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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귀촌의 경제학 / 김정용

 

1. 가자! 부모님 곁으로


“막내야! 문어는 좀 잡았나?”

 “아뇨. 아직 문어철이 아니잖아요. 보름정도 지나야 됩니다”

 “니는 문어도 안 잡고 무신 돈으로 먹고 사노? 내가 걱정이데이”

다른때와 달리 온전한 정신이 된 어머니는 제가 뭘 먹고 사는지 걱정이 태산인 모양입니다. 치매가 중증으로 치달으면서 요양병원에 입원하신 후로 하루의 절반은 온전한 정신에 나머지 절반은 자신이 누구인지조차도 모르신지 1년이 되었습니다. 보고 있으면 답답하기도 하고 한스럽기도 한데, 어머니는 오히려 제가 더 답답하다고 합니다. 생각해보니 도시의 삶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어머니께서는 아버지보다 더 실망하셨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마흔이 넘어 얻은 막내아들이었습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도시에서 살게 되어, 부모님과 그리 끈끈한 관계를 맺지는 못했습니다. 거기에다가 부모님께서는 유달리 맏이에 대한 애착이 강하셔서 저나 둘째 형님에 대해서는 별 신경을 쓰지 않으셨고, 저희는 그것이 당연한 거라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다가 아버지께서 아흔을 한 해 앞두고 큰 수술을 받게 되셨습니다.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아버지께서는 예전의 건강함도 그대로 갖게 되셨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수술은 ‘우리 아버지는 100세는 거뜬하실거야’하며 살았던 제게는 충격이었습니다. 어쩌면 빠른 시일내에 아버지와 이별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을 여실히 느끼게 되었죠. 퇴원하는 아버지를 모셔다 드리고 고향을 지키는 친구와 술을 마시면서, 부모님의 늙음과 환갑이 지나면 나도 고향으로 돌아와서 노후를 보내고 싶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때 친구가 그러더군요.

“네 딸이 이제 대학도 졸업했고 취직도 했지 않나? 이제 큰 돈 들일도 없는데 지금 들어오면 되지 늙어서 고향오면 뭐해. 내 말은 요만할 쯤에 고향에 와서 부모님도 보살펴드리고 한 살이라도 젊을 때 고향에 적응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자네 부모님도 내년이면 아흔이신데. 그나마 지금까지는 두 분이 잘 지내오셨지만 이제는 연세도 있으니까. 더구나 자네 형님들은 들어올 형편도 아니고. 지금 하는 일이 스트레스 만땅이라면서 뭘 그리 붙잡고 있으려고 그래?”

 “지금 여기와서 뭘 하면서 살라고?”

 “낚시 좋아하잖아. 그러니까 배를 한 척 사면 돼. 날 봐. 평생을 어부로만 사는데 남들만큼 잘 살고 있잖아.”

가만히 생각해보니 친구의 말도 일리가 있었습니다.

아내와 의논을 한 후에 고향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고향으로 가야겠다!’고 결심을 하고 나니 마음이 급해서였는지, 집 구입과 직장을 정리한 우헤 이사를 하는데는 2개월밖에 걸리지 않았죠.

그리고 친구의 말대로 배도 한 척 구입했습니다. 저는 친구의 조언에 따라 혼자서도 마음편하게 할 수 있는 통발로 문어조업을 하기로 했습니다. 이유는 하나였습니다. 자망은(그물조업) 두 사람이 해야 하므로 선원을 고용해야 하는데, 요즘은 어촌에서도 선원 구하기가 힘들어 안되며 문어가 관리도 좀 쉽다는 거였습니다. 정부의 감척사업 때문에 허가권을 구입하는 일은 어려웠지만, 다행히 신창호로 명명되어 있는 어선(1.4Ton)에 통발 400개도 준다고 하셔서 ‘웬 횡재냐?’하며 배를 샀습니다. 감척으로 인해 허가권값이 많이 올라 예상 금액을 두배나 초과해야 했지만, 제게는 첫 배라 기분좋게 항구에 입항하고 부모님께 보여드렸습니다.

그런데요.

항구에 정박해놓은 배를 보고 부모님께서는 실망한 눈빛을 보이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아예 대놓고 절 책망하셨습니다.

“왜 바다 일을 하려고 하느냐? 겨우 가르쳐 놓았더니 쉰도 되지 않아 고작 바다 일이야?”

 “아버지! 바다 일이 어때서요? 아버지도 하셨던 일이고 제 친구들도 하고 있고, 무엇보다도 제가 좋아하는 일이잖아요? 그리고 아버지 어머니도 제가 옆에 살면 의지도 되고 더 좋지 않으세요?”

어떤 대비책도 없어 그저 ‘바다는 성실하면 먹고 살게 해 준다. 그리고 부모님께도 효도를 좀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급하게 귀향을 했기에 살아갈 준비를 차근차근 해야 했습니다.


2. 처음이라서


8월 10일, 아버지께 통발의 줄 매는법을 익혀 문어를 잡기 위한 첫 조업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첫날부터 다른 사람이 쳐놓은 그물에 스크루가 걸려 뱅뱅 돕니다. 출항을 할때의 자신감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문어 한 마리도 못 잡아보고 바다에서 죽겠구나. 괜히 귀촌했나’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랴부랴 친구에게 연락하여 항구로 들어와야 했죠. 친구는 제 배에 실린 통발을 보며 실소를 금치 못했습니다.

“아이고야! 이 통발은 장어 잡는 통발이네. 니 문어잡을꺼제? 그라믄 통발부터 바꿔라. 선구점에 가서 4000원넘는 문어통발 달라캐라. 그리고 줄은 왜 이리 짧게 해 놨노? 수심 30m를 기준으로 해야지. 이건 15m밖에 안 된다.”

그 얘기를 아버지께 했더니 아버지는 또 소리를 지르십니다.

“뭐라 카노? 그라믄 내가 줄을 잘못 맸다 말이가? 나도 20년 전까지 통발 했다.”

나중에야 친구의 말도 맞고 아버지의 말씀도 맞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버지께서 통발 조업을 하실때와 지금의 바다 사정이 많이 달라져 버린 거죠. 거기에다가 어구도 많이 선진화되어 아버지께서 통발조업을 하실때와는 모든 여건이 달라졌음에도 아버지의 말씀에 따라 조업준비를 했던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때 서야 저는 ‘준비를 더 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배를 구입할 때 덤으로 주셔서 횡재라 생각했던 통발부터 문어통발로 교체를 했죠. 하지만 곧장 출항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두 시간 넘게 바다위에 표류해본 첫 출항의 기억때문에, 연습을 좀 해야 했거든요.

그때부터 제 배는 항구에 아예 정박시켜놓고 친구의 배를 함께 탔습니다. 그러는 틈틈이 친구의 조언대로 수협에 자주 가서 이것저것 알아보았습니다. 가보니 제가 참으로 준비성이 부족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우선 직원분의 안내에 따라 수협에 조합원으로 가입을 했습니다. 필요한 漁具에 대한 설명도 듣고 1000만원의 어업인 저리 대출을 받아 수협에서 조언해 준 대로 통발 조업에 필요한 장비를 구입했습니다. 창고에 산업용 전력을 가설하고 문어를 보관할 수족관과 미끼를 챙겨놓을 냉동고도 넣었죠. 바닷물을 담아서 수족관에 넣어야 하기에 물통도 구입하고, 면세 유류 카드도 받았습니다.

‘어부가 되어야겠다’고 작정했던 처음에 예상했던 금액을 4배나 초과하는 비용이 지출되었죠. 어린 시절에 아버지의 배를 잠깐씩 탈 때를 생각하고 비용 지출을 예상했는데 난감했습니다. 귀촌을 하면서 통장에 묶어놓은 돈을 헐어써야 했으니까요. 거기에다가 군에서는 귀어나 귀농을 하는 사람에게 집 수리비 400만원을 지원하는 귀촌 정책도 있었는데 이것도 이용할 수 없었습니다. 분명히 귀촌 정책에는 있는 항목인데, “귀촌을 준비하는 도시인 우선‘이라고 하더군요. 이미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도 해당은 되지만, 귀촌을 준비하는 도시인에게 우선권을 주는 정책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잡은 고기에 먹이를 주지 않는다’는 것이었죠.

그때 서야 ‘내가 참으로 성급하게 고향으로 돌아왔구나!’하는 것을 실감했기에, 내 뒤에 귀촌한 후배와 친구에게는 ‘귀촌전에 모든 혜택을 받는 방법’을 권해주었습니다. 400만원이면 우리집의 2개월 생활비에 해당되는 금액이었거든요. 그래도 좋았던 것은 수협에서는 유류 보급 시간을 알려주는 문자메시지와과, 일기예보를 실시간 문자로 보내주는 후포 통신국에 문자메시지를 신청해 주셨습니다.

위판하는 방법도 알려주셨고, 통발에 넣을 미끼의 구매 방법도 알려주시더군요.

수협에 가서 문어를 잡았을 때의 판로나 가격비교, 문어가 많이 잡히는 철에 대한 정보등을 익히는 한편으로는, 아버지께 통발 꿰매는 법도 익히고 친구의 배를 함께 타면서 수심에 따른 줄길이의 차이점등을 배우며 11월까지 지냈습니다. 시골로 귀향하기전에 했어야 할 일을 귀향후에 하니 시간소모를 꽤 하면서 예상외의 금전적 지출도 하게 되었죠. 답답했지만 내색을 하지 않고 지내는데, 아내는 배를 구입하고 4개월간 출항을 하지 않자 걱정스런 눈빛이 되었습니다.

“언제까지 통장의 돈을 빼서 쓸수도 없는데, 당신 배는 왜 매일 항구에 매여있기만 해요?”

아버지도 말씀하십니다.

“이제 김장 문어 들어올건데 니는 언제 문어 잡으러 가노? 딴 사람들 다 잡고 나서 헛 통발 놓을라 카나? 정아 에미 신경 쓰이게 하지 말고 이제는 나가야재. 기왕에 촌에 들어왔으면 열심히 일해야재. 회관에 가면 사람들이 집에 막내는 왜 출항을 안하노 하면서 묻는다”

첫 출항 때의 경험 때문에 유비무환을 하려고 하니 기다려달라고 하고 계속 연습을 했습니다. 드디어 12월 13일 새벽 6시, 겨울의 찬 공기를 맞으며 문어잡이를 위해 출어를 했습니다. 첫 출어 때의 공포감 때문에 친구의 배와 나란히 붙어 통발을 던지는데, 친구의 손은 빠르기 그지없지만 저는 더딥니다. 배가 작아 한틀에 30개의 통발을 단 저보다, 한틀에 80개의 통발을 단 친구의 작업속도가 더 빠릅니다. 친구의 배를 타면서 나름대로 배운다고 배웠음에도 혼자서 배의 船首와 船尾를 동분서주하니 다리도 아픕니다. 드디어 제 어부생활의 첫 문어를 수확했습니다. 친구가 보더니 ‘3Kg!’하고 외칩니다. 속으로 ‘저울에 얹지도 않고 어찌 저리 잘 아노? 진짜 3kg맞나?’하면서 저울에 달아보니 맞습니다. ‘나는 언제쯤 저 경지까지 갈 수 있을까?’하면서 열심히 일을 하다보니 6시간이 훌쩍 지나가 정오가 넘었습니다.

“점심 먹자!”

친구가 배에서 절 불렀습니다.

“니 도시락 안 싸왔나?”

아, 또 준비성 부족입니다. 배에서 밥을 먹게 될 것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배에서 내려 집으로 가기 전에 읍내 마트에 들러 도시락을 사 아내에게 건네주었습니다.

“그럼 새벽에 일어나서 도시락을 싸야 하네요? 그렇다면 밤 10시 전에는 무조건 자야겠어요.”


3. 일찍 일어나는 어부가 문어를 잡는다


 도시에서 직장에 다닐 때 저의 기상시간은 8시였습니다. 그랬는데 지금은 새벽 5시면 무조건 일어납니다. 결국 밤 10시 이전에는 잠자리에 들어야 하죠.

2010년 12월 17일, 처음으로 새벽에 수협위판장으로 갔습니다. 저는 문어를 잡는 어부들이 그렇게 많은 줄 몰랐습니다. 저 많은 문어중에서 중개인들이 제 문어를 사 줄지 걱정까지 되더군요. 친구는 걱정말라고 하면서 문어를 구분하는 법을 제게 일일이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무게가 비슷한 녀석끼리, 짝다리는 짝다리대로 모아놓고 제 차례가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알아들을 수도 없는 빠른 말로 제 문어의 경매가 끝나고 문어값을 받았습니다. 일정 금액의 수수료를 떼고 35만원이 제 손에 쥐어졌죠. 경매 용지를 자세히 살펴보니 같은 무게의 문어라도 짝다리가 되어버리면 가격이 심하게는 온전한 문어의 절반밖에 안되더군요. 그걸 보니 어떻게든 문어의 관리에 신경을 써야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내는 제가 문어를 잡아서 갖고 온 첫 현금이라며, 일전에 수협에서 권했던 ‘농어가 목돈 마련저축’에 가입하러 수협에 가자고 합니다.

수협에 가서 적금개설을 하고, 10만원은 봉투에 넣어 아버지께 드렸습니다. ‘통발 꿰매는 법을 가르쳐 주신 답례’라고 말씀드리니, ‘앞으로 더 부지런히 하면 먹고 사는 일은 해결되겠구나. 뭐 꼭 목돈 들고 고향에 올 필요가 있나. 돈벌이만 계속할 수 있으면 되지’하시며 아내만큼이나 좋아하셨습니다. 처음에 ‘목돈을 좀 만들어오지 왜 준비없이 들어왔느냐?’고 하시던 때와는 많이 달라지셔서 제게는 든든한 지원군이 되신 아버지십니다. 아버지의 말씀대로 바다 일은 부지런하면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그걸 알기에 저는 출·입항 대기소에 가장 먼저 도착하는 것을 습관으로 만들었습니다.

도착하여 대기소 청소를 하고 나면 마을 어르신들과 선배들이 출항을 위해 나오고, 저는 자판기에서 커피 한 잔씩을 뽑아 드립니다. 그러면서 통발조업중에 궁금했던 것들을 여쭤보면, 모두들 자기일처럼 상세히 가르쳐 주시죠. 그렇게 나름대로는 열심히 적응한다고 노력했더니 마을의 선배님들도 제 일이라면 자신의 일처럼 챙겨주셨습니다. ‘문어는 잡히느냐? 미끼는 이렇게 해봐라. 배는 묶어놓을 때 이렇게 묶으면 안전하다.’등등. 제게는 참으로 많은 힘이 되는 말들이라, ‘역시 고향으로 오길 잘 했구나’싶고 배려라는 단어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됩니다. 물론 어부일을 하다보면 배려는 필수적으로 이행해야 할 일이기도 함을 저절로 알게 되기도 했습니다. 통발을 하다 보면 남의 통발위에 제 통발이 얹혀 있을 수도 있고, 제 통발위에 남의 통발이 얹혀있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제가 남의 통발위에 얹는 경우가 많았지요.

그래도 초보라고 이해를 해주시면서 제 줄을 끊었더라고 말없이 묶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제 통발위에 다른 배의 통발이 있으면 무조건 제 줄을 끊어서 다시 이어가며 조업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다른 배가 기관 고장등으로 운행을 못하면 제 배로 견인을 해오고, 제가 그런 처지가 되면 다른 배가 제 배를 견인해주는 것도 제가 배운 무언의 배려입니다. 도시의 삶과 달리 어부는 ‘협동’과 ‘상부상조’를 가슴에 담고 생활해야 하는 것이죠. 가끔은 제 통발줄을 끊어놓고 다시 매놓지 않은채로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날이면 조업은 안되고 종일 통발을 끌어올리려 온 힘을 쏟아야 하는 고충을 겪어야 하니 힘들어서 지쳐버리게 됩니다. 어부라는 직업이 3D라는 것을 실감하는 날이죠. 그래도 이제는 조금은 숙달이 되어 줄이 끊겨 있어도 통발을 찾아 건져올리는 나름대로의 기술도 갖추게 되어 예전만큼 힘들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성공적인 조업을 하려면 그날의 조업여건과 상황, 그리고 조업성과를 일일이 기록해야 합니다. 그 기록이 제게는 더할 나위없는 문어잡이 어부의 길잡이가 되어 주었지요. 문어는 명절을 앞두면 아주 높은 가격이 형성됩니다. 추석, 설날, 그리고 정월 대보름 직전이 가격이 가장 높습니다. 그래서 문어를 잡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수족관에서 문어를 살려 모아두었다가 명절 직전(일주일전 쯤)에 위판장으로 싣고 가는데, 저는 처음에 그걸 몰라 수족관에 어느 정도의 양만 차면 무조건 새벽에 위판장으로 갔습니다. 갈 때마다 Kg당 낙찰가를 노트에 적으면서 비교해보니 위와 같은 결론이 나와 요즘은 요일과 시기를 맞춰서 싣고 가는 요령도 생겼지요.

힘들게 조업하여 잡은 수산물인 만큼 조금이라도 높은 가격을 받아야 하니까 신경을 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면 수족관 관리를 잘 해야 하기에 제 나름대로의 방법을 찾아내서 관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 덕분에 제가 잡은 문어가 위판을 할 때 더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게 되었죠. 다른 사람들은 ‘그냥 위판장에서 입찰할 때까지만 살아있으면 돼’라고 생각하며 문어를 수족관에 보관·관리하지만, 저 같은 경우는 ‘입찰을 끝내고 다른 수족관에 넣었을 때도 팔팔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관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통에 위판장에 문어를 펼쳐놓으면 팔팔한 기운을 못 이겨 계속 돌아다녀서, 입찰을 받은 중매인이 갖고 가기 전까지는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하는 기분 좋은 불편함도 있기는 합니다. 반면, 제가 잡은 문어와 소라에 중매인들이 일찌감치 관심을 갖고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을 볼 때면 자부심도 느껴지고, 가격도 다른 사람들이 가져온 것보다 10%정도 높으니 그만한 보람을 느낄 수 있어서 좋죠.

이렇게 노력한 덕분에 전는 1년이 되지 않아 우리 항구에서 가장 문어를 잘 잡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이런 내게 ‘00댁 막내는 처음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더니만, 이제 보니 그게 다 쇼였나 보네. 아마도 쟤는 도시에서 직장에 다닌 것이 아니고 통발 배를 탔을 게야. 그렇지 않고서야 문어를 우째 저래 잘 잡겠노?’라며 ‘속았다!’는 식의 표현을 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되니 이웃 마을에서 통발조업을 하는 사람들도 제가 쳐놓은 통발 근처에 통발을 치는 일이 다반사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제 통발에는 들어오는 문어가 그 사람들의 통발에는 없거나 적습니다. 사람들은 ‘참 이상타’고 했지만, 이상할 것이 전혀 없는 일이죠.

저는 바다위치와 수심, 시기에 따라 미끼의 종류에서부터 원줄과 부줄의 길이와 굵기, 거기에다가 하나의 원줄에 연결하는 통발의 숫자까지도 제 나름대로의 연구 결과에 따라 조절하는데 사람들은 그걸 모르고 딱 한가지 방법으로만 조업을 하니까요.


4. 성실과 협동, 그리고 겸손함


 어부가 바다에서 생활을 위해 살아남으려면 태풍이 오거나 풍랑주의보가 와도 항구로 가야 합니다. 배가 안전한지도 살펴야 하고 간혹 누구가의 배가 풍랑피해를 당하고 있으면, 다함께 배를 끌어올리는 일은 바닷가 사람들이 묵시적으로 하는 협동의 사례일 것입니다. 통발 일을 하다보면 기축돌이 바위틈에 끼여 통발 일부를 끌어올리지 못하고 포기해야 할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통발을 올리다 이런 통발을 올리면 주인을 찾아주고, 제 것을 다른 이가 올리면 정박해놓은 제 배에 올려주는 일도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습니다. 서로가 잡는 어종이 틀리니 교환해서 먹는 일도 제가 어부생활을 하면서 배운 상호부조입니다. 그러니 제가 좋아하는 싱싱한 회를 어종별로 양껏 먹을 수 있게 된 것도 어부가 누리는 혜택일 것입니다.

그리고 어부가 바다에서 생존하려면 항상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합니다. 말 못하는 바다라고 무시해서도 안 되고, 파도가 잔잔하다고 해서 바다 밑까지 잔잔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답니다. 제가 바다에 나갈 때면 아버지께서 방파제와 나와 항상 하는 말씀이 이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잔소리로 들렸는데 몇 번의 위험한 고비를 넘기고 나서야 아버지의 염려를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재작년 4월 초순에는 ‘어, 위험하네!’ 정도가 아닌, 죽을 뻔한 일도 있었거든요. 제 배는 폭이 좁습니다. 대신 길이가 깁니다. 그렇다보니 통발을 많이 실을 수는 있지만, 배의 앞과 뒤를 오갈때면 위험한 편이었죠. 그래서 앞뒤를 다닐때는 최대한 긴장하며 다녔는데, 비가 왔던 그날은 미끄러져 바다로 빠져 버린 것입니다. 항구도 아닌 바다 가운데서 빠진 거라, 제가 수영을 못했다면 살아남지 못했을 정도로 급작스런 사고였습니다.

이튿날은 바로 조선소에 갔습니다. 친구의 조언에 따라 안전하게 앞뒤를 오갈 수 있게 고쳐달라고 했죠. 그리고 요즘은 무조건 구명조끼를 입고 일하는 습관을 들였습니다. 이제야 부모님과 끈끈한 유대관계를 맺게 되었고 자식으로서 어부로서 제 역할을 하고 있는데, 바다에서 죽을 수는 없으니까요. 어떻든 바다에서의 일은 돈보다는 안전이 최우선이라는 것을 그때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역시 어부라는 직업은 힘든 직업이 맞습니다.

그래도 지금까지의 경험과 마을 어르신들이 하시는 것을 볼 때면 못해도 일흔까지는 할 수 있는 일이고, 낚시를 좋아하는 제게는 어느 정도 적성에 맞는 일이기도 합니다. 다행히 건강하기만 하면 노후 걱정을 크게 하지 않아도 되는 이점이 있는 거죠. 그러니 도시의 직장인들이 많이 하는‘퇴직후의 척박한 노후생활’에 대한 걱정을 덜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현재 수입은 도시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보다는 많이 부족합니다.

대신 도시에서 지출하던 생활비로 2/3으로도 더 여유있다는 느낌으로 살 수 있어서 ‘돈이 부족해서’라는 불편함은 없습니다. 물론 도시에서 살때보다 저축액은 많이 줄었죠. 귀촌을 하고 저의 문어잡이가 기틀을 잡은 4년 전부터는 농어가 목돈 마련저축 12만원을 포함하여 월 50만원을 저축하고 있습니다. 직장생활을 할 때는 무조건 월 100만원을 저축했던 것에 비하면 절반밖에 되지 않죠. 일전에 아내가 가계부 정산을 하다말고 ‘완전히 실패한 귀촌 같아요. 일년내내 모아봐야 600만원이니’하면서 한숨을 쉬더군요. 그때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내가 회사에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모으는 100만원보다는, 마음 편하게 50이 나은 거야. 시골에 와서 살아보니 스트레스가 건강에 가장 좋지 않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거든. 그나마 귀촌을 한 덕분에 당신이나 나나 건강한 거야. 여태껏 직장생활을 했으면 스트레스로 나한테 어떤 병이 왔을지 모르는데. 눈앞에 보이는 돈만 따지지 말고 건강하게 사는 걸로 가치를 두면 귀촌이 훨씬 좋은 거지. 그리고 엄마 병원비도 빚 없이 댈 수 있고 대출금도 값고 있으니 이 정도면 괜찮은 거야.”

물론 제가 이렇게 긍정적인 생각을 하기까지 힘든 일도 많았습니다. 그래도 위판장에 다녀오는 날이면 힘들다는 생각도 싹 없어지니 괜찮은 생활인 거죠. 2010년 12월에 조업을 시작한 후 일주일에 한번씩 포항에 있는 수협의 위판장에 다녀옵니다. 위판장 출입이 늘어나면서 이제는 저도 친구처럼 문어를 보면 무게를 알아맞힐 수도 있게 되었죠. 위판장에 가는 날은 친구와 함께 가는데 좋은점이 많습니다. 문어도 같이 내리고 분류하며 왕복 2시간동안은 조업에 대한 얘기도 하게 되므로 많이 배울 수 있거든요. 그럴때면 제 고향이 바닷가라는 것이 너무도 감사합니다.

서울에서 학교와 직장에 다니며 생활할 때는 ‘우리 부모님은 왜 한갓진 동해에서 나를 낳으셨을까? 서울에서 낳았으면 살기가 더 편했을텐데’하는 생각을 자주 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 귀향해 살아보니 한갓진 동해에서 살고 계신 것이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노후에 대한 걱정도 접어두고 나이드신 부모님께 뒤늦은 재롱도 부려가면서 웃음을 드릴수도 있고, 늙어서도 할 수 있는 어부의 일도 할 수 있으니까요. 무엇보다 좋은 것은 고향마을의 변함없는 人情을 제가 느끼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귀촌을 한 후에 다른 친구가 귀촌을 했습니다.

하지만 친구는 귀촌을 한 1년후에 다시 도시로 돌아갔습니다. 새벽에 일어나야 하는 일을 도저히 할 수 없다고 하면서 구입했던 어선도 싼 값에 처분하는 손해를 감수해야 했죠. 그걸 보면서 아내는 ‘그러고 보면 당신은 참 위대해요’하며 엄지손가락을 척 들어보여주었습니다. 고생한 보람이 있었죠. 그러나 좋은 일만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5. 귀향의 경제학


 작년 10월에 어머니께서는 갑작스런 치매로 요양병원에 입원을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어머니의 요양병원 입원 후 1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돌아가셨죠. 70년을 함께 살았던 사람의 부재가 가져온 충격이었습니다. 제가 고향에 돌아온 후에 만 4년이 조금 지난 때로 제가 돈을 모아 배를 조금 큰 것으로 교체한 직후였습니다. 배 수리가 끝나면 진수식에 잔을 올려주시기로 약속하셨는데,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셨죠.

아버지의 장례식에는 많은 사람들이 문상을 와 주셨습니다. 지난 4년간 헛되이 산 것은 아니라는 것과, 고향의 따뜻함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죠. 그때 저는 ‘내가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 잘 한 것이구나!’하는 것을 다시 한 번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마지막을 함께 할 수 있었고, 이웃들과의 유대로 사람사는 맛을 제대로 알게 되었으니까요.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나서 도시에 사는 친구들이 우리집을 방문했습니다.

“집이 좀 허접하네. 어설프서 어떻게 살아? 그냥 다시 도시로 나가는 것이 낫겠다. 이제 부모님도 집에 계시지 않는데.”

그때 아내가 그러더군요.

“하긴 어머님의 치매가 나을 가망이 없어 요양병원에 쭉 모셔야 하니 도시로 다시 가도 될 것 같아요. 내 친구들도 당신이 어부라고 하면 나를 좀 불쌍하게 봐요.”

아내의 말처럼 사람들은 ‘어부’라고 하면 안됐다거나 무시하는 눈빛을 보내는 경우가 많긴 합니다. 실제로 제가 사는 곳은 블루로드가 지나가는 항구마을이라, 주말이면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오는 곳입니다. 조업이 끝나 배에서 문어를 내리고 있으면 문어를 팔라는 사람도 있어요. 위판장으로 갈 것이라 항구에서의 판매는 안한다고 하면 ‘그깟 문어갖고 튕기기는’하면서 비웃는 표정이 되는 사람도 있거든요. 처음에는 사람들의 그런 표정에 화도 났는데, 요즘은 그러려니 합니다.

남들이 어떻게 보든 제게는 고향에서 어부로 일하는 현재가 만족스럽습니다. 어부가 되고 나서 건강을 챙기게 되어 30년간 피워오던 담배도 끓을 수 있었고, 출항을 할때면 기분좋게 해야 하니 아내와 서로 말조심도 하게 되어 부부사이도 더 좋아졌거든요. 거기에다가 제가 좋아하는 회를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지금이 좋기 때문에, 사람들의 편견쯤은 대수롭잖게 넘기는 방법도 터득하게 된 덕분이죠. 한마디로 나쁜점보다는 좋은점이 훨씬 많은 것이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어부인 셈입니다.

사람들은 귀촌이나 귀향이라는 단어에서 ‘낭만’이라는 것을 떠올린다고 합니다. 물론 연금을 받아 생활에 문제가 없는 귀촌이나 귀향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해당될 수 있는 ‘낭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낭만’만으로는 인생을 꾸릴 수가 없다는 것을 귀촌후에 저는 알게 되었습니다. 마을의 선배는 공무원 퇴직으로 연금을 받고 있음에도 고향으로 돌아와 어부로 살고 있습니다. 한번은 그 점이 의아해서 제가 물어보았죠.

“형님! 연금으로 생활도 해결되는데 왜 고기를 잡으세요?”

그때 선배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할 일이 있다는 것이 최고의 활력소야. 그리고 사람이 일을 해야 밥맛도 좋고 다른 사람과 어울릴 구실도 있어 좋은 거야. 사람이 밥 먹는 문제만 해결되면 산다고 생각했는데 반년동안 아무것도 안하고 있었더니 죽을 것 만큼이나 심심하더라고.”

맞는 말입니다.

아버지는 돌아가실때까지도 이웃집의 그물을 꿰맨다거나 저의 통발 수리를 도맡아 하실 정도로 열심히 일하였어요. 낭만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아버지께서는 만족하셨죠. 제가 힘들다고 그만두시라고 하면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 밥맛도 없다. 내가 쓸모없는 사람같아서 계속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고’하면서 손놀림이 더 빨라지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부터는 아버지께서 일하시는 것을 막을 수 없었어요. 하긴 저도 여름철에 태풍이 몰려와 아무것도 못하게 되면 짜증도 나고 밥맛도 없어지거든요. 도시 사람들이 퇴직후에 산으로 산으로만 가는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시골에서는 나이가 들어도 어떻게든 할 일이 있지만, 도시에서는 없거든요. 이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어부생활은 또 다른 단점이 있었습니다.

제가 잡는 문어는 12월에서 이듬해 7월까지 조업을 할 수 있습니다. 대게를 잡는 사람들은 12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조업을 하죠.

처음에는 7월이 넘어서자 문어가 서서히 잡히지 않아 엄청나게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러다가 8월과 9월에는 태풍이 연이어 오니 출항을 못하고 10월과 11월에도 문어가 잡히질 않았어요. 사정이 이런데 어떻게 저렇게들 잘 사나 궁금할 정도였죠.

나중에야 마을 사람들이 자신의 조업기간에 번 돈을 비조업기간에 분배해서 산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저도 그렇게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어릴때만 해도 뱃사람들은 돈이 있으면 팍팍 쓰고, 없으면 굶는 식으로 생활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래서 뱃사람들이 돈을 모으지 못한다는 말도 있었죠. 그런데 이제는 모두들 잘 분배하며 쓰고 있었고, 저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리고 조업을 하지 않을때는 통발을 손질하기도 하고, 어선에 문제가 있는 부분을 수리하기도 합니다. 재작년부터는 놀래미를 잡는 것을 알게 되어 비조업기간에도 소소하게 수입을 올리는 방법도 알게 되었죠. 2012년에 저는 마을 어촌계의 총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일하는 것을 눈여겨본 마을 어른들께서 총무직을 맡겨 주셨고, 고향에서 인정받았다는 기쁜에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 덕분에 작년 어업인의 날에는 도지사님께서 ‘어업인 공로자’표창을 주셨습니다. 귀촌의 성과를 인증받은 날이었죠. 그리고 제 경험을 제 뒤에 귀촌할 사람들에게 말해줄 수 있는 기회도 얻게 되었습니다. 저처럼 시행착오를 겪지 않도록 멘토역할을 하면서, 귀촌이 주는 이점을 더 많이 누리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일전에 딸아이가 집에 다니러 와서 이런 말을 하더군요.

“아빠! 요즘 가장 인기있는 신부감이 뭔지 아세요? 그건 바로 시골에 친정부모님이 생업에 종사하고 계신 무남독녀래요. 이것저것 찬거리도 공수할 수 있고, 휴가갈 곳 걱정없고, 아이를 낳으면 자연을 느끼게 해 줄 수 있는 여건이 되는. 그러면서도 처가사랑을 100%독점할 수 있는 조건인데 바로 저죠. 고향으로 오신 건 정말 잘하신 것 같아요.”

그러나 딸이 말하는 이 조건보다는 제 귀촌의 가장 큰 이득은 부모님과 돈독한 관계로 지내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제가 귀촌을 하지 않았더라면 여전히 일년에 세 번 뵙는 부모님과는 데면데면한 관계로 지냈을 것이고, 그런 관계로 아버지를 보내드려야 했을 것입니다. 귀촌을 한 덕분에 부모님을 모시고 온천이나 근처 명승지도 함께 다녀볼 수 있었고, 맛있는 밥도 함께 사먹는 호사를 누렸습니다. 요즘은 1시간 거리의 요양병원에 계신 어머니를 일주일에 한 번 찾아 뵙고 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치매시긴하셔도 두 번 중에 한 번은 저를 알아보시고 손을 잡아주실 정도로, 저에 대한 애정을 갖고 계셔서 정말 감사하죠. 예전에는 명절에 내려와도 큰형에게 밀려 제게는 별 신경도 쓰지 않으셨거든요.

며칠 후면 농어가목돈마련저축이 5년 만기가 됩니다. 첫 조업에서 받은 돈으로 가입한 적금이니, 이제 제가 문어조업을 한 지 만 5년이 되었다는 뜻도 되는 것이죠. 물론 많지 않은 돈이지만, 5년의 기간동안 단 한번도 날짜를 어기지 않고 불입한 적금이라 기분이 참 좋습니다. 적금을 받으면 집 수리를 할 겁니다. 남들이 보기에 조금 허접한 집이라 우리 부부가 죽을때까지 살기에는 미흡한 부분이 꽤 있어서 아내에게 늘 미안한 마음으로 살아야 했거든요. 아마도 이 집을 수리하고 나면 우리부부는 지금보다 더 건강하고 행복한 고향의 일상을 지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그러고 보면 귀촌은 저희에게 욕심을 버리는 방법을 알려준데다가, 행복지수를 높여준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이제 또 다시 문어조업이 시작되었습니다. 저를 기다리는 새벽바다로 행복한 출항을 해야죠.




<심사평>

 

가족의 삶도 청춘의 고민도…더 풍성해진 '생활속 경제이야기'

 

또 한편의 가작은 수필 부분에서 나왔다. '귀촌의 경제학'과 '경제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이야기'를 놓고 여러 논의를 거쳤다. 둘 다 수기적 성격이 강한 작품 가운데서도 '경제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이야기'는 한 가정의 위기 극복 과정을 실감나고 설득력 있게 그렸다는 점에서 '귀촌의 경제학'이 도시의 삶을 뒤로 하고 귀촌하는 과정과 귀촌 후 실생활 속에 일어나고 있는 실경제 이야기를 마치 이야기하듯 들려준다는 점에서 저마다 강점이 있지만, '귀촌의 경제학'이 귀촌 가운데서도 흔히 보는 농촌으로의 귀촌이 아니라 아주 드물게 어촌으로의 귀촌을 그렸다는 점에서, 또 주제 전달력이 높다는 점에서 이 작품을 가작으로 선택했다.


심사 : 이순원, 이희주