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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속의 그 길 / 이호석

 

 

"아니 왜 영도다리로 가자고 합니꺼, 바빠 죽겠는데."

운전석에 앉은 남자가 불평을 늘어놓았다. 나는 대꾸 없이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멀리 송도 바닷가에 잿빛 물결이 일었다. 내 가슴속도 불안하게 울렁거렸다. 남자는 계속 구시렁대며 용달차를 험하게 몰았다. 짐이 별로 없어 싼값에 부른 이삿짐센터 사장이었다. 남항대교로 가면 주행거리가 훨씬 짧은데 나는 그 길을 고집했다. 다시 돌아간다는 기분을 내기 위해서였다. 용달차가 자갈치시장 입구에 들어서자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오전 열시께인데도 버스와 택시, 자동차, 트럭이 왕복 사 차선 도로에 꽉 막혀 있었다. "야, 이 상놈 새끼야!" 사장이 앞으로 끼어든 택시에 고함을 쳤다. "괜한 고집을 피웠구나"하는 후회가 들 즘에 차량이 정상 속도로 나아갔다. 빗방울이 화석처럼 바랜 건어물 상가 건물에 흩어졌다. 곧이어 옛 시청 자리에 세워진 백화점이 보이고, 그 오른쪽 바다 너머에 흐린 빛깔을 품은 섬이 나타났다. 용달차가 곧장 바람의 갈기를 헤치고 다리에 올랐다. 삼십 년 만의 귀향이었다.

내가 영도로 들어온 이유가 뭘까? 마흔다섯 나이에 결혼도 못 하고 
직업도 없이 영구임대아파트로 들어온 게 과연 귀향일 수 있을까?


"단디 봐 놔라. 오늘이 이 집 마지막이다."

어머니는 등교하려는 내게 말했다. 내가 세상을 기억할 때부터 거기서 살았다. 마당에 긴 화단과 작은 연못, 큰 무화과나무가 있었다. 나비와 금잉어, 사슴벌레와 같이 유년을 보낸, 친구들에게 잘산다는 소릴 듣던 집이었다. 다다미가 깔린 다락방에서 만화를 보고, 아버지에게 매를 맞은 뒤 빈 시멘트 물탱크 속에 숨어 울고, 비 오는 날 우산을 펼치고 연못가에 앉아 동화책을 읽던, 그런 추억이 깃든 곳이었다. 중학교 이 학년 가을 녘에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그 집을 팔아야 했다. 옛 집과 버스로 오십 분 거리인 송도 인근 아버지 본가로 가족 모두 떠났다. 그 후부터 나는 알 수 없는 허전함을 껴안고 살았다. 그게 그 집 때문임을 아는데 그리 어렵지 않았다. 영도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시간이 지나도 사그라지지 않았다. '언젠가 저 집을 내가 꼭 산다, 연필 칼로 내 이름을 새긴 무화과나무 그늘 아래서 점심을 먹고 다락에 올라 북항에 깔린 별을 바라볼 거야.' 그렇게 다짐하며 서른 줄의 나이테를 늘이고 살았다. 오늘에야 그 바람이 이뤄졌다. 하지만 지금 그 집으로 들어가는 길이 아니었다. 내가 이사할 데는 아홉 평 남짓한 영구임대아파트였다.

모든 것이 빛을 잃은 느낌이었다. 해무 탓에 섬은 온데 흑백사진 같은 그림을 걸어 놓았다. 나는 밀항자처럼 건물 사이 골목 틈으로 비치는 남항 부둣가를 흘금거렸다. 밧줄에 묶인 녹슨 고깃배 깃발이 세차게 펄렁거리고, 낡은 가옥 주위로 고무 대야를 든 아줌마들이 바삐 움직이고, 추레한 행색의 사내가 술에 취해 지저분한 포구를 떠돌아다녔다. 회갈색으로 찌든 풍경을 스쳐 지나가던 차는 외할머니가 살던 동네에서 정지 신호를 받았다. 많이 달라졌으나 낙후된 분위기를 감출 수 없었다. 할머니 말에 의하면 이곳에 개가 지폐를 물고 다닌 시절이 있었다고 했다. 육이오사변 중일 때였다. 전국에서 몰려든 피난민으로 온 마을이 북적였고, 할머니는 식당을 열어 술과 국밥을 팔았다. 늙은 남편 대신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지만 주모란 소리가 듣기 싫어 얼마 안 가 그만뒀다고 했다. 딸들이 나중에 시집갈 때를 염려한 결단이었다. 잠시 차에서 내려 유리창에 '할매집'이라고 쓴 대폿집의 막걸리 한 사발이라도 축축이 삼키고 싶은 날이었다. 그러나 용달차는 아랑곳없이 신호를 무시하고 동삼동 방면으로 내달렸다.

지난날의 흔적이 조개무지로 쌓여 있는 것만 같았다. 동삼중리 어귀 언덕에 내가 다닌 중학교가 자리 잡았다. 그때가 내 인생의 전성기였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공부 잘한다는 칭찬을 들었다. 육십여 명 중에 십 등 안팎이었지만 성실하게 학교생활을 했다. 공부가 재미났고, 외교관이 되겠다는 꿈이 있었다. 학교 운동장 앞에 펼쳐진 바다를 보며 늘 외국으로 떠나는 상상을 했다. 하늘이 맑으면 대마도가 보였기 때문에 일본을 첫 근무지로 정했다. 그래서 중학생인데도 일본어회화 책을 지니고 다녔다. 가타카나와 히라가나를 외우고 '우미' '나미' '소라' '구모' 같은 단어를 중얼거리며 앞날을 대비했다. 그러나 높푸른 '소라'와 같은 꿈은 일순간 장막 같은 '구모'에 가려 버렸다. 가장 친한 친구에게 나의 꿈을 자랑스럽게 털어놓은 때였다. 그 녀석은 빈정거리듯 한마디를 내던졌다.

"우리나라 외교관에 신체장애자는 안 뽑을 낀데."

어머니와 이모들도 내게 그저 열심히 하라고만 말했을 뿐 그런 사실을 알려 주지 않았다. 그날 나는 정말로 '우미'에 빠져 '나미'에 쓸려서라도 대마도까지 닿고 싶었다.

마침내 아파트에 도착했다. 삼일 전 이 집을 처음 방문했을 때 베란다 문을 열어 두고 갔는데 여전히 악취가 났다. 전(前) 거주자가 여름 내내 문을 닫고 살았는지 방 안에 쾨쾨한 곰팡이 냄새가 배어 있었다. 그동안 비가 오지 않았는데도 창문과 방바닥에 물이 흥건했다. 해무가 자주 끼는 건 영도 특유의 기후 조건이다, 그러니 그걸 감안하고 살아야 한다. 계약할 때 들은 관리소장의 말이 생각났다. 짐이라곤 텔레비전과 냉장고, 소형 장롱과 가스레인지, 이불과 옷가지, 식기와 수저, 밥상과 책상, 컴퓨터와 책 꾸러미가 전부였다. 나와 사장이 십육 층까지 승강기를 번갈아 타며 옮겼다. 일이 끝나고 사장에게 오만 원을 줬다. 방에 어지럽게 널린 짐을 놔두고 베란다에서 망연히 밖을 건너봤다. 앞 동(棟)으로 가려진 정면 오른쪽에 태종대 첨탑이 허옇게, 왼쪽으로 무인도인 나무섬이 거멓게 보였다.

주민센터로 가서 전입신고를 마치자 즉시 휴대전화에 문자가 날아들었다. '영도구 전입을 환영합니다. 영도구청장'.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편의점에 들렀다. "난 이제 영도 주민이다. 드디어 꿈을 이룬 거야."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담배 한 갑을 샀다. "근데 기분이 왜 이래? 구청장에게 환영 인사까지 받았는데…." 이상하게 여기고 아파트 벤치에서 담배를 태웠다. 그토록 살고 싶던 곳에 정착을 했는데 이사 전보다 훨씬 심란했다. 더더욱 쓸쓸했다.

이대로 들어가 짐 정리를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옛집을 보러 동삼중리 반대 방향의 산길을 내려왔다. 도보로 삼십 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천리교 회당을 지나 새마을 길을 천천히 걸었다. 가을이면 코스모스가 만발하던 꽃길이었다. 초등학생 적 여기서 창공에 잠자리채를 휘저으며 뛰어다녔다. 바다 건너 북항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그 부두의 푸른 유류 탱크를 태권브이 같은 로봇을 숨긴 장소라고 공상하기도 했다. 거리가 많이 변해 있었다. 당시 동네 꼬마들의 놀이터였던 땅에 구청이 들어섰고, 판잣집이 즐비하던 곳에 중소형 아파트가 생겨났다. 예전 그냥 지나치던 풍경이 이젠 자세히 살펴졌다.

차도 맞은편에 내가 졸업한 초등학교로 올라가는 길목이 나타났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샛길로 우회했다. 마치 큰 죄라도 지은 것처럼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조금 더 내려가자 옛집 골목에 다다랐다. 이사한 후에도 일 년에 서너 차례씩 찾은 집이었다. 석 달 전에도 와 집 밖을 구경했다. 집 주변은 변함없이 그대로였다. 주로 밤에 왔는데 오늘은 낮인 게 다를 뿐이었다. 근데 그때는 알지 못한 사실이 눈에 잡혔다. 나의 키보다 약간 높은 담벼락을 타고 나온 무화과나무 가지가 삭정이 같이 말라 있었다. 집 안으로 들어가 확인하진 못했지만 나무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가지 끝에 달린 무화과도 탐스러운 열매가 아닌 듯 느껴졌다. 앙상한 나뭇가지에 손을 대니 금세 '툭'하고 부러졌다. '너도 늙어 버렸구나….' 곪은 열매를 들고 골목길을 나왔다. 진액이 흘러 손이 끈적거렸다. 버릴까 하다가 버리지 못하고 온 길로 돌아갔다.

방바닥에 짐을 그냥 둔 채 영도의 첫날밤을 맞았다. 하얀 수액이 들러붙은 무화과를 작은방 창턱에 놓았다. 으슥한 복도 창으로 북항이 보였다. 정박한 배의 등불이 묽은 안개에 싸여 어슴푸레 비쳤다. 내가 여기로 온 이유는 정말 뭘까? 마흔다섯 나이에 결혼도 못 하고 직업도 없이 영구임대아파트로 들어온 게 과연 귀향일 수 있을까? 낮부터 귀양지에 갇힌 죄인처럼 착잡한 맘이 수그러들지 않았다. 내가 있는 이곳은 옛날에 암자로 올라가는 산길이었다. 그 길을 어머니와 나는 시주할 물건을 들고 여러 차례 오른 기억이 있었다. 도심과 떨어진 섬, 그곳에서도 외진 장소에 난 버려진 암자처럼 처박혔다. 내 인생이 여지없이 실패했음을 지금 썩은 내 나는 방이 충분히 대변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리움 때문에 고향을 찾아왔다고 말할 수 있을까? 누가 봐도 변명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부끄러운 귀향이 아닌가?

추진 어둠 속에 또 다른 섬이 떠 있었다. "아" 하고 탄식이 터졌다. 해양대학 건물 불빛이 희미하게 번지는 그곳은 조도(朝島)였다. 아치섬…. 참 오랜만에 부르는 이름이었다. 대학교가 들어서기 전까지 부산에서 가장 먼저 아침을 맞는 섬마을이었다. 원래 아침섬인데 발음하기 편하게 아치섬으로 불렸다. 희망찬 이름과 달리 어디든 눈물과 한숨이 서렸다는 척박한 섬이었다. 한 집 건너 바다에 남편을 묻은 아낙들이 새벽부터 갯가에서 흐느끼고, 아이들이 제 아비인 양 바다를 쳐다보며 저녁까지 시름에 잠기던 곳이었다. 죽어서조차 바다에 붙들린 혼백의 울음과 남은 가족의 단내 나는 한숨 소리가 고구마 줄기처럼 질기게 이어진다고 했다. 교정에서 수십 년 만에 만난 동창생 같이 반가웠다. 나는 쇠창살 사이로 고개를 들이밀고 한참을 바라봤다. 아치섬이 서서히 안개 속으로 침식되어 갔다.

어머니가 낮에 다리를 절룩이며 왔다. 내가 이사를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그렇진 않았다. 오자마자 방에 쓰러지듯 누웠다. 나흘 만에 본 어머니는 더 늙은 얼굴이 되어 있었다. 머리 염색을 안 해서 그런지 마치 외할머니가 환생한 것만 같았다. 나는 다리에 대해 일절 묻지 않았다. 과체중으로 평상시에도 다리가 종종 아프다고 했다. 그제 친할머니 제사라 무리를 했나 보다 하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잠들 때까지 옆에서 뉴스를 봤다. 삐거덕거리는 미닫이문을 조심스레 닫고 작은방으로 가서 컴퓨터를 켰다. 영도에 온 지 벌써 삼 일째인데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스토리는 떠오르지 않고 아직 컴퓨터 펜도 익숙지 못했다. 태블릿에 펜을 움직이면 선이 매끄럽게 그어지지 않았다. 빨리 적응해야 하는데…. 컴퓨터 앞에서 넋 놓고 앉았다 커피를 끓이려고 일어섰다.

"쭈야."

싱크대에서 전기 포트에 수돗물을 받을 때 어머니가 낮게 불렀다. 문을 열자 어머니가 일어나 앉았다. 할 말이 있다는 표정이었다. 집안 식구와의 대화는 안 좋은 쪽이 대부분이었다. 기뻐하고 축하할 일이 없는 나이 든 자식에게 부모가 할 말은 질책이나 원망 따위였다. 그러나 어머니는 잔소릴 퍼붓기엔 기운이 너무 없어 보였다.

"내 어제 병원 갔다 왔다…."

평생 큰 병으로 병원 한 번 안 가 본 게 자랑인 어머니였다. 언제나 씩씩하게 살림을 혼자 도맡다시피 한 여장부였다. 좋지 않은 진단임을 알아챘다.

"어디가 아픈데?"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곤 뻔한 물음밖에 없었다. 퉁명스럽게 그런 말을 하면서 어머니에게 미안했다.

"허리디스크가 심하다 카더라. 다리에 마비도 왔다 카고."

남 말하듯 감회 없이 던진 그 말을 내가 무표정하게 받아쳤다.

"그럼 어째야 되는데?"

어머니는 얘기를 덧붙이지 않고 힘겹게 일어나 화장실로 갔다. 그래서 다리를 절뚝거렸구나,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고 벽 천장을 멀거니 올려 봤다. 어머니에게 감정을 숨겼지만 진단 결과를 듣자 불안감이 일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서 받는 생활비 일부를 내게 송금해 줬다. 어머니가 집안일을 못하게 되면 아버지는 틀림없이 금액을 줄이거나 주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내 생활에도 지장을 줄 게 뻔했다. 그리고 스산한 분위기의 그림 한 장이 휑한 벽면에 스케치되었다. 대낮 길거리에서 모자(母子)가 같이 다리를 저는 광경이었다. '하반신마비 중증장애자가 집안에 두 명이나 있다니….' 상상만으로도 비참하고 부끄러웠다. '어머니로선 어쩔 수 없는 일이야, 늙으면 다 저렇게 될 수밖에 없어….' 나는 세수하듯 얼굴을 박박 문지르며 이 상황을 수긍하려고 애썼다. 그런데 음울한 모습의 캐리커처 하나가 어수선한 머릿속을 헤집고 들어왔다. 우리 집에 장애자가 한 사람 더 있었다. 아버지는 어머니처럼 몸이 망가진 건 아니었다. 지금도 팔십 가까운 노인네치고 잘 걸어 다니는 편이었다. 그러나 예전부터 술만 마시면 어머니에겐 화냥년, 내겐 병신새끼라며 식칼을 들고 설쳤다. 병명은 알코올 의존성 인격장애였다. 그건 의사의 소견이 아니라 내가 인터넷 검색을 통해 내린 결론이다. 포악한 성격의 정신병자가 스스로 병원에 찾아가서 진료를 받는 경우는 없다. 조울증과 강박장애 증상도 있었다.

"수술하라드나?"

내가 다시 묻자 어머니는 희끗한 웃음을 보이고 딴전을 부렸다. 수술하기 싫다는 뜻이었다. 지금까지 폭력에 시달려도 어머니는 남편보다 의사를 더 두려워했다. 아버지의 상욕과 손찌검보다 더 끔찍한 건 주삿바늘이고 메스였다. 그건 내가 갓난아기 때 소아마비로 여러 병원을 전전한 경험이 한몫했을 것이다. 병원 소독약 냄새만 맡아도 가슴이 답답하다고 번번이 토로했다. 제 새끼 하나 제대로 키우지 못하고 장애자로 만들었다는 죄책감 때문인지 어머니는 병원이라면 고개부터 내저었다.

"내가 수술하믄 영감재이 밥은 누가 차려줄 낀데? 차츰 괜찮아지겠지. 근데 말이다…. 내가 지금 다리가 억수로 아프니까네 잠시 여서 쉬었다 가야겠다. 그래 말하니까 니 아부지도 암 말 안 하더라."

칠순이 되어도 남편 밥상 걱정을 하다니, 어이가 없었다. 노예도 이런 노예는 없을 것이다. 아버지가 송도로 가서 실업자가 됐을 때 어머니는 집 앞에 슈퍼마켓을 차려 생계를 꾸렸다. 외할머니도 가게서 쪽잠을 자며 큰딸인 어머니를 도왔다. 오년 후 도로확장공사 보상금으로 삼층 상가 건물을 지어 월세를 받고 살게 되었다. 그러나 그 돈은 아버지가 다 챙기고 관리했다. 더구나 아버지는 외할머니가 오면 본체만체하며 냉대했다. 가게를 할 때 장모 눈치 보며 술값을 받아 가던 인간이 하루아침에 돌변했다. 그 상처 때문에 남몰래 피눈물을 쏟던 어머니 모습을 적잖게 봤다. 난 그 이후부터 아버지를 정상으로 보지 않았다.

나는 말없이 작은방으로 가 문을 닫고 드러누웠다. 다리를 뻗자 방문에 걸려 비스듬한 자세로 바꿔야 했다. 할머니 다리를 벤 어릴 적 모습이 눈앞에 어렸다. 늘 혼자 지내던 할머니는 내가 오면 자신의 무릎에 눕게 하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게만 베풀던 할머니 식 최고의 애정 표현이었다. 자기 손에 아들 하나 없는 게 한이 되어 손자 중 맏이인 나를 끔찍이도 아꼈다. 할머니의 주름진 손이 이마에 와 닿는 감촉을 느꼈다. 은하수 담배 향이 콧속에 그윽하게 퍼지는 듯했다. 그때의 할머니 모습으로 복제된 어머니가 큰방에서 외롭게 코를 골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내리 잠만 잤다. 저녁을 먹기 싫다며 계속 누워 자다 깨고를 반복했다. 이십 년 전 할머니가 췌장암에 걸렸을 때도 저랬다. 곡기를 끊고 온종일 일어나지 않았다. 그즈음 나는 한 모임에서 만난 여자 친구와 매일 놀러 다녔다. 가족 이외 유일하게 날 이해하고 사랑을 베푼 천사 같은 여자였다. 난생처음 해 보는 연애였기에 할머니의 생이 얼마 남지 않은 사실을 알고서도 거의 찾지 않았다. 할머니는 죽어 가고 있었고, 나는 인생의 가장 뜨거운 날을 보내는 중이었다.

아파트를 나와 동삼중리 해안도로를 걸었다. 몇 년 전만 해도 인도가 없었는데 산책할 수 있도록 도로 가에 널찍한 나뭇길을 만들어 놓았다. 멀찍이 송도 야경이 은은히 보이고, 어둠을 덮어쓴 천마산 형체가 어른거렸다. 하늘에서 용마(龍馬)가 내려왔다는 전설을 가진 영산(靈山)이지만 내겐 고통스러운 기억만이 날뛰는 곳이었다. 줄곧 그 자락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거기서 이곳을 바라보며 눈물을 삼킨 적도 많았다. 할머니에게 슈퍼마켓을 맡긴 어머니가 저녁을 지을 무렵, 술에 취한 아버지가 돌아와 이유 없이 머리채를 잡았다. 산발이 된 어머니는 부엌 바닥에 퍼질러 앉아 울부짖었다. 비명에 놀란 나는 집을 뛰쳐나와 부들거리는 몸이 진정될 때까지 바다 건너를 응시하곤 했다. 천마산 기슭에 웅크린 괴물이 나를 쫓아오지 못하도록 바다가 울타리 역할을 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저편에서 이 섬을 애타게 그리워했다.

번잡한 영선 로터리를 지나 적막한 주택가에 이르렀다. 할머니가 살던 슬레이트집은 이층짜리 연립주택으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집 근처 청과시장 터엔 노인요양원이 지어졌다. 여름방학이면 할머니 집에서 살다시피 했다. 할머니는 시장에 가서 참외며 수박을 사 왔다. 내가 대본소에서 빌린 만화를 볼 때 할머니는 부엌칼로 과일을 싹둑 잘라 도마째로 내밀었다. 언제나 트럭이 쏟아 놓은 과일 향이 퍼지고 경매 나온 사람들로 붐볐다. 봉래산 철탑안테나 조명은 아직도 붉게 반짝이는데 골목거리에 그 향긋한 내음은 더 이상 맡을 수 없게 되었다. 영도에만 오면 넉넉하고 포근하던 시간 속으로 저절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 내가 어리석었다. 맡고 먹고 기대고 안겼던 환영에 이끌려 여기까지 온 게 후회가 되었다. 이제 여기는 송도보다 더 낯선 동네일 뿐이었다. 변형된 추억의 풍경을 뒤로하고 할머니 아바타가 기다리는 집으로 허탈한 발걸음을 옮겼다.

새벽 두시인데도 잠이 오지 않았다. 컴퓨터를 켜고 포토샵을 열었다. 그다음 폭 690(픽셀), 높이 1000(픽셀)의 새 문서를 만들었다. 그 속에 무엇이든 그려야 하는데 손이 얼어붙은 것처럼 움직여지지 않았다. 머릿속에 아무런 이미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년 전에 웹툰을 시작했다. 그전까지 컴퓨터로 만화를 그려서 보여 준다는 건 알았지만 내가 할 수 있으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내게 만화는 그저 할머니 곁에서 과일을 먹으며 보던 종이 만화였다.그런데 어느 날 나는 웹툰 작가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웹툰에 대한 열망은 그렇게 뜬금없이 시작되었다. 마흔셋에 그런 일에 뛰어든다는 건 누가 봐도 무모한 짓이었다. 이십 대 작가들이 넘쳐나는 판에 사십대가 학원에서 포토샵 기초를 배우고 방구석에 틀어박혀 만화를 습작하는 걸 아무도 이해해 주지 않았다. 그때부터 영구임대아파트 신청을 하고 집 나올 준비를 했다. 옛날 잃어버린 꿈을 고향에서 되찾고 싶었다. 꿈길처럼 거닐던 유년의 바다와 언덕에서 다시 출발하고 싶었다. 그런데 어느 날 나는 웹툰 작가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웹툰에 대한 열망은 그렇게 뜬금없이 시작되었다. 마흔셋에 그런 일에 뛰어든다는 건 누가 봐도 무모한 짓이었다. 이십 대 작가들이 넘쳐나는 판에 사십대가 학원에서 포토샵 기초를 배우고 방구석에 틀어박혀 만화를 습작하는 걸 아무도 이해해 주지 않았다. 그때부터 영구임대아파트 신청을 하고 집 나올 준비를 했다. 옛날 잃어버린 꿈을 고향에서 되찾고 싶었다. 꿈길처럼 거닐던 유년의 바다와 언덕에서 다시 출발하고 싶었다. 

어머니 걸음은 나보다 못했다. 정류소까지 굉장한 인내가 소요되었다.  
며칠 전까지 괜찮던 다리가 순식간에 무너져 내린 게 믿기지 않았다.

 

내 인생에서 새로운 계기가 될 것 같았다. 집을 나오면 모든 게 잘 풀릴 거야, 지금처럼 아버지 눈치 보지 않고 살 수 있을 거야. 이런 생각으로 두 해를 버텼다.

 

그러나 어떤 그림도 화상에 채울 수 없었다. 여기만 오면 재밌고 감동적인 스토리가 봇물처럼 터져 나와 금방 웹툰 작가가 될 것이란 희망이 불과 나흘 만에 좌초되었다. 그리고 건강하던 어머니마저 병든 할머니로 바뀌어 함께 떠밀려 왔다. 큰방에서 다리가 아픈지 끙끙거리는 소리가 반복해 들렸다. 아까부터 소변이 마려웠지만 화장실에 가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내 기척을 들키는 게 싫어 방에 우두커니 앉아만 있었다.

 

들려오는 소리 하나하나에 촉각을 세우는 밤이었다. 할머니의 환갑날 밤이 그랬다. 딸 여섯과 사위 여섯이 할머니 집에서 조촐하게 잔치를 하고 난 뒤였다. 나는 잠이 들었다가 깨었다. 그리고 할머니가 이모들을 두고 뭔가 심각한 얘길 하는 소리를 엿들었다. 할머니가 눈물 섞인 넋두릴 이어 갔다.

 

"내가 열여섯에 시집가가 열여덟에 딱 과부가 된 기라. 가시나 하나 놓고 남편이 고마 죽어삣다 아이가. 눈물 콧물로 시집살이를 보내는데 그 집 먼 친척이라는 늙수그레한 남자가 어느 날 나한테 와 가꼬 영도다리 구경 가자고 살짝 꼬시더라고. 그때가 왜정시대 땐데 부산에 생긴 영도다리에 대한 소문이 파다했다. 아, 글쎄 다리가 하늘로 번쩍 올라간다며 보고 온 사람들이 이바구해 쌌는데 그 다리 한 번 보믄 저승길이 편하게 열린다고 난리도 아니었다. 그래서 무작정 그 노인네 따라나선 기라. 부산에 도착해서 그 기막힌 구경 한 번 하고 고마 그날로 코가 끼 삐따 아이가. 다시는 고향에 못 돌아가고 여서 그 노인네랑 같이 한이불 덮는 신세가 돼버리 뿟다. 고향에 핏덩이 같은 딸내미 한 년 내삐리고 이날꺼지 너희들 놓고 눌러 앉아뿌고 말았다. 근데 그 영감탱이 알고 보니 이 동네 근방에 늙어빠진 왜년 마누라가 하나 있더라고. 그 여편네가 아를 못 놔서 날 데리고 온 기라. 내 팔자도 참…."

 

나는 그때 하늘로 끌어올려진 다리를 상상했다. 시청 앞 게시판 흑백사진 속에서 봤던 광경에 상상력을 덧붙여 머릿속으로 그렸다. 무거운 다리가 번쩍 올라가자 뱃고동을 울린 큰 배가 다리 사이를 지나는데 남포동에 엄청난 사람들이 몰려 있고, 일본 순사가 호루라기 불어 대며 고함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고, 마침내 배는 바다 멀리 떠나고 인파들이 갈매기 떼처럼 다리보다 높이, 하늘로 훨훨 날아가는 꿈을 꾸며 다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할머니의 저승길은 영도다리 때문에 편안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품 안에서 할머니는 임종했다. 온몸 구석구석 암이 퍼져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쉽사리 목숨을 버리지 않으려 했다. 어머니는 순간 임종 염불을 하지 않은 걸 깨달았다. 할머니의 유일한 안식처와 같았던 절에서 항상 읊조리던 왕생기도문이었다. 어머니는 서둘러 책을 찾아 기도를 할머니 귓가에 바쳤다. 어머니 다리 맡에서 할머니는 비로소 평안한 얼굴이 되어 갔다. 그 시각에 나는 여자 친구와 영화를 보고 있었다. 그런 죄의식 때문이었을까? 할머니 장례 때 술에 취한 아버지가 낄낄거리며 이모들에게 큰소리로 농담을 하는 모습에 격분해 대판 싸웠다. 한 달간 나는 막내 이모 집에 있어야 했다.

 

아침이 왔고 영도는 안개로 뒤덮였다. 베란다 창에 오십 미터 거리의 앞 동(棟)이 안 보일 정도였다. 이곳의 안개는 성난 바다와 닮았다. 너울처럼 굽이치며 공중으로 마구 밀어닥쳤다. 이런 안개구름은 송도에서 좀처럼 보지 못했다. 사방이 바다인 산 중턱에 자리 잡은 아파트 지형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 섬의 지명대로 모든 게 그림자로 변했다. 모두 희미해진 것 같이 모조리 잊어버리고 싶은 아침이었다. 어머니와 같이 아침을 먹고 텔레비전을 봤다. 투명인간을 대하듯 서로 간 침묵이 바깥 안개보다 더 자욱이 감돌았다. 나는 베란다로 가서 아스라이 몸을 감춘 세상에 담배 연기를 흩날렸다.

 

"니 하는 일은 잘 돼 가나?"

 

어머니가 먼저 괴괴한 안개를 걷어 냈다. 나는 어떤 응답도 없이 한숨 섞인 연기를 연거푸 내뿜고 안개 속으로 숨었다. 사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앞으로 살아갈 길이 막막하다. 그렇게 실토해서 내 가슴 밑바닥에 떠도는 안개의 실체를 드러내고 싶었다. 담뱃불을 끄고 어머니를 곁눈으로 살펴봤다. 러닝셔츠에 축 처친 뱃살이 먼저 눈에 띄었다. 긴 세월 아버지의 폭언과 폭행으로 생긴 울증을 폭식으로 달랬기 때문이었다. 그에 비해 다리는 너무 앙상했다. 몸에서 다리만 희뿌옇게 덧칠된 듯했다. 나는 주섬주섬 옷을 입고 어머니에게 바람 쐬러 가자고 했다. 걷는 게 불편한데 외출이라니, 어머니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소리를 질렀다.

 

"무조건 걸어야 된다, 인자 안 걸으면 영원히 못 걷는다!"

 

막무가내로 어머니의 옷을 챙겨 입히고 나왔다. 역시 어머니 걸음은 나보다 못했다. 아파트 근처 버스정류소까지 굉장한 인내가 소요되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 괜찮던 다리가 순식간에 무너져 내린 게 믿기지 않았다. 나는 힘든 티를 내지 않도록 조심하며 어머니의 손을 잡고 걸었다.

 

버스를 타고 남항동으로 갔다. 어머니는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일부러 이곳을 피했다. 아린 기억의 멍울을 가슴속에서 덜어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어머니의 눈물이 고인 송도를 싫어하는 것처럼 어머니는 영도를 좋아하지 않았다. 자기 어머니의 한 많은 일생과 나이 많은 아버지에 대한 부끄러움, 그리고 소싯적 가난으로 받은 상처들이 그 터에서 유령으로 살아나 자신을 괴롭히는 걸 바라지 않았다. 갑자기 어머니는 다리가 끊어질 듯 아프다며 할머니 집 쪽으로 가는 걸 마다했다. 그래서 거길 지나치는데 어머니가 걸음을 멈췄다. 기다란 한숨을 쉬며 구부정한 허리를 힘들게 폈다. 그리고 멀리서나마 옛 집터와 마주했다. 무엇을 확인하는 것처럼 입을 앙다물고 가만히 바라봤다. 나는 어머니 뒤에서 함께 그쪽을 바라다봤다. 지금 어머니는 어떤 생각을 할까. 그래도 할머니와 같이한 젊은 날이 좋았다고 회상할까, 아니면 다시는 여기에 안 오겠다고 결심할까.

 

어머니는 돌아서서 내 손을 잡았다. 할머니가 오갔던 시장과 은행, 입원했던 병원을 거쳐 우린 영도다리로 향했다. 고정된 교각을 허물고 하늘로 치솟던 옛날로 돌아갈 공사가 한창이었다.

 

"한 스물 두셋 정도 됐나, 내가 직장 다닐 때 다리가 저렇게 굳었다 아이가. 마지막으로 다리 들어 올리는 날이 구월 다 됐을 땔 끼야. 하이고 말도 마라, 어찌나 인간들이 많이 와 가꼬 구경하던지 떼밀려서 죽을 뻔했던 게 지금도 생생하다. 택시가 경적을 마구 울려 쌌고 사람들이 올라가는 다리 난간을 붙잡고 같이 올라가고 순경이 와서 뜯어말리고 진짜 난리도 아니었다. 지금 보니까 그때 생각이 확 나네."

 

어머니는 신이 난 듯 목청을 높여 얘기를 들려줬다. 처녀 때 마지막으로 본 모습을 오십 년 가까이 지난 후 다시 보면 저런 표정일까, 새 다리가 번쩍 들리는 올 연말쯤 어머니 다리도 예전처럼 성해져 있을까, 그리고 어쩌면 어머니도 저승길이 환히 열린다고 나와 같이 영도에 눌러앉게 될까. 나는 여러 가지 후일을 그려 보면서 임시로 설치된 교량을 밟았다. 철판에서 탕탕거리는 소리가 났다.

 

비바람 치는 다리를 다리가 불편한 우리는 끝까지 갔다. 나는 이력이 났지만 별안간 장애자가 된 어머니는 마라톤 선수처럼 숨을 헐떡이며 울상이 되었다. 약재상 거리 근처에서 아파트로 돌아가는 택시를 잡아탔다. 어머니는 널브러진 채 물끄러미 차창 풍경을 내다봤다. 그리고 옆에 앉은 내 어깨에 백발을 기댔다.

 

아파트 복도에 아버지가 서 있었다.

 

"점심은 드셨소?"

 

어머니의 말에 아버지는 잔뜩 화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머니는 다리를 끌면서 밥상을 차렸다. 아버지는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언제나 그렇듯 아버지는 말없이 뉴스를 보고 어머니는 옆에서 석고상처럼 앉아 있었다. 내가 복도에 담배를 피우러 간 사이 아버지에게 무슨 말을 들은 모양이었다. 방에 들어가자 어머니가 송도 집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자기가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니라는 말투였다. 나는 아버지를 노려보았다. 아버지는 날 외면하고 어머니와 나갔다. 또 어머니는 거기서 남편의 욕설을 듣고 주저앉을 때까지 무거운 짐을 일 것이다. 이혼하란 말도 이제는 못하겠다. 할머니가 일부종사를 못 해 파란 많게 살았다며 자신은 죽어도 안 그러겠다는 소리를 할 게 뻔했다.

 

어머니가 떠난 방에 홀로 남았다. 안개가 더욱 사정없이 몰아닥쳤다. 나무섬이 뿌리 뽑히듯 잘려나가고 태종대 첨탑이 흔적도 없이 내려앉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저녁에 혼자 밥을 먹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몸뚱이에게 멱살이 잡힌 듯 컴퓨터 앞에 억지로 앉았다. '대체 무얼 그려야 하나….' 손가락 하나 까딱 못할 만큼 무기력감을 느꼈다. 가슴이 조여오고 밑도 끝도 없는 불안에 휩싸였다. 더 깊은 수렁으로 빠지기 전에 나는 얼른 인터넷 검색창에 '영도다리'를 써넣었다. 그런 후 이미지 한 장을 캡처해 내사진 파일에 저장했다. 이어 포토샵 작업창에서 'Ctrl O'를 클릭해 그 이미지 파일을 열었다. 그러고 나서 'Ctrl C'를 쳐서 영도다리 사진을 알맞은 크기로 복사했다. 계속해서 다리의 한쪽을 'Ctrl T'를 이용해 움직일 수 있도록 변형시켰다. 난 컴퓨터 펜으로 선택된 반쪽을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더더더더더! 마치 교량관제사가 된 것 같이 외쳤다. 육중한 콘크리트 더미가 가볍게 세로가 되었다. 포토샵을 배운 후 맨 처음 파일에 보관한 문서가 있었다. 굵은 가지와 무성한 잎의 무화과나무 아래 세 사람이 함께 찍힌 빛바랜 사진이었다. 정정한 노인과 너무나 젊고 예쁜 여인, 그리고 장난스럽게 웃고 있는 중학생이 서로 의지하듯 꼭 붙어 있었다. 죽음과 멀어 보이고, 영영 아프지 않을 것 같고, 자신만만한 소년의 모습을 정교하게 오렸다. 이제 솟대처럼 솟은 다리 앞에 그들을 붙여넣기만 하면 됐다. 나는 'Ctrl V' 버튼을 눌렀다.

 

삶의 굴곡진 선과 과거의 일그러진 면, 현실의 갑갑한 부피도 이렇게 간단하게 수정할 수 없을까. 합성하고 시공을 초월해 원하는 대로 갖다 놓을 수 없을까. 언제쯤 'Ctrl N'을 입력해 새로운 이미지를 완성하게 될까. 아치섬이 검붉게 지워진 고독한 저녁이었다.

초등학교 길목 반대편 어둠 속에 나는 몸을 숨기고 있었다. 행여 누구에게 들킬까 봐 조심스레 약국을 주시했다. 청소를 마친 여자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얼굴을 또렷이 볼 수 없었지만 그 여자의 머리 모양과 하얀 가운에 드러난 몸매만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녀가 거기 있다는 소식을 최근에 전해 들었다. 그래서 영도로 오길 망설이기도 했다. 사실 그녀가 여기로 오리란 걸 오래전 만날 때부터 눈치챘다. 나와 자주 영도에 대해 얘기했고 그녀는 이곳을 맘에 들어 했다. 중형차가 약국 앞에 멈춰 섰다. 중년 남자가 딸 같은 초등학생과 함께 내려 안으로 들어갔다. 여자가 아이를 끌어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 남자가 나와 셔터를 내렸다. 세 사람은 자가용을 타고 옛집 방향으로 떠났다.

 

나는 모퉁이 벤치에서 일어났다. 구청 옆에 영도관광 안내판이 보였다. 거기에 영도 지명의 유래가 적혀 있었다. '영도(影島)의 본래 이름은 절영도(絶影島)였다. 하루에 천 리를 달리는 천리마가 빨리 달리면 그림자가 못 따라올 정도라 하여 끊을 절(絶), 그림자 영(影)을 붙여 절영도라 불렸다….' 나는 나귀처럼 고개를 크게 끄덕거리고 집으로 향했다.

 

어제 어머니가 떠난 뒤 잠을 설쳤다. 오늘 아침 나는 태종대로 갔다. 초·중학생 때 사생대회가 자주 열린 곳이었다. 울창한 소나무 숲과 짙푸른 바다를 담은 수채화로 수차례 입상했다. 되새겨 보니 빛과 같은 꿈을 그린 시간이었다. 순환열차가 돌아 나가는 이 섬 끝머리에 다다랐다. 자살바위라고 부르는 곳으로 내려갔다. 낭떠러지에 서자, 바르르 몸이 떨렸다. 여기서 끝내고 싶다는 유혹이 바다로 번져 갔다. 거칠게 등을 떠미는 해풍에 휘청거리고, 고단한 눈이 저절로 감겼다. "나는 비겁한 놈입니다! 언제나 무서워서 도망만 쳤습니다! 또다시 막다른 길에 몰리자 여기로 숨었습니다! 돌아왔다는 거짓말을 하면서!" 바위 꼭대기에 엎드려 설움을 토해 냈다. 요란한 마차 바퀴 소릴 내며 굴러오는 파도와 한참 울컥거리는 소리를 섞었다. 가슴팍을 짓누르던 뭔가가 떨어져 나가는 걸 느꼈다. 지금껏 고삐처럼 매여 있던 그것, 끊어 버릴 수 없었던, 겹겹이 쌓아놓은, 암색으로 얼룩진 그림들이 한 줌의 재 같이 부피도 없이 날아오를 때, 어디선가 고동 소리가 울려 퍼졌다. 눈을 떠 보니 어느새 낮게 깔린 먹구름이 달아났다. 일생 그치지 않을 것 같은 안개비가 사라지고 세찬 바람도 섬을 떠났다. 사방에 시린 빛이 몰렸다. 윤나는 자갈처럼 섬 전체가 투명한 조각으로 변해 있었다. 푸른빛으로 찰랑거리는 그곳에 뱃길이 열렸다. 전망대 앞 모자상(母子像)에 새하얀 이슬이 맺혔고, 새마을 꽃길까지 황금빛 노을이 젖어 있었다. 어릴 때 뛰놀던 집 마당같이 평온한 북항 바다를 바라보며 초등학교 초입까지 걸었다.

아치섬 위에 별이 떠오르고 닻을 끌어올린 배가 먼바다로 나아갔다. 

 

 -끝-

 

 

 

 

[2014 신춘문예-단편소설 당선소감] "따스한 위로가 되는 얘기 만들고 싶어"

오래전 겨울밤, 거리에서 본 한 사람이 잊히지 않습니다. 풀빵 파는 아낙이었습니다. 여인은 혼자 책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 책을 힐끗 봤습니다. 아들 수술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자신의 각막을 팔고 죽는 아버지 이야기였습니다. 그녀의 한기를 녹이고 있는 건 난롯불이 아닌 소설 한 권이었습니다.

사람마다 취향과 평가가 다를 수 있겠지만 저는 그런 소설을 쓰고 싶습니다. 외롭고 힘든 그들에게 따스한 위로가 되는 얘기를 만들고 싶습니다. 누구에게나 쉽게 읽히고 공감할 수 있는 그런 글을 쓰고 싶습니다. 또 한 가지, 내가 소설을 쓰는 목적은 용서를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나로 인해 상처받았던 이들에게 글로서 무릎 꿇고 사죄하고 싶습니다. 정말 그러고 싶습니다. 이제 만날 수 없기에 한 자 한 자가 더 간절히 느껴지는 그들입니다. 먼저 돌아가신 신정분 배정분 할머니 두 분에게, 박현숙 선생님과 현진이에게 용서를 빕니다. 그땐 정말 철이 없었다고, 사랑에 대한 고마움을 몰랐다고 고백하면서 나의 보잘것없는 소설을 전하고 싶습니다. 앞으로 용서를 청할 이들이 더욱 많아지리라 생각됩니다.

부모님과 가족에게 쑥스럽지만 고마움을 전하고, 글판으로 이끌어주신 고(故) 박시원 선생님과 훌륭한 소설 스승이신 김헌일 선생님, 그리고 '문창 날개' 식구들에게 이 영광을 돌립니다. 심사위원 여러분과 부산일보사에도 감사드립니다.

이호석 / 1968년 부산 출생. 경남고 졸업. 케이블 방송 FTN 작가.

 


 

[2014 신춘문예-단편소설 심사평] "작은 이야기, 하나의 큰 물길로 모으는 서사 능력 탁월"

응모 작품이 300여 편에 이르렀다. 어려운 시대를 소설 형식으로 살펴 이겨 내려는 의지들이 응집된 것일까. 하지만 본선에 오른 8편의 작품 모두가 팍팍한 현실과 치열하게 맞서고 있지도 않다는 점에서 갑자기 늘어난 투고 현상에 대한 해석이 쉽지 않아 보인다. 

먼저 4편을 골랐다.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독거노인들의 세계를 안락사로 접근하는 '행복장의사'는 소재의 충격성을 소화시켜 줄 수 있는 서사적 구조를 만들지 못했다는 점에서 아쉬웠다. 

'선고'는 전·의경 이야기를 권력의 속성이나 본질 문제로까지 끌어올린 작품이다. 아주 치밀한 상황 설정과 심리묘사에 힘입어 하나의 완결된 세계를 구현하고 있지만 이인칭 화자를 동원한 서술방법이 문제의식에 대한 후퇴와 더불어 지나친 내면화로 내몰고 말았다.

'CCTV의 매혹에 관한 타자론적 고찰'과 '섬 속의 그 길'은 소재와 서술 방법이 극명하게 대조되는 작품이다. 감시사회를 사는 현대인의 모습을 글 쓰는 행위를 통해 존재론적 차원으로 형상화한 'CCTV의 매혹~'은 주제에 다가가는 사유의 깊이를 담보하는 언어 조탁 능력이 귀하고 독특한 재능으로 확인되지만 빈약한 서사가 마음에 걸렸다. 반면 장애인을 주인공으로 하여 고달픈 가족사를 영도의 여러 장소성을 빌려 이야기하는 '섬 속의 그 길'은 서사는 승하지만 잦은 장소의 이동이 자칫 스토리텔링의 확산으로 보일 수도 있어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작은 이야기들을 하나의 큰 물길로 모으는 서사 능력과 남루와 절망을 떨치는 과정의 진지함을 높이 사 당선작으로 했다. 응모자 모두의 정진을 바란다. 

심사위원 김성종·조갑상·박명호·정영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