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한국경제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새 / 조혜은 새 / 조혜은 아주 오래전부터 나는 새를 보고 새를 볼 수 없을 땐 새를 상상해 왔다. 여덟 살 때부터 치기 시작한 피아노마저 건초염으로 오년 전 그만둬버리고 내게 취미라고는 새를 보고 새를 상상하는 것이 유일하다. 눈앞에 있지 않은 새를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사무실 내 옆자리의 후배는 신기할 정도로 새하얀 피부와 유독 새빨간 입술이 백문조를 쏙 빼닮았다. 뭐 때문인지 매사에 부루퉁한 얼굴로 혼잣말이 잦은 세탁소 주인아저씨는 새카만 까마귀를, 아파트 근처 편의점의 스물 남짓한 야간 알바생은 검푸른 눈매가 도드라진 동고비를 닮았다. 세상에는 새를 닮은 사람이 아주 많다. 개나 고양이를 닮는 것처럼 사람들은 새를 닮기도 하며 특별하거나 커다란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왜 하필 새를 보는가 하면.. 좋은 글/수필 5년 전
[2019 한국경제 신춘문예 시 당선작] 물고기의 잠 / 설하한 물고기의 잠 / 설하한 뜰채에서 튀어 오른 물고기가 수조로 돌아간다 물고기는 잠을 잔다 비가 수면을 두드린다 물살이 물고기를 조금씩 밀어낸다 한 물고기는 뭍에서 헐떡거리다 죽는다 물고기들의 미래에 놓인 것은 얇고 길고 번쩍이는 흰 것 물고기는 꿈을 꾼다 롤러코스터는 트랙을 달린다 정해진 낙차를 따르는 플롯 눈이 먼 늙은이는 젊었을 때 괴물이 낸 문제를 풀어 왕이 되었다 비가 끝없이 내렸다 그는 진창이 된 길 위에서 지쳐버렸다 자신을 이끄는 어린 딸의 손을 잡고 눈물 흘린다 그는 쓰러져 숨을 몰아쉬다 죽었다 몸 위로 칼날이 떨어지는 꿈을 자주 꾼다 어떤 사람들은 물로 뛰어 내린다 바깥은 있습니까 나는 잠에서 깬다 마적떼는 도착하지 않았다 비는 그치지 않는다 딸은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녀는 오빠를 땅에 묻고 .. 좋은 글/시 6년 전
[2018 한국경제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애주가의 결심 / 은모든 애주가의 결심 / 은모든 ‘술희’라는 애칭으로 불릴 만큼 자타공인의 애주가인 만 스물아홉 살의 신주희. 오너 셰프라는 최종 목적을 향한 중간 단계로 도전한 푸드 트럭 운영에 실패한 주희는 무일푼에 심신의 에너지까지 바닥난 채 연말을 맞이한다. 그러던 주희에게 대학 선배의 집에서 열린 송년회는 잠시나마 유쾌한 주당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는 자리가 되어준다. 그곳에는 한참 만에 만나는 반가운 얼굴들, 오랜만에 발견한 설레는 남자, 다양한 주종의 술이 넘칠 듯 구비돼 있었다. 그러나 여태껏 단 한 번도 필름이 끊겨 본 적 없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일이 무색하게 그날 밤 주희는 생애 처음으로 필름이 끊긴 채 녹다운되고 만다. 이튿날, 두 동강난 기억과 밀려드는 후회 속에 망연자실해 있는 주희. 그녀에게.. 좋은 글/소설 7년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