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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타크나 흰 구름 / 이윤정

 

타크나 흰 구름에는 떠나는 사람과 돌아오는 사람이 있다 

배웅이 있고 마중이 있고 

웅크린 사람과 가방 든 남자의 기차역 전광판이 있다

전광판엔 출발보다 도착이, 받침 빠진 말이

받침 없는 말에는 돌아오지 않는 얼굴이 있다가 사라진다

흰 구름에는 뿌리 내리지 못한 것들의 

처음과 끝이 연결되어 

자정을 향해 흩어지는 구두들

구두를 따라가는 눈 속에는 방이 드러나고 

방에는 따뜻한 아랫목, 아랫목에는 아이들 웃음소리 

몰래 흘리는 눈물과 뜨거운 맹세가 흐른다

지금 바라보는 저 타크나 흰 구름은 출구와 입구가 함께 있다 

모자 쓴 노인과 의자를 잠재우는 형광등 불빛 

그 아래 휴지통에 날짜 지난 기차표가 버려져 있다

내일로 가는 우리들 그리움도 잠 못 들어

나무와 새소리, 새벽의 눈부신 햇살이 반짝이고

어제의 너와 내일의 내가 손을 잡고 있다 

새로운 출발이 나의 타크나에서 돌아오고 있다

우린 흘러간 다음에 서로 흔적을 지워주는 사이라서

지우지 않아도 지워지는 얼굴로 

지워져도 서로 알아보는 눈으로

뭉치고 흩어지고 떠돌다 그렇게 너의 일기에서 다시 만나리




<당선소감>


 동면 깨어나 … 마음 다독이는 시 쓰겠다

 

 몇 번의 겨울을 애벌레로 동면했습니다. 날개 달지 못한 채 셀 수 없는 밤을 어둠에서 보냈습니다. 어느 날 태양이 눈부시게 다가왔습니다. 푸른 하늘이 보이고 겨드랑이가 가볍습니다. 길었던 겨울 동안 날개를 키우며 오늘을 기다린 보람이 있습니다.

내 짝사랑은 이제 긴 어둠을 걷어내고 새로운 곳으로 나를 초대합니다. 그동안 나는 나를 지탱하고 나를 세우는 힘을 익히고 있었던 것입니다. 늘 새로움으로 나를 채워주는 호기심과 변하지 않는 날개를 달고 푸른 하늘을 날아오를 것입니다.

 늦은 밤 역사에서 갈 곳 없어 서성이는 사람들을 봅니다. 종착역도 출발역도 없는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종이박스로 방을 만들어 추운 잠을 청하는 사람들. 저들도 한때는 푸른 하늘을 날았었지요. 돌아갈 곳을 잃어버리고 떠도는 쓸쓸한 풍경에 가슴이 시려 옵니다. 타크나에서 떠돌던 구름처럼 잠들지 못하고 우리는 그렇게 흘러가는 것 아닐까요. 오늘 밤 흰 구름 속에서 떠도는 사람들 모두에게 따뜻한 온기가 감싸지기를 기도합니다.

 오늘의 이 영광은 심사위원 최동호 선생님, 이시영 선생님 두 분께서 날개를 달아 주셨기에 가능했습니다. 세계일보사에도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여기까지 올 수 있도록 든든한 반석이 되어준 용정씨, 가장 냉정한 평론가 민희, 지중해 하늘을 날면서 뜨거운 용기를 보내준 서윤, 눈빛만 봐도 마음 읽어주는 준호, 그리고 친구들. 두 눈으로 마주친 세상 모든 인연들과 오늘의 이 기쁨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늦었지만 서두르지 않고 마음을 다독이는 시를 쓰겠습니다.


◎ 약력

▶ 1961년 대구 출생

▶ 한양대학교 행정자치대학원 수료
▶ 커리어 컨설턴트



<심사평>


 오랜 시적 연마 느껴지고 서정적 언어 돋보여

 

 1200여명의 응모자들 가운데 예선을 거쳐 넘어 온 30여분의 작품을 꼼꼼히 읽었다.

 많은 응모작 때문인지 응모자들의 수준은 향상되어 있었으며 어느 작품을 선정해야 할지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 일반적인 신춘문예의 수준을 넘어서는 작품이 많았다는 것이 솔직한 소감이다.

 그럼에도 심사를 위해 다음 네 분의 작품으로 좁혀서 논의를 거듭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은지의 ‘구름의 공회전’외 3편, 이규정의 ‘오르막에 매달린 호박’ 외 4편, 노운미의 ‘일요일의 연대기’ 외 3편 그리고 이윤정의 ‘모자는 우산을 써 본적이 없다’ 외 4편 등이었다.

 이 네 분의 작품은 서로 다른 개성을 가지고 있어서 어느 하나를 우선적으로 선정하기가 어려웠다. 

 각각의 장단점을 다시 살펴보고 심도 있게 검토한 결과 김은지와 이윤정의 작품이 최종 심사 대상이 되었다.

 김은지의 작품은 시행을 밀어나가는 힘이나 사물을 관찰하는 시선이 세밀하고 좋았지만 전반적으로 시행의 압축보다는 다변의 서술에 의존하고 있어서 시적 언어의 절제력이 조금 부족하다는 것이 아쉬웠다.

 이윤정의 작품은 서정과 서사를 아우르면서 적절한 균형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 일차적 장점이었다. 우리 시단에 조금 낯설게 느껴지는 그의 목소리는 새로운 시인으로서의 자격도 갖추고 있다고 여겨졌다.

 예를 들면 이규정의 ‘오르막에 매달린 호박’과 같은 작품은 시적 완성도에 있어서는 뛰어난 점이 있었지만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느낌이 들어 주저하게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이윤정의 작품을 놓고 어느 작품을 당선작으로 정하느냐를 정하기 위해 좀 더 논의했다.

 ‘모자는 우산을 써 본적이 없다’의 경우는 새롭기는 하지만 접속어가 많아 시행의 흐름이 일부 어색했고, ‘흔적의 이해’는 안정적이기는 하지만 조금 관념적이어서 구체성이 약했다.

 결과적으로 새로운 출발을 약속하는 ‘타크나 흰 구름’이 당선작으로 적정하다는 것에 의견이 일치했다. 오랜 시적 연마가 느껴지는 다른 시편들의 안정감도 이런 결정에 도움을 주었다.

 당선자에게는 아낌없는 축하의 박수를 보내드리고 아쉽게 탈락한 다른 응모자들에게는 따뜻한 격려의 말을 전해 드린다.


심사위원 : 최동호·이시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