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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균열하는 주체, 그들이 살아가는 방법 / 임동휘

 

1. 현상-그림자들


근래 노동시의 행보가 그 어느 때보다 묵직한 울림을 안겨주고 있다. 2000년대를 기점으로 이전까지의 노동시가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수단으로 집단적 저항과 고발을 골자로 했다면, 지금은 개인의 무의식에까지 침투한 자본주의의 역습으로 주체는 “어떤 빼어난 은유와 상징으로도”(송경동,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꿀잠』) 형상화할 수 없는 절대적 몰락이라는 참담한 현실을 미학적 감수성으로 재봉인하고 있다는 점이다.[1] 이때 ‘개인’은 더욱 견고해진 사물화로 경사될 수밖에 없는데 이는 산업자본이 주도해 온 오랜 소비주의의 경향과 신자유주의적 자본지배에 의한 산업 경제구조 속으로 재편된 ‘균열하는 주체’[2]로 이해되는 개인이라 하겠다.


근대 산업사회가 출범한 이후부터 인간의 가치는 노동 시장의 가치에 의해서 결정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이 이성적 자아를 실현시키는 수단으로 삼아 온 노동행위가 ‘자기 보존’이라는 궁극의 목적을 기반으로 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실물 경제시대에 이르러 자기 보존이라는 내적 가치보다는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고 말았다는 점이다. 이는 오늘날의 노동이 그 형태와 범위, 기능과 성격 등에서 세분화, 첨단화, 전문화라는 산업경제구조의 새로운 패러다임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3] 다시 말해 정보화시대를 거치면서 첨단의 소프트웨어를 장착한 자동화 기계들이 대거 노동현장을 차지함으로써 과거 창조적이고 자발적이었던 노동에서 훼손하고 착취하는 ‘피로(疲勞)한 노동’으로 변질되었다는 점에서 노동현실의 심각성은 더욱 뚜렷해진다.[4] 이와 같은 현실에서 노동시의 역할 또한 노동현장에서 소외된 인간노동의 공동체적 가치의 실현을 위한 사회적 관계를 새롭게 투사하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 방법론 가운데 하나가 ‘존재’에 대한 치열한 탐색이라고 했을 때 체념과 굴종의 시간을 강제하는 후기 산업자본주의의 폭압에도 끊임없는 자기긍정으로 암울한 현실을 돌파해 가는 서정적 주체들의 목소리는 그래서 더욱 커다란 울림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2. 분열하는 주체들


자본주의는 단순히 실제적인 사회 영역을 구획하는 범주가 아니라 사회 공간 전체를 구조화하는 형식으로 문자 그대로 생산 양식이다. 자본주의의 힘은 여기에 있다. 이때 자본주의는 자체로 근본적인 적대와 구조적인 불균형을 회피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스스로를 재생산한다. 현대 소비사회가 조장하는 ‘유행’이나 ‘패션’이라는 속성이 산업자본주의의 대표성을 담보하는 것은 이 같은 이유 때문이다. 그 점에서 자본주의는 존재론적으로 ‘개방’되어 있다고 하겠다. 하지만 이때의 개방이란 더욱 은폐되고 은밀하게 잠복한 자본주의의 또 다른 얼굴이며, 그 그늘지고 음습한 자리에 마침내 비루한 ‘개인’이 자리하는 것이다. 이들은 산업 자본주의사회에서 대중으로, 다중으로, 시민으로, 소비자로 호명되는 한편, 그 경계만큼이나 불확실한 정체성으로 파편화되고 단자화된 개인으로 존재할 뿐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개인’은 어떤 모습으로 자본에 편입되어 있는가?


잔업이 끝나고 처음 만난 기계와 잠을 잤다

기계의 몸은 수천개의 부품들로 이뤄진 성감대를 갖고 있었다

기계가 나를 핥아주었다, 나도 기계를 핥아먹었다, 쇳가루가 혀에 묻어서 참지 못하고 뱉어냈다,

기계가 나에게 야만스럽게 사정을 한다고, 볼트와 너트를 조여달라고 했다

공장 후문에 모인 소녀들

붉은 떡볶이를 자주 사먹는 것은 뜨거운 눈물이 흐를까 싶어서이다

아니다, 새로 들어온 기계와 사귀면서부터이다

                                                           ―이기인, 「흰 벽」, 부분 


공장과 기계와 잔업, 그리고 소녀.

이 키워드는 일상을 주도해 가는 표면일 뿐 정작 자본의 세계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개인(소녀)들을 조종하고 유린하는 자본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세상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기인은 그것을 자본과 교환되는 ‘강제된 섹스’로 함축한다. 이를테면 평범한 일상을 구조하던 공장, 기계, 잔업, 소녀라는 키워드에서 “뜨거운 눈물”이 환기하는 것은 화장실 문에 숨어 있던 오래된 ‘낙서’다. 이때 낙서는 평범한 일상에서 이탈하여 ‘비일상적’ 개인으로 전락한 소녀인 동시에 자본이 강제하는 현실에 대한 폭로로 기능한다. 그러므로 “가려운 벽을 긁었던 소녀의 머리핀은 은밀한 필기구”라는 은유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 개인들이야말로 무자비한 자본의 권력으로부터 “소리 없이 우는 법을”(「소녀의 배」) 배우는, “껍질을 벗기지 않아도 먹을 수 있는 간식(間食)”(「솜사탕」)이며, “처녀막에 남겨진 천공”(「상처 디자이너」)이며, “안 아프게 살점만 떼어”(「소녀의 거울」)갈 것을 호소하는 자본지배구조의 살풍경한 현실을 반영하는 거울인 셈이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청춘의 꿈은 있다. “두세 살 많거나 동갑내기라도 좋은”(「열일곱 열여덟 바늘」) 사람과의 결혼이 그것인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세상 밖 사람”이라는 조건이다. 이 같은 인식은 “공장 밖만 생각하면 식은땀 나는 악몽”[5]이라고 말하는 황규관의 시선과는 사뭇 다르다. 황규관의 악몽이 ‘공장’이라는 닫힌 세계와 자본주의라는 열린 관계에서 비롯된 역설이라면, 이기인의 소녀들은 속절없이 ‘걸레 되기’를 강요당하는 동안 신자유주의적 자본지배 구조에 길들여진 현실인식이 ‘바깥세상’을 향한 동경에서 비롯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그녀들의 ‘무분별한 섹스’[6]가 ‘세상 밖’에 존재하는 사람 찾기의 방법인 동시에 ‘신분 세탁’의 한 방편일지도 모른다는 혐의를 두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한편, 김사인에게 있어서 ‘개인’은 ‘밤’으로 상징되는 비참한 현실을 고요한 응시와 고뇌로 도하해 간다. ‘가장’(家長)의 자리로 분류되는 이 개인의 자화상은 “하루 세 끼니// 피 뜨거운 나이에// 처자식 입 속에 밥을 넣기 위하여// 일해야 하는 것은 외로운 일// 몸 팔아야 하는 것은 막막한 일”(「한 사내」, 『밤에 쓰는 편지』)이라는 돌파구 없는 현실과 조응한다. 이 가장들은 정처(定處) 없이 외지를 떠도는 가운데 “몸만 상하고/ 돈은 마음같이 모이질 않는”[7], 바꿔서 말하면 “며칠 후면 남이 누울 방바닥”(「지상의 방 한 칸」, 『밤에 쓰는 편지』)에 드러누워 불면의 밤을 이어가는 심사일 것이며, “세상 밖 사람”을 쫓는 소녀들의 몸부림과 다르지 않다. 송경동이 “12인승 봉고차에 닭장차 안 죄수들처럼 빼곡하게 들어앉아 무표정하게 창밖을 보는 날일을 마친 용역 잡부들”[8]이라고 했을 때, 그 용역 잡부들의 삶이란 “초라한 몸 가릴 방 한 칸”을 찾아 헤매는 김사인의 ‘개인’에 다름 아니다. 더구나 그곳에는 “육십이 훨 넘은 노인네부터/ 서른 초반의 사내/ 이국의 푸른 눈동자까지” 인종과 연령의 구별이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을 연대하게 하는 것이 자본이라는 사실이다.


개개인의 낱낱을 숙주로 팽창하고 변종을 거듭하는 신자본주의의 얼굴에서 주체는 불행하게도 “집안 걱정 아이 걱정 일 걱정 하다보면/ 우리는 개인이 아니었는데/ 개인이 되고 말았다”[9]는 서글픈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한때 “변혁의 주인”으로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사정을 알아주는” 뜨거운 연대감으로 존재했던 개인이지만 소비자본이 구축하는 잉여의 시대에서 “생활을 핑계로 어느새/ 존재가 바싹바싹 말라가는”[10] 현대의 비루먹은 자화상에 다름 아니다. 그런즉 “웃고 악수하고 돌아선 뒤에/ 누군가의 서랍에 처박힌 명함 한 장에 지나지 않”는, “실체 없는 유령으로 살아가”(송경동, 「묘비명」, 『태풍』)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맞는 ‘죽음’ 또한 삶의 모습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그 해 여름은 무더웠다

(중략)

고깃값 계산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거적대기에 싸인 영철이가

살 냄새 땀 냄새를 풀어놓으며

썩어가던 장마철 내내

추석 상여금 얘기와

여자 얘기만 했을 뿐

아무도 영철이의 죽음을 그리워하지 않았다

                                                      ―최종천, 「그 해 여름」, 부분


죽은 이는 죽었으나 산 이는 또 살았으므로

불을 피운다 동짓달 한복판

(중략)

차가운 땅에 그대를 혼자 묻고

그 곁에서 불을 피우고

그 곁에서 바람에 옷깃 여미고

용서하라

우리만 산을 내려가는 것을

우리만 돌아가는 것을

                                           ―김사인, 「그를 버리다」, 『가만히』, 부분


인용한 두 편의 시, 「그 해 여름」이나 「그를 버리다」는 죽음조차 아귀 같은 삶 속에서 온전하게 애도되기 쉽지 않음을 보여준다. 백무산의 언술대로라면 “노동이 다 빠져나갈 때”[11]가 죽음의 상태다. 하여 「그 해 여름」이 자본에 압사당한 죽음을 직접적이고도 사실적으로 드러냈다면, 「그를 버리다」는 평범한 일상의 한 부분을 스케치하듯 담담하게 죽음을 묘사한다. 그래서 시는 무표정하게 삶을 통제해 가는 자본주의의 민낯 같아서 겉으로는 어떤 이념이나 갈등조차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산 이는 또 살아가야 했으므로”가 상정하는 개별적인 삶의 양상에 이르러서야 “우리만 산을 내려가”야 하는 숙명적 현실과 조우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용서하라”는 말은 여전히 정처 없는 삶에서 마주치게 될 굴종과 체념의 소치라 하겠다.


자본이 인격인 세상에서 자본은 주체를 대신한다. 이 식상한 언표처럼 한 노동자의 죽음이란 그야말로 “폐기처분 품목 보고서”에 작성되는 “박살난 안전모”이거나 “산소 게이지” 따위와 다를 바 없는 물적(物的) 존재일 뿐이다. 그럼에도 “얼빠진 노동조합이나/ 제 밥줄에 목맨 회사 간부들과 싸우는 것이/ 마치 아귀다툼 같아서 떠나온 곳에게/ 무릎을 꿇”(황규관, 「우체국을 가며」, 『패배』)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란 “나는 이렇게 늘 패배하며 산다”는 체념과 “생(生)의 서랍을 샅샅이 뒤져” 이력서를 꾸려야 하는 굴종의 시간으로 대체되기 마련이다.


3. ‘생존’이라는 역설


유홍준의 「다방에 관한 보고서」(『나는, 웃는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주체가 어떻게 물화(物化)되어 가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현실의 전면에 이기인의 ‘소녀’들이 있음은 물론이다.


우리나라 다방은 18,536개이다. (중략) 지금 3급 카쎈터 더러운 쏘파에서 배달 나온 다방 레지의 젖을 만지는 놈은 2,304명 팁을 받으려고 치마를 걷어올린 년은 576명이다 시간당 3만원하는 티켓을 흥정하는 자가 483명 여관까지 가는 2차를 행차 중인 자가 885명이다 (중략) 나들이 열 번으로 금목걸이를 해 건 공주가 4,747명 엄마 별일 없죠? 네에 저도 직장 잘 다니고 있어요 그럼요 걱정 마세요 타락천사가 1,906명 오늘 보건소 가야 하는 백설공주가 5,401명이다 지금 공주의 썩은 가랑이를 들여다보는 보건의는 152명 오늘 은퇴하는 왕비가 84명 새로 입궐하는 궁녀가 157명이다 정말로 굉장한, 이 나라의 행사다

                                              ―유홍준, 「다방에 관한 보고서」, 부분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판단은 결코 가볍지도 않을뿐더러 더욱 직접적이고도 첨예해진 자본의 속성을 떠나서는 설명될 수가 없다. 그것은 ‘성’(性)의 매수라는 특수성 때문인데 자본주의가 ‘교환’이라는 해당 조건을 충족시킴으로 성립한다고 했을 때 화폐로 교환되는 성은 이미 육체의 상품화, 즉 물화된 주체로써 ‘사물’에 다름 아니다. 그런 만큼 “나의 꿀단지를 더듬으면서, 긴 겨울잠을 자자고 옛날 옛적의 이야기를/ 꺼낸 곰이 얼마나 많은가”(이기인, 「꿀단지」)로 구체화되는 자본의 폭력성은 인격이나 성마저 질량화, 계량화 하는 화폐경제 사회에서 이미 그 상상을 불허한다.


이른바 “퇴출된 노동”(백무산, 「예배를 드리러」)으로 분류되는 「다방에 관한 보고서」의 소녀들은 어쩌면 소비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계급의 최하층을 담당하면서도 목소리조차 낼 수 없는 사각지대에 매몰되어 있는 존재다. 노동행위를 지극히 간명하게 정의할 수 있다면 ‘밥 버는 일’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 과정에서 ‘구김’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그러니까 일요일 밤마다 쭈그려앉아 하는 다림질은/ 지난 시간의 굴욕을 황급히 손사래치며/ 반듯하게, 아무렇지 않게 펴는 일”(황규관, 「다림질」, 『패배』)로 치환된다. 그렇다면 다방의 소녀들 역시 “새처럼 쓰린 걸 물고 와서/ 아이들 앞에 내놓는” 달디 단 노동일 것은 분명하다. 문제는 이 소녀들의 행위를 노동으로 규정지을 사회적 합의나 암묵적 동의조차 없다는 사실이다. 결국 이 개인들은 “자연사박물관 유리상자 안에”(백무산, 「자연사박물관」) 담긴 패배한 자본주의의 얼굴인 것은 분명하다.


어느 사회에서나 자본권력은 먹이사슬의 최상위를 차지해왔다. 자본권력이 주도하는 달콤하고도 은밀한 강제성은 끊임없이 새로운 욕망의 가능성을 부추긴다. 이때 주체는 어쩔 수 없는 내적욕망과 자기 체념을 동일시하는 것으로 부당한 현실에 굴복하고 만다. 바로 그 순간, 자본권력의 강제성은 후퇴하고 소비주체의 개인만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진정한 목적이 소비를 위하여 지속적인 노동을 필요로 하는 것이라고 했을 때 이미 새로운 소비현실에 길들여진 개인은 자본의 달콤한 유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게 물화된 주체는 티켓다방 종사원, 노래방 도우미, 술집 접대부, 창녀 등 자발적 매춘으로 성립되는 자본주의의 추악한 뒷골목을 전전하게 되는 것이다. 이기인의 소녀에게서 일정정도 ‘자발적 섹스’라는 의혹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은 이 같은 경사된 욕망에 관한 경계 때문일 것이다.


반면, 이런 모습은 어떨까?

북서울오토바이 집에는 빵꾸를 떼우는 스무살이 있다

피자배달보다 오토바이가 좋아서 왔다는 스무살이 있다

노랑머리 애인이 가끔 놀러 온다

 

열 받으면 그녀는 툴툴거리는 낡은 선풍기를 발로

걷어차버리기도 하고 쭈그려앉아 제 입술로 불붙인

담배를 물려주기도 하는데,

 

그녀가 예뻐 보일 때는

땀 많은 애인 머리칼을 걷어올려주는 그 찰나

 

기름투성이 스무살이 타이어를 주물거리다

불에 구운 풋콩처럼 검게 익은 손가락으로

그녀 볼에 기름 곤지를 찍을 찰나

 

그 키득대고 깔깔대는 소리가 덜 여문

덜 여문 수작인데,

여기는 바람 한점 없는 칠월의 기름밭

보는 사람만 젖는 소나기 내린다

                                                   ―문동만, 「마들의 소나기」, 전문

   

욕망과 감각의 시대를 횡단하는 스무 살. 그저 ‘예쁘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이들은 “휴일 없이/ 3교대”로 돌아가는 종이공장(유홍준, 「문맹」, 『나는, 웃는다』)에서 “더욱 완전한 백지에 이르고자” “문명에서-문맹으로” 추락을 거듭하는 제지공들일 것이며, “큰아들은 백령도 가서 고기 잡고 작은 아들은 사람 때려 징역에 들락날락/ 더 썩을 속도 없는 유씨네”의 아들들일 것이며, “데모쟁이 대학생 아들놈 덕에 십 년은 땡겨 파싹 늙은 약방집 내외”(김사인, 「내 고향동네」, 『가만히』)가 서로 얼굴을 맞대고 살아가는 고향의 이력을 가지고 있기 십상이다.


우리가 ‘노동’이라고 했을 때 아무래도 집단이나 연대가 연상되는 것은 그 성격이 내포하는 공동체적 삶의 근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가치조차 무의미해진 오늘날은 “내 몸을 구석구석 착취해달라는”(황규관, 「비창」, 『패배』) 기형적인 노동구조 때문일 것이다. 삶의 바닥까지 유린해 마지않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지배의 세계에서 개인은 영혼마저 수탈당하는 치욕조차 “모퉁이는 어디에나 있”(김사인, 「풍선」, 『어린 당나귀 곁에서』)는 것으로 자위함으로써 당면한 모순된 현실마저 정당화시키고 만다. 이 개인들의 배후에 “더 일하면 모든 게 되돌려질 것처럼 내내 믿어왔는데/ 이제는 밥만 먹게 해달라고 울어야” 하는 비극적 현실이 자리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이처럼 “인간들의 약속이란 고작 이 한 근의 무게가 모자란다고 보태거나 넘친다고 떼어내는”(유홍준, 「저울의 귀환」, 『나는, 웃는다』) 것으로 종속되고 마는 시대에서 주체의 속성과 존재방식은 과거 민중의 시대와는 많이 달라진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우리 각자가 다른 어느 누구로도 대체될 수 없다는 점이야말로 우리가 사는 방식이 다른 사람에 의해 강요될 수 없음을 증명하기 때문”[12]이라는 짐멜의 통찰이 명징하게 드러나는 「마들의 소나기」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자본주의의 역설과 마주치게 된다.

 

두 눈 때꾼해지는 야근을 마치고

공단 식당 허름한 방석 위에 앉아 받는

희멀건 밀양돼지국밥

한 뚝배기

 

(중략)

 

이것 봐,

내가 만든 제품에

그대가 찍어준 합격 도장처럼

여기, 푸른 도장이 찍힌 내 숟가락 위의 비곗덩어리 한 점!

                                        ―유홍준, 「푸른 도장」, 『나는, 웃는다』 부분

 

예로부터 노동은 ‘밥에 관한 경전’이라 해도 좋을 만큼 우리 삶에 직접적이다. 인용한 시에서라면 고된 노동으로 은유되는 “제품 합격 도장”을 비곗덩어리에 찍힌 “푸른 도장”으로 희화화함으로써 “내 꿈은 은행빚을 탕감받는 게 아니라/ 이 비루함을 더 큰 비루함으로 완성하는 것,/ 그게 혼자 끙끙대는 혁명”(황규관, 「쇳소리」, 『패배』)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러한 삶의 긍정성이야말로 ‘밥’이라고 말할 때 그 밥이 품은 “그냥 뜨거운”(송경동, 「밥」, 『태풍』) 것의 의미가 된다. 그러므로 “밥이, 그를 먹는다”(유홍준, 「지하급식소」, 『나는, 웃는다』)는 반어는 더욱 강력해진 자본의 세계에서 물질과 주체의 전도된 현상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되겠다. 이 과정에서 “일용직 노동자의 얼굴엔 일용직 노동자의 혈서가/ 백화점 점원의 얼굴엔 백화점 점원의 혈서가”(유홍준, 「혈서」, 『저녁의 슬하』) 쓰일 수밖에 없고 “모래밥도 먹어본 사람만이 먹는”(유홍준, 「모래밥」, 『저녁의 슬하』), 노동이 차별화하는 계급성을 부인할 수 없다.

 

내가 다니는 종이공장

제지기계는

베어링을 돌린다

스님보다도 오래, 수녀님보다도 더 끈질기게

기계는 기계의 염주 베어링을 돌리며 용맹정진을 한다

소음이라 부르는 기계의 염불 소음송(騷音頌)을 외우며

오직 한 길 생산도(生産道)를 닦는다

               ―유홍준, 「기계는 기계의 염주 베어링을 돌린다」, 『나는, 웃는다』 부분

 

종교마저도 자본권력에 종속되었다는 혐의를 지울 수 없는 시대에 얼핏, 종교의 가증스런 두 얼굴에 대한 풍자로 읽혀지는 위의 시는 용맹정진이나 소음송, 생산도, 기계신과 같은 직접적인 의미어휘 뿐만 아니라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는 내가 믿는 건 이 공장 이 기계의 크신 능력뿐,”이라는 현실풍자를 통해서 극대화되어 나타난다. “일용할 양식 내리시는 기계신”이 주관하는 세계에서 한낱 개인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騷音人”(유홍준, 「소음은, 나의 노래」, 『나는, 웃는다』)으로 체질이 바뀌는 것도 그 때문이다.

 

「다방에 관한 보고서」의 속편이라고 할 수 있는 「오토바이와 쟁반」에서도 이와 유사한 페이소스가 담보되는 것은 “저 보자기 속의/ 커피 잔,/ 온갖 개/ 잡놈이 핥고 빤/ 쟁반 든 여자”가 “가슴을 열고 허벅지를 열고” “더 이상은 어쩔 수가 없는, 아슬아슬한 미니스커트로, 뽕브라로, 쫄 만큼 쫄아버린 쫄티로 방뎅이를 돌리며 들어가는” 곳곳마다 “기름손이, 가위손이, 전자손이” 주무른 것은 여자의 육체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어두컴컴한 속살인 것이다. 그런 만큼 “보쉬카쎈터, 한양이발관, 00텔레콤”으로 지칭되는 그곳이 바로 우리들의 자화상인 것은 틀림이 없다.

 

본디 풍자와 해학을 품은 골계미는 지배계층을 향한 날선 비판을 가치로 존재해 왔다. 유홍준의 시에서 베어링과 묵주와 염주로 대표되는 세계란 개인의 정체성마저 “서두르는 사람”(문동만, 「물에 에인 날들」)으로, “성실한 인간”으로, “騷音人”으로 규정짓고 만다. 문동만의 관점에서라면 곡선이라는 자연적 순환 질서를 부정하거나 왜곡할 때라야 존재가 증명된다는 점에서 「물에 에인 날들」은 “포경수술 한 아이처럼 한쪽으로 기우뚱”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이며, “욕을 먹어야 밥이 나오는” 세상을 향한 지독한 포즈가 되는 셈이다.


4. 주체, 그리고 태도


오늘날의 노동이 더욱 정밀해지고 기계화된 자본지배의 결과물이라고 했을 때 노동 주체의 자리는 더 한층 외지고 습기 찬 바닥일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런 이유로 노동시는 분열하는 주체와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물화된 욕망과 집단이나 연대가 아닌 개인의 문제로 전락해버린 노동현실에 대하여 보다 냉정한 인식과 폭넓은 접근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백무산이 “경계는 어떤 지점이 아니라 태도”[13]가 되어야 한다는 바로 그곳이 오늘날 노동시의 자리가 되어야 하는 것은 그래서 마땅하다. 그리하여 열린 ‘바깥’에서 닫힌 ‘내부’를 돌아볼 수 있을 때 비로소 ‘인격적 노동’이 귀환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 그 길이 “앞선 발자국 하나 없이 내 흔적을 남겨서”(문동만, 「아직은 저항의 나이」) 가야하는 곳일지라도 “그걸 웅성웅성 해보자는 것”(황규관, 「붉은 꽃」, 『태풍』)이며, “밥을 먹었으면 밥이 될 줄도”(황규관, 「밥」, 『태풍』) 아는, 백무산의 방식이라면 한마디로 “염치”(「감수성」)쯤 될 것이다.


그의 시집, 『그 모든 가장자리』는 그야말로 ‘가장자리’에 있는 것들에 대한 시선으로 뜨겁다. 그 대표적 장소가 ‘시골 장거리’인 것은 그곳이야말로 ‘도시적 감수성’이나 ‘윤리적 감수성’으로 포장되지 않은, “일용할 양식들이 흙 묻은 발을 막 털고 나온 곳”(「예배를 드리러」)이기 때문이다. 감수성의 사전적 의미가 “외부세계의 자극을 받아들이고 느끼는 성질”이라고 했을 때 “꽃을 피게 하는 일과 마음의 짐 한줌 덜어주는 일/ 그보다 더 잘난 일 세상에 뭐길래 나는 닳고 닳도록/ 풀 한포기 나지 않는 길을 끌고 다녔을까”(「바람과 다투다」)라는 내부를 향한 시선은 “경계”를 규정짓는 그의 의식을 고스란히 관통한다. 이것이 송경동이 말하는 “이제는 싸움 자체가 두려워졌다”(「싸움의 끝」, 『태풍』)라는 의미와 상통하는 것이라면 싸움을 시작한 이후 “열세 살 적 강물이 보이지 않는다”는 고백에서 알 수 있듯이 자본지배가 횡행하는 세계에서 “알고도 피해버린 너의 굴욕/ 너의 비겁”(송경동, 「도살장은 무죄다」, 『사소한』)에 맞서 싸우다 낯설게 변해버린 “내 오래된 상징”(문동만, 「낯설지 마라」)을 회복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들 곁에서 무엇보다 그리운 건 인간”(「그 모든 가장자리를」)이라는 각성이야말로 “나는 다 태어나지 않았다” “대지는 아직 나를 낳고 있는 중”(「뱀」)이라는 자기 검증인 셈이다.


이 아픈 검증을 문동만은 사람의 ‘등’에서 찾는다.

 

우리는 서로 등을 밀어주었다

묵묵한 등을 보면 알 수 있다

등이 인간의 맨얼굴이라는 걸

 

사람들의 몸에서 이끼 냄새가 났다

아마도 인간의 첫 수원지(水源池)에서 자라난

건강한 이끼일 것이다

                                                              ―문동만, 「등」, 부분

 

 “첫 수원지”와 같은 순수.

그것은 곧 목적이 무엇이었든 폭력으로부터 물러섰을 때라야만 가질 수 있는 “열세 살 적의 강물”이거나 “지상에서 가장 큰 경외가/ 당신의 발을 씻겨주는 일”(황규관, 「발을 씻으며」, 『패배』)임을 깨닫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러한 변화는 비단 몇몇 시인에게서 감지되기보다는 노동시 전반에 걸쳐 다양한 목소리로 나타난다. 그러나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사는 게 어려운 날엔 늘 벌금이나 세금이 나왔”(문동만, 「낙화」)다는 진술처럼 신자유주의적 자본지배가 획책하는 삶의 구조가 강팔라질 때마다 열람되는 ‘낭만적 자연으로의 회귀’가 그렇다. 다시 말하면 “패대기당한 듯 사는 게 비리기만 할 때면”(「홍어생각」) 본능적으로 신화적 삶에 몸을 기대는 것은 인간의 오랜 습성이다. 신화가 때로 고향으로, 추억으로, 꿈으로 몸을 부리는 것은 그런 기대감 때문이다. 이때 존재는 “눈물겨운 것이 어디 술뿐일까만/ 그래도 한 잔”(김사인, 「빈 방」, 『가만히』) 하면서 시름을 달래다가도 “자면서도 입 벌린 것들”(「자면서도 입 벌린 것들」) 생각에 “꽃게처럼 비척거리며 집을 찾”(「서해 2」)아 들곤 한다. 여기서 ‘술’과 ‘입 벌린 것들’로 환기되는 ‘등’은 물화된 세계에서 존재의 본래자리를 회복해 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살아가는 동안 마주칠 수밖에 없는 “오종종한 나날들”(김사인 「전주」, 『가만히』)이 지피는 고된 속내에 문동만의 ‘등’이 있다.


그들의 몸은 그들이 만드는 공처럼 오그라들었다

쪽창으로 본드 냄새 풍기는 햇살이 들면 니코틴으로 쌓은

치석을 보이며 “야야 사는 게 다 이렇지 어떻간?”

나는 그때 도넛이 되어 올라가는 담배연기의 허무와

묵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공을 꿰매지 않아도 되는

세계를 다 안다고 겁 없이 말했던 것이다

그들의 등을 공처럼 차버리면 공처럼 굴러갈까

그들은 평생을 싸우는 사람들의 바깥에서 살았고

살기 위해 비교적 비겁했다 둥근 품새로 견뎠다

나는 그들의 바깥에 살았던가 그래서 잘살았던가

                                                     ―문동만, 「직립의 뼈들」, 부분

 

“계단도 옵션인양 걷는 시대”(「수직의 배반자」)에서 ‘등’을 기억하는 일이란 쉽지 않다. 더구나 “인간의 맨얼굴”이라는 “묵묵한 등”이 환기하는 것이 고된 노동의 결과로 “휜 등뼈”라면, 그것은 백무산이 말하는 “경계”와 맞닿는다. 바꾸어 말하면 “담배연기의 허무와 묵음”이 어떤 ‘지점’이라고 했을 때 굽은 등속에 잠복한 “직립의 뼈들”을 찾아가는 여정은 그 ‘태도’일 것이 틀림없다.


“강물처럼 출렁거려야 앞으로 갈 수 있”(백무산, 「굽이굽이」)는 삶이란 늘 고달프기 마련이다. 때문에 ‘삶’ 앞에서 인간은 누구나 조금씩 비겁해질 수밖에 없으며 그 주체가 “휜 등뼈”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말하자면 “발바닥으로 부르는 노동가, 따라 부르기 버거워/ 어떤 음계에서 나는 미끄러지고”(「어떤 음계에서」) 마는 삶의 현실성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마다 훼손된 가치를 다시금 붙잡아 세우는 일이 “다림질”이고 보면 “한주일 동안 접혀질 구김을 미리 길들이기 위해/ 남몰래 치르는 비겁한 의식”(황규관, 「다림질」, 『패배』)이라는 하소연은 “나는 그들의 바깥에 살았던가 그래서 잘살았던가” 돌아보는 시간으로 귀결된다. 그리하여 비루한 개인일망정 “산다는 것”은 “주름이 참 곱다”(송경동, 「주름」, 『사소한』)라는 말의 참된 의미를 알아가는 ‘인간의 시간’으로 복원 되는 것이다.


노동의 종말을 예고하는 시대에서 모름지기 노동시가 한걸음 더 진화해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계와 인간, 물질과 비물질노동이 혼재되어 있는 오늘날의 노동생태계에서 재구조화될 수밖에 없는 노동과 노동자에 대한 정밀한 분석과 노력이 절실한 지금, 노동시는 여전히 모든 삶의 ‘가장자리’를 탐색해 가는 전위를 감당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것은 곧 신자유주의적 자본지배가 양산한 ‘기계 노동’이라는 비인격적 노동현장에서 인간 노동의 가치를 회복해 가는 방법일 것이며, 아울러 노동 시장에서 새롭게 복원되어야 할 인간의 가치와 사회적 관계를 모색해 나가는 디딤돌이 될 것이 분명하다. 그랬을 때 비로소 “불에 구운 풋콩처럼 검게 익은” “스무 살” 노동이 “직립한 뼈들을” 찾아가는 확고한 이정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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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글의 텍스트는 유홍준, 『나는, 웃는다』(창비, 2006), 『저녁의 슬하』 (창비, 2011), 황규관, 『패배는 나의 힘』 (창비, 2007), 『태풍을 기다리는 시간』 (실천문학사, 2011), 이기인, 『알쏭달쏭 소녀백과사전』 (창비, 2005), 백무산, 『그 모든 가장자리』 (창비, 2012), 송경동, 『꿀잠』 (삶이보이는창, 2006),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창비, 2009), 문동만, 『그네』 (창비, 2009), 김사인, 『밤에 쓰는 편지』 (문학동네, 1999), 『가만히 좋아하는』 (창비, 2006), 『어린 당나귀 곁에서』 (창비, 2015), 최종천, 『눈물은 푸르다』(시와시학사, 2002) 등으로 인용하는 시에 대해서는 수록된 시집만 밝히기로 한다.

[2] 주체가 보편적 실체 속의 균열로서 출현하는 주체와 실체의 이 역설적 관계는 프로이트-라캉적 실재라는 정확한 의미에서 “사라지는 매개자”로서의 주체 개념으로 오늘날 자발적 일체화라고 말할 수 있는 이성과 물질과의 상관관계에서 ‘균열하는 주체’로 이해할 수 있다. 이들은 외적 합목적성을 자기-합목적성으로, 다시 말해 외적 형식을 절대적 형식으로 역전시키는 것으로 사고의 보편성에 도달한다. (슬라보예 지젝,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 도서출판b, 2007, p.66. 이하 참조)

[3] 위 서비스나 지식 또는 소통과 같은 정보경제로의 이행에 따른 ‘비물질노동’은 노동의 질과 노동성격의 변화를 반드시 수반한다. 그것은 상품의 정보적・문화적 내용을 생산하는 노동으로 정의된다. 마우리찌오 랏짜라또, 『비물질노동과 다중』, 조정환 옮김, 갈무리, 2005, p.181. 이하 참조.

[4] 제러미 리프킨은 “2050년쯤이면 전통적인 산업 부문을 운영하는 데 전체 성인 인구의 5퍼센트 정도밖에 필요하지 않게 될 것이며, 모든 나라에서 노동자가 거의 필요치 않는 농장, 공장 및 사무실이 일반화” 될 것이라고 진단한다. 제러미 리프킨, 『노동의 종말』, 이영호 옮김, 민음사, 1996. p.21.

[5] 황규관, 「공장 밖이 위험하다」, 『태풍을 기다리는 시간』, 실천문학사, 2011. (이하, 『태풍』)

[6] 이 소녀들은 비단 ‘기계’로 상징되는 자본권력이 강제하는 섹스뿐만 아니라 지하철에서 만난 구닥다리(「소녀의 곰인형」)나 정육점 남자(「소녀의 거울」), 심지어는 “솜사탕”(「솜사탕」)이 “불륜”으로 역전되는 비윤리적 관계마저도 서슴지 않는다.

[7] 김사인, 「여수」, 『가만히 좋아하는』, 창비, 2006. (이하 『가만히』)

[8] 송경동,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꿀잠』, 삶이보이는 창, 2006.

[9] 송경동, 「가리봉오거리 연가」,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창비, 2009. (이하, 『사소한』)

[10] 황규관, 「반성」, 『패배는 나의 힘』, 창비, 2007. (이하, 『패배』)

[11] 백무산, 「생과 사의 다리」, 『그 모든 가장자리』, 창비, 2012.

[12] 김덕영, 『게오르그 짐멜의 모더니티 풍경 11가지』, 도서출판 길, 2007, p.147. 이하 참조.

[13] 백무산-이기인의 대담, 「미래의 노동, 미래의 노동시」, 『열린시학』, 2008년 봄호.



<당선소감>

 

바다처럼 변함없이 품어준 가족·친구 감사해요

 

참으로 먼 길을 에돌아 왔습니다. 바람이 차가운 날이었습니다. 삶의 뒤란에 몸을 버린 것들에 오래도록 눈길이 머물던 시간이었습니다.

먼지 가득한 어두운 공간에 버려진 듯 드러누운 그것들로 잠을 설치는 그런 계절이기도 했습니다.

그때마다 귓가를 떠나지 않던 이명으로 진저리치다 바다로 달려가 안기고는 했습니다.

그렇게 변함없이 품어주는 바다처럼 묵묵히 견뎌준 아내와 현규, 희령에게 먼저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언제나 곁을 내준 친구 종헌과 정희 선배, 몇몇 다정한 얼굴에게도 이 자리를 빌려 고맙다는 인사를 대신합니다.

아울러 전영태·신상웅 선생님과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머리 숙여 감사를 드립니다.

바야흐로 차갑고 어두운 것들까지 그리운 계절입니다.



◎ 약력

▶ 1963년 강원도 태백 출생

▶ 2006년 중앙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 2009년 문학박사 학위 받음



<심사평>

 

한국 노동詩의 궤적·전망 담은 세심한 독해

 

201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에는 모두 13편이 응모했다. 응모작 수준이 전반적으로 높아졌고 비평적 주제가 다양해졌는데, 후기 산업사회의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한국 사회에 대한 비평적 촉수를 들이대고 있는 글이 많았다.

현대사회와 불행한 주체, 시에 나타나는 '나'의 유형학, 수필의 현대성에 관한 논의, 키치와 문학의 관련성, 생태주의 및 정신분석적 작품 읽기 등 다양한 주제와 만날 수 있었다. 고유한 문제의식과 문학적 열정으로 똘똘 뭉친 글을 읽어 가는 과정은 매우 즐거웠지만, 그만큼 심사는 세밀하게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 문학은 최근 몇 년간 위기와 침체가 논의되고 있지만, 비평 응모작을 읽는 동안은 한국 문학의 새로운 가능성과 만나고 있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오랫동안 문학적 열정을 간직하며 글을 다듬어 왔을 응모자들에게 응원의 마음을 전하며 앞으로 학업과 건필을 기원한다.

본심에서는 4편으로 압축하여 집중적인 검토를 진행했다.

김정현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악(惡/樂)'은 니체 철학과 조연호의 시를 함께 읽으며 글쓰기의 문제를 제기했고, 임동휘의 '균열하는 주체, 그들이 살아가는 방법'은 2000년 이후 노동시의 주요한 주제와 흐름을 세밀하게 맥락화했고, 조대한의 '소녀는 마스크를 벗지 않는다'는 한국 문학에 등장하는 소녀의 계보학을 흥미롭게 재구성하였으며, 최서윤은 '빛―바람의 시학'에서 정현종 시에 나타나는 빛과 바람의 변주를 정밀하게 추적한 바 있다.

고심 끝에 노동시에 대한 세심한 독해를 수행하면서도 현대 한국 사회에 대한 비평적 안목을 함께 구축하고 있는 임동휘의 비평을 수상작으로 선정하였다.

자본과 노동의 갈등이 노골화하는 상황에서 한국 노동시의 궤적과 전망을 함께 들여다보고자 하는 비평적 태도가 무엇보다도 인상적이었다.

앞으로 한국 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가는 비평가로 성장하기를 기원하며 축하의 마음을 전하고자 한다. 



심사 김동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