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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비상구는 있다 / 최우람

 


등장인물

학생 - 고등학교 2학년 학생

청년 - 28세 백수

남자 - 45세 기러기 아빠

경비원 - 아파트 경비원

경비원2 - 아파트 경비원 2

 

배경

 

늦은 밤. 고층 아파트의 옥상. 4개의 전등 중 하나는 나가서 불이 깜빡이고 뒤쪽에는 작은 밭이 있다. 잠시 후 자물쇠가 열리고 경비원이 들어온다. 천천히 옥상을 걷다가 불이 깜빡이는 전등으로 간다.

 

경비원 : (혼잣말로) 이씨 이거 안 되겠구만. 사람이 안 온다고 이렇게 관리를 소홀히 하면 쓰나.

뒤 쪽에 있는 밭으로 간다.

 

경비원 : (혼잣말로) 이씨가 그동안 신경을 많이 쓰긴 했네. 나도 이렇게 나도 이런 거라도 했으면 좀 덜 외로웠으려나.

 

경비원은 잎을 어루만져 보고 흙도 만져 본다. 이후 천천히 난간 쪽으로 다가가 아래를 슬쩍 내려 다 본다. 뒤로 주춤거리며 망설이다가 다시 난간으로 다가간다.

 

경비원 : (혼잣말로) 거 이런 날까지도 바람이 뭐 이리 불고 이러는지.

 

경비원은 조심스럽게 난간을 잡는다. 찬 냉기 때문에 다시 손을 떼고 몸을 한 번 떤 뒤 다시 난간을 잡고 넘어 끄트머리에 선다. 아래를 한 번 내려다보고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고 눈을 감고 깊게 심호흡을 한다.

 

그때 옥상의 입구로 청년이 고개를 삐죽 내밀고 옥상을 둘러본다. 그리고 난간에 기대어 있는 경비원을 발견한다.

 

청년 : 저기요?

경비원 : (화들짝 놀라며 몸을 난간에 기댄다.) 아이고 깜짝이야!

청년 : (놀란다.) 거기서 뭐하세요! (경비에게 달려가 억지로 난간 안쪽으로 끌어당긴다.)뭐 하시는 거예요 지금!

경비원 : 뭐긴 뭡니까. 그보다 여긴 함부로 오면 안 돼 학생!

 

경비원은 청년을 뿌리치고 다시 난간을 잡으려 하지만 청년이 다시 끌어당긴다. 경비원의 머리가 바닥에 닿으며 쿵 하는 소리를 낸다.

 

경비원 : 아이고 머리야!

청년 : ! 죄송해요.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경비원 : 아이고 머리 아파 죽겠네. 뭐하는 짓인가 대체.

청년 :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경비원 몸의 먼지를 털더니 허탈한 표정으로 청년을 바라본다.

 

경비원 : 젊은 사람은 이길 수가 없네. 그보다 여긴 뭐 하러 올라오신 겁니까. 여긴 아무나 오면 안돼요.

청년 :  .(난간을 바라본다.) 그게…….

 

경비원은 난간과 청년을 번갈아 본다.

 

경비원 : 아이고! 젊은 사람이 그런 생각 하면 못 써!

청년 : .. 그러는 아저씨도 그러시면 안 되죠!

경비원 : 경우가 다르지! 나는 이제 다 끝나가는 사람이고 자네는 이제 피어오르는 시기인데!

 

경비원 일어서서 다시 난간 쪽으로 가려는 걸 청년이 다리를 붙잡고 말린다.

 

청년 : 가족들이 걱정하십니다!

경비원 : 걱정 할 가족 있었으면 이런 짓도 안 했지! 지금 이런데 올라 온 거 보면 모르겠나! 차라리 마누라 있는 하늘이 더 편하겠어!

청년 : ...그래도 함부로 그런 생각 하시면 안 됩니다!

 

청년은 경비원을 끌어 내리고 경비원은 그대로 주저앉는다. 두 사람은 잠시 실랑이를 벌이지만 경비원이 먼저 지친다.

 

경비원 : 젊은 사람이 힘은 좋네.

청년 : 놀고먹으니 남는 건 힘뿐이네요.

경비원 : 내려가게. 부모님이 걱정하시네.

청년 : 글쎄요. 그럴 분들이 아닐 것 같은데

경비원 : 자고로 부모란 존재는 자식을 걱정하기 마련이지. 그러니 이 노인은 상관 말고 가게. 어차피 노인 하나 죽는다고 관심도 없을 세상이야. 아파트 값 떨어진다고 걱 정이나 하겠지.

청년 : 그래도 그런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하늘에 계신 할머님이 욕하셔요.

경비원 : 허이고. 그렇게 이 노인네 걱정하고 싶거든 내 장례식에 와서 꽃 한 송이 놓은 다음 육개장이나 한 그릇 먹고 가게.

 

경비원 다시 난간으로 다가간다. 힘이 빠졌기 때문에 청년은 그를 손쉽게 끌어 내린다.

 

청년 : 아 글쎄 제 눈앞에선 그런 짓 못하십니다.

경비원 : 그렇다면 자네도 오늘 결심 이룰 생각 꿈도 꾸지 말게. 여기서 나보다 먼저 누가 내려가는 꼴은 못 보니까!

청년 : 죄송하지만 저도 여기서 두 다리로 걸어내려 갈 생각은 없습니다.

경비원 : 어허! 이 사람이 정말!

 

그때 문으로 누군가 계단을 걸어 올라오는 소리가 들린다. 두 사람은 잠시 귀를 기울이고 경비원은 황급히 청년을 구석으로 끌고 간다.

 

경비원 : 이리와! 다른 경비원일 수도 있어!

 

두 사람은 구석으로 몸을 숨긴다. 잠시 후 가방을 멘 학생이 모습을 드러낸다. 학생은 주위를 둘러보고 가방을 내려놓는다. 이어 난간 쪽으로 다가가더니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접고 그 안에 하얀 봉투를 반 정도 보이게 놓는다. 난간을 슬쩍 내려 다 본다.

 

학생 : 그래.. 이정도면…….

 

학생은 천천히 난간을 넘어가기 시작한다.

청년 : (작은 목소리로) 어쩌죠?

경비원 : (작은 목소리로) 어쩌긴 뭘 어째! 말려야지! (달려 나가며 소리친다.) 학생! 뭐하는 짓이야!

 

경비원이 달려 나가자 청년이 그 뒤를 따라 나간다. 학생은 한 쪽 다리만 걸친 상태로 멈춰 놀라며 뒤를 돌아본다.

 

학생 : ! 깜짝이야! 뭐야! 놀라 죽을 뻔 했네!

청년 : 내려와! 뭐하는 짓이야!

학생 : ..뭐야 경찰이에요? ..말리려고 해도 소용없어요!

경비원 : 그런 생각하면 안 돼! 내려와!

 

학생은 그대로 밖으로 돌아 뛰어내리려 한다. 경비원과 청년은 달려들어 남학생을 끌어내린다. 그대로 한 쪽 다리가 걸쳐진 채로 상체가 뒤로 넘어가며 학생의 머리가 바닥에 박는다. 학생의 머리가 바닥에 닿으며 쿵 소리를 낸다.

 

학생 : 아야! 머리야!

청년 : 부모님이 아시면 어쩌려고 이러는 거야!

경비원 : 어린 나이에 그러면 안 돼 학생!

청년 : 맞아! 이제 피어오를 시기에 이러면 안 되지!

학생 : 상관 말아요! 내가 죽던 말든 무슨 상관이야! 어른들이 우리한테 언제부터 그렇게 관심을 가졌다고!

 

학생은 다시 몸을 일으켜 난간으로 가려 하지만 청년과 경비원에게 눌린 채로 실랑이를 벌인다.

 

학생 : . 잠깐..만요. 알겠으니까. 이거 좀.. 숨 막히는데

 

청년과 경비원은 몸을 일으킨다. 학생은 대()자로 누워 숨을 내뱉는다.

 

학생 : ..죽는 것도 마음대로 안 되네. 대체..  (흐느낀다.)

 

경비원은 어쩔 줄 몰라 하고 청년은 학생을 천천히 다독인다.

 

학생 : 아저씨들이 뭔데 대체.. 왜 날 막는 거야. 내가 살기 싫다는데.

청년 : 학생은....어리잖아.

학생 : 어리다고 놀리지 말아요! 나도 내 마음대로 살 권리가 있는데 왜 무시하는데요!

청년 : 무시가 아니고. 그렇다고 이렇게 나쁜 선택을 하면 안 되지! 힘든 건 알겠지만…….

학생 : (말을 끊으며) 위선자처럼 이해하는 척 하지 말아요. 내 말에 긍정하는 척 해 봤자 소용없어요. 어차피 자기 말대로 안 하면 돌아오는 건 총알 뿐 이잖아?

청년 : 아니 나도 따지고 보면 그렇게 어른은 아닌데.

 

학생은 다시 난간으로 뛰어 간다. 한 쪽 다리를 걸치고 넘어가려고 하자 청년과 경비원은 필사적으로 학생을 막으며 실랑이를 벌인다.

 

청년 : 그만해! 학생!

학생 : ! ! 죽고 싶은데 왜 그래요!

경비원 : 죽고 싶다는 놈이 망설이고 유서까지 고이 접어 두는 거냐!

 

학생이 멈칫 하자 두 사람은 재빠르게 다시 학생을 끌어 내린다. 세 사람은 다시 실랑이를 벌인다. 그때 옥상 입구로 남자가 고개를 슬쩍 내밀고 세 사람이 엉켜 있는 모습을 잠시 관찰한다. 그리곤 천천히 세 사람 쪽으로 다가간다.

 

남자 : 저기요.

 

세 사람은 모두 남자의 목소리에 놀라 남자를 돌아본다.

 

남자 : 여기서 뭐하세요? 가족끼리 오붓하게 운동이라도 하는 건가. 내가 방해 한 건가? 훈훈하네

청년 : 아니 이 학생이 자살하려고 하는데. 같이 좀. 도와주시죠.

남자 : 죽는데 순번도 있는 건가. 그러면 얼른 합시다. 나도 끝내게.

청년 : 학생이 이러는데 막아야 하는 거 아녜요?!

남자 : 뭐야 봉사단체야? 그럼 가기 전에 좋은 일이라도 하고 가야지 혹시 알아. 천국 가게 될지.

 

남자는 천천히 세 사람 쪽으로 다가가 학생을 안쪽으로 끌어당긴다. 세 사람은 모두 바닥에 내동댕이친다. 이어 남자가 난간을 넘어가려고 하자 학생이 남자의 다리를 붙잡는다.

 

학생 : 아저씨! 내가 먼저 인데요!

남자 : 놔라. 가는 데 순서가 어디 있냐.

청년 : 아니 다들 뭐 하는 거예요 대체!

 

청년은 남자를 끌어 내리기 시작한다.

 

청년 : 그렇게 따지면 내가 먼저죠.

 

경비원이 청년과 함께 남자를 끌어내리자 경비원을 제외 한 세 사람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진다.

 

경비원 : 아니 근데 여기서 대체 뭐 하자는 겁니까!. 여긴 함부로 올라오면 안 되는 곳입니다!

청년 : 저는 죽으려고 왔는데요.

학생 : 보시면 알잖아요.

남자 : 이하 동문

경비원 : 아까부터 말씀드리지만 여긴 아무나 올라오면 안 되는 곳이란 말입니다.

학생 : 그럼 아저씨는요.

경비원 : 나는 경비잖아요 경비!

청년 :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아저씨도 죽으려고 하시지 않았어요?

 

학생과 남자는 청년을 바라본다.

 

남자 : 정말?

청년 : . 분명 제가 올라 왔을 때 난간에 서 서 떨어지려고 했는데.

남자 : 뭐야. 그러면 아저씨도 할 말 없네. 순서 따질 거면 얼른 먼저 하소. 순서대로 갑시다. 아니면 다 같이 사이좋게 손잡고 갈까요.우애 넘치게.

경비원 : 아니 글쎄. 다들 여기 있지 말고 내려가요 내려가!

 

경비원은 세 사람을 억지로 문으로 밀기 시작한다. 그때 다시 옥상을 향하는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네 사람은 구석에 숨는다. 잠시 후 문으로 경비원2가 들어온다.

 

경비원2 : 무슨 소리가 난 거 같은데. 뭐야 여기 문은 왜 열려있지. 김 씨가 깜빡했나.

 

경비원2는 주위를 둘러보고 네 사람이 있는 곳 쪽으로 시선이 갔을 때 네 사람은 몸을 더욱 웅크린다. 옥상의 한 편에 조그만 밭이 있고 경비는 그곳을 서성이며 물을 주고 흙을 몇 번 만진다.

 

경비원 2 : 다 익었네. 내일 캐서 먹으면 되겠네.

 

경비원2는 흡족한 표정을 짓는다. 잠시 옥상을 둘러본다. 깜빡이는 전등을 끄고 문 쪽으로 간다.

 

학생 : (속삭이듯 혼잣말로) 빨리 안 가고 뭐 하는지.

 

경비원2는 뒤를 돈다. 네 사람은 놀란다.

 

경비원2 : 누구 있어요?

 

침묵

 

경비원2 : 나이를 먹었더니 이젠 헛것이 다 들리나. 자식들은 보청기도 안 해주고 거참. 자식 키워봤자 소용없구먼.

 

경비원2는 문을 나가 문을 닫고 자물쇠 잠근다.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자 구석에서 네 명의 그림자가 나온다.

 

남자 : 갔지?

청년 : 간 것 같죠?

경비원 : 갔습니다. 저 친구 이제 경비실에서 TV보느라고 한 동안 안 올 겁니다. 저 친구가 좋아하는 프로그램이 하는 시간이거든요.

학생 : 맘 편히 죽지도 못 하네 참.

남자 : 그럼 나 먼저.

 

학생은 남자를 막는다.

 

남자 : 놔라. 어차피 결심 다 섰으니까.

학생 : 먼저 방해하신 게 누군데 이러시나요. 어려도 상도덕이란 게 있죠.

남자 : 죽는데 상도덕이 어디 있냐. 게다가 내가 어른이니까 먼저 하자.

학생 : 가는 덴 순서 없죠.

 

남자는 잠시 남학생을 보다가 문 쪽으로 몸을 옮겨 문을 열려고 하지만 열리지 않는다.

 

남자 : 잠겼네.

청년 : 어차피 그리로 내려 갈 일은 없을 것 같은데 상관없지 않나요.

남자 : 그건 그렇지만. 이렇게 대기번이 많아서야. 다른 자리 찾아보려고. 게다가 다들 딱히 가고 싶은 마음은 없나 본데.

경비원 : 혹시나 다른 맘 생기면 그냥 내려가시죠. 자녀분들이 걱정하십니다.

남자 : 걱정 마소. 지금 어디서 외국 년들이랑 같이 좋은 시간 보내고 있을 테니.

경비원 : 자녀분들이 외국에 있나요?

남자 : (주저앉으며) 그래요. 내가 그 유명한 기러기 아빱니다. 생일날인데 오기는커녕 전화 한 통 없네요. 어차피 기대도 안 했지만.자식 놈이던 아내 던. 다 쓸모없네.

학생 : 그러면 따라가시지 왜 여기 있어요.

남자 : 뭐야?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이 어디서 어른들 말씀하시는데 끼어들어.

학생 : 아니 뭐. 어른이라고 딱히 대단한 것도 아닌 듯 하네요. 그런 걸로 죽을 생각이나 하고.남자 : 너희 같은 어린 애들이 뭘 알겠냐.어른들의 고민이란 걸.

학생 : 별로 알고 싶지도 않은데요. 말만 번지르르한 어른들의 사정

 

남자가 성난 표정으로 학생에게 다가가려 하자 경비가 막는다. 남자는 그것을 뿌리치고 학생에게 손가락질을 한다.

 

남자 : 부모님이 주는 용돈만 받고 공부만 하면 되는 나이에 뭘 이해하기는 해?

학생 : 아니 무슨 우리는 고민도 없는 줄 알아요? 거참 말 쉽게 하시네. 그러니까 자식새끼들한테 연락도 못 받는 처량한 기러기 신세를 벗어나질 못하지. 꼭 일차원적 인 생각만 하니까.

남자 : 성적 고민 밖에 없는 너희가 무슨 고민이야 고민은! 우리 때는 말이야…….

학생 : (말을 끊으며) 우리 때는 우리 때는. 아주 오래 사셔서 좋으시겠어요. 말만 하면 무슨 우리 때는. 그때랑 지금이랑 똑같습니까.아직도 구시대적 발상 속에 사니 그렇게 가족한테 버려 진거지.

남자 : 뭐야? 이 싸가지 없는 새끼가 진짜 보자보자 하니까!

 

경비원은 남자를 말리고 청년은 학생을 말린다.

 

경비원 : 아이고. 두 사람 다 그만해요! 이러다가 시끄럽다고 사람들 올라옵니다. 아저씨도 그만하시고. 학생도 그만해! 어른한테 그러는 거 아냐!

학생 : 어른이면 다예요? 쌍방에 기본적인 예의가 있어야지 최소한. 사람관계 라는 게 나이만 먹으면 뭐해 머리는 어린앤데.

남자 : 뭐야? 너네 같은 어린놈들이 뭘 알아!

학생 : 당신도 우릴 이해 할 생각이 없는데 우리라고 당신 이해해야 됩니까? 애초에 자식들 성적표 말고는 관심도 없으니 그렇게 버림받아도 할 말 없지!

청년 : 그만해요 둘 다. 어차피 끝나가는 마당에 이렇게 싸우고 가고 싶습니까. 둘 다?

 

잠시 침묵

 

남자 : 에이. 씨발. 빨리 뒈져버리긴 해야겠네.

 

남자는 품에서 담배를 꺼내고 라이터를 찾으려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 청년이 그 모습을 보고 천천히 다가오더니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여 준다. 잠시 침묵이 흐른다.

 

남자 : (담배 연기를 뱉는다.) 그나저나 자네는 여긴 뭐 하러 올라왔어. 젊어 보이는데. 직장상사랑 뭐가 잘 안 되서 그런가? 대학생인가.

청년 : 졸업은 진즉에 했죠. 그런데 취직도 안 되고. 에라 모르겠다 이렇게 된 거 하고 싶은거라도 하고 살아야지 하고 시작한 공부가 잘 안 돼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죠. 그런데 벌서 4번째 낙방이네요. 덕분에 돈 없고 능력 없고 이젠 애인도 바람나고 가족들한테도 눈칫밥이 먹는 멋진 신세가 됐죠.

경비원 : 우리가 그때는 뭐라도 열심히 하면 희망이라도 보였는데 지금 친구들은 그런 것도 없는 것 같어. 안 죽으려고 사는 거 같아.그러면 자네는 뭐 하고 싶었던 게 있었나?

청년 : 원래 디자인이 하고 싶긴 했었죠. 그런데 집안 반대가 워낙 심해서. 포기하게 됐죠.

 

청년은 멋쩍게 웃는다. 경비원은 입맛을 다시곤 남자에게 다가간다.

 

경비원 : 혹시 한 개비 있으면 좀 주시면 안 될까요.

 

남자는 품에서 담배를 꺼내 경비원에게 주고 청년이 불을 붙여 준다. 경비원은 천천히 담배를 들이 마시더니 헛기침을 몇 번 한다.

 

경비원 : 내 몇 년 전 회사 퇴직하고 손자 놈들 생각해서 끊은 건데. 이렇게 다시 무는 군요. 기껏 끊었더니 자식 놈들도 연락도 없이 사라졌네요.

청년 : 세상에 참 불효자식 많죠. 저만해도 그렇고요.

남자 : 하이고. 자식 놈들이 다 그렇지 뭐. 결국 남는 건 이 놈이네. 그래도 가는 길동무로는 최고네. 자네는 안 피나?

 

남자는 담배를 하나 청년에게 건넨다. 청년은 잠시 망설이더니 웃으며 담배를 받아 입에 물고 불을 붙인다. 어색하게 담배를 한 모금 마시더니 이내 기침을 하며 연기를 뱉는다.

 

청년 : 그나마 이거라도 무니 좀 낫네요. 집에선 이거 무는 것도 눈치 보였었는데.

남자 : 갈 때 가더라도 담배 한 개비 정도는 괜찮지.

경비원 : 그러게요. 손자나 자식이나 할 것 없이 지아비 사라진 마당에 이거라도 얻어야 덜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곱다 하잖아요.

 

남자는 학생을 바라본다.

 

남자 : 너는 안 피나? 요즘 애들은 중학생 때부터 술이고 담배고 다 하던데.

학생 : 담배는 안 피는데 배는 고프네요.

남자 : 그 말 들으니 그러네. 아 뭐라도 좀 먹고 올 걸. 후회되네.

학생 : 무슨 냄새 안나요?

 

학생의 말을 듣고 다들 코를 세워 냄새를 맡는다.

 

남자 : 아 고기냄새네. 죽이네. 쌈 싸서 소주라도 한 잔. .

청년 : 전 보쌈이 생각나네요. 아니면 그냥 닭발 같은 것도 좋겠어요.

남자 : 이 친구가 담배 피는 거 보고 숙맥인 줄 알았더니 술 먹을 줄 아네. 언제 한 번 같이 한 잔 하면 좋겠네.

학생 : 진짜 배고픈데.. 우리 저거라도 먹으면 안 될까요.

 

학생은 손가락으로 옥상에 있는 밭을 가리켰다. 사람들은 모두 그 곳을 바라보았다.

 

남자 : 괜찮네. 아까 그 경비아저씨도 이제 먹을 수 있다고 했잖아 아까. 대충 보니 감자나 고구마 같은 거 있는 거 같은데.

청년 : 그렇게 하죠.

경비원 : 저거 이씨가 굉장히 아끼는 밭인데…….

남자 : 어차피 가는 마당인데 뭐 어떻습니까.

학생 : 맞아요. 이거 잘 타려나 모르겠는데 (학생은 가방에서 책을 쏟아낸다.) 괜찮겠죠?

남자 : 괜찮아 괜찮아! 불만 붙으면 되지!

 

청년과 남자는 밭을 헤집어 감자와 고구마를 캐낸다. 학생은 가방과 책으로 불을 붙인다. 경비원은 잠시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책으로 부채질을 하며 불을 붙인다. 감자와 고구마에 묻은 흙을 대충 털어내곤 그 안으로 던져 넣는다.

 

남자 : 불이 좀 약한 가. 마른 나뭇잎이 최곤데. 땔감 없나 어디.

 

학생은 버려두었던 외투를 안으로 집어 던진다. 다들 학생을 보자 뭘 보냐는 표정을 짓는다.

 

학생 : 어차피 앞으로 입을 일도 없을 거 같은데.

 

남자는 손을 뻗어 바닥에 있던 하얀 봉투를 집어 불 속으로 던진다.

 

학생 : 뭐하는 짓이에요?!

남자 : 너한텐 쓸모없어 보이 길래.

 

학생은 뭐라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문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잠시 후 불 속에서 감자와 고구마를 꺼낸다.

 

남자 : . 뜨겁네 뜨거워.

청년 : 고기는 아닌데. 이것도 (고구마를 한 입 문다.) 맛있네.

경비원 : 이 씨가 고생해서 키운 거니까요. 약도 안치고 하루가 멀다 하고 고생해서 키웠죠.

 

남자는 고구마 껍질을 까더니 남학생에게 건넨다. 남학생이 받지 않다 남자가 계속 권하자 받는다.

 

남자 : 아까 화내서 미안하다. 좀 예민했나보다.

남학생 : ...아녜요. 저도 죄송해요.

남자 : 네 말이 맞을 수도 있지. 내 자식들한테는 어릴 때부터 화만 냈으니 아빠만 보면 싫어하는 것도 당연하지.

경비원 : 저도 어딘지 낯간지러워서 자식 놈들 앞에선 손자 안고 웃지도 못하겠더군요. 하도 어릴 때부터 엄한 모습만 보여준지라 저만 보면 무서워 지어미 품에 안겨 들곤 했죠. 진즉에 웃는 모습이라도 연습할 걸 그랬어요.

남자 : 학생도 힘들었겠지. 나도 생각해보면 학생 때 여행을 좀 가고 싶었는데 집에선 안된다고 그러고. 그래서 반항 했더니 아버지한테 맞기 일 수 였지. 덕분에 나도 아버지를 굉장히 싫어했었어. 개구리 올챙이 적 모른다더니. 옛 말 중에 틀린 말 없네.

학생 : 반대로 저도 아빠가 일 갔다 오면 방 한 번 내다 볼 수 있는 건데 그것도 안 하고. 저도 똑같죠. 밥 먹었냐 그 한 마디가 정말 나 밥은 먹고 다니나 걱정 돼서 한 말이었는데 그게 뭐가 그렇게 듣기 싫었는지.

남자 : 그래도 이렇게 사람들이랑 같이 있어서 목숨이 붙어 있는 것 같네. 그래도 혼자 간 다는 생각에 끝까지 외로웠는데 이렇게 동지라도 있으니 좀 든든하네.

경비원 : 그러게요. 이젠 혼자 살다가 죽을 줄 알았더니 그래도 죽는 순간에 누군가와 같이 있다는 건 정말 좋은 일이군요. 오랜만이네요 이런 기분도.

남자 : 만약 그 전에 가족과 같이 했다면 이런 곳에 올라 올 일도 없었겠죠.

청년 : 세상에 정말로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학생 고구마를 높이 치켜든다.

 

학생 : 아저씨 생일이라고 했죠? 축하해요. 다 같이 건배라도 할까요.

청년 : 그거 좋네.

경비원 : 변변한 선물은 없지만 축하합니다.

 

남자 멋쩍게 웃는다

 

남자 : 거참 쑥스럽네. 하하.

 

어디선가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남학생은 코를 세우고 어디서 나는 가 맡는다.

 

학생 : 근데 어디서 타는 냄새 안 나요?

 

학생의 말을 듣고 모두 코를 세운다.

 

남자 : 고기타는 냄새 아냐? 고기 구울 줄 모르네.

청년 : 그거랑 다른데. ? (자신들이 피운 불이 번져 밭이 타고 있는 것을 본다.) 저기 불났어요 불!

남자 : 뭐야! 불이야!

 

네 사람은 불을 끄려고 발로 밟고 옷을 펄럭이지만 불은 삽시간에 번지기 시작한다. 남자는 문으로 달려고 발로 차보지만 열리지 않는다.

 

청년 : 소화기요 소화기!

경비원 : 저기 저기!

 

청년은 경비원이 가리킨 곳으로 달려가 소화기를 꺼내 안전핀을 뽑고 분사하려 하지만 나오지 않는다.

 

청년 : 이거 왜 이래!

 

청년이 계속 소화기의 손잡이를 누르지만 소화기가 분사되지 않고 손잡이가 부러져 버린다.

 

경비원 : 이씨 관리 좀 잘 하라니까! 아이고 이걸 어떻게!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학생 : 살려주세요! 불이야!

아파트 주민 : 시끄러! 잠 좀 자자!

학생 : 사람 살려요! 살려줘요! 불났어요!

 

불이 더욱 크게 번지자 다들 문으로 달려든다. 문을 발로도 차고 주먹으로 친다.

 

학생 : 이렇게 죽기 싫어! 엄마!

남자 : 용현이 엄마. 미안해

청년 :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그때 빗방울이 천천히 떨어지더니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네 사람은 비에 젖으며 정신을 차리고 비가 꺼지는 걸 보고 서로를 얼싸 안는다.

 

학생 : 살았다! 살았다!

청년 : . 비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경비원 : 만세! 만세!

 

비가 그친다.

 

학생 : . (눈물을 닦는다.) 살았네요. 아 엄마 미안해요.

청년 : 죽고 싶었는데 막상 이렇게 사니까 기분이 묘하네요. 죽지 말란 신의 계시 같은 건가.

학생 : 신은 안 믿지만. 하늘한테 감사는 해야겠어요.

청년 : 근데 조금 기분이 묘하네.

경비원 : 학생이랑 자네는 아직 젊은데 더 살아봐. 뭐라도 건질 수 있겠지. 우리는 이미 산전수전 다 겪은 껍질인데.

남자 : 선생님도 저랑 같이 어디서 소주라도 한 잔 하시죠.

 

남자는 경비원에게 어깨동무를 한다. 경비원은 웃는다. 그때 경비원2가 문을 두드린다. 네 사람 모두 놀란다.

 

경비원 2 : 뭐야. 거기 누구 있어요?

 

문 밖의 목소리에 네 사람은 놀라 뒷걸음질 친다. 잠시 짤랑 거리는 열쇠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리고 경비원2가 나타난다.

 

경비원 2 : 뭐야. 시끄럽다고 주민 신고 들어 와서 올라와봤더니 다들 여기서 뭐합니까. 꼴은 그게 뭐고. 가족들끼리 무슨 운동회라도 한 겁니까?

 

경비원 2 주위를 둘러본다.

 

경비원 2 : 달밤에 체조라도 하셨나. 그런데 내가 아까 문 잠글 때 까진 없었는데 대체 어떻게 올라 온 겁니까? ?

 

경비원 2, 경비원을 발견한다.

 

경비원 2 : 김씨? 여기서 뭐해요. 꼴은 대체 그게 뭐고. 김씨랑 올라온 거요?

경비원 : 아니. 이씨 그게 말이야…….

 

경비원2 옥상 주위를 둘러보다가 자신의 밭이 모두 불타고 뽑힌 것을 눈치 챈다.

 

경비원 2 : 뭐야. 저기 꼴이 어쩌다가 저렇게 된 거야. 김씨 이게 뭡니까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예요. 여기 여 그을린 건 뭐고.

 

네 사람은 잠시 말없이 서로를 바라본다. 이윽고 경비원을 선두로 네 사람 모두 경비원 2를 밀치고 옥상을 뛰쳐나간다.

무대. 어두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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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도전에 두려움 버리고 용기 갖게 된 계기

 

  처음 연락을 받지 못 해 문자를 받았을 때 본선을 통과했다라는 정도의 이야기일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통화 중 당선되었단 말을 듣고 어리둥절했습니다. 상상했었던 일이 현실로 펼쳐진다는 것은 기쁘기도 했지만 멍한 기분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마치 잠을 덜 깬 것 같았습니다.

  일단 부족한 제 작품을 높이 평가해 주신 심사위원 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고등학생 때 처음 펜을 잡기 시작했지만 도전에 대한 공포와 실패에 대한 두려움에 계속 멈춰 섰었습니다. 결국 대학 자퇴까지 생각하면서도 졸업만 하자라며 우물 안에 가뒀던 저를 끌어 올려주신 전성희 교수님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번 일은 단순히 뭔가 이뤄낸 것만이 아니라 도전에 대한 용기를 갖게 된 아주 중요한 순간이 되었습니다.

  앞으로 어떤 도전을 하게 되더라도 먼저 두려워하여 포기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진심으로 다시 한 번 감사드리겠습니다.

 

[약력-최우람]

-1991 1 8일 서울 출생.

-명지전문대학 문예창작과 2015 2월 졸업 예정

 

 

<심사평>

 

희비극적 현실 담아낼 가능성 높은 작품

 

  희곡작가 지망생들의 초기 단막희곡들을 보면 대체로 두가지 경향이 나타난다. 하나는 희곡을 완성된 독자적인 문학의 한 방식으로 생각하는 경향이요, 다른 하나는 희곡은 연극을 공연하기 위한 대본으로 그 자체로는 미완성이며 궁극적으로 배우와 연출을 통해 완성된다고 보는 생각이다.

  본선에 올라온 10편의 작품을 훑어보면서 이번 신춘문예 공모에 출품된 작품들 역시 대체로 이러한 두가지 경향이 혼재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 두가지 경향 중 어느 쪽이 옳다고 단정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전자-독자적인 문학-의 경우 작품 자체로 완결성을 갖는 것이 필수적으로 요구될 터이며, 후자-연극을 위한 대본-의 경우 다양한 공연요소의 가능성을 충분히 포함하고 있어야 마땅할 터이다.

  그런데 독자적인 문학 성향의 경우 대체로 매우 관념적인 인물과 상황을 설정하고 있음이 공통적으로 드러났다. 현실의 부조리나 존재의 모순을 드러내기 위한 일종의 모호성이라 할 수 있는데, 기실은 설정이 너무 작위적이어서 읽는 문학으로서도 썩 다가오지 않았다. 그 중 현실 은유가 꽤 진솔하게 느껴진 작품이 오르는 사람들이었으나 당선작으로는 조금 미흡하였다.

  고심 끝에 선정한 작품이 비상구는 있다이다. 늦은 밤 고층아파트 옥상에 자살하러 올라온 각 연령층 군상들과 경비원 사이에 벌어지는 이 에피소드는, 아직 잘 정리돼 있지는 않지만 우리네 희비극적 현실의 숱한 사연들을 좀더 담아낼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아 당선작으로 정하였다.

  좋은 연출과 배우를 만나 이 작품이 보완되어 완성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약력-임진택]

-1950년 전라북도 김제 출생

-서울대학교 외교학 학사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부회장 역임

-창작판소리 명창

-연극연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