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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예의 시선과 소통, 그리고 현재 / 김세린

 

 

. 시작하며: 시선과 소통, 공예의 필수 요소

 

우리는 스스로가 편견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엄청난 편견 속에서 많은 판단을 하지요. 눈에 보이는 것에 영향을 많이 받으니까요. - 말콤 글래드웰, 블랭크Blink중에서

 

주의나 관심, 눈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시선. 시선은 우리의 삶 안에서 항상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게 해준다. 추함과 아름다움을 눈을 통해 직접 전달하고, 그것에 대한 판단을 하게 시각적으로 도와준다. 사회 제도나 유행 안에서 드러나는 표면적인 것에 대한 생각이나 그 안에서 형성되는 미감이나 취향을 사람에게 판단하게 하는 직접적 역할을 담당한다.

 

공예는 생활에 유용한 물건을 제작하는 일과 그 제반사항을 총칭한다. 사람들이 사용하는 물건을 제작하는 산업적 요소에 물건을 보기 좋게 아름답게 꾸미는 예술적 요소가 더해지면 공예는 비로소 완성된다. 시선은 이런 공예의 외형과 쓰임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그러나 시선만으로 공예가 완성되지는 않는다. 시선을 통해 머릿속에 생각한 것들을 제작자가 제작자 자신과 소통을 하거나 수요자와 제작자가 소통하면서, 공예품의 모든 것은 결정지어져 탄생된다. 공예는 이러한 소통과정을 거친 후 제작되어 우리 삶 안에서 함께 살아가면서 진정한 의미가 완성된다.

 

시선과 소통. 그것은 시대의 관습이나 미의식에 의해 달라지고 한 시대의 양식을 탄생시킨다. 제작자와 수요자에 의해 결정되는 공예의 시대양식은 이들이 동등한 위치에서 한 소통에 의해 탄생되는 것은 아니다. 시대상과 제도에 따라 수요자만의 시선과 의사만을 반영해 그 안에 제작자의 기술이 더해 만들어지기도 하고, 이와는 반대로 제작자만의 시선과 사유, 그의 인식 안에서의 소통에 의해 결정되기도 한다. 공예품 제작에 이와 같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시선과 소통의 주체 변화는 근대 이전과 이후가 뚜렷이 구분되어 나타난다. 특히 근대 이전에 제작자와 수요자의 소통과 시선의 적용은 주도하는 이가 거의 변화하지 않았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소위 우리가 개화기 혹은 근대의 시작이라 부르는 이 시기 우리나라는 계몽과 개화가 국가의 선결 과제로 강조됐다. 시대의 변화는 공예 역시 기존 제작 체제의 변화와 일본을 통해 들어온 서구의 새로운 체제들의 유입으로 격변을 가져왔다. 그리고 격변은 공예에 있어 새로운 소통의 방법과 시선이 들어오는데 결정적 요인을 제공했다. 당시 관영수공업을 중심으로 철저한 국가의 관리에 의해 이뤄졌던 공예품 제작체제에 불어온 변화의 바람은 당대 지식인들과 기존 관영, 민영 수공업에 종사하던 이들에게는 혼란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사회의 변화는 기존 공예에도 시선과 소통의 변화를 요구했고, 이에 따라 공예품의 제작 양상과 소통에는 변화가 시작됐다.

 

그러나 이를 단순히 시대상황에 의한 공예의 담론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공예에 있어 소통의 변화는 시대 상황은 물론 공예품을 사용하는 사람들과 제작하는 사람들의 시선과 소통에 변화와 인식의 전환 등 다양한 요소들이 작용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공예의 양상과 소통방식의 정착을 판단하는데 중요한 키워드이기도하다. 근대는 현대 공예의 소통과 시선의 형태, 그리고 체제구축에 결정적 요인을 담당했고, 기점이 되었다 필자는 판단한다. 이에 필자는 근대 이전과 이후 수요자와 제작자 사이에서 작용하는 시선과 소통주체의 모습을 근대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시대에 따른 변화를 추적해 사용자와 제작자 사이의 소통방식과 공예품의 반영 양상에 대해 알아보고, 그 모습을 통해 현대 공예의 소통양상과 현실을 논하고자 한다.

 

. 공예품 제작의 소통 방법: 근대 이전과 이후.

 

지정 4(1344) 5월 청동누은향로 하나를 경건히 만들어 삼각산 중흥사 대불전에 공덕용으로 바치다. 장차 이 공덕으로 황제는 오래 살고 국왕은 오랫동안 천하가 태평하길 원한다. 영의정승 채하중 오산군부인 양씨 철명이 발원하였고, 비구 오여, 진오, 계호가 권선하였고, 누수는 중낭장 김경이다. 이 공덕이 모두에게 널리 미치고 우리 무리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불도를 이루도록 한다. - 지정4년 중흥사명 향완 명문(1344)

 

는 백토白土를 구워서 제조한다. 초벌구이는 길이 88푼이고<조예기척을 쓴다>, 넓이는 68푼이고, 두께는 7푼이며, 매 장에 8항이고,<장수는 문장의 다과에 따른다> 매 항에 18자이다. 회회청回回靑을 사용한다. 오른쪽 모퉁이에 모릉지’<시호도 함께 작성한다>, 아래 모퉁이에 제 몇 장이라고 쓰고, 왼쪽 모퉁이에 무슨 능지<시호도 함께 쓴다>’, ‘모두 몇 장이라고 쓴다. 재벌구이해서 쓴다. - 국조상례보편치장도설자지治葬圖說磁誌

 

필자가 제시한 근대 이전 공예품을 제작하는 모습을 담은 앞의 이 두 자료는 당시 제작에 있어 시선과 소통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근대 이전 공예품 제작에 있어 소통은 제도와 수요자의 시선, 인식, 그리고 종교와 향유문화가 주요 요소였다. 이러한 수요자의 일방적인 소통은, 제작자의 기술만이 공예품에 반영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꼭두나 광주리, 신발 등 제작자의 염원이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지는 공예품도 있었지만, 생활에 사용하는 것을 비롯한 대부분의 공예품은 수요자 중심의 소통을 통해 제작이 이루어졌다.

 

국가에서는 공예를 백공百工 혹은 백공기예百工技藝라 하여 국가의 기간산업 가운데 하나로 인식했다. 국가가 원활하고 효율적으로 제작 시스템을 관리하기 위해 공조工曹를 중심으로 공예품을 제작하는 장인들을 중앙관청에서 일하는 경공장, 지방관청에서 일하는 외공장으로 나눠 편입시켰다. 이에 따라 제작자들은 백공안독, 공장안이라 불리는 서류에 기록되어 국가의 관리감독을 받으면서 자신이 맡은 분야의 공예품 제작을 담당했다.

 

실례를 살펴보면, 국장國葬이 치러질 때 각 관청에 소속된 장인들을 징집하고 사전에 제작된 의궤에 따라 그 역할을 분담하고, 세종오례의를 비롯한 각종 의례서에 적혀져 있는 공예품의 의전에 따라 예조의 지시를 받아 제작자는 국장에 소용되는 공예품을 제작했다. 여기에 제작자의 취향은 들어가지 않았다. 오로지 국가에서 정해진 내용에 따라 제작자는 공예품을 제작할 뿐이다. 앞서 필자가 예시한 지정4년 중흥사명 향완의 명문과 국조상례보편의 내용은 이러한 제작 시스템과 소통의 방식을 알려주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이런 국가의 시스템 안에서 제작자는 수요자와 공예품 제작을 위한 소통을 할 때,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것이 국가의 제도였고, 국가의 제도는 그들의 시선과 소통을 위한 목소리를 용납하지 않았다. 공예품을 제작할 때 소요되는 재료 하나

 

하나도 앞서 예시한 국조상례보편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국가에서 정한 대로 사용해야만 했고, 제작자는 그들의 기술로만 작은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공예품에 장식되는 문양이나 의장 또한 국가의 지시를 받아 도설을 제작하는 화원들이 그리는 오조룡 혹은 주작이나 백호 등을 제작자가 만든 공예품에 장식했다. 수요자의 취향과 그들이 살고 있는 국가의 이념이나 제도에 따라 제작자는 공예품을 제작할 수밖에 없었다. 삼국시대 이전부터, 수요자와 제작자의 소통은 그렇게 이뤄져왔다.

 

민가에서 사용하는 공예품을 제작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국가에서 지정한 신분에 따른 장식의 한계를 넘을 수 없었고, 그 한계 범위 안에서도 수요자들은 자신들이 사용하기 편리하게 공예품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했다. 결국 제작자 자신이 사용하는 물품도 제도의 한계 안에서 제한적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고, 주문을 받은 물품은 수요자의 시선과 미감에 맞춰 제작을 해야만 했다. 근대 이전, 제작자의 시선과 생각이 자신의 손으로 만드는 공예품에 적용된다는 것은 수요자와의 소통을 제작자가 주도해 한다는 것이 기본적으로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에, 제도와 신분 등의 요인으로 거의 불가능 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회화의 경우, 환쟁이라 하여 아무리 천대받았다 하더라도, 조선시대 풍속화나 문인화 등에서 화원이나 양반층의 문인화가의 시선을 느낄 수 있는 작품들이 꾸준히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공예는 제작자 개인의 인식이나 시선이 반영된 예를 찾아보기 힘들다. 공예가들은 각 관청에 소속된 제작자의 우두머리인 도변수가 평민수준의 취급을 받고 있었고, 수공예를 업으로 삼는 특수행정구역의 제작자들은 평민 혹은 천민의 신분으로 제작에 참여하고 있었기에, 이런 현상은 더욱 두드러질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의례기를 제외한 기물 하나하나가 사람들의 생활에 그대로 흡수되어 사용되기 때문에 그들은 단순히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기물을 제작하는 기술자 취급을 받아야만 했다. 산릉을 비롯한 국가 공역과 의례를 기록한 의궤를 제외한 공예품 제작에서 제작자의 이름 하나 전해지기 힘들 정도의 수요자 일방의 소통 형태. 이것이 근대 이전 공예품 제작에 있어서의 주요 소통 방식이자 현실이었다.

 

근대기에 접어들면, 이와같은 제작자와 수요자간의 소통에는 변화는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공예품 제작에서 일방소통의 도구로 활용된 관영수공업 체제가 해체되고, 이와 함께 일본과 서구에 의해 들어온 기계를 이용한 대량생산시스템이 도입되어 여기에서 생산된 기성품들이 기존 수공업의 생산품을 서서히 대체했다. 이러한 시대의 변화는 공예품을 제작하는 제반환경도 변화의 바람을 맞으면서 이전부터 내려오던 제작 시스템에 대한 고찰을 요구했다.

 

정치와 법률과 농업과 공업과 상업과 척식업과 광업 등 각항의 전일 편리하지 못한 법을 버리고 새로 선량한 법을 취하여 씀을 이름이니 새 법을 학습지 아니하고 어찌 옛 법을 제거하리오. 공업계는 새로 정교함을 학습하며 새 것을 배우는 이유는 옛 것을 고치기 위해서다. - 대한매일신보 1910.10.20 신개혁의 주지 중에서

 

국가의 기간산업 중 하나로 인식되었던 공예품의 제작에 대한 인식과 방향의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필자가 제시한 대한매일신보의 논설과 같이 장지연을 비롯한 지식인들은 공예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각종 의견들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공예품 제작 체제를 변화시키더라도 부국강병을 기본 목적으로 두고 국익을 위한 수단으로 초점을 맞추면서 결국 대다수 담론의 골자는 근대 이전과 마찬가지로 수요자 일방의 소통에 의한 공예품의 제작이 중심을 이뤘다. 제작자의 시선을 담은, 제작자를 하나의 개체로 인정해 그들만의 공예품을 제작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야 한다는 내용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서구나 일본에서는 이미 일방의 소통과 시선은 깨져버렸고, 공예를 아름다움과 제작자의 시선을 담는 예술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시대의 대세는 이미 위의 논설과 같은 견해와는 상관없이, 그리고 그간의 우리나라의 상황과는 무관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결국엔 이뤄질 수밖에 없었던 시선과 소통의 다각화는 아이러니하게도 계몽과 개화 엘리트를 양성을 목표로 부국강병을 위해 시행된 국가의 신식 교육이 시발점이 된다. 공예를 비롯한 서구의 각종 사조와 문화들이 일본에 의해 유입되면서 하나의 지식으로 인정돼 교과목에 편입되었다. 이와 함께 부국강병을 위한 공예론을 주창하던 지식인들에 의해 진행된 개인 자체에 대한 사유가 하나의 담론으로 활성화되며 제작자는 기술자가 아닌 공예가로 변모해나갔다. 근대 이후 시작된 제도의 변화와 새로운 사유, 담론의 유입과 활성화, 이 모든 것들이 하나로 어우러지며, 공예는 시선과 소통의 다각화를 시작했다.

 

그간 근대 공예에 대한 평론과 논의는 주로 제도와 담론의 변화, 그에 따른 현상이 거론되었다. 하지만 이와 더불어, 1900년대에 들어서면서 본격화된 개인, 그리고 개인의 역할에 대한 담론과 그에 따른 제작경향의 변화도 그 영향이 지대했다고 필자는 판단한다. 백성, 신민에서 국민, 개인으로의 국가 구성원의 위치 전환은 수요자와 제작자 그들 사이에 적용되는 시선과 소통에도 분명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우리가 지금 접하고 있는 전통공예의 제작 양상과 소통의 방식에도 결정적 역할을 담당했다 생각한다.

 

. 격변: 공예가와 프로슈머, 그리고 소통의 다각화

 

필자가 제시한 우리나라 근대기 개인에 대한 사유와 담론은 이를 처음 시작한 서구나 우리나라에 교과서나 서적을 통해 전달한 일본과 마찬가지로 시작은 단순히 개인의 이익이나 권리를 위한 논의는 아니었다. 개인의 이익이나 권리보다는 '개인의 활동과 능력치가 국가의 공익에 어떻게 활용될 수 있을까?' 라는 탐구에서 비롯되었다. 공예의 경우, 공업의 하나로 간주되어 상공업 진흥을 위한 도구로 개인의 담론이 적용되었다.

 

그 나라의 부강함이 그 나라의 공업 발달여부에 있으며, 그 나라의 공업 발달은 개인 개인이 공업을 발달하는 데로부터 이루어진다고 파악된다. - 대한매일신보 1908.8.1 나라의 빈부는 그 나라 공업의 발달여부에 있다 하노라.

 

근대 이전과는 달리 개인 자체와 개인의 활동을 인정하면서도 공익을 위한 개인의 역할에 대해 논하고 있는 위와 같은 기사는 비단 매일신보 뿐 아니라 한성순보, 독립신문 등에도 꾸준히 등장한다. 위정자들과 지식인들은 국가의 발전을 위해선 개인의 능력을 끌어올려야 하며, 그것이 국가 발전에 도구이자 원동력이 될 수 있다 판단했다. 이러한 생각들이 바탕이 되어 신식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고종은 교육조칙을 내려 국가 차원에서 신식교육을 장려했다. 이에 따라 공예 역시 도화혹은 수공이라는 이름으로 교육이 이뤄졌고, 학생들은 지식의 일부로 공예를 인식하게 되었다.

 

또한 한성미술품연구소의 설립으로 이전에는 일상의 생활용품, 의례를 위한 도구로만 여겨졌던 공예가 미술품美術品으로의 위치를 획득했고, 자연스럽게 소속된 제작자들의 능력도 국가를 위한 개인의 능력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렇다 하여 이들을 개인으로서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예술가의 영역인 공예가로서 인정을 받은 건 아니다. 다만 앞에서 언급한 기사와 같이 국가의 발전을 위해 일해야 하는 한 개인, 그리고 국가를 위해 자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해야 하는 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된 것 뿐이었다. 때문에, 공예는 예술적 요소()보다는 산업적 요소()가 강조돼, 근대 이전과 마찬가지로 기술만이 여전히 중요하게 여겨졌고, 작업 역시 공예가 개인의 시선과 인식이 반영된 것 보다는 박람회 등에 국가 차원에서 출품하기 용이한 청자, 백자, 의례기 등 재현품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국가 차원의 전람회나 박람회 등의 노출 횟수가 높아지면서 공예는 미적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고, 우리 근대 사회에서 예술품이라는 새로운 위치를 획득할 수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더불어 산업과 교육체제가 점차 정립되고 컬렉터라는 새로운 수요층이 등장하면서 공예에 대한 시선과 그에 따른 제작 경향은 또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단순히 부국강병을 위한 산업으로의 역할만을 요구했던 공예에 대한 시선은 칠기와 자기 등을 중심으로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고 기술을 전승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 여겨졌고, 수집품으로서의 위치를 확보하게 했다. 이런 새로운 공예에 대한 시선과 인식은 산업에서 예술로 나아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고, 시선과 소통의 다각화에 초석이 되었다.

 

그러므로 문명의 확산보다 우선할 일은 국민들에게서 노예의 성질을 씻어버리는 것이다. 노예의 성질을 버리지 않으면 문명화를 이뤄도 소용이 없다. 교육을 확장해도 국권은 회복되기 어렵다. 건축물이 미국처럼 정교하고 제조부문이 영국처럼 발달한 형질상 개화를 성취해도 국권회복은 어렵다. 개인의 독립사상을 활발하게 하는 것이 제일 급선무다. - 대한매일신보, 1909.4.29 논설: 정신으로 된 국가

 

이러한 인식이 정립되는 데에는 필자가 위에 제시한 논설과 같은 한일합방 이전, 국가의 발전을 위해 논의되었던 독립적인 개인에 대한 담론이 한 몫을 담당했다. 개인의 능력을 인정하는 담론이 국가 발전을 위한 개인의 능력 함양이란 기치 아래 부각되면서 제작자 개개인의 기술이 하나의 능력, 그들만의 기술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런 개인에 대한 담론과 사회적 변화는 이들이 산업과 예술을 책임지는 공예가라는 인식이 확대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또한 이미 대한제국기에 설립된 후, 그 체계가 갖춰진 관립공업전습소(1906년 설립, 이하 공업전습소)는 시선과 소통의 다각화를 구축하는데 시발점을 제공했다. 공업전습소에 입학한 이들은 금속공예, 목공예, 도자, 칠공예 등 각자의 전공에 따라 교육을 받았고, 미학이나 공예사 등 다양한 이론수업을 접하며, 수요자의 요구에 의한 작품제작이 아닌, 제작자 자신의 생각과 시선을 통한 자신만의 소통을 통해 이뤄내는 작품세계를 접하게 되었다. , 공예품을 제작하는 이라 하더라도, 이전과는 달리 기술자가 아닌 미래의 공예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교육이 진행된 것이다.

 

이것은 근대 이전의 수요자 일방 소통 방식에서 벗어나 공예품 안에 자신만의 목소리를 담아 수요자에 일방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새로운 공예품 제작의 소통 방법을 습득해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을 주었고, 더불어 자신을 예술가의 한 사람인 공예가로 인식하고 자부심을 심어준 계기를 제공했다. 이와 같은 변화들은 현재의 전통공예가에 대한 인식과 위치를 마련해준 중요한 사건이자 의미라 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이왕직미술품제작소를 비롯한 각종 공예품 제작소들은 기존의 소통법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대신 새로운 생산체제인 기계에 의한 대량생산과는 대비되는 소통의 방법이 사용되었다. 일본인을 비롯한 외국인 컬렉터들, 당시의 부유층의 주문 제작은 이전과 같은 수요자에 의한 소통방법이 적용됐지만, 이와 함께 프로슈머(prosumer)'라 하는 새로운 소통 체계도 동시에 활용되었다.

 

프로슈머란 생산자producer + 소비자Consumer의 합성어로서 생산소비자라는 뜻이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가 1979년에 출간한 3의 물결에서 정의한 개념으로, 생산과 소비가 완벽하게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와 생산자가 제품 개발이나 제작에 관련해 적극적

 

인 소통을 해 제품을 제작하는 것을 지칭한다. 근대에 시작된 프로슈머는 현재까지도 사용하는 제작, 소비의 양태로 우리나라에서도 1910년대 이후에 등장하는 것이 확인된다. 이왕직미술품제작소와 일본인들이 운영한 형이공방, 그 외 공예가들에 의해 설립된 독립 공방들에서 주로 나타나는 제작 소통방법으로, 여전히 수요자가 자신의 시선을 반영한 의견을 제작자들에게 제시하지만, 그들 역시 그들의 시선이나 재료를 수요자와 함께 논의하여 제작하는 모습이 바로 프로슈머의 형태이다. 일본인을 위한 공예품을 이왕직미술품제작소에서 제작할 때, 제작자들이 부족한 재료에 대한 언급하거나, 도안design을 그들에게 보여주고 의견을 개진하는 등의 방식이 소극적이지만 그 예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프로슈머의 등장은 메이지유신 이후 정립된 일본의 공예품 제작 체계와 미술 고등교육방식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이것이 우리나라의 공예에 도입되어 적용되면서, 우리나라 공예에 있어 또 하나의 소통 방식으로 자리 잡은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한, 기계생산으로 대체할 수 없는 수공예품에 제작에 있어서 이러한 소통방식의 유입은 공예품을 단순히 생활에서 사용하는 물건에서 하나의 작품으로, 그리고 만드는 이를 기술자가 아닌 전문가이자 예술가인 공예가로 인식이 전환되는데 한 몫을 담당했다 필자는 평가한다.

 

급변하는 세계 정세에 따른 갑작스런 개화와 계몽의 시작 그리고 한일합방이라는 슬픈 역사 안에서 시작된 다양한 상황의 전개. 기존의 백성, 신민이 아닌 개인이라는 인식의 출발, 그리고 지식의 하나로 시작된 공예교육, 생활용품의 기계생산 등. 이 모든 것이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하나로 연결되면서 공예에서의 소통은 점차 다양화됐다. 그리고 그 안에서 제작자는 자신의 시선이 적용된 공예품에 제작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국가의 제도나 수요자의 일방소통에 얽매였던 공예의 시선과 소통이 이러한 요인들이 상호작용을 하면서 다각화를 맞이했다.

 

. 소통의 양극화: 다각화된 소통방식의 정착과 변형

 

급변하는 정세에 따른 지식인과 위정자들의 담론들과 일본의 유용한 조선 지배를 위한 제도의 유입 및 구축과 사회의 변화. 이러한 변화는 우리나라가 주체가 아닌 철저하게 타자가 되어 이루어진 것이지만, 새로운 교육기관과 제도, 제작 시스템의 도입과 정착이 공예계에 미친 영향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그리고 그 영향은 현재의 공예 제작시스템에도 지속적미치고 있다 필자는 보고 있다.

 

근대 이전의 소통법에서 탈피한 다각화 된 소통법의 도입과 확산은 공예품을 제작하는 제작자들에게 다양한 활동 방향을 열어줬다. 서구의 기계생산이 그 동안 제작자의 손으로 제작했던 생활용품제작을 대체하면서, 수공예는 새로운 용도와 가치를 부여받았다. 제작자의 기술을 바탕으로 생각과 시선을 적용한 예술품. 일본인을 중심으로 한 컬렉터들이 구입해 장식하는 장식품. 부유층들이 주문 제작하는 고급 생활용품. 이러한 가치의 변화는 공예품을 근대 이전의 국가 기간 산업 속 결과물의 일부에서 벗어나 공예가가 제작하는 하나의 미술품으로서 격상된 위치를 갖게 하였다. 이러한 공예의 변화된 위치 정립은 공예품의 제작에 있어서 시선의 적용과 제작을 위한 소통에서도 앞서 살펴본 소통방식들이 점차 정착하게 하는데 일조한다. 근대 이전과 이후가 공존하는 이러한 소통의 다각화는 공예품의 제작 방식과 그 결과물에서도 점차 다른 모습으로 표출된다.

 

우선 근대 이전의 수요자 중심 일방소통의 공예품 생산체제는 이전과는 약간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수요자의 취향과 유행에 맞춰 도안이 제작돼 그것을 바탕으로 생활용품(기성품)이 공장에서 대량생산되는 모습과, 야나기무네요시의 조선공예개관에 언급되는 일본인들이나 우리나라의 부유한 이들에 의해 고용된 제작자들의 활동이 바로 그것이다. 수요자의 필요에 맞춰 생활용품이 만들어지고, 고용주들의 선호도에 따라 광주리를 짜고 청자를 재현하고 칠기를 제작하는 모습. 시대의 변화에 따라 제작자가 기계 혹은 고용된 인력으로 대상이 바뀌고, 수요자의 대상도 고용된 제작자들의 경우 근대 이전과 마찬가지로 주문을 요구한 고정된 수요자지만, 공산품의 경우 구입이 예상되는 다수의 수요예정자로 대상이 변화했다. , 이전과 같이 수요자 일방소통의 방식은 동일하지만, 수요자와 제작자 그 대상 자체가 변화해 수요자 일방소통에도 이전과는 달리 두 갈래의 길이 생겼음을 뜻한다.

 

더불어 앞서 서술한 프로슈머와 작가의 일방소통 일명 디세뇨disegno도 정착을 맞이하며, 공예의 시선과 소통의 다각화에 한 몫을 담당한다. 바자리가 정의한 디세뇨disegno는 머릿속에 상상하고 자신의 이념 속에서 형성된 것을 작품 속에 투영시키는 행위, 즉 공예가의 시선과 인식만을 작품에 담은 또 하나의 소통방식, 공예가의 일방소통을 뜻한다. 프로슈머와 디세뇨는 근대기 공예가들이 병행해 사용하기도 하고, 한쪽으로 치중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전문적 교육제도의 시행과 그에 따른 제반 이론과 지식이 가져온 이와 같은 풍경은 제도권의 교육을 받은 이들이 전업 작가로 나아가거나 사회에서 생산활동을 본격적으로 전개된 1920년대 후반부터 등장한다. 특히 강창규, 임숙재, 이순석 등 유학파를 비롯한 신식교육을 받은 공예가들은 단순한 제작자가 아닌 예술가로서의 공예가 면모를 본격적으로 보여주기 시작한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건칠기에 조각을 하고, 성경책 도안을 예술화 시켜 전시하는 이들의 작업은 분명 기존의 공예 작업과는 다른 것이었고, 공예가 본인의 시선과 인식을 대중에게 고스란히 전달하는 디세뇨적 소통의 모습이었다.

 

더불어 김정섭, 이학응 등 이왕직미술품제작소에서 활약하다 독립해 나온 이들 역시 공예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한다. 이들은 주로 자신의 독립된 공방을 운영하면서, 자신의 시선과 인식이 들어간 자신과의 소통에서 나온 디세뇨적 작품을 제작하면서 동시에 수요자의 주문을 받아 그들의 취향과 자신들의 소견을 개진해 작품을 제작하는 프로슈머prosumer적 활동도 병행한다. 이들은 교육에도 직접적으로 참여해 자신의 인식과 기술, 그리고 작품세계를 후학들에게 전달하기도 하는 등 그들의 제작 소통법과 시선을 후학에게 전달해 다각화 된 소통과 시선을 정착시키고 현재까지 이어지게 하는데 큰 역할을 담당한다. 특히, 이왕직미술품제작소에서 활동하던 이들의 이러한 흔적들은 근대 이전부터 내려온 전통 공예의 기술들이 소실되지 않고 계승되는데 절대적 도움을 줬고, 후학들이 전통공예를 근대의 새로운 소통 방식에 적용시켜 작품활동을 하는 데 초석이 됐다.

 

이러한 그들의 활동과 새로운 소통방식의 정착은 조선미술전람회(이하 조선미전)1932년 공예부가 신설되면서 그 결과물이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강창규, 이남이를 비롯한 당시 활동한 많은 공예가들이 작품을 출품 했고, 칠기, 자기, 섬유공예 등 다양한 분야의 작품과 그들만의 기술로 공예품 안에 적용되어 있는 자신의 시선과 인식, 미감을 관람객들에게 전달했다. 자신과의 소통에서 탄생한 공예품의 전시와 평론가들의 평가. 이것은 또 다른 수요자 혹은 관람객들에게 온전히 자신만의 이야기만 하는 공예에서 가장 늦게 등장한 소통방식, 디세뇨disegno의 완전한 정착이기도 했다.

 

자신만의 시선과 인식을 담은 공예품의 제작. 자신만의 작품 활동에 전념하는 이들이 늘어가고, 관람객과 수요자는 전시된 작품을 통해 공예가의 이야기를 듣고 그것이 자기의 구미에 맞으면 구입을 하는 모습. 그리고 평론가들이 공예가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해석해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모습. 조선미전에 공예부가 생겨나고 디세뇨가 정착하면서 시작된 새로운 풍경이었다. 조선미전이 조선을 유화시키기 위한 일본의 문화통치의 방법 가운데 하나로 설치되고, 이후엔 황국신민화의 일환으로 활용되었지만, 공예에 있어서 새로운 소통방식의 정착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나라 전통의 것을 그대로 재현한 작품 혹은 아르누보 등의 사조에 영향을 받아 제작한 탐미주의 작품들이 조선미전에 입상해 관람객들에게 공예가들이 말하고 싶은 다양한 이야기를 전달했다. 제작자가 수요자에게 자신의 시선과 인식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근대 이전과는 또 다른 일방 소통방식이 근대의 제도 변화와 다양한 담론들과 함께 시작된 소통방식들과 함께 어우러져 조선미전을 계기로 정착을 맞이했다.

 

제작자의 시선이 담긴 일방 소통, 제작자와 수요자가 함께하는 상호 소통, 수요자의 시선이 담긴 일방 소통. 이렇게 다각화 된 소통의 방식은 근대의 다양한 담론을 담아 시대상과 어우러지면서 정착하고, 예술로서의 공예가 새로운 시선과 소통방식을 안고 이어져갔다.

 

그리고 이러한 소통방식이 완전하게 정착함과 동시에 기계로 대량생산하는 생활용품의 생산방식 역시 확실한 위치를 잡았으며, 수요자 역시 공장에서 생산하는 것들을 거부감 없이 사용하게 되는 모습 역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아 나갔다. 또한, 공예가들도 조선미전에 자신만의 작품을 출품하거나 개인전을 개최하기도 하고 신문이나 잡지를 통해 자신의 공예관을 설파하는 등 점차 엘리트이자 예술가로서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이러한 각자의 위치 변화와 고착은 그들의 사유가 담긴 공예품의 제작의 확산을 동반했고, 공예가의 일방소통은 시간이 지나며 심화되었다. 공예가는 자신의 분야를 중심으로 창작활동과 전승활동을 이어나갔고, 그 결과물은 작품으로서 사진이나 전시장의 오브제를 통해서만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모습은 점차 공예품을 쉽게 삶 속에서 사용할 수 있는 것이라는 근대 이전의 인식에서 벗어나 바라보고 느끼는, 그리고 관람만으로 볼 수 있는 대상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리고 공예품에 대한 이런 변화된 시선과 소통은 현재 우리가 공예품을 대하는 가장 익숙한 모습이기도 하다.

 

프로슈머의 모습이 아직도 지속되기는 하지만 기성품과 주문제작을 중심으로 한 수요자의 수요형태와 예술품과 전승공예품을 중심으로 한 공예가의 일방소통은 현재까지 공예의 주요 소통 형태로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수요자 역시 공예품을 근대 이전과는 달리 자신의 시선과 의견이 담아 사용하는 물건으로 보지 않는다. 점차 공예가의 시선과 인식이 담긴 공예품을 관람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필요한 것은 기성품으로 그 자리를 채우고, 수공예품은 관람하는 오브제 혹은 수집의 일부인 컬렉션이라는 인식이 지배한다. 그 결과, 공예품을 비엔날레나 전시회, 전수회관 등에서 주로 만날 수 있게 되었고, 이에 따른 공예가와의 인식과 시선의 공유 즉 소통은 점차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삶 속에 존재하던 공예와의 양극단으로 벌어진 시선과 소통은 지금 우리에게는 일상적 풍경이 되었다.

 

. 나가면서: 양극화 된 소통의 방식, 그리고 현재

 

전통적인 순수미술은 규범을 상실한다. 다양한 미디어와 미술형식들이 점점 더 상호작용하게 되고 미술적 표현이 더욱 멀티미디어적으로 접근해야 된다는 생각은 너무나 중요하다 - 앤디워홀

 

앤디워홀의 이 말은 필자에게 이 글을 시작하기 전 동기이자 화두가 되었다. 작품과의 소통 그리고 상호작용, 이 글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시대를 짚어가며 시선과 소통의 변화를 고찰하면서, 다시 우리가 사는 현재의 시선과 소통을 돌아보게 되었다. 근대라는 격변의 시대를 거치며 공예를 비롯한 전반적 미술 체제의 새로운 정립은 시선의 변화와 소통의 다각화를 불러왔다.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의 양극화 된 소통방식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필자는 판단하고 있다.

 

인간의 삶 속에 함께 숨 쉬며 사용되기 위해 만들어진 공예에게 상호 소통과 시선의 상호 작용은 분명 필수 요소이자 존재의 이유이다. 현재 예술품으로서만 중시되는 공예의 모습 역시 중요하지만 우리의 삶 안에 사용되고 숨 쉬는 공예의 본래 모습 역시 중요하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생활 물건들을 공예가들이나 생산하는 공장의 제작자들에게 주문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공예가들의 시선이 담긴 공예품들이 우리의 생활 안에 직접 들어와 상호소통을 하고 있지도 않다. 공예품을 접하려면 박물관이나 미술관, 인사동을 찾는다. 그 곳에서 우리는 그들의 목소리를 구경할 수 있고, 평론가들의 설명을 통해 공예품에 담긴 스토리를 이해한다.

 

산업화가 완전히 정착되기 전 근대는 프로슈머가 그 자리를 대신해 수공예품이라 하더라도 수요자의 의견이 반영되어 상호 작용이 가능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가 마음에 드는 공예품을 공방이나 전시회에서 보는, 수집을 위해 구입하는 또 다른 일방 소통의 방식으로 공예품을 만난다. 그만큼 공예는 일상에서 멀어졌다.

 

물론 대중화와 저변확대를 위해 강연, 강습회와 대중을 위한 공예학교 등의 노력이 이어지고는 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공예가는 자신의 예술세계 표현을 위해, 무형문화재는 전승받은 기술의 보존과 계승을 목적으로 전통방식의 공예품을 제작한다. 그리고 전시를 통해 수요자들은 자신의 취향과 맞았을 경우에만 구입을 결정한다. 프로슈머적 소통을 위한 작품활동으로 판로를 개척하는 이들도 있지만, 대부분 우리가 접하는 공예품은 작가가 자신만의 이야기를 하는 일방소통의 공예품 뿐이다. 이러한 소통은 결국 공예에 대한 관심과 인식을 멀어지게 하는 결과를 낳았고, 특히 전통공예는 전승에 있어서도 전승을 희망하는 이들이 부족해져, 현재 일부 공예분야에서는 기술 전승의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근대 이전에 비해 다각화된 소통방식과 시선이 근대라는 변화하는 시대 안에서 정착해 오늘에 이르렀지만 소통방식은 시대에 따라 또 변화한다. 그리고 현재 우리가 접하고 있는 공예는 이전과는 또 다른 시선과 인식을 우리에게 전달한다. 우리의 삶 안의 공예인가, 아니면 전시장 안의 자신의 이야기만을 하는 공예인가. 산업화와 국가의 발전을 위해 그리고 새로운 예술 체제의 정착과 변화에 너무 가쁘게 달려온 공예와, 기계생산품에만 의존하고 전시장에서 예술품으로 만들어진 공예품만을 보고 있는 우리의 현실은 공예와의 소통 방식에 또 다른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당선소감

 

"엄마의 삶으로 시작한 도전더욱 매진하겠습니다"

 

대학원을 마치고, 아이를 출산하면서 나는 어떤 길을 가야 할까? 라는 진로의 고민이 올해 내내 저를 뒤덮었습니다. 학위논문을 낸 지 2년밖에 되지 않았고, 학회발표도 아직 못한 초보 미술사학도였기에 '내가 공부하는 이로 묵묵히 끝까지 걸어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저 자신에 대한 자신감도, 확신도 떨어진 상태였습니다. 저에겐 새로운 자극과 도전이 절실히 필요했습니다. 이 글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이 글을 쓰며, 공예의 시간을 여행하는 시간여행자로 살았습니다. 즐겁고, 행복했습니다. 주제를 위해 미술사적 요소가 크게 가미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너무 미술사로 가지 않을까 염려했고, 너무 근대만 부각되는 것은 아닌가 우려했습니다. 부족한 것 투성이인 이 글을 너그럽게 봐 주시고, 세상에 내놓아 주신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겸손한 마음으로 학문에 더욱 매진하겠습니다. 늘 유쾌하면서도 진지한 가르침을 주시는 멘토이자 지도교수님이신 장남원 교수님, 공예사에 흥미를 갖게 해주시고 처음 길을 열어주신 최공호 교수님, 고려시대가 전공인 저에게 쉽게 접할 수 없는 근대 미학과 미술사에 대한 가르침을 주신 홍선표 교수님. 이 글을 통해 감사 인사 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저를 너무나 사랑해주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반쪽 김주형, 이 글 쓰는 동안 낮잠을 자주는 것으로 협조해준 11개월짜리 꼬마, 분신 김효건, 귀여운 여름이 사랑한다!

 

김세린

1983년 충남 논산 출생 이화여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

 

 

 

심사평 (박영택)

 

한국 공예에 관한 비평 거의 전무당선작 반가웠다

 

11편의 응모작을 읽었다. 빠르게 읽혔고 아쉬움은 컸다. 한국 (현대)미술을 보는 관점과 문제의식, 논쟁적인 시선이 부족한 글들이 대부분이었다. 그것은 미술작품의 폭넓은 접촉과 이해가 부족하거나 동시대 미술계의 현상을 읽어내는 안목의 부재, 또는 글 쓰는 이로서의 자신만의 미술관·세계관이 약하다는 방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평론의 대상으로 삼은 작품·작가들을 보는 안목이 진부하고 그것을 비평하는 시선이 둔탁하다. 문장은 작품에 관념적 의미망을 덮어씌우는 수사적 차원에서 맴돌고 있었다. 하여간 11편을 다시 읽고 정말어렵게 1편을 최종적으로 선정했다. 김세린의 공예의 시선과 소통, 그리고 현대란 글이다. 평이하고 담담한 글이지만 한국 공예의 전통과 근대, 현대로의 추이를 논리적으로 기술해나간 점이 상대적으로 돋보였다. 물론 논의가 다소 상식적으로 전개되었고 시선과 소통에 대한 개념적 정의가 부족하며 글 안에서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가 좀 더 명확히 개진되어야 했다. 그리고 다른 장르와의 연관성 속에서 공예를 조망해보는 시선도 아쉬웠다. 그러나 한국 공예 혹은 확장된 공예작업 등에 관한 비평이 거의 부재한 상황에서 이 글은 반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