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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비커의 샤머니즘 / 김민율

 

굴러다니는 돌 하나 주워 주머니에 넣고 숭배한다

소원을 돌에게 말하고 우물에 던진다

 

대낮의 우물은 하늘을 번제하는 제단

저녁의 우물은 마력이 기거하는 당집

 

아이를 바쳤다는 소문에 이끼가 끼어 있다

물의 나이테를 열고 바깥을 엿듣는 누가 있다

두레박을 내려 몇 번이나 얼굴을 퍼올려도

제단에 바쳐진 아이가 사라지지 않는다

 

비커는 어린 시절의 설화

눈금에 다다를 수 없는 기억이 웅크리고 있다

 

수년 동안 던진 크고 작은 돌들이

내 뒤통수와 등짝을 닮은 기억을 보글거리며……

눈금 바깥을 초월하고 있다

 

물이 기포로 기포가 증기로 변하는 것은

아이의 주먹을 펼치는 주술일까

모든 손마디를 다 펼치면 아무것이란 게 우글거리는

 

이미 기억을 개종한 내가

한 손에 다른 비커를 움켜쥐고 있다



<당선소감>

 

가장 좋은 때, 가장 좋은 선물 받았다

 

  시를 처음 만났을 때가 언제였는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열 손가락으로 나를 세기에 충분했던 무렵이었던 것 같다. 농부인 아버지는 십장생 그림을 잘 그리셨다. 그림 귀퉁이에 적어 넣은 글귀의 출처를 알게 된 것은 내 가슴이 한 귀퉁이였음을 눈치챌 무렵이었다. 푸시킨의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와 노천명의 시 사슴의 구절은 꿈을 동경하듯 목을 젖혀야 읽을 수 있는 높이에 걸려 있었다. 나는 아버지의 고개를 젖혀놓는 목침에 올라서서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시구와 눈을 맞추곤 했다. 이것이 나와 시의 첫 만남이었던 것 같다.

 

  시와 오랫동안 헤어져 지내고 있다고 생각하던 무렵, 주머니 속에서 웅크린 손을 꺼냈다. 잡을 수 없는 것까지 잡으려고 굵게 자라 있는 손가락이 보였다. 이 무렵 스승 오규원 선생님을 뵈었다. 내 글을 읽으시고 고개를 젖혀 내 눈을 보시며 말씀해 주셨다. “세계를 보는 눈이 있다는 한마디가 나로 하여금 나를 믿게 했고 비로소 웅크린 손이 아닌 주먹을 쥘 수 있는 손으로 시인의 첫걸음을 가다듬을 수 있게 했다.

 

  홀로 걷는 밤길에 불 밝혀 주신 차주일 선생님, 늘 기도해 주시는 김효현 목사님, 무엇보다도 애태움이란 기도를 오랫동안 놓지 않으신 부모님, 첫걸음을 옮겨 심을 영토를 내어주신 심사위원 김기택, 이원, 권혁웅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가장 좋은 때에 가장 좋은 것을 얻게 된 것 같다. 첫걸음을 잘 기르겠다는 약속을 하며 고개를 젖혀 먼 곳을 오래도록 바라본다.

 

 김민율 씨는

1978년 강원 강릉 출생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학원 강사

 


<심사평>

 

우물과 비커  새로운 상상력으로 접목한 이종교배

 

  한국경제신문만의 특징인 청년 신춘문예라는 타이틀답게 푸르고 뜨거운 청년정신이 깃든 작품들을 만날 수 있었다. 투고작들을 읽으면서 낯설고 도전적인 작품이 더 많았으면 하는 아쉬움도 들었다. 청년의 언어에서 보고 싶은 것은 두려움이라는 불가능을 열정이라는 가능으로 바꾸는 마술이기 때문이다. 응모자들은 이 점을 한번 뒤척여보면 좋겠다.

 

  김솔, 김민율, 배지영, 장우석의 작품을 두고 논의했고 최종적으로는 김민율과 배지영으로 좁혀 여러 논의를 거듭했다. 김솔의 바오밥 씨 이야기  4편은 일상을 유머러스한 서사 구조로 만들어내는 힘이 있었다. 그러나 언어의 탄력이 약하다. 시적 긴장을 확보할 수 있는 언어를 고민해 본다면 좋겠다.

 

  장우석의 이태리타월  4편은 삶과 현실의 비루함을 과장 없이 풀어내는 면이 돋보였다. 심각한 진술을 언어유희를 통해 극복하는 감각도 있었다. 그러나 후반부로 갈수록 힘이 약해졌다. 후반의 폭발력을 보강하면 좋겠다.

 

  배지영의 크림  5편은 상상력이 신선했다. 때로는 과감하고 때로는 간결한 언어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개인적 진술에 그치는 아포리즘이 걸렸다. 솔직한 언어와 솔직한 시적 언어의 차이를 생각해 본다면 보다 좋은 시를 쓸 수 있을 것이다.

 

  김민율의 비커의 샤머니즘  4편은 응모작 전반이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고, 집중하고 있는 세계가 보였다는 점에서 믿음이 갔다. 성실한 습작 기간을 거쳤음을 느낄 수 있었다. 당선작인 비커의 샤머니즘은 구조가 튼실한 작품이다. 우물과 비커의 이종교배 상상력이 신선했다. 이 점이 새로운 서정성을 확보하게 했다. 우물-비커, -눈금, 기억-개종의 자연스러우면서도 정확한 전개가 내용의 설득력을 갖게 했다. 절제된 감정의 언어를 가지고 있으니 보다 자유로운 시적 탐험을 시도해 보아도 좋겠다. 시인으로서 첫 호명을 축하한다.

 

심사 : 김기택·권혁웅·이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