쳐다보았다.

 

"온통 붉은 것뿐이네요?"

 

누군가의 물음에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내가 붉은 색을 좋아해. 남자의 말에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장난 섞인 야유를 던졌다. 여자는 남자의 손에 들린 것들을 바라보았다. 밑으로 고개를 떨어뜨린 붉은 장미들과 바구니 위로 튀어나온 탐스러운 사과 몇 알. 싱싱해 보이는 딸기들과 붉디붉은 석류. 과일들이 신선해서 바구니 위로 포장된 비닐 안쪽에는 축축하게 물기가 있었다.

 

붉은 색을 좋아하는 것은 남자의 아내만이 아니었다. 예뻐. 오늘은 꼭 작고 통통한 체리 같네. 무얼 바른 거야? 남자는 식성이 좋아 여자의 입술을 터뜨릴 듯 깨물었다. 여자는 입술 신경이 잔뜩 시려왔다. 핏물이 여자와 남자의 입안으로 섞여 넘어갔다. 아니야. 시큼털털한 맛이 나는 게, 석류가 확실해.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킥킥 꼬마같이 웃었다. 홍시 셔벗 먹어본 적 있어? 살짝 얼린 홍시가 시원하고 참 달아. 남자는 여자의 다리 밑으로 얼굴을 파묻으며 홍시에 대해서 얘기했다. 언제나 남자는 관계를 가질 때면 자신의 미각이 기억하는 음식들에 대해 묘사했다. 여자는 남자의 말에 귀 기울이며 눈을 감았다. 그러다보면 여자는 남자의 혀 아래에서 홍시 셔벗이 되었다가, 어린 양 스테이크가 되기도 했다가, 본 적도 없는 음식의 특제 소스가 되었다.

 

"이것 좀 잠깐 들어줘."

 

얼떨결에 남자의 뒤에 서있던 여자는 두 손 가득 꽃다발과 과일 바구니를 들었다. 남자는 허리를 숙여 구두 뒷부분을 끌어 잡고 발을 끼워 넣었다. 몽환적인 장미향이 여자의 코밑으로 진하게 스쳤다. 여자는 품 안에 가득 껴안은 장미 다발 속으로 살짝 고개를 숙였다. 여자는 이렇게 화려한 꽃다발을 받아본 적이 없다.

 

졸업식 날 교문 앞에서 파는 시들시들한 장미 한 송이를 그녀에게 내민 사람은 그렇게 보고 싶었던 아버지였다. 여자가 어머니보다 더 키가 커진 것에 비해 아버지는 그리 많이 늙지 않았다. 아버지의 목에는 카메라가 걸려 있었다. 여자는 묻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입을 떼기도 전에 아버지가 채집한 나비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오지로 여행을 갔다던 아버지는 정말 희귀한 나비를 잡아서 돌아왔다. 아버지가 여태 채집한 나비 중에 가장 큰 나비였다. 하늘거리는 하늘색 스커트를 입고 해바라기 모양 귀걸이를 하고 있었다. 상냥하게 웃으며 여자에게 인사를 하는 손가락이 사뿐히 내려앉은 나비 같았다. 밀가루와 계란에 흠뻑 젖은 교복을 입고 있던 여자와 별로 나이 차이가 나 보이지 않았다.

 

새장가 가는 건 그렇다 쳐도 그 계집애, 몇 살이라니? 그 애 부모는 그걸 허락했다니? 어머니는 고개를 묵묵히 숙이고 있었다. 여자는 방문을 닫았다. 문 안으로 할머니의 울음 섞인 신세 한탄이 새어 들어왔다. 그때 여자의 가슴 속에서 따갑게 불꽃같은 것이 튀었다. 여자가 세상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은 바로 여자의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여행을 떠난 이후부터 부쩍 말랐다. 말 수도 줄었고 목소리도 낮아졌다. 어머니는 미련했다. 아버지의 곁에서 여자를 자꾸 끌어내지만 않았어도 여자는 아버지가 여행을 떠나지 않도록 붙잡을 수 있었다. 조금만 더 아버지의 허벅지 위에 앉아서 시간을 보냈더라면 여자는 더 부드럽고 달콤해졌을지도 몰랐다. 아버지의 만족스러운 웃음소리를 들으며 행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여자와 함께 뒷자리에 탄 남자동료가 내리고 그 뒤로 한참이나 더 떨어진 동네에 와서야 여자는 뒷자리에서 조수석으로 와 앉을 수 있었다. 여자는 조수석에 놓여있던 꽃다발과 과일바구니를 뒷좌석으로 옮겼다.

 

"한 동안은 퇴근하고 바로 병원으로 가야 해. 미스 안은 그동안 밀린 야근이라도 하던지 해. 여편네가 딸애 낳은 값으로 큰 루비 알이 박힌 반지를 사달래. 정말 지겨운 여자야. 미스 안은 뭐 갖고 싶은 거 없어?" 고개를 저으려다가 여자는 뒷좌석을 돌아보았다. 두툼한 손가락이 달린 남자의 손은 참 커다랗다. 남자는 운전대에서 한 손을 떼어내 여자의 머리칼 사이로 집어넣었다. 굳은살이 박이고 주름이 잔뜩 진 손가락들이 여자의 여린 뒷목을 가만히 주물렀다. 예쁘다미스 안은 소박해서 참 귀여워. 꿈틀거리는 손가락에 여자의 머리칼이 휘어 감겼다. 그 손에 감기고, 그 손이 쓰다듬는 머리칼은 방금 씻어낸 상추 다발처럼 파릇파릇하고 생생하다.

 

여자는 현관에 구두를 벗어놓고 들어와 바로 바구니의 비닐 포장을 뜯어냈다. 달큰하고 끈적거리는 향이 금세 퍼졌다. 온통 새치름하게 붉은 과일들은 촉촉하게 물기를 머금고 있다. 여자는 딸기 꼭지를 하나 따내고 입속에 집어넣었다. 과즙이 가득한 딸기는 이에 쉽게 짓물렀다.

 

사람의 손에 닿지 않게 높은 가지에 매달린 열매일수록 달다고 하더라. 그렇지만 나는 쉽게 따먹을 수 있는 게 좋아. 남자는 그렇게 말하면서 봉긋 솟은 여자의 젖꼭지를 깨물었다. 난 좀 시큼하고 떫은 맛도 좋아하거든. 여자는 진득한 과즙을 목뒤로 삼켜내고 곧바로 딱딱한 석류 알을 집어 들었다. 톡톡, 두드리자 노크 소리가 날 정도로 껍질이 두꺼웠다. 여자는 부엌에서 과도를 가져왔다. 터진 배꼽 같은 꼭지부분으로 칼끝을 겨눴다. 꾹 찔러 넣어 금이 가게 벌려놓고 양 손으로 잡아 뜯었다. 투드득, 원피스 실밥 터지는 소리가 났다. 자글자글한 알맹이들이 쏟아져 나왔다. 하나같이 반투명한 핏빛이었다. 어떤 루비 보석보다도 영롱한 빛깔이었다. 그 빛깔이 너무도 고와서 여자는 혀를 내어 알맹이들을 입속으로 거뒀다. 탱탱한 알들을 토독, 토독 씹을 때마다 여자는 눈가를 찡그렸다. 시큼한 맛이 그녀의 혀에 자르르 흘러들었다.

 

시큼하고 떫은 과일은 새로워서 좋아. 남자는 여자의 귓속으로 혀를 집어넣으며 말했다. 여자는 귓속으로 울리는 그 목소리를 기억해내곤 자그마한 루비들을 모두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여자는 좀 더 새로워지고 싶다. 신선하고 산뜻해지고 싶다.

 

우리 엄마는 날 낳을 때 태몽으로 복숭아 꿈을 꿨대. 산 속에 복숭아가 무더기로 쌓여 있었대. 근데 그 복숭아가 얼마나 뽀얗고 탐스러운지 아무리 먹어도 배부르지 않았대. 웃기지. 남자애를 낳는데 왜 그런 꿈을 꿨을까. 그런 건 너 같은 여자애를 낳을 때 꿔야 하는 건데. 남학생은 그렇게 속삭이며 여자의 교복 치마 속으로 손을 뻗었다. 동그랗게 튀어나온 여자의 엉덩이를 쥐어본 남학생은 대학의 오리엔테이션이 끝날 늦봄 무렵 여자에게 문자 메시지를 남겼다. 너를 잊을 수가 없어.

 

독서실 근처의 공원으로 밤늦게 남학생을 다시 만나러 갔을 때, 여자는 남학생이 잊을 수 없었던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여자는 떨어진 벚꽃 잎과 흙이 묻은 치마를 털어내 다리에 꿰었다. 나무에 기대어서서 여자를 가만히 지켜보던 남학생은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가끔 그립긴 한데, 넌 너무 빨리 질려.

 

여자는 앙상하게 사과 뼈대만 남겨놓는 것을 마지막으로 바구니 속의 모든 과일을 해치웠다. 포만감은 곧장 편안한 수면으로 연결된다. 남자는 모텔 침대에서 여자의 맨 허리를 끌어안고 잠이 들 때면 두어 번 세게 흔들어도 좀처럼 깨어나지 않았다. 텅 빈 주스 통이 탕 탕 거실 바닥에 몇 번 튀며 굴러갔다. 여자는 팔 다리를 쭉 펴고 거실 가운데에 누웠다. 씻고 싶지도 않았고 스타킹을 벗고 싶지도 않았다.

 

예쁜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어. 나이가 있으니 별 수 없겠지만 여기저기 축축 쳐지고 그나마 쓸모 있는 구석이라곤 거기 하나 뿐이야. 그 여편네는 참애들만 아니었어도 진즉에 미스 안으로 갈아치우는 건데. 여자는 묵묵히 남자의 양말을 벗겼다. 입가에 적포도주가 말라붙은 남자가 힘겹게 숨을 뱉어내자 여자는 넥타이도 풀어주었다. 빠르게 잠속으로 빠져드는 남자는 본능적으로 단 맛을 찾아 혀를 내밀어 입가를 닦아냈다.

 

적 포도. 여자는 발딱 눈을 떴다. 빈 바구니와 부스러기처럼 널린 장미 꽃잎 사이에서 핸드백을 찾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닫을 준비를 하는 동네 슈퍼로 조급하게 걸어와 여자는 지갑을 꺼내들었다. 주인아저씨는 여자가 들기 쉽게 포도를 세 상자씩 노끈으로 묶어 여자의 양 손에 쥐어주었다. 손이 무거워진 상태로 슈퍼에서 나오던 여자는 다시 뒤돌았다. 다른 과일들 사이에서 붉은 알을 하나 발견했기 때문이다. 톡 터진 입 끝을 야릇하게 벌린 석류 한 알을 핸드백에 넣고서야 여자는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여자는 다시 차근차근 입속으로 열매들을 집어넣었다. 처음에는 포도 껍질을 벗겨내고 포도 씨도 발라서 모아놓았다. 그러나 포도를 다섯 송이 째 상자에서 꺼냈을 때부터 송이를 손에 든 채로 한 알씩 똑 똑 따서 씹어 삼켰다. 껍질도 씨앗도 모두 달게 삼켰다. 목 뒤로 까슬까슬하게 넘어가는 씨앗을 느끼며 여자는 우스운 상상을 했다. 뱃속에 모인 씨앗들이 꿈틀거리며 움트는 상상이었다. 여자는 씨앗이 자라서 포도 알 같은 것이 주렁주렁 열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이왕이면 포도 알보다는 석류 알갱이들처럼 더 작았으면 좋겠다. 더 조그맣고 더 많은 알맹이들이 무수히 많이 자랐으면 좋을 것이다. 세포처럼 작고 많은 그것들은 이로 씹을 때마다 토독, , 타닥, 제각기 소리를 내며 터질 것이다. 어떤 것은 새큼하고 어떤 것은 순하디 순하게 달고 어떤 것은 놀랄 정도로 신 맛이 난다면. 어떤 혓바닥이라도 그 새로운 맛을 모두 핥아먹지 않고는 못 견딜 것이다. 여자는 손바닥이 온통 과즙으로 끈적끈적한 것도 신경 쓰지 않은 채 금세 반수면 상태로 접어들었다.

 

나는 순진한 년이 좋아. 여자가 탄 버스가 신호에 걸렸을 때 여자는 차창 밖에서 익숙한 목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걔는 진짜 순진해. 아냐, 순진한 게 아니라 머리가 텅 텅 빈 것 같아. 뇌가 쪼그라든 대신에 젖가슴만 부풀었나봐. 오토바이에 등을 기댄 채 남자애들은 꼭 까마귀 떼같이 웃었다. 그 중 한명은 붉은 도트무늬로 포장된 상자를 세 상자 안고 있었다. 신호가 바뀌고 여자가 탄 버스는 그 속옷가게 앞을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빨래 건조대에 걸린 속옷들은 명확히 어머니와 여자의 것으로 구분할 수 있었다. 어머니의 속옷은 늘 민무늬의 흰색이거나 칙칙한 살구 색이었다. 시장 거리에 널린 채로 파는 그것들은 전혀 창피하거나 비밀스러운 구석이 없었다. 여성이 봐도 여성스럽지 못했다. 어머니는 어떻게 그런 것을 입을 생각을 하는지, 여자는 정말 궁금했다. 그러고 보면, 아버지가 어머니를 놔두고 여자에게만 연락을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만나러 오렴. 아버지의 손은 여전히 컸고 자상했다. 여자의 뺨을 어루만지며 아버지는 여자에게 안쓰러운 눈빛을 보냈다. 옛날에는 무릎에 앉힐 수 있을 정도로 귀여웠는데 어느새 이렇게아버지의 목소리가 너무 처량해서 여자는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가 안쓰러워졌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찍어둬야 해. 그리 많이 늦지는 않았어. 여자는 비좁은 아버지의 사진관 구석에 스웨터를 벗어 놓았다. 싸늘한 공기에 맨살이 노출되자 팔뚝에 좁쌀 같은 소름이 돋았다. 사진관 벽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액자 속에는 하나 같이 뽀얀 뺨을 가진 아기들의 돌 사진이 걸려있었다. 그 새뽀얗고 토실한 뺨들이 꼭 동글동글한 알사탕 같아서 여자는 그 액자들 앞에서 옷을 벗는 것이 부끄러웠다. , 이걸로 머리를 틀어 올려서 고정시켜. 아름다운 부위를 가리면 안 되니까. 커다란 나비의 것이 분명할 흐린 물색의 머리끈으로 여자는 머리를 묶어 올렸다. 걱정할 것 없어, 날개처럼 양 팔을 벌려봐. 여자의 아버지는 신중한 눈으로 여자의 몸을 훑었다. 그리곤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겨드랑이 가까이의 팔뚝 안쪽 살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연한 살은 쉽게 여자에게 촉감을 전했다. , 예쁘다. 그래, 아직 예쁜 부분이 남아있구나. 기특하다.

 

, 하는 만족스런 아버지의 감탄사는 아주 오랜만에 들어보는 것이었다. 여자는 감격으로 눈 안쪽이 뜨겁고 축축해져서 눈을 감았다. 아버지의 숨소리는 여자와 달리 세찬 바람소리를 내며 콧구멍에서 새어나왔다. 아버지는 좋은 구도를 잡기 위해서 뜸을 들였다. 그녀를 좀 더 예쁘게 다듬기 위해서 아버지는 여자의 몸을 찰흙처럼 부드럽게 반죽했다. 차가운 바닥에 여자의 엉덩이가 닿고 등뼈와 뒤통수가 닿았다. 찬 기운은 설레고 시원하게 느껴졌다. 살이 닿는 부분의 바닥은 오히려 곧 온기로 미지근해졌다. 다만 뒤통수만이 좀 시리다고 느껴질 때쯤, 잠가놓았던 촬영실 문을 열고 누군가 들어왔다.

 

여자는 천천히 눈을 떴다. 팔에 닿는 여자의 반대편 손바닥은 끈적끈적한 것이 바짝 말라붙어 거칠한 느낌이었다. 팔을 움직이자 바닥에 말라붙은 포도 씨에 팔뚝 살이 쓸려 따가웠다. 여자는 포도 껍질에 미끄러졌다가 다시 바닥을 짚고 허리를 일으켜 앉았다. 복부에 거북하고 답답한 느낌이 심했다.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을 할 수도 없었다. 여자는 과식했던 지난밤을 생각했다. 거실 벽시계 큰바늘은 이미 한 시를 지나있었다. 여자는 이미 출근할 기분이 아니었다. 어차피 회사 어느 자리에 앉아있더라도 남자는 여자와 눈 한번 마주치지 않을 것이다. 여자는 창가의 항상 같은 자리에 놓인 화초 화분 같은 것이어서 대부분 그녀의 빈자리를 크게 느끼지 못할 것이다.

 

여자는 화장실에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언제나 홀쭉해서 허리띠가 남아돌던 그녀의 복부가 팽팽하다. 팽팽한 정도가 아니라 눈에 띄게 도드라져있다. 그러나 일단 참기 힘든 요의가 자꾸만 밑으로 쏠려서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팬티를 내리고 변기에 앉은 여자는 순간, 짜릿함과 함께 가볍게 몸을 떨었다. 녹녹하고 미지근한 지린내가 변기에서 올라온다. 그녀는 팬티에 달라붙은 생리대가 새하얀 것을 보곤 다리를 좀 더 벌려 다리 사이로 변기 안을 들여다보았다. 오랜 잠에서 깨어나 누는 오줌은 빛깔이 진했다. 그러나 변기 안에는 가라앉은 핏물이 조금도 없었다. 생리를 시작한 지 오늘이 이틀 되는 날이었다. 보통 그녀의 생리 주기는 일주일을 조금 넘는다. 이틀째는 핏물의 농도와 그 양이 가장 많은 날이었다. 희한한 일이다. 여자는 고개를 더 숙여 변기 안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아무리 몸이 안 좋은 날이어도 하루만에 생리가 끝나지는 않았다. 여자의 생리 혈은 유난히 핏빛이 진하고 철분 냄새가 비릿하고 지독했다. 그녀가 자전거 보조 바퀴를 빼고 처음으로 신나게 집 앞 거리를 달렸던 날, 안장에서 내리던 순간의 그 냄새를 여자는 잊을 수가 없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공포였다. 지독한 냄새와 함께 분홍색의 안장에는 붉은 핏물이 덕지덕지 말라붙어 있었다.

 

이제는 거리를 걸을 때에도 얌전하게 걸어야 해. 어머니는 물에 락스를 풀어 여자의 치마를 담그며 말했다. 여자는 그 독한 소독내에 코를 틀어막으며 화장실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대야에 물이 점점 묘한 색으로 오염되는 것을 구경하며 여자는 어째서? 하고 생각했다. 남자애와 너무 가까이에 앉거나 몸싸움을 하며 장난을 치는 것도 안 돼. 어째서? 여자는 날이 갈수록 목소리가 거칠게 변하는 남자애들이 좋았다. 어머니는 얼룩덜룩한 여자의 치마를 건져내며 한숨을 쉬었다. 어머니의 목소리는 너무 작아 잘 들리지 않았다. 잃는 건 쉬워. 너무 쉬워. 대야에서 쏟아진 불그죽죽한 구정물이 하수구로 끌려들어갔다.

 

여자는 화장실에서 나오자마자 냉장고 문을 열었다. 뭔가 시원한 것으로 배를 채우고 싶었다. 이미 불룩한 배는 무언가를 채워 넣지 않아도 충분해보였지만 여자는 충분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시원한 냉기가 피어나왔다. 여자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싱그러운 포도 향이 살랑살랑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여자는 간밤에 사온 포도들을 야채 칸에 넘치도록 넣어놓은 것을 기억해냈다. 기쁜 마음으로 야채 칸을 열었다.

 

촬영실 문을 열고 들어온 나비의 손에는 보온 도시락 통이 들려있었다. 흰색 털실로 짠 목도리를 칭칭 감고 있었다. 아버지가 흰 원피스를 좋아한다는 것을 나비도 알고 있었을까. 혹시 아버지는 나비를 허벅지에 앉히고 머리를 쓰다듬어주진 않을까. 여자의 자리였던 그 허벅지 위에.

 

그 짧은 순간 여자는 그런 생각들을 하며 나비를 올려다보았다. 나비의 손에서 그 묵직한 도시락 통이 턱, 무겁게 떨어졌다. 그제야 여자의 아버지는 여자의 가랑이 사이로 집어넣었던 손가락을 천천히 빼내며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의 뺨에서 목을 타고 주륵, 빠르게 진물 같은 게 흘렀다. 밑에서 올려다보는 아버지의 눈동자는 축축함으로 번들거렸다. 전에 본 적 없는, 잔뜩 일그러진 아버지의 입술이 힘겹게 열렸다. 딸애가 변했어아버지의 목소리가 너무도 애처로워서 여자는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그 귀엽던 딸애가창녀처럼 달려들었어.

 

냉장고 경고음은 지친 듯 끊어졌다. 불 꺼진 냉장고 앞에 앉아서 여자는 훅, 숨을 내쉬었다. 아예 부엌 바닥으로 들어낸 야채 칸 안에는 이제 포도 가시만이 잔뜩 남아있다. 야채 칸 구석에 떨어져 박힌 포도 한 알을 떼어내 입속에 넣는 것을 끝으로 이제 포도 알은 흔적도 없이 모두 사라졌다. 그녀는 무심결에 동그란 언덕 같은 배 위에 왼팔을 걸쳤다. 몰라보게 부풀어 오른 뱃속에서 미미한 진동이 느껴졌다. 여자는 두 손바닥을 청진기처럼 배 위에 올렸다. 여자의 심장박동과는 또 다른 소리였다. 다른 것이 살아있는 소리였다. 여자는 놀라지 않았다. 그 일정한 울림은 여자가 여태 들어본 어느 소리보다 평온하고 아름다웠다. 여자는 조심스레 배 위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그녀는 뱃속에 가득 들어찬 그 무언가가 아주 싱싱하다는 걸 느꼈다. 여자는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여자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남자는 아, 하고 그녀의 존재를 인식했다. 여자는 침을 삼켰다. 그리고 울컥 넘어오는 감격을 삼켜내며 그녀가 낼 수 있는 가장 예쁜 목소리로 말했다.

 

"내 뱃속에서 뭔가 새로운 것이 꿈틀거려요!"

 

남자는 잠시 말없이 있었다. 여자는 그 시간을 얌전히 기다려주었다. 남자는 여자의 뱃속에 무언가가 둥지를 틀었다면 그것이 남자 자신의 씨앗일 것을 알았다. 남자는 갓난아이까지 합해서 애가 셋이다. 남자는 찡얼거리는 애 울음소리에 밤을 지새웠던 순간들이 머릿속에 빼곡하다.

 

"병원에 가. 떼어버려. 돈을 줄 테니까."

 

미스 안, 남자는 그녀를 부르고는 훅 콧김을 불었다. 여자의 귀에 닿은 수화기에서 콧김이 시끄러운 소음으로 부서졌다.

 

"혹시, 뭔가를 바란다거나. 쓸데없는 생각일랑 하지도 마."

 

알아들어? 왜 대답을 안 해? 여자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여자는 아직 그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지금 뱃속에 있는 무언가는 매우 싱싱하다. 새롭다. 남자를 충분히 만족시킬 것이다. 남자는 지금 이 싱그러운 느낌을 몰라서 하는 소리다. 여자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몰라서 입술을 벙긋거리고만 있었다. 남자는 작게 욕지기를 뱉어냈다.

 

"좋아, 지금은 바쁘니까 액수는 나중에 협상해. 너도 똑같아. 요물 같은 년."

 

여자는 끊긴 전화기를 들고 뚜 뚜 뚜 이어지는 소리를 멍하니 들었다. 남자는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여자는 숨 쉬기가 버거워 블라우스를 벗었다. 브래지어 버클도 끌렀다. 골반 밑을 꽉 조이는 치마도 벗고 뜯어지기 일보직전인 팬티스타킹도 뜯어냈다. 고무줄이 극한까지 늘어난 팬티를 마지막으로 벗고 나니 여자는 홀가분해졌다. 부풀어 오른 배와 가슴은 그 경계가 모호했다. 이대로 조금만 더 부풀면 몸매가 둥그렇고 부드럽게 이어질 것이다. 분명 뱃속에는 싱그러운 알맹이들이 옥시글거리고 있을 것이다. 역시 껍질과 함께 씨앗까지 모두 먹기를 잘했다. 그 자잘한 알갱이들은 모두 제각기 탱글탱글 잘 여물 것이다. 더 부풀려서여자는 뭔가 더 채울 게 없을까 냉장고를 올려다보았다.

 

냉장고 중앙 칸에 석류 한 알이 오롯이 담겨있다. 여자는 냅다 팔을 뻗어 석류를 쥐었다. 불그스름한 빛깔이 처녀의 뺨처럼 새치름하니 비밀스럽다. 여자는 속삭이듯 벌어진 석류의 입가에 양 손가락을 집어넣어 벌렸다. , 겨우 금이 갔다. 과도는 거실 바닥에 떨어져있었다. 거기까지 기어가기에 여자의 몸은 이제 너무 무거웠다. 여자는 더 악력을 주었다. 그러던 중 배꼽 부근이 못 견디게 간지러워져 배꼽을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심하게 튼 자신의 배꼽은 한겨울에도 본 적이 없었다. 여자는 마치 곧 피어날 꽃봉오리처럼, 심하게 불거져 나온 참외배꼽을 구경했다. 여자는 그녀의 가느다란 검지로 슬쩍 배꼽 위를 어루만졌다. 근질근질한 기운을 참기 힘들어졌다. 결국 여자는 살살 배꼽 위를 긁다가 어느 순간 강하게 손톱에 힘을 주었다. 투득! 살이 뜯어지는 소리와 함께 그녀는 반사적으로 배를 움켜쥐었다. 뱃속에 가득 차있던 것이 와르르 쏟아지는 소리를 들었다. 시큼하고 달달한 향이 그녀를 에워쌌다. 안 돼, 잃으면 안 돼. 그녀는 잔뜩 몸을 웅크렸다. 동그란 공처럼. 아무것도 잃지 않기 위해서 안간힘을 썼다. 허벅지로 배를 꾹 막은 상태로 다리를 꾹 감싸 안았다. 그녀의 몸은 거친 손바닥들이 전해주던 뜨거운 체온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의 팔목을 잡아 올리고 허벅지 살을 밀어젖히던 강한 아귀힘은 금세 그녀를 지치게 하곤 했다. 그러나 지금 스스로를 감싸 안은 팔은 매우 여리고 온기마저 미지근했다. 앙상한 종아리를 휘감은 그녀의 팔이 얇디얇은 끈처럼 그녀를 상냥하게 휘감았다. 그녀는 생각했다. 나는 내 안에 포근히 담겨본 적이 있던가. 어느 순간 그녀는, 온 몸에서 울리는 스스로의 심장박동을 들으며 마음 속 소란이 잠잠해 지는 것을 느꼈다. 심장박동은 느린 클래식처럼 그녀의 귓가로 흘러들었고 그녀의 머리통과 팔뚝과 발은 천천히 쪼그라들고 있었다. 그녀는 혈관을 흐르는 핏물 색이 점점 흐려지고 있는 것을 알았다. 눈을 감고 있어도 알 수 있었다. 비로소 그녀가 진정 새로워지고 있다는 것을.

 

처음에 남자는 그녀가 싱그러운 사과 같아서 그녀를 꾀었다. 조금씩 상해서 지금처럼 짓무르기 전에 빨리 여자를 버렸어야 했다. 모름지기 여자는 싱싱함이 생명이다. 남자는 여자의 집 앞에 주차를 하곤 바닥에 가래침을 뱉었다. 너무 많은 돈을 원하면 싸대기를 몇 대 갈겨서라도 수술실로 끌고 갈 것이다. 하지만 남자가 알고 있는 여자는 꽤 순한 편이어서 그렇게까지 하지 않고 조금만 겁을 줘도 될 것이다. 아무리 초인종을 눌러도 대답이 없다. 남자는 괘씸해져 현관문을 몇 번 발로 뻥 뻥 찼다. 그러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문고리를 돌렸는데 너무도 쉽게 현관문이 열렸다. 그녀는 참 헤프다. 혼자 사는 주제에 문도 잠그질 않았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과일 썩은 내가 진동을 했다. 남자는 코를 틀어막고 안으로 들어섰다. 꼭 남자의 아내가 생리를 할 때 화장실에 뿌리던 향수 냄새 같았다. 비릿하고 어딘가 달큰한 냄새는 남자를 숨 막히게 했다. 거실 바닥에 지저분하게 포도 씨와 껍질, 먹다 남은 사과, 장미 꽃잎과 같은 쓰레기가 널려있다. 남자의 눈에 익숙한 과일 바구니가 비어있다. 저걸 혼자 다 먹은 건가? 돼지 같은 년. 남자는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냉장고 문이 열려있다.

 

"혹시 거기 있어?" 남자는 냉장고 문 쪽으로 다가간다. 냉장고 칸이 밖으로 나와 있고 포도를 먹고 남은 찌꺼기들이 널려있다. 더러운 광경에 남자는 눈가를 찌푸렸다. 대체 어딜 간 거지? 발걸음을 돌리려던 남자는 다시 냉장고 쪽으로 가까이 갔다. 더러운 과일 찌꺼기들 사이에서 무언가 반짝였다. 이게 뭐지? 보석인가? 남자는 눈을 크게 뜨며 허리를 숙였다. 남자의 눈이 닿은 곳에는, 새하얀 박하사탕 한 알이 오롯이 빛나고 있었다.

 

 



[당선소감]

"가난한 문장 거닐더라도 소설 마주할 것

 

새벽은 어린 신처럼 광폭하고 편협합니다. 잠든 이의 어깨에는 이슬비처럼 포근히 내리면서, 깨어있는 이의 어깨에는 세상 모든 고민을 끌어다 놓습니다.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 새하얀 모니터 화면 앞에 앉아 야릇한 박자로 점멸하는 커서를 보고 있자면, 한순간 나는 바보천치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몇 줄의 문장을 바라보는 내 시선은 승용차 사이드미러가 되었다가 옷가게의 기다란 오목거울이 되기도 합니다. 급기야 참을 수 없는 답답함에 모든 글자를 지워버리게 만듭니다.

 

참 이상하죠. 소설을 쓰지 않으면 급체한 듯 가슴속이 답답하지만, 막상 소설을 쓰기 시작하면 뾰족한 가시 하나가 가슴 끝에 꽂힌 것처럼 따끔하기까지 하니 그 답답증은 더욱 커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을 계속 쓰는 이유는 그 씁쓸함 속에 담긴 한 방울을 쾌락이 너무나도 달콤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사랑'이라는 단어를 넣지 않고 러브레터를 쓰는 것이 바로 문학이라고들 말합니다. 사랑을 고백하기 바로 1초 전의 순간이 세상 가장 행복한 순간인 것처럼, 나는 새하얀 화면을 마주한 그 순간을 참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소설을 흠모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짝사랑의 고수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다른 이가 써놓은 대작에 짜릿하게 전율하고 뜨겁게 질투하며 새벽을 뜬 눈으로 지새우고 나면, 어김없이 내게도 구애의 순간이 옵니다. 사랑하는 마음은 늙지 않는다는 과학적 결과처럼 내 마음은 철없이 어리고 유치하기 때문에 두려움과 창피를 모릅니다. 미약(媚藥) 같은 새벽의 마법이 풀리고 또렷한 아침이 오면 유리 구두를 잃은 맨발로 가난한 문장 사이를 비척비척 거닐게 될지라도, 나는 결국 또 소설 앞에 마주 앉게 됩니다.

 

할 수만 있다면 심사위원님들의 눈으로, 교수님의 눈으로, 동기의 눈으로, 엄마의 눈으로 내 소설을 읽어보고 싶습니다. 편식하는 제 숟갈 위에 생경한 반찬을 올려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맛있게 먹고 제대로 소화하겠습니다. 튼튼한 소설 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약력

1989년 수원 출생. 현 서울거주

수원여자고등학교 졸업

추계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심사평] 김용만·방민호

"현대 여성의 내밀한 심리 잘 그려낸 수작"

 

이번 경인일보 신춘문예에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작품들은 심사자들을 놀라게 했다. 무엇보다 수준이 아주 높았기 때문이다. 예심에서 열 편이 올라왔는데, 이 가운데 세 편 정도는 어디 내놔도 손색이 없을 정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니 이번 신춘문예에 당선되지 못한 그 몇 분은 절대 낙심하지 말고 더 정진해서 소설가로서의 길을 잃지 말기 바란다.

 

본심에 올라온 작품 가운데 두 사람의 심사자가 마지막까지 눈여겨 본 작품은 손솔지의 '한 알의 여자', 허윤실의 '미러', 조미해의 '마스카라', 김개영의 '봄의 왈츠', 김소연의 '루시드 드림' 등 다섯 편이다.

 

'봄의 왈츠''루시드 드림'은 작품을 쓴 사람들의 사회학적 상상력이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봄의 왈츠'는 일종의 상황극인데, 직업 세계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문제를 교수 또는 학교사회에서 찾아 압축적으로 제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고, '루시드 드림'은 요즘 젊은이들의 꿈과 희망과 절망을 하나의 예로써 제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봄의 왈츠'를 쓴 사람은 문장 수련이 이미 잘 되어 있는 반면 '루시드 드림'의 작가는 아직 더 많은 정진이 필요하다. 두 작품 모두 소설 속 사건이 하나의 예시 이상으로 퍼져나가는 울림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깊이 논의하지 않고도 두 사람은 모두 '한 알의 여자'를 단연 당선작이라고 보았다. 당선작인 '한 알의 여자'는 우선 문장이 탄탄하다. 생략, 압축 등 감정의 절제를 통한 미적거리를 확보, 상징과 은유 등 미학적 장치를 통한 품격 제고, 장면 전환의 능숙한 솜씨 등이 무척 돋보인다. 삽화 또한 명료하고 참신한 압축미로 작품 형상화에 공헌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 작품을 쓴 이는 이 시대가 어떤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고 있는지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한 여성 인물의 짓눌리고 변형된 자아 정체성을 통해 남성 중심적 세계를 살아가는 현대 여성의 내밀한 심리를 드러낸 그 안목을 높이 살 만했다.

 

만만찮은 작품을 선보인 당선자에게 축하를 드리며 문학에 정진해 주실 것을 당부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