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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천화(遷化) / 이연초

 


여자는 쪽창 가까이 의자를 끌어당겼다. 오금지에 바짝 힘을 주면서 고개를 창가로 밀착시켰다. 화단가에서 불쑥 뻗어 나온 나뭇가지처럼 생뚱한 팔 하나가 여자의 시선을 잡아챘다. 허공에 들린 그 팔만 아니라면, 상체가 한쪽으로 15도쯤 기운 노인의 모습은 여섯시 오 분 전에 멈춰 선 시계바늘 같았다. 지팡이를 짚은 오른손과 달리 머그잔 같은 것을 치켜든 다른 한 손 때문에 여자는 점점 긴장감을 느꼈다.

저 팔 좀 내렸으면. 여자는 두 손으로 횡격막을 문질렀다. 평소라면 화장실을 다녀온 뒤 야채수를 마실 시간이었다. 여자는 마른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만 들어가세요.

어디로, 어디로 말인가? 내가 들어갈 곳은 없다네. 나갈 곳도 없다네.

고집 센 영감탱이라니.

여자는 모노드라마 배우처럼 표정을 바꿔가며, 손가락으로 창틈에 낀 먼지뭉치를 퉁기듯 건드렸다. 마침 화단가 목련이 흰 꽃잎을 화르르 노인의 기우뚱한 어깨위로 떨구었다.

누가 좀 데려갔으면. 어느 보호소에서라도 나와 햇살 따스한 곳으로 데려갔으면.

여자는 웅얼거렸다. 실내의 서늘한 기운에 몸이 떨렸다. 푸르뎅뎅한 맨발을 꼼지락거리던 여자는 몸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움직이란 말야!

여자는 방광이 터질 것 같았다.

망할 노인네! 죽어버려!

노인의 요지부동이 가증스러워졌다. 어서 한 마리 꽃뱀처럼 스르르 화단 속으로 사라지든지, 민달팽이처럼 햇빛 속에 녹아나버리든지. 여자는 그런 종말을 지켜보고 싶었다.

죽어, 차라리 죽어! 그대로 고꾸라져버려!

한바탕 통증이 등뼈를 훑고 지나갔다. 여자는 거친 숨을 가다듬었다. 노인이 한 마리 새처럼 보였다. 여자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이제 노인은 허수아비 같았다. 누가 좀 데려갔으면. 그녀는 누군가 나타나기를 다시 간절히 바랐다. 경비라도 다가와 담벼락에 기대 세워준다면. 그저 담배 한 개비 입에 물려주면서, 오늘 햇살이 참 좋겠군요, 말을 붙여준다면…….

통증이 등뼈를 타고 사타구니로 흘러내렸다.

노인이 잠깐 움찔했다. 허공에 들린 왼팔을 가볍게 내렸다. 여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자유로워진 손목은 노인의 엉덩이 옆에서 흔들거렸다. 당장 화단가에서 꽃이라도 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여자는 비로소 쪽창 턱받이에 놓인 탁상시계를 바라보았다. 의자를 붙잡고 몸을 일으켰다. 방광이, 가슴이, 위가, 등뼈가, 열 손가락 마디마디가 일제히 아우성 댔다.

그 순간, 기우뚱한 노인의 얼굴이 여자 쪽으로 향했다. 노인은 하회탈처럼 웃고 있었다. 그가 분명 웃고 있었다. 부드럽게 퍼져 내린 사월의 아침 햇살이 가장 먼저 노인의 얼굴위로 내려앉아 있었다.

노인이 기다렸던 것은 저 첫 햇살일까. 기다린 연인을 만난 듯 흐뭇한 얼굴로 햇살의 애무에 온몸을 맡긴 저 포즈라니. 변덕심한 노인 같으니라고. 그 완고한 고집은 사라지고 노인은 한없이 유순해 보였다. 15도 각도 기울어진 저 몸 어디에서 저런 기운이 솟아오르는가. 노인은 당당했다. 홀로 서서, 두 다리로 온전히 홀로 서서 해바라기 하는 기쁨을 맘껏 뽐내고 있었다.

아파트 쪽문 옆 작은 공터에 흰 빨랫줄이 쳐져있다. 화단에는 수국이 덩치 큰 사내의 주먹 같은 잎사귀를 퍼 올리고 있고, 그 옆에 누군가 재미삼아 심은 푸른 보릿대가 오소소 시퍼런 기운을 내뿜고 있다. 공터는 햇빛에 반사된 시멘트 바닥으로 눈이 부셨다.

여자는 자꾸 눈을 감았다 다시 떴다. 화단의 진초록 빛과 대조적인 하얀 공터에 노인이 동그마니 혼자서 담벼락을 따라 걷고 있다. 그는 등산용 지팡이로 더듬어가며 이 끝에서 저 끝으로, 시계추처럼 왕복하고 있다. 흰 빨랫줄이 몸에 닿으면 노인은 그대로 돌아선다. 그는 그 선을 넘으면 안된다. 고압선이라도 되는 듯 우뚝 멈췄다가 돌아선다.

인간은 항상 선()을 만들었다. 안전과 평화, 질서와 행복을 지켜주는 경계선. 법과 도덕과 관습, 교양과 예의라는 각종 이름의 선. 그렇지만 선은 위태롭다. 위태로워서 아름답다. 햇빛처럼, 흰 빨랫줄이 튕겨내는 저 팽팽한 햇빛처럼. 윙윙대는 흰 빛이 날카롭고 어지럽다. 저것이 고압선이라면, 차라리 150,000v 고압선이라면 좋겠다. 여자는 다시 눈을 감는다. 어지럼증이 쉽게 가시지 않는다.

며칠 전 노인은 혼자 쪽문에 이르렀다가 문턱에 걸려 얼굴을 짓찧었다. 무릎이 꺾인 노인을 지나던 초등생들이 일으켜 세웠고, 마침 할머니가 등산에서 돌아왔다. 누가 예까지 나오라했어! 참 내. 할머니 목소리는 쌀쌀맞았다. 여자는 땅바닥에서 베레모를 집었다. 할머니가 낚아채듯 받아들었다.

그날 당장 빨랫줄을 산 것 같았다. 할머니가 쪽문 옆 빈 공터에 줄을 쳐두고 등산을 다녀오는 동안, 노인은 두 시간쯤 선 안에서 보낸다. 왼 손목에는 머그잔 크기의 라디오가 항상 달랑거린다. 노인은 시간의 흐름을 청각으로 해결한다.

이 여편네가 오늘 또 늦는구먼.

노인이 라디오를 껐다. 나 좀 도와주시오오, 도움을 호소한다. 여자의 존재를 감지했을까. 그냥 허공에 내어보는 소리는 아닌 것 같다. 쪽문 입구에 조용히 서 있던 여자가 느릿느릿 노인에게 다가간다. 노인의 눈 밑에는 아직 생채기가 남아있다.

-할멈이 또 안오구먼. 나 집에 가고 싶은데.

-제 어깨 잡으세요.

-아이고, 고맙소. 색시는 몇 동에 사오?

-바로 앞 동이에요. 혹시, 조금이라도 앞이 보이세요?

-아녀,아녀, 전혀 안보여. 나이가 몇이나 되여? 목소리가 꼭 우리 막내딸 정도밖에 안 되는 거 같어.

뭐가 좋은지 합죽 웃는다. 누런 앞니 끝이 전부 삭아있다. 흰 눈썹 아래 쌍꺼풀진 두 눈이 살짝 열리면서 끔벅거린다. 그렇게 해바라기를 열심히 하는데도 얼굴은 음지식물처럼 희멀겋다.

-딱 삼년 되었어, 이렇게 눈이 먼 지. 그래도 다리 아파 못 걷는 사람보단 내가 낫지. 내 친구는 꼼짝 못하고 방구석에만 박혀있어. , 내가 백번 낫지. 난 이렇게 맘대로 걷고 있잖여.

-장애물 없으니 편히 걸으세요.

그녀 말에 한결 긴장을 푸는 기색이다. 주차차량을 지나 노인의 아파트까지는 4·50미터 거리다. 출입구에 이르자, 노인이 안도의 숨을 내쉰다. 숨이 찬 것은 오히려 그녀 쪽이다.

-고마워요. 색시. 이제 혼자 갈 수 있어.

노인은 지팡이로 더듬거리며 벽을 지나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노인의 집이 1층일 거라는 여자의 추측은 틀렸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여자는 저도 모르게 미끄러져 들어간다. 노인의 손이 익숙하게 7층을 누른다. 역한 체취가 좁은 엘리베이터 안에 진동한다.

순간, 노인이 고개를 돌린다. 여자는 침묵한다. 유령처럼 노인을 뒤따라 나온다. 노인이 머뭇머뭇 해찰한다. 경계하는 기색이다. 여자는 다시 숨을 멈춘다. 느리게 주위를 둘러본 다음 노인이 번호 키를 누른다. 뜻밖에 손놀림이 정교하다. 마치 다섯 개의 숫자를 누르기 위해 손가락 다섯 개가 온전히 붙어있는 것 같다. 문이 열리고, 열린 문은 노인을 삼키고 재빨리 닫힌다. 푸른 색 조명 아래 드러나는 투명형광글자처럼 여자는 비로소 유형의 몸으로 돌아온다. 천천히 몸을 돌려 계단을 밟는다.

가슴보다 쇄골이 더 튀어나온 상체를 바라보며 여자는 거칠게 숨을 몰아쉰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악행보다 반드시 낫다고 할 수 있을까? 여자는 납작 달라붙은 유방을 움켜쥔다. 유두는 검은 빛으로 죽어있다. 여자는 바싹 졸아든 음부와 앙상한 허벅지를 천천히 쓰다듬는다. 발바닥에 힘을 준다. 물젖은 욕실바닥에서 중심을 잡은 여자의 두 다리에 정맥이 터질 듯 솟아있다.

여자는 갑자기 허기를 느낀다. 회복기에 50킬로까지 올랐던 체중이 급격히 30킬로대로 곤두박질친 이후, 그녀는 배고픔을 알지 못했다. 선식과 녹즙, 야채수프를 먹는 것도 중단했다. 그런데 갑자기 여자는 먹고 싶어졌다. 먹이고 싶어졌다. 몸을 잘 먹이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힌 여자는 병원에서 받은 식욕촉진제를 떠올렸다. 배가 두둥실 부풀어 오른다. 만삭의 배. 생각만으로 숨이 가쁘다.

시든 신선초와 당근 두 뿌리를 개수대에 버려두고 여자는 지갑을 찾아들었다.

회색 베레모 노인은 오늘도 아파트 쪽문 옆에 서 있다. 그의 손에 하얀 빨랫줄이 감겨있다. 혼자서 자박자박 감았음에 틀림없다.

-할멈이 안와. 망할 놈의 망구 같으니라구.

전에 없이 노인은 화가 나 있다.

-아이 참, 할아버지, 혼자 잘 찾아가시던데요. 제가 안내해드릴게요.

애교 섞인 목소리에 스스로 놀라면서 여자는 노인의 팔을 잡아끈다. 노인 얼굴이 금세 헤벌쭉 펴진다. 다 삭은 치아 너머로 컴컴한 목구멍이 보인다. 노인이 조심스럽게 여자 팔에 몸을 의지한다. 단단한 뼈마디와 체중감에 일순간 여자의 몸은 긴장한다.

-물 한 잔 마시고 가오?

엘리베이터가 멈추자 이번에는 노인이 팔을 잡았다. 기름종이 위, 보이지 않는 글씨 같은 여자를 향해 노인은 서있다. 3할 쯤 열린 눈으로 끔벅인다. 보이지 않는 눈 위의 흰 눈썹이 발발 떨고 있다. 어쩌자는 것일까, 저 떨림은. 여자는 그 떨림에 이끌리듯 노인을 뒤따른다.

-, 내게도 이런 손님이 생길 줄이야. 가만 있어보우, 내 냉장고에서 뭐 하나 가져오지.

노인의 동작은 실외에서와 달리 민첩하다.

-그만 가 볼게요, 할아버지.

-, 아니어. 그냥 가믄 안되어. 여기, 여기서 박카스 좀 꺼내줘요. 내가 안보여서 말야.

노인은 냉장고 문을 열어둔 채 엄살을 부린다.

-색시도 마셔어. 고마워, 우리 색시.

순간 핑 돈다. 박카스 한 병에 여자는 어지럼증과 취기가 한꺼번에 몰려든다.

-이게 말이여, 내겐 평생 친구여, 피곤할 때마다 난 이걸 마신다우. 금방 기운이 펄펄 돌아와.

노인이 미소 짓는다. 흐뭇한 저 미소라니. 문득 빼앗고 싶다. 여자는 팔에 실린 노인의 묵중한 중량감을 떠올린다. 아직 고갈되지 않은 기운에 질투가 인다. 여자는 빈 박카스 병을 식탁위에 소리 나게 놓는다. 그녀는 얄팍한 제 손을 천천히 들어 올린다. 노인의 손을 해파리처럼 감싼다. 노인이 움찔 놀란다. 작고 마른 두 손이 노인의 투박한 손을 들어올린다. 그녀의 밋밋한 가슴께로 들어올린다.

어 어, 노인이 뭔가 저항하려 한다. 그녀는 민둥한 젖가슴에 그의 손을 가져간다. 살 거죽만 남은 강퍅한 갈비뼈 언저리에 달랑 매달린 두 젖가슴이 노인의 손아귀에 들어간다. 얇은 티셔츠 위로 미세한 떨림이, 손가락질이 느껴진다. 아기의 손놀림이 이럴까. 여자는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터치에 눈을 감는다. 노인은 이제 장년이자 열아홉 미소년, 두 살 박이 아이가 된다. 저릿저릿 피가 데워진다. 피가 돈다. 빙빙 돈다.

여자는 황급히 눈을 뜨고 일어선다. 허공에서 서서히 낙하하는 노인의 두 손, 놀란 노인의 표정을 맞바라본다. 노인의 실명(失明)이 그녀를 더 대담하게 만든다. 의자 옆으로 두 손을 늘어뜨린 채 어쩔 줄 모르는 노인을 그녀는 가만 안아준다. 그녀 가슴에 푹 담긴 노인의 얼굴. 아기처럼 안기던 노인이 어 어, 애써 이성을 찾으려한다.

-그만 가볼게요.

진통제를 패치로 바꾸었다. 집이 점점 넓어져간다. 통증에서 벗어나 잠시 숨 돌릴 때마다 여자는 물건을 없앴다. 자잘한 잡동사니에서 소파와 장롱, 텔레비전과 오디오까지. 물건들은 제 몸집과 나이에 따라 크고 작은 그림자를 남기고 사라졌다. 모형 메타세콰이아 같은 진초록 율마는 라흐마니노프곡이 흐르던 자리에 덩그러니 놓인 후로 빠르게 윤기를 잃어갔다.

얼마나 더 이 집에서 머물 수 있을까. 사흘씩 유지되던 패치조차 간격이 짧아지자 방문간호사는 난감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패치를 교체하기 전에 미리 경구용 진통제를 먹어보지만 두 시간은 항상 통증에 시달려야 했다. 여기저기 옮겨 붙인 패치자국으로 붉어진 가슴팍을 만지며 여자는 서둘러 전화기를 집어 든다.

-이번엔 컴퓨터를요.

어딘가에 좀 더 유익하게 처분할 수도 있을 텐데 귀찮았다. 여자는 가장 손쉬운 쪽을 택했다. 재활용센터. 어쩌면 귀국 전 여름의 기억 탓일지 몰랐다. 햇빛에 선명히 반짝이던 문구, ‘재생자원(再生資源)’.

여자는 매일같이 땀에 젖어 깨어났다. 에어컨을 끄고 창문을 열어둔 채 가까스로 잠이 들면 그새 참새 떼들처럼 시끄러운 소리가 잠을 깨웠다. 축축한 습기와 새벽 공기에 진저리치며 창문을 닫기 위해 창가에 서면 이미 숙소 밖 담장 밑에 즐비해있던 삼륜차들. 경운기 같이 생긴 그 짐칸 모서리에는 노란 형광색으로 선명히 돋을새김 하는 단어, ‘재생자원이 있었다.

삼륜차 주인들은 짐칸을 차지하고 누워 줄곧 하늘과 손바닥만 들여다보며 시간을 보냈다. 작은 가로수아래 웃통을 벗어든 채 트럼프를 하다가도 이내 삼륜차에 올라 종이박스로 상체를 덮은 채 잠이 들었다. 최소한 굶어죽지는 않는다는 배짱이 그들을 천연덕스럽게 만든 것인지. 여자는 그들이야말로 재생자원 같았다. 그러나 해질 무렵이 되면 그들은 언제 모았는지 종이박스며 빈 물병과 음료수 캔으로 가득 찬 수레를 끌고 득의양양하게 철수했다.

어느 날 문득 여자는 그렇게 돌아갈 곳이 있는 그들이 부럽기 시작했다. 다투는 듯 높은 그들의 고음과 욕설, 웃음소리가 갑자기 부러웠다. 뙤약볕과 먼지 속에서도 태평한 그들을 여자는 식은땀을 흘리며 오래 바라봤다.

예정보다 일찍 서울로 돌아왔을 때, 그녀를 기다린 것은 새로운 삶이 아니라 암의 재발이었다. 겨우 1년만이었다. 암의 재생만이 명명백백한 사실임을 인정했을 때, 여자는 얼토당토않게 삼륜차들이 떠올랐다. 다시 떠나고 싶었을까.

어디로? 어디로 말인가? 내가 들어갈 곳은 없네. 나갈 곳도 없다네. 이러고 있을 수밖에. 멈춰 선 회색 베레모 노인, 박제된 새처럼 시선을 끌던 그가 웃는다. , 내가 백번 낫지. 난 이렇게 맘대로 걷고 있잖여.

여자는 노인을 흉내 내듯 눈을 감고 천천히 거실 안을 걸어본다. 마침 창가로 흘러든 햇빛에 눈이 눈부셨다.

나도 눈이 멀었으면. 차라리 눈이 멀고 고통 없이 더 살아남는다면. 내년 봄에도, 그 다음 봄에도 이 무사한 햇살을 느낄 수만 있다면.

여자의 눈꺼풀 위로 온갖 초록햇빛이 타임랩스처럼 펼쳐진다.

눈 먼 노스님이 낡고 닳은 겨울이불을 덮은 채 꼿꼿이 앉아있다. 감긴 두 눈과 동그랗게 패인 눈자위가 해골의 커다란 눈구멍 같다. 구들이 식은 지 오래인 바닥은 냉랭하고, 뭉툭한 초 두 개만 달랑 천수경 옆에 놓여있다.

봄이 많이 왔는가?

아직 덜 왔습니다. 쑥이 덜 자랐어요. 진달래도 안 피었구요.

그럴 것이어. 이번 겨울이 좀 추웠나.

환한 초록빛줄기들이 장방형 법당 안을 사선으로 가로지른다. 여자는 미간을 좁히며 빛을 따라간다. 잎 없는 어린 비파나무 아래 연초록 돌나물과 어린 딸기나무 잎들이 듬성듬성 돋아나있다. 사이사이에 곰보배추가 푸른빛을 내뿜고 있다,

스님, 곰보배추로 김치 담가볼까요?

무슨, 효소나 담그는데 쓰이지.

그래도 배추는 배춘데요, 사람도 그렇게 제 운명을 가지고 나는 걸까요?

여자는 눈을 가늘게 뜬다. 곰배배추로나 다시 태어날까. 여자는 창밖의 빛을 흡입하듯 창가에 바짝 붙어 선다.

-? 이거 아주 좋은 건데요?

컴퓨터 기기 앞에 선 재활용 센터 직원이 여자를 바라본다.

-이것도 가져가세요.

여자는 노트북까지 건네고 만다.

-저기, 어디 많이 아프신가본데.

벌써 세 번째 방문인 그는 아무래도 마음이 편치 않는가보다. 말도 못 붙이던 그가 오늘은 꽤 머뭇거린다. 그럼 절 한번만 안아주세요. 그녀는 그에게 안기고 싶다. 이런 것도 성욕이라면, 여자는 시시각각 성욕을 느끼는 중이었다. 말로 되어 나오지 못한 그녀의 끈끈한 눈빛이 당혹스런지 그가 땀을 훔친다.

-얼른 가져가세요. 싫다면 다른 데 연락할 테니까요.

여자는 냉랭하게 돌아서며 냉장고에서 박카스 두 병을 꺼내든다. 그에게 하나를 건넨다. 그는 더욱 난처한 표정이 된다. 두 손으로 작은 박카스 한 병을 비비고만 있다. , 그 속에 뭐라도 들었을까봐? 여자는 눈을 부릅뜨고 그를 노려본다. 그가 얼른 고갤 숙여 마개를 비튼다. 여자의 눈자위에 실핏줄이 번진다. 두 눈알이 빠질 듯 아프기 시작한다. 여자는 양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본다. 그는 오늘따라 당황해 한다. , 이제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그가 컴퓨터 본체를 현관 밖으로 내놓기도 전에 여자는 서둘러 작별인사를 한다. 그의 튼실한 어깨가 다시 그녀의 시선을 붙든다. 지금 순간 여자는 햇살 한 자락, 풀 한포기, 지상의 무엇이라도 다 붙들고만 싶다.

-제가 뭐 도와드릴 거 없나요? 몸이 많이 불편하신 거 같은데.

그가 여전히 머뭇거린다. 무엇이 그를 멈칫하게 하는가. 죽음의 그림자가 그의 옷자락을 당기고 있는가. 여자는 자신의 머리채를 확 잡아당긴다. 손에 들린 가발을 총채처럼 흔들며 소리친다. 가란 말야, 어서 가! 그가 허둥대며 구두를 꿰찬다. ! 문이 요란하게 닫힌다.

그가 돌아서온다. 그녀는 무너지듯 그의 가슴에 안긴다. 숨을 헐떡인다. 온 몸으로 돌고 도는 통증 때문에 숨쉬기가 곤란하다. 아아, 견딜 수 없어, 나를 좀 놔 줘. 그러면서도 그녀 손은 갈고리가 되어 그를 붙든다. 나를 잡아 줘, 나를 꼭 잡아 줘. 그녀는 주저앉는다. 거실 모서리의 몰딩부분이 등허리를 자극한다. 이제 한차례 통증이 지나나보다. 바닥의 딱딱한 감촉이 느껴진다. 눈을 뜬다. 아무도 없다. 노트북마저 사라진 텅 빈 집. 터엉. 터엉. 집이 우는 소리가 들린다.

현관에는 남자가 급히 나가면서 흩뜨려놓았던 흰 운동화가 제각각 흩어져있다. 다 버리고 남은 운동화 한 켤레. 여자는 엉금엉금 기어가 바르게 정돈한다.

네 들어갈게요.

마침내 방문간호사에게 완화병동 입소를 약속했다. 병실만 나면 모든 것은 순식간에 진행될 것이다.

여자는 새삼스럽게 실내를 휘둘러본다. 책장은 흔적을 남기고 빠져나갔다. 장식장과 텔레비전이 놓인 벽면도 마찬가지다. 겨울옷가지들과 히터가 빠져나간 옷장, 접시와 그릇들이 비어버린 수납장, 액자가 사라진 벽의 못 자국들.

물건들도 저렇게 제 흔적을 남기는데. 여자는 윤기 잃은 율마 화분을 잠시 노려본다. 한그루만으로도 푸른 원시림을 연상시켰던 그것은 하루가 다르게 갈색으로 변했다. 여자는 손으로 쓸어본다. 까칠한 줄기에서 아직 향기가 난다. 그녀는 더 남아있으려는 물건들이 거추장스럽다. 포획물을 찾듯 허기진 여자의 눈이 천장과 배란다, 사면 벽과 거실을 가로질러 부엌으로 향한다.

이제 여자는 검정 양장본 한 권을 손에 들고 노려본다. 책장을 버리면서 빼놓았던 유일한 책, 요절시인 하이즈에 관한 것이다.

내일부터는 행복해야지

말 먹이고 장작패고 세계를 여행하리

양식과 채소에도 관심을 가져야겠지

내게는 집이 한 채 있어, 너른 바다 마주하고

봄이 오면 꽃이 피리……

내일부터는, 여자는 조용히 속삭인다. 내일부터는, 행복해야지. 속세에서 행복하기를 바랐던 하이즈는 이 시를 쓴지 두 달 만에 철길 위에 목을 놓았다. 여자는 시인보다 훨씬 오래 살았다. 여자는 시인보다 이백 배, 이천 배 일찍 잊힐 것이다.

봄이 오면 꽃이 피리. 여자는 내년 봄을 생각해본다. 자신이 죽고 없는 내년 봄. 그녀가 없어도 꽃은 필 것이다. 내년에 필 봄꽃을 미리 보아둬야 한다는 듯 여자는 오늘도 어김없이 벙거지를 쓰고 집을 나선다.

시야가 자꾸만 희뿌옇고 어지럽다. 노인 또한 예외없이 공터에서 홀로 걷고 있다. 여자는 자동인형처럼 그에게 다가간다. 손목에 걸린 소형 라디오를 머그잔으로 여길 만큼 시력을 잃었다니, 어쩌면 그에게서 느낀 생기도 착각이었을까.

-햇살이 눈부셔요, 할아버지.

사월의 쨍쨍한 햇빛 속에 화단가 철쭉이 붉게 녹아내리고 있다.

-, .

그녀를 알아챈 노인은 이제, ,어 소리밖에 할 줄 모른다. 지팡이를 짚은 그의 손가락이 움직거린다. 그녀도 노인의 손가락 감촉을 빠르게 재생한다.

노인이 멈칫하는 새에 그녀는 흰 빨랫줄을 걷어 감는다. 감을 때마다 햇빛이 피시식 사그라지며 잦아든다. 기세등등한 흰 빛을 잃어버린 빨랫줄은 이제 아무 것도 아니다, ……아무 것도 아니다. 라이터 한 방이면 활활 타오를 나일론 끈이다.

-할아버지, 줄을 감았어요.

-? .

-가시게요.

감은 줄을 노인 손에 쥐어주고 팔을 가볍게 잡는다.

-, ? 이쪽이 아니여. 방향이 틀렸어.

침묵을 끊고 노인이 항의하듯 멈춰 선다. 고집 센 영감탱이. 그녀는 가볍게 짜증이 이는 걸 참는다. 침착할 필요가 있다.

-안보고도 잘 아시네요.

노인이 긴장을 푸는 기색이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지.

-아직 시간이 많은데, 저희 집에서 차나 한 잔 드시고 가세요.

-, 그러자고.

여자는 노인의 옆구리를 바짝 낀다. 그녀가 이끄는 대로 노인이 느릿느릿 움직여 준다. 그녀를 따라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오며 웅얼거린다. 이럴 필요 없는데, , . 엘리베이터 상자는 금방 열린다.

-301호예요.

여자는 필요 없는 말을 덧붙인다. 노인이 아, 하며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노인을 식탁 의자에 앉힌 다음 여자는 부엌 창가에 선다. 노인의 집 출구가 정면으로 보인다. 아무도 없다. 화단에는 철쭉만 만개해 있다. 붉고 흰 꽃무더기 위로 햇살이 흐른다. 꽃잎과 푸른 나뭇잎들을 머금은 햇빛이 형형색색으로 허공에서 산란한다. 석상처럼 굳어있던 노인. 마른 나뭇가지 같은 팔 하나가 허공에 떠 있던 노인. 여섯시 오 분 전 시계바늘로 멈춰 선 회색베레모의 노인. 그가 지금 순간이동이라도 한 듯 그녀 앞에 앉아있다.

여자는 부엌창가의 블라인드를 내린다. 실내가 일시에 그늘진 듯 서늘해진다. 눈꺼풀 위로 명암차이를 감지하는지 노인의 눈이 바쁘게 껌벅인다.

-박카스 드릴까요?

노인이 뭐라 대답하기 전에 여자는 박카스 뚜껑을 연다. 노인의 팔목에 감겨있는 라디오 줄을 마저 풀어 식탁위에 놓은 다음 박카스를 노인 손에 쥐어 준다.

-하하.

낯익은 음료가 노인을 웃게 만든다. 불안이 가신 저 천진한 미소. 좋은 일이다. 여자는 노인을 따라 박카스를 단숨에 들이킨다. 뱃속이 홧홧 뜨거워진다. 준비한 과일들이 생각났지만 더 이상 냉장고문을 열고 싶지 않다.

여자는 호흡을 가다듬는다. 손은 따뜻할까? 마디마디 뼈마디는 온전한 것일까? 현기증을 가라앉힌 여자는 무릎걸음으로 노인에게 다가간다.

노인의 손을 잡는다. 손이 따뜻하다. 그의 손이 따뜻하다는 것은 여자에게 용기를 준다. 노인의 손을 젖가슴 위로 가져간다. 노인은 놀라지 않는다. 지켜보자는 듯 멈춰있는 노인의 손. 철사로 뼈대를 만들어 놓은 의수 같다. 여자는 노인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비틀어 그녀 가슴을 움켜쥐게 만든다. 그의 손가락 마디마디에 피가 돈다.

장롱과 화장대가 빠져나간 방에는 침대만 동그마니 한 쪽 벽에 붙어 있다. 숱한 밤, 고통으로 삐걱댄 침대 위로 눈 먼 노인을 불러내는 일이라니. 여자는 부지런히 자신을 설득한다. 상식이란 살고자 하는 이들에게나 필요한 것. 여자는 다시 한 번 깊이 숨을 들이마신다. 심장이 쿵쾅대는 소리가 파도소리처럼 낯설다.

여자는 눈에 질끈 힘을 준다. 사타구니 사이로 조그맣게 오그라든, 호두과자 같이 생긴 고환. 듬성듬성한 흰 거웃과 충혈된 성기. 이를 앙다문 여자는 노인의 물건을 두 손으로 꼭 쥔다. 물컹하다. 놀란 그녀는 하마터면 손을 놓을 뻔 한다.

노인의 삭은 이빨과 여자의 부실한 이빨이 부딪힌다. 날렵한 혀가 입안을 휘젓는다. 흡입력에 놀란 여자가 노인을 밀친다. 빠져나온 혀가 여자의 목덜미를 지나간다. 쇄골을 지나 가슴에 이르자 여자는 비로소 혐오감을 통제한다. 노인의 손아귀에 들린 젖 거죽이 있는 힘을 다해 부푼다. 앙상한 가슴뼈는 가슴뼈끼리, 팔 다리 네 쌍의 마른 가지는 가지끼리 열을 내기 시작한다. 부싯돌처럼 뜨거워진다.

한 숨의 불길, 한 톨의 피가 그녀를 촉박하게 만든다. 정신은 또렷해지고 고통은 더욱 극심해져간다. 고통은 모든 것을 점령했다. 마지막 남은 한 숨마저 빼앗기기 전에, 여자는 제 손으로 육신을 갈가리 찢어 산화하고 싶었다. 그렇게 사라지고 싶었다. 여자는 눈을 꾹 감는다.

스님이 걸어간다. 허정허정 걷는 그를 따라 그녀도 소리없이 걸어간다. 스님이 걷는다. 느릿느릿 걷는 그를 따라 그녀도 걷는다. 숲이 깊어진다. 인적 없는 깊은 숲 속, 사위가 저물어간다. 덤불 우거진 수풀 속으로 스님이 기어간다. 그녀도 따라 기어간다. 스님이 여윈 어깨를 들썩이며 땅을 판다. 그녀도 땅을 판다. 두 손 가득 피가 나게 땅을 판다. 낙엽 몇 장 그러쥐고 스님이 홀로 눕는다. 그러쥔 몇 장의 낙엽으로 얼굴을 덮는다. 밤이슬이 내리고, 어디선가 승냥이가 울부짖는다. 이마가 넓고 주둥이가 뾰족한 붉은 색 승냥이가 반짝, 나타난다. 연이어 회갈색, 황갈색, 홍갈색 승냥이 떼들이 스님을 파헤친다. 여자는 그만 그 자리에서 흐르르 물이 되어버린다.

가슴속에서 핵이 폭발하는 파동이 인다. 여자의 두 눈에 광채가 난다, 꺼지기 전 마지막 불꽃처럼 일렁인다. 여자가 노인 위로 올라탄다. 노인의 입술을 열고 여자는 마지막 폭발음을 토해 넣는다. 여자는 이제 노인의 검은 성기를 움켜쥔다. 제 몸에 맞춰보려고 애를 쓴다. 노인이 그녀를 안아들고 뒤집기를 한다. 그녀의 온 존재가 다시 한 번 저항한다. 수치와 두려움, 환희와 안도가 북받치는 감정의 혼재.

아으으으. 삼륜차들이 질주하기 시작한다. 흰 목련꽃잎이 화르르 쏟아져 내린다. 번쩍거리는 금빛 수를 놓은 삼륜차들이 흰 꽃잎 속에서 끝없이 행진한다.

-주책맞게 어디를 함부로 다녀어, 가만있지 않구설랑.

-, 박카스 하나.

노인의 목소리가 필요이상 크다. 블라인드가 걷힌 부엌 쪽창으로 무사한 햇빛과 함께 들어오는 창 밖 소음들. 적요한 시간 속에 살아있는 것들의 소리, 소리들.

노인이 할멈과 함께 나란히 앞 동 입구로 사라져간다. 검은 입. 두 노인을 삼킨 검은 입을 바라보며 여자는 진통제를 입에 털어 넣는다. 창을 닫는다. 블라인드를 다시 내리고 천천히 침대로 돌아온다.

이대로 잠이 들면. 내일은 다시 오지 않았으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장롱얼룩이 돌아가신 부모님 형상처럼 다가든다. 여자는 눈을 감는다. 길이 열린다. 좁다란 길 위에 회색베레모 노인이 서있다. 노인이 발가락을 꼼지락거리자 파드닥, 한 마리 새가 솟구쳐 날아간다. 어느새 노인 대신 삼륜차 한 대가 그녀 앞에 서 있다. 눈부시게 반짝이는 노란 글귀에 홀려 다시 보니 이번엔 황금마차다.

여자는 눈을 번쩍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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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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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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