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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인사법

김경순

1.

지문이 세면대 밸브에 쌓여간다

암묵적인 약속처럼

조심스럽게 잡고 올렸다 내리며 안녕,

밸브를 감싸 쥐고 그 위에 나의 지문을 포갠다, 새긴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매머드를 화석으로 만나듯

비 젖은 발자국에 서로의 무게로 깊이를 더하듯

만나지 못하기 때문에 매일 조우하게 되는 것일까.

만나지 않으려 이렇게 만나는 것일까.

안녕, 안녕,

헤어질 때와 같이.

 

2.

당신이 지나간 보도블럭을 밟았을 때

내가 사려던 책을 당신이 집어 들었을 때

한 소리에 동시에 고개를 돌렸을 때

지구 반대편에 있는 당신과 나도

춥다는 핑계로 귀 접어 주머니에 넣고

입이 벌어져 있으면 자꾸만 우리는 말이 쏟아질 것 같아요,

아침마다 지우개로 입술을 지우던 나

당신과 나의 선들이 교차하던 순간

내가 웃었기에 당신은 울었다.

 

계속 되는,

 

1.

가족이 깰까 달빛도 사뿐히 걷는 밤

어둠과 맞닿은 자리에서 더욱 짙어지는 까만 점

밤은 그녀의 등과 마주해 블랙홀이 되었다

별 부스러기 가득한 두 평 우주를 호출하는 등

 

2.

태양은 햇빛을 저장하기 위해

치타의 몸에 까만 점을 무수히 찍었다지

그 모습이 마치 송송 뚫린 구멍 같아,

바람이 자꾸만 손가락을 넣어 보는 탓에

치타가 뛸 때마다 쉭--

휘파람 소리 난다지

줄넘기 하듯 그 구멍을 가볍게 통과하면

치타처럼 포효하며 달려볼 수 있을까.

 

3.

하늘이 바리케이드를 칩니다.

앞뒤가 없는 끝이 환한 구멍

그 안에 들어서면 우리는, 지나가는 사람입니다.


 

빛이 수직으로 서는 이유

 

종종 하늘을 향해 손전등을 비추었다

한 치 어긋남 없이 주욱 뻗어나가는 빛

내가 쏘아올린 빛의 끝을 잡아당기고 있다

밤새 팽팽한 빛의 기둥에 제가 가진 가장 빛나는 것을 심어주던 하늘은

다음날이면 또 나를 보러 한숨에 일억 오천만 키로미터를 달려왔다

봉우리며 바위들이 위를 향해 열심히 날을 세우듯

바람이 닦고 지나간 자리를 지키는 나뭇가지처럼,


<
당선소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밥벌이를 핑계로 문학은 항상 제 생의 뒤안길에 자리했습니다. 말로는 사랑한다 하면서 순정하지 못한 행동들로 문학을 쓸쓸하게 만든 적 많았습니다. 아둔하고 졸렬하여 나아지지 않는 살림살이가 문학 때문이라고 타박하고 괴롭혔습니다. 이런 저에게 천형이 떨어졌습니다. 앞으로는 문학에 희생하라는 뜻으로 여기고 이 벌 달게 받겠습니다. 제 시에 마음 한 자리 내어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 감사합니다.

바다 비린내 화인처럼 섬기며 사시는 어머니, 아버지, 사랑하는 내 동생 하라와 찬섭. 우리 다섯 식구 조만간 따뜻한 밥 한 끼 먹어요.

낡지 않는 것은 사람과 세상을 사랑하는 일임을 알려주신 강형철 교수님, 항상 제 손 꼭 잡고 기운 북돋아 주시는 김양호 교수님, 따뜻한 숭의 소설세미나 선후배님들, 고맙습니다.

숭의 시세미나 마성의 여인 현경언니, 사랑스러운 윤지, 치명적인 매력의 여인 현정 선배, 닮고 싶은 상상력 효정, 너무 많은 것을 주기만 하는 재화 선배. 그대들과 머리 맞대고 골몰하는 시간 속에 함께 할 수 있어 다행입니다. 이 모두를 언어의 채찍질로 기르고 계신 이윤설 선생님. 의지박약에 무기력으로 점철된 저를 참고 여기까지 이끌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문학을 귀히 여기고 시를 모시며 사는 일로 보답하겠습니다.

 

<약력> 숭의여자대학 미디어문예창작과 졸업 / 서울디지털대학교 상담심리학부 휴학 중

 

<심사평>

첫 행의 매력에 끌려

신인들을 만나는 일은 즐겁다. 과거의 낡은 옷을 과감히 벗어던지고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은 우리 문학의 내일을 보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기에 그들이 보내온 한 단어, 한 글자도 빠뜨리지 않고 읽어줄 각오를 하고 한 편 씩 페이지를 넘긴다. 문학이 죽었다고 개탄하는 시대, 돈이 안 되는 문학을 붙잡고 불면의 밤을 지새우는 문청들이 아직도 우리 사회의 곳곳에 숨어 뼈를 깎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작업 또한 적지 않은 즐거움을 준다. 더구나 어느 순간 큰 나무로 자랄 만한 신인을 발견하면 이런 걱정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설렘과 기쁨보다는, 선배로서 떨림이 앞서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이번에 5회째를 맞는 영주신춘문예 시 부문에 응모한 시편들은 800여 편에 이른다. 그 중에는 아직 응모의 기본이 안 된 사람들부터, 아직도 원고지에 자필로 정성껏 눌러쓴 글씨도 있고, 미국과 독일에서 국제우편으로 배달된 응모작품들도 섞여 있었다. 심사위원들은 일차적으로 시적 완성도, 새로운 감각, 습작의 수준 등을 고려해서 작품을 읽어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남은 작품이 한상림 씨의 임플란트3, 김창호 씨의 자동이체3, 정성수 씨의 배롱나무2, 이미화 씨의 햇빛이 좋은 날3, 김경순 씨의 우리들의 인사법2편 등이었다.

우선 한상림 씨의 경우는, 일상에서 시적 대상이나 상황을 발견하는 힘은 좋으나, 이것들을 시적으로 형상화함에 있어 현실적 리얼리티에 안주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어, 좀 더 신인다운 상상력을 발휘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김창호 씨의 경우는, 시상은 잘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시적 이미지를 만들어냄에 있어서 너무 서술적이며 산문적이라는 지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시인이 자신의 진술로 설명을 하고 나면 독자들이 느껴야 할 것은 그만큼 적어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다. 정성수 씨의 경우도 앞의 김창호 씨와 비슷하게 서술적인 이미지가 지나치게 발견되어 산문적인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마지막까지 심사위원들의 눈길을 잡은 것은 이미화 씨와 김경순 씨의 작품들이다. 이미화 씨의 경우는 시적인 모티프를 형상화하고 시를 갈무리하는 품이 상당한 습작 이력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곳곳에서 발견되는 오자(誤字)들과 행과 연의 구분 등은 시를 읽어감에 있어서 걸림돌이 되곤 했다. 반면에 김경순 씨의 경우는 첫 작품, 첫 행부터 읽는 이의 눈길을 사로잡으며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앞에서 지적한 다른 분들의 단점을 발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응모된 시들이 고른 수준을 보여주고 있어서 당선자로 밀어 손색이 없다는 데 합의했다.

오직 한 사람만을 뽑아야 하는 신춘문예의 속성으로 인해 굳이 최종심에 오른 분들의 작품에서 단점을 지적하긴 했으나, 기성 시인들도 그러한 점들을 완전히 극복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탈락한 분들께도 용기를 가지시라고, 위로의 말씀 전하며, 당선자에게는 큰 박수로 축하를 드린다. 아무쪼록 우리 문단의 큰 나무가 되시길 기원한다.

심사위원 : 유종인변종태(대표집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