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천국으로 가는 계단 / 박기눙


마지막으로 발레슈즈를 벗고 남자는 알몸으로 무대에 섰다. 직선으로 쏟아지던 핀 조명이 꺼지고 남자는 깜깜한 무대에 남았다. 처음 무대에 섰던 날처럼 심장소리가 귀 밑에서 울렸다. 남자는 조용히 숨을 가다듬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찰나의 어둠, 남자가 지독히 싫어하는 순간. 어둠속에서 가운을 집는 남자의 손길이 다른 날보다 빠르다. 정육점 진열장처럼 붉은 홀이 눈에 들어왔다. 여자가 있어서 다른 때보다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남자는 홀 구석진 곳, 테이블에 앉아 남자를 줄곧 지켜봤을 여자의 표정을 떠올렸다.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허리를 구부려 바지를 입는 동안 스팽글을 촘촘하게 단 팬티가 드러났다. 바지의 밑단이 발목에서 출렁거렸다. 남자는 무대와 연결된, 몇 개 안 되는 계단을 내려왔다. 박수소리가 유난히 작았던 오늘. 남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남자는 분장실에 들어와 땀을 닦았다. 오늘따라 얼굴이 더 번들거렸다. 검은 눈썹 자국을 지우고, 입술에 남은 펄을 휴지로 닦았다. 남자는 가운을 벗고 땀에 젖은 몸 위로 하얀 셔츠를 입었다. 까무잡잡한 속살이 하얀 셔츠에 배어나왔다. 

무대의상을 벗기 전에 흥건해진 겨드랑이 때문에 손님들은 야유를 보냈다. 무대에 나가기 전 데오도런트를 뿌렸는데도 소용이 없었다. 무심코 본 거울 한 구석에서 남자의 귓불에 박힌 작은 사파이어 귀고리가 반짝거렸다. 헝클어진 머리칼을 한 손으로 쓸어 넘기는 남자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머리칼 사이에서 나온 땀이 손에 묻어 나왔다. 맨발에 구두를 신고 나서 남자는 마지막으로 거울 속의 자신을 확인했다. 

홀은 소음으로 꽉 차 있었다. 그새 차오른 땀이 인중에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남자는 코언저리를 쓰윽 문질러 바지 솔기에 닦았다. 홀 구석에 앉은 여자가 손짓을 했다. 남자는 둥근 테이블을 여러 개 건너 여자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남자를 보고 애써 웃음 짓는 여자의 눈이 젖었다. 남자가 여자를 처음 봤을 때처럼.

“다른 사람 같아요.”

여자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남자는 잠자코 무대를 바라봤다. 여자 무용수가 걸어 나와 스탠바이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색소폰이 독주를 하는 재즈 음악이 흐르고 드라이아이스가 낮게 깔렸다.

빠밤

커다란 소리에 맞춰 핀 조명이 여자 무용수를 잡았다. 한줄기 빛, 조명이 밝아진 무대 아래 여자무용수가 얼굴을 치켜들고 있었다. 여자의 빨간 입술이 도드라져 보였다. 무용수 뒤로 은빛 봉이 차갑게 빛났다. 여자는 남자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남자는 는 여자를 애써 외면했다. 남자의 공연의상을 고르느라 온 시장을 다 뒤졌을 여자의 아픈 다리를 어젯밤에 외면했듯이. 

‘드디어 남자의 쇼를 보러 간다.’ 

남자가 처음으로 여자에게 자신의 쇼를 보러오라고 했다. 여자가 골라주는 의상을 입고 무대에 오르고 싶다고 했다. 남자가 그 말을 했을 때 여자는 뒤돌아서서 남자를 쳐다봤다. 남자는 여자의 얼굴을 응시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텅 빈 남자의 집엔 햇살이 거실까지 가득했다. 여자는 냉장고 문을 열었다. 반찬통이 여자가 쌓아 놓은 그대로다. 닭가슴살 통조림이 가지런히 한쪽에 쌓여 있었다. 반찬통을 열어 냄새를 맡던 여자가 손을 코에 갖다 댔다. 

‘오디션이 사람 잡겠네.’

여자는 묵묵하게 냉장고를 채우고 반찬통을 바꿨다. 가끔, 아주 가끔 여자가 끓여다 넣어준 곰국이 없어지곤 했다. 우족을 끓이면 옅은 거품이 위에 떴다. 핏물을 충분히 빼도 그랬다. 한소끔 끓이면 물을 넣었던 선을 경계로 찌꺼기가 생겼다. 냄비에 테를 두른 듯 곰국 찌꺼기는 잘 떨어지지 않았다. 여자는 세차게 쏟아지는 수돗물에 냄비를 말끔하게 씻었다. 가는 솔로 뼈다귀에 붙어있는 찌꺼기를 닦아낸 후 물을 받아 푹 고았다. 그제야 아기 속살처럼 뽀얀 국물이 올라왔다. 여자는 남자의 냉장고에 여자의 마음을 채우듯 곰국을 넣었다. 잠시 국물이 출렁거리더니 얌전해졌다. 

여자는 남자의 방문을 열었다. 분홍빛 니트가 뱀 허물처럼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니트를 집어 드는데 팬티가 방바닥에 떨어졌다. 황금돼지가 그려진 팬티. 여자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재복이 붙고 팔자가 필거라는 속옷 가게 아줌마의 말을 믿지 않더라도 남자에게 입히고 싶었던 팬티. 여자는 다림질까지 해서 옷장 잘 보이는 곳에 두었지만 한동안 그대로였다. 오디션을 보러갈 때 꼭 입으라고 했을 때 씩 웃고 말던 남자였는데. 여자는 세탁 바구니에 분홍색 니트와 팬티를 던졌다. 

얇은 실크와 레이스, 스팽글이 많은 옷은 다리미 열에 민감했다. 온도가 낮으면 구김이 펴지지 않았고, 높으면 가느다란 줄이 생겼다. 뒤집어서 다려야 탱글탱글 윤기가 흘렀다. 남자는 셔츠 어깨부터 소매까지 빳빳하게 줄이 서도록 다려야 입었다. 땀을 빼며 다린 셔츠를 남자가 다시 다림질할 때 여자는 남자의 집을 나와 버렸다. 한동안 여자는 남자의 집에 가지 않았다. 

빌딩 꼭대기 층 나이트클럽의 네온간판이 반짝이기 시작하는 퇴근시간, 남자가 여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둘은 말없이 걸었다.

“미안해.”

남자는 앞만 본 채 말했다.

“그거 알아, 제자리에 있는 사람이 가장 무섭다는 거?”

여자가 남자의 눈을 똑바로 보면서 말했다. 고개를 숙이고 구두코로 바닥을 긁던 남자가 여자의 손을 꼭 잡았다. 

어제, 의상을, 남자가 맨 마지막에 벗을 무대의상을 준비해달라는 말을 듣고 여자는 시장을 다섯 바퀴나 돌았다. 하얀 형광색 실크 팬티와 빨간 스팽글을 사왔다. 한 올의 실에 매달렸던 스팽글이 여자의 손길에 따라 제 빛을 찾아 반짝거렸다. 여자의 손에 자꾸 땀이 찼다. 젖은 스팽글은 여자의 손에 딱 달라붙어 바느질하기가 쉽지 않았다. 

여자는 남자가 무대에 있는 동안 집에 촛불을 켜놓는다. 촛불을 바라볼 때 여자는 이상하게 차분해졌다. 끊임없이 일렁이면서도 촛불은 집중하게 만드는 힘도 가졌다. 불꽃은 이리저리 흔들리다가도 얼른 중심으로 되돌아왔다. 홀로 억지를 부리지 않고 심지를 꼿꼿이 세운 촛불. 촛농이 흐르는 시간동안 남자는 무대에 홀로 남겨지겠지. 한 겹 남은 옷자락을 벗어 던질 때 남자는 무슨 생각을 할까. 홀로 무대를 지켜야 하는 순간. 찰나를 지나고 억겁을 돌아 나온 영원의 시간을 느낄지도 모른다고 여자는 생각했다. 허공을 바라볼 남자는 ‘허공’이 숫자의 크기를 나타낸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찰나보다 더 짧은 시간이라는 것을 알까. 찰나의, 아니 허공의 몇 십 배 되는 시간이 흐른 정적 후 휘파람을 불어 자신의 허세를 드러내는 사람과 침을 삼키면서 자신의 소심함을 드러내는 사람. 외면하면서 호기심을 감추는 사람들 속에서 가운을 집어 들 때 남자는 어떤 심정일까. 스팽글을 꿰던 여자가 짧은 비명을 질렀다. 집게손가락에 깨알만한 핏방울이 금세 맺혔다.

여자는 방송국과 영화, 광고에 엑스트라와 단역배우를 전문으로 출연시키는 캐스팅 에이전시에서 일했다. 여자는 드나드는 낯선 사람들 속에서 붙박이 가구처럼 사무실을 지키는, 한 명 밖에 없는 여사원이었다. 회사 복도에 안내표를 붙이고, 너덜거리는 테이프를 떼어내고, 전화를 주고받고, 일회용 봉지커피를 수시로 채워놓고, 생수를 배달시키는, 누가 하든 상관없지만 도맡아 할 사람이 있으면 편한 일이 여자의 일이었다.

배우의 꿈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다양했다. 언젠가 열렬한 관객의 호응을 받으면서 노랠 부를 날을 기다리는 무명가수처럼 사무실에 찾아오는 이들도 각자 다른 꿈을 꿨다. 배역과 아무 관련도 없는 대본을 들고 오거나, 꾸깃꾸깃한 옷을 입고 오는 사람에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고 스타라도 된 듯 머리부터 발끝까지 성장을 하고 나타나는 이들도 있었다. 몇 줄 되지 않는 대본을 제대로 읽지도 못하는 사람, 춤을 춰보라고 하면 무술을 선보이겠다고 고집부리고, 사장에게 애교를 부리는가 하면 뭐든 시키는 일은 다 한다고 호기를 부리는 따위의 별별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회사가 원하는 기준은 간단했다. 참을성이 있는 성격인지가 중요했다. 옛날에 무슨 일을 했는지도 상관없었다. 그저 고분고분 말 잘 듣는 사람이면 족했다. 

단역배우는 맡은 역할에 따라서 대사가 한마디라도 있는 배우이고, 엑스트라는 그저 배경으로 쓰이는 사람을 말한다는 것을 여자는 이 회사에 와서 알았다. 엑스트라일지 단역배우일지 정하는 것은 회사가 아니고 현장을 총괄하는 스태프였다. 너무 잘생기면 화면에서 튀었고, 못생겨도 눈에 띄어서 스태프들이 싫어했다. 적당히 평범하고, 적당히 잘생기고, 현장에서 오랫동안 불평 없이 기다리는 참을성과 전화를 했을 때 즉각 달려올 수 있는 사람이면 충분했다. 사장은 아무나 뽑지 않는 것처럼 오디션을 봤다. 발음이 좀 되는지, 경력이 얼마나 되는지를 물어봤다. 여자는 사장의 한마디에 조심스럽게 대답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회사가 원하는 사람을 알려주고 싶었지만, 여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사장이 여자의 침묵을 인정해주고 나서였는지도 몰랐다. 일을 벌이고 치러나가는 것을 좋아하던 사장이 빌딩 꼭대기 층의 나이트클럽까지 인수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생리가 시작되려는지 허리가 뻐근했다. 머리는 띵하고 무엇에 눌린 듯 무겁고, 가슴은 슬쩍 부딪혀도 아플 정도로 딱딱하게 굳어지고, 아랫배는 평상시보다 더 무지근했다. 출근하던 아침부터 기분이 롤러코스터를 타듯 오르락내리락 제멋대로였다. 입안이 텁텁하고 시큼한 냄새가 트림과 함께 올라왔다. 비상계단에 쪼그리고 앉아 잠시 쉬던 여자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얼굴을 묻고 여자는 한참을 흐느꼈다. 

어둑한 계단이 사선으로 밝아지더니 어떤 남자가 들어왔다. 잠시 주춤거리던 남자가 계단을 내려왔다. 여자는 빠르게 눈가를 훔쳤다. 여자와 남자의 눈이 얽혔다. 그것도 잠시, 남자가 그대로 뚜벅뚜벅 걸음을 옮겼다. 여자의 눈이 계단을 내려가는 남자의 발에 머물렀다. 가느다란 은빛 발찌가 여러 겹으로 흔들렸다. 아래층 비상문을 여는 소리가 났다. 이어서 쾅하고 닫히는 소리. 다시 고요해지자 여자는 엉덩이를 계단에 걸치고 앉았다. 여자의 블라우스 자락이 허리춤에서 가늘게 떨렸다. 점심시간이 끝났는지 웅성거리면서 올라오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나자 여자는 얼른 일어섰다. 여자는 화장실에서 파우더를 덧발랐다. 거울 속에 얼굴만 뽀얀 여자가 떠있었다. 지루한 장마가 시작되려는 여름이었다.

남자는 눈길이 얽혔던 짧은 순간, 여자가 가지고 있는 어둠이 낯설지 않았다. 계단을 내려오는 동안 남자는 처음 본 여자를 생각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는 아픔을 간직한 여자처럼 보였다. 가슴 한구석에 날이 시퍼런 칼날을 깊숙이 숨기고 사는 여자처럼 보였다. 여자와 계단에서 마주치게 되리라는 것도 몰랐지만 여자의 젖은 눈을 볼 줄이야. 눈자위가 붉게 물들었던 여자의 얼굴. 문을 닫으면서 힐긋 본, 눈동자보다 더 흔들리던 여자의 어깨가 남자의 품을 파고들었다. 

‘젠장.’

남자는 우는 여자들에게 약했다. 눈물이 많은 편도, 동정심이 많은 편도, 그렇다고 마음이 약한 편도 아닌데 이상하게 그랬다. 언젠가부터 우는 여자 앞에선 나오던 말도 들어가고, 아무런 말도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눈이 붉게 물드는 여자들만 봐도 남자는 가슴이 답답했다. 여자들은 애초부터 침묵하는 남자를 견딜 마음이 없었을지도 몰랐다. 말을 안 하는 것이라 마음이 없는 거라고 제멋대로 생각하고 떠나갔다. 뒤늦게 하소연해봤지만 남자는 여자들이 듣고 싶은 말을 알 수 없었다. 뭐든 말로 해주기를 원하는 여자와 할 말을 찾아내지 못하는 남자는 애초에 다른 결승점을 향해 달려가는 것인지도 몰랐다. 무관심과 침묵은 엄연히 다른데 여자들은 똑같이 생각했다. 눈물을 보이고, 서운해 하고, 제멋대로 생각해버리는 여자들을 만나는 일이 언젠가부터 지겨워졌다.

색소폰이 울리고, 조명이 붉어지면 실바람에 커튼이 날린다. 화면 속 샹들리에가 빛날 때 영화 속 남녀는 뒤엉켜 옷을 벗기고, 살을 부비고, 입을 맞추고, 함께 스러진다. 여배우의 머리카락이 천천히 흔들리고,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눈을 감은 여배우가 남자 주인공의 손길을 느낄 때 남자는 영화 속 주인공이 된다. 남녀가 규칙적으로 흔들리고 신음을 흘릴 때 남자는 그들과 함께 타오른다. 영화 속의 여자들은 울지 않는다. 이별할 때조차 남자에게 캐묻지 않고 질척이지 않는다. 남자는 영화의 텔롭을 끝까지 보고 텔레비전을 껐다. 남자의 얼굴이 시커먼 액정유리에 비쳤다. 물끄러미 남자가 마주본다. 둘 다 표정을 들키지 않는다. 남자는 전리품처럼 뒹구는 하얀 휴지를 손으로 뭉치면서 일어섰다. 달빛이 블라인드 결을 따라 바닥에 수직으로 떨어졌다.

남자의 꿈은 발레리노였다. 중학교 1학년 무렵이던가. 처음 무용학원에 간 날, 남자는 흰색 타이즈를 신었다. 벽 한 면이 거울인 무용실은 불룩 솟아있는 남자의 앞부분을 숨겨주지 않았다. 동작을 엉거주춤하게 하는 남자에게 선생은 당분간 타이즈 위에 헐렁한 반바지를 입으라고 했다. 몸을 유연하게 푸는 클라스를 하는 내내 남자의 얼굴은 여러 차례 붉어졌다. 기본동작을 배우는 동안 남자의 시선은 자꾸 아래로 향했다. 

바워크가 끝나고 센터워크를 하는 동안 남자를 힐끗 쳐다보는 여자 아이들이 많았다. 어느새 남자는 그 눈길이 싫지 않았다. 타고난 무대 체질이라고 생각한 것은 그때였을지도 모른다. 남자는 온 몸을 써서 움직이는 춤이 좋았다. 그중에서 발레가 제일 좋았다. 차이코프스키 음악이 가득 흐르는 무대, 가볍게 무대로 뛰어나와 눈부시게 하얀 튀튀를 입은 여자 무용수를 사뿐히 올리는 발레리노를 꿈꾸었다. 브라보 대신 남자무용수에게 바치는 브라바를 외치는 관객은 매력적인 보너스였다. 힘들고 고달픈 연습 시간, 여자무용수들 사이에선 얼마나 많은 발톱이 빠지고 새로 나는지를 경쟁했다. 납작한 발레 슈즈를 신은 남자무용수들은 오로지 발 자체만으로 곧추서야 하는 움직임이 많았다. 발가락과 발등의 뼈가 아팠지만 남자는 발레슈즈의 가죽바닥이 닳도록 춤을 추었다. 근력을 키우는 일에 남자는 애를 썼다. 남자의 허벅지가 나날이 굵어졌고 팔과 어깨의 근육이 탄탄해졌다. 발레리나를 받쳐 올리는 남자의 허리가 잘록하게 보였다. 공연 리허설이 다가왔다. 견딜 수 있는 한계 이상으로 몸을 쓰다 보니 아픈 데가 많이 생겼다. 집으로 돌아와 발목을 감싸고 허리에 냉찜질을 했지만 개운해지지 않았다. 무지근하게 올라오는 통증 때문에 자는 내내 이리저리 뒤척였다. 

어느 날, 발레리나를 들어 올리는데 팔이 저리고 손목에 힘이 빠졌다. 오른쪽 팔이 어깨 높이에서 더 이상 올라가지 않았다. 목 디스크였다. 남자는 주인공이 될 수 없었다. 자신보다 엘레바시옹을 높게 하지 못하던 후배가 주인공 역할을 꿰찼을 때 남자는 발레단을 스스로 그만두었다. 

나이트클럽 사장은 발레를 했다는 남자에게 호기심을 보였다. 남자는 일부러 몸매를 드러내는 하얀 스키니 진 바지에 빨간 실크셔츠를 입고 사장을 만나러 갔다. 사장은 남자의 긴 다리를 훑더니 춤을 춰보라고 했다. 남자는 준비한 음악을 틀었다. 바이올린 소리가 높게 홀에 울렸다. 앞으로 나가면서 연속 턴하는 삐께, 한발을 딛고 다음 발로 감아 도는 플리에, 업을 반복하며 도는 턴, 한 다리는 뒤로 올리고 다른 다리로 몸을 지탱하면서 올린 다리의 무릎을 90도로 굽히고 도는 아티튀드, 한쪽 다리는 마치 던지듯이 공중에 날리면서 다른 다리로 이어가는 동작인 주테까지 남자는 쉬지 않고 춤을 췄다. 사장은 다리를 꼬고 앉아 남자를 쳐다봤다. 마지막으로 남자는 두 팔을 오므려 손은 가슴께에 댔다가 다시 쫙 펴는, 발레리노가 프리마돈나를 보고 사랑을 고백하는 발레마임으로 끝을 냈다. 남자의 등과 귀밑머리에 땀이 차올랐다. 가슴이 빠르게 부풀었다 잦아들었다. 

박수소리가 홀을 가득 채웠다. 남자는 박수소리를 찾아갔다. 홀 뒤 구석진 곳, 어떤 여자가 보였다. 손님이 아직 들지 않은 시간, 불을 환히 밝힌 홀, 여자는 한참동안 박수를 쳤다. 남자는 여자가 왠지 낯설지 않았다. 그 여자였다, 계단에서 울고 있던! 여자는 얼굴 전체로 환하게 웃었다. 남자의 몸짓에 박수를 아끼지 않았던 예전 관객의 눈빛으로 여자는 남자를 바라봤다. 무대를 떠난 후 내내 그리웠던 박수갈채.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 울던 여자는 말끔히 사라지고 없었다. 남자는 살짝 고개를 숙여 여자에게 인사를 했다. 사장이 팔짱을 풀면서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거 몸 좋네. 그런데 말이요?”

사장이 뜸을 들였다. 

"쇼로 갑시다. 발레 스트립쇼!”

툭 내뱉는 말끝에 사장의 어금니가 조명을 받아 번쩍였다. 밤무대에서 발레를 할 수 있다고 해서 오디션을 보러 온 남자였다. 아무 말도 못하고 얼굴만 벌겋게 달아오른 남자에게 사장은 남자에게 몸으로 추는 춤에 무슨 차이가 있냐고 했다. 밤무대도 엄연한 무대이며 프로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사장은 뭣도 모르는 아마추어들이 꼭 무대 탓을 한다, 장소가 중요한 게 아니라 마음이 문제 아니겠냐고도 했다. 남자의 목덜미가 셔츠 색깔처럼 빨갛게 변했다가 제자리로 돌아오면서 얼룩덜룩해졌다. 세게 보이려고, 기죽기 싫어서 빨간 셔츠를 입고 왔냐고, 그걸 들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냐고, 그런 사람일수록 별 볼일 없다며 쯧쯧 혀까지 찼다.

“골든타임이면 생각해보죠.”

사장은 초짜인 주제에 무슨 그런 말을 하냐며 빙글거렸다. 오디션을 보러오면서 예상은 했지만 처음으로 맞닥뜨린 밤의 세계는 굵은 모래알처럼 거칠었다. 남자는 눈을 감았다. 사장을 한 대 갈기고 뛰쳐나갈까. 춤을 출 무대만 있으면 돼, 마음을 다잡았다. 갑자기 무대가 통째로 가라앉았다. 현기증이었다.

남자는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떴다. 여자가 무대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서 있었다. 

― 내려와요, 당장!

여자의 소리 없는 외침이 남자에게 직선으로 날아와 꽂혔다. 여자의 눈은 남자의 가슴에 화인이 되었다. 한 줄기 먼지가 조명 속에서 끊임없이 떨렸다. 사장을 쏘아보던 여자가 뒤돌아 나가고 있었다. 남자는 여자의 등을 봤다. 굳어진 화석처럼 꼿꼿했다.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 울먹이던 여자가 아닌 것처럼 보였다. 가녀린 어깨를 떨던 여자는 사라졌다. 눈먼 자의 어둠처럼 시간은 깊고 천천히 흘렀다. 사장은 다른 나이트클럽 밤무대도 소개해 준다고 했다.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두 타임을 배정 받았다. 밤 열한 시와 새벽 한시 반. 남자는 구두를 하나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일을 시작하기 전 구두를 사는 것은 남자의 오랜 습관이었다.

남자는 첫 무대를 앞두고 팔과 다리에 난 털을 밀었다. 따뜻한 물과 거품이 묻은 종아리와 허벅지가 천천히 불었다. 면도기가 지나가는 자리마다 거품이 비켜서고 굵은 선이 생겼다. 남자는 종아리를 쓰다듬었다. 

‘끝까지 가보는 거야.’

여자의 눈빛을 닮은 한줄기 눈물이 남자의 볼을 타고 천천히 흘렀다. 닦아도 자꾸 김이 서리는 거울처럼 앞날이 투명하지 않았지만 쇼를 잘하고 싶은 오기도 생겼다.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고 싶었다. 남자의 춤을 보고 열렬하게 박수를 보내준 여자가 있는 곳, 소리 없는 명령을 하고 돌아서 나간 여자를 다시 만나고 싶었다. 여자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스트립쇼든 누드쇼든 상관없었다.

사장에게 본때를 보여주자는 마음과는 반대로 무대에서 리허설을 하는 동안 남자의 몸에 잔뜩 힘이 들어가 뻣뻣했다. 백조의 잔걸음을 닮은 부레도, 기본동작인 두 다리가 딱 붙고 무릎은 아웃 턴 상태에서 앞의 발뒤꿈치와 뒷발 엄지발 끝이 서로 맞부딪히게 하면서 두 발끝의 각도는 180도를 유지하는 자세도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자꾸만 뒤꿈치가 바닥에서 떨어졌다. 한쪽 발을 바닥에 고정시키고 있는 힘껏 발을 뻗치는 아라베스크에서 허벅지가 떨리고 중심을 잃었다. 사장은 연습을 더 해야겠다고 타박을 했다. 남자는 밤마다 팽이처럼 한발로 서서 도는 피루엣을 연습했다. 굵은 땀이 콧등을 타고 흘렀지만 멈추지 않았다.

공연을 하는 동안 남자는 관객을 쳐다보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발레슈즈를 벗어던지고 알몸인 자신에게 꽂힌 수많은 눈동자들한테서 도망치고 싶었다. 쇼를 하는 십오 분이 슬로우비디오처럼 흘렀다. 지미 페이지가 연주하는 기타와 건반을 넘나드는 신시사이저의 소리가 낮게 깔리기 시작하면 리드보컬 레드 제플린은 쉰 목소리로 반짝이는 모든 것이 금이라고 여기는 한 여자의 이야기를 읊조린다. 음을 따라 남자의 몸이 흐느적거리면서 풀리기 시작한다.

우우우, 가수가 음울한 목소리로 비명을 지를 때 남자는 파란 조명아래 허리를 틀면서 한 겹을 털어 낸다. 뜻을 모르고 들어도 끈적끈적한 목소리로 다가오는 음악이 홀 안에 가득 찬다. 남자의 옷이 한 개씩 던져질 때마다 무대로 눈동자들이 쏠린다. 쉰 목소리로 레드 제플린이 다시 바람처럼 속삭인다, 한 가지 단어에 다른 뜻이 있는 것을 우린 알고 있다고. 기타소리가 비명만큼 커질 때 남자는 관객을 뒤로하고 돌아서서 타이즈를 내렸다. 

속삭이는 바람 속에 계단이 있는 것을 모르셨나요 

우리가 바람을 타고 길을 내려갈 때 

휘황찬란한 빛을 받고 싶은 한 숙녀가 걸어갑니다

그리고 그녀는 천국으로 가는 계단을 사려합니다

피리 부는 사나이가 우리를 이끌어요

끌려가요 

우우 아아 악

그림자가 쫓아와 

우우우, 



레드 제플린이 두려움에 떨며 고함칠 때 남자의 몸은 파란 조명에 드러난다. 겨드랑이에 남아 있는 털이 곤두선다. 속삭이는 바람 속에 계단이 있다고 절규하는 가수의 음성과 관객들의 아우성에 남자는 갇혀버린다. 남자의 이마에 진홍 불빛이 차갑게 닿는다. 노래가 끝나가는 마지막, 기타와 드럼이 빠르게 연주를 하고 가수는 비명을 지른다. 후반부에 기타와 드럼이 미친 듯이 서로를 탐하는 동안 남자는 끝없이 피루엣을 하면서 앞을 가렸던 실크조각을 당긴다. 순간적으로 먹빛이 된 무대. 남자는 파드되를 할 때처럼 힘껏 발을 뻗어 올린다. 핀조명이 남자의 발을 비춘다. 발레슈즈가 스르르르 굴러 내린다. 무대를 등지고 웅크렸던 남자가 일어나 맴을 돈다. 끊임없이 피루엣을 하는 남자가 어둠 속으로 잠긴다.

박수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휘파람이 무대로 제멋대로 날아와 꽂힌다. 드디어 어둠의 세계에 들어온 것인가. 무대는 모두 어둠과 빛을 가지고 있다. 조명이 있고, 관객이 있고, 박수가 있다. 예술극장과 나이트클럽의 무대는 낮과 밤처럼 다르다. 발레를 하는 극장의 조명이 은은한 달빛이라면 나이트클럽의 조명은 강렬한 햇빛이었다. 잔기침도 박수 속에 숨기는 관객과 아무 때나 휘파람을 불고 낄낄거리는 관객으로 나뉘었다. 극장에서 사람들은 소곤거린다. 나이트클럽에서에서 사람들은 목울대를 세운다. 술기운에 풀어져 박수 속에 야유와 휘파람을 섞는다. 남자는 핏빛 조명이 가득한 무대에서 이제 몸이 기억하는 몸짓으로 춤을 췄다. 

남자는 쇼를 마친 후 강한 요의를 느꼈다. 서둘러 화장실로 갔다. 두 명의 웨이터가 볼일을 보고 있다가 남자를 힐끗 쳐다봤다. 오줌이 시원스레 나오지 않고 방울방울 떨어졌다. 중심을 잡았던 오른쪽 허벅지가 저렸다. 남자는 물끄러미 소변기를 바라봤다. 웨이터들은 어느 결에 나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화장실을 나와 엘리베이터가 아닌 계단으로 내려왔다.

계단은 남자가 들어설 때마다 알아서 불을 밝혔다. 그가 지나온 곳은 다시 어둠에 잠겼다. 몇 층을 내려왔을까. 터벅터벅 걷는 남자의 걸음 때문에 등이 켜지는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남자는 걸음을 멈췄다. 한 발만 내딛으면 센서 등이 남자를 감지할 것이고 계단은 이내 밝아질 것이다. 아무도 없는 계단, 남자는 우뚝 섰다. 밖이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담배갑을 찾았다. 그러다가 담배를 가지고 오지 않았다는 것이 생각났다. 남자는 한숨을 깊게 몰아쉬었다. 눈을 감았다. 어둠이 익숙해질 때가지 한참 동안 남자는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남자는 처음 이곳에 오던 날, 사장의 슬리퍼 색이 무엇인지 기억해내려 애썼지만 생각나지 않았다. 슬리퍼 안에 있던 발, 그 발을 감싸고 있던 양말은 분명 회색이었다. 사람의 머릿속엔 전체를 기억하는 곳과 부분을 기억하는 곳이 따로 있기라도 하는 것일까. 여자가 신고 있던 갈색구두는 앞코가 뭉툭한 것이었다는 것은 남자의 기억 속에 또렷했다. 여자의 블라우스가 옅은 베이지색이었다는 것도.

몸이 재산이라는 말은 몸을 쓰는 남자에게 피할 수 없는 정답이었다. 몸을 고스란히 보여줘야 하는 남자는 몸 관리에 피가 말랐다. 군살이 붙으면 끝장이었다. 금세 다른 사람에게 일이 넘어가버렸다. 쇼를 마치고 집으로 갈 때, 쭈그려 앉아 새벽 인력시장 일꾼들과 마주칠 때가 있다. 일꾼들도 남자처럼 몸으로 돈을 번다. 하루를 보내는 것은 누구나 같다. 빛과 어둠속에서 일을 한다. 일꾼들은 태양빛 아래서, 남자는 강렬한 조명 아래서 땀을 흘릴 뿐이다. 일을 끝내면 몸이 땀으로 젖는다. 태양 아래서 일하는 사람은 빛을 피해 그늘로 숨고, 어둠속에서 일하는 사람은 빛을 닮은 조명을 바라보면서 일한다. 빛과 어둠을 번갈아 헤매다가 스러져가는 것이 육체를 가진 뭇 생물들의 숙명일지도 모른다고 남자는 생각했다. 

남자가 쇼 타임을 넷으로 늘리는 동안, 남자와 여자는 다른 시간대 속에서 타인처럼 살았다. 빛과 어둠이 마주치는 일식과 월식처럼 여자와 남자는 만났다. 여자는 위, 남자는 아래. 세 개의 계단이 남자와 여자 사이에 버티고 있었다.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지나치던 남자가 뒤돌아서면서 내려가던 여자를 불렀다.

“밥, 같이 먹을래요?”

여자와 남자는 나란히 앉아 말없이 곰탕을 먹었다. 여자는 숟가락을 쥐고 있는 남자의 손을 봤다. 손등을 수놓은 파란 정맥을 바라보면서 여자는 남자를 향해 웃었다. 깍두기를 베어 문 남자의 빨갛게 물든 입술이 여자를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사귄 지 2년이 되어도 남자는 자신의 스트립쇼를 보여주지 않았다. 남자는 여자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남자는 얽히지 않는 철길처럼 나란히 가는 것을 원했을 지도 몰랐다. 떠날 준비가 되어있는 방랑자처럼 굴었다. 여자는 처음 만났던 날처럼 남자가 비상구 문을 열고 여자에게 뚜벅뚜벅 걸어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다짐했다.

남자가 분장을 지우고 맨 얼굴을 거친 손으로 만질 때 얼굴도, 손도 모두 서걱거릴 때 여자는 남자의 집에 있었다. 싱크대에 생긴 묵은 때를 벗겨내는 중이었다. 희멀건 뜨물처럼 낀 기름기 때문에 가스레인지 상판과 벽이 지저분했다. 손으로 쓰윽 문지르면 자국이 났다. 지난 번 김치찌개를 끓이고 미처 닦지 못한 찌꺼기는 곰국을 끓이는 동안 점점 까매지고 눌러 붙어 진한 얼룩이 되었다. 여자는 세정제를 뿌렸다. 작고 짙은 얼룩이 녹으면서 옅게 퍼졌다. 세정제와 얼룩이 섞인 시꺼먼 때가 손톱사이에 끼고, 손끝이 거칠어졌다. 손바닥에 습기가 없어 버석거렸다. 촉촉했던 손가락은 독한 세정제 때문에 건조해졌다. 비비면 지문이 떨어져 나와 흩어질 것 같았다. 이럴 땐 고무장갑을 낄 걸, 여자는 잠깐 후회한다. 후회는 후회로만 남는다. 여자는 비누를 손에 문질렀다. 거품이 지나치다. 손이 미끈거렸다. 수돗물을 틀어 한참동안 비볐다. 끈적이는 기름때는 손에 남아있던 거품과 함께 배수구로 쏜살같이 빨려 들어갔다. 손의 물기가 금세 말랐다. 거품이 많을수록 물기는 빨리 마르고 더 빨리 뻣뻣해졌다. 청소를 하느라 시달렸던 손이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팔뚝은 말갛게 그대로다. 손목과 팔뚝의 경계가 뚜렷했다. 남자와 여자 사이처럼.

여자는 남자를 봤다. 남자는 여전히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명을 받으며 땀을 흘리던 여자 무용수의 안무가 끝을 향해 갔다. 여자 무용수가 은빛 봉을 잡고 빙그르르 돌았다. 짧은 치마가 들리고 속옷이 보였다. 여자는 이미 가슴을 드러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한 겹 옷을 벗으면서 여자 무용수는 어둠 속에 잠겼다. 휘파람소리가 곳곳에서 나왔다. 

“집에 가. 응?” 

여자가 남자의 손등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왁자한 소음이 한꺼번에 없어졌다. 택시를 타고 남자의 집으로 오는 동안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현관에 구두가 널브러져 뒹굴었다. 납작하게 닳은 구두굽이 뒤집힌 채였다. 남자는 오늘 여자가 남자의 집에 들르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여자는 남자가 팽개친 구두를, 슬리퍼를, 운동화를 가지런하게 하지 않고 가는 법이 없었다. 서둘러 집을 나간 여자의 마음을 알아채지 못했다.

여자는 곰국을 냉장고에서 꺼냈다. 꿀렁이는 곰국을 뚝배기에 담았다. 따닥 소리가 날 때까지 손잡이를 왼쪽으로 돌렸다. 파란 불꽃이 너울거리며 뚝배기에 금세 들러붙었다. 오른쪽으로 돌리자 가스불이 움츠러들었다. 곰국이 퐁퐁 끓으면 남자에게 먹이리라. 뽀얀 국물을 닮은 여자의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여자는 소파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남자를 바라봤다. 입을 오므려서 담배를 빠는 남자의 옆얼굴이 거실 창에 비쳤다. 거실 창에 비치는 남자와 소파에 앉아있는 남자는 난시가 심한 사람이 사물을 볼 때처럼 겹쳐 포개져 있다. 둘은 다른 손에 담배를 들고 다리를 꼬고 앉아 있다. 여자는 남자 곁으로 걸어왔다. 담배를 쥐고 있던 오른 손을 밖으로 빼며 남자는 여자의 허리에 머리를 기댔다. 여자의 손이 남자의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남자는 재떨이에 담배를 눌러 끄고 여자를 당겨 무릎에 앉혔다. 남자는 허리를 감았던 팔을 풀었다. 누릿하고 고소한 곰국 냄새가 온 집안을 채웠다. 우족에 붙은 살코기인 뭉치처럼 여자의 몸이 흐물흐물해졌다. 

“우리 집으로 와.”

남자가 여자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여자는 감았던 눈을 떴다. 남자의 사파이어 귀걸이가 여자의 눈앞에서 별처럼 반짝거렸다. 

여자는 짐을 풀었다. 구두의 끈 달린 부분이 발등 부분까지 덮여있는 더비스타일 구두와 연분홍빛 리본이 달린 앙증맞은 에나멜 아기구두였다. 여자를 보는 남자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여자는 배를 쓰다듬으면서 배시시 웃었다. 남자를 처음 만나던 날, 여자는 남자를 생각하면서 구두를 샀다고 했다. 계단에서 만났던 남자의 구두는 해질 대로 해져 있었고, 남자가 사장 앞에서 맨발로 맴을 돌았을 때, 남자의 발을 따듯하게 해 줄 수 있는 편안하고 멋있는 구두를 사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구두를 신고 함께 어디든 가고 싶었다고 했다. 남자가 나이트클럽으로 공연하러 오던 날, 남자의 구두가 바뀐 것을 보고 여자는 구두를 선물할 기회를 놓쳤다고 말했다. 더비구두를 닦으면서 여자는 남자가 여자에게서 멀리 가지 않기를, 남자가 어둠에 잠기지 않기를 바랐다고 했다. 남자가 ‘우리 집으로 와’ 속삭일 때 여자 속으로 연분홍빛 리본을 단 작은 구두가 걸어 왔다고 고백했다.

남자는 구두를 신었다. 구두끈이 날개처럼 양 옆으로 벌어졌다. 남자의 뒤꿈치 맨살에 구두 가죽이 닿으면서 나는 소리가 경쾌했다. 남자는 빙그르르 돌아 여자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형광불빛이 남자의 얼굴을 은은하게 비췄다. 일자로 두 다리를 쭉 펴서 점프, 그랑주테를 하는 남자의 긴 팔이 어깨를 따라 올라갔다. 가슴이 저절로 위로 부풀었다. 남자는 팔을 오므리고 양 손을 포개 왼쪽 가슴에 살포시 올렸다. 심장을 바치듯 남자는 여자를 향해 팔을 내리며 파드부레처럼 종종거리며 온다. 몸짓으로 사랑을 고백한 남자가 여자에게 손을 내민다. 순백색의 튀튀를 입은 발레리나처럼 여자도 남자에게 한 손을 뻗는다. 파드되를 청하는 남자의 얼굴이 여자의 젖가슴으로 다가온다. 여자의 심장이 빠르게 뛴다. 세 개의 심장이 함께 팔딱였다.

 

 


 

 

단편소설부문 당선소감

 

청회색하늘이 먹빛이 되는 그믐밤, 어머니는 양팔에 우리를 끼고 누운 채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세상에 태어나 겪은 일이, 아니 어머니를 훌쩍 뛰어넘어 아득히 먼 세상을 떠돌다 어머니의 가슴에 새겨진 모든 일들이 이야깃거리입니다. 가끔, 아주 가끔 저는 어머니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담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하면서 잠이 들곤 했습니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이상하게 그때가 떠올랐습니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들려주던 어머니의 이야기는 저를 지금, 여기까지 이끈 힘입니다.

글을 쓰다가 가끔 손을 놓고 마음을 들여다봅니다. 설핏한 마음을 모아 꿰매다보면 알롱달롱한 조각보가 생깁니다. 조각보는 왠지 영혼을 잃어버린 듯 슬퍼 보입니다. 벽에 걸어 오랫동안 보고 싶은 마음을 거두고 개켜 서랍에 넣습니다. 멀리 사는 손주들에게 줄 옥수수를 감싸는, 야무지게 매듭을 묶는 할머니의 손길이 닿는 튼튼한 나일론 보자기가 될 날을 오랫동안 기다렸습니다. 이제 처음으로 빛을 쐰 내 글이 커다란 단지를, 보늬를 벗긴 밤이 가득한 항아리를 감싸 안을 만큼 촘촘하고 튼튼한 보자기가 된 것 같아 마냥 기쁩니다. 먼 곳으로 이사 간 동생을 잊지 못하고 내내 허전한 마음을 드러냈던 언니들에게도 이제 전할 말이 생겼습니다.

글쓰기를 시작하는 저에게 낭중지추라며 힘을 주신 조돈만 선생님, 문단나누기도 제대로 하지 못하던 제게 주춧돌 위에 기둥을 세우고, 서까래를 올리고, 지붕을 잇는 방법을 차근차근 가르쳐주신 장창호 선생님. 글을 읽어주고 마음을 터놓던 소설동인 글목 친구들. 내 글의 첫 독자로서 끊임없이 나를 벼리고, 내 글을 읽고 표지가 떠오른다며 그림을 그려준, 이제 막 작가가 된 나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가족. 글을 끝까지 읽어주신 심사위원 이화경 선생님. 새 이름을 널리 알릴 기회를 준 무등일보. 모두 고맙습니다. 

이제 막 첫 계단에 발을 디뎠습니다. 아득히 먼 정상을 보면 오르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저 한 발자국씩 떼다보면 어느새 오름에 닿는다 했습니다. 숨을 찬찬히 쉬며, 가끔 뒤를 돌아보며 끝까지 오르겠습니다. 

박기눙(본명 박기옥)
▲경기도 여주 출생
▲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 졸업 
▲소설동인 글목 동인


소설 부문 심사평

이화경

소설가·광주대 겸임교수 

무등일보 신춘문예에 많은 관심과 애정을 보인 작품들을 만나게 된 것에 먼저 깊은 감사를 드린다. 

도처에서 야만으로의 복귀를 꾀하고, 역사적으로 퇴행하는 모습을 목도하고 있는 이 시기에 문학적으로 치열하게 대응하는 작품들을 뵈니 송구스럽고도 고마웠다. 적지 않은 작품들이 당대의 현실과 문제적 삶에 대한 문학적 심문에 치열하게 응답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작품들이 주관적으로 체험했던 삶과 관계의 곤경을 직설적으로 토해내고 있었다. 생의 공포와 두려움, 심리적 불안과 공황 상태로부터 텍스트들을 발생시키고 있었다. 

문제는 작가가 강도 높은 체험에 지나치게 압도당한 나머지 산문의 객관성을 저버리고 있다는 데 있었다. 몇 작품은 과도하게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어휘들의 과용으로 인해 구체적이고도 실감나는 생의 진면목이 묻혀버린 한계를 보여주었다. 

몇 작품은 지나치게 주관적이고, 소재주의적이고, 관습적인 측면이 너무 강해 오히려 문학적 감응력을 반감시키기도 했다. 긴장의 역학관계를 끈덕지게 추적하는 언어적 몸부림 속에서도 예술성을 확보하는 작품을 만나보고 싶어서 읽고 또 읽었다. 

아울러 소설 미학을 정확히 인식했는가, 서사적 전략이 효과적으로 달성되고 있는가, 문체의 개성이 드러나 있는가, 인생의 함축성과 보편성과 진정성을 일깨워주고 있는가, 가독성이 있는가의 여부를 고려했음을 밝힌다. 

'괴물을 위한 산책'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처절하게 추락한 한 개인이 어떻게 괴물이 될 수밖에 없는가를 공포스럽게 묘사하고 있었다. 가족이 황폐해지는 동시에 주인공의 실존이 절멸에 처해지는 모습이 리얼하게 그려지고 있는 것도 장점이었다. 다만 세련된 어휘를 서사로 끝까지 묵직하게 이끌지 못한 점이 한계로 작용하고 말았다. 

'해피 트리 하우스'는 가상현실에서 소비되는 욕망의 굴절을 폭로하고자 하는 의욕을 나름 효과적으로 잘 드러내고 있었다. 등장인물들을 평면적으로 서술하지 않고 캐릭터 속에서 개성과 매력을 효과적으로 살렸으면 좀 더 좋은 작품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끝내 남았다. 

'선심'은 가독성이 뛰어난 작품이었다. 뇌성마비 장애인과 봉사자의 모습이 작품 속에 적절하게 갈마드는 서사를 운용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그럼에도 작가의 의도가 쉽게 읽혀지는 구태의연한 갈등구조와 편의적인 결말, 약간의 신파와 작위성이 한계로 남았다. 

'천국으로 가는 계단'은 가장 안정적이고 믿음직스러운 소설 문체를 구사하고 있는 작품이었다. 어휘를 다루는 솜씨 또한 치열하게 갈고닦았음을 짐작케 했다. 남자와 여자, 몸과 마음, 낮과 밤, 이별과 만남의 이항대립적인 요소들이 자칫 소재주의로 함몰될 수 있었음에도 조목조목 살피는 침착함으로 팽팽한 긴장을 유지한 채 적절히 서사 속에서 갈무리되고 있었다. 각자가 지닌 생의 상처와 비극을 인정하는 모습은 작품 전체에 호소력을 부여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신인다운 패기를 기대하며, 당선을 축하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