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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재현성"과 "토톨로지" 너머의 반복: 기존 단색화 비평의 메타비평 / 손지민

 

1. “단색화” 비평의 재정립을 위한 선행논의: 무위반복


한국에서 소위 “단색화”라 분류되는 작가들은 회화의 개념을 비판하는 작가들이다. 더 자세히 말하면 회화장르 내에서 회화의 ‘재현성’과 그 역사를 비판하는 작가들이다. 창조의 새로운 어휘를 찾기 위해 이들이 사용해 온 “행위의 포기”[1]나 “형상의 추방”[2]  등의 ‘비재현적’ 개념들은 “무위지향적”[3] 방법론의 근거가 되었다. 세부적으로는 일루전과 재현의 거부, 공간적 자유, 여백의 미학적 탐구, 탈회화성, 그리지 않음 등의 개념들이 그것이다. 예를 들어 박서보는 자신이 지향하는 작품을 “무목적적...탈이미지”라 일컬으며 이를 “순수무위행위라고 해도, 무위순수행위라 해도 좋다”[4]고 덧붙인다.


이 배경에서 눈여겨 보아야 할 점은, 모든 “단색화” 작가들이 자기수행성과 “탈이미지적” 혹은 “비재현적”[5] 성찰을 지향하는 “반복”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이 반복은 서구의 미메시스 전통에 입각한 회화의 역사를 완전히 벗어나는, 겉으로 보기에 다소 무미건조한 반복행위를 가리킨다. 전반적으로 비평가들은 이러한 반복 작업이 드러내는 시지각적 패턴과 효과를 “단색화”라는 ‘자의적’ 범주의 구성요소로 보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동시에 작가들과 비평가들 모두 장기간 같은 행위를 반복함으로서 물질/형태적 재현성을 넘어 ‘수양’한다는 의견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기존의 “단색화” 작업에 대한 해석들은 작가들이 서구의 미메 미메시스적 이미지 개념과 그의 기반이 되는 ‘재현성’을 “무위적 반복”을 통해 넘어서려 했다는 사실에 전반적으로 동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단색화”라는 카테고리와 배너를 위해 반복을 자의적으로 끌어들이기보다, 반복은 “단색화”의 기원의 중추개념이 아닐까. 작가들의 이러한 ‘재현 초월’의 모색은 분명 순수자연의 본질에 접근하기 위한 노력이며, 의식적 선택이자 적어도 의도의 일부일 것이다.


이곳저곳에서 등장하는 많은 개념들이 뒤얽히고 있지만, “재현의 비판”과 무위적 “반복”의 개념이 작가들이 갖는 공통분모라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힘들 것이다. 이 개념들이 중요한 이유는, 단색화를 한국 특유의 예술로 이해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한국성”, “동양성”등의 정신적 근원을 강조하는데 결정적으로 작용한 개념이 “무위적 반복”이라는 점이기 때문이다.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예술계는 “한국성”이나 “동양성”을 정립해야 한다는 과제를 스스로 짊어졌다. 이는 서구 예술과 한국적 예술과의 차이를 분명히 밝히겠다는 의도로 해석된다. 이를 위해 많은 비평가들이 “단색화” 작업에서 선(禪) 개념을 비롯하여 전통재료와 기법 등에 기초하는 “한국성”이나 “동양성”을 도출한 점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모순적으로 서구 예술이론을 도입하면서 말이다. 물론 우리나라 고유의 전통을 이어받아 한국을 대표하는 현대미술로 발전시키기 위해 이 작업들에서 “단색화”라 부를 만한 작업의 특성을 관찰하려는 노력도 필요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단색화” 작가들이 공통적으로 “한국성”에 대해 자각함과 동시에 이를 위해 ‘반복적’ 작업방식을 택하였다면, 반복 개념이 작가들에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필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필자가 지적하고자 하는 점은 다음과 같다. 서구의 회화 장르의 기본도구를 사용하는 “단색화”의 정신적 기원을 “한국성”이나 “동양성”과 같은 개념으로 이해하는데는 비평가와 학자들의 이론적 설명이 필요했다. 서구 회화를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회화라는 장르 내에서 비판하는 “단색화” 작가들을 이해하고 설명하는데 있어 서구 예술이론의 도입은 불가피했다. 이 과정에서 대체적으로 기존의 비평들은 “단색화” 작가들의 무위반복을 “한국적 모더니즘”[6]의 일환으로 보거나 “평면환원론”으로 설명하려는 경향을 나타냈다[7]. 필자는 이러한 점에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경향은 역사적으로나 이론적으로 “한국성”/“동양성”의 근거가 된 선(禪)이나 불교적 수행의 “무위적 반복”이 의미하는 바와 대립되기 때문이다. 즉, “모더니즘”과 환원론은 “한국성/동양성”이나 수행론과 이론적으로 공생할 수 없는 개념인 것이다. 결정적으로, 미술사적 맥락에서 볼 때 반복 개념은 서구의 모더니즘과 환원론에 저항하기 위해 도입된 방법론이었다. 필자는 바로 여기에 “단색화” 비평에 대한 메타비평의 필요성이 있다고 보고있다.


2. 반복 개념을 통한 회화의 기존 이론과 역사의 비판


물론 “단색화” 작가들은 서구미술사와 담론을 의식하고 있었을 터이다. 그러므로 이 작가들의 작품 역시 서구미술의 역사성을 염두에 둔 결과물이며 그와 분리되어 생각될 수 없다. 그러나 이들은 이러한 서구미술사에서의 반복 작업들이 그 본연의 목적이자 이상인 무위와 재현의 거부를 충분히 수행하지 못한다는 인상을 동시에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단색화” 작가들은 외형적으로 비슷하다고 평가되고 자주 비교되는 서구예술과 무엇이 다른가? 이들의 주요 방법론인 반복 개념은 여기서 왜 중요한 것일까?


이 소위 “단색화”라 불리는 작품들은 수많은 행위의 흔적들이 극도로 응축된 작품들이다. 몸의 반복적 행위와 물질-형태적 발현 간의 시공간적 간극을 잇는 수많은 극소화된 행위 단위들이 중첩된 산출물이기 때문이다. 거기서는 작가의 몸과 표면 사이에서 찍기, 찢기, 긋기, 긁어내기, 뚫기, 벗겨내기, 쌓기, 밀어넣기, 묶기, 흘리기, 삐져나오게 하기, 매듭짓기, 펴기, 쌓기, 번지게하기, 스며듬, 지우기 등 몸과 도구가 표면에 닿는 축소불가능한 순간들이 자의적인 동시에 거의 무의식적으로 반복된다.


이 작업들은 특정한 “계획의 결과물”이라고 보기 어려운데, 이는 반복행위가 갖는 양의성 때문이다. 이들의 반복은 일단 현동적인 행위를 매개로 물질에 변이를 ‘추가’하는 행위이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것은 더하는 행위를 통해 작가가 자신의 의도가 가질 수 있는 주제나 개념, 가치나 의미를 스스로 ‘차감’해 결국은 말소시키는 행위이다. “더하는 동시에 빼는” 작업방식인 것이다.


이러한 반복은 흔히 서구이론에서 반복개념을 항상 따라다니는 “자기지시적”인 행위라고도 볼 수 없다. 이들의 반복은 이미 그 시발점부터 선결된 목적을 지니지 않으며 상징성이 극소화되어있기 때문에 특정한 의미 부여에 저항한다. 주체를 이루고 있는 인위적, 선결적 의미들과 가치체계와의 연결선을 “더했다 빼면서” 지워나가며 사라지게 하는 행위인 것이다. 작가 박서보는 “‘......아무 것도 그리지 않는다.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는다’라는 탈논리, 탈표현의 주장은 행위의 무목적성이랑 그 자체가 목적일 뿐 행위가 어떤 목적을 갖지 않음을 의미한다”[8]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 작품들은 전통적인 “만듦”이나 “생산”의 개념도 아니며 흔적을 “남기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실증적이거나 논리적 분석이 불가능한,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담금질”이다. 지극히 반복적인 행위를 기반으로 하는 추가-차감 과정의 한 단면일 뿐이다.


그러므로 회화의 단일적 특성으로의 “환원(reduction)”도 이들의 작업을 이론적으로 설명하기에는 부적합한 것으로 보인다. 이 일, 오광수, 서성록 등 기존의 비평가들의 분석처럼, 만약 작품이 “평면성”과 같은 어떠한 중심요소로 “환원”될 수 있다면 그 말은 곧 선결된 형이상학적 시발점이 존재한다는 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의 작품은 시발점 자체를 부인한다. 주제도 없고 이미 존재하는 어떠한 상징이나 표상성도 없다. 도리어 시발점이 될 수 있는 모든 요소들을 지워나가는 반복행위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비평은 각기 이질적인 작가의 의도를 캔버스의 균질적인 구조에 편입시킨다. 결정적으로, “평평함”으로의 환원은 곧 재현성을 불가피하게 한 지각상의 원근법적, 그리고 재료상의 특질적 이유로의 회귀를 뜻한다. 이는 당연히 “단색화”의 본질을 찾으려는 노력에서 불거져나온 현상이다. 다시 말해, “평면” 자체가 비판의 대상인 동시에 재현성을 불가피하게 한 이유 중 하나라면 회화가 “평면”으로 환원된다, 또는 평면이 회화화된다는 말은, 예술이 재현성을 벗어나지 못함과 동시에 재현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바로 그 원인 중 하나로‘만’ 회화가 환원된다는 말과 같다는 것이다. 이것이 평면환원론이 안고 있는 모순이다. (그리고 평면성을 회화 영역의 중심요소로 본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환원론의 결점에 대해 매우 민감했다.)


“단색화” 비평은 그러므로 먼저 서구 담론의 일부인 “평면으로의 환원”[9] 또는 “비물질화 경향”[10]등의 방법론적 명제에 선행하여 “단색화” 예술만이 가질 수 있는 특유의 조건이 있는가를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많은 예들 중 몇가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박서보는 초기 <묘법>시리즈에서 판자 위에 올라타서 반복적으로 서서히 흔들리는 온몸의 진동으로 세계의 움직임을 최대한 있는 그대로 제시하려 하였다. 이후 한지를 여러번 반복적으로 붙이는 작업도 하였다. 그에게 이러한 반복행위는 자연과 삶의 반복 진동의 움직임의 합일이다. 그는 세계의 움직임을 신체적 행위의 반복을 통해 표면 상에서 자기를 부정 한다.[11] 하종현의 <접합>은 물질의 성질을 끝없이 잇고 연장하는 반복으로 이루어져있다. 수없이 반복되는 안료의 삐져나옴과 이를 밀고 긁어내는 파도과 같은 행위의 물결이 시지각적인 형질, 형태를 양산해 낸다. 그는 전통회화 비판을 위해 조형적 실험을 AG(한국아방가르드협회) 시절부터 수년간 반복하며 <접합> 시리즈에 도달한다.


한편 최병소에게 있어 반복은 역(逆)실증적인 지움의 행위다. 그는 신문지를 지우는 것으로 시작해 언어적 기호로 표명된 모든 기록을 말소시킨다. 이러한 부조리하고 말소적 반복은 이미 존재하는 실증적 대상의 재현이 미적 이상의 표현에 있어 소통을 가능케 함과 동시에 비본질적인 추가요소임을 보여준다. 그는 흑연과 잉크로 이 요소들을 차례차례 차감해 나간다.


정영렬의 작업은 반복되는 패턴으로 전통적 재현의 일회성과 차원의 개념을 비판한다.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세계는 어지러운 “모상”으로 “환영”[12]처럼 드러난다. 이 환영은 현실주의적 일루전이나 미메시스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정신발생적 “증상”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작품은 화면의 평평함에 국한되지 않는, 반복을 통해 드러나는 진폭 패턴으로 이루어진다. 캔버스와 안료 등 회화 장르의 요건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양감”과 화면의 픽션적 깊이로서 회화의 평면성을 비판하는 작품인 것이다.[13] 이들 반복이 갖는 공통점은 이미 재현성을 기반으로 제시된 상징적 단위들의 반복이 아니라는 점이다. 의식적으로 채택된 반복인 동시에 무정형, 무의미적 반복이다. 예를 들어 “마릴린 먼로”라는 상징적 단위가 수없이 반복되는 워홀의 반복과, 상징적 의미를 부여할 수 없는 행위 단위가 반복되는 김환기, 윤형근, 정상화, 정창섭, 최대섭, 김 한, 김기린 등의 작품들을 비교해 볼 수 있다. 반복은 “단색화” 작가들에게 있어 작품 내에 생성된 이미지의 재현성에 대한 비판이며 작품의 현상의 관찰에 대한 재고이자 로고스(logos)에 저항하는 수단이다. 반복이 겉으로 드러내는 유사성의 이면에는 작가들이 반복으로 지향하고자 하는 재현적이고 물질적인 한계를 ‘초월’하는 지점이 있다.


현대미술작가들은 전반적으로 전통적 재현을 거부하며 역사적 전례에 구속되지 않기 위한 전략의 일환으로 반복적 태도를 취하였다. 이미 존재하는 어떤 대상을 “다시” 제시하는 재현은 예술을 위한 예술(l’art pour l’art)이 아니라는 생각에서 였다. 이는 물론 현대미술사를 아방가르드의 역사로 보는 관점에서는 작가들의 실험과정의 일부로 여겨질 것이다. 반복작업을 채용하는 현대미술작가들은 과거의 작품들과의 차이를 만들어내고 자신들의 특유성을 나타내기 위해 사유의 반복으로부터 실험의 반복으로 이어지는 그 과정 자체를 꾸준히 반복하며 그 과정 자체를 작품으로 제시했다고도 볼 수 있다.


또 반복을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시지각적으로 극도의 단순성을 갖는 (“축소주의적”, “미니멀리스트적”, “환원주의적”이라 일컬어지는) “단색화” 작업에서 우리는 흔히 연쇄적, 혹은 직렬적 반복들을 많이 찾아보게 된다. 가시적인 재현 요소들로 이루어진 의미체계와 정체성을 차감하면 결국 표면에 인간의 행위로 할 수 있는 것은 가장 원초적인 시각적 표현단위인 ‘일진법적 새김(////......)’의 반복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반복은 표면에 새김을 남김과 동시에 재현성에 의거한 모든 의미를 상쇄한다. 그러므로 반복은 재현의 역사를 가장 효과적으로 비판하는 방법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다.


3. 반복을 통한 토톨로지 비판


결국 “단색화” 작가들이 반복하는 것은 자신들의 이상 앞에서 진동하는 자신의 몸과 정신이다. 이 미적 이상은 “자연과의 합일”일 수도 있고, “무한”의 구현일 수도 있으며, 재현성의 거부일 수도 있다. 이는 현대작가들이 예술 그 자체의 개념에 대한 고찰의 과정에서 던질 수 있는 질문들이기도 하다: 완벽한 이상의 구현이란 인간이 가늠할 수 있는 것인가? 이것이 구현되면 예술의 역사는 끝나는 것일까? 역사가 끝나는 지점에는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이는 상상 가능한 것인가? 만약 “단색화” 작가들이 이러한 이상의 구현을 위해 재현요소들을 지워나가는 것이라면, 이들은 작업의 그 개시부터 이미 모든 주관과 사상을 지우기 위해 자연의 반복리듬을 작품에 그대로 제시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정체성과 작품 개념, 색채, 상징 등 이미 존재하는 것들을 차용, 전유하기를 거부한다. 즉, 표면적으로 반복하기를 거부한다. 이미 존재하는 것을 반복하는 것은 결국 재현성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고, 이렇게 돌고 도는 순환체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토톨로지’를 비판하며 거부한다는 것이다. 토톨로지는 같아 보이는 비슷한 것들의 표면적인 반복이므로 재현적이지만 “단색화” 작가들의 반복은 표면의 모든 것을 지우므로 차감적이다. 반복과 토톨로지는 겉으로 보기에 같아 보이지만 그 내면에는 분명 차이가 존재한다.

반복은 ‘조건’이다. 현실에서 두 오브제는 아무리 같아보여도 같을 수 없다. 왜냐하면 완벽한 반복, 곧 “같음”의 회귀는 현실에서 불가능하고, 유사함과 같음 사이에는 인간의 지각이 접근할 수 없는 간극이 있기 때문이다. 어떠한 사물이나 사건이 완벽히 ‘즉각적으로’ 반복되려면 그 사물이 자리하고 있는 공간과 사물이 겪는 시간성이 모두 있는 그대로 회귀해야 한다. 기존의 사물을 비슷하게 복제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것을 (인간의 손으로) 완벽히 반복하는 것은 곧 그 대상 자체가 완벽한 내적 회귀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과거의 행복했던 기억을 반복하는 것, 과거의 사건으로 있는 그대로 반복하는 것, 그리고 작가의 정신에 내재되어 있는 미적 이상을 현실에서 반복하는 것, 이 모두의 불가능함이 재현을 불가피하게 한다. 결국 주체 내의 내면성, “느낌”, 정신발생적 이미지 등을 완벽하게 캔버스에 반복한다는 것은 일종의 가능태이며 끊임없이 움직이는 조건이다.


동시에 자신의 순수이상을 있는 그대로 구현함, 그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지금 이 순간에도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반복하게 한다. 비슷한 작품을 여러번 시도한며 ‘시리즈’가 탄생한다. 박서보의 <묘법>, 하종현의 <접합>을 비롯하여 이우환의 <점으로부터>와 최병소의 말소적 <무제>, 정영렬의 <적멸> 시리즈 등의 작품은 작가 이상의 구현으로서의 반복이 낳는 실행적 반복과정의 단면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동시에 “단색화”가 지향하는 바인 재현의 초월을 여과없이 표현해 내고자 하는 작가의 의지/의도와 이를 표현한 작업이 본질적으로 같을 수는 없다. “단색화” 작가들에게 있어 모든 반복행위은 (예를 들어 회화라는) 매개를 통한 재현 발생의 가능성을 항상 안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 자신이 내면에 품고 있는 미적 이상은 작품으로 제시되는 즉시 역사상에 토톨로지의 형태로 유입될 가능성을 지닐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더더욱 “단색화” 작가들은 재현성을 최대한 결여시킨 방식으로 불특정하고 이름을 붙일 수 없는 무언가를 반복하는 것이다.


4. 반복의 미술사적 맥락: “단색화”와 서구 이론을 어떻게 함께 이해할 것인가?


한편, 흔히 “단색화” 작가들에 대한 비평은 한편으로 작업에 대한 담론의 토톨로지를 인정하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는 이 토톨로지를 벗어나 지금까지 제기되지 않았던 문제를 파고드는 분석함 간의 미묘한 모순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일반론적 정서를 반영하는 “한국성”이나 “한국적 모더니즘”에 국한된 토톨로지적 비평이 전자에 해당된다 볼 수 있다. 후자는 이를 배척하지 않는 선에서 새로운 역사학적 발견과 해석, 즉 기존의 비평과 용인된 견해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재해석과 메타비평이 될 것이다. 이 둘 간의 모순을 드러내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며 역사가 지우는 책임을 받아들이며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이기도 하다. 이러한 역사상에서의 반복은 차이를 동반하며 이러한 모순들을 드러내고 새로운 작품과 비평을 탄생시킨다.


그리고 이는 필자가 이 글에서 지적함과 동시에 시도한 바이기도 하다. 새로운 해석은 역사가 자신을 써내려가야 하는 필요성에 기인한다. 그러나 ‘진정한’ 새로움은 일종의 파마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기억하고 소환하고 참조할 수 밖에 없는 ‘역사’의 영향을 받는 한, 엄밀한 의미에서의 진정한 새로움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동시에 우리가 이제껏 한번도 보지 못한 것은 우리는 우리가 기억하고 소환하고 참조할 수 밖에 없는 역사에 비추어 보아야만 ‘이해’가 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위에서 설명한 토톨로지는 필요하지만 우리가 벗어나야만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작가들 역시 이러한 토톨로지의 영향을 염두해두고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사실 새롭게 등장하는 모든 작품과 비평도 반복의 영향을 받는다. 다시 말해, “새롭다”는 작품과 비평도 결국 전례에 빛을 지고 있고, 역사적 단서와 이론을 기억하고 소환하면서 새로운 해석을 내놓는다. 같은 개념과 담론을 표면적으로, 토톨로지적으로 반복하는 비평은 “지침”이나 “훈화”의 성격을 드러내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보편화된 비평 구도가 결국 제도/정치적인 측면과 안이한 타 비평가의 논점을 수용하는데 그친 경우가 곳곳에서 보인다. 위에서 지적했듯이 기존의 “단색화” 비평은 서구 이론과 역사를 참조하고 광범위한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여 한국현대미술의 현상들을 한국의 문화에서만 가질 수 있었던 특수성으로 대변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이렇게 “한국성”과 “동양 특유의 화면의식의 우월성”[14] 으로 귀결되는 관점은 여기저기에서 ‘되풀이’ 되었다. 여기에 덧붙여 한국예술에 유입된 “모더니즘”에 관련된 서구의 이론들이 계속 번복되며 교차하고 있는 상황도 고려되어야만 한다.


현대미술시장과 학계의 “단색화” 열풍은 시지각적인 관찰에 기인하는 토톨로지적인 담론과 선결된 어의(語義)의 경제적 증상으로 추려질 수 있다. “단색화” 관련 전시와 담론이 재생산되고 이동하고 있지만, 비슷하면서도 다른 작업의 얼굴들을 애초부터 그 정체성이 모호했던 “단색화”라는 카테고리에 부여한다. 그리고 역사학적, 양식적으로 카테고리화 하기가 매우 어려운 이 작가들을 인용구로 묶어 “단색화” 작가들이라 쓰고 있다. 심지어 최근에는 한국미술품가격인덱스(KAPIX)의 요청으로 “단색화”라는 단어가 포털사이트 네이버(Naver)의 백과사전에서 삭제되기도 하였다.[15]“단색화” 작업에 대한 전시 그리고 담론들은 서로를 차별화를 두며 대체하려 하는 동시에 서로의 보철 역할을 하며 애초부터 모호했던 “단색화” 용어들의 의미를 더 보편화시키고 있다. 더 많은 대중에게 “단색화”를 소개하려는 전시와 담론들이 서로 차별화하려는 동시에 서로를 보완하는 구도이다. “단색화” 작품들은 그 시지각적 이미지와 “한국적 모더니즘”이 뒷받침되어 홍보되고 알려졌다. 이를 감안한다면, 이미지 형성과 모더니즘을 비판하는 물질성과 작가의 행위 그 자체에 시사하는 바에 대한 숙고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그 시지각적 결과물만을 평가하며 가치를 창출하려는 오늘날의 현상은 분명 심각한 재고를 요한다. 그리고 한국예술계와 미술시장은 논의의 출처가 불분명한 “단색화”에서 잉여 가치를 만들어내는데 있어 조만간 한계를 드러낼 것으로 보는 바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현재 미술시장에서 “단색화” 예술은 이코노-토톨로지(econo-tautology)에 휩싸여 있고, 이들 작가들의 손에 예술가로서 미학적으로 할 일이 남아있기를 바라는 이는 많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물론 비평가들 뿐만 아니라 작가들도 이러한 토톨로지에 민감할 수 밖에 없다. 기존에 이미 시도된 실험이나 이미 다루어진 주제 또는 개념은 다시금 분석되어야 하고 새로운 무언가를 제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미술사적 전체적 맥락에서 작가들의 이러한 노력은 다음과 같이 풀이할 수 있다. 이미 있는 것을 지정된 독립적 시공간 상에서 “다시” 제시하는 전통적인 재현은, 이 재현의 한계를 비판하는 “단색화” 작가들의 반재현적 움직임과 대립된다. 현대미술은 지금까지의 이 모든 역사, 곧 표현장치 발전의 역사로서 (즉 아방가르드의 역사로서)의 미술사가 갖는 무게를 짊어지며 역사적 반복의 불가피성을 고찰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그리고 반복은 미술사에서 한 작품이 다른 작품에 미치는 모든 영향이 갖는 근본적 조건으로 이해된다. 예를 들어 리얼리즘은 전통적 미메시스에 그 기반을 두는 재현을 그 기본 조건으로 하였다. 현실과 지각이 만나는 지점에서 보이는 것을 그대로 캔버스에 반복하려 한 셈이고, 그러므로 행위로서의 미메시스는 조건으로서의 반복을 그 기준으로 삼는다.


한편 이러한 미메시스 전통에서의 재현성을 비판한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의 경우 20세기 전후의 인식론적 비판과 이데올로기가 뒤얽힌 체계에서 진행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들이 주장하는 반재현적 사상과 “해답”은 역사의 눈을 통해서만 이해와 비판이 가능했다. 더 나아가 이러한 비판은 표식(예를 들어, 언어와 같은 기호나 상징)으로 제시되어야만 했다. 결국 이들을 분석하고 이해하는데 있어 역시 역사상에 이미 존재하는 이론들을 다시 다시 불러와 비슷한 것들을 번복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재현성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비롯된 예술 그 자체에 대한 고찰은 토톨로지적 미로(迷路)에서 같은 길을 반복하여 찾았으며 같은 벽을 반복하여 마주쳤다. 결국 “새로움”과 “특유성”을 추구하는 아방가르드주의는 사실은 현실세계의 부분적, 허구적 반복을 그 조건으로 하였고 이전의 이론들과 역사적 사실들을 다시 불러들일 수 밖에 없었다. 이 모두를 인정하고 이론의 미로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 위한 노력 역시 끊임없는 역사적 반복을 불러왔다. 이 “불러옴”, “소환”을 거부하기 위해 아주 소수의 작가들은 급기야 모든 재현과 의미체계를 말소시키는 “부조리한” 반복을 실행하기 시작했다[16]. 이 “부조리”하고 “무미건조”한 반복의 이면에 깔린 의도가 한국의 “단색화” 담론이 서구현대미술의 담론과 이론적 연결고리가 될 수 있는 부분이라 감히 말하고 싶다.


5. 나가는 말


필자는 이 글에서 “단색화” 작업이 추구하는 이상 구현의 조건을 “반복”으로 보았으며, 작가들이 어떻게 반복을 통해 재현의 문제와 역사를 비판하면서 비재현을 향한 반복수행의 점근성에서 벗어나려 했는가에 주목했다. 이 작가들은 항상 이미 현동적일 수 밖에 없는 행위의 흔적이 갖는 재현적 요소들을 반복수행을 통해 ‘차감’함으로써 특정 “주제”나 “목적” 그리고 “가치”의 여지를 모두 무효화시킨다. 반복은 공통적으로 모든 해당 작가들이 공유하는 작업방식이자 가장 ‘원초적인’ 일진법적 새김(////...)의 작업방식이다. 미술사적 맥락에서 보았을때 “단색화” 작가들은 이러한 토톨로지를 반복을 통해 극복하려한 작가들에 포함된다.


많은 작가들과 비평가들이 세계일원론, 무념무상, 무(無)에 관한 사상 등을 참고하며 자신들의 미적 이상을 지향해왔고, 예술에서의 ‘초월’은 곧 작가의 이상과 재현과의 간극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의 문제와 직결된다[17]. 우리에게는 아직 이러한 “초월”을 사유하거나 현실화 시킬 수 있는 도구가 없으므로 우리가 가장 확실히 도출할 수 있는 관점으로 “단색화” 비평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필자는 이들의 작업과 가장 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반복성에서부터 작가들이 말하는 비재현성이 사유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반복은 물질도 아니고 어떤 ‘것’도 아니며, 형태나 상태도 아니고, 질료도 아닌, ‘보이지 않는 움직임’이다. 반복은 존재론적인 상태성이 없으므로 재현을 비판하는 중요한 방법이 된다. “단색화” 작가들이 재현된 존재의 역사를 의식하면서도 그 근본을 이루고 있는 순수자연계, 비존재계로의 초극을 반복을 통해 지향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끝으로 노자의 도(道)사상에서 재현과 표상을 필요로 하는 유(有)와 극(極)이질적 관계에 있는 무(無)는, 곧 창조하고 제시해야 하는 예술가에게 있어 도(道)의 순수반복으로만 다다를 수 있는 지점이 아닐까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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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70년대 후반기의 작가들은 방법상의 새로운 어휘를 찾아내기 위해 모든 조형요소들을 평면의 2차원성으로 돌리고 동시에 그린다는 행위마저 포기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서성록, 「70년대 후반의 모노크롬), 특집: 70년대 한국 현대미술의 검증, 미술평단, 1991 여름, p. 20)

[2] 「畵面의 掁幅과 平面에서의 量感」 (Volume, Width, and Vitality Added to the Confines of Square Frame): 畵家 鄭永烈씨와의 對話, « 鄭永烈繪畵20년 展 » (미술회관, 1980. 1.9~23), p. 76

[3] 이우환이 일본 작가 세키네 노부오(關根伸夫)의 작품 <위상-대지>(1968)를 두고 말한 인간의 재현적 한계에 대한 위상적(topological) 변환의 대안도 이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4] 서성록의 박서보 인용, 「한국 모노크롬 회화의 한 전형」, 현대미술, 1991년 봄호, p. 6

[5] 비평가 서성록의 박서보 인용, 「한국 모노크롬 회화의 한 전형」, 현대미술, 1991봄호, p. 6

[6] 미술평론가 김영순은 “한국적 모더니즘”에 대한 다음과 같은 전제를 기정사실화하는 것으로 보인다. (「좌담: 한국적 모더니즘의 정착」, 김영순 분 (참석자: 김영순, 서성록, 최명영, 이동엽), 한국의 단색 평면회화 (특집), 월간미술, 1996.3, p. 66, 강조는 필자)

[7] 이 일(「平面의 繪畵化, 한국의 추상예술 – 20년의 궤적」, 계간미술, 1979), 오광수(「평면에의 환원, 구조로서의 평면」, 공간, 1980년 7월), 서성록(「70년대 후반의 모노크롬」, 특집: 70년대 한국 현대미술의 검증, 미술평단, 1991년 여름), 김복영(「70년대 한국현대미술 定型의 提示), 공간, 1984년 3월)

[8]「한국의 단색 평면회화」 (특집) 월간미술, 1996.3, p. 47

[9] 평면환원론을 주창한 비평가는 대표적으로  이 일(「平面의 繪畵化」, 한국의 추상예술 – 20년의 궤적, 계간미술, 1979), 오광수(「평면에의 환원, 구조로서의 평면」, 공간, 1980년 7월), 서성록(「70년대 후반의 모노크롬」, 특집: 70년대 한국 현대미술의 검증, 미술평단, 1991년 여름), 김복영(「70년대 한국현대미술 定型의 提示」, 공간, 1984년 3월)이다.

[10] 대표적인 텍스트로는 오광수의 '70년대 한국 미술의 비물질화 경향' (『한국 현대미술의 미의식』, 재원, 1995)을 들 수 있다.

[11] 박서보가 주창하는 자기부정은 이미 <허상>과 <유전질> 시리즈에서 육체의 실루엣만을 남겨 인간존재의 주체의식을 의심하는 작업을 70년대 초반까지 계속 한 바 있다.

[12]「畵面의 掁幅과 平面에서의 量感」 (Volume, Width, and Vitality Added to the Confines of Square Frame): 畵家 鄭永烈씨와의 對話, 鄭永烈繪畵20년 展 (미술회관, 1980. 1.9~23), p. 78

[13] 윗글, “회화는......회화 이상일 수도 없고 회화 이하일 수도 없다는 말을 자주 했었습니다.” (p. 78)와 “나는 순수한 회화 본질에 접근하는 방편으로서 캔버스를 접했던 것입니다.” (p. 79) 참조.

[14] 김수현, 「한국 모더니즘 회화의 화면의식과 그 극복」, 가나아트 (미술시평) 1993. 3. 4, p. 39

[15] 참조: http://www.kapix.kr/home/m_view.php?ps_db=realart&ps_boid=89&ps_mode

[16] 여기서 필자가 염두해 두고있는 서구의 작품들은 대표적으로 Andy Warhol의 <Sleep>과 <Empire>, Peter Roehr의 <Pappe auf Holz>, Rudolf Herz <Zugzwang>, Niele Toroni의 <Empreintes de pinceau n°50 répétées à intervalles réguliers>, Daniel Buren <Peinture acrylique blanche sur tissu rayé blanc et orange>과 <Manifestation>, Bruce Nauman의 <Stamping in the Studio>와 <Clown Torture>, James Hayward의 <Abstract> 시리즈 등이다.

[17] 그러나 재현의 근원을 세계의 근원인 빛으로 보며 이러한 사유를 시도한 학자도 있었다. 예를 들어, “단색화”의 메타비평의 시발점된 미술사학자 김미경 교수의 논문 「‘素’ - ‘素藝’로 다시 읽는 한국 단색조 회화」는 계몽의 비평을 넘어 모든 세계의 표상과 색을 아우르는 빛의 차원인 ‘소예’로 “단색화”를 읽는다. (김미경,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Ⅲ》 국제 학술대회 발표논문, 『한국현대미술자료 약사(1960-1979)-정치 경제 사회와 함께 보는 한국현대미술』, ICAS, 2003, pp. 500-516에 수록)





<당선소감>

 

어머니와 첫 疏通 후 이어온 소통의 길

 

고요와 혼란 사이를 오가며 많은 인생의 접점을 동시에 경험하고 있다. 아직 나 자신에 대한 성찰이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게다가 내 원고는 부끄럽기 짝이 없는 글이다.

미학을 공부하면서 무엇보다 어려웠던 것은 다른 이들과의 소통이었다. 소통의 문제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나를 기쁘게도, 슬프게도 만들었다. 글쓰기와 언변도 워낙 서투르고 재주도 없어 능숙하게 어려운 논지로 소통하는 사람들을 보면 항상 부러웠다. 그렇다 보니 예술의 역사는 "어떻게 나의 이상을 타인과 소통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가득 차 있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나로 하여금 미학에 첫발을 내딛게 해주신 분은 어머니였다. 집을 떠나기 며칠 전, 나와 주전부리를 나누며 미술사 이론을 처음 가르쳐 주셨고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것이 내가 처음으로 경험한 진정한 '소통'이 아니었나 싶다. 집을 떠난 지 수년이 되었지만 결국 그 첫 소통의 경험이 나로 하여금 보이지 않는 것을 계속 쫓게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보이지 않는 진실에 대한 논문을 집필할 때 자꾸 그 주전부리 냄새가 난다. 그리고 갖고 있는 것들을 버릴 줄 알게 되면서 그 냄새가 점점 더 강해지는 것을 느낀다.

내가 지금 처한 모든 환경에 감사할 따름이다. 매일 나 자신에게 성실성을 요구하며 끝도 없고 답도 없는 글을 웃으며 써나갈 수 있도록 힘을 주시는 모든 분께 항상 미안하고 고맙다. 또 이 풋내기에게 이렇게 소통할 기회를 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 약력

▶ 1984년 서울 출생

▶ 영국 런던정경대(London School of Economics and Political Science)경제학/환경정책 학사 졸업
▶ 프랑스 파리 소르본대학교(Paris-I Panthon-Sorbonne) 현대미술사 석사 졸업
▶ 현재 프랑스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Ecole des hautes tudes en sciences sociales, EHESS) 미학 박사과정 재학 중
▶ 뉴욕 컬럼비아대학교(Columbia University) 철학과 Alliance Scholarship 수상 




<심사평>

 

단색화 재조명… 기존과 다른 관점으로 솎아내다

 

작년에 비해 응모 편수가 줄었다. 3편을 고르고 고민했다. 고민할 정도로 엇비슷했고 각기 장점이 있었다. 어렵게 손지민씨의 <"재현성"과 "토톨로지" 너머의 반복: 기존 단색화 비평의 메타비평>을 선정했다. 다른 두 편이 특정 작가의 작품론에 입각해 있다면 이 글은 최근 다시 조명되는 단색화(단색주의)를 대상으로 기존 평론의 시각과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단색화 작업의 의미를 솎아내는 글이었다.

그 키워드가 "부조리하고 무미건조한" 반복이란 개념이다. 단색화 작가들이 재현성을 최대한 결여시킬 방식으로 불특정하고 이름을 붙일 수 없는 무언가를 반복한다고 본 것이다. 그 반복성이야말로 단색화 작업의 핵심적인 지점이라는 주장이다.

따라서 단색화 작업의 의미를 정확히 해명하거나 파악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어나는 최근 한국 미술계와 미술 시장의 단색화 붐은 단지 잉여가치를 만들어 내는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을 뿐인데 이는 조만간 한계를 드러낼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다.

여전히 난삽하고 관념적인 수사로 단색화를 설명하고 있  는 현재 시점에서 손씨의 글은 작품 자체의 본질적인 성향을 고려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글 곳곳에 관념투의 논조가 다소 흐르고 단색화 작업에 대한 객관적 거리나 사회문화적 맥락이 간과된 점 등은 좀 아쉽다.

문장 또한 더 '짱짱하게' 매만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무난한 글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좋은 평론가로서 활동하기를 기대한다.


심사 박영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