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당선작>

 

빨간 휴지 줄까, 파란 휴지 줄까? / 박교탁

 

등장인물

 

노인(72)

*어머니(90)

아들(40)

며느리(38)

손녀(12세)

*어머니는 푸세식 변소에서 사는 귀신이다


무대


집으로 오는 길은 콘크리트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고 계단 너머로 마을 어귀까지 가파른 경사길이다. 주 무대는 툇마루가 있는 세 칸 양옥집. 방 두 칸은 비운 채 1평 남짓한 공간에서 혼자 생활하고 있는 노인, 노인은 한쪽 눈이 하얗게 멀었다. 빨랫줄이 있는 마당 한 쪽에는 판자로 지은 푸세식화장실이 있다. 문은 늘 열려있고 변소 뒤편에는 조그마한 여닫이문이 있다. 똥통에 똥이 꽉 차면 그 구멍을 통해서 퍼낸다.

 

툇마루에 앉은 노인의 무릎 위에는 핸들을 돌리는 전화기가 놓여있다.

 

전화벨이 울리고 한 참 뒤에야 수화기를 든다.

 

통화가 끝나면 툇마루 아래에서 기름통을 꺼내 아주 느리게 부엌으로 들어간다.

 

(사이)



노인, 보일러 위에 손을 올린다.

 

전화벨이 울리지만 듣지 못한다.

 

날이 어둑어둑해진다.

 

노인, 아주 느리게 밖으로 나와 툇마루에 앉는다.

 

 

노인 : 겉모습은 이래도 살기 좋아. 잔소리하는 여편네도 없고 자식도 다 키워서 돈 쓸 일도 없고, 매달 수당도 나오고, 게다가 자식들이 하나 같이 어찌나 효심이 지극한지 엊그제도 서로 자기 집으로 모시고 가겠다는 걸 내가 싫다고 했다니까. 같이 살지 그러냐고? 늙으면 죽어야지. 뭐하려고 같이 살면서 이제 죽나, 언제 죽나, 낮에 죽나, 밤에 죽나, 얼어 죽나, 더워 죽나, 걱정시키겠어? 요새는 이제 가면 언제 오나가 아니라 이제 가면 안 와야, 하는 게 맞아. 그게 다 자식들 위한 거라고. (방바닥을 손으로 매만지며) 아따, 따뜻하니 좋다!

 

 

 

그때 변소에서 곡소리가 구슬프게 들려온다.

 

 

 

목소리 :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가겠네!

 

노인 : 어머니 왜 또 그래요?

 

목소리 : 대철아! 퍼뜩 와서 똥 좀 퍼라. 냄새 나서 못살겠다.

 

노인 : 그러게 왜 하필 그곳에 계셔요.

 

목소리 : 낸들 북망산천 가는 길에 변소가 있을 줄 알았겠느냐?

 

노인 : (똥을 푸면서) 아이고 허리야, 이러다 나 죽겠네.

 

목소리 : 젊은 놈이 엄살하고는.

 

노인 : 저도 이제 죽을 날만 기다리는 나이가 됐어요.

 

목소리 : 귀신 앞에서 죽는다는 말 하는 거 아니다.

 

노인 : (똥지게를 짊어지며) 죄송해요.

 

목소리 : 거름지게 밭에다 뿌려라.

 

노인 :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가지고 있는 밭도 죄다 팔았어요.

 

목소리 : 퍼뜩 안가고 뭐해?

 

노인 : 네 갑니다, 가요.

 

목소리 : 대철아!

 

노인 : , 왜요, 어디 또 불편하세요?

 

목소리 : 바닥이 꽁꽁 얼었으니까, 바닥 보면서 천천히 걸어라.

 

노인 : 

 

목소리 : 내가 저 놈 걱정 때문에 죽어도 죽은 게 아니야. 눈 내리면 얼어 죽지는 않을까, 해가 쨍쨍하면 더위 먹지 않을까, 한 쪽 눈만 있다고 다 늙어서 놀림 받지는 않을까, 노망이 나서 집도 못 찾아오면 어쩌나, 지금도 봐봐, 세상이 험한데 지금도 맨날 천 날 문을 열고 다닌 다니까.

 

노인 : (문을 쾅 닫으며) 똥 뿌리고 왔어요, 어머니.

 

목소리 : 내가 너 때문에 돌아가시겠다. 문 좀 천천히 닫아라.

 

노인 : 

 

목소리 : 돈이 남아 도냐?

 

노인 : ?

 

목소리 : 엄마가 보일러는 언제 틀어야 한다고 했지?

 

노인 : 처마 밑에 고드름이 열 개 이상 달렸을 때요.

 

목소리 : 기름 값이라도 아껴야 라면도 사고 쌀도 사고 그럴 것 아니냐, 넌 어쩜 젊어서나 늙어서나 그리 생각이 없냐?

 

노인 : 어머니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툇마루에 올라서서) 진호가 온다고 했어요.

 

목소리 : 첫째?

 

노인 : .

 

목소리 : 너한테 더 가지고 갈게 남았나 보지?

 

노인 : 그런 식으로 말씀 하시지 마세요.

 

목소리 : (혀를 차다가 잠시 침묵) 선주도 온데?

 

 

무대 뒤편에서 개 짖는 소리 들린다.

 

노인 버섯발로 뛰쳐나갔다가 발을 절룩거리며 다시 돌아온다.

 

 

목소리 : ?

 

노인 : 넘어졌어요.

 

목소리 : 내가 그러게 바닥 보면서 걸으라고 했지!

 

노인 : , 죄송해요.

 

목소리 : 어디 좀 보자.

 

노인 : 괜찮아요.

 

목소리 : 늙으면 뼈도 안 붙어.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

 

노인 : , 어머니. (객석을 보며) 길이 많이 미끄러운데 걱정이네요.

 

목소리 : 어련히 알아서 올까.

 

노인 : 흙 좀 뿌리고 올게요.

 

목소리 : 똥이나 좀 뿌려라.

 

노인 : 어머니도 참.

 

 

흰 소복을 입은 어머니 변소에서 나와 마당을 돈다.

 

무대, 어두워졌다가 다시 켜진다.

 

변소 안. 노인이 쭈그려 앉는다.

 

 

목소리 : 횃대에 오른 늙은 수탉이 따로 없구나.

 

노인 : (힘을 주며) ?

 

목소리 : 비실비실한 두 다리로 판자 떼기나 붙잡고 있어서 하는 말이다.

 

노인 : 요새 통 힘이 안 들어가네요.

 

목소리 : 그게 다 먹는 게 시원치 않아서 그래.

 

노인 : 죄송해요.

 

목소리 : (한숨을 내쉬며) 나는 네 똥구멍이나 핥아야지 어쩌겠냐? 진호는?

 

노인 : 일이 좀 바쁜가 봐요.

 

 

사이

 

 

목소리 : 아랫배를 손으로 슬슬 문질러봐.

 

노인 : .

 

목소리 : 나온다, 나와!

 

노인 : 그렇게 좋으세요?

 

목소리 : 좋긴, 무슨. 퍼뜩 들어가서 자라.

 

노인 : (변기 구멍에 흰 가루를 뿌리며) 안녕히 주무세요.

 

 

무대, 암전.

 

 

 

선물을 사들고 등장하는 아들, 며느리, 손녀.

 

 

손녀 : 할아버지! 할아버지!

 

며느리 : 아버님! 저희 왔어요.

 

아들 : 주무세요?

 

노인 : (기침소리)

 

아들 : 추운데 보일러도 안트시고 주무신 거예요?

 

노인 : (문을 활짝 열고) 아이고! 우리 선주 왔구나.

 

손녀 : (품에 안기며) 할아버지! 보고 싶었어요.

 

며느리 : 선주 많이 컸죠?

 

노인 : (멋쩍게 웃으며) 그러게, 하루가 다르게 크는구나.

 

며느리 : (쇼핑백을 앞으로 내밀며) 아버님 겨울옷이랑, 먹거리 좀 사왔어요.

 

노인 : , , 이런 걸, , 추운데 먼 길 오느라 고생했다.

 

아들 : 자주 찾아 봤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해서 죄송해요.

 

노인 : 일이 바쁘면 다 그런 거지. 추우니까, 서있지 말고 어여 들어와라.

 

아들 : .

 

 

모두 방으로 들어간다. 노인, 겨울 점퍼를 입고 손녀와 함께 밖으로 나온다.

 

손녀, 변소로 들어간다.

 

 

노인 : (객석을 향해 상표를 내밀며) 메이커여.

 

손녀 : 할아버지! 옆에 계신 거 맞죠?

 

노인 : 그래, 옆에 있으니까, 걱정 말고 볼일 봐.

 

손녀 : 할아버지! 할아버지!

 

노인 : , 그래, 선주야. (노인 마루에 앉아서 꾸벅꾸벅 존다.)

 

손녀 : (힘을 준다, 빈 휴지걸이를 만지며) 할아버지!

 

 

그때 어머니 한 손에는 빨간 휴지, 다른 한 손에는 파란 휴지를 손에 쥔 채 등장한다.

 

 

어머니 : 빨간 휴지 줄까? 파란 휴지 줄까?

 

손녀 : 할아버지 장난치지 마요.

 

어머니 : (빨간 휴지를 내밀며) 고놈 참 냄새 한 번 구수하다.

 

 

사이.

 

 

손녀 : 할아버지?

 

어머니 : 왕 할머니다.

 

손녀 : 할아버지! 할아버지!

 

어머니 : 귀청 나가겠다. 이 녀석아. 똥 눴으면 퍼뜩 들어가서 자. 할아버지 고생시키지

 

말고.

 

손녀: 귀신이다! (바지를 추스르다 쓰러진다.)

 

 

어머니, 변소 안으로 들어가 앉는다. 노인 마루에서 일어난다.

 

 

노인 : 똥 누다가 자나? (변소 안을 들여다보며) 에구 이를 어째? (변소 뒤편 여닫이 문을 열어 손녀를 끄집어낸다.) 괜찮아?

 

손녀 : (바들바들 떨며) 화장실에 귀신이 있어요.

 

노인 : (변소를 바라보며) 요즘 세상에 귀신이 어디 있다고 그래? (냉수를 건네며) 숨 좀 돌리고……그런데, , 화장실에서 봤다던 귀신이 뭐라고 하더냐?

 

손녀 : 고놈 참 냄새가 구수하겠다고 했어요.

 

노인 : 그래서 넌 뭐라고 했는데?

 

손녀 : 장난치지 말라고 했죠. 할아버지인 줄 알았거든요.

 

노인 : , 어떻게 생겼는지는 봤어?

 

손녀 : 피부는 바싹 마른 논두렁 같고 입술은 쥐 잡아먹은 것 마냥 붉은 것이……(울먹이며)냄새는 또 어찌나 고약한지.

 

노인 : 변소간에 오래 앉아서 나는 냄새겠지. (사이) 꿈을 꾼 게다. 요즘 세상에 귀신이 어디 있겠어?

 

손녀 : 그렇겠죠?

 

노인 : 그래, 개꿈이다. (변소를 넌지시 바라보며) 개꿈. 그러니 얼른 씻고 들어가서 자.

 

손녀 : 그런데 또 꿈에 나타나면 어쩌죠?

 

노인 : 두 번 절해라.

 

손녀 : ?

 

노인 : 아니다. 아니야. 물 데워 줄 테니 잠깐만 기다려라.

 

손녀 : (뒤돌아보며) 같이 가요.

 

 

노인, 손녀, 퇴장한다.

 

변소에 들어가 담배를 꺼내 물고 앉는 아들.

 

 

아들 : 빚쟁이들을 피해 여기까지 왔습니다. 오랜 기간 마음 졸이며 숨죽이며 살았더니 똥줄이 다 오그라들었네요. 이러다가 나쁜 일이 생기는 건 아닌지 가슴이 다 떨립니다. (호주머니에서 우편물을 꺼내며) 법원에서 온 지급명령입니다. 하루도 쉬지 않고 울려대는 채무 독촉 전화와 집으로 오는 채권자들 때문에 가게도 팔고 적금도 해지 했습니다만, 문 앞에는 채권 추심 우편물만 쌓여가네요.

 

 

사이

 

 

그래도 뭐 똥구멍에 힘주고 살아야지 어쩌겠어요? ! 나온다, 나와! 나오다가 쏙 들어가네. . 이게 다 아버지한테 물려받은 겁니다.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도 화장실만 들어 갔다 하면 함흥차사였거든요.

 

 

어머니, 변소간 아래에서 엉덩이를 올려다본다.

 

의사가 변비환자에게 증상을 설명하듯

 

 

어머니 : 똥 눌 때 과도하게 힘이 들어가거나 똥이 과도하게 단단하면, 똥을 시원하게 누지 못하고 도중에 잘라버리거든. 그러면 똥은 여전히 뱃속에 남아서 좀 전보다 더 단단해지고 단단해지다 똥구멍을 찢어버리는 것이지. 그렇게 되면 똥을 누기가 곤욕스러워 져서 밥도 먹기 싫어지고 소화불량도 생기고 또 그것 때문에 우울증도 생기게 된다, 이 말이지.

 

아들 : 나오라는 똥은 안 나오고 헛배만 부르네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힘을 준다, 식은땀이 뻘뻘 난다.) 이게 다 아버지 때문입니다.

 

어머니 : 그게 다 네가 입이 짧아서 그런 거다.

 

아들 :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거기 누구 있어요?

 

어머니 : 나다.

 

아들 : , 할머니?

 

어머니 : 그래, 용케 목소리는 기억하는구나.

 

아들 : (엉덩이 밑을 내려다보며) , 거기, 누구 있어요?

 

어머니 : 네 할미다.

 

아들 : 할머니는 재작년에 돌아가셨잖아요.

 

어머니 : 그랬지.

 

아들 : 그런데 왜?

 

어머니 : 네 애비가 피똥을 싸기에 다시 돌아왔다.

 

아들 : 그 정도로 심각한가요?

 

어머니 : 배도 자주 아프다고 하고 똥 굵기도 가늘고 피도 섞여 나오는 것이 예삿일이 아닌 듯싶다.

 

아들 : 그건 저도 그러는 걸요. (힘을 주며) 설마 무슨 일이 생기기야, 하겠어요?

 

어머니 : 죽고 난 뒤에 후회하지 말고 살아 있을 때 잘해라.

 

아들 : (건성으로) , , 할머니.

 

 

사이

 

 

나온다, 나와! 나왔다!

 

 

아들, 무대 중앙으로 천천히 걸어 나온다.

 

마루에 걸터앉아 낡은 고무신을 내려다본다.

 

무대 어두워졌다가 수탉이 우는 소리가 들리면 밝아진다.

 

마당 빨랫줄에 노인, 아들, 손녀 옷이 걸려있다.

 

며느리, 밥상을 들고 등장.

 

 

며느리 : 아버님, 식사하세요.

 

노인 : 진호야! 선주야! 밥 먹어라!

 

며느리 : 그냥 자게 두세요. 먼 길 오느라 피곤했는지 깨워도 일어나지를 않네요.

 

노인 : (밥상을 옆으로 치우며) 오랜만에 모였는데 같이 먹어야지.

 

며느리 : 시장하실 텐데 주전부리라도 가지고 올까요?

 

노인 : 아니다, 됐다. (고무신을 신다말고) 아가!

 

며느리 : , 아버님.

 

노인 : 네가 내 못난 아들 데리고 사느라 고생이 많다.

 

며느리 : 아니에요. 아버님도 참. 자주 찾아 뵈어야 했는데 죄송해요.

 

노인 : (머뭇거리다가) 아예 내려온 거냐?

 

며느리 : , 아니에요.

 

노인 : 내가 잠이 안 와서 오다가다 보니까, 차 트렁크에 짐이 많더구나.

 

며느리 : 일이 그렇게 됐어요.

 

노인 : 선주 학교는?

 

며느리 : 아버님만 괜찮으시면 당분간 여기서 통학할 생각이에요.

 

노인 : 그래, 다른 건 몰라도 학교는 꾸준히 보내야 한다. 우리 진호가 저리 못나게 사는 것도 가방 끈이 짧아서 그런 거야. 자고로 사람은 배워야 한다. 사람 구실 제대로 하려면 배워야 해.

 

며느리 : , 아버님.

 

노인 : 그래도 진호가 참 착하지?

 

며느리 : 아버님 닮아서 그래요. 너무 착해서 문제지만.

 

노인 : 진호는 엄마 닮았어.

 

며느리 :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어요?

 

노인 : 곱고 예쁘고 다소곳하고 여리고……. 내가 무슨 말만 하면 부끄러워서 얼굴을 붉히고는 했어. 눈물은 또 어찌나 많은지, 눈두덩이 밑이 늘 붉어져 가지고좋아 죽겠어서 울고힘들어 죽겠어서 울고배 아파서 울고눈이 매워서 울고처마 밑에 고드름 개수를 세어보다가도 울었지. 그런데 그렇게 우는 모습도 어찌나 예쁘던지. 그래서 내가 참 많이 울렸다.

 

아들 : (이불을 개며) 그렇게나 마음씨가 고우시니 어린 자식들을 다 내팽개칠 수 있었던 모양이네요.

 

노인 : (며느리를 바라보며) 그만하고 밥이나 먹자.

 

아들 : 그 여자가 밉지도 않으세요?

 

노인 : 아가, 국이 좀 식었구나.

 

며느리 : , .

 

아들 : 그 눈도 따지고 보면 그 여자만 하루 온종일 기다리다가 멀게 된 거잖아요.

 

노인 : 그런 거 아니니, 그만하고 밥이나 먹어.

 

아들 : 그 여자가 왜 아버지를 두고 떠난 줄 아세요?

 

며느리 : 여보, 그만해.

 

노인 : (수저를 내려놓으며) 떠난 게 아니다.

 

아들 : 떠난 게 아니면 쫓겨난 건가요?

 

노인 : 그만하자.

 

아들 : 시작도 안 했는데 뭘 그만해요.

 

노인 : 길게 말하고 싶지 않다.

 

아들 : 짧게라도 이야기하세요.

 

노인 : 싫다.

 

아들 : 싫어도 들어야겠어요.

 

노인 : 싫든 좋든 내 아내다.

 

아들 : 제 어머니이기도 했어요.

 

노인 : 엄마라고 생각하긴 한 거냐?

 

아들 : 버리기 전까지 만요.

 

노인 : 배 아파 낳는 것보다 두고 가는 것이 더 아픈 법이다. 버려졌다? 아내를 버린 건 나다. 여자를 버린 건 나야. 네게 엄마를 쫓아낸 건 나다. 버린 게 아니라 버려진 거다. 애초에 설자리가 없었던 것뿐이야.

 

아들 : 어머니가 같이 가자고 했으면 같이 떠났을 거예요. 세상에 어느 어머니가 어린 자식들을 두고 떠날 수 있죠? 그리고 지금까지 연락 한번 하지 않았어요.

 

노인 : 몇 번 찾아왔었다. 그런데 내가 매번 매몰차게 쫓아냈었어.

 

아들 : 왜 제게 말하지 않으셨죠?

 

노인 : 두고 떠나는 일은 한번이면 족하다고 생각했다.

 

아들 : 제가 얼마나 보고 싶어했는지 아시잖아요.

 

노인 : 그래서 그런 거야.

 

아들 : 어머니 얼굴도 못보고 자란 동생들은요?

 

 

긴 침묵.

 

손녀, 눈을 비비며 일어난다.

 

밥상 앞에 말없이 마주 앉는다.

 

노인이 생선 살코기를 손녀의 밥그릇에 올린다.

 

식사가 끝나면 모두 퇴장한다.

 

 

어머니 : 대철아! 대철아!

 

며느리 : (고무장갑을 낀 채, 부엌에서 나오며) 누구세요?

 

어머니 : 시할머니다.

 

며느리 : (대문 밖을 살피며) 거기 누구 있어요?

 

 

까악, 까악. , . 까마귀 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뒤섞인다.

 

 

어머니 : 변소에 따뜻한 물 좀 뿌려라.

 

며느리 : ?

 

어머니 : (버럭 소리를 지르며) 귓구멍이 막혔나. 바닥이 얼었으니까, 물 좀 뿌리라고!

 

며느리 : (얼결에 바가지에 물을 뜨며) , , 시할머니. (변소 앞에서 바가지를 쥔 채

 

멈춰 선다.) , 거기 누구 있어요?

 

 

아들, 아버지 새 신발을 사고 들어온다.

 

 

아들 : 뭐해? 거기서?

 

며느리 : (변기에 재빨리 물을 뿌리며) , 아니야.

 

아들 : 아니긴 뭐가 아니야.

 

며느리 : 아버님은?

 

아들 : 집에 안 계셔?

 

며느리 : 동네 마실 나가셨나?

 

아들 : (마루 밑을 살펴보며) 어디 멀리 가셨나 보네. 날도 추운데…….

 

며느리 : 그렇게 걱정할거면서 아까는 왜 그런 거야?

 

아들 : 일도 잘 안 풀리고 아버지 볼 면목도 안서고 그래서 예민해졌나 봐.

 

며느리 : 그래도 자기가 그러면 안 되지. 아버님 오시면 사과 드려.

 

아들 : 그래, 알았어.

 

며느리 : (고무장갑을 벗으며) 아버님께는 언제 말씀 드릴거야?

 

아들 : ?

 

며느리 : 우리 헤어진 거.

 

아들 : 빚 때문에 위장이혼한 거잖아.

 

며느리 : 그렇게 생각해?

 

아들 : 갈대처럼 흔들리는 게 사람마음이라지만, 당신이 내게 그러면 안 되지.

 

며느리 : 당신이야 말로 내게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니야? 사업하겠답시고 상의 한번 없이 직장도 때려 치고 적금도 깨고 아버님이 해주신 돈도 다 날려먹었잖아.

 

아들 : 내가 번 돈이야.

 

며느리 : 아버님이 번 돈이겠지.

 

아들 : 둘째, 셋째 대학 다닐 때 나는 아버지 밑에서 일만 죽도록 했어. 그 정도는 받을 자격 있어.

 

며느리 : 당신은 그게 문제야.

 

아들 : 그래서? 그 돈 나만 썼어?

 

며느리 : 말을 말자.

 

아들 : 다 잘해보려고 그런 거야.

 

며느리 : 다 잘못해서 문제지.

 

아들 : 좋은 말로 할 때 그만해라.

 

며느리 : 좋은 말로 안 하면 당신이 어쩔 건데?

 

아들 : 말을 말자.

 

 

무대 암전. 노인이 똥지게를 무대 중앙에 내려놓는다.

 

 

노인 : 어머니!

 

목소리 : ?

 

노인 : 밤새 잘 주무셨어요?

 

목소리 : 아니.

 

노인 : 손자, 며느리, 증손녀도 보시고 참 좋으시죠?

 

목소리 : 아니.

 

노인 : 어디 불편하세요?

 

목소리 : 아니.

 

노인 : 늦게 인사 드렸다고 삐지셨구나.

 

목소리 : 아니.

 

노인 : 삐지셨으면서.

 

목소리 : 아니라니까, 그러네.

 

노인 : 어머니.

 

목소리 : ?

 

노인 : 속이 좀 안 좋네요.

 

목소리 : 엄마가 술 먹지 말라고 했지?

 

노인 : 아니거든요.

 

목소리 : 똥이나 누고 가라.

 

노인 : 어머니

 

목소리 : ?

 

노인 : 어머니

 

목소리 : 할 말 있으면 얼른 해라.

 

노인 : 진호 어멈한테 왜 그러셨어요?

 

목소리 : 내가 너무 모질게 굴었지. 미안하다. 다 너를 위한다고 그런 건데……. 돌이켜 생각해보니 내가 왜 그랬나, 싶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잘해보겠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던 것들이 그때는 왜 그렇게 모자라 보였는지 모르겠다. 며느리 귀한 줄 모르고 빈손으로 왔다고 타박이나, 할 줄 알았지. 따뜻한 말 한 마디해준 적이 없구나.

 

노인 : 어머니

 

목소리 : 원망하고 싶으면 해라.

 

노인 : 아니에요. 마지막으로 똥이나 누고 갈래요.

 

목소리 : 마지막?

 

노인 : .

 

목소리 : 진호가 냄새 난다고 싫다더냐?

 

노인 : 언제까지 어머니를 변소에 모실 수는 없잖아요. 진호네도 같이 살아야 하고. 곧 있으면 날도 따뜻해질 텐데. 구더기도 들끓을 테고.

 

목소리 : 애들 앞에 내가 나타나서 그런 거냐?

 

노인 : 선주가 무서워하네요.

 

목소리 : 그럴 줄 알았다. 그런데 내가 여기 아니면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이냐?

 

노인 : 죄송해요. 제가 곧 찾아 뵐게요.

 

목소리 : 네 못난 얼굴 봐서 뭐하겠냐? 앞으로 못 봐도 좋으니 오래오래 살아.

 

노인 : (변소간에 앉으며) 오늘은 시원하게 싸고 갈게요.

 

목소리 : 똥통에 빠지지나 말아라.

 

노인 : (힘을 주며) 어머니!

 

목소리 : ?

 

노인 : 얼굴 좀 보여주시면 안돼요?

 

목소리 : 늙어 죽은 귀신 얼굴 봐서 뭐하려고?

 

노인 : 귀신인데 얼굴 하나 마음대로 못해요?

 

목소리 : 그게 마음대로 되면 잘생긴 총각귀신 하나 만나서 벌써 시집갔지. 뭐 하려고 늙고 병든 아들 내미 똥구녕이나 올려다보고 있겠냐?

 

노인 : 선주한테는 보여주셨다면서요.

 

목소리 : 그거야 똥통에 빠질까 봐, 걱정돼서 그런 거지.

 

노인 : 거짓말.

 

목소리 : 아니, 귀신한테 속고만 살았나.

 

노인 : 어머니한테는 속고만 살았죠.

 

목소리 : 그러면 똥간에서 똥 누듯 절 낳았다는 게 진짜라는 말이에요?

 

노인 : 내가 괜히 변소에 사는 줄 아냐?

 

목소리 : 다시 한 번 이야기해줘?

 

노인: 

 

목소리 : 대철이 네 아버지가 집안 일은 일절 하지 않던 거 기억나지?

 

노인 : 물 한잔도 제 손으로는 안 드셨죠.

 

목소리 : 그런 네 아버지도 똥지게 지는 일은 마다하지 않으셨다.

 

노인 : 왜 그런 거죠?

 

목소리 : 변소에서 울려 퍼진 내 울음소리에 놀란 네 아버지가 구더기가 들끓는 똥물 속에서 널 꺼냈기 때문이지.

 

노인 : 말도 안 돼. 언제는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면서요?

 

목소리 : 그 다리가 그 다리냐?

 

노인 : , 아무튼, 그래서요?

 

목소리 : 너 어렸을 때부터 큰일을 볼 때 대강 쓱싹하고 오는 일이 없었잖아.

 

노인 : 그랬죠.

 

목소리 : 네 아버지가 변소에 5촉짜리 전구도 달고 나무발판을 두 겹 세 겹 덧대어서 만든 것도 모자라서 똥간에 빠져도 사람이 빠져 나올 수 있게 문을 만든 것도 기억나지?

 

노인 : . 그런데 지붕에 구멍은 왜 뚫으신 거죠?

 

목소리 : 네 아버지가 그러더라. 네가 화장실에서 나오지 않는 이유가 거기서 낳았기 때문이라고. 그리고 거기서 죽을 팔자라고. 그래서 별이나 보고 죽으라고 지붕에 구멍을 뚫은 거다.

 

노인 : 말도 안돼요.

 

목소리 : , 믿거나 말거나.

 

노인 : 어머니.

 

목소리 : ?

 

노인 : 거기에는 달걀귀신, 몽달귀신도 살아요?

 

목소리 : 달걀귀신, 몽달귀신은 없어도 별은 많이 보인다.

 

노인 : (지붕을 올려다보며) 사람이 죽으면 별이 된데요.

 

목소리 : 별이 된 놈들은 죄다 왕이고 영웅이라고 하더라.

 

노인 : 저렇게나 별이 많은 데 거짓말이죠. 그런데 어머니, 저 좀 들어가 봐도 돼요?

 

목소리 : 똥통에 들어오면 똥독 옮는 일 밖에 없다.

 

노인 : 어머니!

 

목소리 : ?

 

노인 : 휴지가 없네요.

 

목소리 : (엉덩이 밑으로 손을 내밀며) 빨간 휴지 줄까? 파란 휴지 줄까?

 

 

 

노인, 손을 덥석 잡는다. 변소 불 꺼진다.

 

무대 중앙에 화장실 문과 좌변기만 놓여있다.

 

손녀, 바지를 내리고 좌변기에 앉는다.

 

 

손녀 : 아빠! 휴지 좀!

 

아들 : (문틈으로 휴지를 건네며) 아유, 냄새.

 

손녀 : , 진짜.

 

아들 : 저번에도 변기 막혔더라. 작작 좀 싸라. 변기 물 잘 내리고, 휴지 넣지 말고.

 

손녀 : 한 마디만 하지.

 

아들 : 손도 씻고 발도 씻고 수건은 제 자리에.

 

손녀 : 알았으니까, 그만 문 닫고 가시지요. 아바마마.

 

며느리 : (등장하며) 회사 안가?

 

아들 :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벌써 이렇게 됐나.

 

며느리 : 오늘 아버님, 시할머니 제삿날인거 알지?

 

아들 : 허허, 이 사람 참. 어떻게 그걸 잊겠어?

 

며느리 : (배를 내밀며) , 잊은 거 없어요?

 

아들 : ? ! 우리 복덩이. 아빠, 회사 갔다 올게.

 

며느리 : , 그거 말고.

 

아들 : (나가려다 말고) 사랑해.

 

며느리 : 선주야! 학교 늦겠다. 빨리 끊고 나와.

 

손녀 : 싸고 또 싸도 또 나오는 걸 나보고 어떡하라고.

 

며느리 : 그러게 누가 그렇게 먹으래?

 

손녀 : 유통기한 지난 우유를 냉장고에 넣어 둔 게 누군데 그래?

 

며느리 : 내가 전에 버릴 거라고 먹지 말라고 그랬지?

 

손녀 : 아 몰라. 몰라. (물을 내린다) 학원비나 줘.

 

며느리 : 오늘은 학원가지 말고 곧장 집에 와라.

 

 

손녀, 가방을 메고 뛰어간다.

 

찬바람이 쌩쌩 분다.

 

며느리, 화장실에 걸린 겨울옷을 들고 밖으로 나간다.

 

무대 조명 깜박인다.

 

노인과 어머니 손을 잡고 등장한다.

 

 

노인 : 맑고 향기롭고 한쪽 발이 미끄러져 똥통에 빠질 일도 없고. 똥이 가득 차 있어서 파리가 알을 낳는 일도 없고. 오래 앉아 있어도 똥구멍에 거미줄 칠일도 없고. 누렇게 잘 익은 똥 한 덩어리 빠뜨리고 내리기만 하면 똥 찾으러 오는 사람은 따로 있으니 얼마나 좋아요?

 

어머니 : 똥이 거름이 되고 약이 되야, 좋은 거다. 그래야 키우는 재미도 있지. 자식을 키워 좋은 뒤끝을 보는 시대는 갔어.

 

노인 : 어머니야, 자식 똥구녕 닦아주는 게 유일한 낙이었으니까요.

 

어머니 : 너는 아닌 것처럼 말하는구나.

 

노인 : 저야 변소간에 다리 벌리고 앉아서 어머니 목소리 듣는 게 낙이었죠.

 

어머니 : 언제는 똥통에 빠질 일 없어서 좋겠다더니.

 

노인 : 저는 좌변기에 앉으면 똥을 못 눠요. 아시면서.

 

어머니 : 진호 내외가 다시 합쳐서 좋으냐?

 

노인 : 죽으면 가지고 갈 게 자식들 밖에 더 있나요?

 

어머니 : 쇠똥구리가 왜 뜨거운 뙤약볕 아래서 쇠똥을 굴리고 있는 줄 아냐?

 

노인 : 글쎄요.

 

어머니 : 똥이나 쳐 잡수시라고 그러는 거다.

 

노인 : 어머니도 참.

 

어머니 : 쇠똥구리는 바닥에 넙죽 엎드리고 있다가 개나 소나 망아지가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몸을 열기만을 기다려. 그리고 기어이 똥이 나오면 똥 속에서 허우적거리면서 똥을 굴리지. 앞을 똑바로 보고 굴리는 법이 없어. 그래서 뒷걸음질에 밟히기도 하고 산등성이 밑으로 굴러 떨어지기도 하는 거야. 그리고 그렇게 굴린 똥 밑에 굴을 파고 그 속으로 똥을 옮겨와 먹으면서 살지.

 

노인 : 그래서 싫으세요?

 

어머니 : 살아서도 죽어서도 자식 똥구녁만 보고 사는 게 부모란다.

 

노인 : 살아서도 똥구멍 닦고 죽어서도 왜 자식 똥구멍만 닦아요? 다 그만두고 제삿밥이나 얻어 잡수고 가요. ()



<당선소감>

 

 믿어준 친구들가족에 감사 깊은 울림 주는 글 쓰고파

 

  이야기는 결국 두 개의 어긋난 벽돌을 가진 사람이 그 벽돌을 똑바로 세우기보다는 어긋난 채로 벽돌이 무너지지 않게 괜찮다, 괜찮다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글을 썼습니다.


  저보다 더 많이 좋아해주시고 언제나 제가 할 수 있다고 말해주시던 어머니, 누나, , 여동생 모두 사랑하고 고맙습니다. 늘 먼저 힘든 일 없느냐며 손을 내밀어주는 현우,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먼 길도 마다하지 않고 달려와 주는 친구들, 글이 아니라 글을 쓰는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시던 이강백 선생님…….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깊은 곳에서부터 울림을 줄 수 있는 작품을 쓰겠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지켜보고 웃고 계실 아버지. 더 많이 사랑한다고 말해주지 못해 죄송합니다. 앞으로 더 많이 괜찮아 질 거라고 말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될게요. 아버지가 어머니와 함께 살던 모습들이 제게 가장 좋은 가르침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처음으로 극을 올리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가 불현듯 생각납니다. 도서관에서 몰리에르 수전노를 읽다가, 찰리채플린의 라임라이트를 보다가, 세상을 바꾸지는 못해도 같이 살아보고 싶은, 혹은 같이 놀고 싶은 사람이 되는 건 어떨까, 내가 극을 쓴다면 어떤 극을 쓰게 될까 궁금했었습니다.


  궁금증이 풀릴 수 있도록 열심히 배우고 열심히 쓰고 깊이 생각하겠습니다. 제게 답을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신 이윤택 선생님, 한태숙 선생님 고맙습니다. 청개구리 심보를 가진 제게 청개구리 엄마 같은 거짓말로 가르침을 주시는 세상의 모든 선생님, 말씀 새겨듣고 정진하겠습니다.

 

1982년 전남 화순 출생서울예대 문창과 졸업

 

 

<심사평>

 

한국적 해학공연성 발군 '와룡의 꿈'도 돋보인 작품

 

  올해 응모작 142편은 특정한 시류나 유행을 따르지 않은, 자기 개성이 분명한 좋은 작품들이 대부분이었다. 다양한 주제의식을 접한 것은 심사위원들에게 매우 반가운 일이었다.


  본심에 오른 작품은 김한결의 정말 조금 그래요’, 신유섭의 폭우’, 박정규의 와룡의 꿈’, 박교탁의 빨간 휴지 줄까, 파란 휴지 줄까?’이다.


  ‘정말 조금 그래요는 화장실이라는 일상적인 공간을 극중 배경으로 설정해 현 세태를 압축하는 작품이다. 문장을 상당히 잘 쓰고 극의 전체적인 구성력도 좋았지만 소재면에서 참신성이 떨어진 점이 아쉬웠다.


폭우는 아파트, 사무실 등 일상적인 공간을 배경으로 했음에도 소재의 참신성이 떨어지지 않은 좋은 작품이다. 특히 인간의 내면과 심리적 세계를 들여다보고 그 안에 엄습한 불안과 공포를 포착해낸 점이 훌륭했다. 다만 모호한 결말이 다소 아쉬운 작품이다.


  ‘와룡의 꿈은 이번 신춘문예 응모작 중 단연 돋보이는 구성과 주제의식을 갖춘 작품이다. 우선 극의 배경과 소재가 중국의 삼국지연의다. 사마휘를 주인공으로 시종일관 뜬 구름 잡는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전개하는데, 바로 그 점이 전형적인 희곡 전개에 익숙한 심사위원들의 허를 찔렀다. 극의 전체적인 구성이 장자의 호전몽을 연상시키는 구조라는 점도 매력적이었다. 한국 창작극의 영역을 넓혔다고 평가할 작품이다. 다만 분량이 너무 방대하고 연극 무대로 꾸미는 데 어려움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이 단점으로 지적됐다.


  당선작 빨간 휴지 줄까, 파란 휴지 줄까?’는 전형적인 한국 창작극이다. 극적 공간으로 설정한 재래식 화장실부터 한국적인 해학과 골격을 갖추고 시작하는 작품이다. 변소귀신(어머니), 노인, 아들, 며느리, 손녀 등 4대가 등장하는 이야기로 과거와 동시대를 버무렸다. 소재의 참신성은 다소 떨어질 수 있지만 말을 다루는 솜씨나 인물의 성격을 구축하는 솜씨가 훌륭했다. 특히 바로 무대에 올릴 정도의 공연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매력이었다.


  본심에 오른 4편 모두 훌륭한 작품으로 한국 희곡이 예전보다 건강해지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복잡하고 암울한 현실에도 작가들의 작가정신이 회복되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 연극의 희망을 볼 수 있었다.

 

심사위원 : 한태숙 연출가 이윤택 연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