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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위험 수목 / 노국희

 

물음으로 짜인 나무 그늘에 앉아있어

긴 오후가 지나가도록

지금 나뭇잎 한 장이 세상의 전부인

왕개미 옆에서

나의 주인이 되어주세요

헤프게 구걸도 해보았다

당신의 삶을 훔치는 것으로

도벽을 완성하고 싶었어

알록달록 실패들을 엮어 만든 바구니를 들고

저기서 당신이 걸어온다

마른 생선 하나를 내어주고는

가던 길을 간다

비릿한 기억이 손 안에서 파닥거린다

목이 없는 생선이 마지막에 삼킨

말들이 마른 비늘로

바스러진다

낡은 허물 위로 매미소리가 내려온다

울어본 기억만 있고

소리를 잃은 말들이

그림자 속에서 가지를 뻗는다




<당선소감>


세상에 질문을 던지겠습니다

 

 징검다리 양 끝단에 노부부가 서서 들리지 않는 말을 주고받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발을 구르다 엉덩방아를 찧고 넘어집니다.

 맞은편 사람은 내내 어리둥절한 표정입니다. 세상의 모든 대화를 무언극으로 치환하는 상상을 해봅니다. 말이 사라진 곳에서 죄의 무게는 조금 가벼워질까요, 그마저도 불가능한 바람일까요.

 내가 뱉은 말들은 종종 빗장이 되어 나를 가두었습니다. 비좁은 사각의 모서리에 혀를 내밀면 말들은 얼음 입자로 떨어졌습니다. 그 안에 수많은 내가 들어 있었습니다. 불편했고 불화했습니다. 진심은 침묵의 형식 안에 담겨야 온전하다고 믿었습니다. 몸 안에 쌓인 말들의 더미를 뚫고 내려간 벌레구멍에서 몹시도 떨면서 시로 호흡하는 법을 익혔습니다. 한껏 무용해진 몸에 가장 예민한 더듬이를 장착하고 싶었습니다. 시의 입김으로 견고한 세계의 벽을 천공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가까스로 반대편 입구에 닿은 기분입니다. 머리 위로 동그랗게 보이는 세계는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다만 나와 조금씩 가까워지는 걸음으로 나아가겠습니다. 발자국을 따라 시의 자리가 투명한 징검돌로 놓이면 좋겠습니다.

 지면 너머로 이상한 용기를 쥐어준 시인들께 감사 드립니다. 문득문득 곁을 만들어준 벗들에게, 오랜 시간 기다려주신 부모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세상을 향해 질문을 던지기를 두려워하지 않겠습니다. 울음들이 부딪혀 만드는 균열 소리에 귀를 세우고 노래하겠습니다.




<심사평>


과감한 언어의 도전

 

 1차 심사를 거치고 난 뒤 심사위원들의 손에 들려 있던 작품은 세 편이었다. 김수화씨의 ‘아버지가 족문을 옮기는 방식’, 이언주씨의 ‘만두를 빚다’, 노국희씨의 ‘위험 수목’이 최종적으로 거론됐다.

 세 편의 작품 모두 그럴만한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우선 김수화씨의 작품은 삶의 경험을 지나친 감정적 과장 없이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풀어내는 기량을 보여줬다. 이언주씨의 작품 역시 일상적 소재에서 삶의 실감을 잘 구현해내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다만 김수화씨의 경우 군더더기 없이 경험을 풀어내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발화법이 지나치게 안정적이어서 신인의 패기에 값하는 도전의식이 아쉬웠다. 이언주씨의 경우에도 단정한 사색이 장점이 되지만 동시에 언어의 입체적 개진이라는 측면에서는 아쉬움을 남긴다.

 심사위원들은 이와 같은 아쉬움을 뒤로 하고 노국희씨의 ‘위험 수목’을 당선작으로 선보이는 데 합의했다. 과장이나 엄살이 없이 기억과 상처를 다루고 있는 이 작품은 구도에 있어서는 안정적이면서도 동시에 과감한 언어 운용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물음으로 짜인 나무 그늘” “울어본 기억만 있고/소리를 잃은 말들”과 같은 긴장감 있는 상상력이 “당신의 삶을 훔치는 것으로/도벽을 완성하고 싶었어”와 같은 도전적인 문장에 실려 전개되고 있다. 취의와 언어 운용 능력에서 안정감과 패기가 함께 드러나고 있어 짧지 않았을 시 쓰기의 이력에 신뢰감을 갖게 한다. 좋은 신인을 시단에 소개하는 즐거움이 적지 않다. 앞으로의 도정에 문운이 함께 하길 기대한다.


심사위원 : 김소연(시인) 조강석(문학평론가) 황인숙(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