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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킬 / 나푸름



냄비에서는 멸치 우리는 냄새가 풍겨왔다. 아내는 식탁에 앉아 시금치 끝단을 다듬고 있었다. 점심을 준비하는 아내의 뒷모습을 보고, 남자는 문득 저 여자가 누구인지 생각했다. 부엌에 있는 아내가 낯설게 느껴졌다. 남자는 곧 그 낯섦이 아내가 아닌 자신에게 있음을 발견했다. 아침을 먹고부터 지금 이 시간까지 소파에 앉아 졸고 있는 모습은 분명 제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낯선 모습을 소화하기 위해 무릎 위에 올려놓은 신문의 사회면을 꾸역꾸역 읽어 내려갔다. 넘어가지 않는 문장들이 명치를 짓눌렀다.

 

겨우 한 달.

 

남자는 아내가 있는 부엌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등을 지고 선 뒷모습을 훑어보다 다리 부근에서 시선이 멈췄다. 아내의 뒷모습은 회사의 어느 여직원보다도 볼품없었다. 너무 푹 익어 뭉그러진 고깃덩어리 같았다. 시선은 곧 아내의 흰 종아리에 떨어졌다. 무릎과 발목에 접힌 주름만 아니면 봐줄 만했다. 몇 년만 젊었다면 아내의 팔목을 잡아끌 의욕이 생겼을 것이다. 지금은 숟가락을 들고 밥을 먹는 일 말고는 남다른 욕구가 들지 않았다. 아내는 전부 여성호르몬 때문이라고 했다. 결국 나이 탓이라는 얘기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그 말이 아직 믿어지지가 않았다. 무엇이든 나이를 탓할 정도로 늙어버렸다는 건 회사에서 권고사직을 통보받았을 때부터 인정하기 싫은 일이 되어버렸다. 차라리 무능함을 탓하는 것이 좋았을 텐데, 회사는 구색 좋게 정년도 되지 않은 남자에게 나이를 핑계로 퇴직을 종용했다.

 

긴 시간 동안 그가 아내를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차려주는 식사 때문이었다. 남자는 문득 자신이 지난 몇 분간 신문 기사의 같은 줄을 읽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신문을 덮고 아직 차려지지 않은 밥상 앞에 앉았다. 배가 고프기는커녕, 아침에 먹은 음식이 소화도 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마땅히 할 일이 생각나지 않았다. 젊을 때는 지금의 나이가 되면 교외로 나가 낚시를 하거나 여행을 다닐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좀처럼 밖으로 나갈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식탁에 앉아도 신경조차 쓰지 않는 아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감상에 젖었다. 여자와 수십년을 같이 살았지만, 이제는 도대체 무엇에 반해 결혼했는지조차 감감했다.

 

나는 이 여자의 다리를 좋아했던가? 단정히 빗어올린 머리를 좋아했을 수도 있겠지.

 

아내는 도덕적인 여자다.

 

남자의 아버지는 가정에 충실한 편이 아니었다. 가정이 붕괴될 지경까지 가지 않은 건 모두 어머니의 덕이었다. 어머니는 견디지 않아도 될 것까지 참아내는 사람이었다. 그러다보니 어릴 때부터 그는 존경받는 남편이 되는 것을 꿈꾸었다. 매일 끼니를 챙겨주는 아내를 보면 어느 정도 꿈을 이룬 것도 같았다. 아내는 가정에 충실했다.

 

정오가 가까워지자 거실 창문 사이로 굵은 빛발이 내리쬐었다. 여름의 더위는 해가 갈수록 심해졌다. 그는 겨드랑이와 무릎 사이가 땀으로 젖어가는 걸 느꼈다. 퇴직을 하고 나니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들이 그리워지기도 했다. 요새는 회사에서 근무시간 내내 틀어놓았던 에어컨 바람이 자주 생각났다. 열린 창문 틈 사이로 미지근한 바람이 불어왔다. 관자놀이로 땀방울이 맺혀 떨어졌다.

 

남자는 젊어서부터 유독 더위에 약했다. 땀을 자주 흘려 한여름에는 속옷까지 젖기 일쑤였다. 그는 자신의 체취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 자신의 악취도 느낄 수 없다지만, 그는 달랐다. 몸에서 참을 수 없을 만큼 심한 냄새가 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더운 날씨에 땀이 나고 그 땀으로 입은 옷이 젖어갈 때마다, 갈 곳 없는 기억들이 사방에서 튀어나왔다. 목까지 타고 흘러내린 땀을 손으로 닦아냈다. 남자는 부유하는 기억들을 애써 무시했다. 그것들은 불쾌한 냄새를 풍기며 몸 이곳저곳에 달라붙었다. 어떤 부분은 아주 선명했고 또 다른 부분은 물처럼 녹아내렸다. 기억은 땀에 흥건히 젖은 반소매 와이셔츠를 입고 있는 모습에서부터, 아무도 없는 도로를 운전하고 있는 모습까지 이어졌다. 그는 살갗으로 번져오는 소름을 느낄 수 있었다. 어떤 물체가 바퀴에 휘감겨 차체가 크게 흔들릴 때까지, 괴로움은 계속됐다.

 

차가 밟은 것은 과속방지턱이 아니었다. 이전에도 남자는 여러 번 그 길을 지나왔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그는 차를 세우지 않았다. 버려진 쓰레기이거나, 운이 나쁘면 주인 없이 돌아다니던 개나 고양이일 것이었다. 그는 버려진 동물들이 얼마나 위험하게 차도를 건너는지 알고 있었다. 이미 치여 죽은 시체가 여러 번 차에 깔려 내장과 살점까지 납작하게 짓눌린 걸 보기도 했다. 남자는 길가에 버려지는 흔한 물체를 치었다고 해서 평생 죄책감을 가질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기억은 생활 곳곳에 숨어들어 마치 고장 난 브레이크처럼 그의 생활을 방해했다. 짜증이 밀려왔다.

 

도대체 왜 내가 그런 일에 신경을 쏟아야 하지?

 

그는 일의 원인을 아내에게 전가했다. 머릿속에서는 공상에 가까운 생각들이 멈추지 않았다. 입 밖으로 내면 모든 것이 끝나버릴 것 같은 상상이었다. 남자는 입을 닫았다. 말을 하지 않고 생각만 하다보니 어떤 일이 원인이었는지조차 잊어버리고 말았다.

 

남자는 아내의 뒷모습을 좇아 시선을 옮겼다. 된장국의 간을 보고, 밥을 푸고, 마른반찬을 꺼내는 아내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수십년간 반복되어온 아내의 일이었다. 아내의 일은 오랫동안 바뀌지 않았다. 그녀는 오랜 시간 동안 밥을 차리고 청소를 하고 소변을 보는 일 이외에는 할 줄 아는 것이 없는 사람처럼 살았다. 그렇다면 남편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든, 어찌 되었건 이 자리를 견디는 것 말고는 도리가 없다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아내의 친정 식구들은 몇 해 전에 미국으로 건너갔다. 친정어머니도 돌아가신 지 오래라 비교적 근거리에 살았을 때도 데면데면하던 사이였다. 이제 와서 이혼을 하고 바다를 건너 신세 질 수는 없으리라. 남자는 속내를 감추고 히죽 웃었다. 아내가 자신의 말에 꼼짝달싹하지 못하고 모든 비난을 감내하는 장면이 눈앞에 그려졌다. 당장에라도 아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폭로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했다. 대단치 않은 상상이라 하더라도 아내는 심한 모욕감을 느낄 것이다.

 

국은 얼마나 줄까요?”

 

아내는 식탁에 시금치나물과 겉절이를 내놓으며 남자에게 물었다. 남편의 머릿속에 뭐가 들어 있는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는 그녀는, 나이에 비해 지나칠 정도로 순수해 보였다. 나이가 들고 순수함이 더는 장점이 되지 못하자, 그는 종종 아내가 단순히 남편에 대해 무관심한 것은 아닌지 생각했다.

 

몹시 더운 여름이었다. 외근을 나온 남자는 일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집으로 출발했다. 샤워를 하고 아내와 밥을 먹으면 점심시간이 끝나기 전까지 회사에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땀에 젖은 와이셔츠를 빨리 벗어 던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아내가 왜 연락을 하고 오지 않았냐고 타박할 것이 뻔히 보였으나 미리 연락하는 일 같은 건 무척 귀찮았다.

 

집 안은 조용했다. 남자는 아내가 장을 보러 갔으리라 여겼다. 먼저 연락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해 약간 후회하기도 했다. 샤워를 하는 사이에 아내가 돌아와 있을 것 같았다. 속옷과 와이셔츠를 가지러 안방으로 들어갔다. 침대에는 장을 보러 갔다고 생각한 아내가 잠을 자고 있었다. 이불도 덮지 않은 벌거벗은 상태였다. 아내의 몸은 성녀의 것처럼 빛나고 있었다. 커다란 창문으로 들어온 빛의 무리가 음부까지 훤히 비추는 것만 같았다. 남자는 순간 당황했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봐서는 안될 장면이 눈앞에 있는 사람처럼, 무방비 상태로 자고 있는 아내의 몸에 시선을 둘 수 없었다. 열려 있는 창문을 닫고 커튼을 쳐야 하는 게 먼저인지, 아니면 아내를 깨우는 게 먼저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창문으로는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남자의 팔에 맺힌 땀을 식혀 주었다. 불쾌감은 가시지 않았다. 남자는 두 가지 중 어떤 것도 선택하지 않고 조용히 방 밖으로 나왔다. 거실 소파에 앉아, 아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만약 그녀를 깨운다면 무척 창피해하거나 어쩌면 치욕스러워할 것이라는 게 결론이었다. 남자는 조용히 현관문을 닫고, 낮 동안 집에 온 적이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기로 마음먹었다. 자신의 몸에서 나는 쾌쾌한 땀 냄새를 참아내기 힘들었다.

 

아내는 도덕적인 사람이다.

 

그는 결혼 전부터 아내를 그렇게 정의할 수 있었다. 단순히 법을 잘 지킨다는 말이 아니었다. 지나친 결백성과 도덕성은 남자가 결혼을 결심하게 된 결정적 이유이기도 했다. 아내는 사회 윤리에 자신을 맞추어 살아가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 꽤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 여겼고, 적어도 이 여자에게 속고 사는 일은 없을 것이라 확신했다.

 

도망치듯 집을 빠져나온 남자는 차에 시동을 걸고 회사로 향했다. 자신이 아내의 비밀을 엿본 기분이 들었다. 와이셔츠는 또다시 땀으로 젖어갔다. 그는 불쾌감에 몸을 떨었다. 샤워를 한다면 기분이 조금 나아질 것 같았다. 하지만 시간을 지체한다면 점심시간이 끝나기 전까지 회사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는 회사 근처에 차를 대고 근처 식당에 들어가 허겁지겁 허기를 채웠다. 밥을 넘기면서도 숨이 막힐 것 같은 체증에 몸이 떨렸다. 오후 근무 내내 속이 더부룩하던 그는 명찰에 달린 옷핀 끝 부분을 불에 달구어 손을 땄다. 검게 죽은피가 손가락마다 흘러나오자 묘한 쾌감이 느껴졌다.

 

차에 올라탄 남자는 시동을 걸고도 한동안 주차장을 벗어나지 못했다. 자신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오히려 아내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평소 퇴근 후의 자신이 어땠는지조차 기억할 수 없었다. 왜 이렇게까지 아내의 나신에 당황하고 있는 것인지 이해되지 않았다. 남자는 시동을 켜고 차를 출발시켰다. 도대체 아내는 한낮에 옷을 벗고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아내는 대답 없는 남자에게 좀 더 큰 목소리로 물었다.

 

국은 얼마나 줄까요?”

 

남자는 생각을 멈추고 아내를 바라보았다. 상처처럼 자리 잡은 목주름이 눈에 띄었다. 남자는 아내의 목에 시선을 박은 채 대답했다.

 

아침이라 그런지 입맛이 없네. 그냥, 적당히 줘.”

 

남자의 말에 아내는 가스 불을 끄고 잠시 시간이 멈춘 사람처럼 자리에 서 있었다. 마치 지병이 있는 사람이 참아내지 못할 고통까지 참아내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냄비는 불이 꺼지고도 한참 동안 소리를 내며 끓어올랐다. 구수한 된장 냄새가 온 사방에 퍼져나갔다. 남자는 아내가 차려주는 밥상을 수십년간 받아먹었다. 이 나이가 되도록 라면 물 하나 맞출 줄 모른다는 것이 그의 자랑 아닌 자랑이었다. 남자는 지금의 상태에서 어느 것 하나도 잃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앞으로의 세월도 견뎌내야 했다.

 

오래된 이야기였다. 남자는 더운 여름의 집 안 공기와 낮잠을 자던 아내의 얕은 숨소리를 기억하지 못했다. 그는 몇 가지 추측들에 살을 더하며 자신을 괴롭혔다. 조금 열려 있던 옷장 문이라든가, 물기가 흥건한 욕실은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남자는 자신이 봤다고 생각한 자잘한 기억들에 대해 확신하지 못했다. 다만, 벌거벗은 채로 누워 있는 아내의 모습만이 점점 뚜렷해질 뿐이었다. 남자는 아내의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오래도록 같이 산 남편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부분이었다. 만약 그때 제대로 물어봤다면 상황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어쩌면 더는 같이 살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남자는 불쾌함을 떨쳐낼 수 없었다. 마치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내들이 아내의 벌거벗은 모습을 본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장면을 본 것이 오직 자신뿐인데도 그랬다. 이대로 아내가 없는 곳으로 사라져버리고도 싶었다. 그에게는 갈 곳이 없었다. 속 시원하게 싸우기라도 했다면 나을 것 같았다. 남자에겐 아내와 싸울 만한 구실도 변변히 생각나는 게 없었다.

 

주차장을 나오자 이미 사방은 어두워져 있었다. 바람을 좀 쐬고 싶어 시 외곽으로 차를 몰았다. 도로는 금세 한산해졌다. 그는 조금 더 속력을 높였다. 눈에 익은 곳을 달리고 있다고 느낄 뿐, 자신이 어디를 가고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몸이 크게 위로 떠올랐다. 남자는 방금 지나간 자리를 백미러를 통해 훑어보았다. 도로 위에는 검은 무언가가 길게 누워 있었다. 아니, 그랬던 것 같았다. 가로등조차 없는 어두운 도로였다. 분명히 무언가가 있었다. 멈춰서 확인하고 싶을 만큼의 용기는 없었다.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통제할 수 없는 어떤 것들이 무더기로 자신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것 같았다.

 

이게 다 그년 때문이야.

 

남자는 발작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악을 쓰며 아내를 저주했다. 집으로 돌아온 남자는 조용한 집 안 내부를 보고 두려움을 느꼈다. 자신을 잡으러 온 경찰들이 어두운 방 안 곳곳에 숨어들어 있는 것 같았다. 어둠 속에는 아무도 없었다. 자신을 기다리다 잠이 든 것 같은 아내가 소파에 앉아 졸고 있을 뿐이었다. 식탁에는 식은 찌개와 밑반찬들이 평소처럼 차려져 있었다. 만약 낮에 자신이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그는 오늘도 제 시간에 들어와 아내와 함께 밥을 먹었을 것이다. 남자는 그날 처음으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금세 식욕이 돌았다. 그는 딱딱하게 굳어버린 밥을 전부 먹어 치웠다. 오후에 손을 땄던 부위가 빨갛게 부어올라 있었다. 제대로 소독을 하지 않은 탓에 세균에 감염이라도 된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작은 상처 때문에 손을 잘라내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었다.

 

그날을 참아냈기 때문에 나는 아직도 이렇게 밥을 먹고 살 수 있었다.

 

남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내의 치부까지 감싸주는 자비로운 남편이 된 것 같았다. 수십년이 지난 오늘도 식탁에는 따뜻한 밥과 국이 제 앞으로 놓여 있었다. 자신이 가정을 지켜냈다고 생각했다. 뿌듯한 기분에 없던 식욕까지 끌어올려 밥 한 공기를 전부 비워냈다. 그는 과식으로 솟아오른 자신의 배를 두드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꼭 그래야겠어요?”

 

남자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꼭 그래야 했느냐고?

 

먹지도 않은 생선 가시가 목에 걸린 듯 숨이 막혔다. 아내의 목소리는 화난 사람의 것처럼 뾰족하게 솟아 있었다.

 

무슨 말이야?”

 

그녀는 제 앞에 놓인 밥을 수저로 짓이기며 말했다.

 

평생을 그렇게 기다려 주는 법이 없지.”

 

남자는 아내의 말투 속에 드러나는 깊은 불만에 당황스러웠다. 그녀는 평생토록 남자에게 말을 높였다. 나이차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결혼이 결정될 때까지는 자신도 종종 말을 높이고는 했었다. 지금의 아내는 낯설었다. 도대체 이 나이가 되도록 같이 살았으면서, 이제 와 거리감을 느끼는 것은 무어냔 말인가.

 

아내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남자를 쏘아보았다.

 

매번 무시하더니…….”

 

아내는 두 무릎을 세워 고개를 파묻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남자는 커져가는 아내의 곡소리에 분통이 터졌다. 고마운 줄도 모르는 뻔뻔한 여자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마음고생이 모두 헛수고가 된 기분이었다.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러는 것일까.

 

울고 있는 여자의 얼굴을 짓이기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피가 터지고 살점이 떨어져 나갈 때까지 두들겨 패서, 제 잘못을 실토하게 만드는 것이다. 적어도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는 나오리라. 여자는 자신보다 참은 것이 없었다. 그는 그릇 하나 던져보지 못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분한 마음에 손까지 떨려왔다.

 

거기서 뭐든 던졌어야 했는데…….

 

방문을 닫자마자 뒤늦게 후회가 밀려왔다. 왜 그렇게까지 소리 한 번 못 지르고, 눈 한 번 마주치지 못한 채 방 안으로 들어왔는지 자신도 이해되지 않았다. 밖에서는 아직도 곡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아내의 울음소리가 듣기 싫어 손에 잡히는 것이면 뭐든 던져 박살을 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짓을 할 수는 없었다. 그래봤자 속이 시원해지진 않는다는 걸 남자는 어쩐지 알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갑작스럽게 치미는 자신의 지나친 폭력성이 오히려 낯설었다. 그는 아내에게 손을 댄 적이 없다. 남자는 언제나 아버지와 자신을 분리시킨 채 살아왔다. 가슴이 답답했다. 아내의 푸닥거리 때문에 속이 얹힌 것이 분명했다. 그는 자신이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내에게 물어볼 수도 있었다.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아내는 남자에게 거짓을 말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침대에 걸터앉아 아내의 곡소리를 들었다. 그것 말고는 별 도리가 없다고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아내는 마치 제 남편이 죽어 나가기라도 한 듯이 울어댔다. 남자는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아내는 도덕적인 여자다.

 

남자는 자신의 아이가 잠을 자고 밥을 먹고 공부를 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집을 샀다. 조용한 동네였고 무엇보다 아내는 처음 보았을 때부터 그 집을 좋아했다. 방마다 커다란 창문이 있어 채광이 잘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사건이 있은 후, 얼마 안 가 이사를 갔다. 억지로 되지 않는 말을 꾸며 겨우 지방으로 발령받고 헐값에 집을 넘겼다. 남자는 이사를 한 이후에도, 때때로 집 앞 골목에서 자신을 따라오는 누군가의 발소리를 들었다. 그들은 자주 이사를 했다. 더 이상 집을 고를 때 자신의 아이가 자라나는 모습을 상상하지 않았다.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지금의 집에 들어오고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땐, 우습게도 이전에 살던 집과 아주 비슷한 곳에서 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또다시 집으로부터 달아나지 않은 건 집을 옮겨야 했던 이유가 더는 기억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집에 들어온 남자는 아내에게 자신의 귀가를 알렸다.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그는 욕실에 들어가 간단히 찬물로 샤워했다. 수건으로 몸의 물기를 닦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아내는 벌거벗은 채로 자신에게 등을 보인 채 낮잠을 자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모습이라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웃음이 났다.

 

더우면 옷을 벗는 잠버릇이라도 있었나.

 

정오의 햇빛이 여과 없이 아내의 몸으로 들어왔다. 아내의 가슴은 조금씩 처지고 있었다. 그런 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남자는 한동안 그녀의 얇은 발목을 바라보다, 침대 위로 올라가 아내를 껴안았다. 손이 닿자마자 아내의 몸이 움츠러드는 걸 느꼈다. 열어놓은 창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아내는 땀에 젖어 있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에요?”

 

깨어난 아내는 두 손으로 제 가슴을 가리며 몸을 일으켰다. 나체로 자고 있던 사람답지 않게 수치스러워하는 얼굴이었다. 남편의 벗은 몸을 의식적으로 보지 않으려 하는 것도 같았다. 남자는 일어나 창문을 닫고 커튼을 쳤다. 여자는 다급한 목소리로 남편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서랍에서 속옷을 꺼내 입고 옷장과 침대 밑을 살폈다.

 

당신, 왜 이래요?”

 

여자가 남자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는 순간 아내의 손을 뿌리쳤다.

 

너무 덥잖아.”

 

변명 같은 말을 던지자, 아내는 오히려 남편의 시선을 피했다. 그는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와이셔츠 좀 꺼내줄래?”

 

무척 더운 날이었다. 아내의 배웅을 받으며 집을 나오자마자, 등이 땀으로 젖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남자는 회사 근처에서 간단히 밥을 먹고 오후에는 조금 졸았다. 동료들도 더운 날씨에 정신이 없어 보였다. 아무도 그가 존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오후가 되자 속이 더부룩하고 트림이 나왔다. 옆자리에 있는 직원이 손을 따는 법을 알려주었다. 남자는 명찰 뒷부분에 달린 옷핀 끝을 불에 달구어 직접 손을 땄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동료는 그를 보고 독하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검은 피가 손가락마다 올라오자, 속에 있던 답답함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퇴근 시간이 지나 회사를 나온 남자는 차에 시동을 걸고도 주차장을 빠져나오지 못했다. 숨이 막히는 더위에 쉴 새 없이 땀이 나도 에어컨을 켜거나 창문을 열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는 뒷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자신의 것이 아닌 지갑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지갑은 안방 침대 밑에서 발견됐다. 그는 오후 근무 내내 지갑을 자신의 엉덩이에 깔고 앉아 있었다. 어떻게 그러고도 졸 수 있었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다만 둔부 밑으로 느껴지는 두툼한 지갑의 감촉 때문에 때때로 어딘가에 전화를 걸고 싶은 충동이 들기도 했다. 그는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고 지갑을 열어보았다. 어떤 남자의 것이건 아내에게는 자신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실적 때문에 접대를 하다 보면 종종 여자가 권해지는 일이 있었다. 아내가 사실을 알고 있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만약 알게 된다면 상처 입을 것이 분명했다.

 

남자는 지갑을 발견한 순간에도 자신이 느끼는 불쾌하고 괴로운 마음을 확실히 정의내리지 못했다. 그가 가지고 있던 마지막 자존심 때문이기도 했고, 아내가 도덕적인 여자라는 믿음 때문이기도 했다. 믿어왔던 아내의 모습이라는 것도 자신의 머릿속에만 존재했을지 모른다는 의심을 시작하고 싶지 않았다.

 

아내는 도덕적인 여자다.

 

남자는 그 말을 다짐처럼 중얼거리며 지갑을 열고 신분증을 꺼내 들었다. 사진 속의 사람은 자신보다 세 살이 어렸다. 인상도 좋아 보였다. 도저히 다른 남자의 아내와 잠을 자고 다닐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신분증의 이름과 일치하는 명함을 찾았다. 지갑의 주인은 자신이 자동차를 구매한 영업점에서 근무하는 김이었다. 차는 일 년 전에 바꾼 것이었다. 주차장을 빠져나온 남자는 시내로 나갔다. 공용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건널목 옆에 있는 공중전화부스로 갔다. 명함에 있는 사무실 번호로 전화해 보니 김은 아직 퇴근 전이었다.

 

며칠 전에 차를 산 사람인데요. 차가 좀 이상하네요.”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근처인데 일단 좀 보고 얘기하시죠? 얼굴 보면 아실 거예요.”

 

상대방은 탐탁지 않은 목소리로 전화를 끊었다. 귀찮아하는 목소리이긴 했지만 수상하게 여기지는 않는 것 같았다. 남자는 약속장소로 차를 몰았다. 잠시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보았다. 주변은 조용했다. 며칠 전까지 낙석위험 때문에 폐쇄됐던 도로였기 때문에 차가 오가는 일이 드물었다.

 

김은 약속장소까지 걸어온 것으로 보였다. 이렇게까지 쉽게 불러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남자는 김의 얼굴을 보고 사진 속의 얼굴을 떠올렸다. 신분증을 보고도 김을 떠올리지 못한 것이 당연했다. 그는 사진과는 완전히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바람을 피우고도 상대방 남편의 얼굴을 모른 채 돌아다닐 만큼 비열하고 어리석은 인상의 사내였다. 남자는 김에게서 풍겨 나오는 시큼한 땀냄새에 숨을 쉴 수 없었다. 그는 숨을 멈추고 김에게 자신을 기억하느냐고 물었다. 김은 본 기억은 있는데, 며칠 전에 본 것 같지는 않다고 대답했다. 김은 차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정말 며칠 전에 산 거 맞아요?”

 

남자는 김의 질문에 조금 짜증을 내며, 잘 보이도록 등을 켜줄 테니 앞에서 한 번 보라고 했다. 김이 차 앞으로 서자, 남자는 차의 시동을 걸고 전조등을 켰다. 갑작스러운 빛에 김의 인상이 구겨졌다. 남자는 오른발로 힘껏 엑셀러레이터를 밟았다. 남자는 그제야 아내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 있었다.

 

그는 인적 없는 도로에 멈춰 섰다. 피곤함이 몰려왔다. 차가운 밤바람이 그의 땀을 식혀주었다. 집으로 가는 길에 남자는 휴게소에 들러 김의 지갑에 있는 현금으로 핫도그와 커피를 사 먹었다. 지갑은 화장실 뒤편 소각장에 버려졌다.

 

남자는 종종 딴생각을 하고 있는 아내의 모습을 보았다. 조금씩 말을 잃었고, 밥을 먹으라는 말이나 국을 좀 더 먹겠느냐는 말만 반복했다. 한밤중에 자신의 등 뒤로 소리 죽여 울고 있는 아내의 흐느낌을 들을 때도 있었다. 그는 모른 척했다. 아무리 미쳤더라도, 내연남의 직장에까지 전화를 걸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일방적으로 연락이 끊겼다는 것만으로도 저렇게까지 구는 것을 아는 척하고 싶지는 않았다.

 

당신 도대체 지금이 몇 신 줄이나 알아요? 지금이 아침이라고요?”

 

아내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남자는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아내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울음을 그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곡소리는 점점 커지고 있었다. 남자는 당장에라도 방문을 열고 나가, 제발 그만 좀 울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도대체 자신이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저렇게 대성통곡을 하는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아내는 수십년간 잘 해왔다. 그러니 이제 와 모든 세월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은 염치없는 일이다. 평생을 운운하며 등한시해왔다고 하는 것은 지나친 생각이었다. 배가 고팠다. 그는 희미한 밥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하루 종일 밥 한 톨도 얻어먹지 못한 것이 분했다. 울음을 그치지 않는 아내 때문에 냉장고 문을 열 수조차 없는 상황을 납득할 수 없었다.

 

김의 실종 이후로 정신이 나간 듯 보였던 아내는 시간이 흐르자 조금씩 평상시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듯 보였다. 아내를 제대로 쳐다보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보는 것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었다. 그러나 더는 알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알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평생 자신을 속였다하더라도 알아채지 못했다면 지금보다는 나았을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눈치 채지 못했던 일년간의 아내를 생각하며 괴로워했다. 가끔씩 김이 아내를 어떻게 생각했을지에 대해서 궁금했다. 자신과 바람피우는 사람이 도덕적인 여자라고 생각했을까? 부부가 같이 있을 때는 밥을 먹거나 잠을 잘 때뿐이었지만, 남자는 때때로 아내에게 뜨거운 국을 부어버리거나 목을 조르고 싶은 충동을 누르기 어려웠다. 자동차 전조등에 비친 김의 얼굴도 떠올랐다. 남자는 자신이 아무런 연락도 없이 집에 들어간 그 날을 후회했다. 시간이 지나자 그는 혹시 자신이 오해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혀 힘들어하기도 했다. 자기반성의 시간은 쉽게 지나갔다. 그는 견디기 힘든 아내에 대한 살의 때문에 점점 지쳐갔다.

 

어느 순간부터 일어나지 않은 일들이 그의 기억 속에 파고들기 시작했다. 처음은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출발했다. 이상했던 집안의 공기나 당황하던 아내의 말투 같은 것들이 제일 먼저 흐릿해졌다. 모든 상황은 그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한, 하지만 그렇게 비난받을 만한 일은 아닌 한 가지에 집중되었다.

 

그녀는 이해하지 못할 차림으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커다란 창문으로 바람이 불어왔다. 남자의 몸에 붙은 땀들이 차갑게 식어갔다. 그는 곧 감각을 잃었다. 아내에게 다가갔다. 남자는 자신이 바로 방 밖으로 나왔는지, 아니면 조금이라도 그녀의 곁에 머물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다만, 아내가 도덕적인 여자였다는 것만 겨우 기억해낼 수 있었다. 그러자 자신이 아는 척을 한다면 아내가 무척 민망해하고 수치스러워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람피운 장면을 목격한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히기도 했으나, 그럴 리가 없었다. 아내는 언제나 모든 일을 상식적인 선에서 해결했다. 다른 사람에게 욕을 먹거나 꼬투리가 잡힐 일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해가 바뀔수록 아내는 게을러지기보다 제 몸가짐을 조심히 했고 집안일을 철저히 해냈다. 집안일 말고 다른 일을 하는 아내의 모습을 그리는 게 아주 생소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화장실의 물기가 말라갔고 침대 밑에 떨어진 지갑이 사라졌다. 그는 방문을 닫고 집 밖으로 나왔다.

 

재수 없는 일을 당했다. 한 마리의 짐승을 치었다. 죽은 짐승이 남자가 다니던 길에 엎어져 있었다. 이미 어느 누군가의 차에 치여 숨이 끊어졌거나, 아니면 죽은 채로 누군가에 의해 길가에 버려진 시체에 불과했다. 자신이 밟고 지나간 짐승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몰랐어도, 분명한 사실은 그로 인해 경찰이 자신을 쫓아다닐 일은 없으리란 것이었다. 굳어져가는 짐승의 몸이 남자의 차바퀴에 휘감겼다. 차체가 흔들렸고 남자는 순간 중심을 잃었다. 살점이 떨어져나가고 피가 튀었다. 시체에서 나온 피가 바퀴자국을 내며 남자의 차에서 사라졌다. 그는 돌연 식욕을 느꼈다. 집에 도착했을 때 아내는 거실 소파에서 졸고 있었다. 식탁에는 주인 없는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다. 남자는 안심했다.

 

때때로 원인을 잃어버린 증오와 공포심이 해결되지 못한 채 남자를 괴롭혔다. 그는 하루에도 몇 번씩 제 기억 속에 남아있는 과거의 불행한 기억들을 떠올리며 감정의 원인들을 짐작했다. 그런 것들은 조금씩 아귀가 맞지 않았고 그는 오히려 자신의 기억을 의심했다. 기억은 조금씩 몸을 낮춰 움직였다. 저들에게 머리가 있는 듯 스스로 사고했다. 남자가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아주 사소해 보이는 기억의 일부를 바꿨고 교묘히 행동했다.

 

아내는 도덕적인 여자다.

 

기억력이 조금씩 감퇴했다. 머릿속에 박혀 있던 가장 선명한 기억 대부분이 거짓으로 바뀌자, 모든 것들이 비확실한 시간과 엉키기 시작했다. 그는 지나간 일의 순서를 헷갈렸고 종종 사람의 이름을 기억해내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 남자가 많은 일들을 다른 형태로 기억하고 있을 때쯤에는, 일상적 기억력에까지 문제가 생기고 있었다. 회사 생활에도 지장이 생겼다. 결국 그의 친한 후배가 동원되었다. 후배는 상사의 언질로 회사 근처에서 아내를 만났다.

 

병원에서 한 번 검사를 받아보는 건 어때요?”

 

외근을 갔다 오던 남자는 후배와 아내가 오붓이 카페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무작정 달려들었다. 이미 이성을 잃어 주변에서 무슨 말을 하는지도 알아들을 수 없는 상태였다. 남자는 자신을 잡아끄는 아내와 주위 사람들을 뿌리치고 후배의 등에 매달려 귀를 물어뜯었다. 후배는 곧바로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귓불의 살점이 조금 떨어져나간 것 빼고는 이상이 없었다. 그는 약간의 보상금으로 남자를 용서했지만, 회사는 그러지 못했다. 그전까지만 해도 모두 남자가 도덕적이고 상식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심한 배신감과 함께 두려움을 느꼈다. 얼마 안 가 회사는 남자에게 사직을 권고했다. 그러자 남자는 어떻게든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자신이 태어나 한 번도 폭력적인 일에 연루된 적이 없으며, 이번 일이 만약 실제로 일어났다 하더라도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말을 입증하기 위해 평생을 함께해온 아내를 걸었다. 자리에 있던 또 다른 증인들은 제정신이라고 볼 수 없었던 남자의 행동을 묘사했다. 졸지에 당한 변에 남자는 억울하고 기가 막혔다.

 

늙은 아내는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남자는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것같이 커다란 울음소리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머리가 아파왔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안하고 두려운 감정들이 남자의 기억을 헤집었다. 그러나 기억들은 이미 오래전에 남자에게서 벗어나, 고작 저들과 비슷한 종류의 감정만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깊은 슬픔에 빠져 두 귀를 막았다. 습관처럼 기억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남자는 곧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었다.

 



[당선소감] “안되는 일 많은 세상…소설은 나의 은인”


처음 소설을 쓴 건 중학교 3학년 때였다. 아직도 기억난다. 한 여자의 생활을 훔쳐보는 남자의 이야기였다. 그때는 여느 애들처럼 세상이 나에게만 등을 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만큼 자신에게 집중했던 적이 없었다.

당선 소식을 들었을 때,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날 리 없다며 부정했다. 원하는 건 언제나 멀리 있었고 세상에는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너무도 많았다. 그러고 보면 결국 소설이 나를 그런 우울한 상념 속에서도 살아갈 수 있게 해준 것 같다. 당신은 언제나 위대하다. 나에겐 은인이니 두고두고 보답할 작정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꿈을 꾸는 기분이다.

감사한 마음을 전해야 할 분들이 너무 많다. 소설의 맛을 알게 해주신 서종택 선생님과 박형서 선생님, 이혜원 선생님, 홍창수 선생님. 앞으로도 함께 글을 써갈 보라와 은별, 곧 등단할 민지, 여정, 주연. 늘 보탬이 되는 말을 해주시는 문동현 PD님에게도 인사드리고 싶다.

부족하고 모자란 글에 기회를 주신 경향신문사와 심사위원 선생님들께는 고개 숙여 감사를 전한다.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나의 가족. 언제나 나를 위해 힘써주신 그분들에게 나는 다 갚지 못할 사랑을 받고도 더 원했던 것 같다. 하지만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소식을 듣고 흥분이 가라앉자 덜컥 겁이 났다. 십 년은 걸릴 거라고 생각했던 일이 너무도 빨리 내게 다가온 것은 아닌지. 집으로 가는 길에 단테의 <새로운 인생>을 읽었다.

여기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도다.”

어쩌면 처음 소설을 썼던 날, 내 인생은 새롭게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1989년 서울생 20138월 고려대학교 미디어문예창작학과 졸업 EBS 계약직 PD로 근무 중




[심사평] “안정적 삶의 이면, 존재의 불안정한 기반 묘파”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작품은 모두 7편이었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신인에 대한 기대감을 부풀리며 심사에 임하지만 해가 갈수록 신춘문예 응모작의 수준이 전반적으로 저하되고 있다는 데 대한 아쉬움을 떨쳐버리기 어려웠다. 자연과 차단된 아파트에서 나고 자라고, 기술적으로 편집된 영상을 보며 성장한 세대는 소설적 서사와 상상력이 나약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현실로 나타나는 게 아닌가, 우려가 컸다.

 

7편 중 3편을 먼저 제외하고 본심 대상으로 남은 작품은 로드킬’ ‘드릴’ ‘어떤 얼룩’ ‘당신의 책이었다. ‘어떤 얼룩은 문학적 재능에도 불구하고 모든 소설적 인과를 성적인 문제로 해석하는 인식에 문제가 있다고 보았고, ‘당신의 책은 산만한 전개와 지나치게 주관적인 표현들이 문제로 지적되었다.

 

최종적으로 남은 로드킬’ ‘드릴을 놓고 선자들은 몹시 곤혹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두 편 모두 장점과 단점의 정도가 엇비슷해 승자 선별의 각도를 다양하게 대입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구성의 관점에서 신춘문예 당선작의 전형적인 패턴을 사용한 드릴이 밀려나고 로드킬이 당선작으로 선정되었다. ‘드릴의 후반부에 주인공이 난동을 부리는 장면은 너무 상투적이라 큰 결점으로 지적되었다.

 

로드킬은 안정적인 삶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존재의 불안정한 기반을 섬세한 필치로 묘파하고 있다. 아내에 대한 도덕적 신뢰와 불륜 사이에서 주인공의 기억은 수시로 재편집되지만 끝내 몰락을 피하지는 못한다. 인간과 인생에 대한 직관적 시선이 미덥고 열린 결말을 지향하는 작가적 자세에 신뢰를 보낸다. 정진하여 한국문학에 크게 이바지하는 작가가 되기를 빈다.

(심사 : 최인석, 박상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