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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한 물방울 / 김유진


참 단단한 물방울이라 여기면서, 밤을 깐다
복도가 나오고 수 많은 문이 보인다
벌레는 아주 가끔씩 빛처럼 부서졌다
그때 흔들린 손에 대해 말하지 않았지만
한 말을 다시 반복하는 뉴스는 보았다
나는 물을 마신다 물이 흩어진다 수 많은 문이 열린다
흩어진 수 많은 껍질을 문이라 할 수 있을까

참 단단한 물방울이라 여기면서
윗부분 중간을 칼집 내어 잡아 당긴다
형광등은 자주 깜박거렸다
천장 한쪽 구석에 거미줄이 불빛에 걸려 움찔하면
아무도 없을 때 더 시끄러워지는 나는
그동안 꾼 꿈과 마주치고 다양해진다
초인종이 울린다 나는 다시 한 곳에 모인다

참 단단한 물방울이라 여기면서
거울을 보며 이를 드러내고 웃어본다
웃음이 길게 늘어지며 읽을 수 없는 표정들이 지나간다
냉장고에 붙여 놓은 명언들이 노랗게 바래지고 있다
자주 삶은 베갯닛과 닮았다
인쇄해두고 한 번도 가지 않은 여행지를 자꾸 머리 속에서 내몬다
종이를 본다 얼룩진 곳이 단단하다

창문 위에 물방울이 가득 맺혀 있고
방에서 물방울 뒤척이는 소리가 들린다



[당선소감] 아버지 붙들고 흘리던 눈물, 영광으로 다가와


날씨가 몹시 흐렸고 이내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별 생각 없이 사람들 사이에 섞여 하루를 생각하고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음을 흐릿하게 감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디서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의 당선 소식. 잠시 휴대전화를 의심하고 귀를 의심해보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의심할 여지 없는 현실이었습니다. 어쩌면 내게도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나.

올여름 폐암 수술을 하신 아버님께 제일 먼저 이 기쁨을 전하고 싶습니다. 수술하지 않으시겠다던 아버지 붙들고 울며 흘리던 그 눈물이 바로 오늘의 영광인 '단단한 물방울'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숨 고르고 돌아보니 고마운 분들이 많습니다. 참신한 상상력으로 늘 새로운 시의 길을 안내해 주신 김영남 선생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시의 손을 놓으려 할 때마다 다시 용기를 북돋아 준 이기홍 선배님, 심명수 선배님, 그리고 정동진역 회원들께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언제나 저를 최고로 믿어주는 송경수 씨, 당신이 있어 여기까지 왔습니다. 첫 독자가 되어 쓴소리를 거침없이 해준 지혜, 지연, 나경에게 사랑한단 말 전합니다. 누구보다도 기뻐해 주는 동생들 완희, 영진, 병관, 정희, 종일이와도 이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음지의 숨소리를 건져 올려주신 김명인 선생님, 박태일 선생님, 최영철 선생님 고맙습니다.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훌륭한 시인이 될 것을 약속하오며 제게 새로운 기회를 주신 국제신문사에도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좋은 글로 보답하겠습니다.


▶약력=1963 년 서울 출생. 한국방송통신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 전문가과정 수료



[심사평] 온건하면서도 설득력 있는 일상의 풍경 자아내


신춘문예 투고시가 두 켜로 나뉜 지는 오래다. 어느 정도 수준을 갖춘 소수 전문시와 흔한 생활시 다수가 그들이다. 그만그만한 표현력을 갖춘 전문시는 우리 사회에 시를 꾸준히 학습하는 이가 적지 않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생활 감각을 담아낸 소박한 생활시 또한 문학이 삶의 중요한 취향문화임을 한결같이 일깨워 준다.

문제는 이런 속에서 눈을 번쩍 뜨게 할 만한 작품이나 새로운 시도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는 데 있다. 적당한 수준의 언어감각을 바탕으로 소극적인 표현성에 머문 작품이 대종이다. 올해 투고시 또한 거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뽑는 이의 손에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은 셋이었다. 조유희의 '고양이의 대화법', 김태형의 '비 내리는 공단', 그리고 김유진의 '단단한 물방울'이 그들이다.

'고양이의 대화법'은 고양이를 대상으로 삼은 날렵하고도 예각적인 인상화다. 글감으로서 흔한 고양이를 시인 나름의 신선한 서정 공간으로 감싸고자 했다. 표현주의적인 필치까지 겨냥한 역량이 뛰어났다. 거기에 견주어 '비 내리는 공단'은 우리 사회의 가장자리 풍경에 대한 집중적인 응시가 빛나는 작품이다. 대범한 수사로 그려 담은 날카로운 현장성은 시인의 넉넉한 뒷심까지 엿보게 한다. 앞서 가는 삶보다 뒤서는 삶이 차라리 건강할 수 있음을 일깨워 주는 시다. 그럼에도 두 편 모두 당선작으로 밀기에는 완성도가 떨어졌다.

'단단한 물방울'은 방에 앉아 밤을 까는 가벼운 일상을 독특한 상상적 직조술로 즐긴 작품이다. '고양이의 대화법'처럼 표현성을 극도로 좇지도 않았고, '비 내리는 공단'과 같이 현실의 무게에 표현이 밀리지도 않았다. 그만큼 온건하면서도 설득력 있는 풍경을 자아낸 셈이다. 이 작품이 지닌 나날살이에 대한 섬세한 상상력은 아무나 넘볼 경지가 아니다. 함께 보낸 '핀셋' 또한 좋은 작품이었다. 당선작으로 밀어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다. 그러나 두어 군데 막연한 진술이 흠을 키웠다. 따라서 뽑는 이는 김유진의 '단단한 물방울'을 즐겁게 당선작으로 민다. 힘차게 날아오를 앞날을 기대해도 좋으리라. 더욱 가혹한 말의 형벌 속으로 쉼 없이 내려서기 바란다. 

심사위원 김명인 박태일 최영철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