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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부정의 프레임n-이장욱 <기린이 아닌 모든 것>, <천국보다 낯선>을 중심으로 / 선우은실

 

0. 큐레이션 시대감각과 VR, 그리고 프레임


이머시브 저널리즘(Immersive Journalism)의 목적은 참여자로 하여금 뉴스 스토리를 대변하는 가상의 만들어진 시나리오로 실제로 들어가게끔 허용하는 것이다. (‘www.immersivejournalism.com/about’에서 인용).


인간의 상상이 구현되는 범위에 있어서 버추얼 리얼리티(이하 VR), 즉 가상현실이라는 개념은 2015년에 와서 그리 새로울 것은 아니다. 게임상에서는 가상의 현실화를 극대화시키기 위한 VR이 이미 넘쳐나고 있다. 다만 2015년에 이르러 VR이 뉴스 매체의 자장 안으로 들어왔다는 것은 주목해 볼만한 사실이다. 뉴스는 VR 기술을 현실적 감각의 극대화를 이끌어내는 일에 사용하는데, 이머시브 저널리즘이 시도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렇다. 범죄, 내전 등과 같이 인간의 삶의 파괴적 경험들을 전달하는 데에 있어 뉴스매체는 이제 시각(카메라)과 청각(오디오)뿐만 아니라 시간과 공간까지 접수함으로써 극한의 리얼리티를 구현하고 있다.


고도의 기술력이 접목되면서 미디어는 극사실주의를 향해 나아가고 있고 또 성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와 같이 구체적 상황 속에서 특정한 정서를 이끌어내고자 하는 시도는 빅데이터 이후 큐레이션의 시대로 접어드는 시대의 감각에 부합한 결과물이기도 하다. 2010년 이후 개인의 표출과 인식의 방법은 큐레이션의 감각 안에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스토리텔링의 욕구를 저변으로 한 개인의 이미지화를 위해 각 개인은 고급정보의 선별을 요구하게 되었다. 미술관에서 특정 테마를 중심으로 작품을 선별해서 전시하는 것과 같이 필요한 고급의 정보를 누군가 일련의 카드로 정리해주는 큐레이션 매체는 이러한 개인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며, 현 세대는 그러한 큐레이션 패러다임에 뜨거운 반응을 보내고 있다. VR에서 구현되는 상상력의 현실화는 저널이라는 전문가에 의해 선별된 인간문제에 관한 정보를 취할 수 있다는 점에서 큐레이션 시대의 감각적 층위를 만족시킨다. 저널이 제공하는 기사와 사진을 토대로 상상하는 것을 넘어 실제 그 시공간을 경험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VR의 기술력과 이머시브 저널리즘의 시도는 상상의 리얼리즘화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VR과 같은 상상을 실제화시키는 기술은 내전과 같은 인간 삶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한 사안에 대하여 뭔가 느낄 만한 것을 너무 쉽게 ‘제공’한다. 매체와 기술은 그 자체에서 상상의 ‘재현’을 시도하고 있을 뿐 ‘상상’ 자체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지는 않는다. 기술 덕택에 우리는 타인을 이해하려는 별다른 노력 없이 그들의 고통을 감각할 수 있게 되었다. 치열한 내면 성찰을 수반해야만 하는 인간에 대한 공감능력은 그 힘을 점차로 상실하고 있다. 상상을 쉽게 수용하는 자가 상상을 가두는 ‘프레임’을 자각하지조차 못한다는 것은 문제적이다. 소외되는 대상이 ‘소외됨’조차 자각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이 틀을 인식하는 무한한 프레임을 만드는 순간 하나의 규격으로서의 세계는 감지될 수 있다. 거울 속에 무한히 뻗어나가는 ‘자신’을 보는 것처럼 끊임없이 연장되는 프레임은 바로 그것을 포착하는 방법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을 가두는 그 ‘틀’을 포착함으로써 문학은 세계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프레임의 무한한 확장과 같은 맥락에서 인간의 상상력에 대한 지평이 확장되고 있는 지점을 가늠하는 것은 중요하다. “인간은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것만을 상상한다”(‘기차 방귀 카타콤’, <고백의 제왕>, 143쪽)던 그 소설가, 이장욱은 소설적 상상력의 범주를 재차 묻는다. 인간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아는 것을 토대로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 지금까지의 작업들이 이미 쌓여있는 재료들을 토대로 다른 하나를 만들어내는 식의 상상의 결과물이었다면 이장욱이 시도하고 있는 것은 그 반대이다.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것들을 하나씩 제거하는 방법으로 그 상상력을 확장시킨다. 즉, ‘상상하지 못함’의 징후를 상상한다. 이장욱의 최근 단편집 <기린이 아닌 모든 것>과 장편 <천국보다 낯선>은 귀류법을 원리로 한 상상의 지평이 확대되는 것을 잘 시험하는 작품이다. 다소 까다롭고 난해해 보일 수 있는 방법론이 왜 소설 속에서 시도되었어야 했는가? 이장욱 소설의 형식적 기법은 여기에 대한 답을 주고 있다. 상상력의 영역으로서의 문학이 어떻게 그 지평을 넓혀갈 수 있는지, 독자로 하여금, 소설로 하여금 어떠한 질문을 던져주고 있는지 지금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scene1. 귀류법을 통한 실재(reality)의 환기- <기린이 아닌 모든 것>


이장욱은 ‘기린이 아닌 모든 것’을 말함으로써 상상력의 지평을 넓히고 있다. 소설을 관통하는 원리는 문학적 귀류법이자 ‘상상하지 않음’의 상상이다. ‘기린이 아닌 모든 것’을 이야기함으로써 기린을 떠올릴 수밖에 없게 한다. 이 소설은 반대 명제를 참으로 가정하고 그것을 논리적으로 풀어가는 과정을 통해 그 명제가 거짓임을 밝히는 것과 비슷하다. ‘기린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기린이 아닌 모든 것’에 관한 것을 명제로 삼고, 그것을 제외한 이야기를 하겠다고 선언하는 순간 그 이후에 나오는 어떠한 진실이나 거짓은 그 본래적 의도를 잃어버리고 만다. 진실을 말해도 거짓이 되고 거짓을 말해도 진실이 된다. ‘크레타의 거짓말쟁이’의 역설이 발생하는 것이다. 표제작 ‘기린이 아닌 모든 것에 대한 이야기’의 화자는 자신이 보지 못한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함으로써 역설적인 상상력을 이끌어낸다. “기린이 아닌 모든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해드릴까요?”라는 주인공의 질문이 떨어지자마자 우리는 곧바로 기린을 상상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기린이 아닌 이야기에서부터 탄생한 기린에 대해 주인공은 이렇게 말한다. “물론 나는 그 기린에 대해 아무런 권리가 없습니다. 그건 순수하게 당신의 머릿속에서 태어난 당신의 기린이니까요.” 이장욱은 두괄식으로 문제를 던지고 답한다. 기린이 아닌 모든 것을 이야기했음에도 각자가 떠올린 상상의 영역에 대해 타인은 침범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상상하는 대로 이루어지리라, 아니 상상하지 못함을 상상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현실이다. 주인공은 자신이 말하는 진실은 거짓으로 함몰되고 거짓을 말하면 진실로 육화되는 기이한 ‘운명’을 타고났다고 주장한다. 부반장의 지갑을 훔쳤다는 누명을 쓴 ‘나’가 경찰서에 찾아가 담임선생님이 짝의 몸을 더듬는 것을 보지 못했기에 그렇다고 말했을 뿐인데 추행이 사실화되는 식이다. 거짓의 발화가 진실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부정(否定)의 양태가 중요하다. 선생님이 어떤 행위를 하지 ‘않았다’가 아니라 ‘보지 못’했다고 발화되는 순간 불순한 상상은 (거짓)진실의 형체로 육화된다. 비약적 결론을 도출하는 부실한 논리 안에서 인간이 감각하고 있는 수준의 상상력은 위험한 상상으로 뻗어나간다.


이후에 ‘나’에게 일어나는 일은 감각의 부정을 넘어 말 그대로 거짓이 사실이 되는 기이한 성격의 것이 되고 만다. 여기서 아버지의 말이 인상적인데, “선생님한테 혼이 났다고 해서……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비록 사실이라고 해도” 말이다. 사실임에도 해서는 안 되는 이야기 때문에, ‘나’는 아버지가 간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를 간첩으로 신고하고 아버지는 간첩혐의로 체포된다. 사건이나 사실 혹은 진실이 있고 그 뒤에 명제가 따라오는 것이 아니라, 앞에 어떤 사건이 있고 그것이 어떤 진실을 가지고 있든지 간에 뒤에 따라오는 명제가 이전의 사실들을 지배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명제와 부정명제가 뒤섞이는 서사는 잘못된 감각이 세계를 어떻게 왜곡시키는지, 어떻게 거짓된 진실을 만들어내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장욱은 마지막까지 감각되는 상상력에 대해 의심의 끈을 놓지 않는다. 이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부터 떠올랐을 당신의 머릿속의 그 기린이 “정말 기린”이냐고 묻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각하고 있는 ‘기린’은, 중국 전설의 동물인 기린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사람은 아는 만큼, 즉 경험한 것을 토대로 그 안에서만 상상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마지막 문구는 더욱 의미심장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 그 이상을 상상해 볼 수 있겠느냐는, 상상의 지평에 대한 일침이기 때문이다.


다시 귀류법의 맥락으로 돌아오자. ‘우리 모두의 정귀보’ 또한 ‘말하지 않음에 대한 말함’에 대한 소설의 구도가 적용되어 있다. 이 소설은 대단한 미술작가 정귀보의 평전을 쓰기 위한 ‘나’가 정귀보의 삶을 추적하는 이야기이다. 자잘한 그의 연애담에서 시작하여 우스꽝스러운 그의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서 핵심은 ‘화가’ 정귀보를 제외한 모든 정보가 화가의 삶으로 귀결되는 상상의 전반에 있다. ‘우리 모두의 정귀보’는 만들어진 인물에 가깝다. “무명이었다가 사후에 유명해진” 정귀보라는 표현은 정귀보의 삶을 말하는 모든 요소들이 정귀보를 ‘훌륭한 화가’라는 상상으로 향하게 하는 사소하고도 중요한 전제로 작용한다.


그의 과거에 대한 서술은 그 방식에서부터도 ‘주체의 발화’를 결여하고 있다. ‘우리 모두의 정귀보’라는 호명방식에서 알 수 있듯이 정귀보는 그 자신의 주체적 발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의 삶을 추적하는 이들의 상상에 의해 ‘만들어진’ 인물로서 지칭된다. 주체의 목소리가 결여된 삶은 그것을 추측하게 하는 많은 이미지들로 구성된다. 이렇게 재구성된 ‘개인’의 이미지는 계속적으로 타인에게 노출되고 소비된다. 정귀보의 죽음 이후 발견된 ‘유서’를 해석하는 방식은 이 패러다임을 잘 보여준다.



“구구한 논란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정귀보 자신이 작성한 유서였다. 유서는 장위동 정귀보의 방, 그것도 책상 위에 놓인 책 사이에서 발견되었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친필이었고, 삶과 죽음에 대한 진지한 성찰로 이루어진 글이었다.”(‘우리 모두의 정귀보’, <기린이 아닌 모든 것>, 172쪽)



위대한 정귀보라는 이미지를 전제로 하고 있기에, 그의 생존을 둘러싼 모든 것들은 죽음의 음모론으로 떨어진다. “친필”로 쓰인 “책상 위에 놓인 책 사이”에 끼어있는 종이가 유서가 되는 식이다. 언론이 그 글을 유서라고 밝힘으로써 비로소 유서는 ‘탄생’한다. ‘유서’가 된 것은 그것이 유서였기 때문이 아니라 “조간들”이 “정귀보의 유서가 발견되었다는 기사를 쏟아냈”기 때문인 것이다. 과연 그것을 유서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 손쉽게 튀어나올 법 한데도, 그러한 의문은 미처 고려될 여지도 없이 빠르게 봉쇄된다.



“정귀보가 왜 삶과 죽음에 관한 선인들의 잠언을 베껴 쓰고 거기에 ‘유서’라는 제목을 붙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이것은 진짜 유서가 아니며 단지 책의 내용을 메모해놓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위와 같은 책, 174쪽)



정귀보의 ‘유서’에 대해서 세간에서는 “고급스러운 농담”이라던가, “죽음에 대한 글을 너무 열심히 읽다 보면 정말 죽음에 대한 충동을 느낄 수 있다”더라는 식의 추측이 난무했다. 이미 “유서”라 규명하고 모두가 정귀보의 자살에 동의한 상황은 바뀔 수 없다. 정귀보의 생사 여부나 과연 유서인가의 진위는 이미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의 정귀보’는 죽음을 맞이했으며 다른 단서들은 그렇게 해석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사후에 구성된 ‘화가 정귀보’의 정체성에 부여할 수 있는 세계의 빈약한 상상의 범주라면, 시신을 발견한 이후 목격담을 삽입함으로써 다시 한 번 소설이라는 프레임이 덧씌워진다. 정귀보의 시신은 사건 발생 후 약 4개월이나 지나서 발견됐는데, 그 목격담이 기이하다.



시신을 발견한 것은 바닷가에서 놀던 오누이라고 했다.(…) 아이들은 정귀보가 처음에는 시신 상태가 아니었으며, 바다에서 ‘비틀거리며 걸어 나왔다’고 증언했다. (…) 아마 애들이 공포에 질려 잠시 착각한 거겠지. 사장은 그렇게 덧붙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파도를 타고 해변에 밀려온 시신을 본 초등학생들이라면 그런 환상에 사로잡힐 수도 있을 것이다. 공포라는 감정은 우리에게 어떤 종류의 환상이든 이끌어내지 않던가. (위와 같은 책, 176~177쪽)



어떤 것이 환상이고 어떤 것이 추론인가? 바다에서 비틀거리면서 걸어 나온 정귀보는 목격담의 명제이다. 이 명제는 참이거나 거짓이다. 여기에 ‘아이들이 발견했다’는 조건이 따라붙는다. 이때 이 명제의 진실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아이들’이라는 전제조건에 있다는 것이 사장과 ‘나’의 추론인 것이다. 애당초 ‘아이들이 걸어 나오는 정귀보를 발견했다’는 사실 자체는 변함이 없다. 여기에 아이들의 공포감을 손쉽게 연관시키는 것은, 경험에서 비롯된 상상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첫 번째 명제가 긍정된다면 정귀보는 4개월 동안 바다를 표류했거나, 그가 바다에 떨어진 시점은 훨씬 뒤라는 다른 가능성이 존재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이 상상한 결론 안에서 모든 근거들을 합리화시키고 있다. 아이들의 공포가 걸어 나오는 정귀보라는 환상을 만들어냈을 가능성과 동시에, 걸어 나오는 시신 정귀보라는 그들의 환상이 다른 가능성, 보다 본질적인 죽음의 시점을 무마하고 만다.


처음부터 이 단편소설에 정귀보의 목소리는 단 한군데도 드러나지 않는다. 그의 삶을 추종하고 추적하는 이들에 의해 조각으로 재구성된 정귀보는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 모두의’ 대상이다. 정귀보라는 주체에 환상성을 부여하는 다양한 이미지들이 소급되는 것이다. 이장욱은 정귀보 ‘빼고’ 다른 이들의 상상과 추적을 통해서만 정귀보를 구현하고 있다. ‘우리 모두의 것’이 되었기에 잊혀져서는 안 되는 정귀보를 말이다. 끊임없이 소비할 다른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삶을 지속하려면 학습된 상상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뻔한’ 현실 때문에 생겨나는 빈약하고 빈약한 상상력의 소산인 것이다. ‘주체’라는 심해까지 가닿지 못하고 점점 조여 오는 수압에 의한 공포를 감각하느라 ‘우리 모두’는 정작 심해에 시선을 돌릴 틈이 없다. 여기에 목적을 잃어버린 삶에서 상상력이 눈앞에 구현되어버린다면 그 깊이는 더욱 얕아지지 않겠는가. VR식의 상상력의 현현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상상의 실현이라고 가정했을 때 이장욱의 소설은 온 몸으로 그것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현실에 대하여 ‘소설’이라는 프레임을 주면서 말이다.



#scene2. 프레임1, 프레임2, (…), 프레임∞ - <천국보다 낯선> 


소설적 ‘프레임’ 기법은 이전 단편집 <고백의 제왕>의 몇몇 단편에서부터 시도돼 왔다. ‘아르마딜로 공간’에서는 “지난해의 여름을 달려가던 택시가 이십오년 전의 겨울을 걸어가던 아이를” 치는 식으로 두 세계의 충돌을 그려냈다. 평행우주를 배치함으로써 미처 자각하지 못하고, 자각할 수 없으며, 그 지점을 상상하지 못하는 인물들의 상상의 구조는 이질적인 시공간이 관여하면서 나타나는 이상 현상에 대한 공포감으로 드러났다. 더 나아가 보다 적극적으로 프레임 사이의 간섭이 드러나는 작품은 ‘변희봉’이다. 교차 서술되는 만기의 이야기와 야구 생중계는, 마치 만기의 사정을 찍어내는 카메라1, 그 사정을 두고 대면한 ‘나’를 찍는 카메라2, 포장마차에서 ‘나’가 보고 있는 야구경기를 찍는 카메라3이 번갈아가면서 씬을 구성하는 느낌을 준다. 말미에 카메라3으로부터 카메라1, 카메라2가 있는 시공간으로 날아오는 ‘야구공’은 환상이라는 구도를 무한정 확대해 놓고 그 안에 현실적 이미지를 집어넣음으로써 마치 영화식 작법을 연상시킨다. 이렇듯 음침하고 공포스러운 분위기에서 프레임의 존재를 드러내는 영화식 소설작법은 <천국보다 낯선>에서 한 단계 발전하면서 소설적 상상력의 범주를 무한으로 확장시킨다.


2013년에 등장한 <천국보다 낯선>은 시선뿐만 아니라 시간과 공간의 프레임을 교차시킨 장편소설이다. 정, 김, 최, 염의 시각이 교차되면서 서사가 진행된다. A의 죽음을 전해들은 대학 동창들이 그녀의 장례식장을 찾아가는 이 이야기는 로드픽션(road fiction)쯤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마지막 염의 목소리에 이를 때까지 반복적으로 교차되는 정, 김, 최가 진행하는 서사는 망자의 서사이다. A의 조문을 가는 정, 김, 최가 추돌사고로 사망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마지막 염의 파트에 와서야 TV의 뉴스 보도를 통해 암시적으로 드러난다.


전말이 이렇다 보니 정, 김, 최의 어떤 기억들은 끊임없이 오독(誤讀)된다. 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체험을 오독하고 상상한다. 심지어 자신들의 죽음이라는 체험까지도 잘못된 상상으로 환원된다. A의 존재가 지워지고 나서야 A의 존재를 뚜렷하게 느끼는 역설적 감각에서부터 시작하여, 그들이 A를 기억하는 방식은 계속해서 현실에서 어긋나고 미끄러진다. 최가 A를 “우울증에 시달”리며, “조용하고 내성적인 애”로 기억하는 반면 정은 A가 “응원단” 출신이며 “활동적”이라고 기억한다. 각자의 시선과 기억에 의해 재구성된 A는 모두 A이면서 A가 아니다. A가 아닌 모든 진술로부터 ‘우리 모두의’ A는 완성된다. 그럼에도 이질적이고 불편한 느낌이 계속 남는 것은, 이번에는 그것이 정, 김, 최라는 각각의 세계에서 구축된 경험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이는 기억의 왜곡이라기보다 처음부터 다른 차원의 세계라는 층위에서 비롯된 것이다. 정, 최, 김의 카메라가 담는 각각의 세계는 3인을 비추는 망자의 카메라에 담겨 유일하게 현실에 남아있는 염의 세계와 구분된다. 망자의 세계는 현실 세계에 도달하지 못하고 자꾸만 미끄러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오독은 조문 길에 ‘김이 음악을 틀었다’라는 사실명제에 대해 그 ‘음악’에 대해서도 계속된다. 그 음악은 “수지 서”(정)였다가, “레이철 야마가타”(김)였다가, “올리비아의 ‘러브’”(최)가 된다. 사실명제에 대한 미끄러짐, 통제되지 못하고 공동의 기억으로 도달하지 못하는 이 행위들은 평행 세계에 대한 상상의 결을 형성한다. 각자도생과 죽음이라는 사실적 체험이 ‘음악을 틀었다’는 사실명제에 어떤 세계를 부여한 것이다.


‘아르마딜로’에서 다른 시공간에 간섭하나 형태가 불분명하던 것이 ‘변희봉’에 와서 ‘야구공’의 형태로 공간을 넘나들었다면, <천국보다 낯선>은 한 발 더 나아가 이들의 세계가 교차하는 듯한 지점이 포착된다.



“이미 약속 시간은 지나 있었다. 나는 거의 뛰기 시작했다. 서두르는 통에 담배를 피우고 있던 중년 남자와 어깨를 부딪쳤다.(…)


저런 씨팔놈이, 눈은 장식으로 달고 다니나.


중년 남자의 욕설이 내 등에 와 박혔다. 나는 한참을 더 달려가다가 천천히 걸음을 멈추고는 뒤돌아섰다. 중년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남자는 손을 주머니에 넣고 서서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욕설을 날린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마치 판화 속의 얼굴 같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나갔다. 저 남자와 나는 서로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런 느낌이 강렬하게 나를 사로잡았다.” (<천국보다 낯선>, 51~52쪽, 강조-인용자)



이 장면은 맨 마지막 염의 파트에서 재서술되면서 기시감을 준다.



“썅. 빼놓고 가려고 작당을 한 건가.


엊그제 A의 영화를 보고 난 뒤 술자리에서 약간의 행패를 부리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람을 이렇게 놀릴 수는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저녁 무렵 김과 통화할 때, K시 공용 터미널에서 기다리겠다고 분명히 말하지 않았던가.(…)


이런 씨팔놈이, 눈은 장식으로 달고 다니나.


달려가는 남자의 등을 향해 염은 반사적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언제부터인지 몸에 밴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달려가던 남자가 멈칫하더니 뒤돌아섰다. (…)


남자는 가만히 염을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천천히 가던 길을 걸어갔다. 뛰지도 않고,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 태연한 걸음이었다. 남자의 뒷모습이 캄캄한 물속으로 잠겨 가는 것처럼 보였다.“ (<천국보다 낯선>, 238~240쪽, 강조-인용자)



불과 “엊그제” 만났던 최와 염이 서로를 알아보지 못했을 리 없다. 각자의 기억 속에서 마주쳤던 사람은 정말 염이고 최였을까? 최의 서사가 저편의 서사라면 유일하게 살아있는 현실에 놓인 염의 파트는 이편의 서사이다. 이들은 서로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저편과 이편의 서사가 동일하거나 비슷한 시공간에 겹쳐지고 있는 것뿐이다. 공존하되 간섭하지 못한다. 최가 염을 “판화 속의 얼굴”로 인식하고, 염이 최를 “캄캄한 물속으로 잠겨가는 것” 같다고 느끼는 것처럼 각자는 네모난 액자를 경계로 다른 차원에 서 있다. 그러므로 이들은 각자의 세계 속에서 염과 최가 아니며, 동시에 염과 최가 된다.


도플갱어를 떠올리게 하는 두 장면의 교차는 음울하고 스산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어딘가 어긋나고 있는 서사가 주는 묵직한 공포의 분위기, 그것을 마주해야만 비로소 그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이장욱은 마지막 염의 파트를 둠으로써 보여주고 있다. 공포의 정체, 다른 세계의 서사, 그것을 바라보는 또 다른 프레임을 설정함으로써 정체를 폭로한다. 무한히 생성되는 렌즈들, 그것에서 오는 또 다른 기시감과 공포감은 소설이 감각할 수 있는 상상의, 미지의 지평인 것이다.


공들여 배치해놓은 정, 김, 최라는 세 카메라는 세 개의, 세 겹의 프레임이다. 이 프레임들이 만들어내는 장면의 결합을 세로로 잘라내면 뒤죽박죽의 단층이 드러난다.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또 다른 프레임으로써 소설적 관찰자가 생겨난다. 분할된 프레임이 한 곳에 모이면 세계는 더욱 혼란해지고 마침내 또 다른 세계로 분열된다. 나를 지켜보고 있는 프레임을 다른 프레임이 인식하는 순간이다. 마치 미술관에서 네모난 액자에 갇힌 작품을 바라보고 있을 때, 어느 한 쪽이 아니라 양쪽이 그 네모난 틀을 통해 서로를 바라보고 있을, 바로 그때 양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 제3의 시선과 같다. 그 시선은 각자의 세계를 인식함으로써 생기는 그 밖의 세계의 것이다. ‘너’와 ‘나’의 존재 말고 ‘우리’를 둘러싼 또 다른 세계의 인지, 그 시선으로부터 오는 공포감은 이러한 프레임의 형식적 실험에서부터 오고 있다.



#scene3. 공포의 근원지: 프레임의 문학적 상상력 - ‘이반 멘슈코프의 춤추는 방’ 


로드픽션 위에 덧씌워진 ‘지켜보고 있음’의 프레임이 주는 공포감의 근원지를 더듬어 볼 차례다. 소설의 공포스러운 분위기는 또 다른 프레임이 겹쳐지면서 발생하는 문학적 상상력의 소산이다. 특히 <천국보다 낯선>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는 시간의 중첩과 공간의 평행구조는 다층적이고 복잡한 세계구조의 측면을 보여주고자 하는 문학적 은유이기도 하다. 프레임은 서로를 비출 수는 있어도 서로에게 간섭될 수는 없다. 간섭될 수 없는 서로에 대해 계속 간섭하고 당하고자 하는 이 소설은 외롭고 스산한 서사이다. 앞서 살핀 작품들을 아우르는 불확실한 형태의 것이 교차하는 프레임을 통해 공포의 분위기는 더 이상 상상할 것이 없어져버린 현실에 맞서는 문학적 환상의 지점으로 귀결된다. 공포와 환상, 상상, 현실에 대한 본질적 탐구는 <기린이 아닌 모든 것>의 마지막 작품인 ‘이반 멘슈코프의 춤추는 방’(이하 ‘이반 멘슈코프’)의 구절에서 포착된다.


신학을 공부하는 안드레이는 어느 날 쓴 공포소설로 인기작가가 된다. 신학과 공포소설이라는 조합에 다소 의문을 느끼는 나의 표정을 읽은 안드레이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왜, 베스트셀러가 나쁜가? 공포소설과 신학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지 않나? (…) 호러는 매력적인 장르지. 인간에게 관심을 가질 때조차도 호러의 초점은 인간이 아니라 인간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힘에 있다. 그래서 호러는 기본적으로 비관적이다. 인간이 언제나 어떤 보이지 않는 힘에 휘둘리는 존재로 묘사되니까.” (‘이반 멘슈코프의 춤추는 방’, <기린이 아닌 모든 것>, 269쪽)



이 소설은 세계와 문학에 대한 이장욱의 메타 비평적 소설이라고 해도 좋겠다. 신학과 베스트셀러 혹은 공포의 결합은 마치 문학의 본령과 닮아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엇으로 인해 증폭되는 상상력, 인간은 공포를 자각하고 그것에 휩싸이고 마침내 그것에 휘둘린다. 호러가 비관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이 ‘주체’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저 겁에 질린, 유약한 동물일 뿐인 것이다.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은 단 한가지다. 공포를 대면하는 것이다. 이윽고 안드레이는 말한다. “하지만 바로 이 공포를 대면하지 않으면, 인간은 진정한 자신과 만날 수 없다”고. 결국 누가 무엇을 장악하느냐의 문제이다. 보이지 않는 힘, 이를테면 이데올로기, 세계, 주체로 드러나지 않는 수많은 이미지 속에 소비되는 타인들을 비롯한 이미지로서의 나. 그것의 존재를 제대로 바라볼 때에야 인간은 ‘주체’로서의 자아를 획득할 수 있다. 주체적 자아로 나아가고자 하는 존재만이 인간 존재를 휘두르는 보이지 않는 공포를, 그 실체를 마주할 수 있다. 최소한 그것만이 잃어버린 인간 존재에 대한 주체적 자각을 가능하게 한다. 최소한 세계를 파악하고자 하는 인간 주체를 마련하는 발판이 된다. 곧 ‘공포’와 ‘신학’의 관계는 어떤 주체로서의 자각을 이끄는 문학적 상상력과 ‘문학’으로 각각 유비적 상관관계 속에 놓여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이반 멘슈코프’는 직관적인 비유를 토대로 인간 주체와 세계에 의해 조성되는 공포의 즉물성에 대해서 보여준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형식적 차원의 ‘상상력의 구조’이다. 신학 전공생의 호러소설을 소재로, 유럽의 어디일 것만 같은 이국적 배경을 설정하는 이 상상력의 구조는 구체적 자본주의 사회를 말하지 않고도 떠올리게 하는 상상의 원동력이자 문학적 알레고리이다. 중세적이고 음울한 느낌을 주는 배경과 호러, 이국 땅의 이국적 주인공은 각각 2000년대, 한국 사회, 자본주의라는 시공간에 겹겹이 포개놓은 필터인 것이다. 이장욱은 이런 식으로 ‘상상하고 있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상상이 아닌 현실의 지점들을 보여준다. 이것이 소설임을 자각하게 하는 프레임이라는 형식을 통해 그 상상력의 지평을 보여주고 있다.



#fin. 형식의 실험실로서 문학이 나아가는 곳


이장욱은 인간적인 공감을 위한 감정을 상상하기 위해 별다른 내면을 구축하지 않아도 되는 작금에 대하여 인위적 상상의 방법론으로 일침을 가한다. 어떤 일에 대한 ‘상상’은 체험에서 비롯된다. 경험으로 구성된 어떠한 기억이 다른 체화된 기억들과 맞물리면서 변형되고 새로운 지점을 상상하게 되는 것이다. 이 상상이 무분별하거나 근거 없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우선 체험을 바탕으로 했다는 점이 그러하고, 이는 곧 그 상상의 영역에 도달하기까지 추론 가능한 것들로 긴밀하게 구성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VR과 큐레이션 패러다임의 시대에 우리의 상상은 빈약할 수밖에 없다. 알고 있는 만큼, 더욱 깊이 내재화하는 만큼 상상의 영역은 넓어지고 깊어진다. 소설 속 인물들로 형상화 되는 지금의 ‘감정’ 소비시대의 상상은 우리가 체화할 수 있는 세계의 수준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너무나 비논리적이고 협소한 사유수준의 세계를 자아는 ‘자아’라는 자각도 없이 그저 수용체로서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 즉 세계로부터의 경험이 파편적이었으며 습관적인 논리 회로를 따라가고 있다는 뜻이 된다. 이장욱은 이러한 비현실적일 만큼 부실한 상상력을 바라보고 있는 외부적 시선을 마련함으로써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음’을 노출한다. 실체 없이 막연함에도 불구하고 인간 존재를 위협하는 ‘그 무엇’, 그러나 우리가 마주해야 할 그 ‘공포’를 소설적 기법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인간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공포)에서 해방되기 위해서 우리는 그것을 마주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고 있는 무형의 것을 이장욱은 소설적 장치로써 드러내고 있다. 그의 형식적 실험은 상상의 지평이 현실 또는 현실을 담고 있는 스토리에 국한되지 않고 그 형식에 적용될 수 있음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전위적이다. 거울 속의 나를 들여다보는 나, 그 나를 들여다보는 나…로 연장되는 프레임의 무한성은 도달점이 없이 연장된다. 결코 끝에는 이를 수 없다. 그것을 지켜보는 또 다른 ‘나’를 발견하는 만큼 세계는 확장될 것이다. 그것이 겹겹의 프레임이 보여주는 상상력의 무한한 가능성이다. 새로운 카메라를 등장시키는 순간 상상의 틀은 확장되면서 또 하나의 구체적 틀로 압축된다. 내면의 확장과 중지의 반복이다. 최소한 문학이 여전히 상상력의 끝없는 연장선상에 서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이장욱의 소설은 상상의 허약함을 지켜보는 무엇을 통한 공포감의 근원, 즉 빈약한 현실세계를 암시한다는 점에서 예술과 사회성을 고루 갖춘 실험의 요체이다. 큐레이션 시대 감각과 극사실주의 패러다임이 현현하는 현재에, 이장욱이 끊임없이 환기하고 있는 소설적 응시는 문학의 대사회적 영향력으로서의 상상력을 넓혀가려는 시도라고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당선소감>

 

‘뭔가 부족한’ 마음 글로 세상을 마주하게 하는 힘

 

새삼 진지해지고 마음 한구석이 묵직해진다. 지금껏 내 글 아니었던 적 없지만 이젠 비로소 ‘내’ 글이구나 싶다. 동시에 내 것만은 ‘아닌’ 글임을 실감한다. 세계를 살고 사람을 겪고 이야기를 한다. 감각과 기억을 살려 한 글자씩 적는다. 내 글이면서 내 글만은 아닌 이유이다. 부끄럽지만 이런 무게들을 지고 나아가겠다는 호기를 부려본다.

‘뭔가 부족하다’는 마음이 계속 공부하고 글을 쓰게 했다. 결핍이나 갈증이 늘 유쾌한 것만은 아니지만 무언가로 전진하게 하는 큰 원동력이 될 수 있음을 실감한다.

‘뭔가 부족한’ 이 마음을 안고 이제 글로써 세상과 마주하겠다. 세계와 문학에 대한 많은 생각들을 신중하게 쓰겠다. 매일 조금씩, 더 좋은 글을 쓰는 평론가가 되겠다. 이런 것들을 다짐하고 꾸준히 나아가겠다.

좋은 일에 함께 기뻐해 주는 사람들이 곁에 있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그들에게 이런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 될 수 있어서 기쁘다.

문학에 입문하게 해주신 최원식 선생님, 늘 옆에서 든든한 정신적 지지자가 되어주시는 김명인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격려해 주시고 훌륭한 가르침을 주신 많은 인하대학교 선생님들과 동학들께도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염려가 많으신 어머니, 아버지께 “평론 씁니다” 할 수 있게 되었다. 두 분 오래도록 건강하셨으면 한다. 한편으로는 조금 더 공부할 수 있는 그럴듯한 이유가 생겨서 진심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빚진 것 많았지만 오늘을 토대로 좀 더 빚져볼까 싶어서 면구스럽다. 그럼에도 잘 부탁드린다고 말씀드려야겠다.



◎ 약력

▶ 1991년 인천 출생. 경기 시흥 거주

▶ 인하대 한국어문학과 졸업
▶ 현재 인하대 한국학과 현대문학 전공 석사과정



<심사평>

 

제기한 문제 책임지는 타당한 분석·미래지향적 고민 돋보여

 

투고작이 총 32편에 달할 정도로 높은 경쟁률을 보인 평론 분야는 전반적으로 시대적 난제를 문제 삼는 문제제기 능력들이 돋보였다. 세월호 사태와 관련된 사회적 죽음에 대한 문학적 응전력이나 지식의 도덕성과 정치성의 문학적 구현, 혹은 최근 문단의 표절 논쟁을 둘러싼 문학적 창조성의 문제 등 시론(時論)적 특성과 접맥된 평론 주제들이 많았다. 이 때문인지 자기만의 개성적 용어와 창의적 독법을 보였음에도 작가론 혹은 작품론의 입장에서 해설 수준에 그친 글들이 상대적으로 더 아쉽게 읽혔다.

집중적으로 논의된 4편의 글 중 ‘벽장 속에서 나온 소년의 이유: 속죄로서의 여장남자-황병승론’은 황병승의 여장남자가 남성적 여장남자로 잘못 읽히는 지점을 내파하면서 속죄의식을 통해 남성중심주의에 대한 진정한 반성을 보여주는 측면을 설득력 있게 분석하고 있으나 글의 구성이나 텍스트 배치가 부자연스러웠다. ‘닿지 않는 시간-신해욱론’은 이론의 원용 없이도 텍스트를 잘 살려내는 언어적 감각이 돋보였으나, 본론의 패기에 비해 결론의 내용이 단순하고 당위론적이었다. 가장 끝까지 당선작과 겨뤘던 ‘밤으로부터 온 편지: 사랑의 정치성’은 김연수의 소설들이 단순히 사랑을 통해 재편되는 삶이 아니라 감각의 분할을 통해 삶의 변화를 어떻게 추구하는지 개성적이고 아름다운 문장들로 잘 분석했지만 정치성에 대한 기존 논의와의 차별점이 약했다.

당선작인 ‘ 부정의 프레임n-이장욱 <기린이 아닌 모든 것>, <천국보다 낯선>을 중심으로’는 이장욱 소설의 형식 미학을 ‘무한증식’의 개념으로 풀어내면서 이때의 ‘차이 나는 반복’이 어떻게 보충이 아닌 소거를 통해 세상과 문학에 대한 편견을 무화시킬 수 있는지 정치하게 분석하고 있다. 부정확하고 다소 현학적인 용어의 사용이 문제였지만, 중단 없는 부정(否定)의 프레임을 통해 또 다른 문학적 사유를 촉발시키고 있는 이장욱 소설의 장점이 잘 부각되었다. 제기한 문제를 책임지려는 분석이 타당했고, 큰 문제를 고민하는 자세가 미래지향적이었다. 문학의 돌파력을 제대로 보여주는 평론을 기대한다.



심사 정과리·김미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