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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 김태우

 

 

 

-집을 나설 때면 엄마는 반드시 당부했어요.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죠. 밖으로 나가면 안 돼. 모르는 사람은 들이지 말고. 밥은 꼭 챙겨먹어. 이 세 가지였어요.

겨울 해는 일찍 졌다. 리버는 버스 정류장에 서 있었다. 꼬마가 엄마의 당부를 어긴 건 순전히 크리스마스 카드 때문이었다. 손수 만든 크리스마스 카드를 조금이라도 빨리 엄마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리버는 기절할 만큼 기뻐하는 엄마를 상상했다. 

"메이시스 백화점 가죠?"

리버가 운전기사에게 물었다. 

운전기사가 리버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너, 혼자니?"

"네."

"몇 살이니?"

"일곱 살이요."

"길을 잃었니?"

"아뇨. 백화점에 가는 길이에요."

"똘똘하구나. 뒤에 앉아라. 내릴 때가 되면 알려주마."

백화점은 피난선처럼 붐볐다. 리버는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한곳에 운집해 있는 광경을 처음 보았다. 꼬마는 인파를 헤집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엄마는 화장품 매장에서 일한다고 했다. 매장으로 들어서자 향긋한 냄새가 풍겨왔다. 대런 이모는 아무나 화장품 매장에서 일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했다. 엄마가 엄청나게 예쁘기 때문이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매장을 순회하면 할수록 꼬마는 불안해졌다. 한눈에 봐도 매장의 여점원들은 엄마보다 훨씬 젊고 예뻤다. 엄마는 어디에도 없었다. 어쩌면 엄마가 벌써 집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고 리버는 생각했다. 

리버는 오줌이 마려웠다. 매장 안은 거기가 거기 같았다. 긴장이 아랫배에 살살 더해지고 있었다. 어렵사리 찾아낸 화장실 앞에 한 여자가 서 있었다. 여자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여자의 유니폼은 화장품 매장의 점원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추레했다. 검정 슈트를 입은 남자가 여자를 향해 연신 삿대질을 해대고 있었다. 화장실을 들락거리는 사람들이 여자를 힐끔거렸다. 여자는 수치심에 목덜미까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리버는 머릿속이 하얘졌다. 황급히 몸을 돌려 왔던 길을 잰걸음으로 되돌아갔다. 멈춰서는 안 돼. 꼬마는 되뇌었다. 엄마가 도착하기 전에 집에 가 있어야만 했다. 꼬마는 매장에서 길을 잃었다. 나가는 문이 어딘지 알 수 없었다. 

리버가 백화점의 라운지로 들어섰다. 라운지의 한가운데에 그랜드피아노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크리스마스 이브를 맞이해 작은 연주회라도 열리는 모양이었다. 연미복을 입은 남자가 그랜드피아노에 기대선 채 소다수를 홀짝이고 있었고 그 옆에서 콧수염을 기른 흑인이 콘트라베이스를 조율하고 있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요? 그러니까 정체불명의 목소리 같은 거였어요. 어디서 들려오는지, 누구의 목소리인지, 왜 하필 내게 말을 거는지. 아무 것도 알 수 없었어요. 뭐하고 있어? 저기가 네 자리잖아. 그 목소리가 말했어요. 다들 알고 있는 걸 왜 나만 모르냐는 투였죠. 실은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금방이라도 엄마가 쫓아올 것만 같았으니까요. 다짜고짜 피아노 의자에 앉았어요. 피아노가 나를 숨겨주기라도 할 것처럼.

조사한 바에 따르면 리버의 혈통은 아일랜드계 미국인이었다. 적어도 미국으로 이민을 온 이후로 그의 가계에는 음악과 관련된 직종에 종사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리버의 부모도 예외는 아니었다. 

-대런 이모는 말하곤 했어요. 나만 없으면 엄마는 지금이라도 얼마든지 새 출발을 할 수 있다고 말이에요. 어느 날 아침 눈을 뜨면 엄마가 달랑 쪽지 한 장을 남기고 사라져버릴 것 같았어요. 누구에게도 이런 말을 한 적은 없어요. 말해버리면 정말 그렇게 될 것만 같았으니까요. 내 안에서 뭔가가 소용돌이치고 있었어요. 이상하게 몸이 뜨거워졌어요. 피아노를 치면 내 안의 슬픔이 깡그리 어딘가로 쓸려갈 것 같았어요.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나도 몰라요. 그러니까 그건 묻지 마세요. 하여간 그런 느낌에 붙들린 거예요. 

흑인 콘트라베이시스트는 흥미롭다는 듯이 리버를 보았다. 리버의 손이 건반 위에서 나비의 날개처럼 나풀거렸다. 맑고 청아한 소리가 피아노의 울림통에서 흘러나왔다. 백화점의 공기를 타고 현의 떨림이 전해졌다. 강음부와 약음부의 강약 조절까지 세심히 신경 쓴 연주였다. 쇼핑을 하느라 여념이 없던 사람들이 일제히 걸음을 멈추고 그랜드피아노 쪽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무언가에 이끌리듯 천천히 걸음을 옮겨 피아노 주위로 몰려들었다. 사람들이 둥그런 원을 그리며 리버를 에워쌌다. 

미란다는 대체 무슨 일인가 싶었다. 그녀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한 꼬마가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다. 보면서도 그녀는 믿을 수 없었다. 어떤 일이 발생하더라도 고객의 쇼핑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내부 규정이 있었다. 연주를 멈추게 해야 해. 그녀는 반사적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소란을 야기한 장본인이 자신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발각될 테고, 그렇게 된다면 엄한 불똥이 튈지도 몰랐다. 

매장 총책임자가 당도한 것과 미란다가 피아노로 다가선 것은 거의 동시였다. 건반 위를 오가던 리버의 손이 갑작스레 얼어붙었다. 연주는 멎었다. 3초 정도 정적이 흘렀다. 리버의 가랑이 사이로 오줌이 흘러내렸다. 바지를 짙게 물들이며 흘러내린 오줌이 밑단에서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사람들의 입에서 탄성이 새어나왔다. 매장 총책임자는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박수를 치기 시작한 사람은 콘트라베이시스트였다. 뒤이어 연미복을 입은 사내와 사람들의 박수가 터져 나왔다. 리버가 피아노 의자에서 일어나 미란다의 품에 안겼다. 매장 총책임자는 이 상황을 어떻게 처리해야할지 몰라 눈매가 가늘어졌다. 사람들의 박수가 잦아들자 그가 짐짓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 곡 더 부탁해도 되겠니?" 

리버는 매장 총책임자를 노려보았다. 매장 총책임자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고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꼬마의 귓가에 입술을 대고 속삭였다. 

"사람들이 기다리잖아."

그의 손이 리버의 어깨를 잡았다. 리버가 그 손을 뿌리쳤다. 어깨를 야무지게 밀어버렸다. 쪼그려 앉은 그의 무게중심이 뒤로 쏠렸다. 오줌이 내깔겨진 바닥에 주저앉았다. 서둘러 일어서려 했지만 바닥이 미끄러워 버둥대다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어떤 음악이 있습니다. 인간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믿기 힘든 음악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음악은 듣는 이들을 속속들이 점령해버립니다. 운 좋게도 나는 그 해 크리스마스 이브에 그런 음악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클래식 전문기자의 자격으로 말하자면, 리버의 연주는 불완전하고 즉흥적이면서도 예리하게 날이 서 있었습니다. 리버는 기존의 방식과는 무관하게, 피아노를 다룰 줄 알았던 겁니다. 

리버는 그때까지만 해도 피아노를 연주한 경험이 없었다고 술회했다. 그리고 브루클린의 집에는 피아노가 없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런 연주가 가능했을까. 

-미란다와 내가 일을 하러 나가면 리버는 하루 종일 빈집에 갇혀 있었어요. 헤어질 때면 유기견처럼 애달프게 우릴 올려다보았죠. 해가 지면 다시 만나게 될 테지만, 어쩐지 영영 다시는 보지 못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매번 반복해도 그런 기분은 줄어들지 않았죠. 차라리 어떤 면에서는 올리버 트위스트가 나아요. 고아원에는 함께 밥을 먹을 친구라도 있으니까요. 이렇게 놓고 보면 모든 게 자명해져요. 리버에게 달란트를 허락하신 분이 누군지 말이에요. 다른 날도 아니고, 크리스마스 이브였어요. 불우한 아이에게 재능을 허락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날이죠. 하나님은 적당한 대상을 물색해서 사과를 하고 싶었을 거예요. 세상이 완전 개판이니까. 

나는 리버가 피아노를 접한 곳이 교회일 거라고 추측했다. 그들 셋은 모두 같은 교회에 출석하고 있었다. 브루클린 9번가에 있는 침례교회였다. 

-예배가 끝나면 교회에 남아 피아노를 치곤 했어요. 한참 연주에 열중하노라면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어요. 한 아이가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죠. 몇 번인가 그런 일이 반복되었어요. 나는 그 애가 피아노에 관심이 많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이름을 물어보았죠. 아이는 고개를 저으며 뒤로 물러섰어요. 괜찮아, 이리 와서 쳐봐. 말을 걸었지만 아이는 다가오지 않았어요. 그저 내 손을 훔쳐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듯이 말이에요. 이건 제 추측이지만 건반 하나하나의 음정을 죄다 입력해버린 게 아닌가 싶어요. 그런 일이 가능하다면 굳이 피아노를 연주할 필요가 없잖아요. 

코엘은 리버가 출석하는 교회의 성가대 반주자였다. 그가 제시한 가설은 흥미로웠다. 나는 실제로 그런 일이 가능한지 의문이 생겼다. 그래서 그 문제에 대해 아일린 교수에게 문의해보기로 했다.

-분명한 건, 당신과 내 기준으로 아이들을 규정지을 수 없다는 사실이에요. 아이들은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생명체예요. 한때 우리가 아이였다고 해서 다 아는 것처럼 구는 건 곤란해요. 우리는 분명 같은 세계에 머물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세계에 존재한다고 해도 무방해요. 그것도, 지구와 아주 멀리 떨어진 행성에요. 내 생각엔 우리와 아이들 사이의 간극이 지구와 머리털 은하단 사이의 거리 정도는 될 것 같아요. 대략 4억 광년 정도. 

-세계를 인식하는 우리의 관점은 이미 딱딱하게 굳어버렸어요. 아쉽지만 최초의 발견 같은 것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 심심한 나이가 되어버린 거예요. 한마디로 창조의 빛 같은 걸 유실해버린 거죠. 하지만 아이들은 달라요. 아이들의 세계는 유동적이고 모호하며 아직 미완성이에요. 그곳에서는 우리가 불가능하다고 단정 짓는 많은 일들이 가능해요. 상상의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쯤은 문제될 게 없어요. 

일요일 늦은 오후였다. 한 남자가 리버의 집 초인종을 눌렀다. 남자는 뉴욕타임스의 클래식 전문 기자인 크루저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리버는 마침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다. 미란다는 거액을 들여 피아노를 샀다. 낡은 중고 피아노였지만 미란다의 입장에서는 초호화 요트를 사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크루저는 시트가 군데군데 벗겨진 소파에 앉아 리버의 연주를 들었다. 그는 자신이 마주친 행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거듭 확인할 수 있었다. 

"무슨 일로 오신 거죠?"

미란다가 물었다.

"취재를 하고 싶습니다. 그날 연주를 들었거든요."

리버는 한사코 미란다의 등 뒤로 숨으려고만 들었다. 

"보시다시피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아요."

미란다가 말했다. 

별안간 크루저의 머릿속에서 참신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는 재빨리 미란다에게 아이디어를 털어놓았다. 

"줄리어드 스쿨에서 열리는 영재 오디션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거기 참가해보는 건 어떨까요? 원하신다면 제가 다리를 놓겠습니다."

대런은 스모 선수처럼 덩치가 산만 했다. 

"이 지옥 같은 뉴욕에서 천사처럼 강림한 당신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라고요? 우리가 당신 말대로 하면 당신은 뭘 얻는 거죠? 당신이 가브리엘 천사라도 된 줄 착각하는 모양이군요. 게다가 뉴욕타임스라니. 남자가 없다고 우릴 깔보다간 큰 코 다칠 거예요."

대런이 마구 쏘아댔다. 

크루저는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고단한 삶을 고려하면 아주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우선 이걸 받으시죠. 제 명함입니다. 월요일에 신문사로 전화를 걸어 확인해보면 됩니다. 맹세컨대 제가 여러분을 속이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저는 기사를 쓸 수 있어서 좋고, 여러분은 리버의 재능을 평가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설사 떨어진다고 해도 밑질 건 없죠."

뜻밖에도 미란다를 설득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크루저는 거의 쫓겨나다시피 리버의 집을 나서야만 했다. 

-리버의 연주가 완벽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연주에는 부족한 부분을 상쇄하고도 남는 무엇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것이 연주자의 영혼과 관련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듯싶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삶을 당신의 뜻대로 살고 있습니까. 누구도 이 질문에 선뜻 답할 수 없을 겁니다. 우리를 옭아매는 것들이 무수히 많으니까요.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지 못합니다. 분명 나 자신에게 속한 삶인데도 말이죠. 피아노를 연주할 때도 이와 비슷합니다. 나는 과연 내가 연주하고픈 대로 연주하고 있는가. 바로 이 질문에 확고하면서도 즉각적인 답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뭔가 대답 같은 것을 찾으려고 끙끙대는 대신, 느끼는 대로 손가락이 한 발 앞서 피아노를 두들겨댈 수 있어야 하는 겁니다.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나는 종종 두려움에 사로잡히곤 했습니다. 천재를 알아보지 못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으니까요. 모차르트가 우유 배달부나 가스 검침원으로 살아갈 가능성 같은 것 말입니다. 리버를 만나기 전까지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습니다. 천재가 나타난다면 알아보지 못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천재인 겁니다.

줄리어드 스쿨의 아렐 교수는 깐깐하기로 악명이 자자한 인물이었다. 리버의 연주를 듣는 내내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숨 쉬는 일조차 잊은 듯했다. 리버가 마지막 건반을 누른 후에도 그는 지그시 감은 눈을 한동안 뜨지 않았다. 아렐이 무표정한 얼굴로 리버의 연주가 남긴 잔향(殘響)을 음미하는 동안 미란다와 대런은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 

마침내 아렐이 눈을 떴다. 

피아노로 다가간 노교수는 리버에게 물었다.

간결한 질문이었다.

"피아노를 좋아하니?"

리버는 살짝 겁을 집어먹은 얼굴로 고개를 세차게 주억거렸다. 

"그럼, 됐구나." 

아렐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재단에서 후원하는 영재 육성 프로그램에 리버를 추천하겠습니다.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 연주였습니다."

미란다와 대런은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아렐의 수제자였어요. 적어도 그 일곱 살배기가 나타나기 전 까지는. 아렐은 점차적으로 레슨 시간을 줄여나갔어요. 그러던 어느 날, 더 이상 레슨을 하기가 힘들 것 같다고 하더군요. 나는 느낄 수 있었어요. 나와 있을 때조차 그는 리버를 생각하고 있었어요. 아렐이 미안하다고 하더군요. 그 꼬맹이 때문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어요. 나는 자리를 박차고 나왔어요. 메이저리거 투수가 리틀 야구단의 4번 타자에게 홈런을 얻어맞은 꼴이었어요. 

아렐은 엄격한 사람이었다.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 태생의 이 망명자는 뉴욕 음악계에서 나름대로 견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는 엄청난 연습량과 정교한 연주로 명성이 자자했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으며, 일상 생활에 반드시 필요한 일을 해야 할 때를 제외하면 항상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렐의 집에 간 적이 있어요. 그가 피아노 앞에 앉아 식사를 하고 있더군요. 우스꽝스러운 광경이었어요. 동기생 셋과 함께 있었는데, 한 녀석이 농담을 했어요. 분명 마스터베이션도 피아노 의자에 앉아서 할 거라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발기가 되지 않을 테니까요.

-아렐은 언제나 말끝을 흐렸어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매번 그런 식이었어요. 짜증이 날 만큼 신중했죠. 일종의 결벽증 같은 거였어요. 사실 아주 간단한 문제잖아요. 이건 해라. 이건 하지 마라. 단 두 문장이면 모든 게 해결돼요.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단 한 번도. 

-언젠가 한 번은 이런 적이 있었어요. 아주 형편없는 연주를 막 끝내고 비참한 기분에 빠져 있었어요. 이게, 자네가 들려줄 수 있는 전분가? 아렐이 말했어요. 나는 짜증이 치밀었어요. 그가 어떤 식으로 말할지 이미 알고 있었던 거예요. 그렇다고 해도, 그렇지 않다고 해도, 그의 대답은 같았을 거예요. 알았네. 이만 가보게. 그는 그렇게 말하려고 준비하고 있었어요. 나는 그만 폭발해버렸어요. 내 연주의 부족한 점을 짚어주기 위해 당신이 여기 있는 거라고, 나는 그걸 들을 권리가 있다고 따졌어요. 한동안 침묵이 흘렀죠. 나는 말할 수 없네. 왜죠? 왜 말할 수 없는 거죠? 내가 말하면 자네는 고정될 거야. 일단 고정되면 돌이킬 수가 없어. 나는 그러고 싶지 않네. 그럼, 교수님은 대체 뭘 하는 거죠? 나는 받아쳤어요. 결국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는 거네요. 나는 따졌어요. 그렇지 않아. 나는 자네를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게, 그의 대답이었어요. 

한때 아렐 교수의 수제자였던 어빙은 아직도 앙금이 남아 있는 듯했다. 그는 아렐의 교수법을 못 견뎌했다. 적잖은 제자들도 어빙의 의견에 대체로 동의하는 분위기였다. 그들은 아렐의 명성이 실제보다 과장되었다고 입을 모았다. 

리버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적어도 피아노 앞에서는. 내가 이렇게 말하면 적잖은 사람들은 리버가 두려움을 이겨냈다거나 극복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건 잘못된 생각이다. 그에게는 두려움에 대한 인식 자체가 없었다. 그는 두려움이 어떤 감정인지 몰랐던 것이다. 리버가 피아노를 연주할 때면 그는 온전히 피아노가 되었다. 음악은 피아노가 아니라 리버의 내면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럴 때면 백발의 아렐이 묵묵히 리버의 곁을 지켰다. 숨죽인 정물처럼, 혹은 멈춰 선 그림자처럼. 

아직 사춘기가 오지 않은 소년의 몸은 작고 연약해보였다. 리버는 양지바른 곳에 세워져 녹아내리는 눈사람처럼 피아노 의자 아래로 물방울이 되어 똑똑 떨어져 내릴 것 같았다. 음표 하나를 누를 때마다 한 방울씩. 그는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지고 피아노가 저 혼자 소리를 내는 것만 같았다. 리버는 국제 쇼팽 피아노콩쿠르에서 심사위원 만장 일치로 대상을 수상했다. 그의 나이 열두 살이었다. 공식적인 데뷔 연주로 기록된 이 무대에서 그는 놀라운 연주를 해냈다. 대상과 함께 특별상까지 수상하면서 최연소 우승자 기록을 갈아치운 것이다. 국제 무대에 처음 등장한 이 소년이 누군지 몰라 관계자들은 어리둥절했다. 

-그땐 정말 행복했어요. 우리는 새 집을 가지게 되었고 자가용도 생겼어요. 길을 걷다가도 웃음이 터져 나와 혼자 키득대곤 했어요. 조카를 잘 둬서 팔자에도 없는 호강을 하는 셈이었으니까요. 가끔 불안하기도 했어요.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걸까. 의심이 들곤 했죠. 내가 미란다에게 이런 속마음을 털어놓았더니 동생도 그렇다고 했어요. 어쩌면 그때부터 동생의 마음에 불안이 움트고 있었는지도 몰라요.

크루저는 아렐의 교수법이 남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교수의 연주 기법을 제자에게 고스란히 전수하는 판박이식 교수법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다. 크루저는 은둔자 스타일의 아렐이 인간적으로도, 교육적으로도 독특해보였다. 크루저는 아렐에게 교육에 관한 칼럼을 써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아렐은 의외로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칼럼은 뜻하지 않은 논란에 휩싸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데스크에서 그의 칼럼을 수정했습니다. 자극적으로 고친 거죠. 의도적으로 논쟁을 유도한 면도 있었다고 봅니다. 수정을 가하기 이전의 원고를 읽어보았는데, 아렐은 자신의 교육적 관점이 고정된 지침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데스크에서는 아렐의 조심스러운 뉘앙스를 깨끗이 걷어냈습니다. 대신 그 빈자리를 선동적인 어조로 채워 넣었죠. 이로 인해 소위 '빅뱅이론'이라 명명된 그의 교육철학은 여타의 교수법을 무시하는 듯한 인상을 띠게 되었습니다. 

나는 아렐의 칼럼 초고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하지만 허사였다. 따라서 여기에 첨부하는 칼럼은 뉴욕타임스가 수정을 가한 원고이다. 이 점을 감안하고 읽어주기 바란다. 

- 어떻게 리버를 그토록 훌륭한 연주자로 키워낼 수 있었습니까? 

사람들은 내게 묻습니다. 나는 이 질문에 답하는 것으로 칼럼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이 말은 겸손을 가장하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닙니다. 또한 수사적인 표현도 아닙니다. 문자 그대로 이 말은 사실입니다. 

피아노는 내가 연주하는 게 아닙니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사람은 리버입니다. 나는 연주에 관여하고 싶지도 않고, 관여할 필요도 없으며, 실제로 관여하지도 않았습니다. 리버가 천재이기 때문에 이런 방식이 적합하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모든 피아니스트는 이미 자신만의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습니다. 어째서 내가 그들의 연주에 참견해야한단 말입니까. 

때가 되면 아이의 세계는 빅뱅을 일으키며 팽창합니다. 재능을 불꽃처럼 내뿜는 순간이 도래합니다. 문제는 그때가 언제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는 겁니다. 리버처럼 일곱 살에 재능이 발현될 수도 있고 그보다 훨씬 늦게 빅뱅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리버처럼 급작스레 폭발이 일어날 수도 있고 더디게 진행될 수도 있습니다. 

부모는 조바심 덩어리입니다. 아이를 너무 사랑해서 그들은 그럴 수밖에 없는 가련하고 미련한 존재입니다. 불행은 거기서 생겨납니다. 아이들은 민감해서 부모의 마음을 귀신같이 읽어냅니다. 조바심과 불안과 외압이 암암리에 그들의 내면에 문신처럼 새겨집니다. 

교육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한 단어를 내게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훼손'을 꼽겠습니다. 교육은 결단코 존재하지 않는 재능을 창조해낼 수 없습니다. 다만 숨겨진 재능을 발견할 수 있을 뿐입니다. 만약 한 사람의 내면에 존재하는 결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교육이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훼손뿐입니다.

단언컨대 재능이 없는 아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이란 무릇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우리 아이의 재능은 보이지 않는 걸까요? 아마도 적잖은 부모가 내게 반문할 것입니다. 기어코 그 대답을 들어야겠다면 나는 엄혹한 진실을 발설할 수밖에 없습니다. 재능이 없는 아이는 없습니다. 다만 재능을 잃어버린 아이가 있을 뿐입니다. 

불안은 우연한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햇살이 강렬한 오후였다. 미란다가 막 운전석에 앉았다. 직사광선이 정면 유리창에서 그녀를 향해 쏟아졌다. 그녀는 잠깐 눈을 감았다. 바로 그때 질문이 떠올랐다. 

리버의 재능은 대관절 어디에서 온 것일까. 남편은 악기 하나 제대로 다룰 줄 모르는 약쟁이였고, 그녀는 음치였다. 리버의 재능이 그들에게서 비롯되지 않은 것만은 분명했다. 

- 그렇다면, 대체 어디서? 

일단 질문이 생겨나자 질문은 형태를 바꿔가며 끊임없이 대답을 요구했다. 자꾸만 되살아나 그녀를 괴롭히더니 급기야 그녀를 엉뚱한 곳으로 데려갔다. 그렇다면, 그 재능의 실체는 무엇일까. 어느 날 갑자기 번개처럼 임했듯이 연기처럼 홀연히 사라질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자 그녀는 몹시 불안해졌고 잠이 오지 않았다. 

"제 말이 엉뚱하게 들리실 거예요. 하지만 이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미란다가 말했다. "리버의 재능이 사라질까봐 두려워요."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됐죠?"

"저도 모르겠어요.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미란다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바보 같죠?"

"아닙니다.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렐, 나는 당신을 믿어요. 당신이 말해주세요.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당신이 말하면 그게 뭐든 당신 뜻을 따르겠어요." 미란다는 아렐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당신 말은 리버의 재능을 지켜주고 싶다는 거죠?" 아렐은 미란다가 무엇을 묻고 있는지 거듭 확인했다. 

"맞아요."

"그건 아주 간단해요. 리버에게 공감해주세요. 그게 무엇이든지." 아렐이 대답했다. "존중받고 있다고 느끼게 해주세요. 아이는 엄마가 말한 대로 되는 법이니까요."

"당신에게도 그런 엄마가 있었나요?"

"어머니는 걱정이 많으셨어요."

"저랑 똑같네요."

"세상의 모든 어머니가 그렇죠."

"어떤 말이 듣고 싶으세요. 만약 살아 계시다면."

"아마 이런 말일 것 같아요." 아렐이 잠깐 숨을 골랐다. "피아노를 치기 싫으면 치지 않아도 돼."

"그렇게 말해주지 않았나요?"

"엄한 분이셨어요. 나한테만 그런 게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당신은 피아노를 좋아한 거 아니었나요?" 

"물론, 나는 피아노를 좋아해요. 하지만 이건 피아노랑은 상관없어요. 이건 존중에 관한 문제예요. 내 주위에는 온통 피아노를 더 열심히 쳐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뿐이었어요. 그래서 이런 식으로 밖에 피아노를 칠 수 없게 된 거죠."

"리버가 정말 피아노를 치지 않겠다고 하면 어쩌죠?"

"그럼, 치지 않으면 되죠."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말 그대로예요. 덧붙일 말은 없어요."

미란다는 대화를 이어가야한다고 생각했지만 더 이상 어떤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렐의 시신을 최초로 발견한 사람은 제니스였다. 제니스는 아렐의 가사도우미였다. 그녀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아침 7시 30분에 집을 나섰다. 간밤에 폭설이 내려 도로가 빙판길로 변해 있었다. 그녀는 원래 도착하던 8시보다 한 시간 가량 늦은 9시쯤에 아렐의 집에 당도했다. 그녀가 열쇠로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아렐은 피아노 의자에 앉아 있었다. 건반에 이마를 댄 자세였다. 

-처음엔 그저 잠이 든 줄 알았어요. 드문 일이긴 하지만 아렐은 가끔 그런 자세로 잠들기도 했거든요. 

나는 제니스가 작성한 진술서를 읽으며 아렐의 마지막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밤새 내리는 눈발을 지켜보며 아렐은 피아노를 연주했을 것이다. 평생을 다 바쳐 피아노를 연주했으면서도 그는 구현해내지 못한 어떤 음형(音形)이 있다고 믿었던 걸까. 뇌졸중이 단 한 번의 습격으로 그를 고꾸라뜨린 그 순간조차 그는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다. 

경찰이 아렐의 집에 당도하기 직전, 제니스는 아렐의 유품 하나를 빼돌렸다. 제니스가 챙긴 것은 아렐의 일기였다. 제니스는 그것의 가치를 알고 있었다. 아렐은 꼼꼼한 성격대로 그가 느낀 거의 모든 감정을 기록해놓았다. 출처를 비밀에 붙인다는 조건을 달고 그녀는 그 일기장을 한 출판사에 팔았다. 그로 인해 우리는 한 남자의 슬픔에 대해 엿볼 수 있게 되었다. 

-미련하게도 나는 리버가 되고 싶다는 열망에 시달린다. 할 수만 있다면 그 애의 자유로움을 빼앗고 싶다. 하지만 아무도 그걸 훔칠 수 없다. 자유로움은 오롯이 리버만의 것이다.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미란다는 리버의 새로운 선생을 물색했다. 여러 후보가 물망에 올랐다. 미란다는 고심 끝에 한 명의 선생을 선택했다. 리버의 새로운 선생은 아렐의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피아니스트가 모든 것을 통제해야 한다고 믿었다. 

나는 사춘기로 접어든 리버의 얼굴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는 생포된 포로처럼 핏기 없는 얼굴로 피아노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의 연주는 여전히 훌륭했다. 그의 연주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알아차린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문제를 일으킨 것은 리버의 연주 태도였다. 그는 제멋대로 굴기 시작했다. 갑자기 건반을 주먹으로 두들겨대는가 하면, 별안간 비명을 내질러 관객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처음에는 천재의 기행이려니 여기며 흥미롭게 지켜보던 관객들도 그의 돌출 행동이 무대 위에서 계속되자 점차 냉담한 반응으로 돌아섰다. 객석에서는 야유와 조롱이 터져 나왔고 비평가들은 혹평을 퍼부었다. 

연주회는 링컨센터의 에이버리 피셔 홀에서 열렸다. 처음 두 곡을 제법 그럴싸하게 연주해낸 리버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뺨으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울음은 점점 격렬해졌다. 어깨를 들썩이면서도 그는 소리 내지 않았다. 객석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죄송해요. 그때 일만큼은 아무 것도 말하고 싶지가 않아요.

피아노 의자에서 벌떡 일어난 리버는 무대 밖으로 사라졌다. 리버가 다시 무대 위에 나타났을 때, 그의 손에는 야구 배트가 들려 있었다. 어디서 배트를 구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배트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연주회 때마다 대형 트럭에 실어 옮기던 피아노가 산산조각 났다. 그는 피아노를 더 이상 부술 수 없을 때까지 부순 후,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미란다는 리버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그건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리버는 그 후 1년이 넘게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 기간 동안 미란다는 리버의 내면에서 발생한 어떤 혼돈이 점차 진정되고 있다고 믿었다. 근거가 전혀 없는 믿음이었다. 그녀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고 알고자 노력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리버의 새로운 선생이 문제의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리버는 그 선생을 만난 이후로 웃지 않았다. 만약 리버가 피아노를 연주하듯 혀를 놀려 진심을 털어놓았다면 그때라도 불행을 막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소심하고 내성적인 아이였다. 

선생이 교체되고 다시 레슨이 시작되었다. 마침내 리버의 보호막은 마지막 한 겹까지 갈가리 찢겨졌다. 스물두 살 되던 생일날이었다. 술에 취한 리버는 그의 손을 돌멩이로 내리찍었다. 힘줄이 끊어지고 뼈가 드러날 때까지. 그는 왼손을 회복할 수 없는 지경으로 망가뜨렸다. 미란다는 충격에 사로잡혔다. 분신 같은 피아노를 내리칠 때조차 애써 이해하려고 노력했던 믿음마저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응급실에서 잠든 아들을 보다가 그녀는 언젠가 아렐이 해준 조언을 떠올렸다. 분명, 어떤 말이 있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어떤 말이었는지 끝끝내 알아낼 수 없었다. 

-아렐이 내게 무언가를 해주었기 때문에 그가 그리운 게 아니에요. 오히려 정반대죠. 그가 무엇이든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그리운 거예요. 

리버는 이제 마흔여섯 살이 되었다. 그는 브루클린에서 세탁소를 운영하고 있다. 내가 아는 한 그는 지난 20년 동안 피아노를 연주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며칠 전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20년을 지켜온 금기를 깼다. 그날 예배당에서는 미란다의 조촐한 추도 예배가 열렸다. 조문객들이 막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찰나, 리버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가 피아노 의자에 앉자 조문객들이 일제히 숨을 죽였다. 리버의 왼손이 건반 위에 놓였다. 손목에 힘을 싣자 피아노의 선율이 울림통에서 새어나왔다. 일곱 살이던 그 백화점에서 그랬던 것처럼 지상의 오직 한 사람, 어머니를 위한 연주였다. 그 연주를 들으며 나는 조용히 무너져 내렸다. 그것은 어디서나 흔히 들을 수 있는, 평범한 연주였다.

 

 

 (끝)

 

 

[한국일보 2014 신춘문예-소설 부문] 김태우 당선소감

'쓸 수밖에 없어서' 글 써온 나는 어제도 내일도 소설가입니다

 

"축하해. 이제 명색이 김 작가가 되었네."

당선 통보를 받은 후, 많은 분들이 축하해주셨습니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보면 이 말이 반드시 맞는 것만은 아닌 듯합니다. 이 기쁜 소식이 기회를 선사했지만, 이로 인해 작가가 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은 언제 비로소 작가가 되는가? 

문득 이런 질문이 떠오릅니다. 돌아보면 저는 늘 무언가를 쓰고 있었습니다. 쓰고 있지 않을 때조차 제 삶은 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쓰고 있다'고 저 자신에게 말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이미 작가였던 것입니다. 

글을 잘 쓰거나, 글이 쓰고 싶어서, 글을 썼던 것은 아닙니다. 저는 '쓸 수밖에 없어서' 썼습니다. 글을 쓸 수 있어서 제 내면을 더 잘 들여다볼 수 있었고, 제 존재를 사수할 수 있었으며, 제가 희망하는 저 자신에게 더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이전에도 저는 작가였고, 지금도 작가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영원히 작가이기를 빕니다. 이 바람을 끝끝내 간직하는 일이 저를 뽑아주신 분들에게 제가 드릴 수 있는 가장 큰 감사의 징표가 되리라는 것을 잊지 않겠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기도를 멈추지 않은, 우리 엄마 이상란 여사님과, 세상에서 제일 좋은 이모인 이명자 여사님, 묵묵히 지켜보아주신 조영식 장교님, 자애로운 이복희 여사님, 존엄하신 사부님과 사모님, 누나들과 형들, 친구들, 동생들, 그리고 나의 보물들, 이한, 이언에게… 그리고 나보다 내 꿈을 더 가엾게 여겨준 혜정씨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띄웁니다. 마지막으로 이 버거운 행복은 마도로스 김으로부터 왔음을 꼭 말하고 싶습니다. 

'나는 이제 소설가입니다.'

 

[한국일보 2014 신춘문예-소설 부문] 심사평

할리우드식 서사를 군더더기 없이 풀어내는 솜씨 인상적

 

마지막까지 심사위원들의 손에 남은 작품은 ‘피아노’ ‘eating’’ ‘winner’ 셋이었다. 셋 모두 자기 개성이 뚜렷했다. 김태우의 ‘피아노’는 선명한 굴곡의 서사와 깔끔한 감각이 인상적이었고, 고문희의 ‘eating’은 정통적이라 할 수 있는 단편소설의 안정적 틀에 바탕해 있었으며, 김현성의 ‘winner’는 활달하고 풍부한 모험심을 지니고 있었다. 안정적으로 자기 세계를 구축해간다면 고문희겠고, 김태우나 김현성을 택하는 것은 선자들로서도 일종의 모험이었다. 

논의가 진행되면서 먼저 제외된 것은 ‘winner’였다. 시합 중인 두 권투 선수의 내면을 교차로 묘사한다는 설정과 뛰어난 묘사력이라는 점에서 이 작품은 매력적이었지만, 맥 빠지는 결말이 문제였다. 결국 승자는 매치메이커일 뿐이라는 결말의 진부함이 묘사력의 매력을 상쇄해버린 때문이었다. ‘피아노’와 ‘eating’ 사이에는 약간의 반전이 있었다. ‘피아노’는 통속적일 수도 있는 할리우드 식 서사를 별다른 무리 없이, 그러나 솜씨 있게 보여주고 있었고, ‘eating’은 혼자 밥 먹는 사람을 위한 동영상 프로그램과 그 사용자의 이야기를 차분하게 풀어내고 있었다. 
짧지 않은 논의 끝에 선자들은 안정감보다 모험 쪽에 표를 던지게 되었다. 혼자 밥 먹는 남자를 만들어낸 불행의 서사가 과도했던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흔할 수 있는 망가진 천재와 훌륭한 교사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군더더기 없이 담담한 솜씨가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선택이 모험이 아니었음을 김태우가 장차 증명해주리라 믿는다.

심사위원 은희경, 서영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