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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평] 날마다 새롭고 언제나 그립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의 이미지 배치방식이 요청하는 새로운 주체성의 사유  / 서은주


이미지를 수단으로 이미지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어떠한 방식으로든 세상은 순수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근접할 수 없는 각자의 진실만이 파편으로 어지럽게 흩날릴 뿐이다. 그러니 나를, 혹은 세계를 통일된 덩어리로 지각하는 것은 둔하거나 혹은 어리석다. 나는 도저히 네가 될 수 없고 중심 없이 흩어진 이 세계의 희망은 덧없기만 하니. 온통 파편들을 간신히 이어놓은 형국,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이곳에서 우린 때때로 무섭고도 외롭기만 하다. 그래서 그 파편과 파편 사이의 결여, 깨진 그 틈이 불안한 우리는 환상을 자꾸만 오라한다. 일관된 사건들이 인과적으로 직조된 영화들의 삼차원적인 환영이 아편처럼 우리를 달래주곤 하니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쉽게 봉합돼버린 덩어리는 언제나 허위로 판정이 나곤 했다. 그것은 결국 누군가의 한갓 꿈, 이데올로기로 탄로 나 무책임하게 사라지곤 했으니 말이다. 독일 영화이론가 지그프리드 크라카우어의 말처럼 균열되고 파편화된, 따라서 의미의 총체성 따위가 존재하지 않는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통일성을 유지하려 하는 일정한 저항방식이라는 것은 언제나 자본주의 논리로 다시 통합되었고 결국 비저항적인 것으로 귀착되어버리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러므로 우리는 차라리 노골적이게 됨으로써 진실과 한층 가까워지게 될 것이다. 곧 통일성이라는 허상에 대한 과도한 믿음이 아닌 파편이 열어주는 틈에 대한 냉정한 인정이 절실하게 요청되는 지점이다. 아무래도 세상은 다시 새롭게 써져야 할 것 같다.


그렇다면 중심 없이 부서진 이 세계에서, 너와 나 우리가 다시 진정으로 만날 방법은 없는 걸까. 파편들의 깨진 틈, 그 심연을 넘어 나와 네가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요원한 것일까. 어떻게 나는 너에게 진정으로 가닿을 수 있는 걸까. 또 그 허위의 뒷장과 환영의 장막을 걷고 어떻게 세계의 진정한 모습을 열어 볼 수 있을까. 사정이 그렇다면 즉, 그 틈이라 하는 것이 어떠한 방식으로든 메울 길 없다면, 차라리 그 틈을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보는 건 또 어떨까. 그 파편들이 새로이 짜일 어떤 가능성의 원천으로 말이다. 크라카우어는 자신의 영화이론을 펼치면서 이미지의 파편성과 그것을 통해서 새롭게 짜일 수 있는 전망, 그리고 그 전망의 열어 보임이야 말로 진정한 변혁의 수단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렇다면 그의 견해를 따라 오로지 파편과 틈이 도리어 이 도식화되고 체계 지어진 닫힌 구조의 세상을 벗어나게 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바로 홍상수의 영화‘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2015년 개봉)는 그러한 가능성의 지대에서 새로운 사유를 전망해 본다. 그것은 영화의 전, 후편(‘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와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이라는 파편의 반복과 그 틈인 차이의 사유에 대한 방식으로다.


삶은 연습 없는 한 번의 실전, 늘 새 살결로 세상을 마주해야 한다는 사실은 새로움의 설렘을 주다가도 이내 영원한 무서움의 방에 홀로 갇히게 한다. 누구나 염원하지 않는가. 이번 생을 다시 한 번 더 살 수 있다면 그래서 세계를 다시 고쳐 쓸 수만 있다면. 그렇게 쓰고 또 다시 고쳐 쓰는 반복된 표현의 방식으로 우리는 마치 영화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의 함춘수가 선물 받은 시집의 메모 글귀처럼 ‘우리 삶의 표면에 숨겨진 것들의 발견’으로 ‘우리의 두려움을 없애’기를 바라는 것이다. 어쩌면 신처럼 단 한 번의 직관으로 써내려갈 수 없는 우리가 얻을 수 있을 세계의 진실이란 오로지 그 뿐이겠다. 바로 그 ‘우리 삶의 표면’이라는 파편을 끝없이 쓰고 또 고쳐 쓰는 바로 그 겸허한 방식으로 말이다. 오로지 그 영원한 반복과 차이만이, 쳇바퀴만을 통한 ‘숨겨진 것들의 발견’만이 우리가 취할 유일한 방법이다. 파편의 하염없는 재생산만이 바로 파편의 끊임없는 교정을 이루어낼 수 있게 해줄 테니 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언젠가는 세계의 어떤 근원적인 시간의 역에 우리는 도착할 수 있을까.


아마도 그 근원적인 시간의 역이란 우리가 꿈꾸는 절대적 자유와 해방의 장소이리라. 그 곳에서 인간은 또 사물은 스스로 빛난다. 온통 순수한 물(物) 자체로 존재하는 그 세계는 오로지 무수한 파편조각들이 열어 보이는 차이의 틈, 그 미세함에 대한 감각과 사유를 경유해야만 다다를 수 있는 곳이다. 클리나멘과 같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작은 것, 아니 그보다 더 작고 미세한 것에 대한 감각과 사유만이 근원적 시간인 방대한 우주와 가느다란 실처럼 연결되어 있음을 감지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우리는 이미지를 수단으로 이미지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니 우리 생에 비록 희망이 보이지 않더라도 이룩하고 다시 또 허물어뜨리는 그 하염없는 반복의 방식만을 부지런히 행하자. 그리고 반복된 파편들의 틈에서 미세한 차이를 느껴보자.


어쩌면 영원한 반복과 차이, 그 틈의 놀이만이 우리가 얻을 수 있을 유일하고도 오롯한 세계의 진실이니 말이다. 분명 파편들의 섣부른 상상적 봉합이 아닌, 질서의 균열을 초래하는 그 틈은 세계의 진실을 보여줄 새로운 주체성의 장소가 되어줄 수 있으리라. 어쩌면 이 틈을 망각하는 통일성의 허상이야말로 차라리 거짓된 이데올로기가 아닌가. 그 틈은 타자로서의 우리들을 적극적으로 환대하고 있다. 영화를 보는 관객은 자기 안에서 끊임없이 미래의 타자들을 길러낸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글은 다르게는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를 통해 영화와 관객과의 관계를 다시 묻고자 하는 홍상수의 노력을 기술한다. 그것은 홍상수가 요청하는 새로운 주체성에 대한 탐색이다.


 


말하지 않은 침묵이 차라리 투명하다


 


반복 병치된 두 판본은 제목부터 미묘한 차이의 놀이를 벌인다. 글자 수 그리고 문장 구조가 똑같은 두 문장이 같은 단어의 자리바꿈만으로 작은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물론 언제나 ‘지금이 맞’는 삶을 사는 관객으로선 전편 제목은 ‘그때가 맞’고, 후편 제목은 ‘지금이 맞’으니 순간적으로 후편의 영화에 방점을 찍는 실수를 할지도 모르겠다. 마침 미묘한 차이로 병치된 두 판본의 서사 혹은 이미지배치 방식도 전편보다 후편에서 훨씬 관객의 감정이 잘 동화되도록 구성해놓았으니 말이다. 게다가 영화의 전체제목마저도 후편의 것을 따르고 있다. 두 제목 중 후편 판본의 제목을 전체 타이틀로 선택함으로써 ‘지금’을 ‘그때’보다 우선하는 듯한 <제스처를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두 판본은 우열이 없다. 두 판본 중 어느 것이 진짜 춘수와 희정 이야기인지 관객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마치 정해진 삶의 교본 없이 무한한 생성의 차원, 즉 우리가 이렇게 살수도 혹은 저렇게 살수도 있는 것처럼 그 두 가지 삶의 판본은 중심 없이 산포되어 있다. 그것은 여러 겹으로 잠재된 우리의 세계 중 어느 결의 것이 가장 현실화 가능한 것이라 단언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다만 무한한 가능성 중 단 하나가 우연히 분기되고 현실로 불거졌을 뿐이다. 그렇게 전, 후편의 영화는 각각이 누군가가 만든 영화, 혹은 누군가가 관람하는 영화라는 중심적 기준 없이 병렬되어 있는 방식의 배치를 따르고 있다. 물론 앞서 밝혔듯 전편보다 후편의 인물들이 더 진솔하고 그들 간 관계도 농밀하다. 그래서 얼핏 후편에서 감정의 전이가 더 쉽게 이루어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반드시 후편 삶의 방식이 더 옳은 것이라 단언할 수 있을까.


진솔한 것이, 온 마음을 다해 남김없이 말해버리는 것이 반드시 더 온당한 방식이 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편(‘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은 확실히 후편에 비해 인물들 간의 관계에 틈이 있다. 후편에 비해 마치 처음 만나는 사람들처럼 춘수는 희정에게 거리를 두는 제스처와 말을 한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틈으로 인해 화실에서 그는 희정으로부터 ‘아주 먼 곳으로 여행을 온 듯한’ 낯선 느낌을 전해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또 이어지는 술집장면에서, 적당한 거리를 둔 마음의 표현만이 오고 간 둘의 관계가 도리어 춘수의 말처럼 ‘아주 완전했었다’는 아쉬움의 정감을 낳는다. 전편 후반부 감독과의 대화 장면에서 함춘수가 말의 힘을 믿지 말라고 설파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게다가 후편 술집장면의 희정이 느낀 ‘섭섭’함이란 춘수의 고백의 말이 너무 노골적이었음에서 비롯되지 않는가. 말하지 않은 침묵이 차라리 투명하다. 우리는 그 곳에서 언제나 새로운 기억,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시간이란 ‘지금’이 다시 ‘그때’로 끊임없이 편입되거나 혹은 다시 미끄러져 버리는, 도무지 포착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의 전체 제목은 홍상수가 후편 영화의 제목을 들어 딱히 우선적으로 선택했다기보다 ‘지금’과 ‘그때’, 즉 현재와 과거에 대한 홍상수 나름의 시간관념을 표현한 것이라 보는 것이 무리가 없을 듯하다. 영화는 잠시 ‘지금’을 선택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그때’로 끊임없이 미끄러져 가버린다. 곧 ‘지금’과 ‘그때’는 영원히 반복되며 교체된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전편인 ‘그때’를 버리고 후편, 곧 ‘지금’의 방식을 택한 것이 아니라 ‘지금’은 지금대로 ‘그때’는 그때 나름대로 똑 같은 무게 값의 정당성을 인정해줄 것을 바란 것이다. 관객은 다만 ‘그때’와 ‘지금’이 이리저리 서로 번갈아 나타나며 잠시 방점을 찍고 사라지는 그 유희를 즐기면 그만이다.


함춘수는 희정에게 여러 차례 강조했다. 예술가의 길을 간다는 것은 우리의 감각을 ‘엄청 예민하게 엄청 용감하게’ 연마해야 하는 힘든 일이라고 말이다. 그처럼 홍상수는 관객에게 우열을 선택하지 말고 두 판본 삶의 미묘한 차이를 예민하고 용감하게 감각하며 즐기기를 바란다. 그러한 방식으로 영화는 판본의 우열을 논하는 고정된 중심을 풀어버리고 그 세계 밖, 틈으로 관객을 밀어낸다. 그러나 그곳에서 관객은 절대 외롭지 않다. 오히려 그 틈에서 말할 수 없는 다양한 삶이 끊임없이 분기될 수 있는 가능성의 무한한 우주, 즉 어떤 근원적 시간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이 영화가 미세한 차이와 반복의 구조로 두 판본을 병치시킨 이유이다.


 


본적(本籍) 없는 사생아들의 놀이터에서


 


그러한 측면으로 보자면 홍상수의 이 영화는 과거 ‘옥희의 영화’와 ‘극장전’이 관객에게 요구하는 기획을 한층 더 발전 · 심화시켰다 할 수 있다. 적어도 그 영화들 속에 깔려 있는 중심, 즉 영화 속 영화의 엄연한 주인이나 고정적인 원본의 기준만은 파기해버렸으니 말이다. ‘옥희의 영화’와 ‘극장전’ 속의 영화 판본들처럼,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의 두 판본은 누군가가 주체적으로 만든 영화도, 또 누군가가 대상적으로 관람하는 영화도 아니기 때문이다. 곧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속 두 판본의 영화는 춘수가 만든 영화이지도, 희정이 직접 본 영화도 아니다. 다만 영화를 보는 관객은 하나의 고정된 전형이 없는 다양한 판본들의 반복과 차이의 놀이 속에서 어떤 감각적 통찰을 얻을 뿐이다.


들뢰즈는 개념이나 재현의 반복이 아닌 자신 안에 차이를 포괄하는 동태적이며 강도적인 반복을 긍정했다. 곧 그는 이 후자의 반복만이 전자의 경계를 넘어뜨려 세계를 향해 열어줄 수 있는 보다 정신적인 것이라 여겼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의 두 판본의 반복 방식은 하나의 중심, 즉 재현되는 영화적 내용에 대해 질문하려 하는 것에 목적이 있지 않다. 그것은 그 재현을 넘어 두 판본의 반복 안의 미세한 차이를 사유할 수 있는 우리들의 새로운 감각을 요청하는 것이다. 무릇 진실이란 반영하지 않고 구성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구성되는 한 관점을 선택하는 결과, 즉 진실에 대한 한 가지 입장을 전달하는 것으로 구성되고 해석될 때만이 오히려 역설적으로 진실에 가장 가까워질 수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유일한 현실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은 끊임없이 현실을 생산하는 방식으로만 존재한다. 그러므로 오히려 홍상수 영화의 유효함을 논하려면 영화가 재현하는 내용이 아니라 그 재현의 방식, 그리고 영화와 관객과의 관계를 염두에 두어야 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면에서 이는 바로 홍상수의 전작인 ‘자유의 언덕’이 관객에게 요청하는 것과 유사한 방식이다. 물론 ‘자유의 언덕’은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와 달리 하나의 판본이 다. 그러나 서사방식이 상당히 독특한데, 바로 비선형의 파편적 이미지배치방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로 인해 관객의 일관된 이성과 논리적인 기억을 순차 없이 뒤섞고 파기한다. 그리하여 영화의 재현된 내용보다 차라리 영화의 이미지배치방식이라는 형식, 그리고 영화의 물리적 형태를 최대한 사유하도록 한다. 그리고 그러한 자유로운 서사조각들의 놀이를 통해 관객이 얻을 수 있는 것은 감각의 자유로운 해방이다. 그리고 이 점이 바로 두 영화가 공명하는 지점이다. 마침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의 마지막 장면에서 희정이 감상하는 영화가 ‘자유의 언덕’임은 단순한 우연의 일치만은 아닐 것이다.


두 영화에서 서사는 정박되어 있지 않다. ‘자유의 언덕’의 서사는 관객이 주체적으로 구성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으며,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는 두 판본이 재현하고 있는 내용이 아닌 반복과 차이를 낳는 그 판본들 형식에 대한 미세한 감각의 분화로 다시 새롭게 관객이 내면의 서사를 구축하도록 한다. 그러므로 이들 영화에 있어 서사는 고정되게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와 관객과의 접점에서 만들어졌다가 사라지며 언젠가는 다시 또 만날 것을 기약한다. 그것은 내러티브가 아니라 생성과 과정으로서의 스토리텔링 또는 화행(speech act)을 강조하는 것이다. 내러티브의 완결성을 포기하는 대신 새로운 사유의 가능성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내러티브의 유연성은 관객 자신만의 새로운 서사성의 형태를 상상하게 한다. 그것은 끊임없는 변화하고 채워지고 비워지는 작용의 연속으로 문제와 해결, 균열과 봉합이 내러티브의 주요한 관건이었던 전형적인 영화보기에 대한 반기이다. 그것은 더러는 관객이라는 주체와 텍스트라는 객체의 거짓 화해가 아니라 바로 그 합치의 불가능성, 차이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미래의 진보적인 서사이론을 주창했던 마리 로르 라이언을 따라 텍스트란 결국 세상과 그 구성원 역사의 한 부분을 포착해서 인과적으로 엮은 상황들과 사건들을 우리의 마음속에 재현한 것이라는 관점을 수용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텍스트 그 자체 보다 텍스트에서 모종의 의미를 추론해내는 관객의 수행능력 그 자체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는 더 이상 하나의 고정된 실체, 즉 의미의 담지체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유동하며 또 관객의 구성능력에 따라 새롭게 재생산된다.


바로 그러한 방식으로 홍상수는 이 상투적인 세계를 벗어날 방도를 자신의 영화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가능할 조건이란 바로 홍상수가 마련한 독특한 이미지배치 방식이다. 그것은 기억의 파편들을 중심 없이 섞어버리는 ‘자유의 언덕’과 원본 없는 사본들의 충돌과 병치의 놀이를 펼치는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의 방법을 경유해서다. 곧 ‘자유의 언덕’은 동일하고 근원적인 그 무언가를 상정하느니보다 차라리 그 파편들의 표면에서 무수히 만났다가 부서지는 우리의 감각을 즐기자는 감독의 전언, 바로 그 순수한 사유의 가능성의 지대에서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와 반갑게 조우한다. 재현되고 있는 내용 자체보다 재현의 영원한 재배치, 그 끊임없는 구성 방식 자체의 사유를 통해서 말이다. 그러니 홍상수는 할 수 있었다면 더 많은 판본들을 또 다르게 줄줄이 써내려가고 싶었을 것이다. 물음 없는 답변, 본적(本籍) 없는 사생아들의 놀이터인 이 세계는 근원 없는 파편들로 둘러싸인 곳, 가능하다면 이야기가 언제든 무수히 분기될 수 있는 무궁무진한 곳이니 말이다. 그러니 원본 없는 사본들의 무수한 이야기의 판본, 그 판본들의 미끄러짐, 그들의 병치와 충돌이 가능하게 하는 틈, 바로 그곳에서 문득 떠오르는 감각적 통찰만이 세계의 어떤 진실에 근접할 수 있게 할 것이다.


 


 


사물은 그 스스로 빛난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두 판본의 차이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형태로 드러날까. 또 그것은 어떻게 빚어지는 것일까. 그리고 그것은 어떤 의미와 영향을 낳는 걸까. 얼핏 두 판본은 전반적 분위기와 인물관계의 깊이에서 우선 그 차이를 견주어 볼 수 있다. 마치 전편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이하 ‘그때는’)는 후편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이하 ‘지금은’)에 대한 초벌구이, 혹은 하나의 기의에 대한 기표 같은 느낌을 준다. 혹은 전편이 본문이라면 후편은 그에 대한 일종의 주석 같은 느낌을 줄 정도이다. 그것은 단순히 ‘그때는’이 먼저 배치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때는’의 이야기선이 단순하고 전반적 분위기가 가벼운 데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마치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 맺는 관계처럼 전편의 인물들, 특히 춘수와 희정과의 관계는 상당히 피상적이다. 때문에 전편의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무미건조하고 담백해서 이렇다하게 주의를 끌만한 것도 없다. 그에 비해 후편인 ‘지금은’은 ‘그때는’에 비해 인물들 관계의 밀도와 온도가 상당히 높다.


그렇다면 두 판본은 어느 시점부터 확연히 달라진 걸까. 전편 ‘그때는’에서, 행궁 안의 ‘복내당’을 찾은 함춘수는 그 곳이 ‘가장 예쁘다’며 마루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바로 그곳에서 희정을 만나게 되는데, 묘한 것이 전편에서 ‘복내당이 예쁘다’라는 춘수의 말은 바로 후편 ‘지금은’에서는 희정이 춘수에게 건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마치 감각의 교감과도 같이 전 후편에서 둘이 함께 나눠 갖는 이 대사는 예민하게 이를 감지하는 관객의 감정을 동요하게 한다. 더 나아가 둘의 관계가 전편보다 얽히고설킬 것임을 예견하도록 한다. 그처럼 말의 내용은 그 말 자체에 있지 않다. 그 말을 주고받으며 얻는 관계, 구성의 힘이 그 말을 육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때 이들의 만남을 마치 축복하듯 멀리서 울리는 희미한 종소리는 괜하게 배치된 것이 아니다. 이후 후편 ‘지금은’의 찻집장면에서, 희정이 자신의 아주 내밀한 부분(개인적 가정사)까지 들추어낼 정도로 둘 관계는 점점 농밀함을 더해간다. 여기서 후편 ‘지금은’의 내밀한 관계는 전편 ‘그때는’의 피상적 관계와 충돌한다.


그렇게 점차적으로 쌓인 작은 계기들은 다음 장면인 희정의 화실에서 또 한 번 새로운 관계를 낳는다. 아무래도 후편에서 희정의 그림에 대해 품평하는 춘수의 태도가 보다 비판적이고 노골적이게 된 것은 바로 앞 장면들에서 쌓인 감정의 누적적 결과이니 말이다. 전편에서 무조건 희정의 예민한 감각과 예술적 능력을 추켜 세워주던 춘수가 후편에서는 희정의 작가적 능력을 깎아내리는 상반된 태도를 보인다. 그림이 상투적이고 자기 위안적이라며 단정해버리는 춘수의 이러한 태도로 인해 희정은 화를 내게 되고 둘의 관계가 잠시 위태로운 과정을 겪는다. 그러나 비온 뒤 땅이 더 굳어지듯 오히려 둘은 더 깊숙한 관계로 맺어지고 그 돈독함의 밀도는 점점 높아 간다. 그 덕분에 춘수와 관객은 화실의 쪽문을 열고 나와 희정의 집과 집 뒤 불상까지 소개받는 뜻하지 않는 광경을 얻는다. 또 이어 전편과 다르게 전개되는 클라이맥스, 즉 술집 장면과 ‘시인과 농부’에서 술자리 장면, 그리고 희정집 골목 장면에서의 에로스는 관객에게 또 얼마나 강렬한 감정을 선물하는가.


사실 술집 장면은 등장인물이나 배경, 기본적인 대사 말고는 전 후편의 공통점을 찾기가 어렵다. 분위기도 전혀 다르다. 전편이 밝고 경쾌하나 피상적이라면 후편은 자못 심각하다. 그 결과 관계는 더 내밀하여 오히려 관객으로 하여금 믿음직스러운 느낌을 준다. 여기서 춘수와 희정은 솔직함으로 작아지며 결국 그들 사랑의 진실이 토로되는 기회도 얻는다. 그렇게 둘은 끈끈히 맺어진다. 그렇다면 후편의 춘수가 옷을 벗는 장면에서 관객이 얻는 통쾌함의 전율은 단순히 그가 옷을 벗는다는 자극적인 사실에서 빚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 감정은 전편과 같은 장소에서 행해졌던 상투적인 사람들과의 피상적인 관계를 균열하는 것이다. 이렇듯 전편과 후편의 판본은 익숙함과 낯섦이 서로가 서로를 갈마들거나 때로는 서로를 충돌하고 균열하면서 진행되는데 중요한 것은 그러한 두 판본의 관계와 구성에서 관객은 미세한 감각의 부서짐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낱낱으로 흩어진 감각은 곧 다가올 새로운 세계를 감지할 준비를 다진다.


옷을 벗는 행위를 희정과 관객을 제외한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이유는 그래서 당연하다. 오직 희정과 관객의 예민한 감각만이 춘수의 미묘한 감각과 감히 교통할 수 있는 것이다. 급기야 영화 후편 ‘지금은’의 마지막에서, 희정의 존재를 묻는 보라의 질문에 춘수는 예전부터 잘 알던 사람이란 말까지 할 정도이다. 물론 관객 또한 그 연유를 안다. 그렇다면 영화 후편 후반부에서 희정 집 뒤 불상에서 크게 울러 퍼지는 종소리는 누구를 위한 것일까. 전편에서 희정 엄마만 새겨들었던 그 종소리는 후편에서 희정과 춘수, 그리고 관객의 귀에까지 울려 퍼진다. 이 종소리는 마치 그들 감각의 소통이 이룩한 감격이 청각화된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또 그것은 영화 후편 맨 마지막 장면의 하얀 눈송이의 축복과 이음동의어가 아닐까.


그 종소리와 눈송이는 스크린 안의 춘수와 희정에서 스크린 밖 관객의 자리에까지 삼투한다. 순간 관객은 영화 안도 영화 밖도 아닌 장소, 곧 새로운 세계의 시간을 감각하는 통찰을 얻는다. 관객은 홍상수가 마련하는 이미지를 통해 이미지를 벗어나게 되는 경험을 하는 것이다. 즉 이 영화 특유의 이미지 배치방식, 즉 파편의 이미지들이 충돌하고 병치되면서 마련된 ‘틈’ 속에서 상투적인 이미지의 이 세계를 벗어난 어떤 근원적 시간을 감각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 느낌은 나타났다가 곧 사라진다. 찰나의 허망한 체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세계는 변한다. 그리고 사물은 그 스스로 빛난다. 또한 그들은 서로를 맞잡는다. 감각으로 교감되는 진정한 소통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이제 희정, 춘수, 그리고 관객은 더 이상 그 전의 그들이 아니다.


어떻게 이러한 커다란 변화가 가능했을까. 그것은 처음 그들의 만남에서 ‘복내당이 예뻤다’는 말이 두 판본을 갈마들 때, 다음 만남들(찻집 장면, 술집 장면, 시인과 농부 술자리 장면, 희정의 집 앞 골목 장면)의 두 판본이 충돌하면서 서로를 드나드는 와중 희정과 춘수, 그리고 관객 서로의 내면이 교감되었을 때, 바로 그 때 생성된 그 사소하고도 미세한 감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또 결국 커다란 변화까지 이루어낼 수 있는 것은 그러한 이들의 감각이 순간적으로 잘 소통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화실에서 춘수는 희정에게 말한다. 순수하고도 외로운 예술가의 길을 간다는 것은 ‘엄청 예민하게 엄청 용감하게’ 감각을 발휘해야하는 일이라고. 마치 그것은 이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 홍상수가 권하는 주문과도 같다. 정박된 원본 없이 끊임없이 생성되는 사본들의 충돌과 배치, 그 틈의 놀이 속에서 홍상수는 우리의 감각을 엄청 예민하게 엄청 용감하게 세우며 이 영화를 느껴볼 것을 권하는 것이다.


 


 


날마다 새롭고 언제나 그립다


 


알고 보면 홍상수는 두 판본의 차이와 반복의 틈에서, 단지 미묘한 차이의 감각 또 그것이 낳는 미세한 표정과 사소한 언어(대사)부터 바꾸는 것이 진정한 변화의 시작이라는 사실을 갈파하고 싶은 것이 아니었을까. 커다란 변화 이전의 하나의 사건, 그 사건 이전의 사소한 행동, 그 행동이전의 감정, 또 그 감정이전의 아주 작고 미세한 감각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우리의 고된 노력을 이 영화는 일깨우는 것이다. 그것이 마침내 커다란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임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아주 작은 사소한 감각을 바꾸면 감정이 바뀌고 이어 우리의 행동이 바뀔 것이다. 또 이어 그것이 작은 상황과 큰 일이 바꾸게 하고 궁극은 세계를 바꾸어 줄 터이니 어찌 이 아니 혁명적이라 할 수 있을까. 그러한 측면으로 홍상수 영화가 현실사회와 연루되어있는 방식은 영화를 도구로 사회변화를 견인해내는 사회적 리얼리즘 영화들에서보다 훨씬 근본적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영화가 재현하는 내용이 아닌 그 미학적 형식을 경유한 방식이다.


크라카우어는 현실이라는 것은 파편화되고 분산되어 있으며, 일정한 개념적 틀 안으로 포괄되지 않는 것이라 했다. 일정한 개념적 틀 안으로 포괄된 총체적 실재 대상은 진실이라기보다 이데올로기적 한 관점에 불과하며, 파편화되고 분산된 의미로 한 개인 개인이 능동적으로 받아들이고 표현하는 그 각각의 것만이 진실이라는 것을 전제로 삼는다. 무릇 영화란 바로 그 파편화된 현실 조각들의 모음이다. 관객은 현실적 좌표 없이 다양한 해석의 물결 위를 방랑하는 겨자씨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는 바로 그 파편들의 판본의 반복과 차이가 빚어내는 미세한 감각의 분화에서 기존의 주체성을 다시 사유해볼 것을 권유한다. 그것은 홍상수가 제시하는 새로운 이미지의 배치 방식을 통해서이다. 일정한 좌표 없이 삶의 표면 위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숙명을 가진 존재, 우리들에게는 순간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하나의 관점만이 유효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홍상수의 전언처럼 미묘한 감각의 차이를 느끼는 것으로 가능하다.


이 영화에서 관객은 특권적 이미지 배치방식에 따른 고정적 의미를 수여받는 수동적인 객체가 아니라 비로소 그 스스로 의미를 창출하는 능동적인 주체가 된다. 그리고 그 주체는 보편성의 동질화로 굳어지지 않는 무시로 흔들리고 무한히 균열하는 감각의 다양체이다. 그 다중적 긴장 속에서 관객은 사분오열로 들끓고 날뛰는 자신안의 모든 타자들 모두를 한꺼번에 끌어안는다. 우리 삶에서 버릴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타자로서 우리들 자신을 환대하는 방식이다. 이제 세계는 날마다 새롭고 언제나 그립다. 이 영화가 취한 파편적 이미지 배치는 그러한 방식으로 새로운 사유의 가능성이 되어 줄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방법으로 상투적인 주체를 끊임없이 혁파해 새로운 주체의 모습을 창안해낼 수 있지 않을까.


우리의 공간은 유한하고 우리의 시간은 무한하다. 유한한 공간은 얼마나 상투적이며 무한한 시간은 또 얼마나 한량없는가. 영원히 회귀하는 우리의 지루한 삶이 다시 달라지는 계기를 맞을 수 있는 방법이란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유한한 것이 자꾸만 다시 돌아오는 이 상투적인 반복, 영원회귀의 쳇바퀴 속에서 우리가 유일하게 춤을 추고 웃을 수 있을 방법이란 바로 영화 속 춘수와 희정이 미세하게 교감했던 그 미묘한 감각의 차이 그 자체를 우리가 영화를 통해 인식하는 일이다. 오직 그것만이 유일한 변화를 낳을 수 있는 길이니 말이다. 또 그러한 변화만이 중심 없이 부서진 이 세계의 파편들을 새롭게 다시 끼워 맞춰볼 수 있을 통로, 즉 진정한 소통의 순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홍상수의 영화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는 ‘자유의 언덕’에 이어 관객의 새로운 감각, 새로운 주체성의 변화를 요청하고 있다.



[단평] '새로운 생명의 판타지아', 장건재의 '한여름의 판타지아'  / 서은주

 

작가는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사람이다. 그는 단선적인 현실공간을 비집고 들어가 무한한 시간의 틈을 열어 보이는 이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현실의 시간은 흑백 필름의 무덤이다. 작가는 특유의 감각으로 주인 없는 그 무덤들의 목소리를 듣는 이다. 아마도 그것은 ‘한여름의 판타지아’(2014년)에서 장년의 겐지가 간직하고 있는 아련한 첫사랑의 기억을 불러오는 것이고, 공무원이 된 유스케가 잃어버렸던 배우의 절실한 꿈을 되찾아주는 일일 것이다. 이때 첫사랑 요시코가 ‘왜 이제 왔어! 계속 기다렸는데’라 하는 간절함에 교감할 수 있는 능력은 영화 속 김태훈의 영화(2부 ‘벚꽃우물’)를 넘어 영화 밖 장건재의‘한여름의 판타지아’를 완성하게 하는 추동력이 된다. 그러므로 김태훈이 과거의 목소리를 불러내고 현란한 불꽃놀이를 상상하는 영화 안은 곧 장건재가 오래된 도시인 고조를 관찰하고 기록하려는 영화 밖과 단단히 결속되어 있다. 그렇게 영화 안과 밖은 묘하게 일렁인다.


그렇다면 장건재는 남이 듣지 못하는 것을 듣는 사람, 곧 영매다. 영화 속 주인 없는 무덤들처럼 아득한 시간 속으로 묻혀버린 과거의 소중한 기억과 잠재적인 꿈들을 위무하고 또 통역해주는 존재. 장건재는 그러한 방식으로 오래된 고조의 소멸된 과거의 시간을 들추어 오늘의 시간으로 접합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바로 영화라는 ‘환타지아’의 방식을 통해서 말이다. 그렇게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들인 김태훈과 유스케, 그리고 혜정은 장건재와 함께 비로소 진정한 작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사실 이 영화에 제작자로 참여한 가와세 나오미가 오랫동안 영화적으로 천착해온 방식이기도 하다. 그는 이를테면 ‘하네즈’(2011년 개봉)를 통해 발굴 중인 아스카 땅의 과거를 살았던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자 했다. 언제나 그렇듯 그는 자신의 터전에 묻혀있는 과거의 목소리를 듣는 것을 계속된 영화적 과제로 삼았던 것이다. 그런데 같은 공간인 고조, 바로 그 오랜 도시에서 다시 장건재가 과거 속 무의식의 함성을 읽어보려 한다. 그것은 마치 가와세 나오미처럼 ‘써지지 않는 것을 읽어’ 내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유스케와 혜정의 여행 중 로맨스를 담은 2부(‘벚꽃 우물’) 영화는 고조를 배경으로 영화를 만들려는 감독(김태훈)과 배우(박미정)의 다큐멘터리인 1부(‘첫사랑 요시코’)의 영화적 시간의 틈을 열어 보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2부는 1부의 세계를 틈입한 하나의 흔적이다. 따라서 그것은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불꽃놀이이고, 판타지아다. 사실 여행 중에 만나는 사람들의 인연이 그렇지 않은가. 또 그렇게 바람 같고 먼지같이 금세 소멸해버릴지 모르는 것이 영화라는 매체의 숙명이지 않는가. 흑백화면인 1부에 대해 2부 영화에 다채로운 색을 입힌 것도 바로 그 순간의 아련한 명멸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마치 활짝 피었다가 순간적으로 떨어지는 ‘벚꽃’처럼 말이다. 남녀 간 사랑의 감정이란 것도 불꽃놀이처럼, 벚꽃처럼 환하게 빛나가도 갑자기 어느 순간 하염없이 사라지는 일회성의 사건에 불과하다.


영화는 그러한 순간적 사건을 붙잡으려 한다. 사실 그러한 방식만이 새로운 생명을 다시 얻을 수 있는 길이다. 장건재가 느끼기에 메마른 고목과 같은 도시, 고조는 다시 새로 태어나고 싶어 한다. 2부 영화(‘벚꽃 우물’)가 다시 1부의 배경이 되는 고조의 오랜 전설인 ‘벚꽃 우물’의 기억에 가 닿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생명, 즉 새로운 생성에 대한 꿈을 담은 ‘벚꽃 우물’이라는 전설은 바로 현재 고조시를 사는 사람들의 염원이기도 하다. ‘주리 카페’라는 곳을 사십년 째 한결같이 찾는 한 손님의 염원처럼 젊은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없는 고조는 지금 새로운 생명의 기운을 흡입하고 싶어 하니 말이다. 그러므로 1부에서 고조의 산업적 활성화 사업의 일환으로 언급된 ‘말린 감’이라는 소재가 2부에서 유스케와 혜정을 교감하게 해주는 매개물이 될 수 있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게다가 유스케는 현실(1부) 속 고조 사람들의 못 다 이룬 기억과 꿈을 체현하는 인물로 드러난다. 1부에서 배우가 되고 싶었고 몸으로 무언가를 만들고 싶어 했던 유스케가 2부에서는 바로 감 말리는 일을 몸으로 직접해내는 배우로 그려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또한 영화 상 그는 1부의 중년 겐지의 아들인 양, 혹은 어느 할머니의 손자 같기도 한 인물로 2부에 묘사되어 있다.


그렇게 이 영화의 1부와 2부는 서로가 서로를 접합하고 또 호흡한다. 그리하여 한 편의 영화 ‘한여름의 판타지아’는 수축과 팽창을 하는 하나의 생명이 되었다. 바로 그러한 방식으로 장건재는 고조에 현재의 젊음을 수혈하고 싶었던 것이다. ‘벚꽃 우물’ 전설의 할머니처럼 다시 영화를 통해 고조의 기억과 꿈의 샘물을 길어다주려 애쓰는 것이다. 그렇게 영화는 고조처럼 하나의 생명이 된 것이다. 영화를 통해 현실의 시간 틈으로 잠재적 기억을 열어 보이려 하는 것이다. 장건재라는 영매를 통해 이 영화는, 그리고 고조는 다시 새로운 생명의 판타지아를 꿈꾼다. 작가는 남이 말하지 못하는 것을 말하는 사람이다.



<당선소감>

 

영화공부하며 나를 떠나는 연습

 

3개월 만의 낮잠이었다. 그 좋아하던 은행잎이 어떻게 물들어 떨어졌는지 모르겠다. 많이 지쳐 있었다. 500년은 잔 것 같다. 일어나니 당선을 알리는 휴대전화 문자가, 떨어진 은행잎이 내게 온 것처럼 노랗게 떠 있었다.

그동안 난 아버지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열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부터 내가 좋아하거나 존경하는 사람, 즉 내 ‘아버지들’은 떨어진 은행잎처럼 나를 홀연히 떠나 버렸다. 조금만 더 가르쳐 주시고 가지. 아버지가 없는 나는 언제나 혼자서 그들을 공부했다. 헛발을 디뎌 넘어지기 일쑤였고, 넘어져도 혼자서 울음을 삼켜야 했다. 10여 년의 시간이 흘러서야 간신히 그들 곁에 닿을 수 있었다. 가을부터 들뢰즈를 읽었다. 우체국에서 원고를 부칠 때까지만 해도 들뢰즈를 읽으려고 화요일마다 설쳤던 그 아침 댓바람들이 글을 쓰게 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당선이 되고 다시 글을 읽어보니 그 안에는 영화공부 하느라 애썼던 10년의 과거가 새겨져 있었다. 오롯한 내 것이란 없었다. 공부를 한다는 건, 글을 쓴다는 건 진정 나를 떠나가는 연습이어야겠다.



◎ 약력

▶ 1974년 경남 진주 출생

▶ 부산대 예술문화영상학과 박사과정 재학



<심사평>

 

홍상수 영화세계를 설득력있게 논증

 

문장력과 작품에 대한 이해력, 독창적인 해석력이 기준이 됐다. 윤종빈 감독의 ‘군도: 민란의 시대’에서 악역인 조윤을 의적 홍길동의 뒤집힌 버전으로 해석한 ‘망할 세상에서 만난 예기치 못한 운명’은 독창적이었다. 샘 멘디스 감독의 ‘007 스펙터’를 이 시리즈물의 전체 맥락에서 분석한 ‘살을 내주고 뼈를 가진 영화’는 전문성 측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데이미언 셔젤 감독의 ‘위플래쉬’를 새롭게 해석한 ‘위플래쉬, 플랫처가 아닌 앤드류를 중심으로’도 독창적이었다. 홍석재 감독의 ‘소셜포비아’를 매체적 존재론이라는 특이한 방법론으로 해석한 ‘동시대의 매체적 존재론을 다시 쓰다’도 특색이 있었다. 하지만 이 글들은 문장력의 매력이 부족했다.

세 기준을 충족시킨 평론은 홍상수 감독의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에 대한 관객 주체적 비평 ‘날마다 새롭고 언제나 그립다’였다. 무엇보다 이 글은 잘 읽힌다. 평자는 전편과 후편으로 구성돼 반복과 차이를 드러내는 홍상수의 작품에 대해, 그런 구성이 관객 주체로 하여금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낳고 있음을 설득력 있게 논증했다.


심사 김시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