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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양철북1인칭 화자의 서술구조(오스카는 나레이터이자 관찰자이다)를 지니고 있다. 영화 양철북에서도 역시 1인칭 화자인 오스카의 역할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오스카가 전후 사정을 설명해 주는 친절한 해설자와는 구별되는 기능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오스카는 해설자이기에 앞서 주의 깊은 관찰자이다. 슐뢴도르프는 영화에서 이 관찰자의 시선을 영상으로 개입시킨다. 따라서 영화 속의 장면들은 전체의 반 이상이 3살 짜리 꼬마의 시점에서 본 어른들의 세계이다. 외할머니의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각 장면들을 연결시키는 나레이터의 목소리도 꼬마의 당차고 기괴한 목소리이다. 오스카의 일상생활에서는 말더듬이 수준에서 머물 정도로 말이 없지만 나레이터로서는 어른들을 능가하는 능력을 과시한다.

그런데 나레이터보다 더 강력하게 영화의 시점을 조절하는 것은 오스카의 시선이다. 오스카의 시선은 소시민 근성을 여지없이 드러내는 어른들의 추태에 집중되고 있다. 위를 올려다보는(개구리 시선) 어린아이의 시선은 눈에 잘 안 띄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더 가까이에서 포착할 수 있다. 그의 냉정할 정도로 날카로운 시선은 어른들이 겉으로 우아하고 평화로운 분위기에서 점잖고 격식을 차리고들 있지만 사실은 너나 할 것 없이 성적인 충동에 사로잡혀 이중적으로 행동하며 오로지 자신이 원하는 것에만 집착하는 이기주의적인 속물에 지나지 않음을 여지없이 폭로한다.

결국 인간의 치부를 수치스럽게 드러내는 현실에 대해 역겨움을 느낀 오스카는 할머니의 네겹 치마 속으로 다시 숨고 싶을 뿐이다. 이렇게 다시 모태로 돌아가고 싶은 충동은 어머니의 자궁으로부터 다시 나오는 순간에도 겪는다. 태아가 세상에 머리를 내미는 순간 아버지 마체라트의 소시민적인 반응이 그로 하여금 역겨움을 느끼게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어른을 능가할 정도로 냉철하고 비판적인 사고력을 가진 오스카는 동시에 어린아이의 순진하고 유치한 천성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세 살이 되면 양철북을 선물로 주리라는 아그네스의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 그만 세상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는 식의 유아식 논리는 이 영화의 전편을 지배하는 유머이기도 하다. 출산 장면에서도 카메라 시점은 태아의 시선과 일치한다. 180도 뒤집어진 상태로 처음 세상을 대하는 아기처럼 카메라 앵글도 180도 회전한다. 카메라가 대부분 오스카의 시점에 맞춰져 있다는 것은 초반부에서부터 암시되고 있다. 출생시 자궁으로부터 바라보는 세상, 생일날 파티 탁자 밑에서 직시하게 되는 어른들의 은밀한 성적 유희, 권위적으로 강요하는 어른들에 맞서 반항하기 위해 소리를 질러 시계유리를 깨는 장면 등에서 보여지는 개구리의 시선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소설의 배경이 단치히로 설정된 것은 우선은 원작자인 그라스의 실제 고향이라는 점을 들 수 있다. 소설 <양철북>은 단치히에서 독일인 아버지와 캬슈바이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작가 그라스의 자전적인 체험이 기본 소재가 되고 있다. 그 밖에도 이 영화의 시대적인 배경이 2차 대전을 전후로 하고 있으므로 그 시발점이 되었던 곳을 중심으로 사건이 전개되는것은 우연이 아니다. 단치히는 오랫동안 슬라브 원주민, 독일인, 폴란드인, 유태인 등 여러 민족이 공존해 왔던 도시로 따라서 민족간의 갈등과 정체성 문제가 항상 쟁점의 대상이 되었고 나치가 2차 대전의 포문을 열어서 전도시가 파괴되어 전화를 입은 것은 비롯해 이 시대의 다양한 문제점을 한 몸에 끌어안고 있던 곳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오스카의 이미지가 소시민의 속성에 대한 알레고리로서 나타나고 있는 것은 그라스의 원작에서 출발한다. "오스카 마체라트는 소시민 계층 안에서 소시민 계층의 일부로서, 또 소시민 계층의 메가폰으로서 발언하는 인물이다". 슐뢴도르프는 이런 오스카의 소시민적 속성에 천착하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현 사회에 대한 시사성에 비중을 두고 있다. 오스카 마체라트는 독일의 전형적인 소시민의 속성을 보여준다. 불평이 많고 냉정할 정도로 이기적이면서 기회주의적이다. 물론 그의 경우는 아이라는 이유로 모든 것이 허용된다. 오스카가 주변의 어른들을 모방하면서 재현하는 왜곡된 모습에서 분명해지는 것은 어른들의 행동 역시 아이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결국 아이가 모방하는 것이 아이보다 더 유치하게 행동하는 어른들의 태도라는데 이 작품의 아이러니가 있다.

오스카의 거부적인 행동은 그의 항의와 저항을 보여주지만 오스카는 그가 생각하는 만큼 영웅적이지 못하다. 주의환경의 부조리와 모순을 직시하긴 하나 영웅적으로, 적극적으로 나서서 그에 맞서 저항하고 투쟁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독일 파시즘이 성공할 수 있게 도와준 소시민 계층의 근시안적이고 비겁한 태도를 그대로 보여준다. 오스카의 이런 이중적인 속성은 그의 목소리를 상징하는 양철북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독일 소시민층의 보수성향은 1차대전의 패배로 인하여 국수주의적인 경향으로 드러나게 된다. 우선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궁핍한 생활이 주범이었고 이로 인해 생존이 위협받자 소시민들의 민족주의적 방어태도는 더욱 급진적으로 변했다. 사회주의자인 귄터 그라스의 입장으로 볼 때 이들이 가진 의식이 탐탁지 않았을 것은 분명하다. 반 유대주의와 새로운 질서라는 파롤을 표방하고 나선 나치는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트로츠키가 "파시즘의 순수한 토대는 소시민층에 있다"고까지 극단적으로 표현한 것은 나치가 소시민적 분노와 절망을 얼마나 잘 이용했나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라스의 눈에는 이들의 행동이 광대모자를 쓰고 양철북을 두드려대며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키려는 미숙아 오스카로 보였을 것이다. 즉 나치이데올로기에 현혹된 소시민 계층이 알레고리로 형상화되고 있다.

이런 것은 당시의 시대상뿐만 아니라 문화적 동기를 설명해주는 요소이다. 그러나 이런 문화적 또는 이데올로기적 동기는 그 자체로 영화/예술의 본질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폭력이라는 분위기에 의해 더욱 적나라하게 모습을 보이고 강화된다. 이 영화는 외설시비에 말려들 만큼 아주 기괴한 장면들을 많이 담고 있다.

1) 주거건물 안뜰에서 개구리를 삶은 냄비에 오줌을 누고 그것을 오스카에게 억지로 먹이며 즐거워하는 아이들은 그 모습이 천진한 만큼 당시 인간 속에 숨어있는 잔인함을 그로테스크하게 그려내고 있다. 더욱이 오스카를 괴롭히는 아이들은 같은 계층의 아이들이었으며 그것도 모자라 집단적이었다는 사실이 소시민의 폭력성을 더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영화에서 한 장면은 곧 전체를 말해준다. 이것이 문학과 다른 요소이다. 문학에서는 일반적으로 설명을 하지만 영화에서는 한 이미지를 통해 전체의 모습을 보여주곤 한다.

2) 야채상 그레프는 소년들에게 각별한 애정을 보이는데 오스카가 3살 되던 날 키를 잰다. 오스카를 문틀에 기대게 하고 키를 표시하기 위해 단도를 끄집어 낸다. 나무 기둥에 단도로 금을 긋는 순간은 히틀러가 유겐트를 부르는 장면과 흡사하다.

3) 오스카의 시선에 나타나는 성애의 장면은 아름답거나 서정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추잡하고 동물적이고 폭력적으로 묘사된다. 이런 장면을 대하면서 우리는 문학과 예술에 시대적 변천도 고려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서정 자체가 더 이상 우리에게 큰 의미를 부여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러나 사람들 중에서 아직도 그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것은 닫힌 사고를 하기 때문이다.

4) 마체라트의 식구는 바닷가에서 뱀장어를 잡는 광경을 목격한다. 낭만적 회화를 연상시키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수난절 금요일의 바닷가 풍경은 인간의 그로테스크한 행위를 통해 더욱 역겹게 나타난다. 수난절이기 때문에 아마 물고기를 먹어야 했을 테고 그 물고기를 위해 말머리를 사용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바다 낚시꾼에게 호기심을 가지고 다가선 이 식구들은 바다에서 건져낸 것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끔찍한 죽은 말의 머리인 것을 보게되고 그것을 파먹은 살찐 수십 마리의 뱀장어들을 목격한다.

1차 세계 대전 때 말의 시체뿐만 아니라 전사한 영국군들의 시체 덕분에 뱀장어들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살쪘다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낚시꾼과 아버지 마체라트는 우글우글 기어나오는 뱀장어를 신이 나서 감자 부대에 집어넣는 것을 보고 아그네스는 구토하고 만다. 그러나 오스카는 냉정하고 무감각하게 뱀장어 머리를 자르는 옆에서 빵을 뜯어먹고 있다.

5) 알프레드 마체라트는 이 뱀장어를 요리해서 싫다는 아내에게 억지로 먹이려 하자 아내는 거부하면서 피아노를 발작적으로 친다. 그 피아노 곡이 '마탄의 사수'인 것을 보면 아그네스가 그의 남편에게 노골적으로 대항한다는 함축적인 뜻이 들어 있다. 또한 아그네스를 위로한답시고 방으로 들어선 애인 얀이 신을 향해 빌고 있는 마리아 막달리아 초상화 앞에서 한 차례 성으로 달래주자 아그네스는 냉정을 되찾고 그 뱀장어를 게걸스럽게 먹는다.

뱀장어는 그라스의 그림에서도 자주 표현되고 있지만 남성의 성기를 상징하고 있다. 따라서 마체라트의 행위는 (뱀장어를 억지로 먹이려는 행위) 강압적으로 성적 폭력을 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것을 역겨워하는 것은 그에 대한 저항이다. 나중에 아그네스가 생선 폭식증으로 가는 것은 불륜관계를 맺고 있는 얀과의 욕구를 마음대로 채울 수 없음을 나타내 주고 있다. 결국 오스카의 말대로 "생선을 너무 많이 먹어서 죽게 되는" 아그네스는 폭력의 희생물이다.

결국 귄터 그라스가 이 소설/영화를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독일인의 소시민적 이기주의다. 시대의 변화를 무비판적으로 따라가며 빵에 의해서 좌우되는 그들, 이들은 나치에 무조건적으로 협력하는 알프레드 마체라트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반어와 풍자

정신병원에 수용된 오스카는 외견상 세 살짜리 난쟁이. 그러나 정신적으로는 태어날 때부터 성인의 지성을 갖추고 있다. 성인의 지성과 난쟁이의 몸이라는 이런 그로테스크한 결합은 기발한 예술적 장치로 기능하며 속물 근성의 표현인 따름인 타협과 굴종에 의해 시민 의식과 자아 의식의 균형을 이루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독일 시민 사회로붜 거리를 두고 관찰할 수 있는 시각을 제공한다. 오스카는 난쟁이이므로 정상인은 가질 수 없는 '아래로부터의' 시각 내지는'개구리 시점'에서 사물을 포착한다. 요켠대 비판하여야 할 대상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우므로 기존의 가치와 부조리에 대한 가차없는 고발이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비판적 시각의 언어적 표현법이 반어와 역설의 풍자인데, 여하간 오스카는 일상적인 선악의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라, 20세기 전반에서 중반까지의 독일 시민 사회의 모순과 역사를 집약하고 있는 알레고리적인 인물이라고 하겠다.

양철북>을 본 사람은 누구나 떠올릴 만한 것들이 있다.

어린아이의 장난스런 목소리이지만 반음조 쯤 높여져 신경질적으로 들려오는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 유리를 깰 수 있는 주인공 아이의 높은 기성, 바다에서 건져올린 말의 머리에서 꾸역꾸역 나오는 뱀장어들, 연민을 느끼게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로테스크한 난장이 연기자들.

자극적인 기억을 남겨준 이 영화의 시작은 동화 같다. 황량하고 드넓은 감자밭에서 촌부가 군감자를 호호 불며 먹고 있다. 한 남자가 경찰을 피해 달려오고 있고 그는 여자의 네겹 치마 속에 피신처를 구한다.

여자는 그를 깔고 앉아 경찰을 따돌려주고 남자는 치마 속에서 바지앞춤을 여미며 나온다.

그렇게 잉태된 이가 주인공 오스카의 엄마다. 오스카는 자신이 태어나게 된 유래를 아주 자랑스럽고 기고만장한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영화는 동화처럼 흘러가지는 않는다. 자궁 속에서부터 엄마를 동시에 사랑하는 두 남자중 어떤 이가 자신의 아버지인지를 혼동하면서, 또한 그때부터 너무나 섬뜩한 어른의 눈빛을 한 아이로 오스카가 등장하면서 이야기는 기이해져간다. 아이의 목소리도 이제는 히스테리컬하게 들려온다. 그 아이는 세살이 되던 날 자신의 눈을 통해 보이는 세상의 모습, 특히 합법적인 아버지의 눈을 교묘히 피해 성적 관계를 끈질기게 이어가는 얀 아저씨와 엄마, 그리고 그것을 알면서도 방조하는 아버지의 행태에 실망하고는 더이상 자라지 않기로 맹세하고 계단에 몸을 던진다.

그리고 그는 스물한살이 될 때까지 세살의 크기로 남아있게 된다.

얀 아저씨가 준 양철북을 분신처럼 메고 다니며. 그가 성장을 멈춘 동안 마을에 나치가 등극하고 위세를 떨치고 그리고는 패배한다. 엄마는 얀의 아이를 잉태한 채 자살하고, 아버지는 나치당원이 되고, 얀 아저씨는 폴란드인이란 이유로 나치에 의해 죽음을 당한다. 오스카가 사랑한 동갑의 마리아는 아버지의 정부가 된다. 또 독일군 위문공연에 나서는 서커스단에서 만난 난장이 여자를 사랑하고 그의 죽음을 목격한다. 그리고 패전 뒤에는 아버지로 하여금 나치를 색출하는 소련군 앞에서 자신이 버린 나치 배지를 다시 삼키게 함으로써 죽음으로 밀어넣는다.

그런 세상에 오스카가 개입하는 것은 양철북을 두드리고 기성을 질러 유리를 깨는 것을 통해서다. 엄마의 간통행위의 절정을 온동네 유리를 깨어가며 망치고, 나치전당대회를 왈츠를 추는 무도장으로 바꾼다. 성적 열정과 정치적 엄숙함은 파괴되고 희화화해 버린다. 귄터 그라스의 1959년도 소설을 각색한 이 영화는 독일역사에 대한 일종의 학습이다.

영화는 오스카라는 비정상적인 아이의 시각이라는 우회도로를 통해 이 학습에 이르게 한다. 그럼으로써 영화는 인류에 대한 최대의 죄악을 범한 이 역사에 대한 접근을 아주 기이하고 변태적인 것으로 만든다.

아버지로 대표되는 과거 독일을 죽이고 아버지가 남긴 정부와 자신의 아이일지도 모르는 동생, 즉 아버지의 짐을 지고 어딘지 모를 새로운 곳으로 떠나는 오스카는 어쩌면 독일 전후세대의 자화상이자 새로운 독일영화의 자기선언일지도 모른다.

폴커 쉴렌도르프가 새로운 독일영화의 대표적 감독들과 공유하는 감성은 바로 이러한 역사에 대한 해석에 있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 벤더스나 파스빈더 또는 헤어초크 등에서 보이는 개성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그는 독일의 정체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추구하되 그 원천을 문학작품에서 찾는다. 사회비판적이고 정치적인 소재를 다루는 데 있어서 이야기는 자극적이되 스타일은 그에 흡족한 것이 못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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