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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거울 속에서 탄생하는 주체들 : 이현승·황인찬·이준규를 통해 보는 2010년대 시 / 최종환

 

1. 슬픔의 이유

 

2000년대 우리 시에서 전대의 거울들은 대부분 깨졌다. 서로가 서로를 반영해 주었던, 그래서 공동체의 공적 이상을 다음 대에 넘겨주었던 상상적 거울은 쓸모없어진 것이다. 깨진 거울들이 뒹굴던 때, 그 거울 면에 나타난 것들은 예상보다 끔찍했다. 우리가 보기 원해온영상이 거기 있었다. 이 관찰을 시 쓰기에 활용하고자 했던 시인들이 2000년대 젊은 시인들이었다.

 

그 시인들 눈에는 거울이 건네준 세계가, 욕망의 주물 이상의 것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이웃을 다른 방식으로 사랑하고자 했던 2000년대 시는 부모가 건네준 그 거울 영상에 속지 않았다. 동일성의 거울에 재현되지 않는 ‘X’와 대화하고자 했던 것이다. “내가 어떻게 보이는지 자세히 좀 말해줄래? 요즘은 거울도 내 얼굴을 보여주지 않아”(김행숙, 눈사람)라는 구절이 말해주듯, 이 시기 젊은 시인들은 거울 너머에서 소통 가능한 세계를 꿈꿨다. 유취 가득한 어머니의 상상적 거울은 공적 이상을 주입하는 아버지의 상징적 거울에 인입되었고, 거울과의 싸움은 다시 아버지와의 싸움이 되어야 했다. 아버지 거울의 너머로 걸어가려던 때 다소 석연치 않은 느낌도 있었다. 세계의 거울 면이 깨지자마자 다시 복원됐던 점이다. 2003년에 변기 속 물거울이 내려가자마자 올라오는 것을 보며 식겁했던 시인도 없지는 않았지만(이윤학, 거울 보는 남자) 2005년 이후 젊은 시인들에게는, 그런 거울 면 위의 글은 어떻게 쓰이든 다 미친 것들’(황병승, Cheshire Cat’s Psycho_7th sauce)이었기에 거울 깨기는 시 쓰기의 보람 자체였던 것이다.

 

그런데도 훼손된 그 거울 면들은 도마뱀 꼬리처럼 생겨났다. 2000년대 젊은 시인들은 득의에 차 있었지만, 거울 또한 그들을 보며 웃고 있었다. 이 밀고 당김의 과정에서 우리 시의 2010년대는 열렸다. 이 시기에는, 깨진 거울 면이 다시 복원되는 것을 자세히 살펴보는 시인들이 나타났다. 앞 시기의 거울 깨기에 동참했거나 그 주변을 걸어 다녔던 이 시인들은 깨진 거울 조각들을 다시 맞춰 보거나(이현승), 은박을 손톱으로 더듬어 보기도 하고(황인찬), 그 거울 속으로 들어가 보기도 했다.(이준규그들에게 거울은 세계를 비추는 것이 아닌 거울을 비추는 물건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 신기해 보이는 거울 면부터 재구성하려 했다. 거울 바깥으로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거울 면 위로 올라온 세계를 다시 읽고자 했다. 이 작업은 2005년 이후 시인들이 주시했었던 상징계의 공백을 다시 다루는 일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 시기의 젊은 시들이 발견했던 세계의 공백은 후반으로 가면서 여백으로 이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지불식간이었겠으나 그 텅 빈 자리는 라멜라 같은 원초적 생명들에 의해 채워지고 있었고, 그 황홀감으로 전날 거울과의 사투를 여전히 치르고 있었던 것이다. 제인 갤럽(J. Gallop)의 논의를 빌려 보면, 상상의 거울은 상징의 거울 이후에도 나타날 수 있다. 그리고 그 상상은 충만한 모성성을 통해 다가오기에, 실재의 거울은 상징계가 사후 구성한 상상의 거울과 언제든 뒤바뀔 수 있다이 세 시인들의 목소리가 다소 우울하고 슬픔에 겨운 까닭은 깨지자마자 복원되는 거울의 저 아이러니 앞에서 느끼는 무력감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거울을 이전과 다른 용도로 활용하는 김에 아예 2010년대 시가 견인했던 새로움까지도 그 거울 면 위에 올려놓는다. 2000년대부터 깨진 거울에 대한 지속적 호기심을 드러내준 이현승의 시부터 읽자.

 

 

2. 조립된 거울, 아버지 혹은 사물의 자리- 이현승의 시

 

이현승은 1시집 아이스크림과 늑대(2007)에서부터 무언가를 깨뜨리는 순간의 향락에 촉을 곤두세웠다. “인정사정없이 깨진 것들은 눈부시다라는 그의 단언이 말해주듯, 무언가를 깨는 행위야말로 그에게는 긍지였던 것이었다. 그런데 이내 그 깨진 것의 몸피를 다시 조립해 보는 것을 즐기는 것도 그의 장기였다. 깨진 것은 어디에 저렇게 많은 금들을 감추고 있었을까”(모래알은 반짝)라면서. 이 궁금증은 이현승의 2시집 친애하는 사물들(2012)로 나아가는 길목이 된다. 거울은 깨지지만 그럼에도깨지지 않는다는 것, 이에 대한 궁금증이 이 시집의 한 주제라 하겠다. “얻을 것은 얻고 잃을 만큼 잃고 나면 / 사람들은 거울을 잘 보지 않는 것 같다”(지나친 사람)라는 좀 더 커진 궁금증까지도 드러내면서, 그는 그 시절의 젊은 시인들이 미처 보지 못했던 한 가지가, 거울을 깼다고 믿었던 우리의 신념이었을 수도 있다고 보고 있다.

 

 

화난 사람들은 돌멩이를 하나씩 들고 물가로 간다. / 돌멩이들은 부릅뜬 눈처럼 무섭다 / 눈을 향해 날아들 때가 제일 무섭다 // 머리 꼭대기 위에 오르는 아이들은 / 징검다리 위를 통통통 건너뛰며 즐겁다 / 눈썹까지 물에 잠긴 머리통들은 나몰라라 즐겁다 // 손바닥에 돌멩이를 말아쥐고 / 얇은 유리창 같은 수면을 노려본다 / 와장창 깨졌다가도 금세 원래대로 회복된다 // 수면 아래로 봉인되는 소리들 돌멩이들 / 사라졌다 모이고 모였다 사라지는 물고기들 / 밖에서 누군가 돌멩이를 들고 이쪽을 보고 있다. -돌멩이전문

 

이 시의 화난 사람들2000년대 일각의 젊은 시에 등장한 아이들이라 추측해 볼 수 있다면, 그 시절의 이현승 자신도 그 아이들 중 하나였을 것이다. 더욱이 인용 시의 수면이 2000년대 신자유주의의 지식을 우리에게 건넸었던 거울이라면, 지금 와 돌이켜보건대 어째서 와장창 깨졌다가도 금세 원래대로 회복되었던 것인지 추측해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인용 시에서 이현승은 이 추측을 좀 더 구체화하고 있다. 그는, ‘우리의 돌멩이가 수면에 파 놓은 것이 공백(lack)보다 여백(blank)은 아니었나?’라고 반문한다. “아이들이 던진 돌멩이- 그들이 빠르게 성장하면서 - ‘바윗돌’(Rock)³처럼 변하고, 즐겁던 저 돌 던지기의 부정성이 나몰라라식의 놀이로 변했기에, 그 전복의 소리들도 이내 수면 아래로 봉인되지는 않은 것인가 라고 묻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이는 미학적 차원에서는 몰라도, 인식론적 차원에서만큼은 우리가 결국 저 거울 속 수심의 절대 심연에 도달할 수 없을 거라는 불길함을 드리우는 예감으로 이어진다. 2000년대 젊은 시들이 알았으되 믿으려까지는 안 했던 질문을, 이현승은 친애하는 사물들에서 조심스레 꺼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모색해 온 저 거울 너머가 어쩌면 거울의 몸피일 수 있다는 것, 다시 말해 아버지 얼굴의 바깥이 그 아버지의 민낯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그런 예감 말이다.

 

앞 시기 아이스크림과 늑대에서 이현승이 거울 바깥으로 나가 본 것은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리고 늑대처럼 변해버리는 사물이었다. 2000년대에 함께 거울과의 일전에 참여했던 동료들에 비해 이현승이 한 발자국 더 나아간 지점은, 그 사물이 아이스크림이 아닌 늑대로 변해버렸을 때에 우리가 느끼는 난감함과 관련된 질문이다. 아름다움이 반복되면서 위험해질 때 우리는 그 시차를 어떻게 직면할 것이며, 나아가 그 망측한 사물들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고 교호(交互)할 것인가. 이에 대한 응답이 가능하려면, 2005년 이후 우리가 파놓았던 텅 빈공백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거기에는 윤리만이 아닌 치안과 관련된 문제의식도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공백에 들어간다는 것은, 사물과 직면할 수는 없어도 이웃’(Nebenmensch)5할 수는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현승은 이를 위해 아이러니한 제안을 한다. 애써 깬 아버지의 거울을 다시 붙여보자는 제안이다. 사물을 친애하는 사물로 만들기 위해 그는 부서진 아버지 거울을 다시 조립해 보고, 그 위에 세계를 다시 올려놓기를 원한다. 어떤 면에서 이는 아버지에 대한 굴종처럼 비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속지 않으려면 먼저 속아야 한다는 라캉의 말이 만일 진실이라면, 이 제안은 아버지에게 기만당해줌으로써 아버지의 거울 파편들 속으로 들어가려는 시도로 읽어볼 여지 또한 있다. 아버지의 상징적 거울상과 그 거울상이 사주한 어머니의 상상적 거울의 바깥으로 나가는 2010년대 시의 한 길목이 여기서 열린다.

 

 

아버지의 구두를 신으면 아버지가 된 것 같고 / 집 어귀며 책상이며 손 닿던 곳은 아버지의 손 같고 / 구두며 옷가지며 몸에 지니던 것들은 아버지 같고 / 내 눈물마저도 아버지의 것인 것 같다 // 우리는 생긴 것도 기질도 입맛도 닮았는데 / 정반대의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본다 / 포옹하는 사람처럼 서로의 뒤편을 바라보고 있다 / 우리는 마주 오는 차량의 운전자처럼 / 무표정하게 서로를 비껴가버린 것이다 -친애하는 사물들부분

 

 

깨진 아버지 거울을 이리저리 맞춰 보면서 이현승은 전기가 나가자 모든 것이 분명해”(암전)지는 어떤 순간과 만나며 놀란다. 그 거울 위로 올라온 영상은 그가 생각했던 전능한 아버지가 아니라, 아버지로 변해 버린 자신의 얼굴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구두를 신어보니 아버지가 된 것같다는 저 신파조의 고백은 실로 난감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시가 2010년대 이후로 걸어가기 위해 한 번쯤은 통과해야 할 감성처럼 보이기도 한다. 친애하는 사물들에서 이현승은 사물들과 우리가 우애를 나누는 세상을, 깨진 아버지 거울을 일단 껴안으면서 만나려 하기 때문이다.

 

일단 저 세계에는 우리에게 세계의 정물들을 이전과 같으면서도 다르게 돌려주는 아버지의 얼굴이 비치고 있다. “내 눈물마저도 아버지의 것인 것 같다라고 그가 고백할 때, 그 아버지는 아들 세계를 이미 비껴서 있었다. 서로는 생긴 것도 기질도 입맛도 닮았는데 / 정반대의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보고 있는 것이다. 이때 이현승은 아버지를 넘어서려 했던 청개구리가 항상 아버지를 닮은 청개구리였음을 알게 된다. 부모 뒤편에서 어깃장만 놓았던 청개구리는 부모에 대한 거역이란 것도, 자기 등에 입혀진 부모의 푸른 색깔을 통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임을 본다. 아버지를 밀치면서 울던 그의 울음이 죽은 아버지에 대한 울음으로, 더 나아가 그리움으로 바뀌는 이 어이없는 경로야말로 세계의 자기 간극일 것이다. 내가 그때의 아버지가 되었다는 신음 속에서만 발견되는 텅 빈아버지. “청개구리는 청개구리 새끼인데억수 같은 비가 쏟아질 때밥의 힘으로 푸른색을 유지하면서 청개구리는 운다”(불효자는 웁니다)라는 고백의 의미도 여기 있다. 이를 아버지 거울이 드러내는 시차라고 말해보는 것이 가능하다면, 거기에서는 우리에게 냄새를 풍기고, 소리를 내는 사물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윤리적 수사가 없을 때 자체 직면하기 어려웠던 사물, 그래서 상징계로 늑대처럼 달려드는 사물은, 다시 맞춰 본 아버지의 거울 속에서 못과 망치를 빌리러 갈 이웃으로 서 있는 것이다.(좋은 사람들)

 

 

3. 깨진 거울과의 사랑 - 황인찬의 시

 

이현승의 호기심을 적어나가고 있는 2010년대의 또 한 시인은 황인찬이다. “깨진 것들이 어디에 저렇게 많은 금들을 감추고 있었을까”(모래알은 반짝)라는 이현승식 궁금증은 황인찬에게 거울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그는 이현승처럼 깨진 거울의 여기저기를 살펴보면서도 금 간 부분에 좀 더 주목한다. 가령 그의 눈에 들어온 은박 벗겨진 면에선, 굴절된 세계와는 다른 세계가 달려와 앉아 있다. 금 간 모서리를 만져 보다가 거울의 민낯과 만난 것이다. 그의 첫 시집 구관조 씻기기는 거울 환상에 오랫동안 시달려 온 자신이 그 거울의 기원에 대해 더듬어 가는 이야기다. 그 점에서 황인찬의 거울 면은 이현승의 그것과 같지만은 않다. 아버지의 거울이 만들어 낸 제2의 거울, 제인 갤럽이 앞서 말했던 사후적 거울단계가 저기 있기 때문이다. 그 상상적 거울은 자신에게 질문하는 사람들을 모성으로 보듬고, 생명력 가득한 진리의 숲으로 초대한다. 그러나 그 거울 면은 자신의 세계를 도외시하는 이들을 말종”(말종)이라고 겁박하며 그 거울 숲의 바깥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황인찬의 시집이 2010년대 타자의식을 드러내는 부분이 있다면 그 환상화된 숲에서 걸어 나오려는 개종”(개종) 의지를 자신과 타인들에게 드러내는 부분일 것이다.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무화과 숲)을 지키고자 하는 것이다. 이 개종은, 그럼으로써 가능해지는 두 번째 삶, “세컨드 커밍”(세컨드 커밍)을 향해 간다. 이 시집 속에서 환상의 거울집들은 대개 기형적인 기독교 언어들로 충일해 있다. 그러나 황인찬이 넘어서고자 하는 거울은 외설화된 그 거울만은 아니다. 이 맥락을 2010년대 대중의 삶 속에서 다시 읽어볼 수 있다면, 저 노회한 신앙은 불확실성 때문에 고통받는 우리 시대 대중들에게 잘못된 일은 없다”(개종)라며 달래는 신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와도 다르지 않다. 합리적 광기에 반복적으로 노출되기에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이성복, 그 날)은 세계를, 그런 매트릭스를 확산하는 것이 저 거울의 전략이다. 우리가 보지 못한 것을 보았다!’고까지 고백하는 거울신앙자를 통해.

 

 

흔들리는 것이 있는데, 어두워서 보이진 않는다 너의 손 / 의 온기를 느낀다 얼마나 지연되었는지 기억나지 않는 공 / 연이다. 사람의 소란과 사람의 침묵이 번갈아 일어서는 것과 무관하게 // 나는 보았다고 너는 말한다 무얼 보았느냐는 물음엔 답 / 하지 않고 분명 보았다고 (중략) 장막을 상상한 적 없다고 너는 말한다 / 그런데도 장막이 느껴진다고, 의미심장하게 펄럭이고 의미 없이 침묵한다고, 어두운 불의 형상으로, 몸을 떠난 영혼의 옷자락으로 // 저 너머에 흔들리는 것이 분명 있는데, 어쩐지 아득한 / 기분이 들어 너의 손을 잡는다. 너는 언제부터 이곳에 없던 것일까 / 보이지 않는 어둠이 계속 보이고 있다

 

-장막의 뒤에서 자꾸부분

 

 

인용 시에 나타난 장막, ‘텅 빈거울 면을 여백화하는 장치다.6 거울신앙자들이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그 여백은, 그들이 그가 거울에 묻는 모든 질문을 원하는 정답으로 만든 후 거울 면에 발라준다. 그러므로 저 장막 너머의 대상은 그 여백의 소유물인 것이다. 거울신앙자는 여백으로부터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반드시발견하고야 만다. 라캉 식으로 풀자면, 그 여백을 보며 그가 말한 것말하고자 한 것이기 때문이다. 저 장막은 거울신앙자들의 눈동자에 흔들리는욕망의 여백을 설치함으로써 그 여백 너머에 그들의 기원이 있는 것처럼 말한다. 성궤 앞에 내려진 고대 신화 속의 장막처럼, 그 커튼 뒤에는 어두운 불이 타오르고 있다. 이것이 어떤 증명이 필요하지 않은 환상이라면, 이것이야말로 아는 것을 믿지 않는우리 시대의 환상일지도 모른다.

 

거울의 절단면을 만지게 된 화자는, “에게 무얼 보았느냐고 물어본다. ‘네가 본 것보고자 하는 너의 상상은 아닌가?’ 하고혹시 장막 때문에 생긴 환영은 아닌가?’라면서. 그러나 이 반문은 보고 싶은 것을 보기 원하는 의 환상만 더 키운다. 장막을 상상한 적 없다면서 흐뭇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화자가 너는 언제부터 이곳에 없었던 것일까라는 자세를 취할 때 의 숨은 서서히 멎는다. 그 커튼을 열어젖힌다면 광기에 휩싸인 너는 이곳에 존재할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커튼을 열어젖힌 방에서 숨이 잠깐 멎었다 / 생각과는 다른 풍경이 펼쳐져 있어서 // 괜찮아? / 묻는 너에게 괜찮다고 답했다 (중략) 나는 커튼을 닫았다 / 아니지? / 묻는 너에게 아니라고 답하며

 

-속도전부분

 


환상은 빠른 속도로 깨지고 있다. 젖혀진 커튼을 향해 직진하는 빛이, 창의 안팎을 함께 비추고 있기 때문이다. 깨진 거울 면으로 들어온 창밖 빛은, 저 커튼이 감춰온 것이 불의 형상이 아니었음을 고지한다. 거울의 장막이 만을 위해 숨겨두었던 그것은 숨기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 거울의 기원은 그 숭고한 장막 너머에 없었다. 장막의 저쪽이란 이곳의 시차였기 때문이다. 젖혀지면서 흔들리는 커튼이 의 환상의 핵을 끌어낸 것이다. 급기야 아니지?”라고까지 묻는다. 화자가 그 장막으로 들어와서 자신의 환상에 대한 공증을 해 주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빛의 느낌이 더 선명해지면서 는 휘청인다. 그때 화자는 괜찮아?”라고 묻는다. 흔들리는 그의 손부터 잡아주는것이다.

 

황인찬 시가 2010년대 독자들에게 적지 않은 울림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바로 이 공감 능력 때문이다. 그것은 거울과 이별하는 자들의 능력을 독려하기에 앞서, 이별하지 못하는 이들과 함께 아파하는 능력이다. 사실, 세계가 저마다의 상상을 지키기 위한 자들의 숲이라면, 지난한 현실을 버텨내기 위해 우리 각자가 자신의 상상 숲으로 들어가는 것은 혼날 일이 아니다. 화자가 에게 아니다라고 말했던 것도 상상환상으로부터 걸어 나온 후 상상자체로 남기 원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너의 숲화자의 숲이 저마다의 꿈을 꿀 수 있도록 격려하는 일이다. 이 새로운 꿈의 숲들은 환상의 지원을 받지 못하기에 매우 건조하다. 하지만 그때, 이전 숲의 장막 너머에서 흔들려온 것은 정지한다. 세계의 민얼굴이 여기 있다.

 

 

쌀을 씻다가 / 창밖을 봤다 // 숲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 그 사람이 들어갔다 나오지 않았다 / 옛날 일이다 // 저녁에는 저녁을 먹어야지 // 아침에는 / 아침을 먹고 // 밤에는 눈을 감았다 /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었다 -무화과 숲전문

 

 

화자는, 들어갔다가 나오지 못했던 예전의 무화과 숲을 회상한다. 신화적 열매로 가득했던 그 숲은 적어도 화자에게만큼은 환상의 거울 면이었을 것이다. 이제 그는 그때의 충만한 시원적 환상이 도려진 자리에서 저녁에는 저녁을 먹고, 아침에는 아침을 먹는다. 거울의 여백 너머에 존재할 것이라 믿었던 낙원은 무연하게 직진하는 일광 속으로 조금씩 사라진다.

 

그러나 때때로 쌀을 씻는 창가에 그 옛날 숲은 돌아와 있기도 하다. 현실이 쉽지 않다면, 화자는 그 숲 속으로 다시 걸어가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다 한들 어떤가. 옛 무화과들의 기억을 보여주는 그 숲은 그때보다는 듬성듬성해졌다, 여전히 아름답지만 필요 이상의 환상으로 덮여 있지않다. 누구라도 들어갔다가 나올 수 있는, 아니 그러한 나듦과는 무관한 숲이 된 것이다. 들어간 자에게도 들어가지 않은 자에게도 도무지 무심한 공백의 장막이 저기 있다.

 

다시 들어가 본 옛날 숲은 이제는 어떤 사랑을 하더라도 이제 혼나지 않는꿈으로 일렁인다. 옛날 숲에서 먹었던 무화과는 다시 들어간 그 숲에서 먹는 이곳의 아침저녁과 다르지 않다. 밥을 먹는 여기가 그때의 무화과 숲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의 창문 안쪽과 다르지 않은 그 숲에는 걷기 운동을 하며 늙어가는 노인들이 있다.(엔드게임) 그곳에 박힌 나무의 잎사귀들은 다시 방문해 준 화자에게 예전처럼 흩날리지 않는다. 나뭇가지에는 같은 말을 반복하는 구관조”(구관조 씻기기)가 앉아 있다. 그러니 이 숲에 있는 것은 텅 빈 있음’(is)이다. 무엇이 ‘-되기’(being)조차 거부하는 그 숲 속 공터에 들어간 황인찬은 거기서 하얀 조약돌하나를 줍는다. 단단함을 잃”(돌이 되어)은 돌은 던져지는 수면마다 작은 공백을 파 놓는다. 그저 그런 하얀 돌 하나가 거기 있다. 어떤 테이블에 놓여도 무덤덤한 텅 빈백자 같은.(단 하나의 백자가 있는 방)

 

 

4. 고요한 슬픔 속으로 - 이준규의 시

 

깨진 거울을 보는 자는 거울과 대화만큼은 가능하다. 거울이 저만치있기 때문이다. 저만치 있는 거울은 질문자가 건넨 낱말을 다른낱말로 건네준다.7 우리는 이런 주고받음설명이라 부른다. 이를 통해 나와 너, 그리고 세계의 정체성이 확인되는 것이다. 그런데 부서진 거울 가루가 눈동자에 쓰인자는 그 거울로부터 어떤 것도 건네받지 못한다. 거울로부터 받은 답이 그가 던진 질문과 같아질 때, 그는 자신이 거울이 되어간다는 느낌에 갇힌다. 이준규의 시는, 세계의 그것’(It)으로 변해가는 자신의 얼굴을 타이핑하는 자리다.

 

 

그것이 그것을 이해할 수 있 / 을까. 그것은 그렇게 반복한다. 그것은 참을 수 없는 성실 / 함을 보여주며 그것을 반복하고 있다. 그것의 생은 단순하 / 며 그것의 일상은 비극적이다. 그리하여 그것의 실천은 놀 / 라운 집중이다. 그것은 기울어져 있다가 꼿꼿이 서고 그것 / 은 꼿꼿이 섰다가 다시 고개를 숙인다. 그것은 기울어져 있 / 다가 갑자기 고개를 들고 그것은 하루의 일과를 끝없이 반 / 복하지만 결국 별일 없이 그의 생을 끝낼 것이다. 어디선가 / 개가 짖고 달은 누렇게 환하다. 그것은 책상 앞에 있다. / 것은 반복하고 그것은 조금 옆으로 벗어난다. 그것은 그것 / 의 그것을 한다. 그것처럼. -그것부분

 

 

건네받은 대답에 환상이 지원되지 않을 때, 세계 속 대상들은 사물로 변해간다. 상징이나 상상의 족쇄로부터 풀려나면서 모든 것은 그것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의미화 사슬 속에 편입되지 못한 인간도 그러므로 세계와 합일된 자일 뿐이다. 이쯤에서 그것으로서의 세계이것은 그것이고, 저것도 그것이다라는 대답만 들려주는 날것의 세계란 점을 한 번 더 덧붙여 두고 싶다. 그러니 이러한 삶이란 동어 반복의 삶이다. 확실성만 존재하는 이준규의 세계는 그러나 황인찬이 말한 증거가 필요하지 않는 세계와는 또 다르다. 이준규에게는 모든 것이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이해할 수 있그것이 없을 때 이준규 자신이 그것이 되기 때문이다. 저 세계를 비추는 거울은 장막을 건네지 않고 스스로가 장막이 된다. 그것은 장막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거울은 이준규에 대해 말하지 않고 이준규실천한다. 저 세계에서 모든 것들은 놀라운 집중력으로 스스로를 실천하기 때문이다. 사물에 있어서 실천의 목적은 별일 없이 그의 생을 끝내는 것이다. 사물이 된 화자가 책상 앞에 앉아 있다.” 이때 그는 책상 앞에 앉은 달이자 책상 앞에 앉은 개. 가끔 그는 공원에서 꾀꼬리를 보다가 가끔 개처럼 짖는다.(울새) 사물이기에 꿈에서도 짖는 개가 되고 싶”(). 반복의 목적이 반복이듯, 그는 개처럼, 그리고 달처럼 자신의 꼿꼿이 서고 기울어지고, 앉아있음을 반복할 따름이다. 이런 하루의 일과는 성실하게 미쳐가는 삶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여기서 그는 자신에게 쳐들어오는 기괴한 자신의 목소리 하나와 만난다. 기괴한 이유는, 자신의 목소리가 그것의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나는 길을 갔다. 어려운 네모와 함께 -관념부분

 

 

환상의 지지가 없을 때 자신의 목소리는 환청으로 침입한다. 그것은 칼날 같은 모서리를 지닌 네모의 침입이다. 라캉이 말한 네모난 원이 저기 있다. 이준규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네모, 둥그런 동어 반복의 길을 가는 자에게 그 길의 앞과 뒤”(둥글다)를 보여준다. 그래서 그는 말한다. “나는 네모 앞에 있었다”(네모)라고. 이 사실은 그것에 지나지 않는 그를 경악시킨다. 그 공포에서 도피하기 위해 그는 반복의 달인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몸에서 그 네모를, 그 네모의 모서리를 반복하면서라도 지워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다 해 본다. 의미의 세계로 들어가 보려는 것이다. “기울어져 있다가 꼿꼿이 서고 그것 / 은 꼿꼿이 섰다가 다시 고개를 숙이기도 하고, “갑자기 고개를 들고 그것은 하루의 일과를 끝없이 반 / 한다. 몸에서 네모를 게워내려고 자신을 반복할 때마다 네모가 조금 옆으로 벗어나기는 하지만, 네모는 이내 다시 채워진다. 왜냐하면 네모는 그것 / 의 그것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그것) 네모의 환청은 끊이질 않고, 그렇게 그는 다시 길을 간다.’ 그러니 이 슬픔의 길은 거울을 벗어나지 않고서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화자가 스스로를 반복하고, 세계를 반복함으로써 그것이 된 나로부터 완전히 나오는 길 외에는 없다. 그것은 환청의 거울 면 바깥으로 나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이 거울인 자에게 그 바깥은 어디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복하고 또 반복하면서 그의 거울은 조금씩 흐려진다.

 

 

지렁이는 마르고 있었다 (중략) 나는 조금씩 지워지고 있었다

 

-지렁이

 

매미는 여전하나,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매미

 

아주머니 하나가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담배

 

 

자신을 반복하면서 걷는 언덕길에서 이준규는 어떤 있음의 사태와 만난다. 그 언덕에서 지렁이는 마르고그는 조금씩 지워지고 있. ‘내가 거기에 있다라는 공허한 설명어가 싫어서 다른 거울의 언덕으로 올라가는 것, 그리고 그러면서 네모라는 고통스러운 환청과 만나기도 하는 것이 이라면, 그 삶의 언덕에서 이준규가 다시 만난 다른 설명어들도 내가 거기에 있었다이다. 거기서 이준규는 ” “지렁이” “매미” “아주머니가 언덕을 올라가는 목적이 다르지 않음을 보게 된다. 반복의 목적은 마르기 위함이고 지워지기 위함이다. 사물의 자리로 그들은 다시 돌아온 것이다. 네모에 찔리지 않기 위해 걸어 올라갔던 저 의미의 길들은, 네모와 함께 걸었던 바로 그 길이었던 것이다. 반복의 슬픔만을 남기고 싶었”(네모서문)던 그가 이내 반복한다”(반복서문)라는 고백을 다시 시작하게 될 때, 후자의 반복은 조금씩 사라지기 위한 반복, 죽음 충동 그것이다. 그 자리는 공허한 슬픔만이 고였던 앞의 그것의 세계와 다르지 않은 것이다. 붙잡으려 한 상징의 거울이 이미 항상 실재의 거울이었다. 이것이야말로 거울 스스로가 드러내는 자기 공백이다.

 

그럼에도 이준규가 거울 밖을 볼 수 있는 자라면, 그것은 저 충동의 거울 면을, 그 거울 면에서 태어난 네모들을 껴안는 자이기 때문이다. 네모를 피해 보려 반복하기도 하고, “길이 갈라지는 곳에서는 머뭇거리기도 했던”(골목) 몸짓들이 다 부질없었고 다 거짓말이며, 끝내 두 손으로 얼굴을 덮게 만든다는 걸 알게 됐기 때문이다.(얼굴) 그래서 그는 자신의 눈동자에 붙은 거울 조각들을 내버려두기로 한다. 여기서 반복의 자리는 고요한 진동의 자리로 변한다. 이 진동의 자리는 이준규가 걸어 나간 새로운 숲이다. 그 숲에서 네모는 자신을 향해 입을 벌리는 대신 그와 함께 걷는다. 다시 환해진 거울, 전능한 실재의 아버지는 그 새로운 숲에서 텅 빈 아버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아마 황인찬이 본 거울의 얼굴도 그것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준규는 거울이 이 세상에 던지는 연설을 이렇게 들려준다. ‘거울의, 거울에 의한, 거울을 위한 저 삶은 우리 세계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그때 우리는 저 거울의 숲이 조금도 두렵지 않은 완전한 숲임을 알게 될 거라고.(마트료시카)

 

 

5. 자꾸만 복원되는 거울을 위하여

 

2010년대 우리 시가 받아 적어나가야 할 공백(lack), 2000년대 젊은 시인들이 발견한 부정성일 것이다. 이현승, 황인찬, 이준규는 거울을 열심히 깨던 전날 시인들과 같으면서도 다른 방식으로 그것을 적어나가는 중이다. 그들은 2010년대 시에 나타난 공백이 부지불식간에 찬란한 여백으로 이동하는 것을 보면서 슬퍼한다. 그러니 이들 시는 깨져도 자꾸만 복원되는 거울에 대한 반응의 페이지일 것이다. 이들은 그 깨졌던 거울을 이리저리 조립해 보고, 그 유리 부분을 더듬고, 거울 가루를 눈에 쓴 채 거울로 들어가려 한다. 그 공백이 이 세계의 실상이라면 이현승은 그것을 아버지의 거울 면 위에서 찾고, 황인찬은 거울신앙자들에게 그것을 거울의 기원으로 제시한다. 거울 가루가 눈에 쓰인 이준규는 몸에 찍힌 거울의 화인들을 슬픔의 고름으로 모은다.

 

이 때문에 이 세 시인을 가리켜 ‘2010년대 거울 주체라 명명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세계는 상징질서 바깥보다, 상징의 거울과 상상의 거울 그리고 실재의 거울이 서로 다른 각도로 매듭지어지는 과정에서 다시 비친다. 요컨대, 이현승은 늑대처럼 달려오는 사물과 우리를 이웃하게 도와주는 아버지 얼굴을 2010년대 세계에 다시 불러온다. 황인찬은 세계 저 너머의 환상이 상징질서의 구성물임을 보여준다. 세계의 민낯을 더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이준규는 죽음 충동과 연계된 반복을 즐김으로써 거울의 안과 바깥이 다르지 않은 그만의 출구로 나간다. 그렇다면 이 세 시인의 거울 면 위로 올려진 2010년대 세계의 공백은 무엇을 위한 걸까. 이렇게 말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다르게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을 위한 거라고.(황인찬, 무화과 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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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이 글이 다루는 위 세 시인의 2010년대 시집은 다음과 같다. 이현승, 친애하는 사물들, 문학동네, 2010; 황인찬, 구관조 씻기기, 민음사, 2012; 이준규, 네모, 문학과지성사, 2012; 반복, 문학동네, 2012.

 

2)박찬부, 라캉: 재현과 그 불만, 문학과지성사, 2006, 278-279.

 

3)주디스 버틀러, 의미를 체현하는 육체, 김윤상 옮김, 인간사랑, 2003, 373.

 

4)정한아, 거기 수심이 얼마나 됩니까?, 친애하는 사물들해설, 100.

 

 

5)레이너드는 라캉의 입으로 말한다. “사물은 타자의침묵하는 부분이지만, 이웃은 말을 하며 따라서 주체가 출현하기 위한 형판을 형성한다”, 케네스 레이너드 외, 이웃, 정혁현 옮김, 도서출판b, 2010, 53.

 

6)이승훈은, 거울 안으로 들어가도 자아가 죽지 않을 때는 그 여백에 되비쳐질 때라 보았다. 이승훈, 라캉으로 시읽기, 문학동네, 2011, 159.

 

7)라캉에 따르면 신경증자는 타자에게 던진 자신의 말을 뒤바뀐 모양으로 돌려받지만, 타자가 자신일 수밖에 없는 환청 주체의 경우는 그대로 돌려받는다. 환상의 지원이 없는, 동어 반복적 확실성만 존재하는 후자 세계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몸짓들은 그 환청을 몸에서 털어내기 위한 반복의 움직임이다. 맹정현, 환청의 논리학, 리비돌로지, 문학과지성사, 2009 참조.



<당선소감>

 

내게 다가온 확신, 결국 내가 원했던 확신 아닐까

 

정신분석학 책들을 읽어가면서, ‘내가 본 것이 결국 내가 보기 원했던 것일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는, 우리 시대 문학이 발견했다고 믿은 실재또한 어쩌면 가상의 다른 얼굴일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까지 번지기도 했습니다. 젊은 시인들의 시가 한창이었던 2000년대는 물론이거니와 2010년대 중반에 이른 지금도 이 생각을 꺼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황인찬, 이현승, 이준규의 시는 저에게 그것을 적어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들 시는, 이 시대가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이성복, 그 날) 지난 시절과 별반 다르지 않으며, 세계의 병리성을 비판해 온 비평 언어도 그 병리성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음을 말해주었습니다. 만일 그들에게 당신이 본 게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그들은 아마도 자기 팔다리에 찍힌 화인(火印)부터 보여줄지도 모릅니다. 젊다는 것이, 새롭다는 것이, 나아가 전복적 상상력을 꿈꾸는 일이 이 시대 꼭 필요한 부정성을 일궈내는 일이라는 사실에 토를 달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세 시인의 시는 그 부정성이 자신에 대한 깊은 응시를 통해서도 변용될 수 있는 것이라는 걸 보여주었습니다.


그들 시 속에 제 삶을 덧대 보면서 PC 자판을 두드려보다가 신문사에 갔었고, 그렇게 한숨 돌렸을 때 당선 통보가 왔습니다. 많이 부족한 글에 날개를 달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의 은혜를, 정진하는 일로 갚고자 합니다. 학부 시절부터 지금까지 저를 길러 주신 은사 박이도 선생님, 그리고 힘들 때마다 격려해 주신 스승님들과 선배님들께도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1969년 충남 아산 출생

경희대 국문학과 및 동 대학원(국문학 박사) 졸업

 

 

<심사평>

 

평론은 문학 텍스트 자체가 아닌 맥락 다뤄야


예년에 비해 응모작 편수가 줄었으나 작품들의 질은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응모작 대다수가 기본을 갖추고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다루고 있는 대상도 다채로워 특별히 주조라 할 만한 것이 보이지 않았던 것도 이번 응모작들의 한 특징이기도 했다.


그런데 대다수의 응모작이 놓치고 있는 것이 하나 있었다. 문학평론이 다루어야 하는 것은 문학텍스트 자체가 아니라 그 텍스트가 놓여 있는 맥락이라는 사실이다. 어떤 대상이나 글감이 글로 쓸 만큼 의미 있는 것이 되려면 그런 의미를 만들어내는 틀이 있어야 한다. 문학평론이란 특정한 작품이나 작가에 대해 쓰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런 의미 생산의 틀에 대해 쓰는 것이다. 이런 틀을 의식한다면 왜 하필 이 작가나 작품에 대해 쓰고자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없을 수 없다. 하나의 대상을 끄집어내면 그것과 얽혀 있는 다른 수많은 대상이 주렁주렁 달려 나오기 마련이다. 여러 작품이나 작가를 겹쳐놓음으로써 그들의 관계와 의미에 대해 말하는 방식은 말할 것도 없되, 하나의 대상에 대해 말하는 형식을 취하더라도 그것은 그 대상이 자기 배후에 감추고 있는 수많은 다른 대상들에 대해 말하는 것이어야 한다. 매우 특별한 텍스트를 찾아내고 그것이 지닌 특별한 의미를 말할 수 있는 것도 이런 틀 속에서이다. 최종환 씨의 거울 속에서 탄생하는 주체들 - 이현승·황인찬·이준규를 통해 보는 2010년대 시를 당선작으로 고른 것은 이 글이 대상이 아니라 맥락에 대해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학술적 방언들을 적절하게 통제하고 독자들과의 소통을 염두에 둔 글쓰기를 해나간다면 좋은 평론가로 성장할 것으로 믿는다.

 

심사위원 : 서영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