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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기 좋은 날 / 김도경



우리 이러지 말고 내일이라도 인사드리러 가자

직장이라도 잡혀야 인사를 드리든지 말든지

하지그러니까 멀쩡한 직장을 왜 그만두냐? 거기도 답이 없긴 마찬가지였어

 

등장인물

 

동욱

 

명은

 

아버지 명은의 부

 

어머니 명은의 모

 

 

현재.

 

무대

 

동욱과 명은이 동거하는 원룸이다. 원래 명은의 집이다.

 

좌측으로 주방과 현관이 있고, 다른 쪽에 욕실 문과 베란다로 나가는 문이 있다.

 

방의 한쪽에는 슈퍼 싱글 크기의 침대가 있다. 분홍색의 화사한 담요가 덮여 있다.

 

창과 침대 사이의 작은 목재 테이블 위에 구형 브라운관 텔레비전이 놓여 있다.

 

방의 다른 쪽에는 옷장과 옷걸이용 행거가 있다. 동욱과 명은의 옷이 함께 걸려 있지만, 대부분 명은의 옷이다.

 

그 밖에 화장대 등이 있어 여자의 방임을 보여준다.

 

바닥에 명은의 옷가지가 널려 있다.

 

저녁, 실내가 어둡다.

 

잠시 후,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불이 켜진다.

 

외출복 차림의 명은이 문을 꽝 하고 닫으며 먼저 들어온다. 기분이 좋지 않다. 뒤이어 동욱이 쫓아 들어온다.

 

동욱

 

대체 왜 그래? 말을 해야 알지. 밥 잘 먹고 와서 무슨 난리냐.

 

명은 밥이 입으로 들어가니?

 

동욱 왜 그러는 거야? 음식이 별로였어? 맛있기만 하더만.

 

명은 배고파. (냉장고에서 음식을 꺼내 먹기 시작한다)

 

동욱 아까 그렇게 먹고 또 배고파? 대체 하루에 몇 끼를 먹냐.

 

명은 배속에 거지라도 들었나보지! 내가 몇 끼를 먹건 무슨 상관이야!

 

동욱 (명은에게 찰싹 달라붙어 달래려) 왜 그래? ?

 

명은 저리 가, 귀찮게 왜 이래.

 

동욱 (어색한 애교를 부린다) 야아, 왜 그래? 좀 풀자.

 

명은 부러워서 그런다, 부러워서. 내가 걔보다 뭐가 못났다고. 공부도 못했고, 촌스럽고, 성격도 제일 안 좋은 애였어. 남자들에게 인기라곤 하나도 없는 애였단 말야. 적어도 걔보단 먼저 갈 줄 알았는데.

 

동욱 능력 되면 먼저 갈 수도 있는 거지. 뭐 그걸 가지고 그러냐.

 

명은 걔가 마지막이었단 말야. 이제 나만 남았어. 게다가 재력까지 갖춘 남자라니. 도대체 어디에 남자 복이 붙은 거야?

 

동욱 그래도 외모는 내가 훨씬 낫지 않아?

 

명은 아빠 정년퇴직하신대.

 

동욱 …….

 

명은 자기야, 우리 이러지 말고 내일이라도 인사드리러 가자.

 

동욱 나중에, 나중에 가자. 아직은 안 돼.

 

명은 대체 언제?

 

동욱 내 사정 알잖아. 직장이라도 잡혀야 인사를 드리든지 말든지 하지.

 

명은 얘기 잘되고 있다며?

 

동욱 물어보니까, 사실 그것도 잘 몰라.

 

명은 그러니까 멀쩡한 직장을 왜 그만두냐? 좀 참아보지.

 

동욱 거기도 답이 없긴 마찬가지였어.

 

동욱, 명은을 보다가,

 

동욱 (안고서) 미안해, 정말.

 

명은의 핸드폰 벨소리가 울린다.

 

명은 (꺼내 보고) ! 엄마야. (받고) , 엄마. 무슨 일이야? 집이지, ? 남자친구? 갑자기 왜? 아직(동욱의 눈치를 보다가) 없지. ?

 

명은, 곤란해 한다.

 

동욱, 명은의 눈치를 보다가 베란다로 나간다.

 

명은 됐어, 무슨 선이야.

 

왜 전화했어? 용건이 뭐야.

 

(잘 들리지 않는다) 어디 가는 중이야? 여보세요? 잘 안 들려.

 

엄마? 여보세요? 여보세요?

 

전화 끊어진다.

 

명은 (베란다를 향해) 뭐해? 통화 끝났어. 들어와.

 

잠시 후, 동욱이 나온다.

 

명은 (킁킁 냄새를 맡고) 담배 피우지 말랬지! 담배 냄새 싫단 말이야.

 

동욱 그럼 밖에서 혼자 뭐 하고 있냐.

 

명은 좀 끊어라. 싫다는데도 기어코 피우지?

 

동욱 어머님 뭐라고 하셔?

 

명은 그냥, 뻔한 얘기지, .

 

동욱 결혼 재촉하셔?

 

명은 축의금 아깝다고. 지난주에도 축의금만 20만원을 넘게 내셨대. 퇴직 앞두고 있으니까 걱정이신가 봐. 그거 다 도로 걷어야 하는데 하고.

 

명은, 침울해진다.

 

명은 마지막에 뭐라고 했는데, 잘 들리지도 않고. 어디 가시나?

 

동욱 어디 옆집에 마실 가시나보지.

 

명은 드라마 할 시간엔 마실 잘 안 다니시는데

 

동욱 전화 해보든지. (옷을 벗으며) 안 씻어? 난 좀 씻어야겠다.

 

동욱, 홀딱 벗고 속옷차림이 된다.

 

명은 배 나온 것 봐. 운동 좀 하세요, 아저씨. 똥배가 이게 뭐야?

 

동욱 언젠 푹신해서 좋다더니? 같이 안 씻을래?

 

명은 먼저 씻고 있어. 곧 들어갈게.

 

동욱, 욕실로 들어간다. 뒤이어 샤워기 물소리가 들린다.

 

명은, 외투를 벗으려다가, 혹시나 싶어 전화를 건다.

 

명은 여보세요, 왜 전화했어? 어디라고? (놀라서) 왜 연락도 없이 오고 그래!

 

명은, 전화를 끊고 급히 욕실 문부터 두들긴다.

 

명은 큰일 났어! 큰일 났어! 큰일 났어!

 

동욱 (욕실 문을 빠끔히 열고 머리만 내민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명은 엄마 아빠 오셨어! 요 앞이래!

 

동욱 뭐? 에이, 장난하는 거지?

 

명은 지금 장난하는 것 같아?

 

동욱 정말이야? 왜 갑자기?

 

동욱, 깜짝 놀라 대충 머리의 비누거품만 헹궈 내고 뛰어나온다. 어떻게 해야 할지, 허둥지둥 정신이 없다.

 

명은, 정신없이 동욱의 옷가지를 숨기고 있다.

 

'딩동' 초인종 소리가 들린다.

 

명은 뭐하고 있어? 빨리 숨어!

 

'딩동'

 

어머니 (소리) 명은아! 엄마 아빠 왔어. 명은아?

 

명은 (소리침) 잠깐만! (동욱에게) 얼른 안 숨고 뭐해!

 

동욱 (둘러보지만) 대체 어디로?

 

명은 창문!

 

동욱 미쳤어? 여긴 4층이라고!

 

어머니 (소리) 명은아!

 

명은 그럼, 베란다!

 

동욱 베란다 보시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설마 영화에서처럼 매달려 있기라도 하라고? 그러다 떨어지기라도 하면.

 

명은 그럼(찾다가) 텔레비전이라도 뜯던지!

 

동욱 뭐라고?

 

명은 텔레비전 수리 기사로 변신! 얼른!

 

어머니 (소리) 명은아!

 

동욱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내가 어떻게 텔레비전을 고쳐?

 

명은 빨리!

 

동욱, 물기도 제대로 닦지 못하고 외투(코트 류)부터 걸친 후, 바지를 대충 쑤셔 입는다.

 

정신없이 서랍을 뒤져 드라이버를 찾는다. 플러그를 뽑고, 텔레비전을 내려 일단 뜯기 시작한다. 볼트 구멍을 찾는 것만으로도 한참 걸린다.

 

어머니 (소리) 명은아!

 

명은 가요 가! 하여간 아줌마 성격도 급해.

 

명은, 나가서 문을 열고,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들어온다.

 

어머니 (들어오며) 가시나가 싸게싸게 안 열고. 하루종일 세워둘 셈이여?

 

명은 연락도 없이 갑자기 쳐들어오면 어떡해?

 

어머니 딸내미 집도 맘대로 못 와?

 

아버지 누구냐 저 사람은?

 

명은 텔레비전이 고장 나서 수리 기사 불렀어.

 

어머니 아니 야가 미쳤어. 오밤중에 여자 혼자 사는 집에 모르는 남자를 들여?

 

명은 낮엔 회사 가야지. 겨우 텔레비전 수리하려고 월차를 내? 낮에 오겠다는 거 내가 사정사정해서 온 거란 말이야.

 

어머니 그래도 그렇지!

 

명은 얼른 앉기나 해. 서 있지 말고.

 

명은, 부모의 외투와 짐을 받아 한쪽에 정리한다.

 

동욱, 텔레비전을 분해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일단 분리는 하는데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다. 그 동작이 몹시 과장되고 서툴러 보인다. 명은과 부모의 대화 내내, 슬쩍슬쩍 그들을 보고 귀를 기울이며, 반응하는 모습을 보인다.

 

어머니 너는 답답하지도 않어? 집 안에서 우아기를 입고 있어. 시방 막 들어온 거여?

 

명은 아니, 추워서.

 

아버지 (코를 킁킁거리며) 샴푸냄새가 나는디총각이 머리 감은 겨?

 

동욱 예? 아뇨. 땀이에요, .

 

어머니 야는 춥다고 돌돌 싸매고 총각은 덥다고 땀을 뻘뻘 흘리고우아기 벗어요, 총각.

 

동욱 예. (벗으려다 안에 아무것도 입지 않은 걸 알고 도로 입으며) 아닙니다. 금방 끝나요.

 

명은 아빠, 엄마한테 들었어. 정년퇴직한다면서.

 

아버지 그렇게 됐구나.

 

어머니 세상에 속도 없어. 이게 남 일이여? 퇴직하면 대체 뭐 하고 먹고살 거여. 걱정도 안 돼?

 

명은 쉬셔도 좋을 것 같은데, 이제 몸 생각도 해야지. 언제까지 청춘도 아니고.

 

어머니 공과금에 생활비에 들어가야 할 돈이 어디 한두 푼이여? 네 동생 학비는 어쩌고. 써글놈이 얼른 취직할 생각은 않고 무슨 대학원을 가겠다고 난리여. 그것도 무슨 문창과? 돈 한 푼 못 벌어오는 놈이 처먹기는 또 엄청 처먹어요. 우리가 시골이라고 농사를 짓는 것도 아니고, 매달 처먹는 식비는 어쪄. 생각만 해도 막막혀. 내가 벌 수도 없는 거고.

 

(사이) 명은아, 그래서 말인디, 너 모아둔 돈 있지?

 

명은 도온? 내가 돈이 어딨어?

 

아버지 (헛기침) 이 사람이, 오자마자.

 

어머니 당신은 가만히 있어봐. 좋은 상가 자리가 났어. 정말 명당이여, 주변 지리도 좋고, 상권도 좋고, 네 아부지 퇴직하고 같이 하면 딱 좋겠더라. 주변 사람들도 다 명당이랴. 아휴, 근디 돈이 조금 부족혀.

 

명은 아빠 퇴직금은 어쩌고!

 

어머니 네 동생 생각도 해야지. 철딱서니 없이 돈 한 푼 못 버는 놈인디, 어디 지 힘으로 장가나 가겄어? 그래도 하나뿐인 아들내미인디 어쩌겄어, 장가는 보내줘야 할 거 아녀.

 

명은 나는! 나도 시집가야 할 거 아냐. 서울에 아파트 전셋값이 얼만지나 알아? 보태주지는 못할 망정 뺏어가지나 말아야지.

 

어머니 그 걱정을 왜 네가 혀? 능력 좋은 남자 만날 생각을 않고. 네가 외모가 딸려, 능력이 딸려, 학벌이 딸려. 안 그래도 이 얘기도 할 겸 해서 올라온 겨.

 

어머니, 가방에서 사진첩을 꺼낸다.

 

어머니 자, 너가 선볼 남자들이여. 올해 가기 전에, 여기 사람들 다 만나봐. 몇 달 안 남았네.

 

동욱, 슬쩍 사진첩을 어깨너머로 들여다본다. 걱정스럽다.

 

명은, 사진첩을 대충 뒤적거리고는,

 

명은 뭐야, 다 아저씨들이잖아. 심지어 머리도 벗겨졌어! 대체 이런 건 어디서 받아오는 거야? 능력도 참 좋아.

 

동욱, 일단은 안심한다.

 

어머니 외모가 중요혀? 외모 아무 필요 없어. 내가 외모 하나 보고 네 아부지랑 살았다가 평생을 고생하고 있어. 외모만 잘났으면 뭐혀, 영 실속이 없는디. 다들 학벌도 좋고, 직업도 제대로고 돈도 많다더라. 잘 찾아봐, 네 맘에 쑥 드는 사람이 꼭 있을 거여.

 

아버지 이 사람이 남부끄럽게.

 

어머니 당신은 좀 조용히 좀 혀. 뭘 잘했다고.

 

명은 엄마, 나 선보기 싫어. 내 나이가 몇인데 벌써 선을 봐. (동욱을 신경 쓰며) 나 그렇게 조건 맞춰서 떠밀리듯 하는 결혼 싫어.

 

어머니 네 나이가 서른이여. 여태 남자 하나 못 잡고 뭐혔냐. 허송세월 보내지 말고 인제 시집갈 생각이나 혀.

 

명은 나도 가고 싶거든! 엄마까지 그럴래?

 

어머니 야가 싫으면 그만이지 뭘 그리 성을 내!

 

아버지 혹시 만나는 남자 있는 거 아녀?

 

명은 남자는 무슨, 없어.

 

어머니 그러니까 선이라도 보란 말이여.

 

명은 아 됐어, 됐어, 싫어, 그만해!

 

성질 내니까 더 배고프잖아. 아빠, 시장하지 않아요? 저녁은 드셨어요?

 

아버지 먹었어. 휴게소에서.

 

명은 집에 먹을 건 없고, 나가서 뭐 먹고 오자. 요 앞에 국밥집도 있고 고깃집도 있고, 음식점 많아. 텔레비전에 나온 맛집도 있어.

 

어머니 뭔 또 밖을 나가, 여기서 먹지. 여까지 고속버스에 지하철에 몇 시간을 시달렸는지 알어? 힘들어 죽겄어. 텔레비전 고치는 건 또 어쩌고?

 

명은 수리야 뭐 다음에 오시라고 하면 되는 거지.

 

아버지 그냥 여기서 먹자. 힘들게 어딜 나가. 가뜩이나 무릎도 안 좋은디.

 

명은 나가자. 음식 하고 어쩌고 하려면 귀찮아. 장도 봐야 하고.

 

아버지 시켜먹으면 되지, 나가는 게 더 귀찮것다.

 

명은 알았어요. 그럼 대충 드시던지. 술이 있으려나 모르겠네.

 

명은, 주방으로 나간다.

 

주방에서 술상을 차리는 소리가 들린다. 전화를 걸어 음식을 주문한다.

 

어머니 근디 아직 저녁도 안 먹은 겨? 지금이 몇 신디.

 

명은 (밖에서) 먹긴 했는데 또 배고파.

 

동욱, 분해된 텔레비전을 들여다보며 끙끙 거리고 있다.

 

어머니 참, 연속극 할 시간이 된 것 같은 디언제 끝나요, 총각?

 

동욱 거의 돼갑니다. 금방 끝나요.

 

아버지 여기까지 와서도 연속극 타령이여?

 

어머니 오늘 꼭 봐야 되는디. 예고편 보니까 서영이가 드디어 아부지를 만나더라고.

 

명은, 소주와 밑반찬 두어 가지를 플라스틱 용기 채 들고 나온다.

 

명은 음식 주문했으니까 일단 대충 잡수고 계세요.

 

아버지 (소주잔에 술을 따르며) 국물 같은 건 없냐?

 

명은 (음식을 먹으며) 탕도 시켰어.

 

어머니 네 아부지는 고기반찬에 고깃국 아니면 안 먹어. 입이 고급이라.

 

명은 미안. 고기가 없어. 온다고 미리 연락이나 해주던지. 그럼 장이라도 봐났지. 나가서 먹자니까.

 

어머니 총각은 저녁 했어요? 고생허는디 옆에서 음식 냄새 피워도 될라 모르겠네.

 

동욱 괜찮습니다. 식사하고 왔습니다.

 

명은, 동욱에게로 가서, 부모들 몰래 발로 툭하고 건든다.

 

명은 언제까지 하실 거예요? 얼른 하고 가셔야죠.

 

동욱 음, 브라운관 텔레비전은 함부로 열면 안 됩니다. 굉장히 조심해야 해요. 잘못하면 터질 수도 있고, 감전될 수도 있고요. 더구나 원체 구형이라, 수리가 쉽지 않겠어요.

 

명은 그래서요?

 

동욱 그러니까……. 이 텔레비전이 너무 구형이라, 제가 잘 알지 못하는 모델입니다. 그래서 당장 조립이 힘들 수도

 

명은 뭐라고요?

 

동욱 너무 구형이라, 어쩌면 텔레비전을 바꾸셔야 할지도

 

명은 멀쩡하던 텔레비전을 왜요?

 

아버지 자꾸 재촉하면 더 안되야. 그러지 말고 가서 차 한 잔 내와라.

 

동욱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명은 빨리 끝내 주세요. 울 엄마 연속극 보셔야 해요.

 

동욱, 분해된 텔레비전을 들여다보지만, 답이 없다.

 

어머니 그래도 내 맘 알아주는 건 딸내미밖에 없어.

 

아버지 그놈의 연속극 타령은? 하루쯤 좀 빼먹으면 뭐 어뗘서.

 

어머니 이 나이에 연속극 보는 낙이라도 있어야지. 내가 남들처럼 백화점 가서 흥청망청 쇼핑을 혀, 여행을 다녀? 남편이라고 하나 있는 거 유머도 없고 재미도 없고. 연속극 보는 낙이라도 없으면 어떻게 살어. 안 그려, 명은아?

 

명은 맞아, 드라마 없으면 어떻게 사나 몰라. 보고 있음 시간가는 줄 모르잖아?

 

아버지 여자들이 말이여, 연속극, 연속극. 연속극 좀 안보면 뭐 어뗘서. 안 그런가, 총각?

 

동욱 예? 저요? 그렇죠. 당장 드라마 조금 못 본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어머니 총각, 무슨 말이 그래요? 듣고 보니 이상허네.

 

동욱 (당황해서) , 그런 말이 아니고요, 저도 연속극 정말 좋아합니다!

 

아버지 뭐여? 언젠 연속극 안 본다더니?

 

동욱

 

, 그게, 그러니까좋아하긴 하는데, 꼭 챙겨보진 않는다, 그런 말이었습니다.

 

아버지 총각은 나이가 어떻게 되는가?

 

동욱 서른둘입니다.

 

아버지 결혼은 했고?

 

동욱 아니요. 갑자기 왜그걸 물으시고.

 

아버지 명은이랑 비슷한 연배 인디, 총각이 보기엔 어떤가? 우리 명은이 쓸만해 보이지 않어?

 

동욱 예. 왜 그런 말씀을 제게…….

 

아버지 우리 명은이가 말이여, 참 귀하게 키운 딸이여. 어릴 땐 피아노고 그림이고 못 하는 게 없었어. 학교 다닐 땐 공부를 얼마나 잘했는지, 대학도 일류 명문대에, 4년 내내 장학금 받고 다니고. 졸업하곤 일류 대기업에 떡 허니 입사하고 말여.

 

어머니 또 시작했어. 아무나 붙잡고 그렇게 딸 자랑이 하고 싶어? 시도 때도 없지.

 

아버지 그런 앤디, 아직까지 시집도 못 가고

 

, 명은아. 네 사촌 은진이 말이여, 곧 시집간다더라. 사윗감이 인사 왔대서 가봤는디, 참 든든하게 생겼데. 직업도 의사여. 네 삼촌, 의사 사위 둔다고 입이 귀에 걸려 가지고선, 어찌나 꼴 뵈기 싫던지.

 

어머니 인물도 참 잘랐드라. 그런 복은 대체 어디서 타고나는 거여.

 

아버지 명은아, 너는 더 잘난 놈 데려와야 혀. 그놈 코빼기 좀 눌러주게. 볼 때마다 자랑 질을 해대는데, 아주 얄미워 죽겄다.

 

명은 부럽네, 벌써 시집가고.

 

어머니 너도 얼른 가야지. 조금이라도 비쌀 때 갸. 좀 지나면 아무도 거들떠 안 봐. 폐물 되는 거여.

 

아버지 사실 좀 그려. 나도 나이 더 먹기 전에 사위 술도 좀 받아보고 싶고. 다들 사위네 손주네 자랑해 대고. 알잖혀? 네 동생은 네 엄마 닮아서 술 못 하는 거.

 

명은 아빤, 고작 술친구 필요해서 결혼하라는 거야?

 

아버지 아니란 거 알잖혀? 더 늙기 전에 손주도 보고 싶고. 퇴직 앞두니까 생각이 복잡혀.

 

명은 뭐야, 무슨 말이 그래. 미안해지게…….

 

명은, 죄송하다.

 

동욱, 괴롭다. 나갈 방법을 궁리하고 있다.

 

전선 다발을 손에 쥐고 결심을 한다.

 

동욱 (감전된 척, 비명 지르며 발작한다) 아아악!

 

아버지 뭐여? 무슨 일이여!

 

동욱 (겨우 진정하는 척하며) 순간 전기가. (숨을 돌리곤) 깜짝 놀라라.

 

명은 (놀라서) 괜찮아요? 다치지 않았어요? 어디 좀 봐요.

 

동욱 괜찮습니다. 순간적으로 온 거라, 괜찮아요.

 

아버지 감전된 거여?

 

명은 병원 가서 진찰받아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혹시라도

 

동욱 그 정도는 아니고요. 괜찮아요. , 근데 오늘 일진이 썩 좋진 않네요. 왜 이러지. 이런 경우는 처음인데

 

어머니 괜찮아요, 총각? 조심하시지.

 

명은, 텔레비전 주변을 보다, 뒤쪽에 뽑혀 있는 플러그를 발견한다. 들어 부모님 안보이게 동욱에게 살짝 보여주는데,

 

동욱, 화들짝 놀란다.

 

명은, ‘이게 뭐냐하는 표정이다.

 

플러그를 동옥에게 건네고, 동욱, 얼른 숨긴다.

 

동욱 (명은의 눈치를 보며) 괜찮습니다. 조금 놀라긴 했는데아무래도 이것 참, 오늘은 그만하고 가봐야 할 것 같기도 하고

 

명은 텔레비전은요? 저렇게 활짝 열어놓고?

 

동욱 이게 가벼운 고장인 줄 알았는데, 감전까지 되고, 생각보다 많이 심각합니다. 수리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아요. 근데, 시간도 그렇고, 일진도 그렇고, 그래서 수거해가서 사무실에서 수리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완벽하게 고쳐서 내일 가져다 드릴게요.

 

어머니 아니, 총각. 아깐 금방 된다더니. 연속극은요?

 

동욱 연속극은 다음에 재방송으로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어머니 안 돼요, 총각. 지금 그거 하나 기다리고 있는디.

 

동욱 감전까지 되고, 아무래도 오늘은 그만하고 가야겠습니다.

 

명은 정 그러시다면, 부탁드릴게요.

 

동욱 죄송하게 됐습니다. 사무실에서 완벽하게 새것처럼 고쳐드리겠습니다. 수리비는 걱정하지 마세요. 제 사비로라도 처리할 테니까.

 

어머니 명은아, 연속극은?

 

명은 수리가 어려울 것 같다시잖아.

 

어머니 안 되야, 일주일을 기다렸어. 총각, 안 돼요!

 

아버지 왜 이러는 거여?

 

어머니 총각, 그렇게 안 봤는디, 너무 허시네. 왜 그래요? 겨우 연속극 하나 보겠다는 건디, 그게 그렇게 싫어요? 아이고, 세상에, 남편보다 더 혀. 남편도 연속극 못 보게 하진 않았어. 말만 저러지.

 

명은 (동욱에게 단념하라고 고개를 가로젓고는) 안 되겠어요. 최대한, 좀 해주세요.

 

동욱 (단념하고) , 알겠습니다.

 

아버지 총각, 괜찮겄어?

 

동욱 괜찮습니다. 고객이 최우선이죠. 어떻게든 해보겠습니다.

 

어머니 연속극 못 보는 줄 알고 깜짝 놀랐잖어. 아휴, 다행이여.

 

동욱, 부품을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대충 비슷한 구멍에 끼워 맞춰 본다. 부품들을 뺏다 끼웠다를 반복한다.

 

명은, 동욱을 보다가,

 

명은 나, 엄마 말대로, 선이나 볼까?

 

동욱, 깜짝 놀란다.

 

명은 (사진첩을 펼쳐 보며) 괜찮아 보이는 사람이 하나 있었던 것도 같아.

 

어머니 정말 선 볼텨?

 

명은 생각 중이야, 결국엔 그래야 하나.

 

어머니 선 봐, . 얼른 시집가야지.

 

동욱 저기, 따님은 조건 맞춰 하는 결혼 별로 안 좋게 생각하시는 거 같던데

 

명은 아저씨는 텔레비전이나 고치세요. 남일 상관 말고.

 

동욱 그냥 연애결혼 하셔도 좋을 것 같아요.

 

명은 연애결혼이요? 그럼 아저씨는 결혼할 거예요?

 

동욱 (자신 없다) 나중에……. 나중에요.

 

명은 나중에요?

 

명은, 실망스럽다.

 

명은 대체 뭐 하자는 거예요? 대체 어쩌라고요!

 

순간, 가족들의 시선이 동욱에게로 몰린다.

 

동욱, 당황한다.

 

동욱 저, 저한테 하신 말이에요? (어색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 아무도 없구나. (어색하게 웃다가) 그러게요, 대체 뭐 하자는 걸까요. 저도 잘 모르겠네요.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지.

 

명은 대체 왜 그러고 있어요?

 

동욱 아, 저기, 고객님. 진정하시구요. 화나신 건 알겠는데, 지금 저한테 이러시면 안 되고요. 부모님도 계시는데.

 

어머니 명은아, 왜 그려?

 

아버지 아는 사이여?

 

동욱 설마요, 아버님!

 

명은, 헛웃음만 나온다.

 

명은 (동욱이 들으라며) 엄마, 내 친구 중에 동거하는 애가 있어. 같이 산지 좀 된.

 

어머니 동거? 아니 그 짓을 왜 하는 거여. 네 친구도 참 그렇다. 식을 올리던지 허지, 왜 그러고 살어?

 

명은 결혼하고는 싶지. 근데 남자가 사정이 안 된데. 몇 년째 기다려, 기다려 기다려달란 소리만 한다는 거야. 무슨 기다려!’ 똥개 훈련시키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

 

어머니 네 친구도 참 답답허겄다. 차라리 헤어지라고 혀. 그게 뭐 하는 짓이여. 그 집 양가 어른들은 둘이 그러는 거 알어?

 

명은 아니, 모르지. 어떻게 알아. 사귀고 있는지도 모를걸?

 

어머니 무슨 사정인진 모르겠는디, 그러면 못써. 친구한티 그러면 못쓴다고 잘 알아듣게 타일러. 식을 올리던지, 끝을 내던지 결판을 내야지.

 

명은 부모님에게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도 모르겠데. 걔 엄마가 남자 보면 욕할지도 모른다고. 받아들여 달라고 설득할 자신이 없다고. 대체 무슨 수로 설득을 해. 결혼식이 뭐야, 차라리 헤어져 버리는 게 낫지.

 

(동욱에게) 그렇죠, 아저씨? 차라리 헤어져 버리는 게 낫겠죠?

 

동욱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다)

 

명은 저 아저씨 생각도 비슷한가봐. 대답을 안 하시는 게.

 

어머니 남자가 그렇게 형편없어?

 

명은 (동욱을 향해) 글쎄, 나야 잘 모르지.

 

사이,

 

아버지, 술을 마시다가,

 

아버지 명은아, 정말로 사귀는 남자 없는 거여? 도대체가 이해가 안 돼, 대체 네가 어디가 못났다고 여태 시집을 못 가. 너 혹시 어디 하자 있는 거 아녀?

 

명은 아빠, 무슨 말이 그래? 하자라니?

 

아버지 그럼 대체 뭐여. 왜 나이가 차도록 시집을 못가.

 

명은 연애하고 시집갈 새가 어디 있어. 공부하고, 일하고, 얼마나 바빴는데. 내가 은진이 걔처럼 한가해서 어디 놀러다니기만 했는지 알아?

 

아버지 남들은 바빠도 연애는 다 하더라.

 

명은 아빠까지. 두 분이서 돌아가면서 나 괴롭히려고 작정했어? 그만 좀 해요. 알아서 잘 하니까. 만나는 사람 있어.

 

동욱, 깜짝 놀란다.

 

아버지 뭐여? 정말이여?

 

명은 정말이야. 만나는 사람 있긴 한데(동욱의 눈치를 보며) 곧 헤어질 거야.

 

아버지 어떤 사람인데 그려. 얼마나 만났어?

 

명은 그냥, 조금.

 

아버지 직업은 뭐고?

 

명은 왜 자꾸 꼬치꼬치 캐물어. 헤어질 사람인데.

 

아버지 궁금하잖여.

 

명은 그냥 작은 회사 다녀.

 

아버지 연봉은 어떻게 되고?

 

명은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일한 지 얼마 안돼서 많지는 않을 거야, 아마.

 

어머니 있었으면 있다고 말을 했어야지, 걱정했잖여. 그려, 집안에 돈은 있는 것 같어? 좀 살어?

 

명은 손 벌릴 처지가 안 된다고 했어. 넉넉하진 않다고.

 

어머니 뭐여, 그럼, 모아둔 돈이라도 있고?

 

명은 없, .

 

어머니 그것도 없어?

 

아버지 빚은?

 

명은 잘 모르겠지만, 다행히 학자금 대출만 조금 있다고.

 

어머니 그게 다행인거여? 잘됐네, 생각 잘했어. 만나지 마러. 결혼이라도 허면 너만 고생혀. 혹시 숨겨둔 빚이라도 더 있어봐, 젊어서 빚만 갚다 끝나.

 

아버지 그려, 그 말도 맞긴 허네.

 

어머니 능력도 없는 놈 만나서 뭐 혀?

 

명은 …….

 

어머니 야가 왜 대답을 안 혀?

 

명은 만나든 헤어지든 내 맘이야. 엄마가 왜 만나라 마라 하는데.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어머니 다 너 걱정해서 하는 말이여. 둘이 결혼은 할 수 있어? 현실적으로. 집은 있어야 할 거 아녀.

 

명은 아직 준비를 못 했다고 했어. 하지만 지금도 열심히 돈 모으고 있고.

 

어머니 돈 한 푼 없이 결혼해서 어떻게 살겠다는 거여. 우리도 도와줄 처지가 못 되는디.

 

명은 나 돈 있어 모아둔 거. 부족하면 대출도 있고. 요즘 다 그렇게 해.

 

어머니 선 봐, . 그러지 말고.

 

명은 무슨 선이야. 내가 뭐 부족하다고.

 

어머니 선이 뭐 어뗘서 그려. 정 방법이 없으면 선이라도 보는 거지.

 

명은 싫어. 됐어.

 

어머니 누굴 닮았는지, 고집은. 저 똥고집.

 

명은 가! 왜 왔어? 그런 소리 할 거면 가!

 

어머니 야가 부모한티 못 하는 소리가 없어?

 

명은 대체 왜 그래, 나 그렇잖아도 속상해. 난 결혼하고 싶은데, 그 자식은 준비도 되어 있지 않고. 대체 그 나이 먹도록 뭐 한 거야!

 

동욱, 멍한 표정이다.

 

어머니 만나려면 제대로 된 남자를 만나던지. (텔레비전 리모컨을 들고) 총각, 연속극 시작할 시간인디, 아직 멀었어요?

 

동욱 예? , 아직

 

아버지 리모컨 이리 줘봐. 뉴스 봐야 혀.

 

어머니 서영이가 드디어 아부지를 만나. 아휴, 그 집안도 참. 여자 팔자 뒤웅박팔자라고, 남잔 잘 만나야 혀. 젊어서 아무리 잘나면 뭐 혀, 남자가 후지면 다 말짱 도로묵인디. 남자가 못나니까 자식들까지 고생하잖어.

 

동욱 저기, 아직 수리가 덜 끝났는데.

 

어머니 대체 언제 끝나요? 고치다 날 새겠어요. 시방 고치고 있긴 한 거예요? 전문가 맞어?

 

동욱 거의 되갑니다. 금방 끝나요.

 

어머니 아까도 그 소리 하더니.

 

동욱, 재촉에 텔레비전 뚜껑을 덮고, 급히 나사를 조인다. 미처 끼우지 못한 몇 가지 조각을 발견하고는 놀라 주머니에 쑤셔 넣는다. 진이 다 빠져, 몹시 지쳐 보인다.

 

명은, 동욱에게 왠지 미안하다.

 

명은 수리 거의 다 되신 것 같은데, 그만하시고 들어가세요. 너무 늦었어요.

 

어머니 총각, 다 된 거예요? 이제 연속극 볼 수 있는 거여?

 

동욱 아직 조금 남았습니다. 확인도 해봐야 하고. 쉽게 되는 게 아니라서.

 

명은 그만 들어가세요. 나머지는 내일 오셔도 해도 되고, 아니면 가져가서 하시던지.

 

어머니 연속극 봐야 한다는데도 왜 자꾸 그려.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은디. 벌써 시작했겄어.

 

동욱, 플러그를 꽂는다.

 

전원을 켜야 하는데 망설여진다.

 

아버지 총각, 어차피 오늘 안에 다 끝내기는 그른 것 같은디, 술이나 한잔 혀. 혼자 마시려니까 영 심심허니 안 되겠어. 거의 다 된 것 같기도 하고, 마무리야 뭐 나중에 하면 되는 거고. (잔에 술을 따르며) 어서.

 

동욱 괜찮습니다.

 

아버지 손 무안하게 허지 말고, 얼른 와서 한잔 혀.

 

어머니 심심하면 나랑 마셔. 왜 바쁜 사람을 오라 가라 혀.

 

아버지 당신이랑 뭔 재미로 마셔. (동욱에게) 어서.

 

어머니 (초조하다) 연속극 봐야 혀. 벌써 시작한 거 아녀.

 

동욱, 망설이다 결국 전원 버튼을 누른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켜지지 않는다.

 

아버지 거봐. 글렀다고 했잖어. 내일 와서 허고, 술이나 한잔 혀.

 

동욱 (마지못해) , 알겠습니다.

 

동욱, 마지못해 술잔을 받는데, 아버지, 동욱의 코트 옷깃 사이로 속살이 보인다. 이상함에 외투를 확 젖혀 본다.

 

아버지 뭐여, 이건? (혹시나 외투의 단추를 더 풀어 보며) 왜 속에 입은 게 없어? 혹시명은아, 어서 경찰에 신고혀! 어서 신고혀!

 

명은 (당황해서) , 무슨 소리야? ?

 

아버지 (동욱에게서 거리를 벌리며) 모두 물러서! 흉기를 가지고 있을지도 몰러! 명은이 너는 얼른 신고하고! (동욱에게) 너 뭐여, 너 혹시 혼자 사는 여자들만 노린다는 살인범이여? 우리 명은이 노리고 수리 기사로 위장해서 온 거여?

 

동욱 예? 뭐라고요?

 

아버지 (물러서며) , 다가오지 마! (무기가 될 것을 찾지만 보이지 않는다) , 거기서 말혀! 얼마 전에 뉴스에서 봤어. 원룸에 혼자 사는 여자만 노리는 강간 살인 사건이 있었다고. 너지? 너여?

 

명은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저 아저씨가 왜?

 

아버지 얼른 신고 않고 뭐 혀!

 

명은 아빠, 아니야. 아니라고. 오버 좀 하지 마.

 

아버지 속에 입은 게 없이 외투만 걸치고 있는디, 안 수상혀? (동욱에게) , 너 정체가 뭐여!

 

동욱 아버님, 그게 아니고요. 오해세요.

 

아버지 (급히 주머니를 뒤져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건다) , 여보세요? , 거기 경찰서에요?

 

명은 아빠! 좀 그만해! 남자친구야.

 

부모님, 깜짝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한다.

 

동욱, 털썩 주저앉는다.

 

아버지 여, 여보, 시방 명은이가 뭐라고 하는 겨?

 

어머니 모, 몰라. 나도 통 모르겠어.

 

아버지 그러니까, 저 총각이……. 하아. (한숨)

 

어머니 명은아, 시방 뭐라고 하는 거여? 저 총각이 뭐라고?

 

명은 어서 인사들 나눠요. 남자친구니까.

 

아버지 아닐 거여,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어. 아니여. 아니지, 명은아?

 

어머니 그러니까, 저 총각이 텔레비전 수리 기사도 아니고, 성폭행범도 아니고, 네가 사귀는 사람이란 거여? 지금까지 쭉 여 들어앉아서 아닌 척 시치미 뚝 떼고 있었던 거고? 지금까지 감쪽같이 속인 거네?

 

아버지 세상에 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여.

 

명은 어쩔 수 없었어. 죄송해요.

 

아버지 어쩔 수가 없긴, 뭐가 어쩔 수가 없어? 지금 뭣들 하는 거여. , 저놈 당장 안 쫓아내고?

 

명은 아빠.

 

아버지, 동욱의 멱살부터 잡는다.

 

아버지 너 여서 뭐 허고 있었어? 내 딸 집에서 뭐 하고 있었어?

 

동욱 죄송합니다.

 

아버지 하나도 빠짐없이 다 말혀. 사실대로 다! 왜 내 딸 집에 있는 거여?

 

동욱 죄송합니다.

 

명은 아빠, 좀 진정해. 아무 일도 없었어!

아버지 혼자 사는 딸 집에 이런 놈이 들어앉아 있는디, 내가 진정하게 생겼어? 뭐 하는 놈이여, 사실대로 다 말혀!

 

어머니 세상에, 무슨 연속극 보는 것도 아니고

 

아버지 너, 너 내 딸 한티 뭔 짓을 한 거여? 둘이 여서 뭐 하고 있었냐고?

 

아버지, 동욱을 밀친다.

 

동욱, 힘없이 밀려 넘어진다.

 

동욱 (무릎 꿇고 앉아) 죄송합니다.

 

아버지 이게 죄송하다고 될 일이여?

 

명은 아빠, 오해야, 아무 일도 없었어.

 

아버지 아무 일도 없었는디, 옷을 벗고 있어?

 

명은 좀 진정 하세요!

 

아버지 어떻게 진정을 혀? 혹시 둘이서 여기 같이 살고 있는 거여? 동건가 뭔가, 그거 하고 있어?

 

명은 아니야, 그냥 잠시 들른 거야. 놀러온 거라고! 좀 진정하세요. 진정해야 얘기를 하든 말든 하지.

 

아버지 진정 못혀! 너 이 자식, 사실대로 말혀. 잤어, 안 잤어? 얼른 사실대로 말혀!

 

명은 (꽥 소리지른다) 그만해! 그만해! 그만해!

 

잠깐의 소강.

 

텔레비전 속에서 무언가 타는 듯 연기가 솟아오른다. 잠시 후, 펑 하고 텔레비전이 터진다. 전기가 나가고, 조명이 꺼진다. 잠시 후, 다시 조명이 밝아지면, 방에는 명은 혼자뿐이다. 잠옷 차림의 명은이 우두커니 침대에 앉아 있다.

 

잠시 후, 전화를 건다.

 

명은 어디야? 떡볶이 해 먹자. 떡이랑 어묵 사와. 튀김이랑 귤도 좀 사고그리고 미역도 한 다발 사와. 의사가 미역국 꼭 끓여 먹으랜다.




[당선소감] "꼭 걷고 싶었던 길 드디어 첫걸음 뗐다"


올해도 안 되면 내년도 있고 내후년도 있으니 열심히 하다 보면 언젠간 되겠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당선 통보 전화를 받았습니다. 아직도 믿기지 않아 얼떨떨하기만 합니다. 머릿속이 하얘져서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흥분이 더욱 거세집니다.

정말 감사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부족한 제 작품을 당선작으로 선정해주신 심사위원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더욱 정진하며 열심히 쓰라는 의미로 알고, 더욱더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많은 도움과 가르침을 주신 김나영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함께 공부했던 라푸푸서원의 다른 학우들에게도 감사의 마음 전합니다. 그 고마움 잊지 않고, 더 좋은 작품을 쓰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멀쩡한 직장 그만두고, 직업과 전혀 관련도 없는 신춘문예 그것도 희곡을 준비하겠다는데도 응원해 주신 부모님, 정말 고마워요. 정말 큰 힘이 됐습니다.

이 길이 아니면 다른 길이 없어 보였습니다. 다른 누군가에게 치유가 될 수 있는, 결론적으로는 저 자신의 치유를 위한 길로써 희곡을 선택하였고, 이 길에 갓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는 행운을 얻게 되었습니다. 지금의 이 설렘과 기쁨, 흥분을 잊지 않고 더 노력하는 작가가 되고 싶습니다.

2014년은 제게 아주 뜻깊은 한 해가 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1981년 전북 김제 출생
▲호원대 컴퓨터학부 졸업
▲모바일 관련 프로그래머



[심사평] 마치 무대 장면을 직접 보듯기발하고 뛰어난 상황 설정


지난해보다 훨씬 많은 응모작을 접하고 희곡 쓰기를 열망하는 예비 극작가가 참 많구나 하는 생각에 반가웠다. 그런데 많은 작품이 희곡과 연극의 특성에 대한 상식적 이해마저 보이고 있지 않아서 퍽 실망했다.


그런 가운데 김진선의 ‘카페 돌로스’, 강기림의 ‘지중낙원’, 김도경의 ‘사랑하기 좋은 날’ 등 유망한 작품을 세 편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다행이었다. ‘카페 돌로스’는 두 내연 관계의 남녀를 중심으로 관계의 무너져감을 담담하게 그리면서 소통하지 못하는 현대인의 외로움이라는 주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웨이터라는 제3인물의 존재 이유가 증명되지 않고, 주제와 상황이 깊이 있게 부각되지 못하여 아쉽다.

‘지중낙원’은 급속히 고령화되어가는 우리 사회에서 간병인, 요양병원, 가족, 사회적 기관 등이 치매 환자를 대하는 태도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이면서 사실성 유머를 적절히 섞어가며 균형감 있게 사회적 풍경을 그려냈다. 그러나 상황의 구성이 빼어났던 것에 비해 각각의 상황이 기시감을 주는 것은 아쉬웠다. 이에 비해 ‘사랑하기 좋은 날’은 상황 설정이 자연스럽고 기발해서 연극성이 뛰어났다. 특히 혼기를 놓칠까 봐 걱정했던 딸의 동거남의 정체를 확인한 아버지가 일으키는 대반전 장면은 압권이었다. 인물마다 성격에 따라 차별화된 언어와 행동으로 자기의 존재를 정당화했다. 읽으면서 무대 위의 장면이 훤히 연상되는 연극적 글쓰기였다. 작가의 향후가 기대된다.


(심사위원 : 김윤철, 이병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