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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이중주 - 손훈영

 

눈부시게 환한 햇살이 초록 숲 위로 투망처럼 드리워져 있다. 베란다 창 앞으로 바투 다가와 있는 산은 이제 마악 여름옷으로 갈아입고 있다. 창을 열어두고 다가오는 여름을 바라본다.

팡, 팡. 열어 둔 창으로 테니스공이 라켓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온다. 공 부딪히는 소리 사이사이 테니스를 치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섞여든다. 힘껏 내리친 공이 빗나갔는지 안타까운 탄식이 터지기도 하고 아슬아슬하게 공을 받아쳤을 때의 환호성이 높다랗게 들려오기도 한다.

베란다로 나가 테니스장을 내려다본다. 높푸른 히말라야시다의 호위를 받고 있는 테니스장은 치외법권 지역인양 아늑하다. 알맞게 다져진 맨 흙바닥이 정갈하고 높다란 심판석 의자의 진초록 덮개가 새뜻하다.

연두색 공들이 네트 위를 빠르게 오간다. 황토빛 흙을 박차고 하얀 운동복이 튀어 오른다. 튕겨 오르는 공을 따라 공기를 가르는 사람들의 그을린 허벅지 위로 햇살이 작열한다. 약동하는 생명력이 라켓 한복판에서 전율하고 터질 것 같은 율동성이 코트를 가득 메우고 있다.

운동하는 사람들의 활기찬 소리로 흥건한 테니스장을 벗어나 시선을 조금 오른편으로 옮긴다. 봉긋한 봉분 세 개를 감싸 안고 있는 야트막한 동산이 보인다. 조밀한 숲을 병풍처럼 두른, 나무 없는 낮은 구릉은 푸른 풀들이 융단을 깐 듯 부드럽게 펼쳐져 있다. 바람 한 점 없는 맑은 공기 중에 보랏빛 풀꽃들이 고요하다. 이따금 비롱비롱 산새소리만이 적막을 깨고 날아든다.

투명한 햇살 아래 둥그렇게 누워있는 봉분은 고즈넉하고 평화롭다. 생로병사의 긴 여로를 마감한 삶은 이제 비로소 진정한 안식이다. 그 누구도 그 무엇으로도 훼손시킬 수 없는 견고한 평화다. 살면서 늘 갈구하던 그것을 이윽고 품안에 안고 흔들림 없는 침묵으로 고요하다.

봉분은 하나의 메시지다. 비등점에 이를 때까지 열렬히 살라고, 그리하면 마침내 이런 확실한 것 하나 안겨 주겠다는 신의 약속이다. 약속은 적요한 햇살 아래 명확하게 빛나고 있다. 저 약속들은 이미 도처에 새겨져 있었다. 다만 두려워 우리들이 외면하고 있었을 뿐이다. 우리네 삶의 공간으로부터 멀리 추방시켜 놓았었다. 죽음에 등을 기대고 살아가지만 삶이 죽음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잊고 있어야만 우리들은 살아갈 수 있었다.

얼마 전 중병을 선고받음으로써 죽음과 좀 더 밀접한 관계가 되었다. 투병의 시간이란 어쩔 수 없이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시간들이다. 나와는 별 상관이 없던 그것이 이제 불가분의 관계로 가까워진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 어둠이 더 무서워지듯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려면 죽음을 바로 볼 수밖에 없다. 언제 찾아올지 모를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바로 죽음이다. 죽어있는 상태로 죽음이라는 미지의 세계로 들어갈 수는 없다.

그런 마음이어선지 요즘 들어 잔치에는 잘 가지 않아도 죽음의 장소는 열심히 찾아다닌다. 가까운 친인척 장례식에는 빠짐없이 참석하고 요양병원에 누워있는 먼 친척까지 문안을 간다. 정기 진료일이면 병원 장례식장을 서성대다 오기도 한다. 쇠락의 냄새와 죽음의 기미에 점점 익숙해지고 마침내 그것들이 아무렇지도 않은 무엇으로 내 일상에 자리 잡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며칠 전 시백부 상을 치렀다. 입관을 지켜보았다. 입관실은 삶과 죽음이 아무런 갈등 없이 공존하는 곳이었다. 주검 옆에 싱크대와 세제가 천연덕스럽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눈에 익숙한 세제와 핸드크림이 삶과 죽음과의 거리를 빠르게 단축시켜주었다.

전통적 예법에 준한 절차로 구순을 넘긴 백부는 봉인되었다. 딸들의 흐느낌이 백부의 감긴 눈 위로 흩어졌다. 차가운 테이블 위에 일자로 누운 백부의 한 줌 몸뚱아리를 겹겹이 싸매고 묶는 절차가 당연한 수순을 밟는 듯 자연스러웠다.

장례관리사들의 일상적인 표정과 직업적 몸짓이 한 사람의 죽음에 압도당해 있는 우리들로 하여금 그럴 거 없다고 말하는 듯했다. 살아있음과 죽음이 종이 한 장 차이라고, 죽음이 저 먼 곳에 있는 무엇이 아니라 누수로 얼룩진 천장이나 수도꼭지만큼이나 우리들 삶 속에 가까이 있는 것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과실 속에 씨가 들어있듯 삶이 시작될 때 이미 죽음도 함께 잉태되었다’는 릴케의 말이 생각났다. 삶 속에 죽음이 있다는 말이 하나의 관용어구가 아니라 생생한 느낌으로 피부에 와 닿았다.

삶과 죽음은 서로 동떨어진 무엇이 아니라 표면과 이면이었다. 삶이 끝난 다음에 비로소 죽음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삶이 시작되면서 죽음도 함께 시작되었다. 삶이 무르익으면 죽음도 함께 무르익었다. 사람은 삶만 사는 게 아니라 죽음도 함께 살아야 했다. 결국 잘 산다는 것은 잘 죽는다는 것이었다. 잘 죽을 수 있으려면 잘 살아야 함이 전제되었다.

죽음의 절차를 지켜보며 살아갈 일을 생각하는 나를 보았다. 죽은 자를 보내는 시간 속에서 산 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을 생각했다. 그것은 어떤 진실한 약속 하나를 하는 것 아닐까 싶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떠나는 자에게 남아있는 자가 할 수 있는 약속은 무엇일까. 당신 곁으로 갈 때까지 더 멋지게 살아가겠다는 새김질이 아닐까.

막 죽음의 문으로 들어가는 자에게 하는 약속은 신에게 하는 약속이나 진배없었다. 혹 이것이 죽은 자에 대해 산 자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조문행위가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염을 하고 입관을 하고 성복제를 지내는 의식들이 이어지는 그 시간만큼 나 자신이 삶에 대해 열렬해지던 때가 또 있었을까. 명확한 죽음 앞에서 삶도 명확해졌다.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나는 자의 육신을 눈앞에 두고 삶에 대해 열심을 다짐하는 오롯한 시간이었다. 내 다짐이 더 뜨겁고 간절할수록 장례의 의미는 깊어지고 죽은 자와의 관계는 더 두터워졌다.

우리 집 베란다는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전망을 안고 있다. 왼편 테니스장은 살아있음을 음미하기에 좋고 오른편 봉분은 죽음을 명상하기에 더 할 나위 없는 풍경이다. 생사가 원래 같이 가는 것이라는 것을 명료하게 보여주는 곳이다.

삶의 충동인 테니스장과 죽음의 집인 봉분이 환한 햇살 아래 거리낄 것 없이 어우러지고 있다. 귀를 열면 약동하는 생명의 환호성을 들을 수 있고 눈을 돌리면 언제나 고즈넉한 봉분을 마주 볼 수가 있다. 삶과 죽음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전망이 이 공간을 떠나지 못하게 하는 것인지, 십년 넘게 이 집을 지키고 있다.

산책길일까, 테니스장과 야산 사이의 작은 오솔길로 초로의 할아버지와 예닐곱 손자가 손을 맞잡고 올라간다. 호기심 많은 손자의 해찰에 할아버지는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잠시 호흡을 고른다. 그들 속에 삶이, 또한 죽음이 있다. 삶과 죽음의 두 얼굴이 사이좋게 그들의 등 뒤를 따르고 있다.




<당선소감>

 

나날의 기록, 끊임없이 쓰고 싶어

 

의식의 진공상태는 언제 오나? 신춘문예 당선통지를 받았을 때 온다!

소식을 받고 극장으로 간다. 극장 안 어둠만큼 혼자 울고 웃기에 적당한 장소가 있을까. 나에게 극장 안 어둠은 언제나 진통제였다. 부드러운 벨벳 같은 어둠에 오두마니 안겨 당선의 희열을 온전하게 궁굴린다. 감당할 수 없는 황홀감이 새나가지 않도록 어금니를 꽉 깨문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홀림의 순간’.그 순간을 사무치게 각인하기 위해 아무에게도 전화하지 않는다.

나의 글쓰기는 언제나 회의와 열정의 길항작용이었다. 재능에 대한 회의와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열정이 하루하루를 이어 나갔다. 문학이 아니라 단지 발설에 가까웠던 내 글쓰기였다. 기적과도 같은 일은 지치지도 않고 이어지던 그 발설로 인해 내 존재가 새로워졌다는 것이다. 증오와 고통의 거친 누더기를 벗어던지고 평온이라는 깨끗한 순면 옷으로 갈아입게 되었다.

물은 99도씨에서는 끓지 않는다. 반드시 100도씨에서만 끓는다. 그러니 100도씨까지 가려면 끊임없이 쓰는 수밖에 없다. 그저 하루에 정해진 양을 묵묵히 쓰는 수밖에 없다. 기쁨도 슬픔도 없이 매일 조금씩 쓰는 수밖에 없다. 나에게는 신이 내려 준 글쓰기 재능은 없는 것 같다. 허나 ‘재능이란 열정을 지속적으로 투입할 수 있는 능력’이라면 나는 분명 재능이 있다. 나날이 저물어가는 눈동자이지만 시력이 작동되는 한 쉬지 않고 쓸 생각을 가지고 있다. 숨을 쉬고 밥을 먹듯 그냥 나날들을 기록하고 싶다. 이 사실이 내가 가진 유일한 진실이다.

글 판 주변에서 쭈빗거리고 있던 나를 ‘발견’해 준 심사위원들에게 감사하다. 밀실에서 홀로 시들어버리지 않게 해준 나의 광장, 수필사랑 문우들과 두 분 선생님, 이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다.


◎ 약력

▶ 1961년 대구 출생.

▶ 제11회 동서문학상 동상.
▶ 제1회 계간〈주변인과 문학〉 신인문학상 금상.
▶ 제2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가작




<심사평>

 

유려한 문장, 숙련된 내공 느껴져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작품은 7사람의 14편이었다. 각기 주제가 다른 작품들로 특정한 공간, 사물, 상념의 세계를 사유의 깊이로 짚어내어 준 보편성을 뛰어넘는 훌륭한 작품들이다. 이들 작품은 삶의 체험을 중심축으로 확고한 주제와 다양한 소재를 결합하여 의미를 형상화시켜 감동을 전달하고 있다. 그러나 당선작 한 편을 선하여야하는 책무를 다하기 위해 보다 세심한 심의가 필요했다. 무엇을 말하려하고 그 무엇을 어떻게 보여주고 있는지에 관점을 두었다.

본심 2차 심사에서 김응숙의 <마당>, 양태순의 <두레>, 조현미의 <민달팽이의 노래>, 손훈영의 <이중주> 수필작품을 선정하여 놓고 이들 작품들이 지닌 단점을 골라내는데 시선을 모았다. 수필문학이 문학작품으로 승화되는 데는 일상적 사실체험에 대한 심도 깊은 사유의 세계를 구축하는 일이다. 어떤 사실을 평면적으로 나열하는데 그치지 않고 사실에 대한 필자의 사고를 천착하는데 있다. 최종심에는 <이중주><민달팽이의 노래>를 두고 당선작을 선별하다가 수필 <이중주>를 당선작으로 정했다.

수필 <이중주>는 아파트 베란다를 열면 테니스장이 보이고 테니스장을 조금 벗어나면 봉긋한 봉분 세 개를 감싸 안고 있는 야트막한 동산이 보인다. 활기찬 호흡으로 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과 죽은 이들의 안식처가 생멸의 크기로 공존하는 이중주의 연주가 이 수필의 주제이다. 유려한 문장으로 펼쳐내는 이 수필은 필자의 숙련된 내공의 깊이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문장은 의미를 담는 그늘이다. 한 문장 한 문장 구체적으로 형상화된 문장들의 조합은 감동의 크기로 독자의 감성을 흔들게 한다.



심사 지연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