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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면역력으로 순환되는 공포의 뫼비우스의 띠 

- 편혜영 재와빨강,블랙아웃(Black Out)을 중심으로 / 이선희

 

 

편혜영의 시계는 거꾸로 간다

 

편혜영이 빚어낸 가상의 세계들은 불편하고 혼란스럽다. 인간과 인간이 사는 공간, 그리고 인간이 만들어 낸 세계의 결과물들. 이 모든 것이 한데 뒤엉키고 뒤틀리며 하나의 서사를 만들어 내는 것이 바로 편혜영 스타일이며, 그것은 때론 기괴스럽게(아오이 가든, 사육장 쪽으로, 재와 빨강) 때론 서글프게(저녁의 구애, 서쪽 숲에 갔다) 드러나기도 한다(작품 수가 많은 관계로 편의상 장편을 기준으로 나누었음을 밝혀둔다). 하지만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과 사회제도 사이에 생기는 균열, 인간과 인간 사이에 생기는 균열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일까. 편혜영의 작품에는 사라짐, 실종으로부터 시작되는 서사가 유난히 많다. 실종된 인물들을 찾아가는 과정은 그야말로 희뿌연 안개 속을 헤매듯 좀처럼 맥이 잘 잡히질 않는다. 그야말로 애매하고 모호하다. 하지만 더 큰 공포는 누군가 사라져도 세상은 아무렇지 않게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녀의 초기작들은(아오이 가든이후를 말함) 대부분 도시라는 공간과 인간이 만들어 놓은 제도의 여러 가지 폐해에 잠식당하고 희생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주로 그리고 있다. 그들은 그러한 제도에 어떻게든 적응하고 편입되어 끌려가는 수동적인 인간형이다. 가장 정점에 달하는 것은 바로 재와 빨강이다. 그 이전의 작품들이 개별로 존재하면서도 개별적이지 않고,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주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재와 빨강은 그야말로 분노와 증오의 종합세트인 셈이다. 이후 출간된 저녁의 구애는 유통기한이 짧은, 사회의 부속품으로 전락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림으로써 이 시대의 쓸쓸한 한 단면을 보여주었다. 주제의 측면에서 볼 때 이전과 크게 달라진 건 없었지만 표현의 측면에서 보자면 전작보다 훨씬 순화된 느낌이었다. 그 때문인지 이것이 과연 편혜영의 소설이 맞나 싶을 정도로 많이 낯설고 조금 밋밋하게까지 느껴졌다. 그만큼 전작이 주는 인상이 강렬했기 때문일 것이다. 가장 최근작인서쪽 숲에 갔다에서 보여준 세계 역시 그 동안 편혜영이 보여주었던 세계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숲이라는 거대하고 막막하고 그 속을 알 수 없는 미스터리한 공간과 인물을 엮음으로써 눈에 보이지 않는 공포를 극대화시켰다는 점에서 과연 편혜영표 소설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 작품에는 편혜영의 소설을 서쪽 숲에 갔다를 기점으로 그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는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은 그 동안 편혜영 소설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았던 인간의 존재에 대한 진지한 물음이었다. 이전 작품에서의 인물들이 대부분 사회나 제도의 부속품처럼 그려졌다면, 서쪽 숲에 갔다에서는 어두운 욕망에 사로잡혀 오히려 사회나 제도를 적극 악용하고 이윤을 챙기는 인물들과 그들에게 이용당하는 인물들이 서로 얽혀있다. 그들이 얽히는 과정에서 인간 본연의 이기주의와 악마성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으며, 관계의 수렁에 빠진 주인공은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에 대해 되묻기 시작한다. 작품을 읽는 내내 심연으로 침잠하는 기분이 들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리라. 서쪽 숲에 갔다에서 시작된 인간 본연의 문제는 이후 발표된 몇 편의 단편들 (야행, 밤의 마침, 비밀의 호의)에서도 꾸준히 드러난다. , 이제 편혜영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 생긴 균열에 집중함으로써 또 다른 작품의 전환기를 맞을 수도 있겠구나. 하지만 그것은 순전히 착각이었다. 가장 최근 발표된 단편 블랙아웃이 나의 기대를 배반했기 때문이다. 블랙아웃은 주제 면에서나 구성 면에서 재와 빨강과 유사성이 많은 작품이다. 도대체 작가는 왜 위기에 처한 세계와 대책 없는 자연재해와 전염병을 또 거론하는 것일까. 동어반복적인 이야기를 굳이 다시 할 필요가 있을까. 그것은 마치 끝나지 않는 도돌이표 같은 느낌이었다. 나의 궁금증은 바로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왜 편혜영의 시계는 거꾸로 가는가?’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재와빨강블랙아웃두 작품을 유심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현실로부터의 이탈, 다른 세계로의 이동

 

우리는 삶이 피곤하고 힘들어질 때면 현실로부터의 도피를 꿈꾼다. 그것은 지금보다 더 나은 삶으로의 지향을 내포하고 있으며, 대개는 유토피아적인 상상으로 이어지지만 때론 쾌락이나 범죄 같은 일탈로 방향을 잘못 틀어 삶의 궤도에서 완전히 이탈해버리는 경우도 흔치 않다. 그런 경우, 일상을 벗어나고자 했던 원래의 의도와는 달리 과거의 삶까지도 송두리째 어딘가로 견인되어 이전의 삶 자체를 복구시키기란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현재 내가 속해있는 현실에서의 이탈이 누군가의 자발적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 타인에 의한 것이라면, 그리고 그것이 내가 원하는 방향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면, 그래서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곳이라면 문제는 전혀 달라진다. 편혜영의 소설 재와 빨강블랙아웃은 그러한 상황설정에서 시작된다.

 

우선 재와 빨강을 살펴보자. 방역업체의 약품개발원인 주인공 는 순전히 쥐를 잘 잡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지사장의 눈에 들어 전염병이 창궐하고 대지진의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는 ‘C’국의 본사 파견사원으로 선발된다. 그는 ‘C’국의 공항 검역대에서 전염병 의심환자로 판명되어 소독약과 질병과 쓰레기로 가득 찬 Y시의 한 아파트에 격리된다. 게다가 착오가 생겼다며 파견근무는 이유도 없이 무기한 연기되고 본사 담당자인 과는 연락조차 제대로 닿질 않는다. 전염병에 뒤늦게나마 대비하기 위해 찾아간 약국에서 그가 구한 것은 살충제와 쥐약이었고, 그것마저 누군가에게 빼앗기고 만다. “사내에게 얻어맞은 순간, 그는 자신이 이제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세계에 들어섰음을, 도덕과 질서와 교양과 친절이 정당한 세계에서 약탈과 노략질과 폭력과 쓰레기가 정당한 세계로 진입했음을 깨달았다.” (재와 빨강, p.55) 이는 누군가가 모종의 계략을 꾸며 그의 인생을 쥐락펴락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추측을 하게 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블랙아웃의 경우는 그나마 상황이 낫다. 주인공 조효석은 벙커를 만들고 파는 회사의 계약직 A/S맨이다. 이 회사로 이직하기 전 그는 대기업 소속의 가전제품 수리사였다. 벙커에서 고칠 것이라곤 기껏해야 세탁기나 냉장고 같은 가전제품뿐이었으니 특별히 일이 달라질 건 없었다. 하지만 비교적 무사태평했던 과거를 보냈던 그는 신입사원 연수를 받으면서 완전히 다른 세계로 이동했다. 세계는 언제라도 핵이 사용될 정도로 정치 상황이 위태롭고, 환경적으로 극심한 위기에 처해 있었다. 예고와 대책이 없는 자연 재해는 무시무시했고, 수치를 정기적으로 보도해야 할 만큼 방사능이 위협적이었다. 에볼라바이러스, 광우병,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조류 독감 같은 질병이 전 세계에 퍼져 있고, 심지어 지구는 소행성이나 우주 쓰레기와 충돌할 가능성도 있었다.”(블랙아웃, 자음과 모음2012년 여름호, p.112). 여기서 주목할 것은 가능성이다. 즉 사람들이 걱정하는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닥치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느라 현재의 시간들을 낭비하고, 살 수 있을지 없을지도 알 수 없을 만큼 비싼 벙커를 사기 위해 돈을 모은다. 미래를 비관하는 것은 그의 아내 역시 마찬가지다. 그보다 이 회사에 먼저 입사한 아내는 고객에게 전화로 세일즈를 하고 있다. 그녀가 파는 것은 벙커가 아니라 임박할 위기에 대한 두려움긴박감같은 것들이었다. 세상은 온통 지구멸망을 예고하는 암시들과 말들로 넘쳐난다. 하지만 여전히 의심이 든다. 누군가 이런 소문에 개입되었을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구심. 언제 일어날 지 모르는 재난에 대비하기 위해 하늘 위로 나는 비행기나 공습 사이렌은 사람들의 공포심을 조작하기 위한 것은 아닐까. 재와 빨강에서 전염병이 실제로 돌고 있는지도 알 수 없다. 그저 방역차가 계속 돌아다니고 거리에 쓰레기와 쥐가 넘쳐나며 도시를 구성하고 지탱하던 수많은 것들이 서서히 무너지는 모습들에 막연히 동의할 뿐이다. 사람들이 계속 죽어나가는 것은 전염병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교통사고나 암 같은 현실적인 문제로 인한 것일 수도 있다. 실제로 누군가 개입되었는지 개입되었다면 왜 그랬는지는 명백히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다음 두 문장은 그러한 의심을 더욱 부추긴다. “본래 멸종에의 위협은 종()을 강화시키는 법이다.”, “전염병은 사실상 인간이라는 종을 강화시키는 데 일조한다. 쥐와 마찬가지로 인간도 쉽게 소탕되는 종이 아니다.”(재와 빨강, p.117) 질병에 대한 두려움 역시 일상의 면역력을 키우기 위한 수단으로 제격이기 때문이다. 불분명한 것은 비단 그것뿐만이 아니다. 지사장은 왜 전염병이 돌고 대지진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C’국에 그를 보냈는지, 전처가 그를 사랑하기는 했는지, 전염병의 감염경로는 무엇인지, 트렁크를 훔쳐간 사람은 누구인지, 몰이라는 사람이 실재로 존재하긴 하는 것인 지 등등. 마치 지독한 악몽을 꾸고 있는 듯 그야말로 혼돈 그 자체이다. 사실 편혜영 소설의 대부분이 그렇다.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하고 애매모호함으로 가득 찬 세상.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눈에 보이지 않는 삶의 균열이나 폭력이 늘 주위에 도사리고 있는 반복적 일상. 꿈과 현실이 뒤섞이듯 혼돈과 착각으로 점철된 세계. 그것은 편혜영식의 문체(~이거나 ~가 아닐지도 몰랐다)를 만들어 냈으며, 비단 인간과 인간이 만들어놓은 인공의 세계뿐만이 아니라 심지어 동물들(, 고양이, , 코끼리, 원숭이, 부엉이 등)에게도 적용되는 것이다.

 

뫼비우스의 띠로의 진입, 애매모호한 세계에 적응하기

 

뫼비우스의 띠는 몇 가지 흥미로운 성질을 가지고 있는데, 가장 특징적인 것은 어느 지점에서나 띠의 중심을 따라 이동하면 출발한 곳과 정반대 면에 도달할 수 있고, 계속 나아가 두 바퀴를 돌면 처음 위치로 돌아온다는 점이다. 두 작품의 주인공 모두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하지만 현재이며 실재인 세계로 이동했다. 그들은 이미 뫼비우스의 띠의 어느 한 지점 위에 올라서 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주목할 점은 주인공들의 이동경로와 그들이 어떻게 새로운 세계에 적응해 나가는가 하는 것이다. 두 주인공은 비슷한 듯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른 상황에서의 적응양상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재와 빨강에서의 전제는 전염병이 창궐하여 국가전체로 확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C’국으로 파견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처와 그녀가 키우던 개가 무참히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공교롭게도 전처와 개가 살해된 날은 그가 출국하던 날이며, 그런 이유로 그는 살인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다. 며칠 후 갑작스레 방문한 낯선 사내의 방문이 아마도 형사일거라 생각한 그는 사내들을 피하기 위해 4층 아파트에서 쓰레깃더미로 투신한다. 그의 낯설고도 기이한 여행이 시작되는 지점은 바로 여기서부터다. 그의 이동경로 또한 흥미롭다. 아파트에서 탈출한 그가 유일하게 몸을 숨길 수 있는 곳이라곤 근처에 있는 공원뿐이다. 그 곳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이란 차고 넘치는 쓰레기와 열 일곱 개의 벤치와 그 벤치를 각자 차지하고 있는 부랑자들 그리고 수시로 지나다니는 방역차가 내뿜는 희뿌연 연기가 고작이다. 그 곳에서 그는 생존의 법칙을 배운다. 닥치는 대로 쓰레기를 뒤질 것, 음식은 아무에게도 양보하지 말 것,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벤치를 지킬 것 등등. 그런 식으로 그 역시 점점 온몸에 악취가 진동하는 거리의 부랑자가 되어 간다. 그것이 그의 첫 번째 이동이다. 첫 번째 이동이 그의 의지대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두 번째 이동은 순전히 누군가에 의해 이루어진 비자발적 이동이다. 부랑자 중에 전염병에 걸린 누군가를 보디백에 담아 쓰레기 소각장에 던져 넣었을 때처럼 어느 순간 그 역시 보디백에 담겨 하수구로 던져진다. 정리해보자면, 그는 아파트라는 허공에서 공원이라는 지상으로 그리고 다시 하수도라는 지하로 점점 수직하강하며 내려온 셈이다. 그러한 궤적은 그의 신분이 점차 불분명해지고 경제적으로 가장 빈곤한 계층으로 추락하는 과정과도 일치한다. 또한 그것은 뫼비우스의 띠에서 처음에 출발한 곳과 정반대의 지점이기도 하다. 태초에 하느님이 인간을 정착시킨 곳이 지상의 땅이었음을 상기해볼 때 그가 공원에서 지낸 날들은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지상이 인간의 세계라면, 지하는 쥐의 세계이다”(재와 빨강, p.114)라는 말처럼 지하로 내려간 순간 그의 인생은 더 이상 인간의 삶이 아니었다. 그곳은 석유처럼 검은 하수가 흐르고온갖 세균과 오물들, 사람보다 더 많이 살고 있을법한 쥐들, 더러운 쓰레기만도 못한 인간들이 모인 그야말로 세상의 가장 더럽고 추악한 것의 집합소이다. 지옥이 있다면 바로 이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 곳엔 질서와 인간에 대한 예의 따윈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더 슬픈 건 그런 시궁창 속에서조차 인간은 길들여지고 적응해나간다는 사실이다. 모든지 괴로운 건 처음뿐이다. 조금만 지나면 아무렇지 않게 지낼 수 있다. 그가 마치 하수도생활이 오래된 사람처럼 아무렇지 않게 잠을 자고 밥을 먹고 쥐를 잡는 걸 보면 말이다.

 

반면 블랙아웃은 위험수위에 이르렀지만 아직 세계가 멸망하지 않았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무사태평했던 생활에 안녕을 고하고 언제, 어디에서 정체를 드러낼지 모를 위험이라는 지뢰 때문에 늘 두려움에 떨며 지내야 하는 세계로 이동한 그는 벙커내부의 자잘한 전자제품이나 지상출입구 개폐장치를 수리하며 살아간다. 그는 벙커가 어디에 매립되어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단지 회사에서 단말기를 통해 전송한 방향지시를 통해 벙커를 찾을 수 있고, 암호로 된 비밀번호를 입력해야만 겨우 들어갈 수 있다. 그런 식으로 지상과 지하를 오가며 일하는 일상이 매번 반복된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시간이 지남에도 불구하고 조효석은 두려움에 익숙해지지 못한다. “전투기 소리에 겁을 먹은 건 조효석뿐이었다. 슈퍼마켓 앞에는 제법 넓은 공원이 있는데, 공원에 있는 누구도 동요하지 않았다.”, ”실로 태연하고 무감하고 일상적인 풍경이었다.”(블랙아웃,자음과 모음2012년 여름호, p.115). 그것은 조효석이라는 인물이 아직 일상에 대한 면역력이 키워지지 않았음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재와 빨강의 그가 본인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어쩔 수 없이 부랑자가 되어 지하생활을 하게 된 반면, 블랙아웃의 조효석은 지하로 내려와야만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란 점이다. 전자가 경제적 활동이 전혀 불가능한 잉여의 존재라면, 후자는 경제적 활동에 적극 동참하는 생산적 존재이다. 즉 두 주인공이 유지하고 있는 일상이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이는 자본주의에서 생겨나는 계급의식이나 불평등과도 관련이 있는데 이는 다시 살펴보기로 하자.

 

파멸과 생존의 갈림길에서

 

이제 뫼비우스의 띠를 타고 한 바퀴 돌았으니 다시 한 바퀴를 더 돌아 제자리로 올 시간이다. 그것은 삶에 생긴 균열을 메워가는 과정이자 자신의 존재감을 회복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쉽지 않아 보인다. 왜냐하면 그들은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개개의 존재인 한편 이념과 권력이 지배하는 세상을 벗어날 수 없는 구성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들을 이런 상황으로 몰아넣은 것은 과연 누구일까 다시 한 번 상기시킬 필요가 있다.

 

먼저 재와 빨강의 그의 상황을 보자. 모국에서 타국으로, 그리고 다시 지상에서 지하로 내려오는 과정을 거치면서 그는 자신의 이름과 존재감을 잃었다. 모국에서든 타국에서든 자신의 이름은 호명되어선 안 되는 것이었다. 그는 아내를 죽인 유력한 용의자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이름을 지워야 했다. 자신의 이름을 지우고 그가 새로 얻은 이름은 바로 이었다. 공원에서 거리의 부랑자로 지내는 동안 쓰레기를 뒤지다가 우연히 발견한 셔츠를 입게 되는데 그 셔츠에 새겨진 이름이 바로 몰이었다. 이후 그는 몰로서의 인생을 살게 된다. 몰은 그가 파견된 본사 담당자의 이름과도 동일하다. 그만큼 ‘C’국에서 흔하디 흔한 이름이다. 흔하다는 것은 개성이 없다는 얘기다. 몰이라는 이름으로 대변되는 개개인은 다름아닌 익명의 대중이자 자본주의의 부속품처럼 전락해버린 현대인의 자화상이다. 게다가 수많은 몰이 근무하는 본사는 무균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전염병으로부터 철저하게 격리되어 있다. 그는 몰과 만나기 위해 여러 번 본사를 방문하지만 그 때마다 까다로운 절차를 요구받으며 번번히 출입을 거절당한다. 이유는 한가지다. 그가 예전과 다른 신분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부랑자가 아니라 방역업체 지사에 근무하는 직원이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 곳은 경제적 논리가 철저하게 지켜지는 곳이었다. 있는 자와 없는 자가 구분되고, 가장 심각한 재난에도 안전한 곳이었다. 본사는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낸 그야말로 가장 이기적인 공간인 셈이다. 안에서는 어떠한 일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들은 기능성마저 상실한 흔해빠진 방역복을 계속 팔 수 있도록 끊임없이 괴담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을 제조하는 중소업체들로부터 적당히 이윤을 챙길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자본주의의 논리라고 우기면서. 그럼에도 그는 본사에 편입되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것은 지하에 익숙해진 그가 다시 지상으로 상승하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어쩌면 일상으로의 복귀가 전염병보다 더 위험할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재와 빨강에서 본사의 이미지는 블랙아웃의 벙커와 돌담이 높은 집으로 대변된다. 조효석에게 있어 벙커란 사고 팔 수 있는 물건이 아니며, “정치인들의 은신처일 뿐이다. 돌담이 높은 집을 처음 방문하고 나서야 그는 깨닫는다. 벙커는 사고 팔 수 있는 물건이며, 그것을 살 수 있는 사람은 정치인뿐만이 아님을. “위험을 불평등하게 만드는 게 바로 벙커인 것이다. 벙커조차 자본주의 논리에 입각한 상품이라니. 중세시대의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를 재현하는 오브제가 바로 벙커인 셈이다. 조효석 역시 자신의 신분의 상승의지를 보이는 인물이다. 회사에서 보내줄 벙커 위치를 기다리는 동안 우연히 들어가게 된 슈퍼마켓에서 그는 방재청 직원으로 오해를 산다. 하지만, 잠시 동안의 거짓말일지라도 그는 국가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된 것에 묘한 권위의식을 느끼며 자신이 마치 모든 걸 통제하고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재와 빨강에서의 그와 다른 점은 수직상승이 아닌 수평이동이란 점이다. 그것은 지상에서 인간다운 삶을 계속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재와 빨강블랙아웃두 작품 모두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드러나 있으며, 다음 문장이 이를 시사하고 있다. “그는 제작자가 아닌 이상 제품을 완벽하게 수리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블랙아웃, 자음과 모음2012년 여름호, p.119)에서 알 수 있듯이 현실의 모든 제도는 한 개인에 의해 근본적으로 바뀔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 견고해서 그 어떤 재난에도 끄떡없다. 개인은 그러한 제도의 일부일 뿐이다.

 

일상으로의 복귀그리고 존재의 잠식

 

물리적인 시간에는 차이가 있지만재와 빨강의 그와 블랙아웃의 조효석은 결국 일상으로 돌아오게 된다. 하지만 다시 돌아온 일상은 어쩌면 서쪽으로 4센티미터”(편혜영, 서쪽으로 4센티미터, 현대문학201012월호, 현대문학사, 2011) 옮겨졌을지도 모를, 이미 이전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돌아오는 길목에서 두 사람은 잠시 망설이고, 깊은 고민에 빠졌을 것이다. 그렇게 원하는 일상이 새롭게 시작되었으나 허탈함을 감추지 못했을 것이다. 쥐 때문에 샐러리맨에서 하수도라는 지하세계의 부랑자로 추락해야 했고, 쥐 때문에 임시방역원으로 선발되면서 다시 지상의 인간다운 삶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전처를 잃었고, 가방을 잃었고, 이름을 잃었다. 어쩌면 그가 찾고 있는 것은 몰이 아닌 잃어버린 자신을 찾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수많은 몰중 하나가 되었고, 이미 사라진 몰처럼 그의 존재감 역시 사람들의 기억 속에 희미해져 가고 있을 터였다. 그렇다면 그는 왜 수많은 몰 중 하나가 되어야만 했을까. 게다가 여전히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가 있다. 그것은 그가 과연 전처를 살해한 범인인지에 대한 진위의 여부다. 진실은 마지막 부분에서 드러난다. 임시방역원으로 선발된 후 새로 일을 맡게 된 집에서 그는 우연히 주인여자와 맞닥뜨리게 된다. 당일 잡은 쥐만으로 돈을 받는 그가 돈을 더 많이 받기 위해 전날 잡은 쥐까지 동원해 편법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챈 주인여자는 그에게 따지며 빈정댄다. 그는 여자에게서 심한 모멸감을 느낀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예전에 쓰레기장에서 주운 날이 무딘 칼을 꺼낸다. 칼을 있는 힘껏 쥐었을 때 그는 오래 전에 느꼈던 통증을 다시 느끼며 익숙하게 여자의 목에 칼을 들이댄다. 그의 존재를 구원했던 칼이 이제는 타인의 존재를 위협하는 칼로 용도가 바뀐 것이다. 그리고 낯선 피냄새가 봉인의 열쇠이기라도 한 듯, 언젠가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이 비로소 떠올랐다”. 주인 여자를 살해하는 과정에서 그의 기억은 전처를 죽인 기억과 고스란히 겹쳐진다. 그에게 전처를 죽인 과거란 감각으로만 희미하게 남아있을 뿐 그의 무의식 어딘가에 무겁게 내려앉은 채 봉인되어 있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곡선을 이룬 칼의 손잡이를 쥐었을 때, 그의 손바닥이 생경하면서도 익숙한 느낌을 알아차린 듯 떨려”(재와 빨강, p.104)오고, “사정없이 2번을 발로 후려차기 시작”(재와 빨강, p.149)했을 때 그 안에 내재된 폭력성이 어느 순간 고개를 들었던 것이다. 방역복이 안전 이상의 의미가 있었던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의 생존 방식이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시간과 돈을 소비하는 일반적인 그것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철저히 지우고 은폐시켜야만 존재할 수 있는 방식이다. 결국 수많은 몰 중 하나가 되어 같은 옷을 입고 같은 꿈을 꾸고 같은 생각을 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가 C국에서 들어온 순간부터 벌어졌던 모든 일련의 사건들과 누군가에게 쫓기듯 도망쳤던 일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는 본능적으로 알았을 것이다. 자신이 얼마나 엄청난 짓을 저질렀는지. 그렇지 않다면 도망칠 일도 대중 뒤에 숨는 일도 없었을 테니까. 자신을 괴롭혔던 악몽의 실체가 드러남과 동시에 그가 기이한 안도감을 느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는 이젠 더 이상 잃을 게 없다. 모든 것이 무너진 자리에서 생명력을 피워낸 꽃처럼 그 역시 자신의 이름조차 사라졌지만 그렇기에 다시 일상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빈 몸뚱이 하나만 잘 간수하면 그럭저럭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삶에 대한 희망과 체념을 동시에 내포하는 것이다. 여전히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나 세상은 여전히 아무렇지 않게 돌아가고 있음에도 여전히 그는 허공에 뜬 존재나 다름없었기때문이다.

 

슈퍼마켓에서 직원의 손에 이끌려 내쫓긴 조효석 역시 공원의 한가롭고 여유로운 모습을 지켜보면서 자신이 그 동안 보아온 세계와의 이질감을 느낀다. 어쩌면 인간의 삶 자체가 긴장감과 두려움의 연속인지도 모른다. 자연재해와 분쟁과 테러가 분명 어디에선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지만 우리는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벙커의 위치를 전달받은 조효석은 산 자들의 무덤과도 같은 어둡고 깊은 지구의 핵 속으로들어간다. 벙커 안으로 들어가는 그의 모습에도 역시 체념과 두려움이 뒤섞여 있다. 마치 자신의 미래를 예견이라도 하는 듯이. 그리고 그는 전원장치의 오류로 벙커 안에 갇히고 만다.

 

편혜영의 소설은 언제나 현재에 집중하고 있으며, 우리가 걱정하는 미래보다 오히려 현실적인 문제들로 인간은 죽고 고통받는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블랙아웃에서 역시 주인공을 위협하는 가장 가능성 높은 위험이란 핵도 아니고 질병도 아닌 바로 실직이다. 그것이야말로 가장 현실적인 위험인 것이다. 게다가 사실상 예고 없는 재앙에 대한 두려움보다 더 심화되고 있는 것은 바로 조효석과 아내 사이의 무관심냉대였다. 어쩌면 진짜 두려움 따위는 처음부터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 조장해 온, 현재도 조장하고 있으며, 다가올 미래에도 조장할 것이 분명한 두려움에 우리 자신이 농락당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수많은 공포와 바이러스와 지구종말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한다고 할지라도 일상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훨씬 더 견고하고 튼튼해서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임에도 분명하다. 작가는 이를 다행으로 여기고 면역된 일상이야말로 삶을 지탱해주는 원동력이라는 점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블랙아웃에서는 주제가 심화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체된 느낌이 들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정작 편혜영에게 미래는 과연 우울한 날의 연속인 걸까. 작가 스스로 무언가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강박과 두려움이 있는 것은 아닐까. 결말에서 벙커 안에 갇힌 것은 조효석이 아니라 바로 슬럼프에 빠진 편혜영 자신이 아닐까. 그렇다면 벙커로 들어간 그녀는 언제 지상으로 나오려는걸까. 수많은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편혜영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불순물로 가득 찬 쓰레기장, 모순덩어리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동시에 그런 세상을 살아가야만 하는 인간에 대한 깊은 연민도 느껴진다. 그것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녀는 변해야 했다. 다시는 동어반복을 하지 않기 위해, 그리고 뫼비우스의 띠를 벗어나기 위해 새로운 무기를 준비해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자신만의 동굴로 들어가야만 했다. 어두운 동굴에서 세상으로 언제 나오겠다는 기약 없는 약속을 하고서 말이다. 그것은 자발적 은둔이라고 볼 수 있다. 어쩌면 조효석은 내부 시스템을 훤히 알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벙커 안에 갇힌 것인지도 모른다. 블랙아웃의 마지막 문장이 이를 시사하고 있다. “언젠가는 어둠에 익숙해질 것이었다. 유구히 어두울 수만은 없었다. 그것이 이 세상의 유일한 법칙이었다편혜영 역시 그 법칙에 따를 것이다. 벙커는 마치 라이카견을 태운 스푸트니크호처럼 광활한 미지의 세계를 유유히 떠돌다 여태껏 삶을 지속해오던 공간을 뚫고 더 큰 세계로 진입할 것이다. 비로소 그 때 벙커의 문이 열리고, 편혜영의 시계는 다시 돌아갈 것이다.

 

 

 

당선소감

 

"두 아이 잠든 새벽, 피정하는 기분으로 즐겁게 썼다"

 

내 안의 우물을 덜 팠기 때문에 좋은 글을 쓰지 못하는 거라며 스스로를 자책하고 불안해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땐 지금보다 어렸고, 앎에 대해 자만했고, 세상의 중심에 내가 있었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났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여전히 밑도 끝도 없는 내 안의 우물을 파고 있다. 예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더 이상 세상의 중심에 내가 없다는 것이다. 어쩌면 편혜영 소설처럼 "서쪽으로 4센티미터"쯤 옮겨졌을지도 모르겠다. 이미 예전과는 다른 일상 속에서 글쓰기는 계속되었다. 특히 이번 평론을 쓰는 내내 내게 주어진 과제는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두 아이를 키우며 책을 읽고 사유하고 글을 써야만 했기에 시간을 쪼개는 것 자체가 무엇보다 큰일이었다. 가장 자유로운 시간은 모두가 잠든 새벽이었다. 덕분에 글을 쓰는 내내 피정하는 기분이었고, 대양의 심연처럼 어두운 새벽하늘 아래 짙은 고독을 맛볼 수 있었다. 일일이 다 나열할 순 없지만 이 자리를 빌려 고마움을 전하고 싶은 분이 너무 많다. 우선 좋은 글을 쓸 수 있도록 지도해주신 장영우 교수님, 서희원 교수님 정말 고맙습니다. 창작을 위한 자극제를 끊임없이 제공해주고 계신 멘토 서정일 감독님, 김진영 PD, 나를 응원해준 사랑하는 친구들과 대학원 학우들에게도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허점 많은 글의 장점을 발견해주신 이남호, 박혜경 두 분 심사위원께도 깊이 감사드린다. 마지막으로 곁에서 묵묵히 지켜보며 나를 믿고 활력을 불어넣어 준 사랑하는 남편과 두 아이 그리고 가족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특히 아이들 보느라 주름이 더 늘었을 친정어머니에 대한 고마움은 정말이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고생하신 것에 누가 되지 않도록 열심히 쓸게요.

 

이선희

1976년 서울 출생 동덕여대 일어일문학과 졸업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문창과 석사과정

 

 

 

심사평 (이남호·박혜경)

 

편혜영 소설의 정당한 독법성실한 태도 돋보여

 

평론 문장도 개성이 있는 편이 더 바람직하지만, 그러나 개성 이전에 정확함이 더 요구된다. 다른 창작에서는 편벽된 개성이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그러나 평론은 개성보다는 상식과 기준에 의존하는 바가 더 크다. 평론은 문학의 보편적 의미와 가치에 복무해야 한다. 이러한 평론의 기본 조건을 충족해주는 응모작이 매우 드물다. 올해는 특히 더 그러한 것 같다. 그나마 일상의 면역력으로 순환되는 공포의 뫼비우스의 띠한 편이 이러한 조건을 충족한다.

 

일상의는 편혜영 소설의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현실을 재현하고 문제 삼는 독특한 방식을 해명해 낸다. 어떻게 보면 별로 새로울 것이 없는 의미 부여일 수도 있다. 그러나 타당한 이야기는 별로 새롭지 않은 경우가 많다. 엉터리 독법으로 말이 안 되는 새로움을 찾아내는 것보다는 정당한 독법으로 알 만한 의미를 좀 더 정확한 논리와 문장으로 드러내는 평론이 단연 바람직하다. ‘일상의의 미덕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글은 편혜영의 소설이 지닌 정당한 의미를 상식적이고 성실한 태도로 존중한다. 그리고 그 의미를 명징한 사유와 선명한 문장으로 알기 쉽게 드러낸다. 이것은 읽는 사람 입장에서는 쉬운 것이 되겠지만, 쓰는 사람 입장에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문학에서도 상식이 점점 경시되고 있다. 당선자가 정직한 사유와 명징한 문장으로 문학의 상식을 지키는 일에 기여해주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