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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므두셀라 / 이서하

 

납작한 주머니에 찔러 넣은 손가락들

그 손가락들은 내 안에 들어온 적이 있다

내게 주먹을 쥔 적이 있다

배가 부은 날엔 혼자 병원에 갔다


두 개의 주머니가 팽창하는 중이다

주머니 속 먼지를 작게 쪼개면

더 작아져 날아가는 티끌처럼

수십 억 년을 떠돈 므두셀라처럼


나의 날은 모래알 같이 많으리라 (욥기 29:18)


나는 처음부터 혼자였어

두 개의 주머니를 오렸다

피 묻은 봉투 속에서도 나는 편안하다

좋은 것만 기억하라는 그의 말이 잠속까지 따라온다


                          나를

   작게

                                             쪼개면

                 더

                                   작게

쪼개지는

                  내 아이들


혼자 떠도는 행성이 있다

그 행성의 이름은 므두셀라다



<당선소감>


"이제 겨우 관문 하나 통과했네요"

 

 이제는 탁희에 대해 말해도 될까? 탁희는 고등학교 동창이다. ‘탁희는 말을 못해, 탁희는 바보 같지.’ 칠판 앞에서 자신을 소개하던 탁희의 목소리가 한데 모였다가 흩어졌다. 탁희는 짧은 머리에 긴 바지를 입고 다녔다. 탁희의 그런 중성적인 이미지와 후천적 장애가 또래에게 호기심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호기심의 표현은 늘 엉망으로 이뤄지거나 철저하게 괴롭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일어나 먼지를 털며 웃던 탁희가 정말로 싫었다. 겨울이 왔고, 우리는 진학을 앞두고 있었다. ‘탁희는 말 못해, 탁희는 바보 같지.’ 이 말을 되풀이하며 묵묵히 교실을 나서던 탁희를 지켜보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런 뒷모습은 너무 고요해서 나는 내가 잠시 사라져 버린 것 같다는 착각이 들기도 했다.

 어쩌면 내가 기억하는 탁희는 내 기억의 함정이 만들어낸 거짓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마쓰오카 마사노리의 ‘가네다(金田)군의 보물’이라는 시를 읽었을 때 나는 탁희가, 탁희의 그 웃음이 너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우린 서로에게 유령이기를 택함으로써, 철저하게 친구임을 숨겨왔던 것 같다.

 지금의 우리는 무엇일까? 나는 그런 시선이 되고 싶은데 내 눈은 점점 더 망가진다. 어두워지면 그냥 포기해버리고 “잘 가” 하고 인사하며 등을 돌린다. 하지만 나의 방관적 시선과 태도가 탁희와 수많은 탁희들에게 쓸모가 될 수 있다면 나는 시선을 거둘 수가 없는 것이다. 

 무엇하나 똑똑하지 못하고 벅차기만 했던 제게 숨을 달아주신 김소연, 백가흠, 양연주, 장석남 선생님 감사합니다. 그 오랜 시간 지치지 않고, 저의 통곡의 문이 돼주신 권혁웅 선생님, 오래전부터 이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저의 균열에 선로를 내어주신 김기택, 이원, 함돈균 선생님 감사합니다.


◎ 약력

▶ 1992년 경기 양주 출생

▶ 한양여대 문예창작과 졸업



<심사평>


몸으로 기억하는 '상처'…문학적 낙천성으로 보듬어

 

 2016 한경 청년신춘문예를 심사해 보니, 신춘문예로는 늦깎이지만 ‘청년’ 신인 문인의 등단에 초점을 맞춘 특성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늘어난 응모량도 그렇지만, 전년보다 젊은 감각을 지닌 언어들이 대폭 늘어난 것은 청년신춘문예의 앞날을 위해 고무적인 일이다.

 ‘달숲 공방’ 외 4편을 투고한 장우석 씨는 문장을 운용하는 단정한 품새가 돋보였다. 다만 물 흐르듯 논리적인 문장 흐름을 시적으로 전환시키는 문장의 분절, 사유의 모험이 있으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내던져지다’ 외 4편을 투고한 김형주 씨는 일상적 풍경을 반성적으로 포착하는 직관력이 눈에 띈다. 그러나 풍경이 직관적으로 ‘포착’된 뒤에 좀 더 적극적인 해석을 통해 시적으로 되새김질되지 못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수생식물로 돌아가는 밤’ 외 4편을 퇴고한 최민서 씨는 내면적 상처를 일상 풍경의 ‘환상적’ 가공을 통해 변형시키려는 시도들이 눈길을 끌었다. 그런데 시가 되려면 말의 시적 변용 이전에, 사유의 시적 변용이 이뤄져야 한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앞으로 더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당선작인 ‘므두셀라’ 외 4편을 투고한 이서하 씨는 당선작 ‘므두셀라’에서 보듯이 몸이 기억하는 상처를 ‘우주적 명랑함’으로 전환하는 위트와 자기 긍정성이 주목할 만하다. 삶에 대한 근거 없는 ‘낙관’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청년다운 문학적 ‘낙천성’을 지니고 있다고 평가하고 싶다. 당선자에게는 축하의 말을, 모든 응모자에게는 격려와 위로와 응원의 말씀을 전한다.


심사위원 : 김기택(시인)·이원(시인)·함돈균(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