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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징후 / 최지



붉은 헝겊 같은 노을이 살다갔다 

죽은 나무에 혈액형이 달라진 피를 돌려야 할

심장이 돋아나기 시작한다

기다림의 대상이, 그, 무엇이었던 동안 

더 이상 풀빛은 자라지 않았다 

대신에 동구 밖의 삼나무들이 푸른 잎을 마쳤다

가두어 놓았던 귀를 풀어 놓자마자 

귀가 아니라 입이었다며 우는

야행의 고양이와도 같았던,

그것은 단순히 후회에 관한 피력이 아닐 수도 있었지만

소문처럼 스쳤다가 간 걸음 속을 따라가다 보면

오래 전에 내렸던 눈이나 비가 다시 내계(內界)로 

돌아갈지 모른다



당신이 보낸 전령사들, 그, 후로

당신이 직접 와서 지나간 자리마다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딜 수 있게 할 가능성은

방향에게 기대어 목을 꺾거나 

내게로 오는, 그, 동안을 하르르 밟아주는 일이었다



당신은 증명하지 않고

증명되지 않는다

바람의 채집사를 자처해 보았을지도 모르는

전생보다 더 멀리서 걸어 왔던 세월 동안 

뒷모습 쪽에만 대고, 훨씬 전에 지나간 유행가 같은, 낡은, 

셔터를 겨누어 보기도 했을 거라는



가장 처음일 때 오고

가장 나중일 때 닿았던 

당신의 징후에게, 더 이상 생의 손가락 하나를 

걸어보는 행위를

파란이라거나 파탄이라는 이름으로 치유하지는 않겠다.




[당선소감] 건실한 언어로 시인의 길 걸어갈터

여수에 간 적이 있다. 기차는 너무 먼 길을 에도는 것 같았고 저녁이 오고 있었다. ‘미리내’라는 단어 한 알을 알사탕처럼 입 안에서 굴려 보았다. 남도의 달빛, 여수 바다의 파도 소리는 하얀하고도 섬세했다. 분명 바다의 바닥에서 기인한 것만 같았으리. 귀에서 작은 풍금소리가 울렸다. 그새 태어나지 않았던 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눈물이 났다. 머리칼이 아니 갈기가 마냥 헝클어진 아프리카의 검은 말(馬) 한 마리가 에티오피아의 커피향을 내뿜는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시는 여전히 내게 아프리카의 들국 떨기들이었고, 에티오피아의 우물이었다. 검고도 검었던 날들이 내게서 나를 바닥으로 내려놓아 주었다. 두통의 아침이면 “두통, 두통” 새 한 마리 울다가 가곤 했었다.

오늘 나는 무언가를 영원히 잃어 버렸고, 무언가가 다시 내게로 왔다. 초긴장과 같은 이 시간을 나는 가장 건실한 언어로 받아 수첩에 옮길 것이다. 무등일보에 절한다. 

▲충남 서천 출생

▲광운대 대학원 석사




[심사평] 시는 그렇다면 기록할 수 없는 것들에 관한 기록일까

정윤천 (시인)

적지 않은 투고작들을 빼놓지 않고 들추어내던 와중에, 한 때 왕성한 시력을 문단에 선보였던 이 지역 출신 시인의 '해가 지지 않는 쟁기질'이라는 시집의 제목이 하나 떠올랐다. 비문(非文)이었다. 그렇다면 저 문장의 속내는 해가 지지 않을 때까지의 쟁기질 정도를 이르는 말이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가 지지 않는 쟁기질’이라는 생뚱맞은 문장은 시적인 어법의 환기 속에서 나름대로의 매력과 힘을 발산하고 있었다. 시는 그렇다면 ‘기록’이상의 혹은 그 너머의 기척이며 기미까지를 비끌어 매야하는 난항과 고투와의 대면이자 확인이기도 했을 것이다. 사실 작금 시단의 기류는 그런 정도를 넘어서서, ‘읽혀지지 않은 것들에 대한 읽히기’의 방식으로까지 세를 넓혀버렸다. 그런 사이 기존의 시들은 이미 전설이 되었거나 물을 건너버린 꼴이다. 요즘 따라 부쩍 시를 읽는 일이 무거워져 버렸다.

투고시의 대부분들은 자잘한 일상의 담론들에 그쳐 있었다. 뉴스는 신산스러운데 시들은 평안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었을까? 뱀이 살아요(박평숙). 늪(곽성숙), 뿌리는 닫힌 문이다 (남상진) 보고서(한영희) 꿈의 각(박순옥) 어느 일요일 오후 (홍유나) 씨 등의 시들과 함께 조유희(앵무새의 난독증)과 최재하(바람의 징후)가 마지막까지 남았다. 두 사람의 작품은 당선권에 무난했으나, 진술의 뒤에 남겨진 여운은 “바람의 징후”가 더 깊어 보였다. 다시 또 일어나 앉아 끝장이 날 때까지 “쓰는 자”만이 시인일 것이다.

▲ 90년 무등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 '생각만 들어도 따숩던 마을의 이름' 등 다수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