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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작>

 

   마디 / 안희옥

 

  하늘 향해 뻗은 대나무의 기상이 옹골지다. 미끈한 몸매에 둥근 테를 두르고 서 있는 모습은 흡사 초록 옷을 입은 병사들의 열병식을 방불케 한다. 이따금 간들바람이 푸른 대숲을 훑고 지나간다. 무성한 댓잎 사이로 신기루처럼 일어나는 햇살에 눈이 부신다.

굵은 대나무가 길을 가로막는다. 두 손으로 감싸 쥐니 손안에 가득 찬다. 매끄러운 줄기 사이, 마디가 껄끄럽다. 볼록한 부분은 특별히 다른 곳에 비해 단단하고 힘이 있다. 대나무는 기후가 나쁘거나 수분이 부족할 때 성장을 멈추고 힘을 모은다고 한다. 이때 생기는 것이 마디다. 성장판을 닫고 힘을 비축한 뒤 기회가 되면 다시 커간다. 이런 과정을 되풀이하면서 대나무는 휘지 않고 곧고 높이 자랄 수 있는 것이다.

아들 귀한 집안의 다섯째 딸로 태어난 여동생은 그 아래로 남동생이 태어나자, 다른 형제들에 비해 귀한 대접을 받았다. 할머니는 터를 잘 팔아 대를 잇게 해 주었다며 동생을 추켜세웠고, 잘못된 행동을 해도 크게 나무라지 않았다. 할머니의 특별한 사랑 때문인지 동생은 어릴 때부터 고집이 세고 자기주장이 강했다.

대나무가 한창 클 때는 한 시간 동안 자라는 속도가 삼십년간 자라는 소나무 속도와 맞먹는다고 한다. 생장점이 많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대부분의 나무들은 줄기 끝에만 생장점이 있는데, 대나무는 마디마다 생장점이 있다. 그러나 줄기의 벽을 이루는 조직은 엄청나게 빨리 늘어나는 반면 내부성장은 느려서 속이 텅 비게 된다.

조실부모하고 사고무탁한 청년과의 결혼을 집안에서 극구 반대했지만 동생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모두들 아무 탈 없이 잘 살아 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가족의 걱정은 기우였다. 동생의 결혼생활은 순탄했다. 제부의 사업은 승승장구했고 상류층 사람들과 친분을 쌓으며 자신의 영역을 넓혀 나갔다. 이 곳 저 곳 모임에서 익힌 세련된 매너와 옷차림에 자매들은 모두 부러워했다. 생활의 여유가 있으니 친정 식구들에게도 여러모로 도움을 주었다.

대나무 마디는 멈춤을 뜻한다. 중간에 잠시 쉬었다가 다시 자라면 더 쑥쑥 큰다. 대나무만의 특징이다. 중간에 마디가 형성되는 시기는 유난히 더디다. 그러나 그 마디들이 없다면 가늘기만 한 나무가 그렇게 높이 자랄 수 있을까. 잠시 정지해있는 듯 보이지만 그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준비의 시간이다. 멈춤이 없다면 진정한 성장도 없다는 교훈을 대나무에게서 얻게 된다.

언제까지나 이어질 것 같던 동생네의 행복이 암초에 부딪혔다. 기다리던 둘째 조카의 탄생을 가족 모두가 기뻐한 것도 잠시, 의료진의 불찰로 그만 하늘나라로 보내고 말았다. 온 세상을 다 가진 듯 넘쳐나던 웃음들이 연기처럼 사라져 갔다. 아이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가슴에 피멍이 들었다. 동생의 인생에 굵은 마디 하나가 생겼다.

설상가상으로 거침없이 질주하던 제부의 사업이 IMF를 맞으면서 또 한 번 위기를 맞았다. 무리한 사업 확장은 곳곳에 빚을 남겼고, 끝까지 지키려 했던 집마저 경매에 넘어갔다. 하루아침에 길가로 나앉은 신세가 되고 말았지만 어려움을 모르고 자란 터라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기란 쉽지 않았다. 월세 단칸방에서 온 식구가 하루하루를 힘겹게 연명해 나갔다. 생활의 여유가 없다 보니 부부간 갈등도 심해 연일 큰소리가 담장을 넘었다. 사춘기에 접어든 큰아이도 점점 밖으로 나돌았다. 삶은 나날이 피폐해져 갔다.

혼다의 창업자 혼다 소이치로는 휴식을 대나무의 마디와 같다고 말한 바 있다. 마디가 있어야 대나무가 성장하듯, 사람에게도 쉼이 있어야 강하고 곧게 성장할 수 있다는 의미다. 드럼통은 최초, 표면에 아무런 굴곡 없이 매끈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작은 충격이나 굴릴 때 쉽게 찌그러졌다. 누군가 대나무 마디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드럼통 옆구리에 마디를 넣었더니 강도가 네 배나 강해졌다.

시간이 약이라 했던가. 지옥 같던 고통도 조금씩 사그라질 무렵, 새로운 생명이 태어났다. 예쁜 딸이었다. 아이는 동생네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딸이 태어나고부터 신기하게도 살림살이가 나아지기 시작했다. 집안에 다시금 웃음이 찾아왔다.

그것도 잠시, 잘 자라던 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이 끝나갈 무렵, 뇌종양이란 큰 병에 걸렸다. 청천벽력이었다. 하늘을 원망하며 속울음을 삼키는 동생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내려앉았다. 강단 있고 패기 넘치는 모습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었다.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받고 있던 동생을 단단하게 버틸 수 있게 한 것은 바로 엄마라는 이름이었다. 아이를 위해 대나무처럼 마음을 비우고 낮은 자세로 임했다. 조그마한 일에도 감사하고 인내하는 삶을 살았다. 그러자 아이의 병도 조금씩 나아져 갔다.

시원스레 하늘로 솟구친 대나무 숲은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죽순이 돋아나고 성장할 때까지 그 음습한 땅 속에서 수년 간 뿌리를 내리는 과정을 거친다. 뿌리가 깊기 때문에 쉽게 쓰러지지 않는다. 속이 빈 채 커 나가는 대나무로서는 반드시 필요한 인고의 세월이다.

대나무는 허허실실이다. 속이 빈 것이 허라면 밖이 단단한 것이 실이다. 내강외유다. 속은 허술해 보이지만 오히려 그것 때문에 더 강하다. 속을 비워 내지 않으면 단단한 마디를 만들 수 없다는 걸 가르쳐준다. 삶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순탄하게 잘 흘러가다가 어느 순간 시련이 닥치곤 한다. 시련은 곧 마디다. 넘어지면 실패가 되고 말지만 그것을 극복하면 승화가 된다. 시련은 크고 강하게 되기 위한 일종의 통과의례다. 작은 일에도 쉽게 절망했던 나의 나약함에 대해 반성해본다.

마디를 가만히 만져 본다. 매끄러운 몸통에서 따뜻함이 느껴진다. 믿음직스럽게 자리 잡은 마디 사이로 봄기운이 가득하다. 대나무 숲 사이로 환하게 웃는 동생의 얼굴이 떠오른다.





  <당선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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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 대나무 숲에 설 때가 있습니다. 우듬지 사이로 지나가는 청아한 바람소리를 듣는 것도 좋아하지만 무엇보다 마음이 맑아지기 때문입니다. 살면서 부딪히는 여러 가지 번잡한 일들도 거기에선 고요해짐을 얻습니다.

대나무 씨는 뿌린 후 5년 동안 싹이 나지 않습니다. 그 기간 동안 캄캄한 땅 밑에서 부지런히 뿌리내리기 작업을 합니다. 그런 후 마침내 새싹을 땅 위로 밀어 올립니다.

글을 시작한 뒤, 오랫동안 미로 속을 헤매기도 했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잃었을 때도 있었고 그만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많았습니다. 그래도 한 발 한 발 나아가면 이 어둠 끝에 빛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올해의 끝자락에 한 줄기 빛처럼 당선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아직은 모자란다고 스스로 도리질을 하면서도, 까마득하게 걸어놓았던 소망 하나가 드디어 내 앞에서 환히 불을 밝히는 순간입니다. 행여 부족한 실력으로 급하게 달려오지는 않았는지 내심 걱정스럽기도 합니다. 나를 에워싸고 있던 어둠이 걷히자 잠시 눈이 부셨습니다. 눈가가 조금 젖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드디어 땅 위로 올라온 나를 바라보며.

설익은 글을 곱게 보아주신 심사위원님과 꿈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멋진 기회를 주신 영주일보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합평회 때마다 따끔한 회초리를 들어준 <윤슬문학회> 문우님들께도 고맙다는 말 전합니다. 늘 곁에서 힘을 실어주는 가족들, 특히 사랑하는 두 아들 진섭, 민섭이를 비롯해 저를 아끼는 모든 분들과 이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 합천 출생.

  ● 동리목월 문예창작대학 수료 (2012), 동서문학상 수필부문 은상 (2012), 공무원문예대전 수필부문 금상 (2017), 천강문학상 수필부문 우수상 (2018).

  ● 동화집 「호미곶 돌문어」 공저 (2014).


 

  <심사평>


  "탄탄한 구성에 산뜻한 마무리 돋보여"


백여 명이 넘는 신춘문예 수필부문 지망생들은 심사자의 시선을 붙잡을 수 있는 그 무엇을 지녀야 한다. 등단 전에는 숙녀신사의 정장 복장이 이에 어울린다 할 것이나, 등단후에는 걸인의 옷도 좋다.

수필의 가치는 타인의 공감을 얻을 때 비로소 의미를 지니게 된다. 수필의 공감지수는 나와 우리을 이어주는 연결고리를 문장화 할 때 더욱 높아진다. 이를 위해 문장력을 비롯하여 제목선정, 단락나누기,은유적 표현 등의 포장 능력 역시 간과해서는 않될 것이다.

2019 영주일보 신춘문예에는 전국에서 128명의 예비작가들이 응모하였고, 작품수는 400여편에 이른다. 5편이 넘는 수필을 보내주신 예비작가들도 십여 명에 이른다. 많은 작품을 쓰려는 열정보다 좋은 작품 몇 편을 쓰려는 열정이 습작시기에는 더욱 빛을 발할 수 도 있을 것이다. 백지와 원고지에 친필로 써내려간 분도, 컴퓨터에 내장된 원고지에 출력해 보내주신 분도 계셨다.

수필은 개인적 체험에 대한 연상과 상상을 작품화 하는 것을 그 가치로 삼는다. 과거의 체험이 현재에서 의식화 내재화 공유화 되고 그래서 미래의 가치스로움인 멋과 맛이 있는 작품이 되기 위해서는, 작가는 상상과 연상의 날개를 펼쳐야 한다. 이러한 흐름을 바탕으로 하여 우리는 본 신춘문예에 응모된 수필 중에서 시선을 끄는 여덟 분의 작품들을 우선 선정하였다.

이인숙 님의 뒷모습›•‹화무십일홍›•‹그리운 이야기꾼, 김정미 님의 시간을 흙으로 굽다›•‹누에의 잠›•‹단풍차를 한 손에 든 채, 김장배 님의 , 에 들다›•‹, 이용호 님의 가지 않은 길›•‹()›•‹시조(時調 예찬, 장희자 님의 내 안의 감옥›•‹봉황을 먹었다.›•‹엄홍길과 라마스떼, 이상수 님의 끙게›•‹박새의 포란›•‹둥근 동행, 조미정 님의 검정›•‹남두육성›•‹둑방 옷 수선집, 안희옥 님의 마디›•‹떼배›•‹사점死點등을 선정하여 다시 정독에 들어갔다. 그리고 최종 심사를 위해 이상수 님, 조미정 님, 안희옥 님 등 세 분의 작품들을 더욱 세밀하게 들여다 봤다.

이상수 님의 수필에서는 농촌에서의 삶의 전경이 눈에 어리고, 박새와 가족들과의 삶과 죽음을 은유적으로 조화롭게 대비되고, 자연과 인간의 동행을 문장으로 잘 버물리고 있다. 조미정 님의 작품에서는죽음이란 묵직한 세계를 가벼운 삶의 영역으로 다루고, 북두칠성에 밀려난 이인자별처럼 여겨지는 남두육성에 대한 깊은 통찰이 돋보이고, 삶의 보풀이 생길 때면 누군가의 수선집이 되고 싶다는 은유적인 삶의 태도가 가슴을 파고 든다. 안희옥 님의 작품들을 다시 만나다니. 어디서 본 듯한 이름이라 작년 심사평을 뒤졌더니, 최종 심사평에 등재된 이름이었다. 낙선의 아쉬움을 뒤로 하고 수필에 대한 열정이 작품 속에 녹아 있는 듯했다. 세 편의 수필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체험에 대한 연상과 심리변화를 적절하게 버무려 놓은 작품에 몰입케 하는 문체의 긴장감이다

등단 수필가의 작품에 못지 않은 세 분의 작품들을 만난 것은 내겐 행운이었다. 하지만 수 차례의 정독 후에 읽는 재미와 삶의 교훈과 수필의 절제미가 좀더 돋보이는 안희옥 님의 수필 마디를 최종 선정하였음을 밝히는 것은 결단에 찬 고뇌였다.

 

심사위원 : 문영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