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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작은 것들의 존재와 존재 방식 - 문효치 시집 '별박이자나방'(서정시학 시인선 083, 2013)을 중심으로 / 이종섭

 

 작고, 보잘 것 없고, 하찮은 것들은 크고, 귀하고, 대단한 것들과의 관계에서 언제나 밀리기 마련이다. 작은 것들은 아무 생각이 없는 미물에 불과하며, 그것들의 존재 가치는 그 어떤 대접도 받을 수 없을 만큼 이목을 끌지 못한다. 세상은 크고 화려한 것들만 주목하기에, 작고 천한 것들은 몸집과 용도에서, 쓸 만한 것들만 위하는 세상에서, 상대적으로 항상 밀려날 수밖에 없다. 본질을 호도하는 비본질적인 것들이 자신의 본질인양 그렇게 살아가는 세상에서, 이제는 상대적 평가가 절대적 평가로 정착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고 큰 것의 관계에서 세상은 언제나 큰 것을 주목하고, 큰 것이 되기를 원하며, 나아가 큰 것이 작은 것을 지배하는 세상으로 재편되어 버린다. 작은 것들은 폭압에 시달리며 살 수밖에 없다. 동일한 생명이면서도 생명이 아닌 것처럼 홀대 받으며 살아가는 것을 숙명처럼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생명은 그 자체로 생명 본연의 특질을 가지고 있는 바, 작은 것들 또한 큰 것들에게 무시당하며 억압받는 삶에도 불구하고 끊임없는 생명을 갈구하면서 노래하고 일어서고 웃음을 짓는 자신들만의 생명을 지금까지 이뤄내고 있다. 바로 이런 점이 작은 것의 체형적 숙명을 전환시켜 작은 것들의 존재와 그 존재의 가치를 참되게 밝혀주는 전범이라고 하겠다. 

 모름지기 예술의 본류라고 자부하는 시와 그 시를 다루는 시인들의 눈과 마음이, 세상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사는 작은 것들을 감지하지 못한다면, 시와 시인의 가치관이나 노래가 건강하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시인은 그 어느 누구 못지않게 시인 자신만의 직관적 능력으로 사물을 꿰뚫어보면서, 발상의 전환을 통해 그 어떤 것이든 새로운 모습으로 세상에 내어놓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큰 것에 의해 규정된 시각과 틀로 작은 것들을 보는 시인이라면, 이미 시인이 아니다. 시인에게는 남이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보는 혜안이 있다. 그것을 깊이와 넓이를 동반한 자신 만의 세계를 통해 확장해 나가면서, 누가 뭐라고 해도 그 노래를 쉬지 않고 부르는 시심이 있다. 그 시심은 시인의 정직함과 직무를 수반하면서 시의 성실성까지를 추구하기에, 시심 하나의 결정체가 비록 작고 보잘 것 없다고 할지라도 그것들을 쌓아 나가면서 그 시심의 완성을 추구한다. 그것들 하나하나가, 그것들의 집합체 전부가, 그것들이 맞이하는 환경이 아침에 영롱하게 맺혔다가 쉬 사라지는 이슬 같을지라도, 작은 것을 작은 음성으로 노래하고, 작은 것을 작은 몸짓으로 보여주고, 작은 것을 잠깐이라도 보여주기를 마다하지 않는 것이다. 

 그 작은 것들의 노래. 그 작은 것들을 위한 송가. 그 작은 것들을 함께 모아 더욱 큰 파장을 일으키는 시와 시심의 들판. 이것이 바로 문효치 시집 '별박이자나방'의 아우라다. 이 시집에 처음부터 끝까지 등장하는 모든 시가 작은 생명을 노래한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이 시집이 나름의 위치와 가치를 담보 받으나, 시인은 그것들의 존재를 드러내고, 그것들의 존재가 상대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저항 정신을 밝히는 것에 주력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아름답고 고귀한 일인가. 

 나태주 시인은 '풀꽃'에서 "자세히 보아야/예쁘다.//오래 보아야/사랑스럽다."라고 노래했다. 그러니 작은 것들을 "자세히 보"아야 한다. "오래 보"아야 한다. 그래야 작은 것들이 "예쁘다"고 "사랑스럽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그것들이 지니고 있는 낱개의 존재적 의미들이 씨줄과 날줄처럼 엮여 우주와 세상을 잇대어 놓은 시심을, 온 마음과 영혼 속에 충만하게 채울 수 있을 것이다.

 

 1. 작은 것들의 존재

 

 누가 보거나 말거나 

 피네

 

 누가 보거나 말거나 

 지네

 

 한마디 말도 없이

 피네 지네

 ―'들꽃' 전문

 

 문효치의 '들꽃'은 "누가 보거나 말거나" "한마디 말도 없이" "피"고 "지"는 들꽃의 삶을 노래한다. 들꽃의 '숙명'이나 '생명'이라고 하지 않고 들꽃의 '삶'이라고 규명한 것은 이 시에 등장하는 들꽃의 품격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보거나" 보지 않거나에 따라 피기도 하고 지기도 하는 세상 이치와는 달리, 문효치가 바라보는 들꽃은 타자와의 관계와 전혀 상관없이 본연의 생명을 수행한다. 피어날 때도 그랬으니 질 때도 역시 그렇게 지는 들꽃의 삶이 한결같다. "한마디 말도 없이"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은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요, 피고 지는 일로 이미 충분하다는 뜻일 게다. 

 자연이나 사람이나 환경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 자존을 지켜가는 들꽃. 존재의 본질을 존재함으로써 드러내고 증명하는 들꽃. 시끄러운 세상에서는 들꽃의 존재법을 배워야 산다. 그것만이 나를 지키는 길이며, 또한 나를 지킴으로써 이 어지러운 세상에 들꽃의 향기를 퍼트릴 수 있는 법이니까.

 문효치의 '들꽃'은 소월의 '산유화'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한다. 여러 면에서 닮아 있기 때문이다. 

 

 산에는 꽃 피네/꽃이 피네/갈 봄 여름 없이/꽃이 피네.//산에/산에/피는 꽃은/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산에서 우는 작은 새여/꽃이 좋아/산에서/사노라네.//산에는 꽃 지네/꽃이 지네/갈 봄 여름 없이/꽃이 지네.

 ―김소월, '산유화' 전문

 

 소월의 "산유화"는 문효치의 "들꽃"과 피고 지는 것은 같으나, 존재와 존재 방식에서는 차이를 보인다. 소월의 꽃은 "산에" 피고 진다. 또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고, "꽃이 좋"은 "작은 새"도 "꽃이 좋아/산에서" 산다. 소월의 "산유화"는 "자세히 보아야"(나태주, '풀꽃') 볼 수 있는 작은 꽃이 아니다. 자잘하게 피어나는 이름 모를 꽃이 분명 아니다. 멀리서도 확연하게 보이는 뚜렷하고 커다란 꽃이다. 새들이 찾아오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앉기도 하는 그런 꽃이다. 소월의 "산" 역시 문효치의 시에서 주로 보이는 들이나 사람이 사는 세상과는 확연히 다르다. 그 "꽃"을 "좋아"하는 "작은 새"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문효치의 "들꽃"은 "누가" 보는 행위가 있고 "한마디 말"을 묻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누구인가. 시집 속에 한결같이 나타나는 작은 풀과 꽃과 곤충들이다. 이것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시들은 '들꽃'의 컨텍스트로 펼쳐진다. 그것은 이 시집의 일관성에서 나타나는 자동적이면서 필연적인 구조요, 이 시집이 획득한 작은 존재들의 미학일 것이다. "산"이 아닌 "들"에서 피었다 지는 "꽃". 새들도 관심을 갖지 않는 꽃. "들"판에서 노닐고 일하는 사람들과 어울리며 섞일 수밖에 없는 꽃.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벌어지는 필수불가결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꽃. 이것이 바로 문효치 시집 '별박이자나방' 전체가 보여주는 '들꽃'이라는 존재의 배경적 핵심이다.

 "들꽃"이라는 대표성이 가지는 작은 생명체들의 삶은 "태어나면서"부터 '좋음과 아픔'을 동시에 가진다. "햇볕이 쪼이면" "저것들 태어나면서 얼마나 좋을까", "바람이 불 때면" "저것들 태어나면서 얼마나 아플까"('좁살냉이꽃') 염려하는 마음에서 잘 드러난다. 그것들의 삶 또한 "힘이 없"어 "겨우 떡갈나무 잎사귀를" 자신의 "영토로 삼"고, 그 위에 "집을 짓고, 길을" 내고, "떡갈나무에서 한 생"('좀사마귀의 집')을 보낸다. 

 그러나 그렇게 작고 좁은 "영토"에서 "한 생"을 살지라도, "더럽혀지지 않은 가슴에/ 붓꽃도" 기르고, "사랑도" 한다. "가슴속엔" 언제나 "맑은 바람이 가득하"('미운사슴벌레')다. 이러한 삶이 더욱 가치가 있고 빛나는 것은 "20mm 정도의 작은 몸"으로 "짧은 촉각을 흔들"면서 "이 어두운 세상을 기어다"니기 때문이다. "누가" "알아주길 원치도 않"으면서 "그저 성실하게 주어진 만큼만 살아갈 뿐"('털두꺼비하늘소')이다. 이것이 바로 '들꽃'의 컨텍스트가 가지는 유려한 변주의 향연이다.

 

 2. 작은 것들의 현실과 세상

 

 미물들은 어떤 현실과 세상을 맞닥뜨리며 살아갈까. 미물들이기에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대자연의 품속에서 하루하루 살아가기만 하면 될 것 같은데, 그들도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이라 세상의 현실과 아픔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나비의 고백이, 사뭇 절망스럽다.

 

 춤추러 가야 할 청산은 없다

 

 무거워진 하늘은 내려와

 우리 모두를 억압하고

 춤은커녕 이제 숨쉬기도 어렵다

 

 날개가 팔랑거리는 것은

 정작 춤이 아니라

 고통스런 비명의 몸짓인 것을

 

 나비에게서 신명이 날아간 지는 오래

 봄이 와도 봄이 아니다

 ―'호랑나비' 부분

 

 "나비"들이 "춤"을 추는 것은 당연한데 "춤은커녕 이제 숨쉬기도 어렵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무거워진 하늘은 내려와/우리 모두를 억압하"기 때문이다. "하늘은 내려"올 수도 없거니와 그 아래에서 살아가는 미물 같은 인생들을 "억압"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하늘"이 "억압"한다고 하는 것은 강한 역설이다. 땅에서 "억압"받는 현실이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나머지 희망이 되어야 할 "하늘"마저 "무거워"져 버렸고, 이제는 그 "하늘"의 도움마저도 끊어진 것 같아 "하늘"이 "억압"한다고 감히 말하기까지 그렇게 땅의 형편이 변해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날개가 팔랑거리는 것은/정작 춤이 아니라/고통스런 비명의 몸짓"이라고 나직이 읇조린다. "나비에게서 신명이 날아간 지는 오래", "춤추러 가야 할 청산은 없"어 이제 더 이상 "봄이 와도 봄이 아니"라고.

 "청산"도 없고, "봄"도 없고, 솟아날 구멍도 없는 세상을 어떻게 표현할까. 그 세상에서 살아가는 미물들의 형편은 또 어떠할까. "왕성한 식욕과 성욕"이 초래하는 세상에 "어둠이 오고 있"('큰멋쟁이나비')다. "술 냄새 가득한/세상은 미치광이"다. "목 잘린 열매들이/우르르 속 좁은 무덤 속으로 뛰어"('풋매실')는 곳이다. "대명천지에/남의 간을 내어먹는 놈/그대로 봐주고 잘살게 하는"('며느리밑씻개') 세상이다. "폐광의 갱도 같은 길"에는 "마법에 걸"린 "검은곰팡이와 박쥐들의 배회"만 있다. "육신 가득 채우는/마왕의 세상"('두더지')이다.

 그 세상에서 "나는 이름에 갇힌 죄인일 뿐/세상은 유배지"에 불과하다. "시기와 아집으로 눈이 삔 자들이/나에게 퍼부은 저주"로 인해 "나의 본색은 처참하게 짓밟"('개불알꽃')힌다. "정말 눈깔 튀어나오는 일이"고, "정말 욕이 씹히는 일이다"('개구리밥'). "얼마나 속이 썩었으면/건드리기만 해도/고약한 냄새가 터져 나올까"('큰허리노린재').

 소월의 말마따나 "산에서 우는 작은 새"는 "꽃이 좋아/산에서" 살아야 하는데, 그것이 산이라는 세상의 본질일 터인데, 소월의 "작은 새"는 문효치에 이르러 "꽃"을 찾아가지 못하는 "나비"가 되고 만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소월의 '산유화'는 자연의 본질이자 다시 회복해야 할 원형의 본질이다. 그래서 문효치의 "나비"도 날아가야 할 "청산"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에, 그것을 위해 "춤이 아"닌 "고통스런 비명의 몸짓"일지라도 여전히 "날개"를 "팔랑거리"고 있는 것이다. 

 

 3. 작은 것들의 존재 방식 

 - 현실 속의 몸부림과 저항

 

 "나비"가 잃어버린 "청산"을 찾기 위해 힘겹게 "팔랑거리는" 날갯짓은 어떤 모습일까. "청산"을 잃어버렸으니, 아니 빼앗기고 말았으니 그런 세상은 앞에서 언급했던 "마왕의 세상"('두더지')일 터. 그 "유배지"('개불알꽃')의 천형 같은 삶이 이러하다.

 

 시멘트 계단 틈새에

 풀 한 포기 자라고 있다

 영양실조의 작은 풀대엔

 그러나 고운 목숨 하나 맺혀 살랑거린다

 비좁은 어둠 속으로 간신히 뿌리를 뻗어

 연약한 몸 지탱하고 세우는데

 가끔 무심한 구두 끝이 밟고 지날 때마다

 풀대는 한번씩 소스라쳐 몸져눕는다

 발소리는 왔다가 황급히 사라지는데

 시멘트 바닥을 짚고서 일어서면서 그 뒷모습을 본다

 그리 짧지 않은 하루해가 저물면

 저 멀리에서 날아오는 별빛을 받아 숨결을 고르고

 때로는 촉촉이 묻어오는 이슬에 몸을 씻는다

 그 생애가 길지는 않을 테지만

 그러나 고운 목숨 하나 말없이 살랑거린다

 ―'풀에게' 전문

 

 문효치의 '풀에게' 역시 김수영의 '풀'에 견주면서 그 의미를 확장해 볼 수 있다. 소월의 '산유화'가 문효치의 '들꽃'에게 그랬듯이, 김수영의 '풀'도 문효치의 '풀에게'에게 말을 걸고 있기 때문이다.

 

 풀이 눕는다/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풀이 눕고/드디어 울었다/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다시 누웠다.//풀이 눕는다/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난다//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발목까지/발밑까지 눕는다/바람보다 늦게 누워도/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바람보다 늦게 울어도/바람보다 먼저 웃는다/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김수영, '풀' 전문 

 

 김수영의 '풀'은 "풀"과 "바람"과 "풀이 눕"고 "일어나"는 행위를 그린다. 그러나 문효치의 '풀에게'는 "풀"과 "시멘트"와 "몸져눕는" 것과 "일어서"는 것을 그린다. 이 둘은 "풀"과 그 "풀"의 반응이 같지만 "풀"을 눕게 만드는 대상이 다르다. 김수영은 들판과 "바람"이고, 문효치는 "시멘트 바닥"과 "구두"다. 마치 소월의 '산유화'와 문효치의 '들꽃'이 보여주는 동질성과 배경적 간극이 여기서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김수영이 "풀"과 "바람"의 본질적 역학관계를 보여주었다면, 문효치는 그 역학관계를 좀 더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김수영의 "바람"보다 문효치의 "시멘트"가 훨씬 더 억압적이다. "영양실조의 작은 풀대"로 "간신히 뿌리를 뻗어" "연약한 몸 지탱하고 세우는데", "무심한 구두 끝이 밟고 지"나간다. 이 정도면 억압을 넘어 강압과 폭압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풀"이 보여주는 반응 또한 김수영은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누우며 "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난다". "바람보다 먼저 웃"을 수 있기에 "날이 흐리"면 "풀뿌리가" 먼저 "눕는다". 그러나 문효치는 폭압적인 세상에서 살아가는 "풀"이기에 그것의 반응 자체가 김수영보다 비관적이다. 이미 생명 자체가 "영양실조"에 걸렸으며 "뿌리"도 "간신히" 뻗을 뿐이다. 한번 밟히고 나면 "소스라쳐 몸져 눕는다". "그 생애가 길지는 않을" 것이라는 애도 섞인 진단까지 있다. 

 그런 생명임에도 불구하고 "정한 생명에/분노의 불길이 일고/이 불길에 온몸을 데"인다. "누구에게도 빚진 일 없이/맑게 씻긴 무심으로/저 하늘 향해 마주 서 있"는데 어느 날 "발굽에 밟혀/한 무더기 분노가 피어난"('땅빈대')다. 그 "분노"로 인해 "나무나무 기둥마다/큰 북을 걸어놓고"서는 "텅 비어 무서운 들판에/북소리 울"('쇠딱따구리')리는 세월. "허리 휘는 하늘 아래" "평생을 넘어가도 끝나지 않"을 "길"을 "동여매던 허리띠도 벗어 던져버"린채 "강퍅한 어둠 속에 삭아 있던/땀을 개어 숙성시"('산개미')키는 생애. "등에/바다"를 "업고 간다". "해도 업고 간다". "별도 업고 간다". "폭풍도 업고 간다". "삶이든 죽음이든" 무엇이든지 간에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라면 "소리 없이 업고 간다"('점박이외뿔소똥풍뎅이'). "깊은 밤에 문드러진 해를/건져 올리기 위해/손발이 닳도록/어둠을 푸"('큰허리노린재')면서, "바람의 살 속에/집을 짓는다//바람 따라 집도 함께 사라지면/또 새로 오는 바람 속에/집을 짓는다"('층층이꽃'). 이 정도 여정이면 고통이 따르게 마련이어서 불평이나 원망이 한번쯤 터져 나올 법도 한데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다/말은 속으로 다져 열매를 만든다". 왜냐하면 "그 열매를 깨물었을 때/매끈매끈한 목소리에 실려 나오는/별같이 많은 말들이/입 안 가득 씹히고 있음을 알게"('멍석딸기꽃') 되기 때문이다.

 

 4. 작은 것들이 바라보는 우주 

 - 존재의 근원

 

 강압적인 현실 속에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하늘"까지 "무거워"지고, 그 "하늘"마저 "모두를 억압하"기에 "숨쉬기도 어렵"('호랑나비')게 된 현실. 이것을 극복할 수 있는 비책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생명 자체의 속성이 저 광활한 우주에 맞닿아 있는 것이라 하겠다. 큰 것만 추구하고 좋아하며 큰 것이 작은 것을 무시하고 강제하는 세상에서, 그 맨 밑바닥에 있는 작은 것들은 생명 자체의 본질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함으로 존재가 저항이 되는 그런 삶을 사는 것이 자연스럽다. 생명 자체가 하늘 그 너머 우주의 신비에 속하기에 자신의 생명이 가지고 있는 우주적 속성을 발휘하는 것, 바로 이것이 어두운 세상을 타개하는 유일한 길이자 절대적인 길이기 때문이다. 

 윌리엄 블레이크는 '모래 한 알에서 우주를 본다'고 설파했다. 우주 안에 있는 것이라면 모래 한 알일지라도 우주의 속성을 띄고 있을 터. 거꾸로 모래 한 알을 보면서 우주를 보는 것이 논리적으로도 당연하니, 직관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시인의 눈으로 '모래 한 알에서 우주를 보는 것'이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다. 생명계에서 그 모래에 해당되는 것은 "키가 8mm 밖에 안 되는"('노란줄점하늘소') 아주 작은 생명체 같은 것들이다. 바로 이런 존재들이 우주와 교신한다. "길 위에 서 있는 나무마다/거미줄 같은 전선줄을 쳐놓고"서는 "별을 향해/송전의, 송신의 키를 누르"면서 "먼 별의 붉은 불을 점등"('남생이무당벌레')하는 것이다. 

 "등 위의 녹색 광택이나/꼬리 부분의 청색은/하늘 한 귀퉁이를 환하게 칠하는 물감"('좀청실잠자리')이다. "힘주어 공중으로 날아오르면/수백억 광년을 달려온/뭇별이 번쩍번쩍 빛"('검은물잠자리')난다. "등에/외계로 가는 길이" 있어 "삶이 하늘로 이어"('별박이자나방')지기에, "때로는 이 길을 따라/하늘에 다녀오기도" 한다. "해나 별 달 같은 천체도/때맞춰 들어"('좀사마귀의 집')오기도 한다. 그래서 "벌레라"고 부르지 않고 "미지의 별을 향해 발신하는/버튼"이라고 명명한다. 그 미물들을 만져보는 행위조차도 "땅의 통신"과 "황새와 같이 날아오는 하늘의 의지"를 "손끝으로 감전처럼"('황철나무잎벌레') 체험하는 우주적 경험으로 격상시킨다.

 겉으로 보기에는 "투박한 갈색 옷을 입었지만/몸속엔 푸른 물이 흐"르는 그들. "어느 여름날 천둥과 번개도" 이겨내고 "쓰나미 같은 소나기도" 견디어내고서는 "슬며시 젖은 몸을 보여 줄 때/아직도 살아 있는 그가 그렇게도 크게 보"인다. "그 몸속에 흐르는 물줄기"가 "유장한 강이 되어 가득히 출렁거"리는 것도 보인다. 왜냐하면 그들은 "별것도 아닌 것 같은 연약한 더듬이로/저 먼 별의 별별 것을 다 찾아내어/제 목숨에 덧대"('도토리노린재')며 살아가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가슴"에서는 "맑은 징소리"가 나고, "아무데나 두들겨도 맑은 징소리"('튤립꽃봉오리')가 난다. 그들의 "두 눈"은 "가지런히 하늘을 향하고", 그들의 손은 "등 위 열 개의 별을 돋우어/맑게 맑게 광을 낸다". 왜냐하면 "어둠 너머엔 반드시 밝은 세상이 있음을"('열점박이별잎벌레') 알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잠자리의 날갯짓 하나/닭의장풀 꽃잎 하나에도" "꿈은 숨 쉬고 있"('쌀잠자리')고, 등에는 "흑남색 바탕에/노란 두 줄" 무늬의 "국기"를 달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를 꿈꾼다. 그 "나라"는 "지도"에는 없는 "나라"요, "저 하늘 뒤쪽 어디쯤에 있는 나라"다. "정말 아름다운" 것을 꿈꾸며 살기에 이 세상 사람에게는 "낯선 국기 한 조각이" "가장 아름다운 나라"를 꿈꾸는 자들을 위해 "오늘"도 "깊은 숲속에서 반짝이고 있다"('노란띠하늘소'). 등에 "국기"를 새겨 넣었으니 실현 불가능한 꿈이 아닐뿐더러 도중에 포기할 꿈도 아닐 터, 우주의 도움과 응답을 받은 그 자태가 이리 귀하다. 이들은 "마법에 걸"린 "마왕의 세상"('두더지')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를 건설하거나 "가장 아름다운 나라"를 꿈꾸는 자의 삶을 보여줄 것이다. 그들은 우주에서 "내려"온 "노란별". 이 땅의 모든 미물들은 우주에서 "내려"온 "별"의 영혼을 품고 있다.

 

 푸른 하늘 깊게 들이마시고

 문득 내려다보니

 저 물위에 노란별이 내려와 계신다

 

 몇 억 광년은 족히 되었을 여정

 우주의 어느 동네에서 내려오시느라

 피곤도 했겠지만

 

 간밤에 잠도 잘 주무셨는지

 오늘 한낮 얼굴도 맑다

 ―'노랑어리연꽃' 전문

 

 5. 작은 것들의 이름을 부르며 기록하다

 

 그 작은 것들의 이름을 불러줘야 한다. 그것이 시인의 마음이다. 그들이 비록 "나에게 무슨 이름이 필요한가/나에게 맞지도 않는 이름/이름은 잘나고 거룩한 사람이나 가져가"라고 외칠지라도, "이름 없이도/내 삶은 이 참나무 숲에서/충분히 윤이 날 수 있"('털두꺼비하늘소')다고 말할지라도,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 시인이 가져야 할 겸손한 도리다. 김춘수의 '꽃'에 나타난 것처럼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서로가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으로 남을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그 마음과 자세가 있다. "이름이 좋아야 팔자가 좋다"고 했던가. "'똥'자가 들어가니 행운이 나를 피하고/거기에 '개'자가 앞에 놓이니 운명이 더욱 기구하"다고 말하는 벌레, "그놈들은 이름 덕분에 자손만대 번창하는데/'개똥'이라니, 이름 한번 더럽다"고 침을 퉤퉤 뱉으며 "세상에 허울만 좋아서/팔자 펴는 놈들이 참 많다"('개똥벌레')고 일갈하는 벌레, 그 "이름"을 불러준다. "그까이꺼, 풀 풀 하면서 업신여겼던 풀"('방동사니')의 이름을 불러준다. "하루밖에 살지 못하"('하루살이')는 그 이름을 불러준다. 

 "시인도 아닌 이들이" 작은 것들의 "이름에/'꺼꾸로 여덟팔'을 붙였"('꺼꾸로여덟팔나비')으니, "세상을 거꾸로 보기도"하는 "시인"이 그 이름을 제대로 불러준다. 그리하여 "누가" 그 "이름을 지었는가"('미운사슴벌레') 묻는 자들에게 그 이름을 불러 대답해준다. "창씨개명이라도 하고 싶"은 그 이름을 불러주면서, "한때"의 "굴욕을 벗어나기 위해/창씨개명 하고 싶"은 그 이름을 불러주면서, 세상 사람들에게 작은 존재들의 본질과 가치를 발견하게 해준다. 

 "이름이 좀청실잠자리라는 걸/이제야 알았다"며 기쁨의 환호성을 지르게 해준다. 한 "때는 이름도 몰랐"으나 "이제야 그 이름을 알게 되"('좀청실잠자리')었다는 깨달음의 만족을 느끼게 해준다. 그리하여 "이름"은 여전히 "며느리밑씻개"이나 "이젠/이름을" "'하늘밑씻개'"로 개명해준다.

 그런 사람들의 귀는 "풀대를 꺾어 다듬고/별빛 잘라내어 현을 단" "악기"('풀종다리') 소리를 듣게 된다. 그런 사람들의 눈은 "풀숲에서 파란 광채를 보"('금테비단벌레')게 된다. 그런 사람들의 손은 "저 우주의 깊은 곳 거기서 발원한/생명의 끈"('기막힌 일이다 -칠성무당벌레')을 잡게 된다. 

 "별똥별이 우리의 평상 위로/비처럼 내리던 때가 있었"음을 알고, "은하의 물결"이 "우리" "옷 속으로 흐르"('알락귀뚜라미')던 때가 있었음을 알아, 이 땅의 작은 생명체들의 이름을 높이 불러주는 시인. 그 작은 것들에게 노래를 바치고 그 작은 것들을 위해 송가를 지어 불러준다. 그것들을 "자세히" 봐주고 "오래" 봐주면서. 그것들이 "예쁘다"는 것과 "사랑스럽다"(나태주, '풀꽃')는 것을 고백하는 마음으로. 

 작은 것들이 사는 숲에 작은 것들이 뿜어내는 생명의 광채가 울창하다. 그것을 받아 적은 시인의 마음속에 노래로 울려 퍼진다. 끝없는 메아리가 우주에 가득하다. 



<당선소감>

 

"빛을 던져준 하늘의 사인에 기대를 걸어야겠다"

 

 오래전부터 사막에 있었다. 서걱거리는 모래알이 신발 속으로 들어왔고, 빛을 잃어버린 별들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숨쉬기에도 버거운 온기를 지닌 바람은 지도에 없는 길만 찾아다니며 스스로 생성과 소멸을 반복할 뿐이었다. 

 입을 조금만 벌려도 혀에 붙어있는 자음과 모음의 미세한 갈기들을 핥아먹어버리는 열기의 감찰, 안간힘을 다해 피해보려고 온몸의 물기를 조공으로 바쳐도 아무런 보장을 확인할 수 없는 굴욕의 세월, 그곳에서 길을 찾거나 길을 만드는 것은 절대적 금기여서 마른 잠을 자다 사막에서 쫓겨나는 형벌이 속출했다. 

 기어이 하늘 한번 보고서 미련 없이 문장을 반납하려는 자에게 어쩌다 주어의 실체를 살짝 보여주기만 할 뿐이었다. 하늘과 사막이 맞닿아 있는 지표면에선 이름 없는 미생물들의 주검이 날마다 발길에 채이기만 했다. 길 없는 길은 허황된 풍설에 불과했다. 그 요설에 속아 목마름 없는 샘물 하나 찾아가려고 욕망을 저당 잡힌 채 질주한 시간들만 배수구로 하염없이 흘러들어갔다.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지하수를 허겁지겁 퍼먹는 사람들의 눈동자에는 동공 속에 모래바람이 쌓이기 시작했다.

 아무도 울어주지 않았다. 그곳에선 눈물이 마른지 이미 오래, 눈물샘을 자극하는 것은 외설로 치부되어 그 누구도 눈물의 성형을 시도할 수가 없었다. 간혹, 누가 울었다는 첩보가 입수되기만 하면, 사이렌 소리 요란하게 달려드는 환청에 시달리며 머나먼 유배의 길을 떠나야 했다. 허기를 사유할 수 있는 밑바닥 생활은 견딜만했으나 억압을 당한 자유는 참아내기 어려웠다. 그마나 갈망이 유일한 음식이어서, 이제 그 부스러기조차 긁어먹으면 내일의 양식은 바닥이 날 것이다.

 정체성 부족에 시달리며 걸어온 사막의 길을 탓하지 않겠다. 사막은 내 스스로 들어온 시대도 아니요, 내가 벗어날 수 있는 고문도 아니니까. 선인장을 까먹다가 찔리는 가시를 내 몸에 몇 개쯤 지니고 살아야 할까. 언젠가는 이 험악한 세월을 감내할 수 있는 자의 인식표로 치환될 것을 믿지만, 그래도 하늘을 바라보며 걷는 내 마음속에 큰 별 하나 떠 있으니, 오늘 흔들리는 내 발걸음을 불안해하기보다 그 빛을 던져준 하늘의 사인에 기대를 걸어야겠다.


 

약력

▲ 1964년 경남 하동 출생 
▲ 한양대 작곡과
▲ 2008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 기독교타임즈문학상ㆍ수주문학상ㆍ시흥문학상ㆍ민들레예술문학상ㆍ낙동강세계평화문학대상 등 수상  
▲ 시집 '물결무늬 손뼈 화석'ㆍ'바람의 구문론'

 


<심사평>

 

"존재 미시적 탐색…추론과정 정밀"

 

 올해 평론 부분에 투고된 응모작에는 문학이 주종을 이루고 영화, 뮤지컬, 미술에 관한 글이 다소 있다. 그 중에서 최종 심사에 오른 것은 김영희의 '여행-예술과 지역미술의 미래-레지던시 프로그램과 공공미술에 관하여', 이연주의 '카르마, 뫼비우스적 순환의 변증법-박영한 소설', '첫사랑'에서 '카르마'까지', 이종섭의 '작은 것들의 존재와 존재 방식' 등 세 편이다. 

 김영희의 평론은 예술가가 여행의 형식을 경유함으로써만 현실을 유토피아로 전환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 지방자치단체, 특히 광주에서 운영되고 있는 창작스튜디오(레지던시)가 자칫 '예술 노동자의 무덤'으로 작동되고 있음을 우려하면서 안정적으로 창작활동에 매진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유토피아가 모색되어야 함을 주장하는 예술 정책에 대한 글이다. 대체로 공감할만한 내용이나 그 비판에 대한 대안 제시가 다소 미흡하다. 

 또 이연주의 평론은 박영한의 자전적 소설 '첫사랑'과 '카르마'을 분석하여 행위 주체가 절망적 가족 구성과 가난을 어떻게 극복하고 숙명적인 업으로서의 카르마에 대한 인식을 갖게 되었는가를 추론하는 과정이 그 나름의 정합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작가와 허구적 주인공을 동일시함으로써 소설의 미학적 감성의 울림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아쉬움이 있다.

 그런데 이종섭의 평론은 문효치의 시집 '별박이자나방'(2013)을 비평적으로 다시 읽어내는 또 하나의 문학작품이다. '장자'의 '소요유'편에는 곤(鯤)이 붕(鵬)이 되는 이야기가 있다. 곤은 물고기의 알을 이르는데 붕은 등의 넓이가 몇 천리나 되는 큰 새이다. 이 이야기는 구속이 없는 절대의 자유로운 경지에서 노닐다 보면 가장 작은 것이 가장 큰 것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현대물리학의 양자역학에서 미립자의 세계가 우주의 원리와 동일하다는 것을 입증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종섭은 장자의 '소요유'와 같은 사유로 문효치 시인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것들에 주목하고 그것들의 존재와 존재 방식을 미시적으로 탐색하여 그것들에게 이름을 불러주는 호명 행위가 생명의 우주적 원리를 밝히는 시작 행위임을 밝히고 있다. 시 텍스트를 철저하게 읽어내어 자기화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추론과정이 정밀하여 이종섭의 평론을 수상작으로 선정하는 바이다. 당선을 축하하며 훌륭한 평론가로 거듭나기를 기원한다. 

심사위원 : 임환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