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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부재를 향한 노래들-정한아, 심보선, 이이체의 시를 중심으로 / 안지영

 

 

1. ‘그럼에도 불구하고노래한다는 것

 

 

블랑쇼는 오르페우스가 에우리디케를 다시 하데스의 품으로 돌려보낼 수 없었던 것을 작품의 완성을 앞두고 망설이는 예술가의 고통에 비유해 설명한다시인들은 누군가의 부재를 노래함으로써만 시인으로 남을 수 있기에 부재에 대한 미련을 극복하기가 죽음을 극복하기보다 어렵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오르페우스는 계속해서 에우리디케의 부재를 노래하는 시인으로 남기 위해 그녀를 저승세계에 남기는 것을 택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시인만큼 그 부재가 종식되기를 원하는 자가 또 있을까. 시인은 그 누구보다 부재를 깊이 응시하고 절망하는 자이다. 이는 연인의 부재에 한정되지 않는다. 시인은 또한 한 시대의 부재에서 유래하는 암흑으로 인해 고통받는다. 시인은 동시대인들이 공통적으로 처해 있으나 누군가는 외면하고, 누군가는 아직 인식하지 못한 시대의 어둠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자인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그 내밀한 어둠 속에서 어둠을 걷어낼 수 있는 역량을 감추고 있는 희미한 빛을 발견해낸다. 그 빛은 너무도 희미하여 암흑 자체에 굴복해 버리고 결국 묵시록적 종말론으로 나아가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른다부재로 인해 드리워진 어둠에 대한 절망이 너무도 깊어서 노래하기조차 포기하는 것이다. 하지만 오르페우스가 그러했듯, ‘그럼에도 불구하고여전히 이 시대의 어둠을 걷어낼 수 있는 뜻밖의 방책을 발견해내고자 노래 부르기를 멈추지 않는 이들이 있다. 비록 지금 당장 누군가가 응답해줄 것인지에 대한 확신은 없을지라도, 지금은 부재하나 언젠가는 도래할 당신이 그 노래를 들어줄 것이라는 희망을 간신히 붙잡고 말이다. 부재를 향해 노래하는 이들의 미약한 몸짓 속에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그러나 언젠가는 올 것이 분명한 미래(未來)의 가능성이 도사리고 있다. 그들이 어떠한 자세로 부재하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지 그 풍경을 한번 들여다보자

 

 

 

2.“내가 자네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군” - 정한아의 시

 

 

정한아에게 이 세상은 더 이상 그 누구도 사랑을 위해 저승으로 내려가지 않으려 하는 냉혹한 세계이다. 그리하여 지금 여기 없는 것들을 향해 노래하는 것이 순진한 이상주의로 치부될 뿐일 때(죽은 예언자의 거리), 그녀는 이 세계에 대해 의심 많은 눈초리를 던지는 오르페우스가 된다(눈을 가리운 노래 - 주신제(酒神際) 1999). 이 오르페우스는 이미 저승세계로 가버린 에우리디케의 부재를 향해서만 노래하지 않는다. 그리스 신화에서 오르페우스가 저승에서 에우리디케를 데려올 수 있었던 것은 그 노래를 들은 이승의 모든 생명체들과 저승의 신 하데스를 감동시켰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시대에는 그 누구도 부재에 관심조차 두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들은 부재를 당연하게 여긴다. 정한아는 무엇보다 이러한 현실에 절망한다.

 

 

이 시대는 망했어 너도 나도 그들도 진짜 같은 짝퉁 소금 같은 모래 양 같은 염소 천국 같은 지옥 (/) 엄마와 (/)아빠 - 결혼하지 마세요 저를 낳지 마세요 자아 저는 이대로 탯줄을 목에 감고 조용히

 

- 타인의 침대부분

 

 

이게 그거였으면 여기가 거기였으면

엄마가 계모였으면,

쟤가 나였으면 내가 딴사람이었으면 이 모든 게

()였으면,

여기가 천국이었다면 나는

태어나지 않았겠지 그것도

괜찮다고, , 엄마,

제발제발제발제발 나를 낳아주세요, 라고

우리는 빌지 않았지만

빌어먹을 삶

 

민주주의의 스승들은 언제나

네 맘대로 하렴, 자상한 음성으로 말했지

 

하지만 모든 걸 취소하는 건 너무나 힘든 일

자기를 포함한 모든 것과 싸우고 있는 이

, 정수일까 궁지일까

 

우리는 울다가 웃는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불행을 견디어낼 수 있는가

견딜 수 없을 때 견디지 않는 건

너무나도 쪽팔리는 일이니까

우리는 필사적으로 웃고 있지만

 

- 쪽팔리는 일부분

 

 

타인의 침대에서 짝퉁같이 가짜가 판을 치는 현실 속에서 자신마저 짝퉁이라고 인식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자신의 탄생마저 거부하려고 한다. 이 시대를 낳기 위해 견뎌 왔던 모든 것들이, 자기가 바라 왔던 세계의 실상이 겨우 짝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것은 자기의 모든 존재 기반을 부정하고 싶을 만큼 절망적인 일이 된다. 차라리 그것이 내가 만든 세상이 아니라 아버지의 혹은 어머니의 세상이었을 때, 그리하여 싸워야 할 분명한 대상이 있을 때 그것은 지옥일망정 견딜 만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지금 이 세상은 민주주의 스승들이 자상한 음성으로 말했던 것처럼, 모든 것을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자기 외부의 어떤 대상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포함한 모든 것과 싸워야 하는 시대인 것이다.

 

아직 에우리디케는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에우리디케가 돌아오지 않아도 살 만하지 않느냐고 말하며 부재 자체를 잊어버렸다. 부재가 부재로서 명백히 드러나지 않는 현실에서, 이름 없는 부재를 향한 노래라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낡은 감상주의라고 매도당할 수 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꾸 짝퉁의 안락함에 만족하려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노래 부르기를 계속한다. 이는 이미 한 평론가가 지적했듯, 그녀에게 이 세계가 카프카적인 연옥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의 무죄가 입증되기를 고대하며 영웅적으로 투쟁하는 삶이 아니라, 자신에게 죄가 있는지 없는지를 끊임없이 자문하며 두려움에 떠는 삶을 살아간다.그렇기에 그녀의 시에 견딘다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 것인지 모른다. 모든 것을 긍정할 수도, 모든 것을 부정할 수도 없는 삶의 한가운데에서 얼마나 많은 불행이든지 필사적으로 웃으면서 견뎌내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들은 자존심이라는 팬티만 걸치고 혹한을 견디려는 그의 무모한 결심을 존중해주었지만, 이 존중이 그의 저체온증을 막아주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는 스테판에게 말했었다; 저 육각의 눈 결정이 아름답다면, 보이지 않는 내 영혼의 아름다움은 어떤 돋보기가 결정해 주는가. 나는 갈비뼈가 드러난 한 덩어리의 공허다. 이것이 나라면, 나는 나를 견디는 것이다. 이 결심의 무한한 휘발성이, 자네는 보이는가.

 

 

(……)

 

 

내가 자네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군.

 

 

반짝이는 육각의 표창들이 제 과녁으로 쏟아졌다. 아무도 그의 외투를 위해 투쟁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오래전에도 한 남자의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그에게 가시로 만든 왕관을 씌워준 적이 있다. 그건 그나마 잘 알려진, 따뜻한 나라의 이야기.

 

- 론 울프 씨의 혹한부분

 

 

 

그런데 정한아는 무엇보다 견뎌야 하는 것은 세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고 말한다. 연옥에서 견뎌내기 위해서는 희망이 필요하다. 그 희망이 부질없는 것임을 알면서도 견디기 위해 그 부질없는 것에 기대기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 무엇에도 기대지 않고 스스로를 끝까지 견뎌내는 데서 일종의 구원을 발견한다. 이 시에서 론 울프(Lonne Wolff)는 그러한 삶의 자세를 보여주는 인물로 소개된다. 론 울프는 누군가에게 단벌 외투를 뺏기고 자존심만으로 혹한을 견디고자 한다. 이 결심이 얼마나 무모한 것인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더라도, 그 무모함이 무엇을 겨냥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이야기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영혼의 아름다움을 위해 기꺼이 혹한을 견딘다. 속물들의 세상에서는 그 누구도 울프가 고작 영혼의 아름다움을 위해 투쟁한다고는 믿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에게는 재림 예수, 이 시대 마지막 금욕주의자, 타락한 현대판 차라투스트라, 처형당함으로써 봉기를 촉발한 혁명가등의 쓸모없는 환상이 덧붙여지기도 한다. 하지만 시 뒷부분에 붙인 각주에서 정한아는 울프가 세속적인 낭만주의가 정의하는 모든 종류의 환상을 거부하였다고 진술한다. 그는 그저 영혼의 아름다움을 증명하기 위한 결심의 무한한 휘발성에 대해, 아무도 그 존재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저항할 뿐이다. 그러한 자신의 존재 자체가 사람들을 불편하게만들고 있음을 인식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그녀 역시 스스로 가시 돋친 혓바닥”(비애의 대가)으로 부재의-있음을 일깨우는 불편한 존재가 되기로 결심한다. ‘개연또는 가시련이라고도 불리는 수련과의 가시연은 그러한 시인의 정체성을 보여준다(다른 못, 가시연). 가시연은 가시가 달린 잎자루가 잎 한가운데 달려 있고, 잎 사이 혹은 잎을 뚫고 가시가 있는 긴 꽃줄기가 자라 지름 약 4의 자색 꽃을 피워내는 수련과의 식물이다. 자신의 몸을 관통하지 않으면, 즉 자기 자신을 견뎌내지 않으면 꽃조차 피울 수 없는 것이다. 그녀의 시도 이와 같다. 스스로 상처투성이가 되어 써내려간 시 앞에, 그 고독한 싸움의 결과물 앞에 우리는 이 세계가 진창이라는 사실을 도저히 잊을 수 없다. 그 잊지 못함을 시작으로 진창 속에서 부재를 인식하고, 그 부재를 구원하기 위해 죽음의 세계를 향해 기꺼이 몸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정한아의 시는 그렇게 해서 우리까지도 이 진창을 잊지 않으면서도 견딜 수 있게 해 준다.

 

 

3.“당신의 손으로 쓰게 할 것입니다” - 심보선의 시

 

 

정한아가 부재를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대치를 벌이고 있는 중이라면, 심보선은 부재를 적극적으로 끌어안으며 눈앞에 없는 사람에 대해 노래하고 있다. 그가 눈앞에 없는 사람, 부재하는 대상에 대한 구애를 멈추지 않는 것은 부재를 바로 자기 자신의 문제라고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그 존재가 세상에서 배제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인간을 인간이 아닌 양 배제함으로써 인간 안에 분류선이 그어지고 그 분류선 바깥에 위치한 인간들은 살아 있는 인간으로서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 다만 그는 이를 단순히 사회 구조적 문제로 환원하지 않는다. 그에게 이 사태는 무엇보다 그 존재의 질문이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못한다는 데서 기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불평등이란/ 무수한 질문을 던지지만 제대로 된 답 하나 구하지 못하는 자들과/ 제대로 된 질문 하나 던지지 않지만 무수한 답을 소유한 자들의 차이다”()라고 말한다. 아무리 질문을 던져도 제대로 된 답을 얻을 수 없기에 거리에서 방황하던 배제된 자들은 무엇보다 우선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려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배제된 자의 비극을 그들의 비극이 아니라 우리의 비극이라고 말하며 그들의 부재를 가시화하려 한다. ‘2011120일 용산 참사 2주기에 부쳐라는 부제가 붙은 거기 나지막한 돌 하나라도 있다면에서 그는 이제 인간이란 너 나 할 것 없이/ 하나하나 불붙은 망루가 되었다고 말한다. 이제 우리 모두가 눈앞에 보이지 않는 자가 될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그는 이러한 운명을 무엇보다 시인의 운명으로 생각하고 기꺼이 껴안는다. 이 운명은 어쩌다 보니자신에게 닥친 것이 아니라(인중을 긁적거리며) 자신이 시인이 되기로 선택한 순간부터 이미 주어진 것이다.

 

 

교토의 여관에서 나는

제임스 조이스의 후손을 만났네

내가 시를 쓴다고 하자 그는 물었네

오늘 교토의 낯선 아침이 그대에게 영감을 주었는가?

그대가 여기서 말도 안 통하고 매 순간 배제되고

나는 배제되었어요, 라는 말조차 하지 못할 때

그대는 여전히 유머감각을 유지할 수 있었는가?

바로 나처럼 말이지, 하하!

 

- The Humor of Exclusion부분

 

 

그는 내게 말하는 듯했다.

시인이여, 노래해 달라.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나의 머지않은 죽음이 아니라

누구도 모르는 나의 일생에 대해.

나의 슬픈 사랑과 아픈 좌절에 대해.

그러나 내가 희망을 버리지 않았음에 대해.

모든 것을 극복하고 생존하여 바로 오늘

쪽동백나무 아래에서 당신과 우연히 눈이 마주쳤음에 대해

 

- 사랑은 나의 약점부분

 

 

심보선이 교토의 한 여관에서 만난 제임스 조이스의 후손이라는 Mr. Joyce씨는 그에게 시인의 운명에 대해 이야기한다. 시인은 말도 안 통하고 매 순간 배제되었다는 소외의 감각을 영감으로 바꿔야만 하는 존재라고 말이다. 배제되었다는 말조차 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시인은 유머감각을 가지고 세상을 비웃을 줄 아는 이방인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의 유머는 단순히 천박한 웃음을 유발하는 것이 아니라 외로움, 슬픔, 분노 그 외에 배제된 자가 느끼는 모든 감정들을 포함한다. 유머감각을 가지고 세상의 아주 사소한 일,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을 일, 그리하여 결국 눈앞에 사라져 버린 일들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는 것이 시인의 숙명인 것이다.

 

이는 또한 시인의 유일한 약점이기도 하다. 사랑은 나의 약점전반부에서 시인은 사랑하는 연인으로부터 당신이 동성애자였다면/ 이렇게 좋은 시를 쓸 수 있었을 텐데.”라는 지적을 듣는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약점은 오로지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대상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야말로 그가 좋은 시를 쓸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에 빠진 자는 지극히 평범하고 직설적인 말로/ 말하자면 전혀 시적이지 않은말로밖에 구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배제당한 자들에 대한 시인의 애정 역시 그러한 방식으로 드러난다. 시인은 중산층 이성애자라는 자신의 근본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내가 대변할 수 없는 세계로부터 던져진 잿빛 가죽 포대와 같은 노인의 이미지에서 아름다운 시 한 편을 끌어낸다. 누군가는 너무 평범하고 직설적이어서 좋은 시가 아니라고 부정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인의 유일한 약점으로서의 사랑이 반영된 시야말로 진정 좋은 시라는 확신이 그에게는 있다. 누구도 주목하지 않은 노인의 사랑과 좌절에 대해, 무엇보다 그가 희망을 버리지 않았음에 대해 노래하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하지만 심보선이 무엇보다 바라는 것은 자신이 부재를 대신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부재 스스로 그의 존재를 증명케 하는 것이다. 에우리디케가 그녀 스스로의 입으로 노래하게 하는 것, 그녀 자신의 슬픔을 분노를 그녀 스스로가 표현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그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당신이 텅 빈 공기와 다름없다는 사실.

나는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 당신의 손으로 쓰게 할 것입니다.

당신은 자신의 투명한 손이 무한정 떨리는 것을

견뎌야 할 것입니다.

 

 

나는 주사위를 던지듯

당신을 향해 미소를 짓습니다.

나는 주사위를 던지듯

당신을 향해 발걸음을 옮깁니다.

 

 

그 우연에 대하여

먼 훗날 더 먼 훗날을 문득 떠올리게 될 것처럼

나는 대체로 무관심하답니다.

 

(……)

 

 

당신과 내가 원하기만 한다면

동시에 함께 웃을 수 있는 것처럼

 

 

당신과 내가 원하기만 한다면

모든 것이 동시에 끝날 것입니다.

- 텅 빈 우정부분

 

 

심보선은 눈앞에 없는사람을 있는사람으로 바꾸고자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투명한 존재로 취급받는 없는사람들이 스스로의 손과 입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야 한다고 본다. 물론 자신이 없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자신의 손으로 써야 하는 이들의 손은 무척이나 떨릴 것이다. 시인은 그들의 고백이 얼마나 쉽지 않은 것일지를 예감하면서도, 바로 그들이 이를 견뎌야 한다고 말한다. 다만 그 투명한 존재들이 쓰고 말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견딜 수 있도록 미소를 짓고 그들을 향해 발걸음을 옮길 뿐이다. 다만 그는 이러한 과정을 그저 무심하게 바라본다. 이들의 자기고백이 당장 눈에 띄는 결과로 드러나지 않을 것이기에, 하지만 그날이 언젠가는 꼭 올 것임을 믿으며 무관심하게 기다리는 것이다. “당신과 내가 원하기만 한다면동시에 함께 웃을 수 있는 먼 훗날이 올 것이며, 그때가 오면 배제의 분류선 바깥에 놓여 보이지 않았던 자들은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내보일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던진 질문에 제대로 된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심보선은 문학과 비문학 사이에 그어진 기존의 분할선이 재편성함으로써 문학과 정치를 별개의 것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악순환에서 벗어나 문맹자들도 시를 쓰는 세상이 올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슌그는 물질적인 측면에서의 불평등만이 문제가 아니라 언어에서의 불평등을 문제 삼으며 누구나 시를 읽고 쓸 수 있는 세계를 열고자 하는 것이다. 존재의 불평등에 대한 문제를 드러내보여줌으로써 눈앞에 없던 존재역시 세상에 드러날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그가 기다리는 당신이 도래할 가능성을 발견한다.

 

 

4. “우리가 잊어버린 우리의 이름이여”- 이이체의 시

 

 

정한아가 부재로 인해 상처받고 있음에도 계속해서 부재를 환기시키고 있다면, 심보선은 부재를 자신의 것으로 끌어안고 부재를 부재 아닌 것으로 바꾸기 위한 길을 모색한다. 그들의 시집을 경유하여 이이체의 시에 이르면 연인의 부재로 인해 삶보다 죽음의 세계에 가까이 다가간 듯한 자의 절망적인 목소리를 듣게 된다. 그에게 삶은 번외(番外)”(금서들)일 뿐이며 이 세상은 수증기에서조차 피 냄새가 나는() 폐허이다. 그는 폐허가 되어 버린 현실을 눈물이 메말라 버린 건조한 세상으로 그리며 눈물을 잃는 것은 감정이 아니라 병”(Alacrima)이라고 진단하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다.

 

이런 점에서 이이체의 시적 주체는 자신이 무엇을 상실했는지에 대해 인식하지 못한 채 근원적인 내적 결핍감에 시달리는 우울자(Melancholiker)라고 할 수 있다. 멜랑콜리가 구성하는 세계는 근원적인 사물(Chose)’을 결여하고 있는 세계이다. 우울자는 이 명명할 수 없고 표상할 수 없는 사물을 찾아나서 끝없는 모험 속으로 탈주하지만 그가 만나게 되는 대리물들은 늘 그를 실망시킬 뿐이다. 하지만 이를 통해 우울자는 상실된 대상을 살아 있게 만듦으로써 상실을 인지하고 상실을 회복하기 위해 세계 내의 기호를 삼킨다.??

이이체 역시 상실된 대상을 살아 있게 만들기 위해 쓰고 또 쓴다.슌이때 이이체의 시적 주체가 반복적으로 엄마를 부르는 것은 자신이 상실했다고 생각하는 대리물로서 모성적인 것을 설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양피지에 기록된 낡은 모계(母系)의 신화를 믿고,/ 믿고, 또 믿으면서, 연거푸”(인간론) 운다. 어머니의 얼굴과 닮고 싶어서 화장을 하기도 하지만 화장한 내 얼굴이 맘에 들지만 역겨워서 몇 차례 토하기도 한다. 그는 사랑하는 대상을 자기 내면 깊숙이 간직하려 하지만, 또한 자신을 버린 그에 대한 증오로 결국 자기 자신을 역겨워하는 것이다.

 

크리스테바는 이와 같은 우울자의 슬픔을 상징화될 수도 명명될 수도 없는 나르시스적인 상처의 가장 원초적인 표현이라고 보았다.슌그리고 이러한 슬픔을 승화시키기 위해 기호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시적 형식을 통해서 폭력성을 배출시켜야 한다고 했다. 얼핏 보면 이이체 역시 나르시스적인 상처에 빠져 슬픔의 감정을 기호를 통해 배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이체는 여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는 자신만이 대상을 상실한 것이 아니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나르시스적인 슬픔에서 벗어나 슬픔의 공통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너 또한 텅 비어 있을 거라고 생각해본다

멀어지는 나의 빈 몸,

외투가 벗어둔 여생

너는 나를 벗고 간 거였구나

드디어 홀몸으로도 단위가 될 수 있는 건가 중얼거리는 입술 밑으로

병신처럼 침을 주룩주룩 흘렸다

소금기가 가득했다

모래 따위는 무시해도 좋을 가족을 만들어가겠지

외투의 혈관을 열 수 있는 유일한 열쇠

진심으로, 나는 무성한 식물원이 되었다

배를 타지도 않고, 그저 따라갈 수만 있기를

슬픔이 점점 귀여워져 갔다

 

- 실외투증후군(失外套症候群)부분

 

 

이이체에 따르면 실외투증후군(失外套症候群)’식물인간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한다. 이는 살아 있기는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이 무기력한 우울증자의 상태를 지칭한다. 그런데 인용한 시의 후반부에 이르러 자신만이 외투를 상실한 것이 아니라 역시 그러하리라는 인식의 전환을 겪는다. ‘의 외투였듯이 역시 의 외투였다면, ‘또한 지금 자신이 겪을 추위를 느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이는 누군가가 자신의 외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서로가 서로의 외투가 되어 주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슬픔이 자신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음으로써 슬픔은 점점 귀여워져가고 외투의 혈관을 열 수 있는 유일한 열쇠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결코 슬픔이 소멸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는 부재가 소멸되지 않는 어떤 것으로 끝없이 이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수용한다. 대상이 아니라 대상의 부재를 소유하는 것이기에 그의 슬픔 역시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다만 이를 통해 그는 이 세상에 부재하는 연인을 부정적인(negative) 방식으로 존재하게 할 수 있다. 그가 진정으로 추구하는 것은 상실된 대상이 아니라 그 대상의 부재이므로, 이 대상이 부재하는 한 그것은 우울자를 살아가게 한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존재 방식 속에서 이름 없는 사랑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너는 어둠이 흐릿해질 때까지

예쁘장하게 어지럽혀진 액세서리들 틈에서

알몸으로 앉아 나를 바라보았지

약속대로 잊어버린, 우리가 잊어버린

우리의 이름이여

 

 

바깥에서 들어오는 네온사인이

네 눈 속의 나를 빛나게 해주었다

서로를 어떻게 부를지 몰라도 행복했다

 

 

젤소미나, 내 사랑의 유일한 형식

너는 무엇을 약속하고 있니

아직도 서로의 몸을 어루만져주지 못해

혼자 팔짱을 끼우곤 신음하곤 하니

 

 

이유를 알려준다면, 이해할 수 있을까

 

 

이름, 이름 따위야……

 

 

사랑은 잃는 자와 얻는 자 모두의 것

미아들, 우리는 미아들

 

 

젤소미나, 나의 젤소미나

이곳은 무서운 곳이다

아무도 울지 않는다

여기서부터, 사랑은 시작된다

 

- 낯선 애무부분

 

 

젤소미나는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영화 (La Strada)의 여주인공 이름이다. 그러나 이 시에서 반복해서 불리는 그녀의 이름은 다만 이미 상실된 것을 대신하는 것일 뿐이다. 서로의 이름을 잊어버리기로 약속한 연인들이, 그 이름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랑의 유일한 형식으로서의 이름인 것이다. 여기서 연인들이 서로의 이름을 잊어버리기로 약속한 것은 그것이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로의 이름을 어떻게 부를지 몰라도 행복하다. 서로의 몸을 어루만져주지 못해 혼자 팔짱을 끼우고 신음해야 할 때에도 이름은 아무 소용이 없다.

 

이이체는 이러한 이름의 소용없음에서 사랑을 발견한다. 그에게 사랑은 우리의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주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이름을 잊어버리는 데서 시작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슬픔은 젤소미나혼자만의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게 된다. “사랑은 잃는 자와 얻는 자 모두의 것이기에 사랑을 잃고 나서 생기는 슬픔 역시 개별자만의 것이 아니다. 이는 의 슬픔이자 우리의 슬픔이자 세계의 슬픔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서로의 슬픔을 이해하고 그 슬픔을 통해 서로를 이해해야 한다. 그것이 암흑으로 뒤덮인 이 세상에서 계속해서 살아남아 서로의 몸을 어루만져줄 수 있는 유일한 방도인 것이다.

 

정한아, 심보선, 이이체는 우리는 미아들이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부재로 인한 고통 속에서도 다시금 사랑이 시작되게 한다. 이들은 고독하기에 서로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고독하지만 서로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 고통 속에서 살아가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서로 사랑하자고 말해주는 누군가가 있다. 슬픔과 절망으로 한 걸음 내딛기조차 힘들 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누군가의 힘겨운 발자국 소리가 우리를 다시금 걷게 하는 것이다. 이 시대의 암흑을 조금이나마 몰아낼 수 있는 것으로서의 희미한 빛은 이러한 각각의 존재들에 대한 사랑이 아닐까. 그리하여 우리들의 오르페우스는 말한다. “웃을 수 있어야 한다/ 불행히도 사랑을 빈다”(이이체, 요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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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르페우스를 통하여, 시적으로 말하는 것과 사라진다는 것은 같은 움직임의 깊이에 속한다는 것을, 노래하는 자는 자신의 전부를 걸고 그리고 마침내 소멸되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죽음의 앞당겨진 접근이, 먼저 다가온 결별이, 미리 주어진 작별이 그에게서 그의 존재에 대한 그릇된 확신을 지우고, 그를 보호해 주는 안전을 흩뜨리며, 그를 끝없는 불안으로 인도할 때만이 그는 말하기 때문이다.” 모리스 블랑쇼, 문학의 공간, 이달승 옮김, 그린비, 2010, 228.

 

2 조르주 디디-위베르만, 반딧불의 잔존, 김홍기 옮김, 도서출판 길, 2009, 그는 이 책에서 최종적 진리를 위해 현실이 파괴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철학자들의 묵시록적 어조를 비판하며 반딧불처럼 영락없이 한시적이고, 경험적이고, 산발적이고, 미약하고, 잡다하고, 일시적인진리의 미광들에 대해 말한다.

 

3 이 글에서 다루는 대상은 다음과 같다. 정한아, 어른스런 입맞춤, 문학동네, 2011; 심보선, 눈앞에 없는 사람, 문학과지성사, 2011; 이이체, 죽은 눈을 위한 송가, 문학과지성사, 2011.

 

4 신형철, 끔찍하게 민감한 마음-정한아의 어른스런 입맞춤에 부쳐, 문학동네68, 2011년 가을호, 393~394.

 

5 심보선, 천사-되기에서 무식한 시인-되기, 창작과비평, 2011년 여름호.

 

6 김홍중, 마음의 사회학, 문학동네, 2009, 236.

 

7 나는 쓴다. 쓴다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쓴다. 쓴다고 생각하기 위해 쓴다. 쓴다. 지운다 -부분

 

8 줄리아 크리스테바, 검은 태양, 김인환 옮김, 동문선, 2004, 24.

 

 

당선소감

 

책임 가지고 쓰라는 무거운 당부로 받아들일 것

 

당선, 이라니. 당선 소식을 알려주신 기자분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드렸는지 모릅니다. 전화를 끊고도 실감이 나지 않아 한동안은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누구에게 먼저 연락을 하면 좋을지 아무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만큼 당선되었다는 것은 저에게 기쁘고도 두려운 일입니다. 읽고 또 쓰는 것은 너무나 즐거운 일이지만 또한 책임을 가지고 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에 당선된 것은 그 책임을 잊지 말라는 무거운 당부로 알고 앞으로도 열심히 읽고 또 쓰겠습니다.

 

감사드릴 분들이 참 많습니다. 언제나 너무 많은 가르침을 주시는 신범순 선생님과 서울대 국문과 여러 선생님들, 그리고 당선 소식을 함께 기뻐해줄 선후배, 동기들 정말 고맙습니다. 부족한 점 많은 글을 따뜻하게 읽어주신 서영채 선생님께도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무심한 듯하지만 변함없는 지지를 보내주는 가족들 항상 고마워요. ‘이상한인연으로 다시금 만나게 된 서울대 대학신문사 사람들, 앞으로도 좋은 인연 이어갔으면 합니다.

 

마지막으로 지난 10년 동안 그러했고 계속 내 옆에 있어줄 국아, 사랑하고 고마워. 지금의 이 떨림과 고마운 사람들에 대한 마음을 소중히 간직하며 좋은 글 쓸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안지영

1983년 충북 괴산 출생 2007년 서울대 국어교육학과 졸업 2012년 서울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수료

 

 

 

심사평 (서영채)

 

동시대의 詩的 개성들 맥락화구성력 돋보여

 

세 편의 응모작이 선자의 손에 남았다. 예년과는 달리, 셋 모두 현재의 시적 상황을 다루고 있는 글이라는 점이 특이했다. 전영규 씨의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이아의 사랑 - 이수명과 김경주의 시는 이수명과 김경주의 시편들을 자기 방식의 산문으로 다시 쓴 것으로서, 독특한 개성과 정련된 문장이 매력적이었다. 아쉬웠던 것은 지나치게 안으로 닫혀 있는 글이라는 점이었다. 아무래도 당선작으로 선뜻 손을 들어주기는 어려웠다.

 

최종환 씨의 차이의 재편성’ - 2000년대 우리 시의 정치에 대하여는 미래파 논쟁에서 시의 정치성에 관한 논의로 이어지는 논리의 흐름을 조망해본 것으로서, 시 자체에 대한 식견이 높고 적절한 인유로 글 전체의 흐름을 끌어 나가는 솜씨가 돋보였다. 이론을 끌어오는 것도 적절하고 무엇보다 이론의 사용이 장식적이지 않아 호감이 갔다.

 

안지영 씨의 이름 없는 부재를 향한 노래들 - 정한아, 심보선, 이이체의 시를 중심으로는 현재 우리가 직면해 있는 그 어떤 부재를 동시대의 젊은 시인들이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에 대해 세 가지 방식으로 논했다. 부재에 대해 소리 지르는 일, 부재를 끌어안는 일, 그리고 그 스스로 부재가 되는 일이 그것이었다. 동시대의 시적 개성들을 시대의 흐름과 함께 맥락화하여 하나의 글로 얽어내는 구성력이 돋보이는 글이었다.

 

마지막까지 남은 두 편의 글은 나름의 장점이 있어 당선작 한 자리를 놓고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안지영 씨의 손을 들어주게 된 것은, 그의 글에 담겨 있는 좀 더 정돈되고 배려심 있는 문장 때문이었다. 아쉽지만 최종환 씨는 좀 더 좋은 모습으로 다른 자리에서 만나게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