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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작>

  새 / 조혜은

  아주 오래전부터 나는 새를 보고 새를 볼 수 없을 땐 새를 상상해 왔다. 여덟 살 때부터 치기 시작한 피아노마저 건초염으로 오년 전 그만둬버리고 내게 취미라고는 새를 보고 새를 상상하는 것이 유일하다.

  눈앞에 있지 않은 새를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사무실 내 옆자리의 후배는 신기할 정도로 새하얀 피부와 유독 새빨간 입술이 백문조를 쏙 빼닮았다. 뭐 때문인지 매사에 부루퉁한 얼굴로 혼잣말이 잦은 세탁소 주인아저씨는 새카만 까마귀를, 아파트 근처 편의점의 스물 남짓한 야간 알바생은 검푸른 눈매가 도드라진 동고비를 닮았다. 세상에는 새를 닮은 사람이 아주 많다. 개나 고양이를 닮는 것처럼 사람들은 새를 닮기도 하며 특별하거나 커다란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왜 하필 새를 보는가 하면 거창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책을 읽고 캠핑을 가고 맛집 탐방을 다닌다면 나는 새를 본다. 하필 새가 아니어야 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번식기나 월동기가 되면 주말을 이용해 순천만 습지나 남해 강진만, 창원 주남저수지, 강화도, 낙동강 하류 을숙도, 충남 태안 천수만 등 전국을 돌아다닌다. 아무리 긴 시간이 걸리더라도 오직 새를 볼 수 있다면 거리는 상관없다. 새를 보러 가는 길은 실제로 새를 보는 것만큼이나 설레고 즐거운 일이다.   새를 볼 때는 그냥 본다. 무슨 대단한 방법이 있는 건 아니고 잠시 생각을 멈추고 오롯이 새 자체에 집중한다. 새를 보기 전에 애써 걱정이나 고민을 내려놓을 필요는 없다. 뭘 하려거나 억지로 누군가 되지 않아도 괜찮다. 그저 눈앞의 새를 보면 된다. 숨죽인 채 새의 모든 행동을 주시하다보면 어느새 나는 비워져있다. 새를 보는 동안 나는 서서히 가벼워진다. 비어 있을 때 나 자신은 아주 가볍고 가벼운 것은 늘 옳다. 나는 끓어 넘치는 것을 혐오한다. 넘치는 것은 모자란 만 못하고 하등 무용하다. 화가 나거나 슬플 때 나는 새를 본다. 긴장했을 때도 새를 보고 황당하거나 창피할 때도 새를 본다. 새를 볼 수 없을 땐 새를 상상한다. 상상까지 새를 보는 일의 포함인 것이다.

  사람들은 새를 보는 일을 일면 생소해하면서도 마뜩찮게 여기는 구석이 있다. 일부러 시간을 내어 새를 보는 일을 굉장히 수고롭게 생각한다. 일례로, 내가 주말에 새를 보러 간다고 하자 사수는 비꼬듯 말했다. ‘뭐? 새를 보러 간다고? 뭐 하러? 새를 보면 떡이라도 나와?’ 새를 보는 것을 하찮게 여기니 새를 보는 나도 하찮아 보였던 걸까. 떡이 나오냐니. 나는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나는 뭘 바라고 새를 보는 것이 아니다. 새를 봐도 내가 얻는 건 없다. 새를 보는 일은 지극히 아무 것도 아니다.

  나는 새 전문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문외한은 아니다. 새라고 다 같은 새가 아니라는 것을 새를 보고 구분할 정도는 된다. 그렇다고 또 자랑할 만한 수준도 아닌 것은 지구에는 팔천육백여 종의 새들이 서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중 칠백여 종이 한반도에 서식하고 있는 걸 고려하면 그저 협소한 나의 생활 반경 내에서 꼭 필요한 만큼 보일 뿐이다.

  봄이 되면 한반도에 날아와 번식하는 여름 철새, 겨울철에 머무는 겨울 철새, 봄이나 가을에 잠시 들렀다 가는 나그네새, 늘상 볼 수 있는 텃새가 있다. 이름만 들어도 익숙한 꾀꼬리, 뻐꾸기, 찌르래기, 제비, 소쩍새 등은 여름철새다. 겨울 철새로는 기러기, 고니, 두루미, 양진이, 말똥가리 등이 있고 노랑딱새, 흰눈썹지빠귀, 촉새, 긴발톱할미새 등의 나그네새와 박새, 딱새, 까마귀, 까치, 참새, 황조롱이 등은 텃새다. 가끔 나는 지구에 서식한다는 팔천육백여 종의 새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걸까 싶은데 이내 그것들을 다 보지 못하고 죽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좀 억울하고 허무해진다.

  가만히 새를 보고 있노라면 마치 다른 세상에 와 있는 것 같다. 새가 있고 새를 보는 내가 있다. 단출하고 홀가분하다. 그 무엇에도 방해받지 않고 새를 보고 있으면 지구에 나 혼자 남겨진 기분이 들기도 한다. 나는 오로지 새를 기다리고 새가 있으면 보고 또 기다리고 다시 본다. 저물녘, 녹아내리는 듯한 하늘을 무리 지어 비행하는 풍경 앞에서 자연스레 겸허해진다. 어떤 순간은 감히 카메라에 다 담을 수 없고 담으려는 찰나 지나가 버린다. 마치 인생의 가장 눈부셨던 순간을 잡아둘 수 없는 것처럼. 그래서 나는 사진 촬영을 하지 않는다. 탐조용 스코프나 망원렌즈 같은 전문적인 장비도 없을뿐더러 애초에 기록을 남기기 위해 새를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에게 있어서 새를 본다는 건 저장이 아니라 비움이다. 비우고 또 비우는 과정이다.

  내가 새를 보러 전국을 누비고 다니는 걸 아는 지인은 내게 새가 그렇게 좋으냐고 물었다. 약속도 취소할 만큼? 사람보다 더? 나는 거의 평생 새를 봐왔으며 새와 견줄 비교대상은 없다. 때때로 사람들은 너무나 무심코 타인에게 가혹하게 군다. 새는 내가 가장 부서지기 쉬웠을 때 내게 왔다. 나의 최초의 새에 관한 기억은 열 살 때로 외할머니의 집 마당에 자그마한 새가 날아든 일이다. 눈 위를 디디며 자그마한 발자국을 남기던 녀석은 몸의 윗부분이 붉은 갈색이었다. 동작이 재빠르고 움직일 때마다 꽁지를 좌우로 쓸어댔다. 그것은 몹시 부드러울 것 같았으나 손에 쥐기엔 너무 작고 연약해 보였다.

  그해 겨울, 나는 인천의 외할머니 집에 맡겨졌다. 아버지의 수술과 장기 입원 생활로 엄마가 나를 보살필 여력이 안됐기 때문이다. 나는 겨울의 눈 덮인 한적한 동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새를 쫓아다녔다. 지치는 줄도 모르고 온 동네를 헤집고 다니다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푸르스름한 바닥위로 짙게 기울기 시작하면 슬금슬금 집으로 돌아갔다. 그때는 얌전히 앉아 공기놀이나 하고 있을 수 없었다. 숨이 다 넘어갈 정도로 달리고 몸을 움직여 혼을 빼 놓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가만히 있으면 외롭고 슬프고 우울한 생각들이 마음을 어지럽혔다. 생각을 멈추기 위해서 나는 그 추운 겨울을 헤집으며 새를 쫓았다. 그러는 동안은 잊을 수 있었던 것이다. 모든 두려운 상상과 망상으로부터 나를 지킬 수 있었다. 바짝 언 몸으로 돌아가면 외할머니가 상기된 내 얼굴을 몇 번이고 어루만지고 차가운 몸을 품에 보듬고 가만가만 어르고 달래주었다.

  나는 그곳에서 한 달 남짓 머물렀지만 때때로 나의 시간은 여전히 그때에 멈춰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해 겨울을 생각하면 하얗게 눈밭을 이룬 마당을 찾아들었던 그 작은 새와 함께 했던 풍경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겨울은 새에게 치명적인 계절이다. 헐빈한 겨울의 한 가운데에서 새들을 위한 안식처는 찾아볼 수 없다. 마땅히 몸을 숨길 수 없기 때문에 창공을 휘저으며 먹이를 찾는 포식자의 표적이 되기 쉽다. 천적들의 위협과 추위, 허기로부터 몸을 숨기려 날아든 녀석을 외할머니는 정성스레 거둬주었다. 아마도 나의 시간이 여전히 그해 겨울에 멈춰있는 느낌이 드는 것은 이상하리만치 평온했던 그 순간을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평온했던 그 순간에 영원히 머물고 싶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날 차갑게 얼어붙었던 내 마음 위를 디디고 간 작은 발자국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언젠가 추락하는 새를 본 적 있다. 새를 볼 때는 그저 새를 볼 뿐이므로 새가 추락하는 동안 그저 지켜보는 것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날개를 뒤집은 채 빠르게 추락하던 새는 능선 너머로 사라졌다. 그 이후로 나는 이따금 그 추락하는 새를 떠올리고 무기력함에 젖는다. 내가 어쩌지 못한 일들. 부정하고 불합리한 일에 대해 침묵을 강요당함으로써 부당함을 감내해야 했던 지난날. 세상은 참으로 불가해한 현상들로 끓어 넘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새를 본다. 새를 생각한다. 가벼워져라. 가벼워져라. 주문을 외운다. 날아가라. 날아가라. 훨훨.


  <당선소감>

   "서른 살에 비로소 다시 잡은 펜…따뜻한 글 쓰는 수필가 될 것"

  “수필은 제 자신을 비울 수 있게 해주는 존재예요. 수필을 쓸 때만큼은 제게 비움의 시간이 주어진 것 같아요. 저도 모르게 감정적 기분이 들 때마다 수필은 최대한 이성적 상태에서 글을 쓰게 해줍니다. 저 자신을 돌아보며 차분해질 수 있게요.”

  2020 한경 신춘문예 수필 부문에 ‘새’로 당선된 조혜은 씨(33)는 수필을 쓰게 된 이유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조씨는 창원의 한 지방신문 편집부에서 교정·교열과 편집을 맡고 있는 5년차 편집기자다. 부산외대에서 영어학을 전공한 뒤 영어학원 강사로 일하던 그가 신문사로 이직을 결심한 이유는 글을 자주 접할 수 있는 직장이었기 때문이다. 조씨는 “기사는 대체로 딱딱한 문장들이라 글쓰기에 직접적인 도움이 된 건 아니었다”며 “그럼에도 문장을 계속 볼 수 있고 글을 접할 수 있는 환경이라는 것만으로도 삶에서 글 쓰는 비중을 늘려가고 싶었던 욕구를 충족해줬다”고 말했다.



  그가 수필을 처음 접한 때는 17년 전이다. 열다섯 살이던 중학교 1학년 때 학교에서 수필을 써 해양수산부 장관상을 받았다. 본격적으로 수필을 써야겠다고 다짐하게 된 ‘사건’이었다. “그게 늪이었어요. 그 상을 타지 않았다면 이런 고단한 길로 들어서진 않았을 겁니다. 지금은 제게 글이 없으면 안돼요. 진부한 얘기로 들리겠지만 전 글 쓸 때 제가 살아있음을 느껴요.” 20대 끝이었던 29세에 그는 글쓰기가 겁나 잠시 머뭇거리기도 했다. 30세가 되자 ‘더 늦어지면 안되겠다’는 생각에 다시 펜을 잡았다.

  조씨는 당선작 ‘새’에서 자기 모습을 새에 투사하고, 새를 보며 평안을 얻는 자신을 통해 이렇게 살아가는 삶의 방식도 있음을 넌지시 보여준다. 그는 “왜 하필 새를 보냐고 할 수도 있지만 새가 아닐 이유도 없다”며 “내가 새를 보면서 마음을 다스리는 것처럼 고단한 삶 속에서 각자가 다른 방식으로 여유를 갖고 관대한 마음으로 쉬어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수필은 연륜이 묻어나는 40~50대 문학이라는 고정관념에 대해 조씨는 “물론 연세가 있는 분의 글 중에는 삶의 깊이를 담아낸 문장도 있지만 수필은 시니어 문학이라고 치부하기엔 아까운 분야”라고 했다. 그는 “젊은 세대가 겪을 수 있는 감정과 생각도 다양하고 깊을 수 있기 때문에 여러 세대가 자유롭게 접근해 즐기는 장르가 됐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이번 당선으로 그동안 홀로 읽었던 글들을 세상 앞에 내놓을 수 있게 된 소감을 묻자 그는 수줍게 입을 열었다. “당선 통보를 받자마자 ‘진짜 내가 글을 써도 되나’라는 의심이 들었습니다. 책임감도 커졌어요. 더 열심히 읽고 많이 써야겠죠. 그럼에도 수필을 계속 쓰게 되는 이유는 내가 누군지 내 안에 조금 더 가까이 들어갈 수 있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

  어떤 수필가가 되고 싶을까. 조씨는 주저 없이 박금아 작가를 꼽았다. “세상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존재하지만 수필은 그중 일부분이라도 누군가에게 알려줄 수 있게 해줘요. 그분 작품을 읽으면 담백하면서도 마음이 녹아드는 느낌이 듭니다. 특별한 교훈을 주는 건 아니지만 자기가 살아온 것에 대한 느낌을 옆에 있는 친한 누군가에게 들려주듯 전달해 마음을 편하게 해주거든요. 그분을 따라 하겠다는 건 아니지만 젊은 세대부터 윗세대까지 모두에게 어필할 수 있는, 보편적이면서도 따뜻한 글을 쓰는 수필가가 되고 싶습니다.”
새를 바라보다, 글을 썼다…비로소 우린 마주본 듯하다

당선 통보를 받고

‘비로소 마주봄의 순간.’

  새를 보는 것은 지극히 수동적인 행위다. 소통이 불가능하고 일방적이기 때문이다. 이로인해 때때로 나는 새를 볼 때 혼잣말을 하기도 하는 습관이 생겼다. 이제는 익숙해졌지만 주변에서는 이해할 수 없다는 시선들이다. 나도 안다. 새를 보는 것은 재미와는 거리가 멀다. 자극점도 없고 구미를 당길 만한 거리도 없다. 하지만 덮어두고 지루하고 따분하게 여기기엔 너무나 살아있지 않나. 살아 흘러넘친다. 명백히 살아있다. 살아있는 모든 것에는 스토리가 있다. 그리고 나는 살아있는 그것들을 볼 때 살아있다고 느낀다.

  얼마 전 새를 보러 갔다. 자꾸만 흘러넘치는 마음을 비우기 위해서였다. 쉬이 비워지지 않는 마음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꾹꾹 눌러 담으려고 해도 잘 되지 않았다. 힘이 들었다. 새를 보는 일이 힘에 부쳤다. 글을 쓰는 것과 새를 보는 것이 다르지 않음을 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느새 차오른 것들이 깃든 자국을 남길 때 마음의 생채기가 하나둘 늘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냥 썼다. 묵묵히. 그러다 보면 어떤 순간에 도달하기도 한다. 기적이라고 믿는 순간. 지금 기분이 꼭 그렇다. 늘 수동적으로 바라보기만 했던 새와 눈이 마주친 기분. 글을 써 온 이래로 비로소 우리가 마주본 듯하다. 심사위원과 가족들, 그리고 모든 분께 깊이 감사드린다.

  ● 1987년 인천 출생
  ● 부산외국어대 영어학과 졸업


  <심사평>

  "심사평 새에게 투사한 힘든 시절 자신의 마음…담백하게 드러낸 표현력 인상적

  수필 부문에는 총 391편의 작품이 응모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글쓰기의 욕망을 가지고 있고,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 싶어한다는 사실이 한편으로 놀랍고, 한편으로 반가웠다.

  이런 욕망이 좋은 수필을 쓰는 데는 장애가 되기도 한다. 물론 누구에게나 자신의 인생은 소중하기 그지없고, 그 인생을 반추하고 회고하고 정리하면서 얻는 기쁨과 깨달음은 글쓰기의 가장 큰 보람이기도 하다. 그러나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것만으로 수필은 완성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응모작이 오로지 자신의 이야기만 하려고 한다는 점이, 그리고 그 이야기 속에 타인을 새겨 넣지 못한다는 점이 심사 과정에서 느낀 가장 큰 아쉬움이었다.

  세 명의 심사위원이 응모작을 나눠 읽고, 그중 본심에서 논할 만한 작품을 추렸다. 최종적으로 논의된 응모자는 김영옥, 고안나, 조혜은이었다. 김영옥의 ‘인간 모루, 깜씨’는 ‘깜씨’라는 인물의 형상화가 돋보였다. 그러나 ‘깜씨’라는 그 자체로 매력적인 인물이 화자의 자기중심적 서술 때문에 충분히 살아나지 못한다는 점이 아쉬웠다.

  마지막까지 남은 응모자는 고안나와 조혜은이었다. 고민 끝에 심사위원들은 조혜은의 ‘새’를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한 편의 글을 완성시키는 솜씨나 문장의 유려함 등에서 고안나의 ‘어떤 접속사도 없이 나는 웃을 것이다’나 ‘우리 지금 뭘 먹고 있는 거지?’도 좋았지만, 모두 대상에 대한 저자의 입장이나 시선을 느낄 수 없다는 점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새’는 상대적으로 가장 단점이 적은 글이었다. 어리고 힘든 시절의 자신을 약한 새에게 투사하고, 그 새를 보는 것으로 삶을 위로받는 저자의 심리에 자연스럽게 공감할 수 있었다. 새가 위로의 대상에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아쉬움은 있었다. 관조를 넘어서서 나와 다른 존재를 향해 저자의 시선이 더 뻗어나갔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그러나 이 글에는 ‘새’를 통해 자신의 마음을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드러내는 담백한 매력이 있다. 이런 매력 때문에 심사위원들은 ‘새’를 최종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심사위원 : 정이현, 서영인, 정혜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