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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고양이는 따뜻했다 / 신희우

 


1.

자한은 광장이 보이는 곳에 방을 하나 얻었다. 광장은 마을 한가운데 있었다. 광장 곁에 류의 카페-레스토랑 플로리아가 있고 그 곁으로 몇몇 호텔과 카페, 여행자 정보센터와 환전소, 토산품점, 마트 등이 빙 둘러서 있었다. 자한의 방 발코니에서 플로리아가 바로 건너다보였다. 돌로 지어진 플로리아의 외벽은 온통 송이가 탐스럽고 색이 선명한 다채로운 꽃들로 뒤덮여 있었다. 한여름 꽃에 뒤덮인 플로리아는 여행자들의 발길을 사로잡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플로리아는 흰색 깃발을 내걸어 영업 중이라는 것을 알렸다. 오늘은 깃발이 꽂혀 있지 않았다. 손님을 받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왜 하필 흰색 깃발일까. 다른 수많은 색의 깃발들 중 왜 하필 흰색인지 자한은 문득 궁금해졌다. 류를 만난다면 물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곳에 도착한 지 일주일째였다. 하지만 자한은 류와 다른 친구들을 만날 것인지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자한은 광장을 가로질렀다. 스포츠 용품점이 보이는 교차로에서 왼쪽으로 꺾었다. 평평한 돌이 깔린 길 양옆으로 아이스크림 가게와 패스트푸드점, 은행과 우체국, 서점과 약국, 옷가게들이 줄지어 선 상점가였다. 여행자들이 많이 다니는 거리였다. 상점가가 끝나는 부근까지 걸어가면 갈림길이었다. 갈림길의 왼쪽은 잡목 숲 사이로 완만한 오르막길이 시작되는 트레킹 코스였다.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그 길로 들어섰다. 그녀는 갈림길 앞에서 망설였다. 결국 어제와 마찬가지로 오른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언덕길을 올랐다. 언덕을 오르다 완만하게 경사진 길을 따라 내려갔다. 호젓한 주택가가 나타났다. 주택가의 거리는 조용했다. 마치 사람이 살지 않는 것 같았다. 주택가를 빠져나가면 차도였다. 자한은 차도를 따라 걸었다.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는 거의 없었다. 보행자도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마침내 자한은 마을 묘지에 도착했다. 죽은 지 오래된 자들의 묘지가 산책의 목적지는 아니었다. 며칠 산책을 하는 동안 우연히 그곳을 알게 되었을 뿐이었다. 한 무리의 관광객들이 몰려 있었다. 묘지도 관광 코스의 일부였다. 한 관광객이 대형 분묘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었다. 묘석 위에 놓인 국화는 이미 시들기 시작했다. 관광 가이드는 냉소적이고 명쾌한 목소리로 묘비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었다. 자한은 그곳에 묻힌 이들 대부분이 한때 유명한 알피니스트였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자한이 귀도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산이 왜 그렇게 좋아. 모든 살아 있는 존재는 자기 자신이 되고자 한다. 올챙이는 개구리가, 애벌레는 나비가, 상처받은 사람이 완전한 인간이 되고자 하는 것처럼 나는 산에서 그 길을 찾고 있는 것뿐이다. 귀도는 그렇게 대답했다. 귀도의 말을 들었을 때, 자한은 두려웠다. 자한은 귀도가 찾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쉽게 헤아릴 수 없었다. 하지만 귀도가 가고자 하는 그 길에 언제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귀도는 틀림없이 자기 본연의 모습을 찾아낼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끊임없이 산에 오를 것이었다. 그리고 훗날 언젠가는 자한이 결코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떠나버릴 것 같았다. 그 근거 없는 확신 때문에 자한은 불안했다. 불안은 점점 확장하고 확장할 뿐 결코 확장을 멈추지 않았다.

드높은 하늘에 바람과 새와 패러글라이더가 뒤섞여 떠돌았다. 여행자들은 산을 오르고 암벽을 타고 기구에 몸을 묶고 새처럼 무겁게 하늘을 날았다. 그들은 감탄스러울 정도로 삶과 밀착된 사람들이었다. 단순하고 직접적이고 복잡하지 않은 스냅 사진 속의 인물들처럼 묘지에서조차 환한 웃음을 지을 줄 알았다.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기에는 그들 속에 너무나 많은 즐거움이 가득했다. 오래전에 죽어버린 이들의 묘지 위에도 경이로운 삶의 풍경은 존재했다.

귀도는 일기에 썼다. 날고 싶다. 귀도는 그 문장에 자신의 바람을 오롯이 담았을 것이다. 귀도의 일기는 미호와 함께했던 순간들에 대한 비밀스러운 기록이었고 산행 일지였다. 자한은 결혼한 미호를 사랑했던 귀도의 의식과 도덕과 양심의 무게에 대하여 생각했다. 또한 귀도가 동생인 자한을 위해 짊어졌던 책임과 의무의 무게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귀도는 억제의 틀을 부수고 이성의 세계에서 탈출하고 싶었을 것이다. 진정으로 새이고 바람이고 싶었을 것이다. 저 하늘의 새처럼 바람처럼 경계 없이 자유롭고 싶었을 것이다. 이 뒤늦은 깨달음은 자한을 오래도록 괴롭혔고 한없이 아프게 했다. 그리고 아직도 여전히 가슴 아팠다.

관광객들은 오래 머물지 않았다. 그들이 빠져나간 묘지는 한층 적막해졌다. 해가 기울고 있었다. 수많은 나무와 풀들과 무덤과 무덤 사이사이로 햇살은 점점 더 얇고 가볍게 마치 비늘처럼 스며들었다. 지속적이고 감지할 수 없는 사멸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 것 같았다.

2

류는 늦게까지 잠을 잤다. 철호와 지욱과 태오는 이미 나가고 없었다. 류는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책을 손에 들었다. 하지만 책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류는 플로리아의 창을 통해 광장을 내다보았다. 한낮의 타는 듯 뜨거운 햇살이 사방으로 낭자했다. 선글라스를 낀 여행자들이 느긋한 걸음으로 광장을 오갔다. 여행자들은 이 마을을 기점으로 동서남북 어느 쪽으로 가든 A산군의 경관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서부 유럽의 한 작은 마을인 이곳의 원주민은 고작 1만 명에 불과하다. 하지만 7, 8월에는 거의 10만 명에 가까운 여행자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이곳은 지금 성수기의 관광지답게 북적였다.

수많은 여행자들 틈에서 광장을 가로지르는 한 동양 여자가 눈에 띄었다. 여자는 백팩을 메지도, 아웃도어를 챙겨 입지도, 트레킹화를 신지도 않았다. 그저 어깨에 작은 크로스백 하나를 걸치고 스키니진과 흰색 티셔츠를 입고 운동화를 신었다. 여자는 어딘가 모르게 류의 눈길을 잡아끌었다. 작고 마른 여자의 체구가 낯설지 않았다. 저 여자는 자한일지도 모른다. 막연한 짐작이 확신처럼 류를 사로잡았다. 하지만 선글라스를 낀 여자의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이윽고 여자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류는 책을 다시 집어들었다. 귀도의 마지막 선물이 되어버린 책이었다. 류는 그 책을 최근에서야 읽기 시작했다. 죽음이 아무것도 아니라면 삶 또한 아무런 가치가 없다. 밑줄이 그어진 문장. 밑줄 긋는 습관은 자한의 것이었다. 귀도는 메모장에 바로 옮겨 적는 타입이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 책은 자한의 것이었다. 귀도와 자한. 세상에 단 둘뿐이었던 가족. 서로에게 말없이 환히 웃을 줄 알았던 남매. 그들과 가까이 지내던 한때, 류는 남매가 공유하는 소소한 일상과 친밀함이 부러웠다. 류는 자기가 어딘가 다른 가족을 가졌더라면 더 행복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었다.

류와 진은 아주 어린아이 때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영어, 바이올린과 피아노, 일 년에 한 번 있는 학예회 준비를 위해 성악 개인 레슨도 받았다. 각종 음악과 미술 경연 대회에도 참가했다. 진은 무엇을 배우든 스펀지처럼 잘 받아들였다. 각종 대회에서 상도 받았다. 진은 장래가 촉망되는 아이였고 부모의 자랑거리였다. 반면에 류는 그것이 무엇이었든 마음먹었던 만큼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다. 어떤 대회에서도 입선조차 한 적이 없었다. 학업 성적도 좋지 않았다. 수도 없이 실망을 거듭한 후 류는 어떤 성과를 얻는 일에 아예 무관심해졌다. 류는 진의 그렇고 그런 쌍둥이 동생으로 불리는 것에 익숙해졌다. 하지만 극복하지 못한 열등감 때문에 까다롭고 산만하고 소심해졌다.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을 삐딱하게 받아들이는 못된 버릇까지 몸에 뱄다.

류의 부모는 스스로를 원칙과 믿음을 가진 합리적인 사람이라고 믿었다. 진이 산악 동아리에 가입했을 때 부모는 그저 스펙 쌓기의 일종으로 여겼다. 류는 진이 오르는 산에 관심 없었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빨리 진의 변화를 알아챌 수 있었다. 진은 열정적으로 몰입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태도였다. 진은 주말마다 산으로 갔다. 자일을 묶고 암벽을 탔다. 진은 활기차졌다. 표정도 밝아졌다. 전에 없이 말도 많아졌다. 하지만 진의 성적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수능이 코앞이었다. 산은 언제라도 오를 수 있다. 공부는 때가 있다. 부모는 진의 동아리 활동을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다고 했다. 진은 부모의 그런 생각이 합리적이지 않다고, 수긍할 수 없다고, 부당하다고 항변했다. 소용없는 짓이었다. 부모는 자신들의 믿음과 달리 더 완고하고 보수적이었다. 진은 산에 오를 수 없었다. 다시 말수가 적어졌다. 공부만 했다. 성적이 올랐다. 마침내 수능 모의고사에서 예전처럼 전교 1등을 차지했다.

부모는 기뻐했다. 류는 그 나름의 방식으로 진을 치켜세웠다. 독한 새끼, 하이파이브. 둘은 오랜만에 유쾌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날 처음 류는 진에게 물었다. 만일 아무도 내게 묻지 않는다면 나는 내가 산에 왜 가고 싶어 하는지 알고 있다고 믿어. 하지만 너처럼 질문하는 사람에게 그 이유를 설명하기란 쉽지 않아. 그런 질문을 받는 순간 나조차도 그 이유를 알 수 없게 되어버리거든. 그리고 진은 자신이 남의 눈에 비친 그대로의 사람이라는 사실과 거기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는 것이 견딜 수 없다고 덧붙였다. 열여덟은 무엇이든지 선택할 수 있는 나이였다. 진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부모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친척에게조차 사고사였다고 둘러댔다. 이웃이 알게 되는 것을 꺼렸다. 먼 곳으로 이사를 했다. 류의 부모는 자책감과 상실감을 체면 따위와 맞바꾸어 버렸다. 류는 진실도 견딜 수 있을 만큼만 선택하는 부모를 증오했다. 류는 앞으로 이전과 같은 마음으로 살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류는 대학교에 입학했다. 집과 부모를 떠났다.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대체로 호기심을 자극하는 사물의 사진을 많이 찍었고 곁에 있는 친구들의 얼굴을 찍었다. 사진을 찍으러 다니는 동안 몇몇 친구들이 떠났고 새 친구들을 사귀었다. 그 시절 귀도와 자한, 철호와 지욱, 태오를 만났다. 그들은 서로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였다. 특히 귀도와 철호와 지욱은 산과 바위와 심장과 열정, 그리고 약간의 행복만으로도 완전히 만족하는 삶을 살고 있는 듯 보였다. 누군가 곁에 아무도 없는 사람은 유령이라도 만들어서 데리고 다녀야 한다고 했는데 그들은 분명 류에게 유령보다 가까웠다.

3

한 아기가 있다. 남자 아기다. 뼈대가 튼튼하다. 살이 오른 팔다리가 엮인 밧줄처럼 울퉁불퉁하다. 머리와 몸이 비례하고, 아기의 얼굴은 섬뜩할 정도로 무표정하다. 아기가 벌떡 일어나 뒤뚱뒤뚱 자한에게 다가온다. 갑자기 무섬증이 들기 시작한다. 그녀가 뒷걸음친다. 그래 봐야 소용없다. 아기는 어느새 그녀 앞에 섰다. 그녀가 뒤돌아서 뛰기 시작한다. 하지만 제자리다. 뭔가 잘못되었다.

공포심이 들기 시작한다. 시간도 공간도 가늠할 수 없다. 아기는 보채는 기색도 없다. 그저 그녀에게 집요하게 달라붙는다. 도망치고 싶어도 마치 뿌리와 연결되어 있는 나무둥치처럼 옴짝할 수 없다. 공포심이 점점 그녀를 압박한다. 결코 아기를 떼어 놓을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그녀는 아기를 안으려 안간힘을 쓴다. 아기는 바위처럼 무겁다. 아기는 여전히 표정이 없고 그녀의 안색이 점점 창백해진다. 간신히 아기를 품에 안았을 때, 아기의 목이 가붓이 뒤로 꺾인다. 마치 나뭇가지 부러지듯 툭.

산만하고 무섭고 기이한 꿈이었다. 꿈에서 깰 때마다 모든 경험, 모든 사건을 지우고 마는 끔찍스럽게 조용한 어둠 속에서 사람들이 어째서 외로움 때문에 죽는지 상상할 수 있었다. 아무리 면밀하게 들여다보아도 꿈은 겉으로 드러내기 불가능한 것들, 그 본질을 알 수 없는 것들로 가득했다. 흩어지고 찾아드는 꿈의 파편들 중 어떤 것은 의미가 있고 어떤 것은 의미가 없다. 꿈의 종말도 끝내 알 수 없다. 시간 또한 언제나 불가해하다. 꿈은 시점도 없고 시작도 없으며 끝도 없는 순간과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한은 깨어 있을 때보다 꿈속에서 더 치열하게 산다고 느꼈다.

자한이 산책에서 돌아와 잠깐 잠이 든 사이 밖은 벌써 어두워졌다. 자한은 꿈의 여운을 떨쳐내지 못한 채 창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안과 밖의 온도 차로 김이 서린 창이 희뿌옇다. 바깥 풍경과 한데 뒤섞이어 어슴푸레 창에 되비친 자신의 모습을 망연히 응시했다. 마치 꿈과 현실의 어느 경계쯤에 자신의 실체가 머물러 있는 것 같았다. 고립감이 엄습했다.

예전에 비해 더 빨리 찾아오고 더 뜨겁고 더 늦게 끝날 것 같은 열기에 숨이 턱턱 막히던 작년 여름, 그날 밤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자한은 자고 있지 않았다. 자한은 낮에 전통시장을 구경했다. 냉면 그릇을 두 개 샀고 귀도의 여름 홑이불도 새로 구입했다. 집에 오는 길에 배추 몇 포기를 샀다. 저녁 내내 배추를 손질하고 소금에 절였다. 귀도는 갓 담근 김치를 좋아하지 않았다. 담근 지 일주일쯤 지난 김치를 가장 좋아했다. 귀도는 일주일 후에 집으로 돌아올 예정이었다. 귀도는 류의 플로리아에 머물고 있었다. 철호와 지욱과 함께였다. 귀도는 자기 몸의 일부와 같은 일기장과 등반용품을 빈틈없이 확인하고 짐을 쌌다. 늘 그러했듯 자한은 비행기 안에서 읽을 만한 책을 골라 귀도에게 주었다. 류가 좋아하는 안동 간고등어와 황기도 따로 챙겨 주었다. 고등어는 결국 상해서 먹지 못했다. 황기를 넣고 삼계탕을 끓여 먹었다. 곧 자신이 오르고자 했던 바위산을 등반할 예정이라고 며칠 전 통화에서 귀도는 말했다. 귀도의 음성은 세상을 다 가진 듯 생기가 넘쳤다. 자한은 함께 가자고 했을 때 따라나서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자한은 시원한 캔맥주를 마시며 텔레비전을 보았다. 오랜만의 외출로 몹시 피로했지만 더위 때문에 잠들기가 어려웠다.

첫 번째 현관 벨이 울렸을 때 자한은 어리둥절했다. 모니터에 비친 얼굴은 태오였다. 자한은 가만히 모니터를 지켜보았다. 태오는 귀도가 이곳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십여 일 전 태오는 자한과 함께 귀도 일행을 공항까지 배웅했었다. 태오가 할 일 없이 자한을 찾아올 리 없었다. 가까운 사이였으나 귀도가 없을 때 불쑥 찾아오는 경우는 없었다. 몇 분 후 다시 두 번째 벨이 울렸다. 자한의 뇌리에 불안이 스쳤다. 머릿속에 종잡을 수 없는 불길한 생각들이 들끓기 시작했다. 몹시 혼란스러웠다. 태오는 조급해 보였다. 자한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자한이 주저하는 동안 세 번째 벨이 울렸다. 모니터를 응시하는 태오의 눈. 그 눈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는 듯했다.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듣고 싶지 않았다. 원치 않는 말을 듣게 되리라는 두려움. 그 두려움으로부터 달아나고 싶었다. 끝내 문을 열지 않으려 했다. 태오는 끈기있게 기다렸다. 개새끼. 뜻밖에도 자한의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누구에게랄 것도 없었다. 자한은 문을 열었다. 그리고 들었다. 자한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4

해질 무렵이면 류는 이 마을이, 플로리아가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잊힌 장소처럼 여겨졌다. 심지어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모든 것에서 멀리 떨어져 이 세상 끝에, 허무의 한복판에 서 있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벌써 오 년째 이곳에 살고 있는데도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어쩌다 이곳까지 오게 되었을까. 장소 하나 바꾼다고 해서 사실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것들을 꿈을 잊듯 잊을 수는 없었다.

일 년 전 오늘 전화는 류가 했다. 철호와 지욱은 그럴 만한 정신이 아니었다. 한국 시각으로 오후 일곱 시쯤이었다. 전화를 받은 태오는 주로 듣기만 했다. 그 이후 두세 번의 통화가 더 이루어졌다. 류는 태오에게 자한과 함께 이곳으로 와달라고 부탁했다. 훗날 태오는 말했다. 그날 그에게 맡겨진, 어쩌면 알지도 못하고 상상할 수조차 없는 절망을 자한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고. 그래서 시간이 조금 더 걸렸다고.

비행기를 환승하며 열두 시간 만에 J공항에 도착해 류의 자동차로 플로리아에 다다를 때까지 자한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비는 주위를 집어삼킬 듯 쏟아졌다. 차고 자욱한 습기가 플로리아를 에워싸고 있었다. 철호와 지욱은 몹시 피로해 보였고 안공이 푹 꺼진 눈은 더욱 침울하고 강렬해 보였다. 까칠해진 얼굴의 윤곽이 더 두드러졌다. 철호는 사고 경위를 설명하는 중이었다. 귀도와 함께 등반했던 철호와 지욱 중 돌아온 자 누군가는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철호는 목이 잠겨 말을 멈추었다. 오래 울어 불어터진 눈시울이 다시 붉어졌다. 더 이상 말을 잇기 어려워 보였다.

자한은 미동도 없었다. 지도만 내려다보았다. 등반 코스가 상세히 기술된 지도였다. 자한은 철호의 설명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 귀도가 돌아오지 못하리라는 사실은 분명하고 뚜렷했다. 그 자명한 사실 앞에서 철호의 말은 하나 마나 한 소리였다. 그 뻔한 소리를 해야만 하는 철호와 묻고 싶은 말을 몸 밖으로 감히 꺼내지 못하는 자한을 지켜보는 류도 참담했다. 류는 그들 모두가 자한을 죽이고 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절망에 꺾이고 두려움에 빠진 자한의 표정. 그 표정 뒤에 숨겨놓은 감정의 중심에는 일종의 분노가, 어디로 쏟아내야 할지 알 수 없는 분노가 확실히 존재했다. 논리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형체가 잡히지 않는 감정들이 소용돌이칠 것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은 분노와 증오를 불러일으킨다. 그 분노를 지닌 채 살아갈 수 있다는 것, 그것은 분명 놀라운 일이다.

자한은 끝 모를 상실의 심연에 놓여 있었다.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고, 그 어떤 말로도 위로할 수 없는 유일무이의 슬픔. 그 차고 텅 빈, 옴짝달싹할 수 없는 심연을 공유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 심연을 이해한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이다. 행복과 불행은 집단적일 수 없고 너무나 개별적이다. 그래서 사람은 온전히 혼자일 수밖에 없다. 마치 고아처럼 혹은 참선하는 사제처럼 그 심연을 홀로 견뎌야 한다. 자한은 그 심연에 재갈을 물리듯, 세상으로부터 마음을 거두어들이듯 잠을 잤다. 눈과 입을 닫아버린 자한의 얼굴은 어둠 그 자체였다. 밖은 온통 천둥소리와 소란한 빗소리로 가득했다. 빗소리가 외부 세계와 플로리아를 완전히 갈라놓고 있었다. 류는 그토록 기진한 하루를 보내고도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귀도와 진의 얼굴이 젖은 그물 같은 빗속에 서성이는 것 같았다. 두려움도 슬픔도 공포도 아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법이다.

5

자한은 귀도의 죽음을 보지 못했다. 보지 못했으니 믿을 수 없었다. 믿을 수 없으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믿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은 채 자한은 귀도 몸의 일부와 같았던 물건들과 남았다. 자한은 종종 라면을 끓여 새로 산 냉면 그릇에 담아 먹었다. 며칠째 소금에 절어 숨이 다 죽어버린 배추로 김치를 담갔다. 짠 김치를 안주 삼아 술을 마셨다. 술에 취하면 새로 장만한 홑이불을 덮고 시도 때도 없이 잠을 잤다. 꿈속에서 자주 곁에 있었으면 하는 죽은 사람들을 만났다. 술에 취한 어떤 밤, 그런 날 꿈속에선 그들의 얼굴도 전혀 모르는 얼굴들처럼 달라져 있었다.

잠은 끝도 없이 쏟아졌지만 수많은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는 날도 많았다. 그런 날, 자한은 공항에 나가서 어디론가 떠나거나 돌아오는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귀도가 있는 곳, 그를 두고 온 곳으로 가는 항공 시간표를 몽땅 외울 수 있었다. 공항을 나오면 발길 닿는 대로 아무 데나 걷기 시작했다. 낯선 거리를 이리저리 쏘다니고 또 쏘다녔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엇갈린 표정의 남자와 여자들, 학교와 학원으로 돌고 도는 쾌활한 학생들, 영화를 보거나 식사를 마치고 나온 온화하고 꿈꾸는 듯한 표정의 연인들, 방금 누군가와 헤어져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홀로 걷는 사람들과 부대끼며 부산하고 시끌벅적한 거리에 서 있으면 마치 머리가 아니라 피부가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죽어가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낯선 곳을 아주 먼 곳까지 걸어도 결국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자한은 집에 틀어박혔다. 간간이 철호와 지욱, 류와 태오를 떠올렸다. 그들의 연락은 받지 않았다. 다른 누구의 연락도 받지 않았다. 그 누구에게도 연락하지 않았다. 누군가 함부로 던지는 위로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의 이해를 얻고 싶지도 않았다. 서투른 위로와 이해의 말들이 자한의 심장에 총을 겨누는 것 같았다. 시간이 약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자한은 그 말을 믿지 않는다. 시간이 고통을 치유하지 못한다는 것쯤은 알 만한 나이였다. 자한에게 필요한 것은 때때로 어두운 길모퉁이에서 마주치는 고양이처럼 단순하고 초연한 짐승의 두 눈이었다.

하루가 가고 한 주가 지나고 달이 바뀌고 계절이 변했다. 그리고 지난여름과 같지 않은 여름, 그게 이 여름이었다. 창문을 열었다. 밤 공기가 하루 사이에 더 차가워졌다. 일주일 사이에 기온이 완전히 변해 버렸다. 서늘한 공기가 가슴 깊숙이 스며들었다. 어찌나 서늘한지 마치 나신이 공기 중에 떠 있는 느낌이었다. 모든 감각이 날을 세운 듯 예민해졌다.

자한은 불 켜진 플로리아의 창가를 왔다 갔다 하는 그림자들을 보았다. 류의 플로리아에 태오와 철호와 지욱 일행이 머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귀도의 오랜 친구였고 자한의 친구이기도 했던 그들. 만약 그들을 만난다면 결국 덧없는 친밀함과 끝없이 존재하는 거리감을 경험하게 될 것이었다. 줄곧 떨어지는 피부의 비듬 같은 기억들이 서로에게 상처만 줄 터였다. 류가 아직도 감춰둔 비밀이 많은 얼굴로 사진을 찍는지, 어째서 흰색 깃발에 집착하는지, 태오가 여전히 담배를 많이 피우는지, 철호와 지욱이 변함없이 자일파티로 등반을 계속하는지, 자한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자한 자신이 그러하듯 그들이 지난여름과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자한은 끝내 그들을 만나지 않을 것이었다.

광장 너머를 아무리 뚫어지게 바라보아도 대단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달빛과 어둠이 띠가 되고 기둥이 되어 마을과 산과 산 사이를 채우고 연결해 더 가깝고 생생하게 만들어 놓았다. 바위로 철갑을 두른 듯 육중한 산맥이 위압적이었다. 산맥의 무겁고 틈새 하나 없는 거대한 침묵은 역시 견디기 어려웠다. 달빛과 어둠이 뒤섞이어 침묵은 점점 더 조밀해졌다. 산의 존재감 또한 철옹성처럼 더 견고해졌다. 저 산은 끊임없이 자한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꿈에서조차 마치 자석처럼, 이 세상에 존재하는 자극처럼 그녀를 끌어당겼다. 빙하와 얼음과 만년설로 뒤덮인 저 산 어딘가에 귀도가 있었다. 귀도는 마치 자신의 삶을 허구로, 수수께끼를 닮은 허구로 만들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그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는 곳으로 사라져 버렸다.

자한은 여느 날처럼 술을 찾았다. 단 몇 방울의 술만으로도 신경이 좀 느슨해지는 것 같았다. 술을 마시면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어쩌다 흘려들은 이야기처럼 잊을 수 있었다. 일상이 아무렇게나 흘러가도 상관없었다. 자신은 어디로든 갈 수 있고, 내키지 않으면 어떤 곳으로도 가지 않을 수 있다. 어떤 곳에 머무르든 다를 게 없다. 아는 사람도, 뭔가를 바라는 사람도 없는 곳에서 미래가 없이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이제는 곁에 없는 이들을 그만 놓아버리고 더 이상 미안해할 필요 없이, 그 누구에 대한 원망도 없이 있는 듯 없는 듯 살아도 괜찮다고 치부할 수 있었다. 술은 새에게 자유를 주는 것처럼 그녀 자신을 한없이 풀어놓아 주었다. 자한은 술을 마신다.

6

류는 온종일 책을 읽었다. 철호와 지욱과 태오는 낮에 소주 한 병을 들고 산행을 다녀왔다. 귀도를 위한 첫 추모 산행인 셈이었다. 그들은 잊지 못했기 때문에 귀도와 자한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다. 작년 이 무렵처럼 그들은 술에, 자책감에, 먹먹함에 그 모두에 취해 있었다.

육 개월 만에 자한을 다시 보았을 때, 류는 철호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에 머물고 있었다. 어디서나 캐럴이 질척거리던 지난 연말이었다. 그날 태오의 재즈클럽은 철호의 결혼식 피로연으로 한창 들떠 있었다. 과장된 축하의 말들이 오갔다. 폭죽이 터졌다. 색종이 조각이 흩날렸다. 테이블마다 케이크가 놓였다. 술잔이 빠르게 비어 갔다. 수많은 친구들이 술잔을 치켜들고 철호의 결혼을 축하했다. 파티는 흥겨웠고 모두 기분이 좋아 보였다. 흥분된 분위기에 휩쓸리다 보면 돌연 미묘한 우울이 찾아들었다. 술이 독처럼 쓰고, 음악이 그저 시끄러운 소음에 불과하고, 상처받고 치유받지 못한 웃음 띤 얼굴들이 괴물처럼 끔찍해 보였다. 기분 탓이지만 류는 다소 지쳤고 어디든 조용히 혼자 있고 싶었다.

클럽의 주방으로 난 뒷문을 열면 후미진 골목이었다. 하룻밤에도 쓰레기봉투가 높게 쌓이고, 담배꽁초가 어지럽게 흩어지고, 찌그러진 캔이 굴러다니며, 취객과 길고양이가 지린 오줌 냄새가 시큼하게 피어오르는 골목은 류에게 친숙했다. 그곳에 의자 하나가 있었다. 그 차가운 의자에 자한이 앉아 있었다. 뜻밖에도 고양이와 함께였다. 자한은 그동안 마치 먹을 것을 입에 대 보지 않은 사람처럼, 마치 굶어 죽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유례없이 말라 있었다.

자한은 류를 보고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고양이는 움직임이 없었다. 죽었어. 류의 눈길을 알아차린 자한이 말했다. 정신이 딴 데로 쏠린 듯한 자한의 눈빛. 그 눈빛 뒤에 어떤 광기가 숨어 있는 것 같았다. 애초부터 이곳으로 오려던 생각은 아니었어. 단 한 번의 몸짓으로 단 한마디의 말로 철호의 행복한 순간을 망치게 될까 봐 조심스러웠거든. 그런데도 결국 이곳까지 와 버렸어. 요즘 나는 나를 이길 수가 없어. 저 아래 찻길 옆에서 이 고양이를 발견했어. 사고였겠지. 품에 안았을 때 고양이는 아직 따뜻했어. 병원으로 달려갔어. 다리가 골절되고 척추 손상도 있고 머리도 조금 다쳤지만 누군가 조금만 일찍 병원에 데리고 왔더라면 살릴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수의사가 말했어. 살아 있었어. 그리고 꼭 살 수 있을 것 같았어. 그런데 오래 견디지 못했어. 너무 오랫동안 추위와 싸운 탓이었어. 조금만 더 일찍 발견했더라면 살릴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그 누구도 그렇게 하지 않았어. 어쩌면 할 수 없었겠지. 반은 술에 취하고 반은 제정신인 채 자한은 혼잣말을 쏟아냈다.

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자한은 더 이상 어떤 것도 얘기할 마음이 없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침묵은 계속되었다.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류는 자한에게서 고양이를 안아 들었다. 야위고 다친 고양이의 몸은 식어 있었다. 류는 고양이를 묻어 줄 만한 장소를 찾아 골목을 빠져나왔다. 추위가 전날 밤보다 더 매서웠다.

수년 동안 귀도와 자일파티였던 철호와 지욱은 자한에게 말하지 못한 진실이 있을지도 몰랐다. 자한 또한 그들이 하지 못했던 말들 속에 어떤 진실이 감추어져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추측으로 자신을 괴롭혔을지도 몰랐다. 생각은 어떤 식으로든 할 수 있지만 그 진실은 끝내 알 수 없는 법이다. 류는 자한에게 분명히 생각하는 것, 실제로 일어난 것, 사실로 알고 있는 것에만 관심을 갖는 것, 그것이 고통을 줄이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류가 돌아왔을 때 자한은 이미 그 자리를 떠나고 없었다.

철호와 지욱과 태오는 잠이 들었다. 뒤에 남아 죽어간 이들과 곁에 없는 이들을 추억하는 건 쓸쓸했다. 류는 낮에 광장을 가로지르던 여자를 떠올렸다. 귀도의 기억과 함께 외로이 남겨진 자한. 자한이 찾아오지 않는다면 만날 수 없을 것이었다. 자한은 불가능한 것을 소망하는 사람처럼 귀도와 함께 나누었던 소박한 일상에 대해, 귀도의 수많은 등반에 대해, 귀도와 관계된 모든 사람들에 대해, 그리고 귀도의 마지막 산행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삶이 실체로 채워지지 않는 텅 빈 공허의 구덩이를 품고 있을지도 몰랐다. 먹고 자고 일하고 운동을 하고 친구를 만나 그 무엇을 해도 공허는 아물지 않고, 지난 시간이 그러했듯 한 해가 가고 또 한 해가 바뀌어도 삶은 여전히 텅 비어 있을 것이고, 정말 머지않아 자신이 허공 속으로 날아가 버리겠지, 하는 생각을 하며 길을 잃고 헤맬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한 류의 이해는 무의미할 수 있으나 아렸다. 누군가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은 자신의 마음을 전제로 한다. 류는 이전에 진을 잃었고, 아팠고, 공허했다. 그리고 마침내는 그 모든 것을 잊은 듯이 살고 있다. 그럼에도 류는 아직도 죽음을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당선소감>

 

 "그리운 이들에게 못했던 말들이젠 내 안의 글 쓰기로"

 

  몹시 추운 날이었다. 나는 담요를 둘둘 말고 베란다에 서서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캣타워에 올라앉은 내 고양이와 함께였다. 내 고양이를 안으면 정말 따뜻하다. 담요 따위는 두르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내 고양이는 좀처럼 곁을 내어주지 않는다. 어쩌면 관계 맺기에 필요한 알맞은 거리감을 본능적으로 체득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주변 경관이 온통 회색빛이었다. 모든 것에 스며들고 마음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어 결국 우울을 불러내는 그런 회색이었다. 놀이터에는 알록달록 원색의 아이들이 추운 줄도 모르고 흙바닥에서 놀고 있었다. 아이들의 웃고 떠드는 소리가 이리저리 흩어졌다. 그 소리에 정신을 팔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신문사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당선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떠오른 얼굴들. 이제는 곁에 없는, 어쩌다 꿈속에서나 볼 수 있는 얼굴들. 그래서 더욱 그리운 이들. 그들에게 미처 하지 못했던 말이 아직도 두서없이 머릿속을 떠다닌다. 소중한 내 아버지와 한결같은 마음으로 내 곁을 지켜주는 형제자매에게도 표현이 서툴고 쑥스러워 하지 못했던 말은 많다. 그리고 또한 가까이 지내는 따뜻한 친구들, 고마운 선후배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밖으로 내몰 수도 안으로 들일 수도 없던 그 많은 말을 이제는 오롯이 내 안으로 들여야겠다. 아마도 앞으로 내 글쓰기는 마음을 들여다보고 말을 모으는 것으로부터 시작될 것 같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안으로 더 자주 더 깊이 들어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제야 겨우 내 안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 선 기분이다. 그 문을 마주 볼 수 있도록 기회를 열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1971년 충북 옥천 출생 계명대학교 일반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 졸업

 

<심사평>

 

"방황하는 인물들 자기 탐색 과정 산만하지 않게 잘 처리"

 

  언어의 진실이 왜곡되고 이 왜곡이 오히려 정상인 듯 여겨지는 오늘날, 문학에 정진하는 문청들의 존재는 그 자체로 고귀하다. 부디 이 문청들의 글쓰기가 자신들만의 보람으로 그치지 않고 언어의 진실과 삶의 진실을 새롭게 발견하는 더 깊은 수준으로 나아가기를 기대한다.


  2015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소설 분야 본선에 오른 작품 중 심사위원들은 신희우의 '고양이는 따뜻했다', 김견숙의 '게릴라 가드너와의 조우', 정선아의 '2 46', 원보람의 '발견' 등을 특히 주목했다. 이 작품들은 공히 예선을 통과하고 본선에 진출할 만한 장점들을 지니고 있었지만 심사위원들은 신희우의 '고양이는 따뜻했다'를 당선작으로 결정하는 데 크게 주저하지 않았다.


  신희우의 '고양이는 따뜻했다'는 비교적 장대한 스케일의 배경과 장소를 바탕으로 인물들의 자기 탐색의 방황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채워지지 않는 생의 공허를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그런데 인물들의 자기 탐색의 방황과 그에 따른 심리적 갈등을 산만하지 않게 처리하는 작가의 방법이 돋보인다. 다소 산만할 수 있는 인물들의 관계를 등산을 매개로 하여 압축하는 방법도 돋보이지만 특히 유기된 고양이를 상징으로 활용하는 결말 장면은 압권이다.


  김견숙의 '게릴라 가드너'가 상상하는 세계는 따스하다. 황폐와 남루가 넘실대는 이 세계에서 우직하게 게릴라 가드너를 자임한 인물을 창조한 작가의 따스한 마음이 읽힌다. 그렇지만 게릴라 가드너의 설정은 좀 더 내적 개연성을 확보해야 문학적 감동으로 나아갈 것으로 보인다. 꼰대로 불리는 게릴라 가드너의 성격도 일면적이지만 꼰대에 거리를 두던 의 변모가 갑작스럽다.


  정선아의 '2 46'은 각별한 인연으로 기억되지만 더는 존재하지 않는 한 일본인 남성을 찾아가는 의 여로소설이다. 그렇지만 어렵사리 찾아가 일본 현지에서 가 개에 물리는 소동이나 일본 원전 사고에 관한 서술이 이 소설의 주제 형성에 기여하는 문학적 사건과 장면으로 녹아들지 않아 아쉽고 대목 대목마다 의 감상이 치고 올라와 단편이 요구하는 압축과 절제의 구조를 방해하는 점이 아쉽다.


  도축장과 집을 오가며 다소 폐쇄적인 자아로 살아가는 의 자의식을 이야기하는 원보람의 '발견'도 이와 같은 문제가 없지 않다.노숙자 시신으로 발견된 아버지와 이를 부인하는 의 모습이 어떤 울림을 주는 게 아니라 간단한 삽화처럼 읽혀 아쉬움을 준다. 특히 집 냉장고에 보관된 정체불명의 사물은 의 자의식을 함축하는 설정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작품의 문학적 의미를 깊게 하는 문학적 상징과 비유로 녹아들지 않아 전체적으로 소설이 작위적인 인상을 준다.


  당선의 영예를 받게 된 분에게는 진심으로 축하를, 아쉽게 탈락한 분들에게는 그에 값하는 격려를 드린다. 그렇지만 당선 여부보다 더 중요한 건 문학에 대한 투고자들의 진중한 태도이리라. 모두 그 진중한 태도로 언어와 삶의 진실을 탐색하는 대장정에 나서주기를 기대한다.

 

심사위원 : 김원우(소설가), 양진오(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