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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물고기의 잠 / 설하한

 

뜰채에서 튀어 오른 물고기가 수조로 돌아간다 물고기는 잠을 잔다 비가 수면을 두드린다 물살이 물고기를 조금씩 밀어낸다 한 물고기는 뭍에서 헐떡거리다 죽는다 물고기들의 미래에 놓인 것은 얇고 길고 번쩍이는 흰 것


물고기는 꿈을 꾼다 롤러코스터는 트랙을 달린다 정해진 낙차를 따르는 플롯 눈이 먼 늙은이는 젊었을 때 괴물이 낸 문제를 풀어 왕이 되었다 비가 끝없이 내렸다 그는 진창이 된 길 위에서 지쳐버렸다 자신을 이끄는 어린 딸의 손을 잡고 눈물 흘린다 그는 쓰러져 숨을 몰아쉬다 죽었다


몸 위로 칼날이 떨어지는 꿈을 자주 꾼다 어떤 사람들은 물로 뛰어 내린다 바깥은 있습니까 나는 잠에서 깬다 마적떼는 도착하지 않았다


비는 그치지 않는다 딸은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녀는 오빠를 땅에 묻고 죽는다 죽은 반역자와 왕좌에 앉은 사람 하나의 트랙을 번갈아 달리는 열차들 비가 무덤의 흙을 다진다 나는 슬프지 않으면 두려워진다 우리가 신의 손등 위에 있는 공깃돌이라면 어쩌지? 끝도 없이 떨어지는 꿈을 꾼다


나는 하루에 세 번 약을 먹듯 떠올린다


죽은 늙은이의 볼에 비늘처럼 일어난 피부, 그것을 적셔주는 빗물 같은 것, 가축의 숨통, 물고기의 ​


깊은 잠.




  <당선소감>


   "세계를 다른 리듬으로 구부릴 수 있는 詩 쓰고 싶어"


  당선되면 기쁠 줄 알았다. 누군가의 몫을 빼앗아 버린 것 같다. 선진국에서 소비하는 일이 후진국을 착취하는 일임을 안다. 하지만 엉망으로 취하는 날이 많고 생활을 바꾸려 하진 않는다. 당선을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인 것도 나다. 나는 무언가 비틀린 것 같다. 관성 때문이라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 주지 않고 적당히 살다 죽고 싶다. 친구와 술을 마시다 그런 이야기를 한 적 있다. 하지만 살아있는 동안 무언가를 먹을 것이고, 차지할 것이다. 누군가에게 영향을 줄 수밖에 없으리라. 그러니 어쩔 수 없이 나는 세계를 조금 구부려보려 한다. 글을 쓰다 보면 세계가 다른 리듬 쪽으로 조금은 휘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닐 수도 있겠지만 믿어보기로 한다. 누구를 위한 예의이고 누구를 위한 최선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게 내 예의이고 최선인 것 같다.

  좌절하느라 많은 시간을 허비한 것 같다. 나 말고도 누군가가 쓰고 있다는 것, 읽고 있다는 것. 이런 사실이 글을 다시 쓸 수 있도록 도왔다. 아무 주목도 받지 못하는 글에도 세계에 대한 진실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누구든 좌절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부족한 시를 좋게 봐준 심사위원님들과 지면을 내어준 한국경제신문사에 감사드린다.

  글을 읽고 쓰는 이들에게 감사와 응원을 보낸다. 지금까지 내 시를 읽은 사람들에게 감사를. 앞으로 내 시를 읽어줄 가족, 친구, 독자, 선생님들에게도 감사드린다. 지금까지 첫 독자였고, 앞으로도 첫 독자일 애인에게 감사를. 그리고 모두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새해가 모든 사람에게 안녕하길 빈다.



  ● 1991년 서울 출생 
  ● 동국대 국어국문학과 대학원 문예창작전공 석사 수료
 


 

  <심사평>


  "신화적 상상력을 이미지로 자신만의 세계 만들어내


  2019 한경 신춘문예 응모자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시적 존재를 증명했다. 특히 시에 대한 실버 세대의 관심이 더욱 많아졌다는 것을 확인하는 심사였다. 취업과 이력서, 알바, 고시원 등의 시어로 대표되는 젊은 세대의 고뇌와 실존의 깊이를 함께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응모작에서는 시의 잠언화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시는 한마디의 잠언을 위해 수만 마디의 시적 실천이 필요하다. 우리는 구체적 일상과 실존의 경험을 통한 살아 있는 이미지, 사물을 바라보는 번뜩이는 눈, 자신만의 문장을 가진 신인을 찾기 위해 오랜 시간을 공들였다.

  본심에서 오랜 숙고 끝에 최종적으로 설하한, 신진숙, 이주호가 남았다. 이주호의 ‘빙붕공항’은 매력적인 작품이다. ‘펭귄’은 지금 우리 사회 청년들을 가장 적확하게 은유하면서 빙하를 향해 날아오르는 비상의 욕망을 발산하기도 한다. 하지만 비슷한 착상의 기성 시가 몇 편 있다는 점에서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신진숙의 ‘ㅁ이 자라 ㅂ이 되도록’은 발상이 새로웠다.

  설하한의 ‘물고기의 잠’은 단연 눈에 띄는 작품이었다. 설하한은 큰 스케일과 자신만의 문장을 가진 응모자였다. 신화적 상상력을 육화해 시의 소재로 삼고, 떠돎과 회귀라는 서사를 시의 구조에 장착할 줄 안다. 이런 이미지와 진술의 조직력은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가기에 충분했다. 더욱이 그의 시는 이미지가 살아 있었다.

 

심사위원 : 유안진, 손택수, 이재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