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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글리 신드롬 - ‘가능성이라 불리는 아이들 / 박성준

 

 

1. 모글리 신드롬

 

돌이 지난 딸아이가/ 요즘 열심히 말놀이 중이다./ 나는 귀에 달린 많은 손가락으로/ 그 연한 말을 만져본다./ (중략) 발음이 너무 설익어 잘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억양의 음악이 어찌나 탄력있고 흥겨운지 듣고 또 들으며/ 말이 생기기 전부터 있었음직한 비밀스러운 문법을/ 새로이 익힌다.”

 

- 김기택, ‘말랑말랑한 말들을부분, <사무원>, 1999

 

늑대소년 모글리가 배우고 싶었던 인간의 언어란 인간의 말, 그 자체였지 인간들의 기호표현이나 사유체계가 아니었을 것이다. 모글리는 언어를 습득하기 위해서 늑대’+‘소년에서 늑대를 버려야 했다. 그러나 소년 모글리를 택하는 일이란, 길러준 을 먼저 버려야만 한다. 자신에게 젖을 물려준 늑대들의 유토피아를 버리고, 인간들의 상징질서 속으로 편입되어야만 모글리는 다시 소년으로 현시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늑대+소년은 무엇을 택해야 하는가? 늑대소년에서 늑대를 빼앗아간다면 모글리는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존재 자체에 대한 부정이 발생한다. 그렇다고 다시 늑대의 세계로 되돌아간다면 그를 인간이라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타의에 의해 명명된 늑대소년이라는 기이한 조합에 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조합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늑대소년사이의 구획 과정에 있다.

 

이제, 한 가지를 선택하라 요구하는 지금 여기를 어떻게 예측해야 좋을까. ‘늑대소년이라는 혼종된 자아, 다성의 언어를 잘 알아들을 수는 없다는 것이 여기의 풍토라면, “말이 생기기 전부터 있었음직한 비밀스러운 문법을 읽어내기 위한 움직임들은 지난 10년간의 지금이었을 것이다. 한 가지를 인정하면 서로가 모순이 되는 관계 속에서, 우리는 꼭 늑대가 아닌 ‘( )+소년의 출현에 대해 주목했었다. 이는 곧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일련의 증상이 되었다. 이렇게 2000년대 중반 시작된 수많은 모글리들의 출현은 우리의 언어를 기형으로 만들었다기보다는 수많은 방언들을 만들었다는 데에 있어서 그 의미를 가진다. 또한 그들은 기호표현을 통한 말이 아니라 말놀이로 존재했고, 그 말과 억양의 음악이 어찌나 탄력 있고 흥겨운지 듣고 또듣고 있어도 매력이 있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논제이다. 이렇게 아이가 말을 처음 배우는 것처럼, 기이한 자아의 설법에 대해 우리는 익숙해져 갔다. 아니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2. “뽀삐는 마을을 떠났다”, 전염병이 도는 마을을

 

욕망이라는 것은 자폐 속에 내재되어 있어야 힘을 갖는가. 때때로 우리는 의지보다는 치환을 위한 삶을 택한다. 현실에 있는 금지령들을 가볍고 쉽게 치환하면서, 충동질하는 자신의 의지를 꺾는다. 누구는 그것을 생존이라 했고 또 누구는 무의식의 발현이라 했을 것이다. 언어 습득 과정에서 이미 약속된 문법(langue)은 우리에게 말을 주었지만 또 말을 빼앗아 갔다. 젖을 떼인 아이의 울음소리를 보면 쉽다. 인류가 공통으로 알고 있는 그 근원적인 문법. 우리는 그것을 잃어가며 아이가 되었을 것이다. 때문에 아이는 근원적 문법과 소통의 문제에 한 발을 딛고 있고, 또 약속된 문법 속으로 자신을 소환해가는 중간자적 주체가 된다. 그러나 이 아이 주체의 자폐란, 대체로 이기적이고 견고한 환상 속에 가라앉아 있는 것이어서 우리에게로 하여금 욕망의 흔적만을 남긴다. 즉 태초의 욕망 대상을 찾기보다는 욕망의 개체들을 추적해가며, 견디는 양태를 엿볼 수밖에 없다. 한 아이가 끝끝내 성장을 거부하고, 또 생존을 거부하는 것으로서 생존하며 여기, 있다.

 

마을에 아이들의 이빨이 녹는 전염병이 돌기 시작했네 어른들은 알아차리지 못하네 아이들은 배가 고팠지만 아무것도 먹으려 하지 않았네 학교에서는 아무 얘기도 하지 않고 지냈네 동네 지붕마다 달이 박혀 있었네 식초를 마신 여인네들은 지붕에 올라 달을 찢어 아기를 훔쳐가네 아이들은 이빨을 녹여 먹으며 거리를 쏘다녔네 아무도 무리에서 떨어져 나가려 하지 않았네 정거장마다 걸린 옷걸이에는 사람들이 갈아입은 옷들이 몇 겹으로 가득했네 도로에는 개가죽들이 솟아 있었지만 자동차들은 속도를 늦추지 않았네 아이들은 길가에서 커다란 빈 분유통을 굴리며 놀았네 차들이 지나갈 때마다 아이들은 개털을 들이마셨네 그때마다 녹아버린 이빨을 토해 냈네 아이들은 그것들을 모아 지붕에 박힌 달 속에 넣어두었네 아이들은 손톱으로 서로의 이마에 구멍을 뚫었네 소독차가 마을을 돌고 아이들이 줄지어 쫓아다니네

 

- 정재학, ‘전염병이 도는 마을전문,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2004

 

정재학의 아이들은 마을이라는 공간 외에 어떠한 공유의 장도 가지고 있지 않다. 다만 이빨이 녹는전염병을 어른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다. 배가 고파도 먹지 않고, 학교에 가서도 녹고 있는 이빨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아이들은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는다. 일반적인 수준에서 배고픔과 묵언이란, 아이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처럼 오인할 수 있겠으나 이 시에서는 그 폭력 당함을 선택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그려지면서 오히려 아이들 자체가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녹고 있는 이빨은 아이들의 식량이며 언어이고, ‘아이라는 하나의 주체를 거리를 쏘다니는 아이의 복수 주체로 변모시킨다. 이빨이 녹고 있는 것은 사건의 원인이자 징후이다. 그럼 이빨이란 무엇일까. 어른들에게 들키지 말아야 할 그들의 윤리란 무엇이란 말인가.

 

우선 아이들은 치아가 아니라 이빨을 가지고 있다는 데에 주목하자. 그것은 사람의 것이 아니다. 입속에 박혀 있는 동물성의 존재는 녹아서 소화가 되지 못하고 아이들에게서 녹아버린 이빨의 형태로 토해진다. 토해진 그것들은 지붕에 박힌 달 속이라는 공간에서 또 다른 아이를 만든다. 그리고 식초를 마신 여인네들은 달을 찢으며 그 아이들의 주인이 된다. 이빨이란 상상된 동물성이 아이들에게 폭력 당함폭력을 가르쳤고 이러한 폭력이 다시 아이들을 생산해 낸다는 사이클이다. 물론 그 폭력이란, “길가에서 커다란 빈 분유통을 굴리며노는 사소한 것에서부터 도로에 솟아 있는 개가죽”(주검)을 지나치는 자동차들의 속도에 이르기까지, 무심하고 흔하게 발현되고 있다. 하지만 폭력의 주체와 객체가 동일하게 아이들에게로 모아지는 것은 비범한 의미를 가진다. “아이들은 손톱으로 서로의 이마에 구멍을 뚫으면서 녹아버린 이빨로 소거된 공동체의 의미를 다시 폭력을 통해 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염병을 통해 아이라는 개체의 야합이 이루어졌고, 아이들은 같은 행위와 같은 폭력을 경험했다. 결국은 소독차가 마을을 돌고 아이들이 줄지어그 차를 쫓아다니며 개체들이 개체의 종합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소독차”, “솟아 있는 개가죽”, “지붕등은 남성적 상징으로 나타나면서, 아이들에게 구멍을 뚫고 있는 대상으로 보이는데, 이것들은 아이들을 통솔하기보다는 아이들 스스로에게 모방을 통한 질서를 만들도록 유인한다는 것이 기존의 아이 텍스트와는 다르다. 대표적으로 기형도의 전문가경우는 이사 온 사내가 큰 주체로 표상되면서 한 가지 대상이 아이들을 지배의 알레고리 속에 묶어 두는 상하 관계를 지향하고 있다. 그러나 정재학의 경우는 오히려 큰 주체에게서 개체들을 해방시키고 개체들의 욕망을 자폐화시키면서 아이 주체 자체를 전염병의 병균으로 알레고리화시킨다. 물론 그 알레고리의 당위는 폭력을 통한 연대감이다. 그리고, 이런 연대도 존재한다.

 

비좁은 방공호 속

열두 살짜리들이 어깨를 웅크리고 앉아

한 녀석은 목을 잡고 다른 한 녀석은 앞다리를

또 한 녀석은 뒷다리를 잡고 떠돌이 개 뽀삐와

했다

 

그 뒤로 뽀삐는

세 녀석을 보면 꼬리를 치며 달려들었고

열두 살짜리들은 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뽀삐를 향해 돌을 집어던지는 것으로

상황을 극복하려 했지만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밤마다 뽀삐의 울음소리가 이 골목 저 골목을 흔들고

며칠 뒤 떠돌이 개 뽀삐는 마을을 떠났다

 

뽀삐는 수캐였다

 

- 황병승, ‘뽀삐전문, <트랙과 들판의 별>, 2007

 

황병승의 경우는 떠돌이 개 뽀삐를 내세워 아이를 아이로 만든다. “열두 살짜리세 아이가 방공호 속으로 들어가 뽀삐와/ 했다는 정황은 실로 충격적이다. 우선 이 정황은 두 가지 장면을 유추해 낼 수가 있다. “한 녀석은 목을 잡고 다른 한 녀석은 앞다리를/ 또 한 녀석은 뒷다리를 잡았다는 진술로만 보아서는 아이 셋과 떠돌이 개 뽀삐는 수간(zooerastia)을 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나 뽀삐라는 것이 용변용 화장지 브랜드라는 것을 감안해서 읽어 보았을 때는 뽀삐는 배설욕과 청결욕의 대상으로 상징화된다.

 

우선 전자의 정황을 설정해 두고 따라가 보면, “꼬리를 치며 달려드는 뽀삐의 행동과 그런 뽀삐를 향해 돌을 집어던지는 것으로/ 상황을 극복하려는 세 녀석의 행동은 비밀이 생겨서 결속이 되는 집단과 비밀 때문에 버려지는 개체의 모습을 상징한다. 자신의 몸을 모두 내어주고도 떠돌이 개 뽀삐는 그들의 세계 속으로 결코 들어오지 못하고 부끄러운 비밀을 공유했다는 이유로 폭력을 당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을을 떠난다. 그러나 마을을 떠나지 않은 폭력의 주체자인 세 녀석의 경우는 자신들의 비밀 행위를 폭력으로 지움으로써 청결해진다. 인간과 동물이 통해서는 안 된다는 금기를 폭력의 행사를 통해 유지하고 생물학적으로 더 하등한 뽀삐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움으로써 세 녀석은 해방이 된다.

 

후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뽀삐를 용변용 화장지의 환유로 본다 하더라도 뽀삐와 했다는 정황은 세 녀석이 서로 방공호에서 용변을 본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뽀삐를 돌려쓰면서 용변을 본 세 녀석은 그에 따른 수치와 트라우마때문에, 비밀을 나눈 서로가 아닌 화장지 뽀삐에게 전이된 분노를 표출하게 되는 것이다. 그에 따라 뽀삐는 그들의 세계에서 추방된 대상으로 전락하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또 주목할 것은 뽀삐는 수캐였다는 진술이다. 위의 시에서는 뽀삐는 확실히 남성의 성별을 가지고 있고, 그 상대가 되었던 아이들은 세 녀석으로 표현되면서 정확한 성별을 가늠할 수 없게 해두었다. 즉 수간뿐만이 아니라 아이들이 방공호에서 했던 행동이란 남성과 여성의 구별 없이 난교에 가까운 비윤리적인 행위였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아이들의 시선으로 처리해둠으로써 비교적 소격 효과를 줄이고 아이들이 세운 윤리라는 측면만 강조하는 효과를 주고 있다. 또한 뽀삐를 화장지로 보는 경우에도 화장지는 여성명사인 데 반해, 남성이었다고 뽀삐를 명명하면서 사건 속 인물들의 관계 해석을 난해하게 차연시킨다. 때문에 폭력성이 짙은 아이들의 현상과 담담한 화자의 욕망관계가 더욱 부각되고 있고, 전방위적으로 상징계를 거부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렇게, 어쨌든, 뽀삐는 떠나갔다.

 

 

 

3. 아이 신드롬, 소년 스타일

 

수잔 손탁은 비평적 글쓰기의 기능을 예술작품이 어떤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지 않았다. 손탁은 이 작품이 어떻게 예술작품이 되었는지에 대해 집중한다. 또 그런 과정의 성찰 이상으로 예술작품은 단지 예술작품일 뿐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비평적 글쓰기의 기능이라 말한다. 그러면서 독자의 의식 속에 지적 충족과 희열을 주는 것이 예술작품이고, 그런 작품이 예술의 영역으로 들어선다면 희열 자체가 도덕이며, 윤리성을 획득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예술작품은 언제나 지적 충족과 예술적 희열을 독자 의식 속에 고양시켜야 하며, 이런 예술작품의 개별적 특성을 손탁은 스타일이라 정의한다. 때문에 예술작품이 예술작품이기 위한 방편은 끊임없이 새로운 스타일의 창출이라는 난제에 놓인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던 판정 이후로, 새로운 것에 대한 갈구는 어떤 작은 느낌의 공유와 그 확장을 통해서 이루어지기도 했다. 소소한 일상, 혹은 기억 속에서 김행숙의 아이는 단편에 어떤 느낌 속으로 향해 있다.

 

두 명의 아이가 손바닥을 맞추며 놀고 있을 때/ 세 번째 아이는// 담장에 장미넝쿨이/ 장미화, 장미화, 장미화를 팡 팡 터트렸을 때// 두 명의 아이가 줄을 잡고 돌리며 들어와, 우리집에 들어와, 우리들은 재밌다는 듯이 부를 때/ 세 번째 아이가 줄을 넘을 때/ 네 번째 아이는// 너희 집은 어디니? 어른이 물을 때/ 다섯 번째 아이는/ 나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어요// 이 구슬은 누가 흘리고 갔을까/ 구슬을 굴리며 색깔이 바뀔 때/ 두 명의 아이가/ 세 번째 아이를 골목이 사라질 때까지 쫓아갈 때// 골목이 다 사라진 후에/ 두 명의 아이가 이상하다는 듯이 마주보았을 때

 

- 김행숙, ‘두 명의 아이전문, <이별의 능력>, 2007

 

두 명의 아이가 손바닥을 맞추며 놀고 있는 것. 우선 두 명의 아이는 가깝고, 서로가 서로에게 익명이다. 그러다가 세 번째 아이가 등장한다. 여기서 담장에 장미넝쿨은 서로가 서로를 찌르는, 폭력을 행사하는 집합체이다. “장미화, 장미화, 장미화하고 꽃이 터지는 이미지들과 함께, 세 번째 아이가 등장한 것에 주목하자. 세 번째 아이는 마치 장미꽃을 꺾는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처럼 등장해서 두 명의 아이 속으로 동참한다. 여기서 두 명의 아이는 멀어지고 세 번째 아이는 두 명의 아이가 돌리는 줄넘기를 넘는다. 둘이었던 대자 관계가 제3의 인물의 등장으로 멀어진다. 그러나 차갑기보다는 따뜻하다. 줄넘기를 돌리면서 두 아이는 줄넘기 속이라는 공간을 만들고 세 번째 아이, 네 번째 아이, 다섯 번째 아이까지 초대한다. 벽도 아닌, 그렇다고 벽이 아닌 것도 아닌 줄넘기 속에는 아이들이 다녀간다. 그곳은 아이들의 안식처다.

 

아이들은 저마다의 역할이 있다. 네 번째 아이는 너희 집은 어디니?”라는 어른들의 문법 상황을 대면하는 아이로, 다섯 번째 아이는 나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어요라는 동문서답을 통해 어른들의 문법 상황을 응수하는 아이로 그려진다. 여기서 아이들은 쓸쓸함을 공유한다. 이 아이들은 모두 집이 없는 아이들처럼 비춰지기 때문이다. 줄넘기라는 세 사람 이상의 공동체가 성립되었을 때 발현하는, 보잘것없는 공간이 그들의 집이라는 것은 공동체 자체가 집이라는 것이지, 집이 있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집으로 상징될 수 있는 자궁의 공간은 돌아가는 줄넘기 속이라는 기이한 환유로 나타나고 그에 따라 귀신과 같은 아이, ,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인 다섯 번째 아이를 등장시킨다. 다시 말하면, 여기 모인 아이들은 모두 어른들의 문법 상황으로 편승되지 않은 그들만의 공동체 문법 속에 가라앉아 있는 주체들이다. 이들의 공동체와 자신들의 질서를 지키기 위해 귀신까지도 호출해내는 새로운 상상을 발현하는 것이다.

 

이것이 모두 상상이라는 것은 처음 두 명의 아이를 떨어뜨려 놓았던 세 번째 아이가 골목으로 사라지는 정황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여기서 세 번째 아이가 사라진다는 것은 네 번째, 다섯 번째 아이를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상상의 문, 자체가 닫혔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이러한 정황은 구슬 속에 신비로운 색들의 조합들처럼, 구슬이 굴러가면서 색들이 병치관계에 놓이는, 이미지의 전체를 상징하는 사건의 발현으로 응축해 볼 수 있다. , 있음직한 사건과 있음직한 이미지들이 병치에 놓이면서 아이들의 상상을 호출하는 국면인 것이다.

 

이와 같은 스타일은 해석이 아니라 느낌과 느낌의 공존을 통해 독서가 되는 것이며, 이런 독서는 우리에게 쉽게 감각이라는 손을 내민다. 알레고리가 아니라 감각을 내미는 것이 김행숙의 시가 가지고 있는 매력이다.

 

너는 천진난만한 소년, 무엇을 떠올리고 있는가? 소녀는 아까부터 새침해져 있다 단순한 연마로는 닿을 수 없는 시선을 가졌구나 시시한 음악이 탁자 위를 조금씩 번져간다 휘감아 오르던 도취는 가벼운 입 모양을 따라 지독하게 부드러워져 버린다 소녀가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는다 너는 언제까지나 소년인 것이다 새 모양의 피리를 불며 불탄 집 앞에 서 있겠지 그리고 누구도 받아주지 않는 잠과 잘린 뿌리를 떠올릴 것이다 너는 다만 소녀를 태우고 떠나는 노새의 방울소리를 들은 것뿐인데 다른 방식으로 지속되는 믿음을 멈출 수 없다 이제 소녀는 매우 저속해져 있고 그런 건 한낱 장식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너도 마찬가지다

 

- 박상수, ‘즐거운가 소년이여전문, <후르츠 캔디 버스>, 2006

 

박상수의 아이는 성을 획득하면서, 함께 권력이라는 장식을 획득한다. 그런데 왜 장식인가. 소년과 소녀의 잠자리를 화자는 소녀를 태우고 떠나는 노새의 방울소리를 들은 것뿐인데 다른 방식으로 지속되는 믿음을 멈출 수 없다고 언급하고 있다. ‘태우다라는 남성적 입장에서의 발언은 소년과 소녀 간의 사건 이후로, 소년이 이미 소년에서 벗어나 어른이 되려고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지독하게 부드러워져 버린어른들의 세계로 천진난만한 소년은 갑자기 몸을 바꾸고 새침해져 있는 소녀에게 시선을 준다. 소년은 그 속에서 불탄 집이거나 누구도 받아주지 않는 잠”, “잘린 뿌리처럼 거세되고 망가진 이미지들을 떠올리고, 그간에 소년의 질서 속에서 믿었던 방식이 아닌, “방식으로 지속되는 믿음을 강요받는다. 물론 그 믿음이 무엇이라고 언급되거나 믿음을 유추할 수 있는 이미지가 나타나지는 않으나, 소녀는 매우 저속해져있다는 결과로 소년이 갖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일단락하고 있다. 소년은 천진난만하고 소녀만 저속해져 있다는 정황은 너무도 권력적이다. 새침해져야만 하는 소녀의 수동적인 반응과 잘린 뿌리마저 인식하고 있는 소년의 능동적 반응이 사뭇 대조적이다.

 

다시 말해 소년은 소녀를 탐하는주체적인 행동을 통해서 어른들의 지독하고 부드러운이질적인 세계를 분명 보았지만 소년으로 남아있기 위해 그 세계를 보고도 세계 자체를 지연시킨다. 반면에 소녀의 경우는 소년에게 태움을 당하는수동적인 행위로 인해 쉽게 저속해지고 소년보다 약자 관계로 내려앉는다. 이를 통해서 시적 화자는 서로 비밀(eros)을 나눈 공동체의 공간의 장을 획득하기보다는 성을 획득해가는 남녀 간의 차이를 고발한다. 즉 아이 공동체 속에서 또 다른 삼각형의 권력 구조가 생기고 그 구조의 꼭대기에는 남자 아이가 놓이는 것이다. 그런데 그 남자 아이권력이란 성인 남성이나 사회구조의 권력이 가지는 초석보다 설익었기 때문에 더 폭력적이다. 여기서 한낱 장식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너란 소년일 수도 있고 소녀일 수도 있고, 시적 화자나, 독자일수도 있도록 열린 구조 속에서 명명되고 있다. 이것은 소년마저도 상징계 속으로 들어왔다는 연민을 위한 연민인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비아냥거릴 수밖에 없다. ‘즐거운가 소년이여?’

 

이런 스타일이라면 윤리가 끼어들기 힘들다. 윤리적이기보다는 오히려 동물적이고 충동적이다. 그러나 그런 동물성과 욕망의 충동질 속에서 콤플렉스가 아니라 하나의 증후군이 드러나고 아이의 통로를 통해 우리는 아이 신드롬을 맛볼 수 있다.

 

4. 우리는 가능성이라고 불렀다

 

한 차례 아이들이 지나갔다. ‘( )+소년의 출현에 대한 주목은 괄호 속의 무엇보다는 소년이었다. 수많은 아이들이 상징 질서를 거부하고 재현을 거부했다. 말을 거부한 아이들이 벙어리가 아니라 새로운 방언을 창출했다는 것. 이것만으로 한 차례의 아이들의 출현이 모두 실재를 향한 알레고리였다고 단정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단지 그 징후와 현상이 그럴 수밖에 없다는 필연과 윤리 이상으로, 아름다웠다는 것이다. 그 아름다움에 기대고 있는 이런 스타일도 있다.

 

무엇이든 만들 수 있으니까, 나는 시멘트를 가능성이라고 불렀다. 수건걸이를 설치할 때. 가능성에 못이 박혔다. 이봐, 가능성 기분이 어떤가? 가능성엔 기분이 없었다.// 바닥에 고인 물 때문에 미끄러지는 일이 없도록. 타일은 간격을 원했다. 물은 간격을 타고 하수구로 간다. 천천히. 동생이 샤워를 하면서 오줌을 눈다. 변수로군. 나는 동생을 변수라고 불렀다. 이봐, 간격에게 사과를 하지 그래? 변수는 배신이었다.// 엄마는 변기에 앉아 거실을 바라보았다. 왜 문을 열고 싸는 거야? 텔레비전이 하나잖아. 아빠는 거실이었다. 부모가 죽자. 변수에게 거실은 학교였다. 변수는 급식도 먹지 않고 하루 종일 누워있었다. 형이 학교에서 돌아와 학교로 들어오면 변수는 일어나서 샤워를 했다. 형은 자꾸 지각이었다. 거실이 사라지고 있었다.// 부모가 죽고 세 달이 흐르자. 아무도 화장실을 청소하지 않았다. 네 달이 흐르고. 변기에서 쥐가 튀어나왔어. 그렇다면 변기는 수영장이로군. 다섯 달과 여섯 달을. 나는 행진이라고 불렀다.// 지각은 지각인데도. 쥐가 무서워서 똥을 누지 않았고. 나는 화장실이라 화장실에 가지 않았다. 다시 행진. 이제 나는 캄캄한 창고 같았고. 학교가 된 거실처럼. 간격은 변수 같았다. 이봐, 수영장. 창고 안에 고여 있는 기분이 어떤가? 똥이 없어서 쥐가 죽었어. 가능성에게 화장실을 맡기고, 굶어 죽은 쥐를 보러. 나는 창고에 갔다. 캄캄한 가능성 위에 부모처럼 누워. 배신이 기다리고 있었다.”

 

- 김승일, ‘화장실에 붙인 변명전문, <에듀케이션>, 2012

 

김승일의 경우, 느낌의 강요라는 어떤 스타일에 관해서 일정부분 해방이 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삼각형의 끝점에서 내려오는 어른들의 질서 자체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대신에 부모를 죽이는 정황으로 시선을 이끌어간다. 연작처럼 보이는 부담’ ‘방관’ ‘가명등에서 김승일은 모두 부모가 죽고 난 이후의 무질서를 포착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박상수의 경우처럼 무질서라기보다는 기이한 질서에 가깝다.

 

무엇이든 만들 수 있는 시멘트를 가능성이라 부르는 형제의 언어체계는 부모가 죽은 국면에서 새롭게 생겨나는 기표의 온상이다. 하지만 그 가능성은 기분이 없고, 못을 박아도 아픔을 느낄 수 없는 무통각의 대상이다. 수없이 변형만을 할 수 있는 대상일 뿐이다. 변형이 되고난 이후에만 자신의 속성을 대변하는 기표가 생겨버리는 시멘트는 변형을 당해야만 하는 사건 촉발 상태의 가능성이다. 즉 질서는 불특정한 누구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지 이미 있었던 것이 아니다. 이렇게 질서 자체를 부정하고 질서를 가능성으로 설정하고 나면, (황병승의 경우처럼) 청결하고 싶고 배설하고 싶은 인간의 욕망이 동시다발적으로 이미 만들어진 간격 속을 채우게 된다.

 

동생이 샤워를 하면서 오줌을 눈다는 것은 규칙에 어긋나는 변수이지만 그런 변수를 어른들은 어른이라는 이유로 쉽게 자행해 왔다. 때문에 나는동생의 가능성을 변수라 바꿔 부르며, 바꿔 부를 가능성의 주체를 찾아 기억을 회유한다. 우선 엄마의 경우다. “엄마는 변기에 앉아 거실을 바라본다. 텔레비전을 시청하고 싶은 욕망과 배설하고 싶은 욕구가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다. 대신 엄마는 동생과 달리 나름대로의 윤리가 있다. 텔레비전이 하나라는 것이다. 하지만 아빠의 경우는 어떠한가. 아빠는 그냥 거실이다. 어떤 윤리와 어떤 상황적 이유 없이 거실인 것이다. 다만 거실이라서 엄마에게 잔소리를 하는 주체이고, 더 이상의 언급이 없다. 김승일은 아빠를 일반적 수준의 상징으로 설정함으로써 아빠라는 가능성을 소거한다. 아빠는 가능성 바깥에 놓이고, 부모가 사라진(엄밀히 말하면 아빠가 사라진) 공간에서 새로운 문제는 화장실을 아무도 치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부모가 죽었다는 사건보다 화장실이라는 가족 공동체의 욕구를 모두 해결했던 공간이 더러워졌다는 결과 때문에 인물들은 조금씩 이질적인 상황에 놓인다. 여기서 생긴 이질성은 가능성을 가진 기표들의 말놀이를 통해서 기이한 언술형태를 띠고 있다.

 

동생은 변수(배신), 변기는 수영장, 시간의 흐름은 행진(지각), 나는 창고, 학교는 거실로 재명명된 기표가 되면서 가족 테두리 속에 놓인 사건의 국면들이 학교라는 사회적 공간의 국면들로 얽히고설켜 공간과 서사가 확장되고 있다. 그리고 나는 결국 창고에 간다. 다시 말해 나는 나에게 나(창고)인 것이다. 그곳에는 캄캄한 가능성즉 시멘트가 발려져 있고 부모의 온기가 있다. 그리고 그 혼자인 공간에 동생(배신)이 곧 찾아올 것이다. 동생이 찾아온다고 둘이 되는 것이 아니라 동생이 찾아왔기 때문에 배신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그런 동생을 기다리고 싶고 부모를 만나고 싶다. 이렇게 성립된 기이한 서정은 폭발적인 말놀이들 속에서 말 자체의 가능성을 획득하게 하고 어린 아이 화자의 언술을 가능성의 언술로 확장시킨다. 때문에 김승일의 시어 속에서 한바탕 그들은 상징 질서를 전복하면서 실재로 향하고, 알레고리를 통해 평면 바깥에 놓인 주름을 상기시킨다.

 

이러한 세계를 다시 찾아올 아이들의 가능성이라 보면 너무 섣부른 판단일까?

 

0. 우리들의 신드롬

 

왜 다시 아이란 말인가?”라는 질문의 끝을 찾아서 우리는 너무나 많은 아이들을 경험해왔다. 현대시 100년의 역사를 막 지나쳐나온 지금, 처음 최남선이 소년지에 발표한 신시 해에게서 소년에게의 소년도 새로운 세계를 견디려는 세대론적인 소년이었고, 고방에서 오래도록 남아 있는 송구떡을 훔쳐보는 백석의 아이 화자도 그런 것이다. 시 텍스트 속에서 아이에 대한 설정은 텍스트 안팎을 연유하면서 아이스스로의 운동성을 띠며 전개되고 있다. 때문에 새로운 문법의 탄생이라는 측면과 새로운 세계로 가는 통로라는 측면이 아이의 문법 속에는 함의되어 있다.

 

이념 시대 때도 마찬가지다. 김명인의 동두천연작에서, 혼혈아에게 국어를 가르치는 화자의 마음도 세계에 대한 고발이자 전복이었고, “환상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었던 오규원 양평동1’의 조로한 아이들도 반항과 반역의 아이들이었다. 또한 이성복의 개새끼를 울부짖는 아이, “어른인 내 얼굴을 공놀이 하듯/ 던지고 치는 과정(‘어른의 꿈’)”을 겪는 김혜순의 아이 또한, 그 시 문법에 있어서 가장 운동성이 짙었었다.

 

여기서 우리는 레비나스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자기 존재타자의 절대성을 통해, 존재의 세계를 넘어설 수 있는 몇 가지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중에서 아이의 출산을 통해 형이상학의 가능성을 찾는 대목을 떠올려봐야겠다. 그에 따르면 나의 아이, ‘이되 내가 아닌 존재이다. 아이는 나의 혐의와 나를 조감하는 형식이지만 그만큼 나의 소유물이 될 수 없고 나에게서 나를 빼앗아간 존재 양식이기도 하다. 즉 나와 자식은 절대적으로 선형적, 순환적 시간 안에 놓여 있고, 절대적으로 타자화되어 있다. 레비나스는 이 생태 속에서, 나의 존재됨의 형이상학을 찾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해보자. 나를 베껴낸 출산과 아이의 탄생은 라는 원본의 가장 강력한 타자이자 나를 도모하는 고행이다. 그렇다면 주체가 아이 화자를 탄생시키는 시적 출산을 통해- 그 타자를 통해- 우리 시는 속수무책으로 새로운 주체를 찾아 헤맸던 것은 아니었을까. 나를 초과한 절대적 시간성을 가진 나인 수많은 아이들의 탄생기부정의 모험기는 아니었을까. 그러므로 자신의 부재를 통해 탄생을 도모하는 모글리들의 언어는 인간+( )+소년일 수 있다. (우선 이와 같은 수식을 위해서는 현시에서 인간+늑대를 불편/불가한 현현이라 두고, ‘늑대자리에 ‘( )+소년을 대입하자.) 다소 범박하지만 이런 기이한 생태의 페르소나는 무한히 시간을 밀며, 미래로, 미래로, 발설의 매력을 증폭시킨다. 다시 말해, 주체 진보의 가능성이다. 다가올 미래 속에서 세계를 가늠하는 빈곳 -( )의 자리- 에 대한 방언들의 증폭 현상인 셈이다.

 

개체적 관점에서 아이라는 개체를 범상한 통로로 설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이런 연유이다. 그리고 1908년부터 우리 문학은 이미 소년의 문학사였던 바, 기이할 정도로 현대시 100년의 처음과 끝이 아이라는 것에 주목하고, 검토의 필요성을 가진 것이 그 또 다른 이유라 할 수 있겠다.

 

수많은 아이들이 지나갔고 그 아이는 우리들의 신드롬 속에서 다시 증후군을 만든다. 우리 시는 아이가 울음을 깨물듯 앞으로, 앞으로 진보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와 같은 시적 운동과 정치하게 세계로 향해 있는 방언들을 생산해낼 앞으로 다가올 시의 모습을 지금, 호출해 본다. 이제 어떤 말이 기대와 위로가 될 수 있겠는가. 그 새로 터질 울음들을 불러보며.

 

 

 

당선소감

 

이제부터 내 평론은 시인이 쓰는 또 다른 고백

 

변성기가 오지 않은 형은 싸가지가 없었다./ 엄마는 형이 없을 때만 형을 다루는 데 불편을 토했다. 나도 토했다. 눈물 나게 맞지 않으면 눈물을 만들려고 입에 손을 넣고 토했다.”(‘비굴과 굴비부분)

 

이 평문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형들의 변성기를 묵묵히 들어야 했던 2000년대. 그때 나를 해방시키고, 또 구속시켰던 울퉁불퉁한 목소리들 때문에 나는 늘 나에게 앓아야 했다.

 

말하고 싶은데, 말할 수 있는데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던 습작기와 내 마음대로 앓지도 못한 변성기 이후의 나의 시들에 대해서 부끄러웠고,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는 사이 더 멋진 시인이 되고 싶었다. 틈틈이 내가 질투해온 동시대의 당신들을 독서를 하는 동안, 나를 더 소중하게 만들었던 시집 페이지 곳곳 그 밑줄들이 이 글을 쓰게 했을 것이다. 더 뜨겁고 솔직하게 내 시를 쓰기 위해서 그토록 아름다운 당신들을, 오늘 나는 나의 은인이라 부르고 싶다. 이제 내 문법을 마냥 읽어달라고 투정을 부리기보다는 당신의 문법 속에서도 가끔 머물다가 돌아와야 하겠지. 이제부터 내가 쓰는 평론은 시인이 쓰는 또 다른 고백일 것이다. 나는 더더욱 시인이려고 말을 시작하련다.

 

그리고 감사한 마음을 모두 전해야겠다. 감사드려야 할 분들이 너무 많아서 걱정이다. 우선 누추한 글을 잘 읽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 감사합니다.

 

학교에서 물심양면으로 학생들을 이끌어주시는 김종회 선생님, 서하진 선생님, 홍용희 선생님, 김수이 선생님, 고인환 선생님, 이성천 선생님 늘 감사합니다. 그리고 침묵으로 문학과 삶의 등대를 묵묵히 밝혀주시는 박주택 선생님. 지면에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마음만 부끄럽고 또 감사하게 보냅니다.

 

경희문예창작단과 현대문학연구회 선후배님들, 안양예술고등학교의 은사님들과 나를 더 가르쳐주는 문창과 학생들, 그리고 한 배에서 태어난 내 친구 김승일과 동인 최정진, 박희수, 황인찬, 객원 이이체 시인들아. 너희들이 나의 은인들이다. 내가 시를 쓰는 또 다른 이유다.

 

박성준

 

1986년 서울 출생 경희대학교 대학원 국문과 박사과정 2009년 계간 문학과 사회시 등단 시집 <몰아 쓴 일기>(문학과지성사·2012) 출간

 

 

 

 

심사평

 

필자의 식견과 믿음을 보여준 인용시와 분석

 

21편의 응모작 중 마지막까지 남은 것은 어느 비평가의 변신모글리 신드롬-가능성이라 불리는 아이들두 편이었다.

 

어느 비평가의 변신은 김소진·김경욱·박범신·박민규·황정은·김애란 등의 소설을 대상으로 읽고 쓰는 일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는 독특한 글이었다.

 

비평에 대해 이 글의 필자가 제시하는 몇 개의 명제들이 있다. 비평적 읽기란 외상적 휴지의 순간을 경험하는 것이며 그런 읽기란 본질적으로 두 번 읽기일 수밖에 없다는 명제 등이 그것이다. 이 글은 그러니까 어떤 작품이나 책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것과 만나는 경험에 대해 말하고자 했던 셈인데, 그런 발상의 독특함이 개성적인 사유와 구성을 만들어냈다.

 

모글리 신드롬역시 발상이 신선한 글이었다. 이 글의 필자는 어린아이가 등장하는, 김기택·정재학·황병승·김행숙·박상수·김승일 등의 시를 뽑아내어 왜 우리 시대의 시 속에 아이들이 등장해야 하는지에 대해 묻는다. 답은 물론 간명하다. 어린아이들은 서정시 속에 존재하는 어른들의 시선의 타자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문답이야 맥거핀일 뿐, 중요한 것은 그 대답에 이르기 위해 이 글의 필자가 거쳐 가는 시의 현장들이다. 그가 인용하고 읽고 분석한 시편들이 시에 대한 그의 식견을 믿음직스럽게 했다.

 

결국 덜 투박하고 좀 더 친절한 쪽을 선택하게 되었다. 두 응모자 모두에게 이런 관문 통과의 경험이, 독자와의 소통의 글쓰기를 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는 말을 덧붙여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