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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우리 사회의 벌거벗은 생명에 관하여 / 이승현

 

영화 '한공주'를 중심으로

 

1. 투사되는 불편함, 불안 또는 공포

불편한 듯, 무심한 듯 거의 무표정한 얼굴로 한 소녀를 둘러싼 어른들이 보인다. 깍지 낀 손을 꼭 맞잡은 소녀는 고개를 들고서 한 마디 한다. "전 잘못한 게 없는데요." 내내 어둡던 화면이 소녀의 얼굴을 비추는 순간 환해져서일까. 소녀의 말에 왠지 믿음이 가지만, 소녀는 이내 짐을 싸고 있다.

영화 <한공주>의 시작은 이렇게 한 소녀가 강제로 전학을 하면서부터 시작된다. 어딘가 답답할 정도로 조용하게 시작한 영화는, 고장 난 선풍기의 회전 소리, 캐리어의 바퀴 소리, 스테이플러 찍는 소리까지 미묘한 소리로 불편함을 조장한다. 그것은 소녀의 것인지 관객의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다. 그러나 이내 소녀의 상황이 이해가 되기도 한다. 그녀는 지방의 소도시에서 서울로 전학을 온 터이니, 적응이라는 것이 되었을 리가 없다. 거기다 거처 또한 전에 다니던 학교 선생님의 어머니 댁이니 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을 터이다. 그러나 여전히 소녀에게서 느껴지는 불편함은 완전히 밝혀지지는 않는다. 선생님은 떠나며 아버지의 전화마저 받지 말라고 당부한다. 무언가 큰일이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그녀는 분명 잘못이 없다고 했다.

 

영화가 초반 내내 투사하는 잔잔하면서도 불편한 감정은 무엇을 예비하고 있는 것일까. 영화의 조명도, 음악도, 배우의 표정까지 어딘가를 향하고 있지만, 관객에게 보이지는 않는다. 대체 관객들이 느끼는 불편함의 정체는 무엇인가? 아마 불안 또는 공포. 프로이트에 따르면 공포는 대상에 집중하지만, 불안은 개인의 상태에 관심을 가진다. , 공포는 그러한 감정을 만들어내는 특정한 대상이 있지만, 불안은 그런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영화 초반까지 관객이 느낀 감정은 불안에 가깝다고 하겠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선가 소녀를 둘러싼 괴로운 상황들이 보인다면 그것은 공포로 변할지도 모른다. 숨기고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이 영화라면 말이다. 그리고 영화에서 그러한 정체를 드러내는 하이라이트는 보통 반전으로 드러나는 법이니까.

 

그렇다고 해도 영화 <한공주>는 어딘가 느낌이 조금 다르다. 그 느낌을 설명하자면, 초반에 보여주는 것이 너무 없다는 정도가 될까. 마치 영화에서 투사되는 불편함의 정체를 알아내라고 하는 듯 말이다. 영화는 초반부터 조명 하나, 소리 하나, 초점 하나, 허투루 쓰지 않고 관객들에게 맞출 퍼즐을 던져주듯 조심스럽게 시선을 옮겨간다. 많은 상업 영화들이 초반에 대체적인 설정을 보여주고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것과는 확연히 다른 진행이다. 설정은 있지만, 관객의 시선에는 들어오지 않는다. 오히려 일상적이지만 영화에서 강조되는 소리나, 빛의 노출이 어딘가 관객의 신경을 긁는다. 어차피 영화는 정해진 카메라의 시선을 통해 대상을 투사할 뿐이다. 그러서일까. 너무 일상적이라고 할 만한 화면에 다른 요소들이 불편함을 만들면서, 불안한 긴장을 유발한다. 마치 일상적이지만 불편한 그 어떤 느낌에 집중하라는 듯하다. 그러니 우리는 불안과 공포의 차이를 각인하면서 영화보기가 아닌 영화읽기를 해야 한다.

 

영화 <한공주>가 단순히 한 개인의 불안의 문제를 넘어선다는 사실을 우리는 영화 중반에 이르러서야 확인할 수 있다. 영화의 화면은 객관적인 사실성에 중심을 두고 있는 느낌이다. 상업 영화나 소위 포르노 영화에서 볼 수 있는 남녀의 자극적인 소리나 행위는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남자의 하체가 보이고 바지를 벗으면, 이내 바닥에 엎드렸던 공주(천우희 분)가 다시 흐느끼기 시작한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할 수는 있지만, 화면은 연신 공주의 상체와 구석에 흐느끼고 있는 다른 그림자를 보여주고 있기에 공주에게 전해지는 피학성이 더 크게 다가온다. 그렇게 영화는 가장 선정적일 수 있는 장면에서도 공주라는 한 소녀에게 집중하도록 한다.

 

영화에서 성관계 장면은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요소이다. 그 영화가 어떤 주제로 어떤 이야기를 담아낸다고 해도, 성관계 장면은 대중의 이목을 한껏 집중시키기에 더없이 좋은 요소이기 때문이다. 고전을 패러디한다거나 인간 본연의 문제를 다룬다는 대부분의 영화들이 선정적인 장면들로 관심을 살 수밖에 없는 이유도 영화 자체가 가진 상업성을 쉽게 떨쳐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한공주>는 너무 쉽게 그 유혹을 떨쳐버린 모양새다. 중반이 되어서야 자극적일 수 있는 장면을 담아내면서도 그것을 전혀 상업적인 성적 자극으로 연관시키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 자극은 성적인 자극과는 매우 이질적이며, 오히려 한 소녀를 통해 전해지는 온전히 폭력적이고 피학적인 자극으로 전해진다. 이러한 자극은 여전히 공주의 불안 혹은 공포에 대해 의문을 던지면서도 그것이 어디에서부터 기인하는지 궁금하도록 만든다.

 

2. 사실과 진실의 거리 그리고 법의 이분법

 

공주가 우리에게 전해주었던 폭력적이고 피학적인 자극은 어디에서부터 기인하는가? '사실''진실'의 차이를 다루는 수업 모습은 이런 의미에서 단순하지 않다. 수업의 내용처럼 사실이 '눈에 직접적으로 보이는 객관적 사건의 실체들, 즉 실제로 이루어진 일'이라면 진실은 그 사실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사실에 대한 담임(하정희 분)의 설명 이후 그것과 다른 진실이 무엇인지를 묻는 물음은 다시 관객들에게 던져진다. 뒤이어 공주가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는 장면은 그래서 중요한 맥락을 보여준다. 형사는 공주의 휴대폰에 나오는 통화 목록을 근거로 공주를 강간한 남학생들이 모두 친구들이 아니냐고 결론 내리며 되묻는다. 그러면서 공주에게 '사실'대로 이야기하라고 강요한다.

 

기실 영화 서사의 흐름에 따르면 관객들에게는 아직 공주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밝혀지지 않은 상황이다. 오히려 그래서 담임과 형사의 입에서 나오는 사실과 진실의 차이에 더 집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쯤부터 영화는 공주의 과거를 다시 현재와 교차하며 보여주기 시작한다. 우리가 목격해야 할 사실과 진실의 차이를 확인이라도 하라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영화가 진행되면서 목격하게 되는 것은 형사들이 말했던 사실과는 다른 진실의 면모이다.

 

동윤(김최용준 분)은 공주가 아르바이트를 하는 편의점 사장(임동석 분)의 아들이기도 하면서 친구 화옥(김소영 분)의 남자친구이기도 하다. 동윤과 화옥은 주로 혼자 있는 공주의 집을 편안하게 드나들었다. 이들 셋에게 있어 진실은 이들이 친구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통화를 했다는 것만으로, 다른 남학생들과 공주가 친구라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들은 동윤을 따돌리던 당사자들이다. 소영은 남자친구인 동윤이 그들과 잘 어울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술판을 벌이는데, 그 장소가 하필 공주의 집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 모두가 함께 어울렸던 것은 '사실'이지만, 어디까지나 그들은 친구일 수 없었다는 것이 '진실'이다.

 

영화는 이러한 진실을 아주 천천히 보여준다. 진실의 결정적인 면모는 영화의 중반을 넘어서서야 조금씩 분할되어 그려진다. 관객들로 하여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도록 배치는 하지만, 그것들이 공주의 사연을 한꺼번에 읽어내는 기제가 되는 것을 방지하기라도 하듯이 진실의 전모는 영화의 거의 후반부에 이르러서야 우리에게 목격된다. 그런데 마치 이 영화가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낼 거라고 소개라도 하듯이, 이러한 '사실''진실'의 문제는 기실 이미 영화의 초반부터 등장하고 있다.

 

공주의 전학 문제가 해결되고 난 후, () 학교의 교사(조대희 분)는 공주에게 "잘잘못은 법원 가서 따지"는 거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그는 "사람 사는 세상에 잘못했다고 죄인이고, 그렇지 않다고 그렇지 않은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잘못이 옳지 못한 행동이라면, 그것을 법원에서 따진다는 말은 법이 판결해 줄 것이라는 말이리라. 그렇다면, 사람 사는 세상에서 잘못을 기준으로 죄인을 판별할 수 없다는 이야기는, 어쩌면 법이 가지는 근본적인 한계적 속성을 지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감벤에 따르면 근대 법률 체계에서 재판관들은 법이 공백 상태에 있는 경우에도 판결을 내릴 의무를 지니게 되었다. , 법이 적용될 수 없는 전쟁이나 계엄, 혁명과 같은 '예외상태'에서마저 법은 언제나 법의 논리 안에서 그 모든 것을 증명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는 근대의 인식 체계가 가지는 기본적인 특성으로부터 유래하는데, 이성을 바탕으로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과학적인 대상만을 진실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체계가 그것이다. 그러나 과학적 객관성을 근거로 한 인식 체계에서 모든 것이 이해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 법에 따라 유죄와 무죄를 나눈다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분법적인 분류의 차원일 뿐이지 그 사건과 관련된 피의자나 피해자의 개별성이나 특수성은 지워진다는 것이다.

 

물론 법의 이분법을 의심한다는 것은, 가해자인 남학생들의 행위가 범죄로 성립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으로 변질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물어야 하는 것은 근대의 법이 말하는 '객관'이라는 사실에 관한 문제이지, 법 자체가 가지는 본질적 효용이나 가치를 따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우리는 다시 <한공주>가 보여주는 '사실''진실'의 문제에 집중해야 한다.

 

형사들이 말했듯이 공주의 휴대폰에 남겨진 통화목록은 그들이 함께 어울렸다는 것을 증명한다. 물론 그것은 그들의 입장에서 대단히 객관적인 사실이다. 그러나 앞에서 말했듯, 그 자체가 진실은 아니다. 형사들의 입장은 다른 등장인물들에게도 나타난다. 영화 후반부에 이르면, 공주는 전학 온 학교에서마저 남학생들의 부모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면서 자신이 감추고 싶었던 과거를 모두 들키게 된다. 이어 파출소장(권범택 분)은 조여사(이영란 분)에게 "누구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면서, 공주가 피의자인지 피해자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이라고 전한다. 따라서 공주는 그 객관적인 '사실'의 문제로 판명 불가능한 지점에 있는 존재가 되고 만다. 오히려 그 판명 불가능성이 불어올 다른 문제들로 인해 공주는 주변 사람들에게 기피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영화에서 사회를 위해 법이라는 기준을 제일선에서 집행하는 경찰에게마저 법은 객관적으로 적용되고 있지는 않다. 사실 조여사와 파출소장은 불륜 관계로 이로 인해 조여사는 동네 사람들에게 마트 앞에서 구타를 당한다. 귀가하던 중 이를 본 공주는 신고를 하려고 하지만, 이내 그것이 소용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현장 근처까지 왔던 파출소장은 현장을 목격하고 출동했던 경찰차를 돌려보내고는 함께 떠나버린다. 여기서 보이는 파출소장이야말로 법을 기준으로 자신 역시 유죄가 될 수밖에 없기에, 법의 가치를 바탕으로 공무를 집행할 수 없는 법의 맹점 위에 서있는 존재이다. 그런 존재가 공주를 법을 통해 판명할 수 있는지 의심스럽다.

 

법은 분명히 이분법적으로 작동한다. 경중을 따진다고는 하지만, 그 전제는 유죄와 무죄라는 이분법의 논리가 성립되고 난 이후에나 가능하다. 따라서 법은 객관적인 증거를 바탕으로 적용된다고 말해지듯 그 적용의 대상이 객관적으로 법 앞에 설 수 있는지 혹은 법을 적용하는 자가 객관적일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을 동반한다. 그러나 더 본질적인 물음은 법의 작동 방식인 이분법적 인식이 우리 모든 삶에 적용 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근대적 인식의 체계가 삶을 이해하는데 있어 절대적인 가치로 적용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물음에 도달해야 할 것이다.

 

3. 벌거벗은 생명의 수영과 노래 사이

 

푸코는 근대적 인간은 생명 자체가 정치에 의해 문제시된다고 말했다. 이러한 그의 입장을 생명 정치라고 말할 때, 아감벤은 이 생명 정치를 보다 확장하여 벌거벗은 생명(호모 사케르 Homo Sacer)이라는 개념에 관심을 가진다. 벌거벗은 생명은 법과 같은 어떤 체계로부터 배제되었으면서도 동시에 포함되어 있는 존재이다. 따라서 체계의 기준에 따라 판단할 가치가 없다는 이유로 그들은 통제받게 된다. 아감벤은 이러한 예로, 아우슈비츠에 감금되었던 유태인이나, 인간 세계와 동물 세계의 사이에 존재했던 늑대 인간, 그리고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는 뇌사자를 언급한다.

 

공주가 처한 현실은 '벌거벗은 생명'이라는 개념을 통해 이해할 때 보다 명확하게 다가온다. 공주의 일은 법으로부터 배제되었다. 파출소장이 말했듯 법적 절차에 따르면, 공주는 아직 어떻게도 법적으로 규정되지 않은 존재로 남겨져 있다. 그것은 여전히 법이 대상을 이분법적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만약 법적 절차가 모두 끝난다면, 공주는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을까. 영화는 그것 또한 아니라고 말한다. 일단 법적인 과정에서 이미 문제가 발생했다. 주정뱅이에 가까운 공주의 아버지(유승목 분)는 공주도 모르게 탄원서에 사인을 받아 돈을 챙긴다. 거기다 조여사의 집을 나서는 공주에게 파출소장은 동윤이의 탄원서에 사인해줄 것을 부탁한다. 탄원서는 분명 이분법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있을 테지만, 그것이 돈으로 거래될 수 있는 상황에서 법의 객관성은 이미 훼손되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가능성은 사람 사는 세상의 차원에서 공주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공주는 평범한 삶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데, 무엇보다 조여사의 집에서 머물기 위해서 애를 쓴다. 조여사가 통화로 정신이 없을 때 계산원 일을 대신하는 장면이나, 조여사가 파출소장과 같이 있는 것을 알고 다시 집을 돌아 나오는 장면이 이를 잘 말해준다. 그런데 이후 공주가 찾은 곳이 수영장이다. 공주는 새로 전학 온 학교 교무실에서 돌고래로 만들어진 트로피를 보고 수영에 관심을 가진다. 수영복 판매원은 분명 누구나 물에 뜰 수 있다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문제라고 했지만, 공주에게는 물에서 숨을 쉬는 것 자체가 버거워 보인다. 모두가 물속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연습을 하는 동안 공주만 물장구를 치며 숨쉬기 연습을 하고 있는 장면은, 그녀가 평범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후에 공주 또한 수영 킥판을 잡고 앞으로 나아가기는 하지만, 여전히 불안하고 어색하다. 자신의 꿈이 풀장 완주라고 이야기하는 공주는 죽지 않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즉 수영은 그녀에게 어떤 의미에서 가장 생물학적인 삶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공주에게 수영이 생물학적인 삶이라면 노래는 그녀에게 인간적인 삶이라고 할 수 있다. 공주는 원래 피아노를 사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고 작곡도 하고 있었다. 영화의 시작에서 나오는 내레이션에서 알 수 있듯이 노래는 그녀에게 일종의 신이다. 사는데 힘을 주지만 현실에는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은희(정인선 분)의 관심을 사게 되는 이유도 공주의 뛰어난 노래 실력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이제 더 이상 노래를 할 수가 없다. 혼자 흥얼거리는 것이 아니라면, 노래는 들을 상대가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작곡을 하던 공주는 이미 자신이 만든 노래를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주고자 했었다. 따라서 작곡을 하고 노래를 하는, 즉 자신을 드러내야 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노래 부르기는 더 이상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사실 공주가 기획사에 낼 동영상을 은희와 함께 촬영한다는 점에서 공주의 꿈은 여전히 진행형일지 모른다. 그러나 아버지의 탄원서 소식을 접하고서 공주는 친구들이 만들어준 카페를 보며 자신이 더 이상 꿈을 실현할 수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인다. 하고 싶어도 못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공주는 하고 싶고 할 수 있어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자신의 꿈을 실현할 수 없다고 깨달은 순간 공주는 현실적 삶에서 완전히 배제된 존재가 되었다. , 더 이상 인간적으로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닌 것이다. 이러한 배제의 논리는 그녀가 겪은 사건을 그 누구에게도 떳떳하게 말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분명 공주 스스로가 주저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지만, 그녀는 이미 누구나 자연스러워 하는 일상 자체에 공포를 느끼고 있는 터다. 스테이플러 찍는 소리를 듣는 것도, 산부인과 병원에서 남자 의사를 마주하는 것도, 피씨방에서 고성과 욕설을 듣는 것도, 그리고 찜질방에서 낯선 아저씨와 있는 것도, 공주에게는 이제 너무나 낯선 일상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공주는 은희에게 왜 잘 해주는지 그 이유를 물어야 한다.

 

그렇다고 평범한 삶이 가능한 것도 아니다. 주위 사람들은 사건을 조용하게 처리하고 싶어서 공주를 어딘가에 숨겨놓은 것이나 진배없다. 기실 그래서 공주의 전학은 단순한 전학이 아니라 이주라고 해야 한다. 보호자도 없이 어떤 다른 목적을 위해 학교를 옮긴 것이 아니다. 어딘가에서 자신을 지우기 위해 그녀는 떠났고 또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조여사는 떠날 준비를 하면서는 불안해서 살 수 없다고 조언하지만, 공주의 이주는 처음부터 스스로에 의해 결정된 것이 아니다. 그리고 공주는 이제 또 다른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떠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공주가 떠나버린 엄마(성여진 분)를 만나고 나서 돌아오는 길에 화옥의 모습을 마주하는 장면은 그래서 매우 상징적이다. 화옥은 자신이 뱀파이어가 된 꿈을 꾸었다고 하면서 뱀파이어가 된 것이 자기 잘못은 아니지 않느냐고 말한다. 사람도 아니면서 사람의 형상으로 그들 사이에 있는 뱀파이어가 어쩌면 벌거벗은 존재로 있을 수밖에 없는 공주의 사정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단어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공주는 떠나버린 엄마의 평범한 일상에 분노를 느꼈을지 모른다. 자신이 이제 가질 수 없는 것을 그녀의 엄마는 공주 자신을 희생시키면서 얻었으니까 말이다.

 

4. 기피된 벌거벗은 생명과 공포의 제거

 

아감벤의 벌거벗은 생명에 관한 논의에서 중요한 지점은 생명 정치에 의해 모든 사람들이 점점 벌거벗은 생명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범죄자나 노숙자가 이미 벌거벗은 생명으로 존재하는 이들이라면, 그들을 보며 자신도 벌거벗은 생명이 될지 모른다는 불안을 안고 사는 사람들 또한 잠재적인 벌거벗은 생명이기 때문이다.

 

다시 화옥이 말했던 뱀파이어의 관한 꿈을 살펴볼 차례이다. 마치 동굴과 같은 터널의 인도로 걸어가는 순간, 화옥은 자신이 이상한 꿈을 꾼다며 이야기를 꺼낸다. 몸이 아프고, 송곳니가 자라있고, 음식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이 나며, 배가 고파도 먹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화옥이 고통스러운 이유는 뱀파이어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은 더 이상 인간의 그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자신의 잘못으로 뱀파이어가 된 것은 아니라고 해도, 사람들은 그런 뱀파이어를 피하고 거부한다는 사실이다. 자신도 뱀파이어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뱀파이어라는 존재로부터 멀어지려고 하는 것이다. 사실 영화에서는 공주가 무언가를 감추려고 하고 사람들을 의식하고 있기에, 공주는 뱀파이어와는 다르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 공주는 뱀파이어와 같이 사람들로부터 기피되고 있다.

 

기피의 시작은 공주가 서울로 강제 이주하게 되는 것부터이다. 원래 다니던 학교와 그 지역의 사람들은 공주가 어딘가로 사라지기를 바란다. 모두가 조용히 처리하고 있다며 "알려져서 좋을 게 없"다던 남자 교사의 말이 공주를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셈이다. 그런데 이러한 시선이 가해자들과 그들과 관련 있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 더 문제적이다.

 

친구들이 만들어준 카페를 보고 놀라서 화를 냈던 공주는, 이내 자신이 너무 심했다고 생각했는지 은희에게 전달할 쪽지를 작성한다. 그러나 그 쪽지를 은희에게 전달하기도 전에 공주를 쫓는 사람들이 나타나면서 공주는 은희에게 자신의 말을 전하지 못한다. 은희는 공주가 사라지고 문자를 보내 연락을 기다린다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공주의 과거를 알기 전까지이다. 공주의 과거를 알게 된 은희는 걸려오는 공주의 전화를 받지 않는다. 그 전화를 걸기 위해 공주는 더 큰 용기를 냈어야 했겠지만 말이다. 은희의 '내 사랑', '보고 싶어'와 같은 말은, 공주가 자신과 같은 범주의 인간으로서 존재할 때나 가능했던 것이다.

 

공주를 기피하는 것과 관련해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사건 현장을 목격한 동윤이 아버지가 동윤이만을 데리고 공주의 집을 나서는 대목이다. 여전히 한 구석에서 성행위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동윤이 아버지의 입장에서 그 모든 것은 기피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그 속에서 성폭행을 당했던 공주와 화옥은 그 순간 이미 의미 없는 존재로 전락했다. 동윤이 아버지에게 공주는 자신의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기에 가까이 지냈고 아들과도 친하던 친구지만, 사건 이후 공주는 동윤이의 새 삶을 위해 탄원서에 싸인을 해줄 수 있는 존재로서의 가치만 있는 것이다.

 

조여사의 집을 나설 때 공주는 파출소장에게 묻는다. 사과를 받는데 왜 자신은 도망가야 하느냐고. 이 물음에 관해 공주는 이미 그 이유를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신 또한 사건 이후 자살한 화옥의 연락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사건의 시작이 화옥의 무모한 선택에 의해 촉발되었고 공주와 화옥은 같은 처지에 있었다고 해도, 공주 또한 가장 친했던 친구가 내민 손을 뿌리친 것이었다. 그 결과가 좋지 못한 상황으로 이어졌지만, 공주의 선택을 비난할 수는 없다. 공주는 화옥과 같이 사건의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문제는 우리의 관점으로 되돌려야 한다. 공주는 화옥의 연락도 거절할 만큼 겁이 나고 사건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르다. 객관을 요구하는 법의 차원을 넘어서 피해자들을 다른 방식으로 바라볼 수 있는 입장에 서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원해서 피해자가 되지 않았기에, 우리는 그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안아줄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은 공주를 그렇게 대하지 못한다. 법의 판결이 어떻다고 해도 공주는 이미 더렵혀진 몸이며, 그 더렵혀짐이 자신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모르기 때문이다.

 

앞서 공포는 감정을 만드는 대상이 있고 불안은 대상이 없다고 말했다. 모든 것을 목격한 우리에게 공주의 공포가 다가온다. 그러나 영화 속 사람들은 공주가 느끼는 공포와 그 공포의 원인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오히려 공주의 불안을 읽고 그녀의 불안을 기피하려고 한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진실 없는 사실에 대한 포착이다. 공주가 찜질방에서 확인한 화옥에 관한 기사는 이를 가장 잘 보여준다. 기사는 집단 성폭행이 화옥을 자살하게 만들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사실 뒤에 진실은 아무도 집단 성폭행을 당한 화옥을 안아주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 사람들은 진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공포를 자신과 사회 속에서 제거하기 위해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불안 요소를 기피할 뿐이다.

 

벌거벗은 생명은 그 자체로 다른 개인들에게 남겨진 하나의 표식이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은 벌거벗은 생명이 자신과는 다르다는 인식을 통해 그들이 다른 형태의 통제를 받기 바란다. 그 통제를 통해 더 이상 벌거벗은 생명이 자신에게 위협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니 자신들과 벌거벗은 생명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그 인식의 체계에는 그 사이 어느 틈에 숨겨진 이분법의 진실을 목도할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왜 그들을 구분해야 하는지 왜 그들을 다른 방식으로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진실'대로의 본질적인 의문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공주로 대표되는 이들에 대한 이러한 현상이 지금 우리 현실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지만, 우리는 그 어디에서도 진실의 문을 열려고 하지 않는다.

 

5. 현실을 넘어 환상으로

 

영화 <한공주>에서 느껴지는 불편함은, 실상 이 영화가 취한 가장 최선의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는 내내 공주를 따라 그녀를 통해 전달되는 불편함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를 목격하게 만든다. 공주의 시선과 카메라의 시선이 접쳐진 지점에서 일상이 보이는 순간 관객들은 공주와 함께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이 시선의 일치가 영화가 가질 수 있는 장점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가장 공주와 가까운 곳에서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던 셈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집단 성폭행과 임신한 소녀의 자살이라는 자극적인 사실에만 초점을 맞추면서, 정작 벌거벗은 생명이 되어버린 이들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진실에 관심을 가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영화를 통해 공주의 입장에서 그녀가 보고 느끼는 것들을 공유하며 벌거벗은 생명으로서 겪게 되는 공주의 일상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이는 비슷한 소재의 영화 <돈 크라이 마미>(2012)가 딸을 성폭행한 학생들에게 복수하는 내용을 취하는 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 영화는 여전히 피해자와 가해자의 이분법적인 논리 안에서 영화를 전개한다. 영화에서 선악의 대립을 통해 갈등을 구성하는 방식이 가장 일반적이고 편안한 방식이라면, <한공주>는 이러한 방식을 벗어났다는 데 의미가 있다. <한공주> 또한 유사한 모티브에서 출발하기에, 가해자와 피해자는 존재한다. 하지만, 가해자는 후경화 되어있다. 오히려 영화는 평범하지만 어딘가 불편한 피해자의 일상을 계속 따라가고 있다. 그리고 그 어느 쯤에 이르면 가해자들에 대한 단순한 분노보다는 피해자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게 만든다.

 

영화 <한공주>는 공주의 내면을 통해 우리가 간과하고 있었던 현실을 보여주는 동시에, 환상을 이용해 현실을 넘어서려고도 한다. 가장 눈에 띄는 영화 속 환상은 공주가 일상에서 죽은 화옥을 대면하는 장면들이다. 공주가 아픈 몸으로 화장실에 가 있을 때나 연락을 끊고 살던 엄마를 만나고 돌아섰을 때, 그리고 지우고 싶은 사건을 떠올릴 때 화옥은 한결같이 공주와 마주하고 있다. 죽은 화옥은 공주의 내면이 불러온 환상이지만, 그 환상은 단순하지 않다. 어떨 때는 공주의 내면을 대신하기도 하고, 어떨 때는 공주를 위로하거나 공감하기도 한다. 이는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았던 그리고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을 환상 속에서나마 가능하게 만드는 방식이다.

 

영화는 결말에 이르러 현실과 환상을 이어준다. 공주는 친구들과 함께 부르던 아카펠라곡 '차오, 벨라, 차오 (Ciao, Bella, Ciao)'를 흥얼거리며 다리 위를 걷고 이내 버스 창에 비친 다리 난간 앞에 공주의 캐리어가 홀로 있다. 강을 바라보는 시선에 물거품이 세차게 일어나면 곧 허우적대는 공주가 보인다. 허우적대다가 화면에서 사라진 공주는 화옥처럼 자살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영화는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어디선가 나타난 공주가 친구들의 환호를 받으며 자유롭게 한강을 헤엄친다. 노래가 아닌 수영을 하면서 환호를 받는 공주. 자신이 수영을 열심히 하는 이유가 마음이 바뀌어 다시 시작해보고 싶어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라고 말했으니, 공주는 이제 진정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탈리아 유격대가 죽음을 앞에 두고 불렀다는 흥겨운 곡 '차오, 벨라, 차오', 사실 그 속에 저항의 의지도 함께 담고 있다. 그러니 공주의 새 출발이 현실에서 불가능했다고 해도, 우리 사회에 남겨주는 의지는 충분하다고 하겠다. 그래도 여전히 마음 한 구석은 아프다. -



<당선소감>

 

"서로 무언가를 주고받았던 모두에게 감사해야겠다

 

어렵게 글을 마무리하고 신문사에 보냈던 날, 오랜만에 친구들과 술을 마주했다. 같이 문학과 인생을 이야기했던 철없던 친구들. 자격지심일까 친구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 하는데, 나는 여전히 어딘가 부족한 기분이었다. 언제부터인가 가끔 어떤 이들은 내가 변했다고 말했다. 무척 사회적이던 내가 어쩜 그리도 혼자가 되어버렸냐고. 평범하지 않다는 건 가끔 그렇게 나를 답답하게 했다.

답답함이 커져갈 때쯤 공주를 보았던 것 같다. 취직을 하지 못하면, 돈을 벌지 못하면, 좋은 학교에 입학하거나 좋은 성적을 받지 못하면, 사는 것에 의미가 없는 것처럼 말하는 누군가의 시선이 불편하고 불안했던 그 때쯤이었다. 아마 내가 하고 있는 공부의 의미를 묻고 싶었을 지도 모르겠다.

아카데믹한 공부가 아닌 '사회적'인 글쓰기에 대한 욕망을 풀어낼 방법을 찾고 있었기 때문일까, 마지막까지 글을 쓰는 게 너무 힘들고 어려웠다. 사실 모두가 그랬을 텐데, 이렇게 소감을 쓰고 있으니 함께 응모했을 분들에게 부끄럽고 한편 죄송하다.

감사의 말을 전하자면, 끝도 없어 오히려 이름 하나씩 기록하지 못함이 죄송하다. 그러니 서로 기쁨이든 상처든 무언가를 주고받았던 모두에게 감사해야겠다. 그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내가 없을 테니. 무엇보다 공부를 업으로 삼게 해주신 지도교수님과 힘들다는 유혹을 이겨내게 해준 아내에게 좀 더 감사하다고 해야겠다.

 

그리고 이 글을 통해 새로운 기회를 주신 심사위원님들과 부산일보에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끝으로 평범하지 않은 인생을 이제까지 응원해준 나의 부모님에게 제일 감사한다.

 


이승현/1979년 대구 출생. 경북대 국어국문학과 박사 수료. 대학 강사

 


<심사평>

 

'벌거벗은 생명'으로 해석한 '한공주'에 주목

 

올해 평론부문 응모편수는 문학평론 4, 영화평론 14편으로 전체 18편이었다. 지난해보다 응모기간이 줄어 그런지 응모편수가 좀 줄었다. 영화평론이 훨씬 많은 것은 영화에 대한 관심이 폭주하는 시대 분위기와 함께 영화의 도시 부산에 있는 신문사에서 시행하는 신춘문예라 그런 것으로 진단한다.

현학적이거나 평이한 해설인 평론이 다수였다. 그 가운데, 이런 경향을 넘어선 평론 5편을 주목하였다. '말의 향연; 시적 언어에 대한 성찰- 김언론'은 김언 시의 특성을 언어와 연관하여 조명하고 있는 평론인데, 일정한 수준의 해설에 그친 아쉬움이 있었다. 파국을 향해 질주하는 돈키호테들의 유쾌한 향연- 천명관의 '고래''나의 삼촌 브루스 리'는 이야기꾼 천명관의 이 두 소설과 소설 속 인물을 돈키호테의 후예라는 점으로 조명하려 했으나, 서두가 장황하고 본문 속에 제대로 녹이지 못했다.

'그들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영화 <카트>의 여성주체화와 그 재현들''권리를 가질 권리'의 개념으로 해석한 부분이 눈에 띄었으나, 전체적으로 마트 비정규직 여성노동자의 문제를 재현의 틀로 살펴보는 데 그친 아쉬움이 있었다. '기억의 남루함과 부재를 견디는 방식- 홍상수의 <자유의 언덕>을 중심으로'는 홍상수의 최신작 <자유의 언덕>에 대한 해석의 의욕이 흥미로웠으나, 소제목에 상응하는 내용을 충실히 갖추지 못했다.

 

'우리 사회의 벌거벗은 생명에 관하여- 영화 <한공주>를 중심으로'는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벌거벗은 생명) 개념으로 <한공주>를 해석하려 한 점이 돋보였고 결과적으로 <한공주>에 대한 확장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좀더 구체화하지 못한 아쉬움은 없지 않았으나, 신춘문예는 완성이 아니라 출발이라는 점에서 '당선'으로 밀기로 하였다. 정진이 있길 바란다.

 

심사위원 : 고현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