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비독점적 다자 연애에 대한 인상비평 / 양진영




사회는 너무 버거운 상대였다

맹종이냐, 저항이냐 택일을 강요했고

눈에 띈것이 다자간 연애 현상 이었다

위험할지라도, 죽도록 독점하고 싶었던

다자 연애에 대한 인상비평에 A+를 준

여교수에 헌신하고 싶었다

여교수의 죽음은 사고사로 종결됐다. 밴쿠버 경찰은 수사 결과를 호흡곤란과 저산소증으로 인한 질식사로 발표했다. 만취한 상태로 욕조에 들어갔다가 그대로 잠들어 숨진 것으로 추정했다. 별다른 사인이 없으니까 서둘러 결론지었을 것이다. 

“피차 혐의를 벗어서 다행이야.”

그녀의 캐나다 남편은 대뜸 반말하며 중세의 반응을 살폈다. 두 사람은 한국에 남편을 둔 여교수의, 합법적인 해외 배우자였다. 여교수는 두어 달 전에 밴쿠버 자택의 욕실에서 익사체로 발견됐다. 그전까지 서너 달 동안 뉴욕에서 함께 지낸 중세도 용의자 중 하나로 맨해튼 경찰서를 들락거렸다. 그녀는 외상이나 약물복용 흔적이 없는데다 캐나다 남편 역시 술에 취해 아침까지 잠든 것으로 입증돼 무혐의로 풀려났다. 

“이 유품 중에서 유You 것을 골라 봐.”

그는 잡다한 물건들로 꽉 찬 가방을 내밀었다. 중세는 좀 전에 받은 명함을 흘끔댔다. 사무엘 박, 공인 최면치료사, 법최면 연구학회 정회원이라고 적혀 있었다. 첫 만남이지만 여교수에게서 그의 신상을 간간이 들었다. 어려서 부모를 따라 캐나다로 이민 온 교포 2세로 현지 폴리아모리(다자 연애) 단체의 리더라고 했다. 삼십 대 중반인데 머리가 벗겨졌고 눈매가 날카로웠다. 한 무더기의 햇살이 그의 이마에서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유는 헌신적이라고 칭찬하던데.”

그는 싸우러 온 사람같이 이죽거리는 말투였다. 고작 스물일곱의 나이에 열 살 남짓 연상인 여교수의 미국 남편이라니. 한국의 시골뜨기 유학생과 아내를 공유했던 것이 아니꼬운 눈초리였다. 여교수는 그와의 사이에 딸아이를, 한국 남편과는 두 자녀를 두었다고 했다. 그 역시 여교수로부터 중세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것이다. 

중세는 가방에서 낯익은 물건을 골라냈다. 몇 시간 전에 뉴욕 공항을 빠져나온 듯 하얀색 항공 화물표가 선명했다. 2년 전 여교수의 제자로 야외 수업에서 함께 찍은 사진, 멀리 유타주까지 날아가 둘만의 혼인 서약을 할 때 끼웠던 반지 등등. 나머지는 여교수의 한국 남편에게 보내질 것이다. 

서울의 모 대학에서 문화인류학을 강의하는 여교수는 지난 10여 년간 ‘새로운 문화 현상 - 비독점적 다자 연애의 정착 가능성’이라는 주제로 한국과 해외를 넘나들며 연구와 학술 발표를 계속해 왔다. 덕분에 하 현정 하면 그 분야에서는 독보적인 학자로 인정받았다. 언젠가부터 중세는 혹여 자신이 그녀의 연구에 필요한 실험 대상이 아닐까? 의문스러웠다. 아무리 둘러봐도 자신은 여교수 같은 여성이 호감을 느낄 만한 조건이 아니었다. 그녀는 요정이고 자신은 야수 같았다.

*

부잣집 외동딸로 태어난 여교수는 자라면서 거칠 것이 없었다. 집안은 티스푼 하나까지 명품으로 채워졌고 원하는 것은 모두 얻을 수 있었다. 그녀는 가문, 학업, 외모라는, 스타 여학생의 조건을 완벽하게 갖추었고 어느 자리에서나 시선을 끌었다. 그 탓에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아무에게도 종속되지 않는 자존심 덩어리로 성장했다. 그러나 교수가 돼 홀로 섰을 때 사회는 너무 버거운 상대였다. 완벽하게 조립된 세계는 어떤 틈새도 허용하지 않았고 여교수는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삶의 주도권은 기성세대가 움키고 있어서 친구들은 순응을 자연스러운 숙명으로 받아들였다. 심지어 페미니스트를 자칭하는 동료들마저 도시 문명을 호화스러운 감옥쯤으로 여겼고 그 안에 안주했다. 반면 그녀는 세상이 무엇인가를 강요할 때마다 왜? 라고 따졌고 사사건건이 충돌했다. 세상은 맹종이냐, 저항이냐 양자택일을 강요했고 그녀는 점점 외톨이 신세였다. 그때 여교수 눈에 띈 것이 서구에 널리 퍼진 다자간 연애 현상이었다. 그것은 기성 사회의 버팀목인 일부일처제를 무너뜨릴 미래 문화 같았다.



“미국에는 현재 50만의 폴리아모리스트들이 공동 가족을 이루어 살고 있어요.”

중세는 2년 전의 첫 수업을 떠올렸다. 한국에서 온 교환 교수의 강의는 느슨하고 학점이 후하다고 하여 수강했는데 그녀는 자신이 본 여자 중에서 가장 우아한 말투와 외모였다. 다른 남학생들의 눈길도 그녀의 차콜색 정장을 불나방처럼 쫓아다녔다. 

수십 년 전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폴리아모리는 여러 부부가 섹스와 자녀를 공유하는 집단혼이다. 이들은 일처다부, 일부다처와 달리 여러 남편과 아내가 자유롭게 부부 관계를 유지한다. 그런 가족 형태는 고대부터 존재했고 현재도 브라질의 카이강족, 티베트와 스리랑카 원주민들 사이에서 집단혼이 성행한다. 

“전세계에서 일부일처를 법으로 정한 사회는 20퍼센트 미만에 불과해요. 그것이 과연 최선의 결혼 제도일까요?”

중세는 연거푸 고개를 갸웃거렸다. 강의 내용은 그녀의 고급스런 분위기와 딴판이었다. 그는 수업을 듣는 둥 마는 둥 내내 여교수의 사생활을 상상하면서 보냈다. 끝날 무렵에 그녀는 노트를 챙기며 말했다.

“다자 연애에서 중요한 것은 정신적으로, 성적으로 서로를 소유하거나 질투하지 않으려는 마음 즉, 비독점적 사랑이에요.”

그런 것도 사랑인가?…….

중세는 무심코 웅얼거렸다. 그도 두서너 여자를 사귀었는데 상대방을 독차지하지 못하는 사랑은 고통일 뿐이었다. 

여교수는 미소를 가득히 머금고 중세를 응시했다. 벽을 반쯤 도려낸 유리창에서 햇살이 우박처럼 쏟아졌다. 그녀의 옷깃에서 팬지꽃 브로치가 눈부시게 빛났다.

*

“그 브로치는 내가 결혼 1주년 기념으로 선물한 것인데.”

캐나다 남편은 중세가 가방에서 꺼내 만지작거리는 액세서리를 보며 말했다. 어색하게 미소 짓는 표정이 그의 노란 겉옷만큼 불투명했다. 노랑은 명랑하고 밝지만 다른 색이 조금만 섞여도 우중충히 변하는 배신의 색깔이다. 

“원하면 가져도 돼. 폴리아모리는 성과 자녀는 물론 재산까지 공유하는 결혼 방식이거든.”

“이성에 대한 소유욕이나 질투심이 아예 없는 건가요?”

“그런 셈이지. 그보다는 헌신과 친밀감을 중시해.”

“예수님은 헌신을 희생심이라고 했다던데 동시에 여러 애인을 사귀는 것이 자기를 버리는 헌신에 해당할까요?”

캐나다 남편의 얼굴이 좀 일그러졌다. 비꼬는 듯한 반박에 비위가 상한 듯했다. 중세가 생각하는 헌신은 부처님같이 자신을 완전히 부정할 때만 가능하다. 새끼를 지키려 먹이를 토해 내 피로 얼룩진 둥지를 짓는 금사연처럼. 그런 처절함이 헌신일 것이다. 연애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헌신적인 사랑은 때로는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일 만큼 무모하다. 애인을 위해 증거를 조작하거나 위증을 서슴지 않고 자진해 벌을 받기도 한다. 불치병으로 신음하는 아내를 위해 목을 조르고 장기를 팔아 가족을 돌보는 가장도 있다. 헌신은 자신을 남김없이 불사를 때 이루어진다. 그래서 한 사람에게 몰입할 수밖에 없다. 여러 애인에게 분배된 사랑은 그 자체로 헌신적이지 않다. 

그처럼 믿는 중세에게 캐나다 남편의 설득이 먹혀들 리 없었다. 이상할 정도로 그에 대해 아무런 감정도 일지 않았다. 한 여자를 동시에 사랑한 사이이면 경쟁심이나 하다못해 친근감이라도 느껴져야 할 법한데 완전히 타인 같았다. 중세는 누군가와 이성을 공유하는 풍속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 탓에 둘이 마주 앉은 탁자의 공기가 무덤 속처럼 무겁고 눅눅했다.

여교수를 다자 연애의 세계로 끌어들인 사람이 그였다. 그는 캐나다에서 가장 많은 구독자를 가진 폴리아모리 잡지의 편집장이었다. 수만 명의 폴리아모리스트이 가입된 웹 사이트를 운영하며 연간 두세 차례의 정기 모임을 주최했다. 그는 아이를 타이르듯 말했다.

“우리도 물론 질투나 독점욕을 느끼지. 그런 감정을 억제하려고 몇 가지 규약을 정해 두고 살아. 배우자간에 위계질서를 세우고 가입과 탈퇴가 자유롭고 등등.”

“그런 것을 결혼 생활이라고 할 수 있나요? 직장 동료들의 모임 같기도 하고 현지처하고 맺은 계약서 같기도 한데.”

“대신 우리에게는 이혼이나 불륜이 없지. 개인을 구속하는 법과 제도를 떠나 자유롭게 애정을 주고받는 것이야.”

“플라토닉과 에로틱을 적당히 버무렸다, 그 말이죠. 그런 것도 사랑인가요?”

중세는 수업에서 했던 말을 되뇌었다. 어쩌면 여교수는 그 질문에 답하려고 그를 선택했는지 모른다. 아니면 본인도 깨닫고 싶었거나.

*

결혼할래?

2년 전 어느 날 여교수가 뜬금없이 말했을 때 언젠가 결혼할 것이냐, 안 할 것이냐를 묻는 줄 알았다. 설마 자기와 하자는 뜻일 줄 짐작도 못 했다. 그녀는 한국에 버젓이 남편이 있는데다 남학생들이 동경하는 배경과 외모를 지녔으니까. 중세가 물을 여유도 주지 않고 그녀가 말했다.

“유타주에서 혼인 신고하면 한국 호적에 안 올라. 미국과 한국에서 동시에 합법적인 부부 생활이 가능해.”

중세는 순간적으로 당황스러웠다. 침대에서 부스스 몸을 일으켜 탁자에 놓인 물컵을 찾았다. 그 탓에 여자의 상반신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서른 여섯에, 아이가 둘이나 딸린 여자치고는 살결이 지나칠 만큼 하얗고 맑았다. 만개한 꽃무늬 이불에 싸인 나신은 맞은편 벽을 장식한 누드화 속 여인 같았다. 

중세도 ‘시간과 사랑의 알레고리’라는 그 그림을 잡지에서 보았다. 르네상스 시대 화가인 브론치노는 사랑의 여섯 가지 얼굴을 화폭에 담아 놓았다. 발가벗은 어머니, 아프로디테에게 입 맞추는 에로스는 애욕을, 장미꽃 가시를 밟고 선 소년은 고통을, 머리를 쥐어뜯는 노파는 질투를, 뱀의 몸통을 가진 소녀는 기만을, 무대를 어둠의 장막으로 가리는 노인은 정열의 쇠멸을, 왼쪽 뇌가 없는 여자는 망각을 뜻한다. 중세인들은 고통, 질투와 분리될 수 없는 사랑의 양면성을 간파하고 있었다. 

여교수의 강의를 들은 지 네댓 달쯤 지나서 그녀와 처음 잤을 때 중세는 왜 나일까? 의아했다. 지방 전문대학을 나와 빈둥대다가 뒤늦게 미국에 유학 온 그는 집에서 학비를 받기는커녕 홀어머니를 부양할 처지여서 고학생으로 넘친다는 뉴욕시립대를 택했다. 미국에 눌러앉으려고 일찌감치 공부는 단념하고 하루 열 시간씩 야채 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하는 중이었다. 

외모도 학벌 못지않게 빈약했다. 시골집에서 가축을 돌보며 자라서 피부는 가무잡잡하고 머릿결이 거칠었다. 누런 남방에 베이지색 바지를 입으면 영락없이 남미의 인디오라고 친구들이 놀렸다. 예일대 출신으로 콧대 높은 조디 포스터를 닮았다고 소문난 여교수와 자신은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짝 같았다. 그런데 종강하고 며칠이 지난 어느 날 그녀가 자신의 아파트로 중세를 불렀다. 이유는 기말고사 성적이 낙제점이어서 리포트로 대체하겠다는 것이었는데……. 유독 자신에게만 호의를 베푸는 것도 아리송했고 하필 미국인이 파티에 들뜨는 토요일 밤일까? 야릇한 기분이었다. 

맨해튼의 고급 거주지에 위치한 아파트는 오렌지색 조명과 고즈넉한 음악에 잠겨 있었다. 옅은 울트라마린 색상의 실크 원피스를 걸친 여교수는 패션쇼 화보에 담긴 사진을 보는 듯했다. 의자에서는 벌꿀 같은 니스 향기가, 테이블에서는 에스프레소 커피향이 맴돌았다. 리포트를 뒤척이는 손가락이 섬찍하도록 가느다랗고 하얀 빛깔이었다. 중세는 때때로 숨이 막혀 마른침을 삼켰고 그때마다 소리를 숨기려 흐흠, 헛기침했다. 그녀는 붉은 사인펜으로 ‘다자 연애에 대한 인상비평 – 질투심과 소유욕을 중심으로’ 라는 제목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두어 모금 빨다 만 던힐 담배에 선홍색 루주가 고대로 찍혀 있었다.

오디오에서 흑인들이 즐겨 추는 탭댄스가 흘러나왔다. 투둑 틱, 투둑 틱, 톡, 톡, 톡. 테이블 아래서 여교수의 발바닥이 경쾌하게 스텝을 밟았다. 셔플, 훕, 백 브러시, 셔플, 스탬프. 중세는 고등학교 동아리에서 배웠던 탭댄스를 떠올리며 리듬에 따라 손가락을 토닥거렸다. 그의 반응을 알아챈 여교수는 환히 웃으며 말했다.

“폴리아모리스트들도 가끔 성적 질투심을 느낀다고 고백하고 있어. 하지만 그들은 독점적인 인간 관계를 거부하기 때문에 흔쾌히 배우자를 공유하는 것이지.”

“그토록 여러 사람을 사랑하고 싶으면 차라리 재혼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세 남편을 동시에 거느리나 결혼을 세 번 하나 마찬가지일 듯 싶은데.”

“폴리아모리는 단순히 다자간의 섹스를 추구하는 운동이 아니야. 인간의 본질적인 욕망을 억누르는 일부일처제 같은 제도에 대한 저항이기도 해.”

“여러 부부가 밤마다 파트너를 바꾸어 가면서 자고 누구 씨앗인지도 모르는 애들은 키우면서 말이죠?”

“호호호…….”

여교수는 중세의 거친 반박을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뜻밖에 그는 물러서지 않고 거세게 나왔다. 평소 그녀에 대한 동경과 열등감이 그의 감정을 내흔들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가족과 재산을 공동으로 소유하는 것은 배부른 자들의 유희일 거예요. 저같이 쪼들리는 사람들은 한 가정을 유지하기도 벅차요. 돈이 없어서 홀로 사는 남자들도 많다구요.”

“그래서 우리는 재산까지도 공유해. 덕분에 경제적인 압박에서 좀 더 자유롭고.”

“우리요?”

“그래, 나도 폴리아모리스트야.”

중세는 말똥한 눈으로 여교수를 바라보았다. 그저 학구적인 열정으로 다자 연애에 관심이 있는 줄 알았다. 저토록 고귀해 보이는 여자가 이 남자 저 남자와 갈마들며 섹스할 줄이야. 중세는 번질대는 그녀의 쇄골에서 울컥 성욕을 느꼈다. 

“한국과 캐나다에 각각 남편이 있어. 물론 합법적이고.”

그녀는 자신에 대한 환상을 깨려는 듯 묻지도 않은 답변을 쏟아 냈다. 그 도발적인 고백이 중세에게는, 너하고도 잘 수 있어, 라는 암시로 들렸다. 여교수는 와인 냉장고로 다가가 데킬라를 한 모금 음미했다. 중세는 그녀가 내미는 스트레이트 잔을 단숨에 비웠다. 화염이 기도를 녹이고 심장을 불태우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땀이 밴 중세의 손등을 쓰다듬으며 재촉했다. 

“더워 보여. 씻으려면 욕실을 써도 돼.”

여자의 입술이 석륫빛이었다. 손바닥에서 축축한 열기가 느껴졌다. 그 뜨거운 기운이 인간에게 생리적으로 내재된 성적 충동이라는 리비도를 연상시켰다.

중세는 샤워기의 온수 꼭지를 한껏 높였다. 물비누를 뿌린 욕조에서 하얀 거품이 몽롱하게 피어올랐다. 그는 쏟아지는 물줄기 아래서 꿈꾸는 것 같았다. 지난 몇 달간 상상했던 일이 너무나 쉽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는 물빛으로 반짝이는 페니스를 조몰락대며 제발 오해가 아니기를 하고 빌었다.

욕실을 나섰을 때 그녀는 간신히 국부를 가린, 검은색 원피스로 갈아입고 있었다. 어둑한 조명 아래서 여체가 실루엣처럼 하늘거렸다. 중세는 눈이 부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두세 번 성경험이 있었지만 도저히 욕정을 억누를 수 없었다. 그는 현지남이라도 되는 양 여자 손에 이끌려 욕실로 되돌아갔다. 물방울로 가득한 욕조에는 애오라지 감귤빛 조명과, 비누 거품과, 숨소리가 있을 뿐이었다.

그러고 나서 여교수가 뉴욕을 떠날 때까지 두어 달 동안 중세는 뻔질나게 그녀의 아파트를 드나들었다. 그에게는 애초부터 다자 연애니 뭐니 하는 것은 관심 밖이었다. 모든 것을 다 갖춘, 우월한 이성을 소유하는 쾌감, 그것뿐이었다. 그래서 그의 손길과 몸짓은 불같이 뜨거웠고 멈출 줄 모르는 철마처럼 몰아붙였다. 열락에 빠진 여교수는 한 사람에게 집중된 성애의 힘을 느꼈으리라. 격렬한 정사를 마친 어느 날 아직 가삐 숨 쉬며 그 말을 건넸다.

“결혼할래?”

“각 나라마다 현지남을 두려구요, 사우디 왕족같이?”

“우리가 바라는 것은 섹스 파트너가 아니야. 사랑한다면 누구하고나 가정을 이루어 친밀감을 나누려는 욕구라고 할까. 평생 한 사람하고만 살도록 강요하는 것은 제도의 횡포야.”

“차라리 미국인같이 원나잇 스탠드를 즐기지 그러세요. 뒤끝도 깨끗하고.”

“그것은 쾌락일 뿐 사랑은 아니지.”

중세는 여교수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가족을 거느리기 귀찮아서 홀로 살려는 친구들도 있다. 그들은 결혼 자체가 불필요한 제도라고 본다. 그것으로 인해 생기는 의무와 간섭이 싫은 것이다. 한데 그녀는 왜 남들이 꺼리는 가정을 두세 개나 꾸리려 할까? 

더군다나 그가 생각하는 사랑은 피자 조각처럼 나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한 사람에게 다 주어도 모자란다고 투덜대기 마련이다. 그것을 서너 사람에게 조금씩 나누어 준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파트너들은 자기 몫이 적다고 불평하고 더 많은 애정을 차지하려고 다툴 것이다. 그런 인간의 유전자를 고대인들은 신화로 전했다.

사람은 본디 자웅동체의 한 몸이었다. 그들의 힘을 두려워한 신이 남녀로 분리했고 배꼽이 그 흔적이다. 그래서 사람은 헤어진 반쪽을 갈구하고 제짝을 찾으면 절대 양보하지 않는다.

어쨌든 중세는 손해 볼 것이 없었다. 유타주에는 동시에 여러 배우자들과 사는 주민도 많다. 오래된 전통이어서 주정부도 쉬쉬 눈감아 준다. 더군다나 그곳에 신고한 혼인 기록은 한국과 공유되지 않는다. 적당히 여교수의 현지남으로 행세하다가 한국에 가서 새신랑인 척하면 그만이다. 그녀의 아파트에 살면 월세도 절약되고 생활비까지 송금해 준다니 그보다 더 좋은 조건이 어디 있겠는가. 친구들이 선망하는 여자를 차지했다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뿌듯했다. 중세는 다자 연애 어쩌고저쩌고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지만 기꺼이 여교수의 배우자 역할을 맡았다. 

*

캐나다 남편은 레드 와인을 한 모금 들이켰다.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지그시 눈을 감고 한참 입 안에 머금었다. 그 와인은 여교수가 즐기던 프랑스 생테밀리옹 산이다. 중세는 불면증에 시달릴 때는 캐나다 남편이 술과 최면으로 잠들게 해주었다는 여교수의 말을 음미했다.

최면은 실은 일반인에게서도 흔히 보인다. 장거리 운전을 하다 보면 현 위치를 깜박 잊는다거나, 낮잠을 자다가 깨어나 밤낮을 헷갈리는 등 자신도 모르게 겪는 예가 많다. 엄밀히 말하면 자위행위를 하는 남녀는 모두 노련한 최면술사이다. 최면은, 일련의 심리적인 환영을 지속적으로 떠오르게 한다, 잠들기 직전과 같은 몽롱한 의식 상태를 유지한다, 그 결과 뇌파와 자율신경계에서 생리적 변화를 가져온다 등으로 이루어지는데 그 과정은 수음의 모습과 일치한다. 환자에게 따뜻하다는 환각을 주면 피부의 온도가 높아지고 다이어트하는 여성들이 고기를 먹었다는 생각에 집착하면 소변으로 배출되는 단백질의 양이 느는 것도 최면 현상이다. 중세는 캐나다 남편이 뉴욕에 온다고 했을 때부터 묻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최면으로 환자를 치료하는 일을 한다던데…….”

“미국에서도 최면이 의료와 범죄 수사에 널리 이용되고 있어. 다만 법적인 증거로는 아직 불충분해.”

“주로 어떤 치료를 하세요?”

“지체부자유자의 재활을 돕거나 우울증에 시달리는 환자에게 정신 상담을 해주고 있지.”

“최면으로 타인의 심리를 파악하는 것도 가능한가요?”

“숙련된 치료사라면 할 수 있지. 러시아에 최면에 빠진 상대를 자기 마음대로 조종했다는, 전설적인 심령술사가 있었어. 그녀는 사랑의 마법사로 불렸는데 최면을 써서 연인들이 가슴에 묻어 둔 말을 고백하도록 했다고 해.”

가까운 사람끼리는 영적 에너지가 흘러서 쉬이 최면에 걸리고 서로간에 텔레파시를 주고받는다고 한다. 낮잠을 자던 주부가 출근한 남편의 비명을 들은 순간 그가 차에 치인 경우도 있다. 미국 작가 싱클레어는 자신의 처와 정신 감응을 290회나 실험했는데 76%의 성공률을 보였다.

“놀랍군요. 저는 불면증이 심한데 최면을 배워서 깊이 잠드는 것도 가능할까요? 된다면 배워보고 싶어요.”

“그 정도는 이삼 년이면 할 수 있을걸. 나에게 자기 최면 요법을 배워서 필요한 시간에 잠드는 환자도 있어. 그들 중에는 비슷한 증세를 가진 가족을 돕는 사람도 있고.”

중세는 여교수를 흉내 내 와인을 핥듯이 맛보았다. 두 달 전에 떠나면서 했던 말을 되새기면서. 그녀는 캐나다 남편과의 관계를 정리할 생각이었다. 서로 맺은 계약을 해지하면 된다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었다. 

그녀가 내게 이별을 통고하면 어떤 기분이 들까?

중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기에는 여교수에게 너무 깊숙이 빠져들었다. 열 명의 남편을 두어도 좋으니, 내가 열한 번째가 되어도 좋으니 헤어지지 말자고 애걸할 것 같았다.

인간의 애정은 맺기 어려운 만큼 풀기도 어렵다. 고용계약처럼 일방이 결정하는 것도 아니고 해고 통지처럼 돌아서면 잊히는 것도 아니다. 어느 날 수업에서 여교수와 중세는 묻고 답했다.

(Q) 다자 연애가 왜 어렵다고 보나요?

(A) 애정의 이면은 질투심과 독점욕이기 때문이죠. 그것을 얻으려고 살인을 서슴지 않는 사람도 많아요. 너무나 사랑했기에 여자를 죽여 그 살을 먹은 엽기남도 있잖아요.

중세는 캐나다 남편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탁자 아래를 더듬어 스위치를 켰다. 여교수의 고급 아파트는 완벽한 보안 시설을 자랑했다. 고객이 원하면 거실에서 일어나는 일이 실시간으로 녹화돼 경비실 피시에 동영상 파일로 저장된다. 중세는 또 와인을 벌컥 들이마셨다, 서둘러 취하려는 술꾼처럼. 술이 약한 그는 금방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캐나다 남편은 호텔로 돌아갈 셈인지 주섬주섬 가방을 챙겼다. 

두어 달 전쯤 캐나다로 떠나기에 앞서 여교수는 흔들리고 있었다. 창가에 우두커니 서서 독백하듯 말했다.

다자 연애는 종교 집단에서나 가능할지 몰라.

폴리아모리는 본디 특정 종교의 혼인 방식이었다. 속세를 버린, 구도자 같은 신도들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이성에 대한 질투심과 독점욕을 억제했을 법했다. 그녀는 30층 아파트의 유리창 밖으로 소담스레 펼쳐진 공원을 응시했다. 환장하게 파릇파릇한 신록에서 한 떼의 연인들이 어우러져 휴일의 한낮을 만끽하고 있었다. 

“몇몇 나라에서는 재혼 인구가 초혼을 앞서고 있어. 폴리아모리가 그 대안이 될 줄 알았는데…….”

여교수가 미래의 문화라고 칭했던 다자 연애의 지속 기간은 일반적인 결혼에도 못 미친다. 집단혼에 대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5년 이상 관계를 유지하는 폴리아모리스트는 7%에 불과하다. 같은 기간에 70%의 보통 부부들이 별 탈 없이 살아간다. 그날 창가에서 두 사람은 묻고 답했다.

(Q) 다자 연애는 왜 그처럼 빨리 붕괴될까요?

(A) 네 말마따나 인간의 본질적인 질투심과 소유욕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요인이 있는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어. 

여교수는 중세 쪽으로 돌아서며 말했다.

“어쩜 네 말이 맞는지 모르겠어. 여러 배우자에게 애정을 공평히 분배하기는 어려워. 미스터 박은 너에게 주는 조각이 더 크다고 투덜대. 호호.”

근래에 그녀는 걸핏하면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뒤늦게 애정의, 감춰진 심연을 들여다본 듯싶었다. 수시로 같은 말을 되풀이하기도 했다.

그에게 계약을 끝내자고 할건데…… 쉽사리 받아들일까…….

캐나다 남편은 중세의 부탁을 거절하고 떠날까 말까 망설였다. 새벽 일찍 뉴욕행 비행기를 탄데다 여교수의 아파트에서 오후 내내 대화를 나누어 피곤이 몰려왔다. 한편으로 그녀에게서 더 많은 애정을 받았던, 어눌해 보이는 애송이를 혼내주고 싶기도 했다. 지난 주에 중세가 이메일을 보내 한번 보자고 했을 때는 좀 어리둥절했었다. 딱히 둘이 만나서 유품을 정리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캐나다 남편은 손가락으로 톡, 톡 탁자를 두드렸다, 여교수의 탭탠스 스텝을 기억해 내듯이. 이윽고 결심한 듯 중세를 소파에 누이고 그 곁에 앉았다. 중세는 기다렸다는 듯 팔걸이를 베개 삼아 눈을 감았다. 여교수가 욕조 안에서 편안히 잠드는 장면을 연상하면서. 그녀의 숨소리가 자장가처럼 귓가를 간질였다. 캐나다 남편은 서서히 이완 수면 유도를 시작했다.

…… 당신은 센트럴파크의 야외 수영장에 있습니다. 주변에 꽃향기가 가득합니다. 비치파라솔 아래 하 교수가 곤히 잠들어 있습니다. 당신은 그녀를 향해 헤엄칩니다. 열 번을 세면 선탠 의자에 다다라 하 교수와 함께 잠들 것입니다. 아주 행복해 웃음이 나옵니다. 여섯 번입니다, 일곱 번입니다…….

중세 얼굴에 미소와 두려움이 갈마들었다. 욕실에 드러누운 여교수에게도 같은 주문을 외우지 않았을까. 그는 서둘러 최면에 말려들었다. 쏟아지는 졸음을 이기지 못해 길게 하품하더니 눈에 띄게 호흡이 얕아졌다. 캐나다 남편은 최면 상태를 확인했다. 

…… 자꾸 졸리고 당신의 몸이 나른합니다. 이제 두 팔을 움직이지 못합니다. 왼쪽 팔을 들어 보세요…….

중세는 낯을 찡그렸다. 그의 말에 따르려 했지만 팔이 말을 안 듣는 것 같았다. 그때쯤 중세의 의식과 행동은 캐나다 남편의 뜻에 달렸다. 일단 최면 상태에 들어서면 상대방은 유도자의 포로나 마찬가지이다. 다음은 무의식 상태에 빠진 중세에게 암시를 불어넣는 단계였다. 그런 때는 피실험자가 손쉽게 떠올리는 장소나 추억을 일깨워야 한다. 여교수와 4년을 동거한 캐나다 남편은 그것을 알 것 같았다. 

…… 당신은 하 교수와 목욕하던 욕조에 있습니다. 가장 아늑하고 행복한 장소입니다. 따스한 물이 차오르는 소리가 들립니다. 물이 턱밑에서 찰랑댑니다. 당신은 물속에 몸을 깊이 담급니다…….

중세는 히죽이며 옆으로 스르르 고꾸라졌다. 수면 중 꿈꾸는 구간인 급속 안구 운동에 돌입해 때때로 눈꺼풀이 바르르했다. 이 시간에 인간은 과거의 아픈 기억이 치유되고 심리적으로 가장 포근하다. 중세도 그 수면 단계에 빠져 절대 행복을 맛보는 중이었다. 그런 모습을 캐나다 남편은 두렷한 눈길로 지켜보았다. 그를 질투에 눈멀게 한 자를 어떻게 할지 번뇌하는 얼굴로.

그 무의식의 세계에 깊숙이 빠지면 유도자의 도움 없이는 네댓 시간 동안 최면에서 못 깨어나는 경우도 있다. 스탈린 치하의 구 소련에서 비밀 경찰은 반대파를 자연사로 위장하려고 최면을 연구했다. 그 생체 실험의 결과는 이러했다.

사전에 그 실험은 인간이 얼마 만에 익사하는가를 알아보는 것이라고 알렸다. 욕조에 대상자를 누이고 최면을 건 후 녹음기로 물이 쏟아지는 소리를 들려주었다. 그는 실제로 물속에서 질식사하는 사람처럼 숨 쉬려고 애쓰다 호흡 장애를 일으켜 죽었다.

중세는 여교수의 죽음을 전해 들었을 때 어떤 예감이 들었다. 그녀는 캐나다로 떠나기 전까지 죽어야 할 이유가 없어 보였다. 한국에서 살인 동기의 70%가 치정과 가정불화이다. 그것은 배고파서 저지르거나 돈을 노린 살인보다 많다. 인류 최초의 살인도 카인의 투기 탓 아닌가. 

이성에 대한 질투심과 소유욕은 그만큼 태생적인 인간 본성이다. 그것은 모든 종이 멸망한 빙하기에도 살아남은 바퀴만큼이나 끈질긴 고질병이다. 그것을 얕보았던 모든 혼인 방식들 – 모계사회, 일부다처, 집단혼 등등 – 은 가뭇없이 사라졌거나 사라지고 있다. 마지막 보루라는 중동에서도 복혼은 남성을 독차지하려는 여성의 욕망이 터져 나오면서 서서히 침몰 중이다. 

중세는 최면에 빠져들 때 캐나다 남편의 주문을 흔쾌히 반복했다. 물속에 몸을 담급니다… 물속에… 몸을 담급니다… 물… 속에… 몸… 을… 담급니다……. 그가 그대로 잠들지 깨어날지 모를 일이었다. 그 녹화 파일을 본 밴쿠버 경찰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미지수였다. 궁극적으로 세인의 머릿속에 여교수의 죽음이 어떻게 각인될 것인가도 관심 밖이었다. 위험할지라도, 죽도록 독점하고 싶었던, 자신의 다자 연애에 대한 인상 비평에 A+ 학점을 준 여교수에게 진정 헌신하고 싶었다.



[당선소감] 문노들이여! 용기백배 하시길


▲광주 출생

▲외국어대 졸업
▲미국 롱아일랜드대학교(Long Island University) 정치학 석사
▲전 뉴욕시 한국계 신문사 기자

당선자는 말한다, 왕은 하늘의 뜻, 신춘문예는 심사자의 뜻이라고. 누구나 입심 걸쭉한 문청文靑을 뽑고 싶을 터인데 늦깎이 문노文老의 손을 들어준 심사위원님께 감사 드린다. 꾸벅. 

당선자는 또 말한다, “문노들이여, 소설처럼 생사의 결말도 반전으로 끝내자.” 이삼십 년 후에는 60세 이상 노인이 우리나라 인구의 4할이다. 문학도 자리도 노장들이 그만큼 꿰찰 것이다. 그런 영감에 취했다면 움츠리지 말고, 멈칫거리지 말고 문노의 행진에 뛰어들 만하다. 

당선자의 작가 궤적을 들여다보면 한껏 분발할 듯하여 해괴한 고백 몇 가지. 당선자는 본디 감수성을 모태로 하는 문학적 유전자가 결핍돼 그 흔한 근현대 소설 하나 웅숭깊이 섭렵하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렀다. 사서오경 같은 철학서를 좀 뒤적거렸는데 기껏해야 일이백 권이나 될까 말까. 완독한 순수소설이 손꼽을 정도이니 온갖 질책과 야유를 받아도 싸다. 거기에다 문학 강좌는커녕 동아리 가담도 전무해 문학 이론 수준은 갓난애나 다름없다. 취미 삼아 끄적거리다 신춘문예에 덜컥 뽑혀 얼떨떨할 뿐이다. 

문노들이시여! 이 염치없는 소감을 보고 용기백배하시기를. 다만 한 가지. 남에게 배우는 만큼, 남을 따라 하는 만큼, 남을 흠모하는 만큼 입문의 기회는 사라지지 않을까.



[심사평]  소설=이야기 잊지 말았으면

박혜강
▲광양 출생
▲89년 무크지 '문학예술운동' 제2집에 중편소설 '검은 화산' 발표 등단.
▲장편 '젊은 혁명가의 초상', '검은 노을', '다시 불러보는 그대 이름' 등 다수 

근래에 ‘안녕’ 대자보 열풍이 대단하다. 시국이 이렇게 요동칠 때면 문학의 대중적인 열기가 일시적으로 수그러들기 마련이다. 세상 돌아가는 상황이 드라마틱해서 문학에 관심을 둘 여유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문학의 대중적인 열기가 약해질지언정 그 깊이나 농도는 옅어지지 않는다. 문학은 시대를 반영하는 것이라서, 글을 쓰는 사람들은 이런 때일수록 격랑을 헤치며 굵고 강한 목소리를 토해내기 때문이다.

나는 심사를 의뢰받으면서 이번에는 거시적 담론의 응모작품이 늘었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데 응모작품을 검토해본 결과 그 예상이 여지없이 빗나갔다. 산문이 운문보다 ‘발이 느리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응모작품 상당수가 사소설이었다. 그래서 주제가 모호하다거나, 시시콜콜한 소시민적인 이야기가 많았다. 또 서사가 실종된 작품이 많았는데, 소설이 곧 이야기라는 것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예전에 비해 요즘 응모자들의 문장 실력이 좋아졌다는 것은 인정하고 싶다. 창작을 지도하는 학교와 학원이 많아졌고, 컴퓨터가 필수품으로 자리 잡은 덕일 것이다. 그런데 문장이 미숙한 응모작품이 더러 있어서 안타까웠다.

문학은 언어를 표현 매체로 하는 예술이다. 소설을 쓸 때 단어 선택이 잘못된다거나 문장이 올바르지 못하게 되면 아무리 좋은 이야기를 늘어놓아도 전달이 잘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할 것이다.

또 하나 지적을 한다면, 단편소설의 특징이 무엇인지 알고 글을 써야한다는 것이다. 어떤 작품들은 중편이나 장편의 일부를 오려놓은 듯했다. 단일한 효과와 함축성 그리고 통일성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져야할 것이다.

응모작품 중에서 '산고동 재', '네버모아', '패총', '고독한 거미', '비독점적 다자 연'애에 대한 인상비평'을 주의 깊게 읽어보았다.

최종적으로 '고독한 거미'와 '비독점적 다자 연애에 대한 인상비평'을 두고 어느 것을 선택해야할지 망설였다. 두 작품 모두다 문장력이나 이야기를 끌어가는 힘이 좋았다. 두 사람 모두 습작기간이 상당하다는 느낌을 받았고, 무엇보다 소설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는 장점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독점적 다자 연애에 대한 인상비평'을 당선작으로 골랐다. 제목이 너무 길다는 흠이 있었고, 이야기 전개 과정이 어느 정도 예상된다거나 작의적인 부분이 약간 드러나서 아쉬웠지만 이 정도라면 당선작으로 내놓아도 괜찮겠다 싶었다. 장차 더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는 힘이 엿보여서 호감을 받았다는 점도 밝혀두고 싶다. 당선자의 문운이 창창하기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